이번주 '문학과작가 사이'에 초대된 시인은 '허를 찌르는 솔직함'이 장기라는 김민정 시인이다(한데, 나는 그 '솔직함'이 가장된 솔직함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라는 은유로 분장하고 무대에 올라 연기하는 솔직함 말이다). 드문 경우이지만 한권 나온 시집을 예전에 통독한 적이 있기 때문에 기사를 옮겨놓는 마음이 편안하다. 다만, 그때 몇 가지 감상을 적어놓지 않은 게 약간 후회스럽지만. 세칭 '미래파' 시인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놓으려고 했었다. 그 시인들을 아직 다 읽지 못하는 바람에 계속 미뤄지고 있지만. 하긴 그런 글이라면 나보다 더 잘 쓸 만한 비평가들이 여럿 되므로 굳이 수고를 무릅쓸 이유가 없어 보이기도 하다. 예컨대 평론가 신형철씨 같은.  

경향신문(07. 04. 14) [작가와 문학사이](14)김민정-허를 찌르는 솔직함

예컨대 그녀는 “삐친 자지처럼”(‘거북 속의 내 거북이’)과 같은 비유를 쓰는 시인이다. 이 직유는 실로 허를 찌른다. ‘시(詩)’라는 제도와 남근주의의 허장성세를 동시에 밟아버린다. 천박하고 외설적인가? 아니, 짜릿하고 통쾌하다. 우리가 차마 못 한 말을 그녀는 한다. 이 솔직함은 포즈가 아니라 불가피한 전략이다. 위선적이지 않은 권력은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전에는 ‘솔직히 말하면’이라는 관용구가 없다. 솔직하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는다. ‘서정적’이지 않다고? 그러나 분명히 ‘시적’이다.

예컨대 그녀는 “나는 한 그루의 눈알나무”(‘멀리 개 짖는 소리 들리더니’)라고 말하는 시인이다. 눈알나무, 라고 그냥 읽어버리지 말고, ‘눈알이 주렁주렁 매달려서 줄기가 휘청거리는 나무’를 나의 감각으로 받아 안아야 한다. 쓸쓸하고 오싹하다. 온 몸이 눈이 되어 세계를 경계해야 할 만큼 상처가 많은 것인가, 라고 생각하면 쓸쓸하고, 그 수많은 눈알들이 일제히 심술궂게 나를 째려본다 생각하면 오싹하다. 그 눈알들이 세상을 굴러다니면서 유쾌한 복수가 시작된다.



이 솔직한 발성과 역동적인 감각이 협업해서 그녀의 시를 굴려나간다. 김민정. 1976년에 태어나 1999년에 시인이 되었고 2005년에 첫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를 냈다. 조화와 화합이 아니라 반목과 적대를 이야기하고, 거죽의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생살의 실재를 현시한다. 그녀의 시집을 사이코드라마(psychodrama)의 시화(詩化)로 읽어도 좋다. 상처를 무대에 올려 집요하게 반추하고 이를 감각적으로 재구성하여 독하게 극복한다. 날 세운 고슴도치가 되어야 했던 한 아가씨가 마침내 날아오르는 사연.

“줄이 돌아간다 줄 돌리는 사람 없이 저 혼자 잘도 도는 줄이 허공을 휘가르며 양배추의 뻑뻑한 살결을 잘도 썰어댄다 난 혼자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두 살 먹은 내가 개똥 주워 먹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다섯 살 먹은 내가 아빠 밥그릇에다 보리차 같은 오줌 질질 싸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아홉 살 먹은 내가 팬티 벗긴 손모가지 꽉 물어뜯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 스물네 살 먹은 내가 나를 걷어찬 애인과 그 애인의 애인과 셋이서 나란히 엘리베이터 타 오르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스물여덟 살 먹은 나 혼자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 (‘나는야 폴짝’)

줄이 한 번 돌아갈 때마다 씬(scene)이 바뀐다. 그 찰나의 순간에 한 여자의 연대기가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철없는 소녀가 스물여덟 처녀가 될 때까지 여자의 삶은 크고 작은 전쟁의 연속이다. 꼬마-소녀-사람은 늘 어른-남자-사람한테 시달리면서 자란다. 잠깐만 방심해도 줄에 발이 걸린다. 삶의 어떤 고비들을 그녀는 이렇게 ‘폴짝’ 넘어 왔을 것이다. 이 폴짝은 무겁고 또 가볍다. 이 이중성을 이해하는 일이 김민정 시의 외부와 내부를 함께 보는 첩경이다.

예컨대 ‘미친 년 널 뛰듯이’라는 말은 폭력적이다. ‘미친 년’을 미치게 한 미친놈들의 존재가 생략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고슴도치 아가씨의 ‘폴짝’은 제도의 중력을 거스르는 무거운 도약일 것이다. 물론 그녀의 시 역시 한국 여성시의 어떤 계보를 잇는다. 문학사에는 돌연변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폴짝’에는 선배들이 간혹 매달렸던 원한과 신파가 없다. 그래서 힘이 센 변종이다. 씩씩한 아가씨가 널을 뛴다. 원한도 신파도 없이, 미친 년 널 뛰듯이.

젊은 시인들의 시는 다 요령부득이라는 식의 무지막지한 히스테리가 창궐하고 있다. “내 거북은 염산을 타 마시고 목구멍이 타버려서 점자처럼 안 들리는 노래를 부르지 내가 너를 네가 나를 껴안고 뒹굴어야 온몸에 새겨지는 바로 그 쓰라린 노래”(‘거북 속의 내 거북이’) 맞다. 그녀는 때로 “안 들리는 노래”를 부른다. 그렇다고 왜 너는 염산을 타마시고 목구멍이 타버렸느냐고 힐난할 것인가. ‘점자의 노래’를 듣지 못하는 우리가 오히려 불구다. 너와 내가 “껴안고 뒹굴어야 온 몸에 새겨지는” 노래, 미련곰탱이 아저씨는 모르지만 고슴도치 아가씨들은 아는 그 노래. 자, 박수.(신형철/문학평론가)

07. 04. 15.

P.S. 캐리커처와 사진에서 알 수 있지만 시인은 정말로 눈이 큰다. 탤런트 김민정 뺨칠 만큼. '나는 한 그루의 눈알나무'란 은유가 다 근거가 있는 것이다(나는 시집을 이 '눈알공주'의 가족사로 읽었다). 여느 여성시인들과의 차이점이라면 히스테리적 상상력이 아닌 도착적 상상력을 펼쳐보인다는 것. 그건 어쩌면 시인도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불편' 동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인지도 모르겠다('불편' 동인들의 인터뷰 기사는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4/02/2007040200003.html 김민정 시인의 동영상 인터뷰도 짦게 포함돼 있다). 블편한 시? 하지만 해롭지는 않다(그게 치명적이긴 하지만)...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로즈마리 2007-04-16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도 얼마 전에 이 시집을 통독해서....뭐랄까, 왠지 로쟈님이 어떻게 읽었을지 궁금하네요. ^^

로쟈 2007-04-16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란 게 생각날 때 써두어야 하는 건데 말입니다. 지금은 시집을 어디에 두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니.--;

끼사스 2007-04-17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제로 보니 눈만 큰 것이 아니라 키도 크더군요. ^^:

난다김 2007-04-21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너무하세요. 하고 많은 사진 중에 하필 저... 술 먹고 눈 뻘건 사진을...--; 간간 들어와보곤 했습니다. 부끄러워 이만 도망갑니다. 휘리릭

로쟈 2007-04-21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미모의 흑백사진이 있지만 사이즈가 너무 커서 대체했었습니다.^^;
 

학술저널 담론비평에서 진화생물학에 관한 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원래는 '[통섭논쟁] 진화론도 진화한다'는 기획기사의 일부로 연세대 대학원신문(152호)에 게재된 것인데(사회생물학에 관한 내용이 다음호에서 다루어진다고 한다) '헌대 진화생물학의 전망'이란 타이틀을 갖고 있다. 상식 차원에서 정리해둘 만하다.

담비(07. 04. 13) 현대 진화생물학의 전망

다윈과 진화생물학 

‘진화(Evolution)’라고 하면 흔히 생물의 진화가 연상된다. 그런데 국어사전의 정의에도 그러하듯 ‘진화’는 세월의 흐름에 따른 ‘진보’ 또는 ‘발전’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생물진화를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진행되는 생물들의 진보 또는 발전’으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다. 일례로, 과거 백인들이 흑인들을 노예로 부릴 때 그 주된 논리는 흑인들이 진화적으로 백인들에 비해서 열등하다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이나 나치의 게르만주의의 배후에도 역시 그런 왜곡된 논리가 숨어있다.  

과학 역사상 가장 탁월한 이론의 하나로 간주되는 진화의 개념과 그 메커니즘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던 최초의 연구자가 바로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이다. 다윈은 1831년부터 1836년까지 근 5년 동안 영국의 군함 비이글호를 타고 세계 전역을 일주하면서 생물 진화의 증거들을 풍부히 수집했다. 이런 증거들에 바탕 하여 다윈은 진화의 메커니즘으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이론을 처음으로 제안하게 된다.

다윈은 맬서스(Thomas Malthus)가 1798년에 발표한 인구론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맬서스에 의하면 모든 생물종은 기하급수적으로 번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서 만약 기아나 질병과 같은 재해에 의해서 억제되지 않으면 그 수가 무한정 늘어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자연의 생물들이 대부분 안정된 개체수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각 세대에서 소수의 자손을 제외한 대다수 개체들이 강제로 죽기 때문이다.

멜서스의 이론을 따라 다윈은 각 세대에서 도태되는 자손들은 아마도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열등한 개체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가축이나 곡식들이 인간에 의해 선택됨으로 해서 점진적으로 종자가 개량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계에서도 어떤 선택의 메커니즘이 존재함으로 해서 생물종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윈 이후의 진화생물학

다윈은 자연선택의 개념으로 진화를 설명함으로써 현대 생물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자연선택의 이론은 실험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는 자연선택과 진화의 관계를 동료 과학자들에게 설명하는 데에 많은 곤란을 겪었다. 19세기의 과학자들은 진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은 선뜻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그것이 자연선택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심지어 다윈조차도 자연선택의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몰랐기 때문에 그들을 납득시키는 데에 더욱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다윈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진화론 연구가 현대의 진화생물학으로 발전하는 데에는 다윈과 거의 동시대 사람인 멘델(Gregor Johann Mendel, 1822-1884)에서부터 시작된 유전학이 20세기에 들어와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는 점이 커다란 기여를 했다.

금세기 초엽, 멘델의 업적이 재발견됨으로 해서 과학계는 비로소 유전자와 자연선택 사이의 관련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유전학적 지식이 처음부터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지지했던 것은 아니다. 일례로, 초기의 유전학에서 얻어진 결과들은 돌연변이가 대부분 개체에 해로우며 그 영향도 점진적인 것이 아닌 아주 대규모적으로 나타난다는 것 정도였고, 결과적으로 자연선택에서 요구되는 새롭고 유용한 변이들은 거의 발견할 수 없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점차 유전학에 수학이 가미되면서 유전학에서 얻어진 결과들이 자연선택설을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유전학과 자연선택의 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원리가 종합되었는데, 이를 ‘신다윈주의(Neodarwinism)’라고 부른다.

사회생물학의 등장

신다윈주의가 출현한 이후 얼마 되지 않아서 도브잔스키(Dobzhansky), 메이어(Mayr), 심프슨(Simpson) 등은 집단유전학, 계통학, 고생물학 등에서의 연구 결과들이 신다윈주의의 원리들과 모순되지 않음을 천명하였다. 이렇게 해서  ‘현대 종합설(The Modern Synthesis)’이 마침내 완성을 보게 되었는데, 이는 진화의 주된 메커니즘으로 자연선택설이 타당하다는 점을 전 세계 생물학자들이 인정한 쾌거라 하겠다.

그러나 진화의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작업이 신종합설의 제창으로 완료된 것은 아니었다. 신종합설이 대두되기까지 주로 고생물학, 계통분류학, 유전학 등에 의존해서 발전했던 진화생물학은 1950년대부터는 주로 분자생물학의 발전에 힘입어 현재까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이런 과정 중에서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를 비롯한 일단의 신다윈주의자들은 생물들 사이의 경쟁이 그다지 치열하게 전개되지 않는다는, 많은 현장 생물학자들의 관찰을 근거로 정말로 중요한 진화의 메커니즘은 생식을 위한 개체들 간의 경쟁이 아니라 유전자들 사이의 경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도킨스, 윌리암스(Williams), 스미스(Smith) 등에 의하면 진화는 다음 세대에 가능한 한 더 많은 유전정보를 남기려는 유전자들의 투쟁으로 정의된다.

1970년대에 출현한 윌슨(Edward O. Wilson)의 사회생물학은 이러한 유전자 중심 진화론의 연장이다. 사회생물학자들은 다윈의 자연선택설이 생물들 사이의 경쟁과 투쟁을 부추기는,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현상이라는 점에 대해서 의문을 표시한다. 만약 자연선택이 옳다면 어떻게 생물들 사이에서 다른 개체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이타적 현상이 빈번히 관찰될 수 있으며, 또 흰개미나 꿀벌의 집단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서로 협조하는 공생 체제가 구축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다윈 진화론과 사회생물학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달에 논의하기로 한다).

현대인과 진화생물학

다윈 이래 진화론에 대한 논쟁은 항상 일반 대중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때로는 그런 관심이 지나친 나머지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례로, 과학으로서의 진화생물학을 반대하는 일부 비전공 과학자들은 창조과학이라는 사이비 과학을 창조(?)해서 진화생물학을 공격하기도 한다. 이처럼 그것을  전공으로 하지 않는 과학자들이 단체를 결성해서 한 과학 분야를 공격한다는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진화생물학은 비단 창조과학자들과 같은 비전공 과학자들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보다 빈번하게는 일반 대중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데, 그런 한 예가 아래의 풍자만화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진화생물학은 앞에서와 같은 세속적인 차원에서만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시야를 크게 해서 널리 바라본다면, 학문으로서 진화생물학의 중요성은 그것이 바로 인류의 장래 문제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우리 인간도 다른 모든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간다. 이러한 환경에의 적응을 다윈은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의 원리로 설명했는데, 우리는 자연계에서 지나치게 적응에 성공했던 나머지 나중에 갑자기 새로 변한 환경 속에서는 살아남지 못하고 멸종에 이르렀던 많은 생물종들의 예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지구라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현재 지나치게 잘 적응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그리고 이런 지나친 적응이 우리 인류의 장래를 어둡게 하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닐까?

인류의 번영은 환경 파괴와 병행하고 있다. 우리는 열대우림, 산호초, 바다와 호수, 늪지, 강과 하구 등 생물상이 가장 풍부한 장소들을 파괴하고 있으며, 오존층을 훼손하고 있고,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를 더해서 온실효과를 부추기고 있다. 또, 매년 그 사용이 늘어나는 유독성 화학물질들은  우리의 식량원인 곡식의 품종을 단순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환경 훼손과 파괴는 필경 새로운 환경 조건을 조성해서 우리 인류로 하여금 바뀌어진 환경 속에서 살 것을 강요할 것이다. 과연 인류는 이러한 적응에 성공해서 영원히 번영할 수 있을까? 진화생물학은 바로 이런 질문들에 대답을 구하는 학문이다.(홍욱희/ 세민환경연구소 소장, 환경학박사)

07. 04. 15.

P.S. 필자인 홍욱희 소장은 생물학과 환경학 전공자로서 여러 권의 저역서를 갖고 있다. <생물학의 시대>(범양사출판부, 1998) 등이 내가 갖고 있는 책이다(물론 박스보관도서인지라 소장의 의미가 없는 책이지만)...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07-04-15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화'생물학' 이란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진화'란 말은 생물학 분야 자체에서보다 사회과학 분야에서 훨씬 인기있는 것 같습니다. 담아가겠습니다.

책읽기는즐거움 2007-04-15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으면서 책 이타적 유전자와 이기적 유전자를 링크해 놓으실꺼라 생각했는데 아니네요^^;;
그런데 궁금한게 있는데 위 본문의 풍자만화 중에서 일반 대중들이 오해한 부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정확히 모르겠어요.
좀 설명해 주시면 안될까요....-_-;; 부탁드립니다^^;

로쟈 2007-04-15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는 윗것과 아랫것의 내용이 다른 거 같습니다. 윗것은 '창조과학자'에 대한 풍자가 맞고요(더불어 진화론과 창조론이 양립가능하다고 보는 대중에 대한), 아랫것은 제 생각엔 진화론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 같습니다(물론 <여성은 진화하지 않았다>란 책의 저자는 여성이지만)...
 

주말이면 밀린 일들과 해야 할 일들이 교차하면서 여러 변이적인 일들까지 생산해낸다. '고립'을 자초하기 위해 도서관에 나가기 전에 그런 일들 몇 가지를 해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이 또한 시간과의 전쟁에서 중과부적이지만). 어제 충무로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들른 지역서점에서 두 권의 책을 사들었는데, 그 중 하나는 아먼드 마리 르로이의 <돌연변이>(해나무, 2006)이다. 거의 기억에 없는 책인 것으로 보아 어떤 이유에서든 출간 당시에 주목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모양이다(한겨레의 리뷰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42947.html).

 

 

 

 

'유전적 변이와 인체의 형성'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표지의 글이 선동적이다. "너 자신을 알라. 병리학적으로 네가 얼마나 연약한 거품인지를." 그런 문구만으로도 일단 눈길을 끄는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유전적/신체적 조건으로 태어나는 돌연변이들을 추적, 소개한 책이다. 눈을 하나만 가지고 태어난 기형아, 얼굴 전체에 털이 뒤덮인 다모증 가족, 외관상으로는 여성이지만 사춘기가 되어서야 자신이 남성임을 깨달은 자웅동체의 수도원 여인 등등, 지난 역사상 등장한 기이한 돌연변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지은이가 궁극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인체의 형성 과정의 신비이다. 부모 세대와는 전혀 다른 변이가 일어나는 과정은 주로 자궁 안에서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고, 유전자 정보가 서로 엉키고 뼈와 살이 생겨나는 가운데 일어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과정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은 날 때부터 건강에 해를 줄 수 있는 돌연변이를 평균적으로 300개 정도씩은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즉 돌연변이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도 돌연변이다!'가 되는 것이다.

어제 본 영화 <데리다>에서도 데리다의 가족이 '재키'(자크 데리다의 애칭이다)에게 가졌던 놀라움이  큰형인 르네 데리다의 입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는데, 전혀 지적이지 않은 집안에서 세계적인 철학자가 배출된 것에 대해 그는 '커다란 수수께끼'란 말로 표현했다. 비록 어머니가 책을 많이 읽긴 했지만 철학쪽과는 무관한 책들이었고 아들의 책을 그녀는 한권도 읽지 않았으며 이해할 수도 없었다(나중에 가족들은 모두 데리다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유명한 철학자가 된 것인지 경이로워했다). 그야말로 철학의 '철'자도 들어있지 않은 집안의 돌연변이가 데리다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신체적 형질뿐만 아리라 지성(지적 능력)에 있어서도 '돌연변이'라는 게 엄존하는 듯싶다.

'개의 심장'을 가진 합성인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불가코프의 소설 <개의 심장>(열린책들, 1998)의 표현을 약간 비틀어서 말하자면, 스피노자의 어머니가 되기 위하여 반드시 대단한 지성의 여성이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돌연변이는 우리 모두가 차여해야 하고 우리 모두가 패배하는 우연성의 게임"이기 때문이다(불가코프의 소설은 이것이 사회공학에 함축하는 바를 따져묻고 있는 풍자소설이다). 그리고 그게 '인간'이다. 돌연변이로서의 인간.

르로이의 <돌연변이>보다 1년 늦게 나왔지만 국내에는 1년 먼저 소개된 에른스트 피셔의 <인간>(들녘, 2005)에도 <돌연변이>의 내용이 소개돼 있다. "인간의 탄생과정은 경이롭지만 몹시 위험하기도 하다. 그러한 위험은 부모와 의사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고 이제는 유전학자들도 그 위험성을 계산하기에 이르렀다. 최근 유전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새로 만들어지는 배아의 게놈에는 부모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수백 가지의 변형(돌연변이)이 일어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돌연변이 대부분은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지만, 그 중 몇 가지는(아마도 세 가지나 네 가지는) 단백질(효소)의 작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즉,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어느 정도 돌연변이를 겪는다. 그러므로 돌연변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들은 모두 돌연변이다.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르로이는 2004년에 출간된 <돌연변이>에서 이런 사실을 지적했다."(189쪽)

책이 '돌연변이 사례집' 정도였다면 굳이 손에 들지 않았을 텐데, 젊은 진화생물학자의 이 첫번째 책에 대한 호평들이 결국엔 마음을 움직였다. 결정적이었던 건 바로 뒷표지에 씌어진 매트 리들리와 리처드 포티의 추천사.

"겉보기에 기괴하거나 뒤틀린, 돌연변이를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괴물 취급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인체의 성장에 유전자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르로이는 역사와 최신 유전공학을 세심하게 연구하여 매혹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가 <게놈>, <본성과 양육> 등의 저자 매트 리들리의 추천사이고, "<돌연변이>이는 최신 발생생물학과 유전공학을 통하여 인체의 경이를 과학적으로 파헤치고 있다. 비정상은 정상을 이해하기 위한 한 방편이며, 돌연변이는 성장과 발생의 미묘함과 경이로움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준다. 르로이는 아주 훌륭한 작품을 일궈냈다."가 <살아있는 지구의 역사>, <생명> 등의 저자 리처드 포티의 추천사이다. 나는 책을 고를 때 주로 친구 따라 강남가는 편이다...

07. 04. 15.

P.S. 나는 집안에서 유일한 '도서애호증' 환자이다. 더불어 철학서들의 유일한 독자이다. 아마도 나의 '돌연변이성'은 그런 데 있는 듯싶다. 더불어, 내성적인 성격에 남들 앞에 나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엄마, 아빠와 달리 모든 '발표'에 열성적인 아이가 있다. 그 아이가 자는 모습을 보면서 부부는 간혹 "얘는 도대체 누굴 닮은 것일까?"를 궁금해 하는데, 그러한 '돌연변이' 또한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면 되겠다. 우리는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7-04-15 15: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4-15 1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4-15 1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5 22:33   좋아요 0 | URL
m님/ 일부러 미리 공지하지 않은 건데요.^^; 그리고 목요일엔 선약이 있습니다. 5월 중순에 한번 시간을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h님/ 참고하겠습니다.^^
움님/ '돌연변이의 확장형'이라고 이름붙이겠습니다.^^

2007-08-09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충무로영상센터(오! 재미동)에서 4월 특별상영전의 프로그램으로 다큐영화 <데리다>(2002)를 상영한다. <지젝!>에 이어서 어쩌다 또 영화를 소개하는 일을 맡았는데, 자막 번역을 조금전에야 끝마쳤다(약간의 우여곡절 때문에 늦어졌다). 교정을 볼 시간도 충분하지 않을 듯싶다(다만 지젝보다는 훨씬 편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 나는 지난 2003년인가 문화일보홀에서 열린 한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처음 본 기억이 있다. 자막이 입혀져 있던 그 영화를 재미동에서 구하지 못하여 나한테까지 일이 떨어진 것인데 나대로 오독한 대목이 없지 않을 듯하다. 영화에 관한 자료는 나중에 올려둘 테지만, 상영에 관해 질문하셨던 분이 계셨던지라 뒤늦게(?) 재미동의 공지사항을 옮겨놓는다.   

4월 특별상영전
-영화와 철학 <데리다>-

<지젝!>에 이은 '영화와 철학'
두 번째 영화는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자크 데리다에 대한 다큐멘터리 <데리다> 입니다. 2004년 별세 전까지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그는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글쓰기와 차이>와 같은 저서를 통해 형이상학자로 동시대 그 어떤 철학자들보다 많은 영광을 누려왔습니다. 난해한 데리다 철학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지방 역할을 할 이 영화는 데리다 철학에 대한 영화적인 버전으로 읽힐만 합니다.

<지젝!>에 이어 로쟈님께서 영화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강연을 30분간 진행해주실 예정입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관람 부탁드립니다.

4월 14일 (토요일) 저녁 6시 강연 후 상영
4월 15일 (일요일) 저녁 6시 상영

07. 04. 14.

P.S. 맛보기 화면은 http://www.youtube.com/watch?v=8xyYGFhPDHo 참조('디컨스트럭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다).


댓글(11) 먼댓글(1)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데리다 이후의 데리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5-08 02:05 
    엊그제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의 현대철학 강의에서 데리다를 다루면서 다큐영화 <데리다>(2002)에 관해 조금 자세히 얘기했는데('입문'용으로 가장 좋을 듯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개인적으론 이 영화의 자막 작업을 하고 간단한 소개강의도 한 바 있다. 찾아보니 2007년 봄이었다. 그때 영화 내용을 간추린 자료를 이번 강의에서도 사용했는데, 다시 둘러보니 서재에는 옮겨놓지 않았다. 혹 이 영화를 보신 분이나 보
 
 
마늘빵 2007-04-14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로쟈님 강연하시는군요! ^^

로쟈 2007-04-14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0분 동안 영화내용에 대해서나 간략하게 설명하는 정도입니다...

2007-04-14 1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4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자막 상태를 확인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도 자막을 입힌 상태로는 아직 보지 못해서요.^^; 사실 DVD 서플먼트에는 영어자막을 화면에 입힌 버전도 있더군요. 그게 더 이해하기 편하실 수도 있습니다...

자꾸때리다 2007-04-14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좋은 감상이었습니다.~~(담 주부터 중간고사 기간인데도 불구하고...갔습니다.ㅡㅡ;;) 근데 [in french]라는 자막 때문에 영어 자막이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던게 좀 아쉽더군요.ㅎㅎㅎㅎ

(근데 로쟈님 얼굴이 꼭 정치인 누구 닮은 것 같았습니다.ㄲㄲㄲ 절대 비방성 글 아닙니다.헤헤헤헤)

로쟈 2007-04-14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감상문이 올라오네요.^^ 역시나 문제는 발생하는군요(저는 저녁 시간이 애매해서 집으로 바로 돌아왔습니다). 자막에서 'in french'를 지울 수 있는지 한번더 확인해볼 걸 그랬네요(뭔가를 대신 채워넣어야 하는 것처럼 뜨길래 놔두었더니.--;). 네댓 분 정도의 얼굴만 기억나는데, 거기에 Mravinsky님도 포함돼 있는지 궁금하군요. 정치인이라... 흠.

에바 2007-04-14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후 늦게 강연/상영 소식을 접하고 바로 달려가서 보고 왔습니다.^^;; 그리고 강연도 잘 들었습니다. 역시 실물이 더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로쟈 2007-04-14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리들 인사라도 나눴으면 '애프터'라도 가졌을 텐데 아쉽네요.^^;

Joule 2007-04-15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에 손을 얹고 미리 알았으면 갔을 거예요. 그러니까 어제 술을 마셔서 오늘 비몽사몽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거죠. 내일은 다른 공부 때문에 역시 못 볼테니 역시 어제 술이 문제였는데. 그런데 충무로 역의 재미동에서 뜻밖에 흥미로운 행사가 많이 있네요. 로쟈님의 강의라면 무척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

2007-04-15 0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5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oule님/ '무척'은 아니었으므로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님/ 저도 다시 한번 보지 않은 상태여서(--;) 오타가 있을 거라곤 짐작했습니다. 자막은 책하고 좀 달라서 '정확성'만을 고집할 수는 없었구요(물론 긴가민가한 대목들은 임의로 처리했지만. 몇 번 더하면 노하우가 생기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강연자료는 조만간 올려놓을 예정입니다...
 

포털사이트에서 우연히 보게 된 기사를 옮겨놓는다. '기자 도올, 소설가 김훈 인터뷰'라고 돼 있다. 기자 도올? 문화일보 관둔 지가 언젠데 하며 검색해보니, 이 양반 어느새 중앙일보 기자가 돼 있다. 대우가 파격적인 것인지, 기자직의 '맛'이 끊기 어려운 것인지 여하튼 그는 다시 기자가 되어 전직 기자인 소설가 김훈을 인터뷰했다. 두 양반 다 로쟈의 페이퍼에는 자주 출연해온지라 모른 체하기도 어렵다. 두 사람 모두 1948년생이니 동갑내기이다. 더불어 고대 동창이고. 초면이더라도 할말이 많을 듯한데, 어지간한 구면이다. 이만한 분량으로 끝난 게 다행이지 싶다.

중앙일보(07. 04. 13) 기자 도올, 소설가 김훈 인터뷰

세상을 살다 보면 별의별 희한한 일도 많다. 아마도 내 인생에서 나를 가장 많이 인터뷰한 기자가 있다면 김훈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난 기자가 되었고, 김훈은 당대 가장 주목받는 소설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엊그제 우연히 그가 병자호란을 주제로 한 또 하나의 소설, '남한산성'을 탈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의 말을 건네는 중에 기묘한 생각이 떠올랐다(*짐작에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소설인 듯하다. 나는 어제 주문을 넣었다). 기자 도올이 소설가 김훈을 인터뷰해 보면 어떨까? 김훈과 나는 대학(고려대)을 같이 다녔다.그는 영문과에서 영시를 외우고 있었고 나는 한시에 탐닉하고 있었다. 1982년 귀국했을 때 우리 사회에서 나를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도 한국일보 기자 김훈이었다.

"암울했지요. 6.25 전쟁의 찌꺼기가 여기저기 남아 있었고, 찢어지게 가난했고, 박정희 군사독재 권력이 태동했고, 베트남에 가서 우리 친구들이 죽어갔고, 더 거대한 지옥이 예비되어 있었던 그 시대에 난 밝은 희망만을 품고 워즈워스, 바이런, 셸리, 키츠를 암송하고 있었죠. 그들의 낭만주의 혁명성 속에는 인간의 희망, 번영, 평등,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어요."

-난 대학 시절에 이미 영문과 김치규 선생님과 한시를 주고받곤 했는데, 김 선생님은 대단한 영시의 시인이기도 하셨죠.

"김치규 선생님은 주로 고전을 가르치셨고 전 여석기.이호근 선생님께 더 많이 배웠어요. 운에 맞춰 암송하는 숙제가 많았는데 지금도 19세기 낭만주의 시를 대부분 정확히 암송해요. 전 주입식 교육의 위대성을 그때 깨달았어요. 도대체 주입식 교육이 왜 나쁘죠? 디시플린을 안 가르치는 교육을 과연 교육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때부터 이미 소설 쓰기를 작심했나요?

"'옥스포드영어사전(OED)'을 많이 뒤져야 했기에 주로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있었는데 하루는 우연히 '난중일기'라는 책이 눈에 띄었죠. 이은상 선생이 번역한 책이었는데 영시에 비하면 참 딱딱하고 드라이한 한 군인의 단편적 진중일기에 불과한 책이었어요. 그런데 암울한 현실을 끝까지 암울하게 뚫어 나가더군요. 19세기 낭만주의 시들처럼 찬란한 희망에 의지하지 않고 절망을 끝까지 절망으로 버티어내더군요. 그때 난 낭만주의적 희망의 허구성을 깨달았어요. 동시에 모든 이념의 허구성을 같이 버렸어요. 그랬더니 삶이 더 절망스러워지더군요. 그리곤 대학도 졸업 못했죠. 소설을 쓸 엄두도 안 났고요."



-그런데 한 가닥의 빛도 안 보이는 그 절망감을 어떻게 버티어 냈습니까?

"기자생활로 이럭저럭 뒹굴다가 83년 봄 우연히 '세계의 문학'이라는 잡지에서 온몸이 감전되는 듯한 문장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번역의 중요성을 말하는 매우 단순한 내용의 글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도올 선생님의 글이었어요. 저에게는 그것은 새로운 문체의 발견이었어요. 볼티지가 있는 글이었죠."

-기자로서 선생님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좀 쑥스럽군요. 그런데 볼티지라니?

"볼티지가 있어야 감전이 되잖아요. 사유의 깊이와 압축감, 과감한 절제, 그리고 거침없는 포효, 그리고 리듬감 있는 음악성, 그리고 생동하는 그림이 퍼뜩퍼뜩 스쳐 가는 영상미 이런 것들이 혼합되어 전압이 확보되는 것이죠. 왜 내가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소설을 한번 써 보시라고 했잖아요. 전 그때부터 다시 문학에 희망을 걸기 시작했어요. 새로운 내 삶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죠."



-김훈과 같은 문호에게 나의 정신세계가 조금이라도 도움되었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역시 '칼의 노래'에서 대중이 사랑한 것은 김훈의 절제된 문체일 거예요. 그리고 그 문체가 이순신이라는 한 군인이 치열한 전화의 한가운데서 느끼는 고독한 심리적 내면을 파고들었다는 데 여태까지의 소설이 건드리기 어려웠던 강렬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김훈의 문체가 너무 까다롭고 유미론적이고 너무 체한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은데?

"많은 사람이 내 문장을 수사학적 문장이라고 평하는데 전 오히려 형용사, 부사 없는 글을 쓰고 싶어해요. 주어, 동사의 뼈다귀만으로 된 동편제 같은 글, 서편제의 계면이 빠진 그런 진솔하고 우람찬 우조 같은 글 말이죠. 그런데 주어, 동사조차 수식이라고 까대면 난 죽어야죠. 아니면 선(禪)의 침묵으로 가야죠."

-역시 영문학도다운 얘기군요.

"영어를 잘해야 한국말도 잘해요. 국제적 감각이 있어야 한국말이 풍요로워지는 것이죠. 김 선생님도 그렇잖아요. 전 우리말의 조사가 싫어요. 우리말에서 토씨를 빼면 나머지를 메우는 개념어, 지시어, 행위어는 대부분 한문이에요. 영어는 '아이 러브 유'하면 토씨 없이도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우리말은 '가'니 '를'이니 이런 토씨를 쓰지 않으면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알 수 없죠. 토씨 없으면 신택스가 성립 안 해요. 법전의 우리말을 보세요. '사기는 타인을 기만하여 재물을 편취한 죄'라고 하면 토씨 빼놓고는 다 한자죠.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어 놓았는데도 수백 년 동안 그것을 열심히 쓰지 않은 죄를 우리가 뒤집어쓰고 있는 셈이죠(*그런 언어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나는 법전을 읽지 않는다). 우리말은 아직 개념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토씨만 있는 언어! 참 걸리적거려요. 전 조사의 매개 없이 단어와 단어가 맞부닥쳐 전압을 발생시키는 그런 언어를 쓰고 싶어요."

-김훈은 그런 언어에 집착한 나머지 사회의식이 박약한 자가 아니냐는 비판도 있는데.

"사회의식? 뭔 말라빠진 사회의식입니까? 그건 노무현이 자유무역협정(FTA)을 한다고 이념적 일관성이 없다고 비판하는 것과 똑같은 얘기예요. 진보인 줄 알았더니 보수네? 이따위 얘기들이 모두 개념 규정이 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개념 규정을 하는 데서 파생하는 오류일 뿐이죠. 진보니 중도니 보수니 이따위 말들이 다 엉터리고, 노무현에게는 애초부터 진보도 보수도 없었던 겁니다. 의미 없는 비연속에다가 일관성을 운운치 말자는 것이죠."

-도덕적 일관성(moral integrity)이 있으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한 국가의 목표가 도덕일 수는 없습니다. 이익이죠. 이익 추구에 실패하면 부도덕해질 뿐이죠."

-맹자는 국가의 목표가 도덕적이면 오히려 부강해진다고 말했는데?

"그건 까마득한 이상이죠. 그렇게 된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그럼 한.미 FTA는 잘한 짓이고 그로 인해 한국민이 잘살게 되리라고 전망하십니까?

"그런 걸 점칠 수 있는 능력은 저에게 없습니다. 단지 우리 사회에는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념, 빈부, 교육, 의료, 재산, 기회, 모든 분야에서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어요. 정치적 리더십이 이걸 해결할 수 있는 카리스마가 없으면 우리나라는 희망이 없어요. 돈 많은 사람들이 존경받는 사회를 만들어 주고 그들로부터 세금을 더 뜯어내면 되죠."

-진부한 신자유주의 언어와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한다면?

"글쎄요. 전 인간의 바탕은 개별적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사회적.공동체적 존재라는 전제하에서 주장되고 있는 모든 가치가 개별적 존재 속에서 구현되지 않으면 공허합니다. 전 사실 이런 철학을 도올 선생님의 방대한 저작으로부터 배웠습니다. 동의하시잖아요?"

-내 사상에도 분명 아나키스틱한 측면이 있지요.

"칸트가 말하는 양심이나 자유의지, 이런 것도 우리 존재의 근원이겠지만 저는 폭력과 악이야말로 세계의 근원적 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

-약육강식에 우리 존재를 내맡기자는 것입니까?

"프랑스혁명, 동학혁명, 볼셰비키혁명이 모두 약육강식에 반대하고 일어났지만 결국 또다시 약육강식에 얽매이는 사회를 만들 뿐이죠. 악에 저항하고 승복하고 또 저항하고, 그런 모순된 꼬라지가 나 김훈의 꼴입니다.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전개되는 것이다. 이것은 도올의 명언입니다. "



-그래 소설가가 되어 행복해졌습니까?

"생각보다 책도 좀 팔렸고, 애들이 다 직장 구해 집을 나갔고, 아내는 여행 열심히 다니고, 대부분 집에 홀로 있습니다. 토굴을 지키는 스님같이, '혼자 있음'(Being alone)의 존엄을 즐기고 삽니다. 우리 사회 병리현상의 상당 부분이 혼자 있는 것을 즐기지 못해 생기는 것 같아요. 외롭다는 핑계로 파당을 만들고 추저분한 짓을 하는 것이죠."

-저런, 부럽소. 내가 해야 할 이야기를 하시는구료.

"안 그래요. 선생님은 항상 자신의 성취를 부숴 버리고 다시 시작하시잖아요.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통쾌감을 주는데."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를 내가 잘 불렀죠. '이제 다시 시작이다. '

"저도 그래요. 항상 초년병, 영원히 신인 작가로 살다 죽겠습니다. "

07. 04. 13-14.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수유 2007-04-13 15:21   좋아요 0 | URL
옮겨 가렵니다 어서 완성하시길.

로쟈 2007-04-14 21:48   좋아요 0 | URL
많이 늦지는 않았지요?^^;

수유 2007-04-14 23:06   좋아요 0 | URL
감사히 옮겨 갑니다. 그리고 <데리다>를 보러갈 마음은 있었습니다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로쟈님 강의를 엿볼 기회였는데요.^^

yoonta 2007-04-14 23:37   좋아요 0 | URL
"정치적 리더십이 이걸 해결할 수 있는 카리스마가 없으면 우리나라는 희망이 없어요." 요말 결국은 권위주의에 의존하자는 이야기로 들리네요..-_-

로쟈 2007-04-14 23:44   좋아요 0 | URL
수유님/ 강의 자료들은 조만간 올려놓을 예정이므로 너무 '상심'하진 마시길...
yoonta님/ 물론 '무정부주의'쪽 얘기는 아니지요...

yoonta 2007-04-14 23:47   좋아요 0 | URL
무정부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김훈씨의 경우 좀 권위주의적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 편집장시절 풍문도 그렇고.

로쟈 2007-04-14 23:53   좋아요 0 | URL
권위와 권위주의 사이의 미세한 차이를 식별해야겠지만, 김훈이 '권위주의'에 어필한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한데, 그런 규정은 아무래도 일반론이고 그런 일반론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게 또한 김훈식이죠. 그러니까 '말'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 '권위주의'보다 우선적이라고 생각됩니다...

yoonta 2007-04-14 23:58   좋아요 0 | URL
흠..이전의 님과의 대화를 상기해보니 무슨 말씀이신지 대충 알긴 하겠는데.. 그렇다면 김훈식의 권위주의는 그럼 말이 아니라는 건가요? 권위주의가 작동하는 혹은 작동해야하는 현실이라는 건 말이 아닌 당면한 현실이라는 말씀?

로쟈 2007-04-15 00:06   좋아요 0 | URL
인터뷰에도 그런 표현이 있지만, 제가 이해하는 김훈은 '뼈다귀'주의자입니다. 어떤 액션에 대해서 권위적인가 아닌가를 평하는 것은 '살코기' 얘기거든요(살코기주의자들은 그걸로 밥먹거나 입닦고 살겠지만). 그에 대해서 '권위주의자'다, '마초주의자'다 하는 레테를 다 갖다 붙일 수 있고, 또 일견 다 말이 됩니다. 다만 뼈다귀가 빠져 있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yoonta 2007-04-15 00:13   좋아요 0 | URL
뼈다귀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가름 하는것은 결국 김훈이나 여타 사람들의 수다한 말들속에서가 아니라 당면한 현실속에서 어떻게 작동되느냐에 의해서 결국 검증되겠죠. 그런데 제가보기엔 김훈식 레토릭도 무지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그래서 뭐가 어쨋다는거야? 현실속에서 그 말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데?" 라고 묻는 다면 혹은 "그래서 그 김훈이 추구하는 정치가 뭐야? 한나라당지지야? 열우당지지야? 민노당지지야 뭐야? 아님 다 필요없구 철인 정치하자는 거야 뭐야? " 이런 식으로 되묻게 될수밖에 없다는 거죠.
"뼈다귀주의자"인지 아닌지는 결국 님말마따나 현실속에서 그의 레토릭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의해서 검증되겠죠.

로쟈 2007-04-15 00:20   좋아요 0 | URL
yoonta님과는 '뼈다귀'에 대한 이해가 다른 거 같습니다. 저는 이번에 나온 책 '남한산성' 같은 게 뼈다귀입니다. 글에서 메시지를 증발시키고 남은 문체가 뼈다귀고요. 그걸 저는 감각적으로 읽기 때문에 '무지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제겐 '한나라당' '열우당'... 이 관념적이구요...

yoonta 2007-04-15 00:36   좋아요 0 | URL
로쟈님은 아직도 "문학의 힘"을 믿으시는가보군요..^^ 저는 일정정도 "근대문학은 죽었다"라는 고진의 명제에 동의하는 편이기 때문에 그런 소설이나 문체가 얼마나 현실적 힘으로 작동할수있는가 하는점에 있어서는 무척 회의적입니다. 아무리 뼈다귀를 환상적으로 나열한다고 한들 그것을 사람들이 도무지 읽지 않는게 오늘날의 현실이기 때문에..문체가 아무리 뼈다귀면 뭐합니까. 사람들은 그것을 그냥 소설로서만 볼뿐이지요. 올드보이같은 영화한편보다도 사회적 힘이 없는 그런 뼈다귀..

이처럼 실질적인 현실적 힘이 없는 뼈다귀에는 그 뼈다귀가 레떼르로서의 뼈다귀인지 아닌지 검증하는 장치가 결여되기때문에. 결국 아무도 무엇이 진짜 뼈다귀인지 알수없게 되는 그런 현실...

로쟈 2007-04-15 00:41   좋아요 0 | URL
오해가 있으신데, '문학'도 레떼르입니다. '직업'이 아닌 '밥벌이'에 상응하는 것으로서의 '글쓰기' 정도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런 특정한 글쓰기를 제가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올드보이'의 사회적 힘을 믿으신다는 건 좀 의외입니다...

yoonta 2007-04-15 01:08   좋아요 0 | URL
올드보이 이야기는 그냥 믿는다는 것이라기보다는 통계적인 이야기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김훈의 소설을 읽는 사람보다 박찬욱의 영화를 본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통계에 근거한 이야기지요..^^ 오늘날의 사회는 엄연히 '대중사회'입니다. 그래서 소설도 아무도 읽지 않는(읽어도 거의 이해되지 않는 -_-) 박상륭식 소설보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더 사회적 힘을 갖게 된다는 거죠. 그런 차원의 이야기로 보시면 되구요.

문학도 레떼르다...이 표현 약간 의외의 말씀이신데요. 어쨋든 님은 그냥 "김훈의 문학이라기 보다는 그의 문체가 좋다..사회적 영향력이 있건 없건 간에.." 라는 정도의 말씀이신지?

로쟈 2007-04-15 01:25   좋아요 0 | URL
아마도 어떤 행위를 '사회적 영향력'이란 말로 푸신 것 같은데, 애초에 '뼈다귀' 얘기를 꺼낼 때 고려했던 것과는 좀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문체가 좋다'라는 식의 취향을 말씀드린 게 아니라 무엇이 진짜인가에 대한 '신뢰'를 피력한 것이구요. '남한산성'에 대해서 예전에 작가가 언급해놓은 구상을 옮겨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 정도 높이의 고민을 제가 신뢰한다는 것이고, 그 형식은 문학이 아니어도 무방합니다(레떼르란 건 그래서 붙은 거구요).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가 어떤 행위라면 저에겐 김훈의 어떤 글쓰기도 그런 행위에 값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에게 들뢰즈의 <안티오이디푸스>가 그런 것처럼...

virtuepeak 2007-04-15 23:25   좋아요 0 | URL
yoonta님 말씀처럼 김훈의 소설이 영화 올드보이보다 실질적인 힘이 없다면 그가 권위주의자라고 해도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 로쟈님이 바로 위에 말씀하셨듯이 뼈다귀가 어떤 사회적 힘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뼈다귀는 이문열에게서 찾아야 하겠지요.

yoonta님은 김훈의 칼럼이나 소설을 읽어 보신 적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그의 글을 읽어 보면 로쟈님이 김훈에 대해 어떤 평을 하고 있는 것인지 파악하실 수 있을실텐데요. 김훈의 글은 문학이기 전에 '김훈의 글'로서 다가오는 게 있습니다. 추상과 관념을 걷어낸 언어로 구성된 글, 그러나 글이라는 것 자체가 추상적인 기호라는 어찌할 수 없는 본질적 조건.. '이 사람 역시 파시스트야!'라는 정치적 견해를 벗고 한 번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저도 작년까지는 아예 읽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가 옛날 글까지 모두 찾아서 읽은 경험이 있거든요.

yoonta 2007-04-16 12:05   좋아요 0 | URL
永革님/ 읽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구요. 한두편의소설과 약간의 수필은 접해봤습니다. 그정도로 읽어봤다라고 말씀드릴수있을진 모르겠지만요.^^ 봤는데 저에게는 그다지 감흥이 오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로쟈님이 관심이 많으신것 같아 로쟈님에게 귀동냥좀 하고 있는 중입니다..^^

님 말씀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쟈님이나 영혁님이 느끼시는 '김훈의 글'이라는 것의 실체를 제가 아직은 느낄수가 없으니 말이죠. 제가 보는 그는 솔직히 말씀드려서 너무나 진부한 한 한국적 가부장의 모습만 보일뿐입니다. 길바닥에 채이고 채이는 그런..인간형..단지 그런데 글재주가 비상한 그런 사람..그정도로 밖에는 안보인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닥 새로울것도 없는 그런 생각과 심성을 가진 사람인데..로쟈님같이 공부많이 하신 분이 높이 평가하신다니 신기해하고 있는 중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