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부터 프레드릭 제임슨과 씨름하려니까 지겨기도 한데, 잠시 짬을 내 '러시아 이야기' 하나를 올려놓는다. 러시아 관련 뉴스라야 '테러 아니면 에너지'가 주종이었고, 최근에는 단연 에너지 관련 행보가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한 행보에 대해서 '에너지 파시즘'으로 경계하는 한 칼럼이며 프레시안에 번역 전재된 걸 스크랩해놓는다. 내용 자체는 새로운 게 없지만(푸틴의 박사학위논문 제목은 처음 알게 됐다), '에너지 파시즘'이란 선정적인 용어가 일단 눈길을 끌고 관련정보들을 정리해놓은 의의가 있다. 아래 편집자의 말에 이어지는 것이 그 칼럼이다.  

다음은 미 뉴햄프셔대 마이클 클레어 교수의 '석유 패권과 핵 르네상스기': 에너지 파시즘의 두 얼굴(Petro-Power and the Nuclear Renaissance: Two Faces of an Emerging Energo-facism)'을 완역한 것이다. 에너지정치학의 국제적 권위자인 클레어 교수는 석유 확보를 둘러싼 국가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석유 확보를 명분으로 한 파시즘이 초래될 것이라고 경고한 앞의 글('우리의 미래는 에너지 파시즘인가?')에 이어 이번 글에서는 에너지 초강대국으로 급부상 중인 러시아를 모델로 에너지 파시즘의 단면을 제시하고 있다. 개인의 소유하고 있는 에너지 재산을 비합법적 방법으로 국유화 한다든지, 에너지를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도구로 활용한다든지 하는 등 러시아가 에너지 패권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몇 가지 모습들이 에너지 파시즘의 어두운 얼굴이라는 것이다. 
  
석유나 천연가스가 고갈된 자리를 원자력이 메우게 되면서 그 시설을 방어하고 그 부산물의 유출을 감시하기 위한 정부 통제권이 강화되라라는 전망 역시 파시즘의 도래를 우려케 한다. 이에 클레어 교수는 "대다수의 정부 지도자들은 이 문제들의 초점을 정부 통제력을 증가시키거나 군사력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데 두려 한다"며 '지각 있는 시민'이 이 문제 해결에 나설 것을 당부한다. 원문은 미국 진보성향 인터넷 매체인 <톰디스패치닷컴>에서 볼 수 있다. <편집자>

프레시안(07. 02. 07) 러시아, '에너지 파시즘'의 정점에 서다

전편에서 말한 것처럼 앞으로 수십년간 세상사를 지배하고 일반 사람들의 삶을 어둡게 만드는 것은 '이슬람 파시즘'이 아니라 '에너지 파시즘'이다. 즉 갈수록 줄어드는 에너지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전지구적 군사투쟁이 우리들의 삶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는 전 세계의 정부 관료들이 국가 에너지 수요를 시장의 힘에 맡겨두기보다는 에너지의 확보, 수송, 할당 등을 정부가 직접 책임지고자 하기 때문이다. 강대국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에너지 확보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라면 무력 사용도 마다하지 않을 준비가 돼 있다.
  
이러한 에너지자원 확보의 절박성은 미국의 경우, 미군의 업무를 '세계 석유 보호기관'으로 전환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밖에 에너지 파시즘의 도래를 알리는 또 다른 징후로는 러시아의 '에너지 초강대국'으로의 급부상, 원자력에너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안전 등을 이유로 한 국가권력의 감시 및 통제가 강화될 것이란 점을 들 수 있겠다.

에너지 부국이 곧 강대국이 되는 시대
  
에너지 수요는 증가하는 데 반해 공급은 줄어드는 상황에서(최소한 공급 증가가 수요 증가를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전 세계는 크게 에너지 부국과 에너지 빈국으로 나뉘게 됐다.
에너지 부국들은 에너지(석유, 가스, 석탄, 수소에너지, 우라늄, 대체에너 자원 등) 자체 보유량이 국내 수요를 충족시키고도 남아 다른 나라에 수출까지 한다. 반면, 에너지 빈국들은 부족한 에너지자원을 수입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쓰거나 아니면 에너지 부족의 뼈아픈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지난 50년간(1950~2000년)은 에너지가 풍부하고 값이 쌌기 때문에 에너지 부국과 빈국 간의 차이가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일본처럼 어마어마한 부자거나 영국, 프랑스처럼 핵무기를 갖고 있거나, 하다못해 나토 동맹국이나 바르샤바 조약기구 가맹국들처럼 '힘센 우방국'이 있다면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더라도 문제가 없었다. 물론 당시에도 이도저도 없는 국가들은 고생을 해야 했다. 아직도 이들 국가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고 있는 외채위기는 사실 에너지부족에 기인한 바 크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돈이 많다거나 핵무기가 있다든가, 또는 강력한 우방국을 갖고 있다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됐다. 오히려 에너지 부국이냐, 빈국이냐의 차이가 더 중요해졌다. 돈 많고 힘 있는 미국과 일본에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에너지 부국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는 의외로 적다. 호주, 캐나다, 카자흐스탄, 쿠웨이트, 나이지리아, 카타르,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베네수엘라, 이란, 이라크(현재의 혼란이 극복된다면) 정도다. 그 외에 몇 나라 더 있을까. 이들 나라는 선망의 대상이다. 일단 엄청난 가격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수입하지 않아도 되고, 이들 나라의 지도층들은 충분한 에너지 확보를 원하는 다른 나라 지도층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 외교적, 군사적 혜택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에너지 소비국들을 싸움 붙여 이득을 챙길 수도 있다. 워싱턴과 베이징으로부터 경쟁적으로 초대받고 있는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이런 게임에 아주 능숙한 지도자다.
  
심지어 단순한 경제적 혜택을 보장받는 것에서 더 나아가 에너지 소비국에 대해 정치적인 지배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에너지 소비국은 국가운영에 필수적인 석유와 천연가스의 안정적인 판매를 보장받기 위해 에너지 공급국의 정치적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전략을 가장 적극적으로 구사하고 있는 나라는 바로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다.

러시아의 가스는 '패권의 방향'으로 흐른다 
  
냉전이 끝난 후 러시아는 희망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초강대국'은 이미 과거의 얘기였고 정신적으로나 재정적으로, 그리고 영향력 면에서도 한물 간 것처럼 보였다.
수 년 간 미국 관리들로부터 모욕적인 대우를 받기도 했다. 미국이 이끄는 나토가 동유럽의 러시아 위성국가에까지 확장됐고, 요격미사일금지협정(ABM)은 일방적으로 폐기됐다. 미국 정부의 수많은 관료들이 러시아를 역사적 유물 이상으로 여기지 않으며 세계사에서 러시아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면 '최후의 미소를 짓는 자'는 워싱턴이 아니라 모스크바인 것으로 보인다. 엄청난 양의 석유와 우라늄은 물론 유라시아 최대의 천연가스와 석탄 보유량을 자랑하는 러시아는 이제 새로운 '승자'가 됐다.
군사 초강대국이 아닌 에너지 초강대국이 된 것이다. 어찌됐건 초강대국은 초강대국인 셈이다.
  
먼저 큰 그림을 보자. 러시아는 천연가스 생산에 있어 '절대강자'다. 영국의 BP 석유그룹에 따르면 러시아의 천연가스 보유량은 측정된 것만 1700조 입방피트에 이른다고 한다. 전 세계 천연가스 공급량의 27%를 차지하는 양이다. 이 사실은 보기보다 갖고 있는 의미가 더 크다. (러시아 에너지 자원의 주요 고객인) 유럽과 옛 소련국가들의 천연가스 의존 비율이 34%로 전 세계 어느 지역보다 높기 때문이다. (석유를 주 연료로 하는 미국의 경우 천연가스 의존도는 25% 정도다.) 유라시아 가스 공급원을 주도한 덕에 러시아는 다른 에너지 공급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배적 공급자의 위치를 누리고 있다.

물론 석유 공급에서도 러시아는 강력한 우위를 갖고 있다. 세계 1위인 사우디아라비아를 따라잡을 수는 없겠지만, 하루 1100만 배럴을 생산하는 사우디아라비아에 고작 140만 배럴 뒤져 있을 뿐이다(2006년 초 기준) . 게다가 러시아는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석탄이 매장돼 있는 나라이자 현재 31개의 원자로가 가동 중인 주요 원자력 소비국이기도 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1999년, 집권 직후부터 이 넘쳐나는 에너지를 러시아 패권 부활을 도모할 만한 정치적 무기로 바꾸는 계획을 추진했다. 러시아는 러시아에서 수출되는 에너지뿐 아니라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에서 러시아 송유관을 통해 유럽에 공급되는 에너지까지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에 푸틴 대통령은 냉전 시대에 누렸던 소련의 정치적 영향력의 일부나마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1990년 소련 붕괴 이후 민영화됐던 가스 산업을 다시 국유화하고 민간이 소유하고 있는 다른 에너지 산업도 모두 국가의 지배 아래 둬야만 했다. 공산주의 법체계 붕괴 이후 러시아에서는 이 같은 국유화를 합법화할 길이 없었기에 푸틴은 불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방법으로 이 귀중한 자산들을 모두 국유화했다. 여기서도 우리는 에너지파시즘의 도래를 관찰할 수 있다.
  
러시아의 에너지 자원을 국가가 집중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것은 푸틴의 오랜 지론이었다. 푸틴은 1999년 '러시아 경제 발전을 위한 전략상의 광물자원'이란 제목의 박사학위논문 요약본에서 러시아 정부는 국가의 광물자원 활용을 감독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러시아 국민들의 이익의 위해서라면 이미 개인사업자 손에 들어간 석유 부분도 예외가 돼선 안 된다는 것이다. "정부는 천연자원, 특히 광물자원에 대한 획득과 사용 과정을 제어할 권리가 있다. 그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이 문제에 관해서 정부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에너지파시즘에 대해 이보다 더 나은 정의를 상상하기는 힘들 것 같다.

석유 재벌 체포하고 석유 기업은 정부 품에
  
이 같은 푸틴의 속셈을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사건은 이른바 '호도르코프스키 사건'이다. 지난 2003년 러시아 최대 석유재벌이던 유코스의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회장이 사기 및 세금포탈 혐의로 체포됐다.
그는 (미국) 엑손모빌과의 합작회사 설립 등 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난 온갖 에너지 판매를 추진해고, 러시아 내 반(反)푸틴 정치세력을 지원했다. 이 두 가지 중 하나만으로도 크렘린의 격노를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푸틴이 이 사건을 기획한 최종 목표는 유코스의 주요 자산인 유간스크네프트가스를 빼앗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 드러났다. 유간스크네프트가스는 러시아 석유 생산의 11% 가량을 담당하고 있었다. 호도르코프스키와 그의 측근들이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정부는 유간스크네프트가스를 경매에 부쳐 명의뿐인 유령회사에 넘긴 다음 곧 국영기업인 로스네프트에 시장가 이하의 가격으로 되팔았다. 푸틴은 순식간에 민간기업인 유코스를 분할해 러시아 최대의 국영석유생산업체 로스네프트를 만들어낸 것이다.
  
푸틴은 석유 및 가스의 수출, 공급도 국가가 장악하려 했다. 민간 기업의 송유관 건설을 원천봉쇄해 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국영기업 가스프롬의 천연가스 독점과 역시 국영기업인 트랜스네프트의 송유관 독점은 확고해졌다. 미국과 다른 에너지 소비국들은 민간 기업의 송유관 건설을 오랜 기간 압박해 왔다. 유럽과 다른 해외 시장에 공급되는 에너지의 양을 늘리는 동시에 가스프롬과 트랜스네프트의 권한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렘린은 제도적으로 이 같은 노력을 배제시켜버렸다.
  
에너지 자산에 대한 소유권을 합법성 여부가 의심되는 방법으로 정부가 장악해버린 것이 러시아가 보여준 에너지파시즘의 한 단면이라면, 러시아가 자원을 이용해 자원 빈국들을 러시아 주변에 묶어두는 데에서 또 다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악명 높은 사례로는 2006년 1월 1일 우크라이나로 공급되던 천연가스를 끊어버렸던 것을 들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가스 가격을 두고 분쟁을 벌이던 가스프롬이 가스 공급을 중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태를 지켜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의 빅토르 유센코 대통령의 친서방 정책에 대한 러시아의 경고로 믿고 있다.

이 사건이 한 겨울에 일어났음을 유념하라. 구소련 국가들과 동유럽 국가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천연가스는 우크라이나의 주 난방 연료였다. 결국 가스프롬은 막판까지 가격 협상을 하다가 서유럽의 요란한 불만에 못 이겨 가스 공급을 재개했다. 우크라이나가 유럽에 공급하던 가스를 내수로 돌려버리자 공급받던 가스에 결손이 생긴 서유럽이 큰 소리를 낸 것이다. 이제껏 러시아 정부가 해 온 모든 일이 결국 에너지를 공급하는 '수도꼭지'를 외교 정책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한 준비였음이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 러시아 정부는 '근린국가(Near Abroad)'라고 부르는 이웃 국가들을 협박하기 위해 종종 이 전술을 사용해 왔다. 2006년 7월 29일에는 트랜스네프트가 누출 위험을 이유로 리투아니아 최대 정유소인 마제이큐에 대한 원유 공급을 중단했다. 마제이큐의 회장이 이 정유소를 러시아가 아닌 폴란드에 매각키로 했다는 발표가 나온 직후였다. 이 같은 움직임을 지켜본 사람들은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 회사가 정유회사를 인수하는 데까지 힘을 쓰고 있다고 풀이했다.
  
이어 11월에는 가스프롬이 그루지야에 공급하던 천연가스 가격을 1000입방미터 당 110달러에서 230달러로 두 배 이상 올리겠다고 협박했다. 가격을 올릴 수 없다면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이 역시 그루지야의 친서방 정부가 다양한 분야에 걸쳐 러시아 정부에 반항해 왔던 점이 일정 부분 감안된 정치적 압력으로 여겨졌다. 가스프롬은 12월 벨로루시에도 같은 장난을 쳤다. 주변의 헐벗은 국가들이 조금이라도 독립의사를 보이면 여지없이 가격인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러시아가 보여준 에너지파시즘의 다른 얼굴이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에너지를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자원 빈국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유라시아 그룹의 자문역인 클리프 쿱샨은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에너지가 새로운 종류의 핵무기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러시아는 석유권력을 공격적이고 영리하게 사용해 자국의 외교적 영향력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원자력과 함께 르네상스를 맞을 '빅 브라더'
  
에너지파시즘의 마지막 얼굴은 원자력의 사용이 증가함에 따라 국가 차원의 억압과 감시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가스와 석유 매장량이 줄어들수록 정부와 산업계 지도자들은 원자력 의존도를 높여 추가 에너지를 공급하려 할 것이 분명하다. 지구온난화에 대한 높은 우려도 이 계획을 부추길 것 같다.
  
석유, 가스, 석탄 등을 태울 때 나오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원자력 의존도를 높여가겠다는 계획을 거듭 말해 왔고 2005년 정부가 마련한 '2005 에너지 정책법'에도 미국에서 새로이 원전을 짓는 전기 사업들에 대한 다양한 인센티브를 보장하고 있다. 프랑스, 중국, 일본, 러시아, 인도 등 다른 나라에서도 원자력 의존도를 높여 가려는 계획을 갖고 있고, 이는 원전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결과를 불러올 것이다.

소위 '원자력의 르네상스기'라고 말하는 길에는 몇 가지 문제가 버티고 있다. 엄청난 부대비용이나 핵 쓰레기를 장기적으로 보관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성이 상당부분 개선됐음에도 1979년 '쓰리 마일 아일랜드' 사건이나 1986년 체르노빌 사건 같은 핵사고 위험에 대한 우려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원자력 산업이 성장할 미래에 대해 우려되는 점 두 가지만 들어보겠다. 원전 부지의 결정권이 연방정부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과 테러리스트, 범죄자, '불량 국가' 등에 대한 핵무기 이전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개인에 대한 국가권력의 억압이 강화될 것이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까지도 미국에서 원자력 시설을 세우려면 (연방정부가 아닌) 시, 카운티, 주 정부 등 지방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에 따라 각 지역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뒷마당에 원전이 설치되는 것을 반대할 권한을 갖는 것이다. 이는 지난 수 십 년간 미국 내 새 원자력 시설을 건설하는 데 주요한 장애물이 됐다. 법이 정한 대로 주 의회와 카운티 의회, 그리고 환경단체들의 반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비용을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규칙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진정한 '원자력 르네상스기'를 절대 볼 수 없을지 모른다. 시민들의 저항이 거의 없는 가난한 촌 동네에 원자로 몇 개가 세워질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원자력에 대한 의존도를 높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허가권을 연방정부가 장악해서 지역단체를 따돌리고 연방정부 관료들에게 새 원자로를 건설할 수 있는 허가서를 발부할 수 있는 무한한 권한을 허락하는 것이다.
  
불가능할 것 같다고? 다음 정황들을 잘 살펴보라. '2005 에너지 정책법'은 지역 관료들로부터 '천연가스 재기화(再氣化) 플랜트' 설치를 허가할 수 있는 권한을 빼앗아 연방정부의 권한으로 만드는 의미심장한 전례를 만들어 놓았다. 이 거대한 시설은 해외 공급자로부터 배로 수송된 액화천연가스를 미국 전역의 파이프를 통해 배달할 수 있도록 다시 가스로 바꾸기 위한 것이다. 몇몇의 동서부 해안 지역에서는 해당 지역 항구에 이 플랜트가 세워지는 것에 반대해 왔다. 폭발할 위험이 있고(완전 억지 주장은 아니다) 테러리스트의 표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저항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잃었다. 아, 지방자치여 안녕.
  
내 걱정은 여기서 출발한다. 미래의 정부는 '천연가스 재기화 플랜트'의 전례를 따라 원자로 설치에 관한 권한도 연방정부에 넘기는 방향으로 '에너지 정책법' 수정을 추진할 것이다. 그리고선 보스턴,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덴버 등 대도시 인근에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의 원자로 신설 계획을 발표할 것이다. 추가 에너지 필요량의 긴급성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시민들은 궐기할 것이고 이들의 저항에 공감하는 지방정부는 시위대에 대한 집단 연행을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주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명령에 대한 반발과는 경우가 다르다. 엄연한 연방정부에 대한 반발인 것이다. 고로 시위대를 제압하고 원자로 주변을 방어하기 위해 주 방위군이나 정규군이 소집될 수 있다. 에너지파시즘의 발동이다.
  
마지막으로 원자력 확산이 낳을 또 다른 위험은 원자력과 연관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먼 관계더라도 정부의 조직적 감시 하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우라늄 농축시설, 원자로, 핵 폐기장 등 모든 핵 관련 시설과 거기서 나오는 부산물들은 테러리스트나 암시장 불법거래상인, 그리고 이란과 북한 같은 '불량국가'의 손에서는 핵 무기화 될 수 있는 소재들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물론 이 같은 시설에 종사하고 있는 개인과 하청업자, 그리고 재하청업자와 그들의 가족들까지 항시적으로 불법 가능성을 조사받을 수 있으며 24시간 엄격한 감시 하에 처하게 된다는 얘기다. 더 많은 원자로와 더 많은 핵 시설이 생길수록 일종의 감시 대상이 될 관여자들의 수도 늘어나고, 이들을 감시하는 보안 관계자들 역시 정부 정보국 차원의 더 높은 단계의 감시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매우 광범위한 '빅 브라더' 공식이다.
  
그런가 하면 '증식형 원자로'에 대한 문제도 있다. 증식형 원자로는 투입한 것보다 더 많은 핵분물질들을 만들어 낸다. 플루토늄의 형태로 만들어 내기도 하는데 플루토늄은 원자로에서 태우면 전기를 생산해 내기도 하지만 핵무기원료로 이용되기도 한다. 비록 미국에서는 증식형 원자로의 건설이 금지돼 있지만 일본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는 화석 연료와 그 역시 한정 자원인 천연 우라늄에 대한 의존도를 줄인다는 명목으로 건설 중에 있다. 원자력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수록 더 많은 나라들이 증식형 원자로를 짓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여기엔 미국도 포함될 수 있다. 이는 폭탄에 가까운 플루토늄의 세계적 공급을 광범위하게 증가시킬 것이고 모든 면에서 원자력 산업에 대한 정부의 더 강한 감시를 요구할 것이다.
  
지각있는 시민의 힘으로 에너지 파시즘의 도래 막아야
  
2회에 걸쳐 논의된 모든 현상- 석유보호 서비스로 미군의 주요 업무 전환, 군비 경쟁에 비견할 만한 강대국간 에너지 확보 경쟁의 격화, 러시아의 에너지 초강대국 부상, 원자력 산업에 관한 감시감독 필요성의 증가-은 모두 에너지의 생산, 획득, 이전, 분배 등에 관한 통제력을 확대하려는 정부의 경향성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이는 전 세계적 자원 고갈의 대가인 동시에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에너지 생산의 거점이 이동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 같은 흐름은 얼마 전부터 진행돼 온 것이긴 하지만 앞으로 몇 년간 더 큰 모멘텀을 갖게 될 것이 분명하다.
  
아폴로 얼라이언스, 로키 마운틴 인스티튜트, 월드워치 인스티튜트 등 많은 지각있는 시민들과 단체들이 에너지 고갈과 에너지 생산지의 불안정성, 그리고 지구온난화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이성적이고 민주적인 해법을 개발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정부 지도자들은 이 문제들의 초점을 정부 통제력을 증가시키거나 군사력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데 두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만약 이러한 경향을 막지 못한다면 에너지 파시즘은 바로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다.(번역 이지윤 기자)

02. 07.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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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2-07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지하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또 엉뚱한 생각이 드네요.그래서 석유재벌이 첼시구단을 인수해서 축구선수들을 사모으는건가?? ^^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원자력의 문제가 근원적으로 '무결점사고방식' 위에 구축되었다는 것이라더군요...

로쟈 2007-02-07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이 좀 남아도니까요.^^ '에너지 파시즘의 시대'가 아니더라도 석유시대의 종언 같은 게 얘기되고 있으니까 뾰족한 수를 찾긴 찾아야 하겠습니다...
 

책은 남들 못지 않게 사놓고 정작 재미를 못보고 있는 대표적인 두 저자가 내겐 프레드릭 제임슨과 아도르노이다(제임슨이 아도르노 연구서를 쓴 건 당연하면서도 짓궂다!). 그 중에서도 최악이라 할 만한 건 제임슨인데, 일단 여러 권의 저작들이 소개되었으면서도 정작 대표적인 주저들은 번역/소개되지가 않았고(이럴 때 쓰는 말이 '닭 쫓던 개 제임슨 쳐다보기'이다), 그나마 번역된 책들 읽기 어려우며(어떤 것들은 이제 구하기도 어렵다), 그걸 좀 덜어주겠다고 나온 해설서들 마찬가지로 난삽하기 짝이 없어서이다. 이때 '난삽함'이 비단 어려운 내용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다. 오역의 난잡함을 좀 에둘러 말했을 뿐이다.

이번에 '크리티컬 씽커즈' 시리즈로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앨피, 2007)과 함께 출간된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앨피, 2007)이 이 시리즈의 성격에 걸맞게 '가장 쉬운 제임슨 입문서'의 구실을 해주려나 은근히 기대를 가졌건만 어젯밤에 첫장인 '왜 제임슨인가?'를 읽고서 기대를 접었다(정말 묻고 싶다. 왜 제임슨인가?).

사실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도 기대에 부응하는 번역은 아니었다(지나가는 김에 지적하자면 알라딘은 이 책명을 '자크데리다의 유령들'로 붙여놓아서 '데리다'로는 도서검색이 안된다. 업무량이 그토록 과다한가?). 원서와 비교해보면 앨피출판사의 국역본 시리즈는 편집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는 걸 알 수 있는데(얼마나 알뜰한 편집이냐면 원문의 한 문장을 두 문장으로 끊어놓은 번역문을 두 개의 문단으로 나눠놓는 식이다), 정작 '콘텐츠'가 뒤를 받쳐주지 못하는 형국이어서 안타깝다. 책은 껍데기가 아니잖은가. 공연한 험담을 늘어놓는 게 아니다.

가령, "여러 차례 그는 네덜란드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에게서 얻어낸 통찰, 즉 결정이 순간은 광기라는 진술을 상기한다."(42쪽)는 구절을 읽으면 당신은 무엇이 상기되는가? 어느 시인의 말대로 이거 송충이 씹는 맛 아닌가? 어쩌자고 덴마크의 '고독한 단독자'의 국적을 네덜란드로 바꿔놓는단 말인가?(나도 '어려운 오역'을 좀 지적하고 싶다.) 물론 우리가 축구 사랑의 인연으로 네덜란드에 더 친밀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겠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어떻게, 역자와 편집자는 '네덜란드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를 아무생각 없이 접수할 수 있었단 말인가?(많이 쓰는 이름인 '키에르케고르'를 '키르케고르'로 표기하면서 '네덜란드 발음은 이게 더 가깝지'라고 생각했을까?) 

그렇듯 시작이 께름칙해놓으니까 이래저래 주의해서 읽을 도리밖에. 그래도 <자크 데리다>의 경우 1장에서 몇몇 의문스런 번역을 제외하면 2장부터는 가독성이 좋은 편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을 내가 먼저 다뤄보기로 한 건 그 때문이다. 멀쩡하게 씌어진 역자 서문을 지나 '왜 제임슨인가?'의 몇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도 괜찮다. 제임슨의 두 화두인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두 주저인 <정치적 무의식>과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논리>에 대해서 유익한 해설을 읽을 수 있겠구나라는 기대감마저 갖게 한다. 한데, 이러한 기대는 제임슨의 이력을 읽어나가는 대목에서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1960년대에 제임슨은 하버대학에서 강사와 조교수로 재직했고, 이어 1967년 샌디에이고의 캘리포니아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1971-76년까지 불문학 및 비교문학 전공 교수로 일했으며, 1976-83년까지는 예일대학에서 프랑스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때까지 듀크대학의 비교문학과 명예교수직도 겸했다."(29쪽)

사실 제임슨의 이력이 어떻다는 것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역자에 대한 신뢰이다. 우리말로도 말이 안되는 게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이다. '그때까지... 겸했다."? '그때까지'는 언제를 말하는가?(1983년 이후는?) 1983년까지 예일대학과 듀크대학의 교수직을 겸했다고?(유렵대학의 명망있는 교수들이 미국대학에도 초빙교수로 양다리를 걸치는 경우들은 드물지 않지만, 같은 미국내에서도 그렇게 'two job'을 갖는다?) 

상식에 맞지 않는 내용은 대부분 오역이라고 보면 된다. 원문은 "SInce then he has been Distinguished Professor of Comparative Literature at Duke University."(3쪽)이다. "그 이후로 그는 듀크대학의 비교문학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에서 '명예교수'는 정년퇴임 이후 봉직기간 등 해당대학에서 규정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교수에게 수여하는 명예직이다. 그리고 미국대학에서 'Distinguished Professor'는 내가 알기론 해당분야의 탁월한 업적을 이룬 교수들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대우도 물론 좀 다를 거라고 예상되고). 그게 몇년 전부터 국내에 도입된 '석좌교수'직과 성격이 비슷할 거라고 본다(물론 영어에서 석좌교수를 가리키는 말은 따로 있지만).

원문 어디에도 '겸했다'란 말은 나오지 않는다. 'since then'을 '그때까지'라고 옮겨놓으니까 수습차원에서 '겸했다'란 말을 집어넣었을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단순 사례이지만 내 독서경험에 비추어 앞으로 역자가 어떻게 번역해놓았을지 얼추 짐작하게 한다. 사실 본문 첫문장 "프레드릭 제임슨은 아마도 오늘날 영미권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비평가 중 한 사람일 것이다."(23쪽)에서 '아마도 오늘날 영미권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비평가 중 한 사람일 것이다'에 인용부호와 인용출처가 빠져 있는 데에서도 번역의 충실성에 대한 의혹은 슬슬 기어나오기 시작했었다. 그러니 사단이 벌어지는 건 시간문제였을 따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들여다보기 전에 '제임슨을 읽는 어려움' 일반론에 대해서 먼저 정리를 해둔다. 이러한 국역본의 소제목들은 아마도 편집자가 붙인 듯하지만(32-43쪽까지에 해당하는 내용이 원서에는 'The Challenges of Jameson's Work'로 돼 있다) 내용에는 부합한다. "일반적으로 제임슨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앞서 말한 대로 그가 속한 비평적 맥락이 복잡하고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제임슨의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시적인 문체를 읽어 내려가야 하는 어려움이다."(32쪽)

'복잡하고 광범위한 비평적 맥락'으로 치자면 슬라보예 지젝 같은 경우 한술 더 뜨기 때문에 제임슨만의 두드러진 난점이라고 할 수는 없고 오히려 매력일 수도 있겠다. 문제는 그의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시적인 문체'. "제임슨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은 한결같이 이해하기 너무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33쪽)니까 특별히 번역상의 문제만으로 우리가 곤란을 겪거나 분통을 터뜨리는 건 아니겠다. 반면에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테리 이글턴  같은 경우에 "나는 종종 서가의 문학이론서 자리에서가 아니라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작품이 꽂힌 자리에서 그의 책을 뽑아든다."(33쪽)고 하니까 그의 문체(스타일)이 악평만을 얻고 있는 것도 아니고(아무리 그래도 나는 이글턴의 활달하고 재기넘치는 문체를 더 좋아한다).  

물론 대세는 역시나 꼭 그렇게까지 문장을 꼬이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이다. "제임슨의 스타일을 피곤하고 번잡스러우며 어쭙잖다고 평가절하하는 비평가들도 있다. 더글러스 켈너는 제임슨의 스타일을 형편없다고 얘기했다."(33쪽) 켈너는 국내에 <탈현대의 사회이론>(현대미학사, 1995)부터 <미디어문화>(새물결, 2003)까지 여러 권의 저작이 소개돼 있는 좌파이론가이다(보드리야르와 마르쿠제 연구서가 유명하다).

한데, 형편없다'고 옮긴 건 오해의 소지가 있다. 켈너가 쓴 단어는 'infamous'이며 사전적 정의대로, '악명 높은'이라고 해야 더 적절한 것이기 때문이다. 국역본엔 이 말의 출처가 빠져 있지만, ('제임슨의 모든 것'이란 참고문헌 해제에 포함돼 있는 바대로) "제임슨의 다양한 논문을 실은 책" <포스트모더니즘/제임슨/비평>의 편자 서문에 나온다. 그 편자가 바로 켈너인 것. 따라서 "제임슨의 문체는 악명이 높다" 정도이지, "제임슨의 스타일은 형편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그의 난해한 문체가 시적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잖은가!).  

왜 그럼 제임슨은 그렇게 쓰는가? 아도르노의 난해한 문체를 옹호하면서 제임슨이 주장하는 바이기도 한데, "요컨대 독서는 어렵고 불편한 일이어야 한다"고 그가 믿기 때문이다. "독서가 고통스러운 작업이 아닐 때, 그것은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한다."(35쪽) 그러니까 드러누워서 읽을 수 있는 책이라면 차라리 안 읽는 게 낫다, 라는 게 제임슨의 글쓰기론이자 문체론이다. 저자인 로버츠의 해석대로, "이러한 주장은 난해한 글쓰기일수록, 비록 소극적인 의미에서나마 진보적 행위라는 사실을 내포한다."(36쪽)

거기에 보태어 제임슨은 그 '난해성'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왜냐하면 시류에 흔들리는 양떼처럼 제도적 압력에 굴복할 때보다는, 그에 저항하고 교전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는 훨씬 더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물론 제임슨과 생각을 달리할 수도 있다. 

저자 로버츠의 제임슨 꼬집기: "가령 우리는 제임슨을 제도권 학계와 비평계에서 높은 존경을 받으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제도권 학계와 비평계가 교육사업을 벌여 미국에서만 연간 수천 만 달러를 벌어들인다는 사실이다. 제임슨의 난해한 스타일은 이러한 교육의 기회를 얻을 수 없는 무지한 노동계급의 접근을 차단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37쪽) 이것이 '난해한 글의 계급성'이자 좌파 엘리트주의의 함정이다.  

그리고 인용문에는 오역의 함정도 있다. 미국 대학시장의 규모를 '수천 만 달러'라고 옮겨놓았는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원서에 따르면 미국의 대학 '산업'이 해마다 벌어들이는 수익은 'billions of dollars'로 돼 있다. 지적하기도 뭐하지만 'billion'은 '천만'이 아니라 '십억'이다. 이건 액면상 적은 차이가 아니다. '무지한 독자계급'을 상대로 한 번역이 아니라면 이런 식으로 대충 번역하면 곤란하다.

어쨌든 그러한 '함정'에 대해서 저자가 일침을 놓고 있는 대목: "그리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가의 물건을 소유하는 행위로 자기를 과시하듯, 난해한 제임슨 이론을 이해한다는 것으로 자신이 학식과 교육 정도를 과시할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차라리 많은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획된 이 '루틀리지' 비평가 시리즈가 더 급진적 전략일 수도 있겠다."(38쪽) 단, 여기서도 '루틀리지 비평가 시리즈(Routledge Critical Thinkers)'는 '루틀리지 비판적 사상가' 시리즈 더 타당하다(비평가와 사상가는 좀 다르지 않나?).

이제 오역의 핵심적 문제로 들어간다. "이와 연결된 핵심적 문제를 검토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문장을 제임슨의 글에서 뽑아보면 이렇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레 <정치적 무의식>에서의 인용문으로 넘어가는데, 유감스럽게도 세 줄이 누락됐다. "Chapter 3 of The Political Unconscious looks at 'the novel', and reads the French novelist Honore de Balzac to illustrate his case."가 그것이다. 뭐 빠져도 대세에는 지장이 없지만(한데 굳이 누락시킬 이유가 있는가?), 디테일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 차라리 발췌역을 하는 게 나을 터이다(그나마 인문서들의 경우엔 덜한 편이고 실용서나 경영서들의 경우엔 공공연하게 발췌역이 자행된다. 그런 책들 돈 주고 산다는 것이 넌센스이다. 물론 발췌독을 한다면야 할말 없지만). 거기에 이어지는 인용문이 오늘의 하이라이트이다.

진실로, 사실주의를 정의하려고 한 수많은 진술들은 <돈키호테> 같은 소설의 원시적 선조들처럼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장했는데, 서사적 모방 혹은 사실적 재현이라 다양하게 불리는 과정은, (전통적 서사가 갖는 신성성을) 구조적으로 훼손시키고 탈신비화시키는 역사적 기능을 수행하는, 필수적인 것으로 부여받은 서사의 신성성의 패러다임 혹은 전 존재적 유산과 전통을 특정한 방식으로 해독한 것이다.

진실로 이해해보려고 여러 번 읽어보았지만 내게 남는 건 두통뿐이다. 제임슨의 원문 자체가 난삽한 건 물론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말도 안되는 문장을 갖다놓고 번역문이라고 우기면 곤란하다(역자는 대체 무슨 뜻으로 옮긴 것인지 물어보고 싶다. 편집자는 한쪽 눈을 감고 교정을 보는가?). 제임슨의 원문보다 난해한 문장을 어떻게 '해독'하라는 것인가?

Indeed, as any number of 'definitions' of realism assert, and as the totemic ancestor of the novel, Don Quixote, emblematically demonstrate, that processing operation variously called narrative mimesis or realistic representation has as its historic function the systematic undermining and demystification, the secular 'decoding' of those preexistng inherited traditional or sacred narrative paradigms which are its initial givens.

이 문장에 대해서는 저자가 이어서 3페이지에 걸쳐서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국역본은 40쪽에서 원서와는 다르게 인용문을 한번 더 반복해주는 '친절'까지 베풀었다. 한데 읽을 수 없는 인용문을 한번 더 읽는다고 이해가 되는지?). 그러니까 설혹 제임슨이 쓴 문장의 의미를 바로 캐치하지 못했더라도 로버츠의 분석을 따라가다 보면 내용 파악을 할 수 있게끔 돼 있다(뒤이어 이 문장에서 주어가 뭐고, 동사가 뭐고, 목적어가 뭐고 하는 내용이 자세하게 나온다).

한데 역자로서 불성실한 것은 그러한 저자의 '노고'조차도 발췌해서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문장 요소들을 분절해서 각각의 요소가 서로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밝히는 힘겨운 작업을 거쳐야만 이 모든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41쪽)고 해놓고 역자 자신은 그 '힘겨운 작업'에 동참하지 않았을 뿐더러 저자의 그 '힘겨운 작업'을 독자에게 전달해주지도 않았다.'옮긴이의 글' 말미에서 "이 책을 쓴 애덤 로버츠는 짧은 분량 안에 대단히 포괄적인 내용을 압축적이고도 명쾌하게 설명하여, 독자들을 단번에 제임슨 이론의 핵심으로 끌어들인다. 그 충실하고 명쾌한 내용이 충분히 이해되지 않거나 깊이 공감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적을 역자의 부족한 능력 탓이다."라고 적은 내용이 아무래도 역자 스스로에겐 충분히 이해되거나 공감되지 않은 듯하다.

Indeed, as any number of 'definitions' of realism assert, and as the totemic ancestor of the novel, Don Quixote, emblematically demonstrate, that processing operation variously called narrative mimesis or realistic representation has as its historic function the systematic undermining and demystification, the secular 'decoding' of those preexistng inherited traditional or sacred narrative paradigms which are its initial givens.

그럼 하나하나 따져보기로 한다. 번역문 말고 원문을, 저자 로버츠를 따라서(조금 더 자세하게 풀었다). 먼저 문장 전체 주어는 무엇인가? 'as any number of 'definitions' of realism'가 주부이고 주어는 'definitons'이다. 그리고 전체 동사는 동사는 'assert'. 그리고 'and as the totemic ancestor of the novel, Don Quixote, emblematically demonstrate'가 삽입절이고, that-이하가 'assert'의 목적절이다, 라고 처음에 보았었지만 이 문장에서 that은 접속사가 아니라 지시형용사이다. 거기에 준해서 내용을 정정한다.  

that processing operation variously called narrative mimesis or realistic representation has as its historic function the systematic undermining and demystification, the secular 'decoding' of those preexistng inherited traditional or sacred narrative paradigms which are its initial givens.

그리고 주절에서 'that processing operation'이 주어이고 'has'가 동사이다. 'has A as B'로 'A를 B로 갖고 있다'란 구문인데 A가 너무 길어져서 'as B'가 먼저 나온 형국이다. 그럼 A에 해당하는 거은 무엇인가? "the systematic undermining and demystification, the secular 'decoding' of those preexistng inherited traditional or sacred narrative paradigms which are its initial givens." 나머지 전체이다. 그럼, B(its historic function)에 해당하는 건 무엇인가? (1)the systematic undermining and (2)demystification, (3)the secular 'decoding' 세 가지이다. 그리고 이 명사(구)들이 전치사 of 를 통해서 뒤에 나오는 목적어들을 받고 있다.

그러한 구문 구조를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리얼리즘에 대한 정의들은... 서사적 모사라는 그 작동과정이 이러이러한 것을 (1)체계적으로 침식하고 (2)탈신비화하고 (3)세속적으로 '해독'하는 것을 그 역사적 기능으로 갖고 있다는 걸 확실하게 말해준다." 그렇다면, 번역문에는 어떤 착오가 있는가?

진실로, 사실주의를 정의하려고 한 수많은 진술들은 <돈키호테> 같은 소설의 원시적 선조들처럼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장했는데, 서사적 모방 혹은 사실적 재현이라 다양하게 불리는 과정은, (전통적 서사가 갖는 신성성을) 구조적으로 훼손시키고 탈신비화시키는 역사적 기능을 수행하는, 필수적인 것으로 부여받은 서사의 신성성의 패러다임 혹은 전 존재적 유산과 전통을 특정한 방식으로 해독한 것이다.

혼돈은 등위적으로 연결되어야 할 (1)the systematic undermining and (2)demystification, (3)the secular 'decoding'이 '역사적 기능'의 내용이란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비롯한다. 그리고 덧붙여 지적하자면 'emblematically'는 '필연적으로'가 아니라 '상징적으로'란 뜻이고, 'initial'은 '필수적으로'가 아니라 '최초의'란 뜻이다. 'preexisting'을 '전 존재적'이라고 띄워서 옮긴 건 (편집자의 오류로 보이는데) '전(前)'이라고만 해줬어도 오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장을 읽으며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란 과연 무엇일까? 반대로 제임슨이 만일 같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쓴다고 할 때 우리가 잃게 되는 즐거움은 무엇일까? '돈키호테의 둥장 이래 사물의 사실적 재현을 시도한 소설들은 실제로는 사실적 재현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명맥히 기반한 고대의 신성한 서사들의 가치를 훼손하는 방향으로 해독해온 것이다.''"(38-9쪽) 

(제임슨의 것이 아닌) 로버츠의 원문은 "Novels, from Don Quixote onwards, that have attempted a 'realistic representation' of things have not in fact been doing this, they have actually been undermining and 'decoding' the ancient sacred narratives on which they are distantly based."(8쪽) 여기서도 '명백히'라고 옮긴 'distantly'는 '간접적으로' '멀리'란 뜻이다('distintcly'와 헷갈릴 정도로 정신없이 번역했다는 말인가?).

그리고 다시 옮기면, "<돈키호테> 이래로 현실의 '사실적 재현'을 시도해왔다고 하는 소설은 실상 그러한 재현과는 무관하다. 소설이 실제로 한 것은 그 자신이 멀리 기원을 두고 있는, 고대의 성스러운 이야기들의 기반을 침식하고 '탈코드화'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최초의 인용문을 다시 옮기면: "리얼리즘에 관한 많은 '정의들'이 주장하듯이, 그리고 소설의 기원으로서 <돈키호테>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서사적 모방' 혹은 '사실적 재현'이라고 다양하게 불리는 그 작동과정은 과거부터 존재해온 전통적인 이야기나 최초에 관한 성스러운 이야기들의 패러다임을 체계적으로 침식하거나 탈신비화하고 세속적으로 '탈코드화'하는 일을 그 역사적 기능으로 갖고 있었다."(가독성을 위해서 얼마간 의역을 했다.)

이제 정리해보자. "이상적인 독자라면 이 모든 과정을 감당할 만큼 머리가 좋겠지만, 그보다 열등한 독자는 해독 과정을 마치기도 전에 단서를 잃고 헤매며 같은 문장을 읽고 또 읽게 될 것이다. 어쩌면 제임슨은 이렇게 자신의 글을 읽고 또 읽도록 의도했을 수 있지만, 그럼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인내심을 잃고 이해 자체를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41쪽) 저자가 먼저 던지는 질문이지만 과연 그런 난해함이 (제임슨이 입만 열면 반복하는) 마르크스주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다른 한편으로 이런 문장을 읽고 느낄 즐거움은 '내가 이 어려운 걸 다 읽고 이해했어'라는 식의 자기만족적 즐거움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 비싸다!

이제 기운이 떨어져서 더 주절거리지도 못하겠다. 한 가지만 더 지적하자면, '왜 제임슨인가?'의 맨 마지막 인용문까지도 오역으로 점철돼 있다. 가령, "post-traditonal daily life and its bewilderingly empirical, 'meaningless,' and contigent Umwelt"를 당신이라면 어떻게 번역하겠는가? "탈전통적인 일상적 삶과 그 정신없을 만큼 경험적이고 '무의미하며' 우연적인 환경세계" 정도 아닌가. 국역본은 "탈전통적 일상생활, 당혹스러울 정도로 제국주의화되고 의미가 상실되었으며 우연적인 환경"이라고 옮겨놓았다.

"현재 프로이트와 라캉, 지젝의 글 등을 읽으며 서사를 둘러싼 행동의 비밀을 이해하고자 애쓰고 있다"는 역자는 먼저 이러한 말실수들을 둘러싼 오역의 비밀들을 먼저 이해하려고 애를 썼으면 좋겠다...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이라... 제임슨은 건너뛰란 얘기로군...

07. 02. 07.

P.S. 사실 프레드릭 제임슨을 건너뛰면 재미있는 건 많다. 가령, 일반인들에겐 프레드릭보다 유명한 포르노배우 제나 제임슨은 어떤가?(사실 외설적인 오역서를 읽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은가?) 

제임슨을 검색하다 보니 학교도서관에 <프로노스타처럼 사랑하는 법>(2004)이란 책도 들어와 있는 걸 발견했다. 제나 제임슨의 자서전이며 우리에겐 <게임>(디앤씨, 2006)으로 소개된 닐 스트라우스가 대필한 책이다. 이전에 한번 소개한 바 있지만, <포르노스타처럼 돈 버는 법>(2006)은 그 이후에 쓴 책이다. 프레드릭을 읽느니 차라리 제나를 당신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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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07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허.. 바로 이번주부터 정치적 무의식 세미나 시작하는데요. 번역된 제임슨의 두 책 신비평 비판서(언어의 감옥)랑 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는 들춰보기는 했는데, 그렇게 '구린' 문체였다는 기억은 없는데. 정치적 무의식 걱정되네요;;
영문학도 3명과 함께 하는 거라서.. 오 마이 잉글리쉬! ㅎ

로쟈 2007-02-07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명'에 미리부터 주눅들 필요는 없는 거죠. 사실 모든 문장들이 욕나오는 건 아니고 군데군데 요령부득일 따름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지젝이나 데리다는 얼마나 평탄한 것인지요...

yoonta 2007-02-08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사에서는 왜 저런 책 번역을 로쟈님같으신 분들에게 부탁하지 않는건지 (아니면 로쟈님이 거부하시는건가?) 그런데 empirical같은건 그렇다쳐도 제임슨의 원문은 난삽하기 정말 그지없네요. 번역자가 혼동할만도 합니다.

로쟈 2007-02-08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지젝 등을 비롯해서 여러 건의 번역 청탁을 받긴 했지만, 현재 맡고 있는 일들 때문에 고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인건비 문제도 있지만). 제임슨의 경우 달리 악명이 높았겠습니까!..

yoonta 2007-02-08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사에서 인건비?를 좀 적절하게 책정해서(로쟈님이 큰 욕심부릴분 같지도 않고^^) 청탁하면 저희같은 독자들에겐 보다 양질의 번역본을 읽어볼수있다는 혜택이 생길텐데..안타까울따름이네요.

로쟈 2007-02-08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다시피, 인문서 번역은 약간의 명예욕을 충족시켜준다는 걸 제외하면 3D업종이죠. 힘들고 대우 못 받고, 인정 못 받는. 그런 상황에서 자꾸 출간되는 오역서들이 상황이 더 악화시키고 있다는 게 유감스러울 따름입니다...

maysoony 2007-02-09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잔데요, 좋은 지적 감사드리지만, 좀 악의적인 지적인듯 하네요. 먼저, 제임슨 원문의 해독 어려움이야 잘 아실테니, 제가 잘했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전체 맥락에서 보면 지적하신 부분은 해독이 어려워야 저자의 뜻이 살아난다고 보고 일부러'두통만 나도록' 번역한 것입니다. 쉽게 쓸 수 있는 내용을 저토록 어렵게 쓰는 제임슨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묻는 부분이니까요. 그 밖에 지적해주신 오역 부분은 물론 부주의 때문에 발생한 것이긴 하지만 본 번역서의 가치를 떨어뜨릴만큼 심각한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누락된 부분에 대해서는 (실제로 누락이 있었는지, 그것이 어느 과정에서 일어났는지 확인이 필요하지만) 진심으로 사과 말씀 드립니다. 적어도 이 책이 단칼에 쓰레기 취급받을 만큼 형편없는 오역은 아니라는 말씀은 드리고 싶습니다. 좀 더 신중한 리뷰 부탁드립니다. 님의 말대로 3d업종에 종사하면서 제대로 인정도 못받는 상황에서 이런 식의 터무니없는 부당한 악평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7-02-10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터무니 없는 부당함'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반박해주시면 좋겠습니다. (1)일부러'두통만 나도록' 번역하시느라 수고하셨는데, 어려운 말이어서 머리 아픈 것과 말도 안되기 때문에 머리가 아픈 건 종류가 다릅니다. (2)부주의가 '번역서의 가치를 떨어뜨릴 만큼'은 아니라고 하셨는데, 제가 읽은 바로는 계속 나오더군요. 그런 '부주의한' 오역들이 어느 정도 나와야지 번역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지 기준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3)'누락된 부분'에 대해선 '실제로 누락이 있었는지' 확인이 필요하신가요? 원서를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으셨다면 바로 확인되는 거 아닌가요?.. 아시다시피, 안면도 없는 처지에 '악의적인' 지적을 제가 굳이 할 필요가 있는지요? 저는 제 돈 주고 산 책의 '품질'에 대해서 고발하고 있을 뿐입니다. 보다 자세하고 성의있는 반박을 부탁드립니다...

cretois 2007-02-11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보아도 역자가 원서를 제대로 독해못한 케이스입니다. 절판시키거나 다시 번역하세요

로쟈 2007-02-11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어본 2장까지 오역은 지속적으로 나옵니다. 성의도 없을 뿐더러 기본 독해력도 의심스러운 대목들이 너무 많은데, 역자는 무엇을 '번역'이라고 생각하며 무엇이 '터무니없는 부당한 악평'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2007-02-12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12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좋은 지적이십니다. assert가 타동사여서 목적어/목적절을 뭐라도 갖다 붙이려고 했고 사실 인용문이라 'that'이 지시형용사로 쓰일 수 있다는 건 미처 고려하지 못했네요. <정치적 무의식>의 원문을 보니까 앞문단에 process 얘기가 나옵니다. 확인해보지 않은 불찰입니다(구문분석은 잘못됐지만 그래도 번역은 틀리지 않았네요)...
 

제목은 좀 거창하지만 내용은 '문예지 휴간, 폐간 잇따라'란 부제에 그대로 들어 있다. 뜻밖인 건 지난 겨울 창간 5주년 기념호를 낸 <문학판>이 무기한 휴간을 결정했다는 소식인데, 그 기념호에 5주년을 기념하며 앞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기대한다고 한 여러 편의 축사를 읽은 나로선 좀 황당하기까지 하다. 내부사정이 갑작스레 악화되었을 리는 없고 '기념호'란 게 마지막 불꽃놀이였나 보다. 물론 폐간은 아니지만 당분간도 아닌 '무기한' 휴간이라니. <비평과 전망>이 소식이 뜸한 지는 오래이고 <문학과 경계> 또한 인공적으로 수명을 연장하고 있는 게 문예지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문학잡지가 너무 많다. 더불어, 계속 창간된다. 그리고 폐간된다. 일설에는 작가/필자들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으로 (적자를 감수하고) 잡지들을 발간한다고 하는데, 그러한 단행본 출판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문예지가 시장에서 생존/자립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노릇이다. 이러나저러나 여건이 그러하다. 변신하거나 전사하거나, 선택지는 많지 않은 듯하다.

 

컬처뉴스(07. 02. 06) 담론의 공간이 불안하다

도서출판 열림원에서 내고 있는 계간 문예지 『문학판』이 최근 재정적 어려움으로 무기한 휴간을 선언했다. 소장 평론가들이 주축이 돼 지난 1999년부터 의욕적으로 발행해왔던 반년간지 『비평과 전망』 역시 사실상 폐간 상황에 처해있으며, 계간 『문학과경계』는 재정난으로 ‘2006년 겨울호’를 내지 못하다가 뒤늦게 편집인과 문인들이 십시일반 재원을 마련해 최근 겨울호를 발행했다. 

지난 2001년 겨울호로 창간된 계간 문예지 『문학판』은 ‘문학의 상업화에 맞선다’는 기본 취지 아래 대중적 감각과 지성적 이해를 결합시키며 평단에서 소외된 신인작가의 전위적 작업을 부각시키겠다는 포부로 시작됐다. 지난해 겨울호까지 통권 21호를 출간했으나 어려운 경제적 여건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무기한 휴간을 결정한 것이다.

반년간지 『비평과 전망』은 2000년 이후 문단을 달군 ‘문학권력 논쟁’의 복판에 섰던 문예지로, 이명원, 고명철, 홍기돈, 엄경희, 최강민, 오창은 등 소장평론가들이 의욕적으로 현장비평의 장을 열었지만 역시 재정적 어려움으로 통권 9호(2005년)에서 멈춰있다.

통권 23호까지 나온 『문학과경계』는 ‘진보 담론의 새 공간을 제공하자’는 모토 아래 이진영 시인이 지난 2001년 가을 사재를 털어 창간한 잡지다. 지난해 가을 이진영 사장의 건강이 나빠지고 잡지사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부득이 폐간신고를 내기도 했지만 잡지를 이어가지는 데 뜻을 모은 편집인들과 문인들의 도움으로 뒤늦게 겨울호를 낸 것이다(*알라딘에는 21호까지만 올라와 있다).

과거 ‘문예지’는 신인작가 등단의 장이자 문학논쟁의 전초기지로 문단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또 87체제 이후에는 군부에 의해 폐간되거나 휴간됐던 문예지들이 복간되면서 폭발적으로 ‘문예지’가 활성화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90년대 들면서 ‘한국문학의 위기’가 공공연해지고 외국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국내 작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예지에 대한 관심은 급격히 낮아졌다. 또 출판의 상업화와 물리면서 규모 있는 출판사에서 발간하고 있는 문예지들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으나 독자층의 감소와 함께 재원 마련이 어려워진 독립적인 문예지들은 문예진흥기금에 의존하거나 자체조달 방식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앞서 언급한 문예지들처럼 휴간하거나 폐간에 이르게 된다.

『비평과전망』 편집주간인 이명원 평론가는 “문학매체 안에서도 문학권력과 같은 카르텔구조가 성립되면서 자본을 동력으로 작가를 포섭하고, 작가들도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결국 마이너 매체들도 출판시장 경쟁에 살아남기 위해 메이저 매체들의 방식을 따라가게 되고, 마이너 매체들이 메이저와 차별성을 갖지 못하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때문에 독자적 시각을 펼치는 독립매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독립적인 재원구조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하지만 어디서?). 하지만 현재의 출판시장에서 작품출판과 분리된 독자적 매체가 재원을 마련할 길이 막막한 것도 사실이다(*그런 의미에서 문예지 또한 지극히 기생적이다. 고상한 발언과 주장들을 앞세움에도 불구하고). 또한 이러한 배경에는 문예지와 대형 출판사 간의 ‘공조’로 창작과 비평의 폐쇄적인 순환구조가 만들어지면서 독립 문예지들의 입지가 더욱 좁아진 측면도 있다.

기존 문예지와 ‘차별성’을 내세우며 등장한 독립 문예지들이 이 같은 출판시장의 거대 자본에 휩쓸리면서 방향을 잃고, 소멸되어가는 모습들이 오늘 우리 문학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고 안타깝다(위지혜 기자).

겸사겸사 기사에서도 거명된 <비평과 전망>의 편집주간 이명원 평론가의 인터뷰 기사를 덧붙인다(며칠전 'TV, 책을 말하다' 이문열 편에 출연하기도 했다). 컬처뉴스의 신년인터뷰 연재 중 한 꼭지였는데, '담론의 공간'뿐만 아니라 직장(=밥통의 공간)마저 불안한 시대를 문학평론가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잠시 들여다 볼 수 있다.

지난해 서울디지털대 교수로 재직하다 학내 비리를 비판해 해직된 이명원 문학평론가

컬처뉴스(07. 01. 11) 집단적 '희망' 상실을 뛰어넘어야 한다

<컬처뉴스> 신년인터뷰 네 번째 손님은 이명원 전 서울디지털대 교수이면서 문학평론가다. 굳이 ‘전 디지털대 교수’의 직함을 사용한 것은 지난해 이 평론가가 재직했던 서울디지털대학교는 학내 비리를 비판해 온 이 교수를 재임용에서 탈락시킴으로 이 평론가에게 ‘해직교수’라는 영광의(?) 명찰을 달아줬기 때문이다.

대학 측은 이 평론가의 재임용 탈락 사유로 “이 교수가 학내 인터넷 게시판에 확인되지 않은 주장을 올렸고, 언론매체에 쓴 칼럼을 통해 학교의 명예를 훼손한 해교행위를 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불법행위를 한 학교가 그 시정을 요구한 교수를 재임용에서 탈락시킨 것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 것은 물론 스스로 비판적 지성의 무덤임을 인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평론가는 현재 대학을 상대로 ‘소송’ 중에 있다. 그를 만나 이번 해직 문제에 대한 심경과 올 한해 계획들에 대해 들어봤다. 

<컬처뉴스> 독자들에게 신년 인사 한마디 부탁한다.
 
올 한 해에는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 의미 있게 충전되는 날들이 지속되기를 기원한다.

지난해 서울디지털 교수 해직 문제로 힘들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사건이었는지 간단히 설명해 달라.

재직했던 대학에서 2006년 한 해 동안 대학 정상화와 민주화를 촉구하는 일련의 상황이 전개됐었다. 2005년 부총장에 의한 교비횡령 사태의 ‘후폭풍’이었던 셈이다. 대학운영의 투명성과 민주화를 요구한 교수협의회와 총학생회의 총장 불신임 선언 이후, 대학에 대한 감사를 촉구했었고, 사이버대학의 근거법률을 일반대학과 마찬가지로 고등교육법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법률 개정 운동도 있었다. 대학당국은 이를 문제 삼아 교수협의회 소속 교수들에 대한 재계약거부와 중징계를 단행했고, 현재도 징계는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교수협의회 회원이었던 나는 다른 교수들과 함께 재임용에 탈락되는 기묘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그렇다면 지금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은?

서울 서부지법에 교수지위확인 소송을 제기했고, 이와는 별도로 지위확인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가처분 소송 1심에서는 패소했는데, 패소의 근거가 현행 법률상으로는 사이버대학 교수의 경우는, 고등교육법에 규정된 교원의 권리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가처분 소송의 경우는 고등법원에 항고해서 계류 중이고, 현재는 서울서부지법에서 본안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1월 26일에 공판이 예정되어 있으니 3월 안에는 판결이 날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마음이 착잡한 상태다. 그러나 나뿐만 아니라, 최근 들어서는 많은 대학교수들이 학내분규 과정에서 징계와 해임을 거듭하고 있다. 한국의 대학사회가 민주적 언로를 차단당하는 시대착오적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을 볼 때, 지성의 위기가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라는 체감을 하고 있는 중이다.

동감한다. 개인적으로 새신랑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일이 터져 걱정스러웠다. 혹 결혼생활에 지장은 없나?

신혼여행을 다녀오니, 재임용에 탈락했다는 이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그때는 잘못 도착한 속달우편처럼 느껴져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이런 상황 자체가 나의 일상에 치명적인 것이 되지는 않는다. 반대로 나는 이런 상황을 거치면서, 사유하는 일과 경험하는 일의 차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실직을 하고 보니까, 또 계약제 교수의 현실을 몸소 체험해 보니까, 노동유연성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구인지 또한 지성의 독립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과거에는 예를 들면 비정규직 문제라든가 관료제의 불합리성, 지식생산 구조의 허약성을 머리로 생각한 수준이었는데, 뭐랄까 이번 사태를 거치면서 체화된 고민을 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불행한 상황이긴 하지만, 나는 오히려 ‘문학에 대한 사유를 깊이 있게 하는 안식년이다’라고 낙천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역사적으로 좋은 지식인들은 다들 ‘파문’의 주역이 아니었던가. 이것이 나의 ‘스스로 힘내기’의 방식이다.

처음에 이 평론가의 ‘해직’ 소식을 듣고 ‘고난의 지식인’ 반열에 오른 것이 아닌가 하고 축하했던 것으로 떠오른다. 여전히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문학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지난 2006년도 ‘문학의 위기’에 대한 논란이 뜨거웠다. 현장에 몸담고 있는 평론가로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문인의 입장에서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문학의 위기라기보다는 더 넓게는 문화예술의 전면적인 위기인 듯하다. 크게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문화의 게토화 현상 때문이겠지만, 시민들이 이른바 삶에 대한 느린 성찰과 반성을 요구하는 문화예술을 향유할 만한 여유를 상실해가는 것이 더 큰 문제인 것 같다. ‘희망이 없는 가난’도 참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되는데, 지금보다 절대적으로 가난했던 과거에 문학을 포함한 예술적 성찰에 시민들 자신이 치열하게 몰입했던 것을 보면, 현실에 대한 시민들의 집단적인 ‘희망’의 상실이야말로 문화예술 위기의 주요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를 포함한 문인과 예술가 자신의 이완된 작가의식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쓴다는 행위, 창조한다는 행위에 대한 자기화된 예술론을 어쩌면 우리 스스로 갖고 있지 못한 것이 아닌가. 또 공적 소통 체계 안에서의 문화예술의 존재근거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이 약화된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의 자동화된 글쓰기와 예술행위에 나르시시즘적으로 몰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들이 들곤 하는 것이다.

문학의 위기를 넘어 문화예술 전면적인 위기를 말했는데, ‘위기’의 원천에 대해 ‘비평이 제 구실을 못하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아웃사이더 비평계의 주자로서 ‘비평’의 현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비평 역시 방향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다양한 해석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그것들이 독자들에게는 지식인들의 ‘은어체계’처럼 느껴지는 듯도 하다. 내 생각에는 한국 문학비평이 ‘육성의 언어’를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 위기의 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정제되고 발랄한 언어감각은 있는데, 그것이 비평가 개인의 삶과는 무관한 층위에서 개념어들의 홍수로 귀착되고 있는 듯한 감도 있다. 비평 역시 매력적인 읽기의 풍속이 가능해야 할 텐데, 그 점에서 읽히면서도 감동적인 비평적 형식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위기' 속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올 한 해 문학계에 바라는 점이 있는가?

작은 글쓰기도 좋지만 큰 의제를 생산해내는 젊은 작가들이 출현해 주었으면 좋겠다. 1970년대에는 황석영이나 조세희, 최인훈, 이청준 같은 청년 작가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문인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오늘의 젊은 문학은 과연 성숙한가. 나는 이 점에서 약간 회의적이다. 작가들이 나의 회의를 불식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올해 계획하는 일이나 준비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말해달라.

2007년은 중요한 해가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대표적인 지식인들을 좌우의 진영과 무관하게 인터뷰를 하고, 그들의 담론을 체계적으로 분석해 볼 생각을 하고 있다. 한 언론사에서 그런 기획을 비공식적으로 제안한 바 있는데, 생각해 보니 흥미로운 기획처럼 느껴졌다. 물론 아직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다.


 
국문학자로서 본연의 연구도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이다. 2006년 한해는 이런저런 복잡한 삶의 형국 속에서 공부다운 공부를 못했다는 생각인데, 2007년은 좀 달라져야겠다. 내가 속해 있는 민족문학연구소나 포럼X와 같은 연구모임을 중심으로 좀더 성실한 연구자와 비평가의 자세를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든다. <비평과전망>의 진로에 대해서도 사실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과감한 해체냐 아니면 후배세대로의 이월이냐 이런 고민이다. 또 한 가지는 과거에 몇 권의 책을 낸 바 있는데, 2007년에는 스스로 만족할 만한 책의 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겨울방학 동안에 책을 한권 쓸 생각인데, 원고가 끝나봐야 알 것 같다.

2007년, 우리 사회에 대한 새해 희망이 있다면?

진보적 지식인 사회의 이완과 무력감이 커가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나와 같은 세대인 30대 중후반의 젊은 지식인들이 한국사회의 진보적 대안을 만들기 위한 공동체를 구성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우리 세대들은 이전 세대들에 비하자면 연대의 경험이 미약하고, 사회적 실천에서 다소 소극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또 과거처럼 한 시대의 의미 있는 지적 담론을 생산해내는 데 다소는 방관적이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포스트 386 어쩌구 하는 표현을 들을 때면, 사실 이게 무슨 세대개념이냐 하는 생각도 드는데, 그것이 문학이든 또 어떤 것이든 일단 장르나 실천의 장을 뛰어넘어, 한국사회의 현실을 고민해 보는 그런 장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정리 위지혜 기자) 

07. 02. 07.

P.S. 비슷한 연배인 탓에 생각하는 나로선 공감하는 바가 많다(칠공년 개띠면 동생뻘이긴 하지만). 차이라면 평론가가 훨씬 진지하다는 것 정도(나는 대개 반어적이다). 관심있으신 분은 문학평론가 이명원과 퍼슨웹과의 인터뷰 http://www.personweb.com/sub10/lee_mw/ymw1.html 도 읽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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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07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사실 시장에 의존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은 사실이죠. 저 같은 전공자 또는 지망생도 계간지 2개 월간지 1개 겨우겨우 보는 것이 고작인데.. 나머지는 중요한 글 실리지 않으면 안 보고, 볼 수도 없는데. 도서관들이 많이 구입해주고 그러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많을 필요가 있나, 어떻게 각 문예지들은 구분되는지를 다시금 반성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나비80 2007-02-07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배 위지혜 기자가 선배 이명원 평론가를 인터뷰 했군요.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의 이야길 보니까 더 헛헛한 느낌입니다. 얼마 전 이명원 선배 담배 피우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긴 했습니다. 그래도 저렇게 씩씩하게 생각하시니 다행입니다.
계간지가 너무 많다고 하나 둘만 남기자면 쉽게 <창비>나 <문지>정도만 떠올릴텐데 그것도 문제가 되겠지요. 소장 평론가들이 의욕적으로 책을 묶어도 1000부 밑으로 마감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자본의 입장에서 그걸 연명시키는 것도 여간 곤욕스러운 일이 아닐겁니다. 군소 계간지들이 기존의 담론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담론을 생산하는 전초기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게 근본적인 자구책이기도 할테고요. 기인 님이 말씀하신 구별짓기 전략도 염두에 두어야겠지요.

니브리티 2007-02-08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판의 내부사정은 3년전부터 안좋았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열림원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데까지 한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좀 우울한 소식이네요. 등단 후 1년반만에 첫 청탁을 받은 곳도 문학.판이었고, 첫 소설집을 낸 곳도 문학.판이었고, 계절마다 뒷풀이할 때는 꼬박꼬박 참석했던 곳도(물론 불러줬기 때문이지만) 문학.판이었는데 말이죠. 그래도 <한국문학>처럼 휴간과 재출간을 거듭하면서도 꾸준히 나오는 곳도 있으니 조만간 재출간되리라 기대합니다. <문학과경계>에도 제 후배가 편집위원으로 있어서 사정은 잘 아는데, 어쨌든 겨울호는 서점에서는 구하기 힘들지 싶습니다.... 이 상태면 문예지가 문학생산을 담당하던 때에서 서서히 멀어지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드네요. 장기적으로는 일본처럼 <장편/단행본 시장>과 <동인지>체제로 구분되지 않을까요. 전자는 일단 팔리는 쪽에 무게를 실을 것이고, 후자는 문학성(?) 위주로 말입니다...

로쟈 2007-02-08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었군요. 대개 또 위기가 기회이기도 하니까 좀 다른 방식의 '생존'이 모색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배를 뒤집는 건 중국어에서 '번신'이라고 하던데, 번신하거나 변신하거나...
 

작년말인가 올초인가 '조중걸 교수와 함께 열정적 고전 읽기' 시리즈가 10권짜리로 갈무리되어 언론에 주목을 받은 바 있고, 나도 관련 페이퍼를 쓴 적이 있다. 그리고 최근에 같은 저자의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프로네시스, 2007)가 '지식 전람회' 시리즈의 한권으로 출간됐는데, '키치'와 관련한 문헌이 드물던 차에 요긴한 책이 한권 출간됐다는 인상을 받았다(물론 '지식 전람회' 시리즈가 대중적인 인문학을 표방하고 있는지라 말 그대로 '전람회'에 그치는 듯싶은 책들이 더러 있지만). 우연히도 이 책에 관한 리뷰들을 검색하다가 읽게 된 글 두 꼭지를 자료삼아 옮겨놓는다. 하나는 한겨레21에 실린 서평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강유원씨가 미디어오늘에 실은 'Book소리'이다. 저자 조중걸씨에 대한 궁금증을 몇 가지 제시하고 있다.

한겨레21(07. 02. 02)  우리의 값싼 낭만에 대하여

<열정적 고전 읽기>로 놀라운 해박함과 독서 편력을 보여줬던 조중걸 교수가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프로네시스 펴냄)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은 묵직한 문체로 현대사회의 키치에 대해 매우 독창적인 성찰을 하고 있다. 조 교수는 키치를 단순한 ‘그림 쪼가리’가 아니라 근대 이후 우리 삶의 태도와 세계관으로 확장시킨다. 그리고 근대 이후 예술사와 철학사를 키치에 대한 다양한 작용과 반작용으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과연 키치란 무엇일까. 지은이의 비유를 빌리면 키치는 고전예술과 통속예술 사이에서 ‘양의 탈을 쓴 늑대’(고급예술의 탈을 쓴 저급예술)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고전예술은 감상을 위해 상당한 양의 교양과 긴장을 필요로 한다. 좋은 예술일수록 거짓 기만이나 타협을 하지 않고 진실을 보여준다. 반면 통속예술은 가장 저급한 현실 도피이고 오직 소비를 위한 문화이다. 산업혁명 이후 탈진할 정도의 노동시간에 짓눌린 시민들은 싸구려 감상을 통해 숨을 돌렸다. 키치는 위선적인 통속예술이다. 싸구려 감상에 호소하면서도 고급예술에서 한자리를 요구한다.

고급예술이 작품과 독자의 직접적인 만남을 전제한다면 키치는 작품과 독자 사이에 ‘환상’이 끼어든다. 예컨대 음악이 그 자체로 감상되는 게 아니라 헤어진 옛 애인과의 추억을 상기시킨다든지, 어떤 그림에서 어린 시절의 경험을 떠올린다든지 하는 식이다. 이것을 지은이는 키치가 불러내는 ‘이차적 눈물’이라 부른다. 키치는 이런 식으로 작품과 독자를 직접 대면시키지 않는 이중적 예술이다. 키치의 가장 큰 해악은 현실 옹호적이라는 점이다. 키치 안에서 세계는 늘 조화롭고 통일적이다. 키치는 대중들이 실존과 불안을 직시하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세계의 가능성을 닫아버린다. 이것을 슬로건으로 표현하자면 “아아, 인생은 아름다워라”이다. 지은이는 프랑크푸르트학파보다 훨씬 과격한 대중문화의 적이며, 키치문화의 고발자다.

키치는 지극히 근대적인 예술이다.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예술에서만큼은 엄청난 해악을 끼쳤다. 산업혁명 이후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이제 자아실현은 소비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밖에 없다. 진정한 예술은 대중에게 불친절하며 고도의 집중력과 몰입을 요구한다. 그러나 키치는 편안하고 달콤한 예술이다. 혹은 대중의 슬픔이나 우울을 싸게 팔아먹는 시큼한 예술이다. “키치는 민주적이고 중간적이고 조촐한 것, 즉 프티부르주아적인 것이다.”

근대적 이성의 파탄은 키치를 번성시키는 토양이다. 신을 ‘불가지’의 영역으로 추방한 이성은 두 번의 세계대전과 함께 몰락했다. 합리적 세계라는 신념은 여지없이 부서졌다. 키치는 이런 절망의 토양에서 자라났다. 키치는 가장 나쁜 방식으로 나와 세계의 화해를 주선한다. 거짓된 위안, 달콤한 사탕발림, 위선의 낙원…. 키치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세계는 실재하지 않는다. 다만 실재하는 척할 뿐이다. 이 시대에 키치는 예술에 안주하지 않고 다양한 사물들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상품의 사용가치와 아무 상관없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상품광고들, 온갖 양식들이 비빔밥처럼 병렬된 강남의 건축물들, 고객을 헛된 꿈으로 인도하는 백화점 등이 그것이다.

지은이가 제안하는 키치의 개념을 이해했다면, 이제 우리는 지은이를 따라 좀더 복잡하고 내밀한 예술사로 여행을 떠나야 한다. 키치에 저항하는 다양한 근현대 예술사조들. 다다이스트들은 예술의 인습성과 구태의연함, 자기만족, 부르주아적 허위의식 등에 내재한 키치적 요소들을 철저히 파괴하려고 했다. 현대미술의 기하학주의는 키치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가식적 진지함을 벗겨내려 한다. 인상주의자들은 인습으로 굳어진 시각상을 해체한다. 인상주의는 부르주아들이 세워놓은 가치의 전복이기 때문에 부르주아들의 혹독한 반발에 직면해야 한다.

지은이의 논의는 키치를 해체하고 넘어서려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한 기법들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몰입과 카타르시스를 넘어서는 브레히트의 소격효과가 있고, 자신을 부정하는 예술인 메타픽션과 실체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네오리얼리즘 등이 있다. 후반부의 복잡한 논의에 길을 잃은 독자라면 지은이가 서두에 제기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보는 게 좋겠다. “언제까지 값싼 거짓 낭만과 삶의 역겨운 기만적 행복 속에 몸을 담그고 있을 것이냐.”(유현산 기자) 

미디어오늘(07. 02. 04) 석학에 관해 궁금한 두세 가지

대형서점에 가보면 ‘논술’이라는 항목에 꽂혀있는 책만 서너 서가를 넘는다. 그것은 공식적으로 분류된 경우이고, 저자 서문이나 띠지(책표지에 두르는 광고지)에 논술 관련임을 알린 것까지 치면 훨씬 더 많은 책들이 그 부류에 속하게 된다. 논술관련 책을 써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베스트셀러로 만들어 볼 생각이 있는 사람이나 출판사는 서점에 가서 서가를 한번이라도 둘러보는 게 좋을 듯도 하다. '저 많은 책들 틈에 끼어들 내 책을 어떻게 사람들이 뽑아들고 계산대로 가게 할까’를 고민하면서 말이다(*강유원도 그이들에 포함되는 것인가?).

논술 책에 가담하는 필자들도 정말 다양해졌다. 항생제를 많이 먹으면 내성이 생겨서 웬만한 약은 약발을 받지 않듯이, 중고등학생에게 논술을 가르치기에 딱 적당한 이들이라 여겨지는 사람들만이 아닌 이른바 석학들까지도 가세한 형국이다. 지난 연말 그 많은 논술 책 틈에 10권짜리 참고서가 덧붙여졌다. 띠지에 ‘생각의 폐활량을 높여라!-논술 달인을 위한 비밀 레시피’라는 문구를 단 <조중걸 교수와 함께 열정적 고전 읽기>가 그것이다.

어느 인터넷 서점에서 찾아본 저자 소개는 다음과 같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재학 중 프랑스로 유학하여 파리 제3대학에서 서양문화사와 서양철학을 공부했다. 미국 예일대학에서 서양예술사(미술사·음악사·문학사)와 수학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With a View to George', <영상의 시대, 관념의 시대> 등이 있다.”

“논술 달인”을 만들기 위한 턱없이 강한 처방처럼 보였다. 공부라는 게 수준과 단계가 있어 그에 알맞는 선생에게 배우는 게 가장 좋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그의 저서 'With a View to George'라는 책을 외국서점에서 찾아보았다. 내가 검색을 잘못한 탓인지 찾을 수 없었다(*나도 검색해봤지만 찾지 못했다. 하긴 모든 책이 다 검색되는 건 아닐 테니까).

그가 쓴 또다른 책인 <영상의 시대, 관념의 시대>를 검색해 보았다. 그랬더니 1999년에 개마고원 출판사에서 펴낸 <인물과 사상> 11권에 같은 이름의 논문이 보였다. 거기서 몇 가지를 옮겨보면 이렇다. “키취, 그 이해와 극복-키취는 우리 마음 속에 있다(제10권)” “영상의 시대-영상의 시대, 관념의 시대 3부작(제11권)”, “관념의 시대 / 조송배의 ‘영상의 시대 관념의 시대’ 4부작(제12권)”(*강유원씨 덕분에 알게 된 건데, 나는 '조송배'씨의 글들을 이전에 읽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글을 쓴 이는 조중걸이 아니라 조송배였다. 개마고원 출판사의 저자 소개를 보았다. “파리 제3대학과 예일대학에서 예술사를 전공했으며,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캐나다에 체류하면서 예술사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With a view to George'가 있다.” 나는 조중걸과 조송배가 동일 인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올해 초 나의 궁금증을 해소해줄 만한 인터뷰 기사가 어느 신문에 실렸다. 그 기사에 따르면 그는 “프랑스 파리3대학(소르본) 유학, ‘스승으로 만나 친구로 헤어진’ 조르주 뒤비의 지도로 서양예술사와 서양철학을 전공, 미국 예일대로 건너가 문학사와 수리철학으로 2개의 석사학위, 미술사 음악사 수리철학으로 3개의 박사학위를 획득”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인터뷰에는 내가 궁금했던 것들, 이를테면 'With a View to George'라는 책은 언제 어디서 출간된 것인지, 그게 그가 썼다고 하는 “몇 권의 대학 교재(영문)”인지, 조르주 뒤비는 서양중세사 전공자인데 어떻게 그 밑에서 서양예술사와 서양철학을 전공할 수 있었는지, 1950∼ 60년대에는 리용, 브장송, 엑상 프로방스 대학에서 교수를 하다가 70년대에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가 되었던 뒤비가 과연 80년대에 파리 3대학에서 학생을 지도하기는 했었는지, 예전에 <인물과 사상>에 쓴 글들이 있는데 그건 어찌된 것인지 등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자질구레한 것들이지만 궁금하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강유원)

07. 02. 06.

 

 

 

 

P.S. <열정적 고전 읽기>는 저자의 이력을 표나게 내세웠던 책들인 만큼 그 사실 여부가 궁금한 것도 사실이다. 지난번 페이퍼에서 살짝 언급했듯이 가령 '미술사 음악사 수리철학'이라는 각기 다른 분야의 박사학위를 세 개나 받는 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한지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세 분야의 강의를 들어봤다, 정도는 가능하겠다). 강유원씨는 나보다 더 강렬한 궁금증을 가졌던 모양으로 덕분에, 조중걸씨가 조송배씨이며 예전에 <인물과 사상>에 몇 편의 글을 썼다는 이력을 알게 됐다(당시 <의미만들기와 의미찾기>(개마고원, 2001)의 저자 '조흡' 교수와 함께 기억에 남는 외부필자였다). 조송배/조중걸 교수의 '키치론'도 <인물과사상> 10호에 게재된 바 있는데, 이번에 나온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는 그 확장판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 필자는 이렇게 적었다. 

키치하면 우선 연상되는 게 시골이발소 그림이다.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물레방아가 있는  풍경, 고풍스런 중세건물,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성모 마리아 상 등등. 요즘은 진부한 이발소 그림 대신 경음악 메들리로 편곡된 베토벤 교향곡, 뉴에이지, 판타지 소설과 영화 따위로 바뀌었다. 적당히 아름답고 감미로우며, 부드럽고 평이해서 오로지 안락함만이 느껴지는 키치. 단순성의 미학. 시큼하고 느끼한 그것.(...) 키치는 나름대로 고상함을 가장하고 있어 통속 대중예술과는 차원을 달리 한다. 하지만 감상하는데는 굳이 고통스런 훈련,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치 않다. 한눈에 명확하고, 쉽게 각인 될 수 있도록 인상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키취는 민주적이고 중간적이고 조촐한 것, 즉 프티부르주아적인 것이다. 키취는 단지 숫자만을 고려하며, 절대 다수의 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민주적·공리적 예술양식이다. 고도의 집중과 오랜 훈련을 요구하는 모욕적인(?) 고급예술과는 반대로 키취는, 감상자의 마음에 스미며 그 달콤함(때로는 시큼함)으로 추근댄다. 키취는 독창성과는 반대의 예술양식이고, 탁월함에 대한 범용함의 승리이며 천재에 대한 재능의 승리다.

그리고 이어서 몇 호인지는 모르겠지만, '영상의 시대, 관념의 시대'를 다룬 연재에서 '사실주의'에 대한 대목.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어서 눈길이 간다. 참고삼아 읽어볼 만하겠다.  

사실주의자들이야말로 우리 앞에 영상을 제시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물과 사건과 인물에 대한 어떤 관념도 배제한 채로 그것들을 그 직접성의 빛 아래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리고 사실주의가 거둔 이 풍부한 결실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가는 다른 한 명의 천재적인 사실주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음으로써 알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이 지닌 이를 데 없는 매력이 그 내용에 있다고 잘못 인식되어 왔다. 이를테면, 추리소설적인 구성, 그로테스크하고 때때로는 악마적인 사건들의 연속, 주정적인 이국적 격정 등, 그러나 이것은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요소들을 모두 지니고 있으면서도 걸작이 못 되는 작품들이 얼마든지 있고, 또 그의 작품들의 이러한 요소에 우리가 눈을 감는다고 해도 그것들이 걸작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의 소설들의 두꺼운 볼륨과 거기에서 다루어지는 시간의 짧음의 대비는 충격적이다. 『죄와 벌』이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나 『백치』나 모두 대단한 장편들이지만 시간은 지극히 압축되어 있다. 그러나 읽어 나가기에 전혀 따분하지 않다. 오히려 대단히 격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다채로운 사건을 중첩시킴으로써-호메로스의 『오딧세이』가 그렇듯이-가 아니라, 오히려 단순한 사건 속에서 한없는 대화와 마음의 움직임과 소품적 디테일을 중첩시켜 그 박진성을 얻어내는 것이다. 사건의 중첩이 강도를 높인다는 것은 중세의 로망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이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밀도는 말도 안 되는 어거지의 사건들을 이어나감으로써가 아니라 단일한 사건의 그 미세하기 짝이 없는 구성요소를 확산적으로 표상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즉, 그의 작품은 사건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박진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기 때문에 박진적인 것이다. 독자는 지칠 줄 모르게 분출되는 그의 주인공들의 대화와 끊임없이 흐르는 디테일로부터, 개념상으로는 도저히 얻어낼 수 없는 생동하는 주인공, 발생 상태의 주인공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주는 영상적 효과는 자못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는 언제나 한 인물을 도입하기 전에 그 인물의 소개를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이것은 그의 선배인 투르게네프나 푸슈킨이나 고골리의 양식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 그가 누구의 아들이고 어떤 계급에 속해 있으며 어떤 성격의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설명함으로써, 한 일문에 대한 확고한 정의를 내려버리는 비사실주의적 요소를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라임 라이트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곳을 어둡게 만드는 무대장치와 같다. 그러나 주인공의 실재는 어둠 속에서 뛰어드는 새로운 인물들에 의해 밝혀진다. 주인공들은 무대에 뛰어들자마자 애초에 제시되었던 관념상 속의 인물들과는 완연히 모순되는 모습을 드러낸다. 제시된 장면들은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아무런 설명도 없이 관념과는 상반되는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상이 관념을 배신하는 것이다.

방탕하고 광기어린 정열의 소유자로 소개되는 미쨔는 순진하고 자유분방한 영상적 제시에 의하여, 그의 전체상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이상한 모순을 불러일으킨다. 난폭한 생명력과 정열이 시적 민감성과 명예에의 존중과 더불어 존재한다. 그는 부친 살인범의 선고를 받는다. 사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바랐고 죽일 생각까지 있었다. 따라서 그가 아버지를 죽이지 않은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동기 때문에 미쨔는 기꺼이 십자기를 진다. 이것이 받탕하고 난폭한 사람의 모습인가? 그러나 모순적으로 제시되는 그의 주인공들은 다른 작가의 일관된 주인공들보다 훨씬 선명하고 사실적이다. 우연적 모순이 오히려 내적 일관성을 주는, 사실주의가 지닌 영상적 효과라고 할 만한 것이다.

철두철미 악의 화신인 표도르는 오히려 가여운 속물, 교활한 야바위꾼, 질투에 눈먼 졸장부, 천박한 어릿광대로 묘사됨으로써 그 생명력을 얻는다. 악 그 자체에다 그것이 지닌 파렴치함과 난폭함에 덧붙여 누구에게나 발견되는 이러한 악들을 병치시킴으로써 새로운 조명을 비춘 것이다. 이렇게 되어 이류의 소설 속에서 얻게
되는 그 미이라 같은 악의 화신, 철두철미하고 악마적인 뉘앙스로서의 악인이 배제되고, 살아 있는 악의 화신, 생동하는 악의 화신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이다.

이들 주인공들에 대해 작가의 설명에 의해 도입된 정의는 그 정의로부터 독립된, 그리고 주로는 모순되는 그들이 생생한 '영상'들이 제시됨에 따라 독자와 더불어 생성(becoming)과정 중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관념과 영상의 두 개념상은 서로 부합되는 것이 아니 것이므로, 여기에 부딪힌 감상자들은 이 모순되는 사실들을 어떻게든지 통일시켜 정의해 보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게 된다. 이 인물상들을 통일시켜 이해하지 않는 한 늘 이 교차점에서 그들을 놓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삶 역시도 이 소설적 현실과 다를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의미가 있고 중요하기 때문에 어떡해서든지 이해하려 애쓰는 한 대상을 생각해 보자. 그는 우리에게 기지의 인물로서 제시되었는가? 마치 한 의학자가 심장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를 내릴 때처럼 그렇게 정의가 내려진 인물로서 우리에게 다가왔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한 개념적 대상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이해와 소유로부터 독립된, 그리하여 복잡하고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여러 개성을 지닌 채로 다가온 것이다. 우리는 이 사람을 포착하고 소유한 채로 삶을 살아나갈 수는 없다. 같이 살아나가야 하고 영원히 이해하도록 애써야 하고, 결정되어 있는 관계로서가 아니라 생동하고 갱신되어가는 관계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은 감상자가 그들의 비밀을 뚫고 육박해 들어오는 것을 쉽지 않게 한다. 그들은, 그들에 관해 형성시키고자 애쓰는 독자의 관념으로부터 독립하여 거기에 자신들을 부합시키기를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 그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하나의 효과적인 실상으로 변모해 나간다. 그는 이러한 효과를 장황한 심리묘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칠 줄 모르고 전개되어 나가는 주인공들의 대화에 의해서 얻어낸다. 그의 모든 소설은 연속되는 사건의 중첩이라기보다는 장면의 중첩이다. 그 각 부분은 연극의 극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한없이 많은 디테일을 설명 없이 제시함으로써 극적인 영상효과를 얻어내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어떤 인물을 창조했느냐가 아니라, 그 인물을 어떻게 창조 했느냐가 되는 것이다.
 


거대하고 통일적인 세계상이 해체되어가는 이 시대, 예술은 예술만의 것으로 수렴되는 이 시대, 그렇기 때문에 직관과 감각과 영상이 점점 더 중요성을 더해가는 이 시대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시대정신을 비교할 수 없는 설득력을 지닌 채로 그의 소설 속에 구현한 것이다. 원한다면 관심을 그가 가난한 간질병 환자였고, 도박벽 때문에 끊임없는 모욕 속에 산 사람이었고, 숭고한 인간정신을 가진 사람 이었고, 종교적 문제에 끊임없이 집착한 천재였다는 데에 둘 수도 있다. 그리고 그가 심오한 관념을 구축했다는 데에 둘 수도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초인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알렉세이는 기독교적 사랑이라는,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음란이라는, 키릴로프는 자살함으로써 신이 되고자 하는, 이러한 관념들에 관심을 기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이것으로 위대한 예술가가 된 것은 아니다. 그는 하나의 작가, 자기 직업에 충실했던 숙련된 장인이었지 그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사실주의 시대의 소설적 기법에 있어 최대의 거장이었고 소설형식의 최고의 개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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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6 0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2-06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06 09:49   좋아요 0 | URL
**님/ 곧 주저들을 낸다고 하니까 책이 말해주겠지요.^^ 겸사겸사 어제 보내주신 책 잘 받았습니다. 감사.^^ 공들이신 만큼 많이 나갔으면 좋겠네요...

드팀전 2007-02-06 12:08   좋아요 0 | URL
키치에 대한 쿤데라의 정의가 가물 가물 떠오르네요. '키치에 대한 키치의 요구'같은 것이었는데.키치를 원하는 키치적 정서에 대한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거울에 비친 키치의 모습에 만족하는 키치적 만족감'같은것....요즘은 키치론도 좀 희멀건해진것같지요?

로쟈 2007-02-06 14:33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키치에 관해서라면 쿤데라도 일가견이 있지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였던가요?.. 저도 가물가물이긴 하네요.^^

이네파벨 2007-02-06 16:10   좋아요 0 | URL
뭔가...흥미로운 냄새가 솔솔~~

경음악 편곡의 관현악곡(폴모리아류...토 나와욧..ㅠ,ㅠ), 뉴에이지 음악, 저급한 환타지 소설에 경기를 보이는 취향에는 경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키치에 대한 이야기는 어렵네요...
문외한인 저에게 예술은 그저...주관적인 저의 감성에 와닿으면 좋은 예술이고 그렇지 않으면 별로라고 생각하는지라...(솔직히 잭슨 폴락이니 백남준같은 분들의 미술에는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지만 때때로 잘 만든 광고 한편에는 진심으로 "인정"을 보내게 되더군요...이 분 관점으로는 실험적 예술가는 좋은 예술..광고는 무조건 키취...그런게 되는걸까요?)

BTW,
쿤데라는...모더니즘에 향수를 포스트모더니즘에 혐오를 보이지 않았던지요...
엘리트주의에 깊숙히 들어앉아있는 고단수 투덜이지만 미워할수 없는 사랑스러운 할아부지....쿤데라.....

2007-02-06 1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06 22:16   좋아요 0 | URL
**님/ 인용문의 오타는 한 군데 고치긴 했는데, 잘 눈에 안 띄네요. 아무래도 화면상으로 읽는 것과 프린트해서 읽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좀 있어서요.^^;
 

오마이 뉴스에 실린 소설가 황석영의 기고문을 옮겨놓는다. 작가는 얼마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새 정치질서 만들기 총대 멜 생각있다”는 발언으로 화제에 오르기도 했었다. 개인적으론 6월쯤에 그의 <오래된 정원>에 대해 강의도 예정돼 있어서 관련자료들을 모아야 될 형편인데 유익한 참조물이 되겠다. 물론 작가의 '총대'는 올 12월에 가서야 보다 확연한 윤곽과 결말이 드러날 듯하지만...

오마이뉴스(07. 02. 05) '개똥폼' 잡지 말고 현실의 저잣거리로 내려오라!

소설가 황석영씨가 지난 1월 22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새 정치질서 만들기에 나라도 총대를 멜 생각이 있다"고 말해 파장을 일으켰습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1230809551&code=910100). 그는 왜 작가로서 얼룩이 튀는 것을 감수하고서까지 이런 선언을 했을까요? 현재 프랑스 파리에 체류중인 황석영씨가 그 배경을 밝히는 글을 <오마이뉴스>에 보내왔습니다. 그는 다섯 번의 변화를 겪은 자신의 사상 편력에 대해 말하면서, 현재 우리 상황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 논란이 된 '민족문학 작가회의'의 명칭 변경 논란에 대해서도 의견을 밝혔습니다.<편집자 주>

1. 나는 뭐냐

나의 글쓰기와 사상적 편력의 길을 세밀히 밝히는 일은 독자들에게도 지루한 것이 될 테지만 방향 전환의 모퉁이를 몇 대목 회상해보는 것은 어떨지.
나는 청소년 시절에 문단에 어정쩡하게 나오고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발표하게 될 때까지 그야말로 '문예반'으로서 내면을 파고드는 탐미적인 습작을 했다. 군에 입대하여 해병대로 베트남 전장을 다녀온 뒤에 사회라든가 역사라든가 하는 것들에 눈을 돌렸다. 이것이 첫 번째 변화였는데 의식이 들고 나서 작품을 쓴 내용은 그 전에 아무 생각 없이 남도를 떠돌며 겪었던 체험들을 스스로 자각해가는 과정이었다.

전태일의 죽음이 <객지>라는 나의 체험으로 각색되었고, 평자들은 여기서 민중문학이라는 개념을 발견해냈다. 내가 공장 취업과 농촌 하방을 하면서 유신시대를 향하여 격문을 쓰듯이 <장길산>을 썼던 것은 일제시대에 벽초가 <임꺽정>을 쓰던 경우와 비슷했다. 이 기간에 나는 뒤늦게 기층민중이라는 당시의 사회과학적 단어가 아닌 살고 먹고 허덕이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전위냐, 현장이냐' 하는 논쟁이 있었을 때에 당시의 많은 벗들은 각자의 길을 택하여 시대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작가였으므로 당연히 가장 문제가 많다던 전라도로 하방했다. 그리고 김지하가 투옥되면서 나에게 떠넘겨준 현장 민중문화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피의 광주를 겪는다. 이것이 두 번째 변화였던 셈이다. 당연히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들은 급진화했다. 우편향이 강요되었으므로 좌편향이 시작되었다. 문예 각 장르의 헌신적인 선전 활동은 광주를 알리겠다는 뜨거운 전제가 있었지만 예술성은 스스로 포기해야만 되었다. 우리는 기꺼이 각자의 재능을 반납하고 한때의 시사적 문제들을 다루는 마당극 대본이나 노래 만들기나 성명서 작성이나 다큐멘터리, 사진, 필름, 판화 등을 제작해냈다.

광주항쟁을 알리는 보고서를 편집·기록한 뒤에 구속되고 당국의 종용에 의하여 베를린에서 초청받은 '제3세계 문화제'에 참석했다가 유럽과 미주, 일본을 1년여 동안 유랑하게 된다. 이것이 세 번째 변화의 계기였다. 바깥에서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또 다른 '자아'를 발견했던 것이다. 군사독재에 반대하며 오랫동안 반한 인사로 해외에 망명 중인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만났다. 그리고 북은 수만리 타국에서 오히려 지척이었다.

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간신히 얻게 된 직접선거의 기회였지만 양김씨의 분열로 쓰라린 좌절을 겪은 뒤에 기력을 회복한 민주화 운동 진영인 노동자, 농민, 빈민, 교사, 학생, 재야 운동권은 드디어 '전국'이라는 이름을 앞에 걸만큼 성장했고, 이들 '전씨5형제'의 연합적 집행부는 물밑에서 논의했다. 그동안 군사정부는 민중의 민주화 열기가 고조될 때마다 북을 빌미로 삼아 각종 간첩단 조직을 조작하여 탄압했다.

노태우의 7·7선언을 계기로 '자주적 민간교류'가 공공연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문익환 목사와 나의 방북이 결정되었고 나는 순순히 긍정했다. 순진하기도 하여라! 나는 그 길이 십여 년이나 걸릴 고행의 길이었다면 솔직히 스스로 조직했던 민예총을 탈퇴하고 입산수도의 길이라도 떠났을 것이다. 그저 귀싸대기 몇 대 맞고 끝날 줄 알았다고나 할까. 내가 북에 가서 경험한 것은 몇 번 밝혔지만 '감동과 절망'이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일구어낸 우리 백성의 '생활력'에 감동을 받았고 한편으로는 그 물샐 틈 없는 '통제'에 절망했다.

베를린에 거처를 정하고 있던 무렵에 국내에서는 나의 방북을 결정하고 지지해주었던 벗들이 뒤늦게 제도 정치권에의 입문으로 뿔뿔이 흩어져 갔다. 나는 마치 헹가래를 받다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채 경기장에 불이 꺼지고, 선수와 관객들도 모두 사라진 어둠 속에 홀로 누워있는 듯한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곧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날 장벽에서 쏟아져 나오던 동베를린 시민들과 환호하던 서베를린 시민들이 뒤섞인 축제의 광장에서 혼자 울었다. 뼈저린 외로움 속에서 나는 빛나는 개인을 발견한다. 그것이 나의 네 번째 변화였다.

그리고 뉴욕을 떠돌다가 들어와 투옥되어 5년을 보내면서 나는 감옥의 독방 속에서 뒤늦게 일상을 배운다. 그것이 다섯 번째 변화다. 나는 출옥 이후 지금까지 형식으로서의 '자아'와 현실과 내용으로서의 '세계'를 연결하는 작업을 일관되게 추구해 오고 있다. 나는 저 떠들썩한 우여곡절 속에서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많이 잃어버리기는 했다. 나는 이미 노인이지만 상상력은 아직도 푸르게 젊다고 자부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직업작가'라는 프로 의식을 더욱 강력하게 유지하고자 한다.



2. '총대를 메겠다'는 뜻에 대하여

지난 1월, 3주 동안 서울에 체류하다가 31일에 파리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하루도 안 되는 동안에 획기적인 공간 이동이 가능한 세상이다. 나는 세계체제 전환기의 작가로서 현재의 해외 체류가 나에게 주는 여러 가지 유익한 점들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나 자신과 한반도로부터의 거리는 더 냉정하게 자신의 문제를 돌아보게 했으며, 세계의 흐름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성찰하게 해준 기간이었다.

파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어떤 때에는 서울보다도 더 번거로운 사교장으로 변하기도 한다. 서울에서는 만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십여 년 만에 연락을 해오는 때도 종종 있다. 런던에 체류할 적부터 옛 벗들이 찾아와 많은 걱정거리를 쏟아 놓았다. 지난 삶을 돌아보는 회한과 시대에 대한 우울한 전망이며 무력감 따위들이었을 것이다. 작년부터는 주위의 후배들도 여러 가지 걱정들을 주고받더니 드디어 뭔가 해보자는 데로 결론이 났다.



늘 하던 얘기지만 84년인가 광주에 살던 무렵이었는데, 홍남순 변호사가 고희를 맞았고 양김씨도 가신들과 더불어 일제히 내려왔으며 전국 각지에 흩어져 와신상담하던 재야 각계 인사들도 모여들었다. 사실 고희 기념은 구실이요, 광주압살 이후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의 복원을 위한 모임이 되었다. 그때에 모두 가난하던 시절이라 내가 그래도 <장길산> 연재로 밥술깨나 먹는다고 삼사십대는 모두 운암동의 우리 집으로 몰려왔는데 160여 명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아마 맥주를 팔십짝 가까이 마셨을 것이다. 마당에, 거실에, 계단에, 이층에 방마다 꼬부리고 삼삼오오 앉아서 밤을 꼬박 새웠다. 모두 옥살이에, 고문에, 도망에 심신이 피폐했지만 기개는 살아 있었다. 그들 모두 어디로 갔는가?

지금 4개 당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제각각의 삶의 굴절을 거치며 세속적인 출세나 좌절을 맛보았다. 지금 내로라하는 정치인들 모두 거기 있었다. 그 시작은 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군부로부터 주어진 6·29 이후였다. 내가 현재를 '87년 체제의 종언'이라 부르자는 것은 역으로 말하자면 우리 다함께 그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뜻이다. 돌아가자 벗들이여, 그 때로! 그리고 생각해보자. '84년 저 피의 현장 광주에 모여서 미래를 소곤소곤 이야기하던 그 때로 돌아가자!'라는 것은 이제 냉혹한 현실 속에서 '낭만적인 작가'이기 때문에 아직도 하는 꿈같은 잠꼬대로 들리는가.



나는 정치하는 벗들이 가끔 상대의 궤변을 허위라고 공격할 때에 '소설 쓰지 말라'하고 얘기할 적마다 심한 모멸감을 느끼던 사람이다. 스스로 직업작가라고, '책장사'하는 처지라고 자학적으로 얘기하던 것도 그 이후부터는 삼가게 되었다. 물론 자본주의사회에서 대중과의 접점은 누구에게나 시장에서 이루어지고 그 접점을 잃으면 대중과의 소통도 끝이 난다. 그러나 소설이란 세상 도처에 널려있는 삶의 진실을 그럴싸하게 재현해내는,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작업이어야 한다. 6·29는 군부가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카드였고 기진맥진 그것을 받아들인 민주화 세력은 분열 이후에 스스로 3당합당이라는 미궁에 빠지고 만다. 그것의 어정쩡한 귀결이 현재의 형식적 민주주의이며 여당과 야당의 가건물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대등한 가치 평가는 과연 가능한가? 그것이 어떻게 대등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가 가치일 수는 있어도 산업화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나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행사장에서 애국가나 국기에 대한 예를 표한 적이 없다. 유명한 얘기로 5공시절 광화문의 그 살벌하던 국기 하강식 시간에 행인들이 모두 얼어붙어 중앙청의 태극기를 향하여 서있던 때에 나는 시인 김지하, 김정환과 셋이서 만취하여 얼어붙은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갔다. 그것은 민주주의만이 존엄을 가지고 국기와 애국가에 대한 예의를 표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중의 땀과 피로 이루어진 민주화시대 이후에 나는 우리가 한반도에서 유일한 정통성을 세웠다고 말한다. 산업화도, 민주주의도 이름 없는 민중들의 업적이다. 감히 아무나 나서지 말라. 그러므로 우리의 구호는 아직도 민주주의이며 다만 거기에 하나 덧붙이자. 선진적 민주주의다. 그 짧은 단어 안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모두 들어있다.

내가 광대처럼 또 이제 나서서 '사람이 살고 있었네' 식으로 분위기 일신의 바람을 잡는 것은 이를테면 작가로서의 본능이다. 왜냐하면 나는 어느 자리에서나 좌중의 분위기가 침체되면 그게 '내 탓이거니' 여기는 못난 자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 '총대'의 본뜻이다. 나의 총대는 그러므로 '이제 나서서 다 같이 처음부터 생각했던 민주화운동 하자'는 소리다. 판은 모두 끝났다. 그러므로 현재의 구도는 깨져야 한다. 그것은 밖에서부터 스스로 잘못 기획하고 구축한 체제를 깨는 일이다. 운동성의 회복이야말로 이제는 오래전 어느 6월에 탄생했던 '시민'들의 몫이다.



3. 바깥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나

2차 대전 이후 냉전 시대에 서구에서는 과거의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를 개량하여 내부에 복지라든가 사회주의적인 안전장치를 갖추었다. 그러나 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에서는 냉전 구조를 확정하기 위하여 과거의 종속적인 민간정부를 스스로 훈련, 교육시킨 군사정부로 교체됐다. 군사 쿠데타는 개발도상국이라는 애매한 명칭의 지역에서 하나의 일상적 유행이 되었다.

소련에서 수정주의를 선언하고 일종의 안정적인 대치 상태가 유지되면서 미국과 서구는 레이거노믹스 또는 대처리즘이라는 정직하고 노골적인 자본주의를 내놓는데 그것이 점잖게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이며 그 행동 강령이 미국식 '세계화'이다. 이런 것들이 현실적으로 구체화 된 것은 동구 붕괴 이후부터며 그로부터 지금까지를 이른바 '세계화 체제'라고 부른다.

웬일인지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 선언이 나올 무렵부터 제3세계의 군사정권은 차례로 민간정부로 바뀐다. 한국에 문민정부라는 이행기적 민간정부 체제가 생길 무렵부터 김영삼은 세계화를 입에 달고 다녔고 남한 자본주의는 풍요와 소비의 짧은 시대를 구가한다. 이때에는 미국이 동구를 재편성하느라고 여념이 없던 시기다. 그리고 아시아로 돌아섰을 때 IMF 사태가 터진다. 남한은 비로소 분단된 자본주의가 한계에 부딪친 것을 깨닫는다. 중국의 생필품 생산 공세와 일본의 첨단기술 사이에 끼어버린 것이다.

미국 민주당 정권의 전향적인 대북정책과 남한의 생존 의지가 만나면서 '햇빛'이 탄생한다. 그러나 이제 한반도를 둘러싼 기류는 신냉전의 판도로 흘러가고 있다.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은 그 세력 판도 사이에 한반도를 두고 다시 대치하려하는 중이다. 틈새를 조심스럽게 헤집어 나간다면 분명히 생존할 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별로 많지 않다.

북의 붕괴가 중국과 미국의 적대적 공존관계를 노골화시키면서 대만과의 교환 카드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눈치 채고 있는 상식이다. 북의 특정 지명을 거론하며 국토 영역 운운하는 중국이나 전작권 환수니, 주한미군 재편제니 하면서도 유엔사의 역할을 강화하겠다는 주한미군사령관의 공언은 DMZ 관리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간접적 선언이다. 어쩐지 대선을 앞둔 이 시기가 매우 불안정하다. 더구나 북은 이미 핵실험이라는 비난받아 마땅한 절체절명의 강수를 두어버린 직후다. 앞으로 우리는 멀고 험한 길을 가야 할지도 모른다. 더욱 지혜롭게 모든 슬기를 모아 다함께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

안과 밖을 향한 운동의 전략을 모두 까발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큰 선은 보수나 진보로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 세력을 줄이고 통합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그래서 중도라는 깃발을 들어보는 것이다. 마치 독일 녹색당의 깃발처럼, 그것은 진보의 적색도 보수의 청색도 아닌 그 둘이 혼합된 보라색이다. 중도는 그러므로 기회주의가 아니다. 현재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라는 공의 핵심을 뚫는 것이 중도다. 그 프레임 안에 누가 들어오든 살아서 온다면 그에게 깃발을 쥐어 주리라. 그리하여 지금의 카오스를 통합하고 북과의 소통을 살려내는 그 누군가가 있다면 점쟁이가 아니더라도 그에게 최고의 책임이 주어질 거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4. 모든 굳어버린 원칙이나 근본주의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장을 하는 혼자에게는 '근사하지만' 다중의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리라고 작정한 것은 어느 후배의 조그맣고 나직한 목소리와 또한 어느 '대가'의 큰 목소리 때문이었다. 내가 어느 신문과 엉뚱한 인터뷰를 한 것은 이를테면 정갈하게 서 있는 현대식 빌딩에 흙덩이를 던져 말끔한 유리창에 얼룩을 만든 것과도 같았다. 고정된 판을 흔들어 보고 싶어서다. 뒤에 어느 후배 작가가 '하이킥'이라는, 나에게는 낯선 표현으로 내 가슴을 흔들었다(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88019.html). 매우 시니컬하고 자조적이지만 낮고 올곧은 음성이었다. 그리고 절망이 깃들어 있었다.

아, 젊은 사람들이 있었다. 6월항쟁의 그날 서울역과 굴레방 다리목에서 최루탄 연기에 눈물을 철철 흘리며 돌팔매질을 하던 지금은 칠순 노인이 된 선배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채광석이가 그 선배의 돌팔매를 피하며 '우리 편 맞겠어요!'하며 핀잔을 주던 모습이 떠오른다. 조태일이도 이문구도 채광석이도 이 세상에 없다. 아, 그런데 지금 저 젊은이들을 품에 안을 선배는 다 어디로 갔는가?

나는 언제부턴가 너무 아름다운 가치라든가, 점잖음, 선량함 등과 더불어 무엇보다도 '지당도사'들의 지당한 말씀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역시 문학이란 세속의 길이기 때문에. 나는 큰 목소리를 내던 내 동년배의 작가를 지난 위기의 시대 어느 현장에서도, 어느 글귀의 서명란에서도, 심지어는 회비 목록에서조차 본 적이 없다. 우리가 광화문의 빌딩에서 그 바로 위층에 군사정권 당시 제도권의 문협 사무실이 있다는 이유로 김지하와 양성우 시인의 석방과 긴급조치 철폐를 부르짖으며 시위했을 적에, 모두 잡혀가고 계단에 있던 염무웅과 몇몇이 문협 사무실에 몰려 올라갔을 때에 난색을 표하던 사무국장이 누구였던가.

우리는 그 누구도 자신의 행위나, 먹고 살려고 허덕이며 써온 글줄을 신주단지 모시듯 내세운 적도 없다. 책을 사준 이름 없는 독자들에게 겸허해야 하므로. 우리는 먹고 살만큼만 쓰고 남는 시간에는 체험하고 독서하고 놀고 위기의 시간에는 항의하고 감옥 가고 그러면서 시시껄렁하게 산다. 그러므로 노대가들이 늙어가면서 글 쓰는 행위를 무슨 하늘이 내려준 형벌처럼 엄살을 떨고 과장하는 것에 구토를 느낀다.

우리는 자신의 기념관이나 기념비를 살아서 자기가 세우지 않으며 작품 이외의 흔적을 이승에 남기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우리들 중 그 누구도, 노벨상 캠페인 따위는 그야말로 아이들 말로 '쪽이 팔려서' 스스로 벌린 적 없다. 노벨상에는 몇 가지의 도그마가 있지만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가 딛고 있는 대지와 구체적인 현실에서 애매모호하게 멀어지게 하는 점이다. 그야말로 '먼 산에는 거짓이 많다'.

늘 말하지만 포즈로 세상이 유지되지는 않는다. 지금은 화면 영상의 시대라 외국인도 공식석상에 나서서 뭐라고 하면 그 말이 진정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허공의 화면 속에서 캐릭터가 다 드러나고 만다. 자아, 모두들 자신의 성채를 부수고 광야로 나오라.

이제부터 나는 점잖지 않을 것이며 예전으로 돌아가련다. 온몸에 얼룩이 튀면 다시는 개량 한복 따위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거나 넥타이에 정장을 하지 않으면 된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명천 이문구는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를 원했다. 무슨 문학상이니 기념비석이니 세우지 말라고 그랬고 자신의 껍데기를 화장하여 고향 뒷산 솔숲에 뿌려주기를 유언으로 남겼다. 그것은 우리들에게도 하나의 엄정한 가르침이다. 모두들 '개똥폼' 잡지 말고 현실의 저잣거리로 내려오라!

뭐라고, '민족'이 문제라고? 나는 근년에 '작가회의' 근처에는 가본 적이 없는데 '권태' 때문이다. 물건은 안 나오면서 '말'만 무성하다. 나는 진작 감옥에서 나오면서 시인 김사인과 농담으로 '저 간판 언제 떼어내냐'고 헛헛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일단 조직이든 집이든 사람이 만든 것은 시간을 이기지 못한다. 쇄락하기 마련이다. 친목회 정도의 기능만 남았다면 '해소'하는 것도 하나의 역사적 과업이다.

요즈음은 엉뚱한 객손님들이 뒤늦게 나타나 '감 놔라, 배 놔라' 한다. 과거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위원회가 되어 조직 안에 깃들었지만, 이제는 6·15 민족문학회에다 무슨 평화포럼인지까지 있다. 내가 '민족'자를 떼든지 '해소'를 하든지 하자고 안을 내었던 것이 이시영 시인이 사무총장을 맡았던 나의 출옥 직후였다. 탈퇴를 하겠다니까, 그러면 시끄러워지니 '평회원'으로 명단만 남으라고 하여 그냥 그대로 지금까지다.

총회 전날에야 '민족' 문제가 안건인 줄을 전해 들었고 백낙청 선배와 만났다가 그의 온유한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민족'을 떼어내는 것은 일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제안하고 끌고 간 것은 바로 남북작가회담을 성사시키고 단일 협의체를 이루어낸 젊은 문인들 자신이다. 그 뜻을 곰곰이 새겨보기 바란다.

언젠가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 작가와 대담을 하면서 우리는 동아시아의 민족주의 바람을 걱정스러워하였다. 남북 분단이 민족 문제인 것은 너무나 지당한 말씀이지만 이제 이 분단체제가 남북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 전체, 나아가 세계의 문제라는 것은 또 다시 너무도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니까 6자회담이라고 하지 않나.

우리가 동구 붕괴 이후로 이념적 방향의 한 축을 동아시아 진보, 평화, 연대로 삼은 것도 오래 전의 일이다. 우리는 무명의 '혈기방자한' 젊은 네티즌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세계인 작가다. 우리는 일본에서도 우리와 뜻을 같이 하는 수많은 시민단체들과 예술가와 지식인들을 알고 있다. 이는 중국, 대만과도 마찬가지며 오랫동안 젊은 문인들은 묵묵히 이러한 연대를 위하여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몽골, 카자흐스탄 심지어는 중동에까지 평화 시위대를 파견하기도 하면서 씨앗을 뿌려왔다.

그런데 '민족문학'을 꼭 붙여야 한다고? 그러면 그것을 떼자는 측의 가슴이나 작품에는 민족이 없는가? 뭐라고, '민족'이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고인다고? 뭐라고, 작가의 고향은 '민족'이라고? 나는 작가란 국경이나 민족의 구애를 받지 않는 존재라고 본다. 그러나 그에게도 조국은 있다. 그의 조국은 바로 '모국어'가 아닌가. 혼혈아를 아직도 멸시하는 사회, 외국인 노동자를 일하는 기계쯤으로 아는 사회, 재일동포의 차별은 목청 높이 외치면서 세계에서 유일하게 화교를 배척하고 밀어낸 사회가 아직도 '민족'이라고? 그것도 명색이 작가들이라는 사람들이.



몇 년 전에 가슴 아픈 일화를 겪었었다. 미국에 망명하고 있을 때의 일인데 어느 날 로스앤젤레스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내 작품 <무기의 그늘>을 번역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딘가 말투가 서툴고 어눌해서 외국인인 줄 금방 알아차렸다. 내가 왜 그 책을 번역하려느냐고 물으니 그가 너무도 쉽게 대답했다. "베트남 전쟁은 한국전쟁입니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말에 모든 것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몇 번 더 통화를 했는데 나는 뉴욕이고 그는 로스앤젤레스에 있어서 만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미국 사람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을 하면서도 나중에야 자신이 한국과의 혼혈임을 밝혔다.

그리고 며칠 후에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김수임을 아십니까?" 나는 6·25 전쟁 직전에 유명했던, 이강국과 박헌영을 주한미군 헌병사령관 차로 개성을 통과시킨 여간첩 김수임을 해방공간의 자료를 통하여 알고 있었다. 안다고 그랬더니 "제가 그이 아들입니다"하는 것이었다. 그럼 누구와? 미군 헌병사령관 사이의? 그는 자그맣게 "네"하고 대답했다.

그를 기른 것은 저 유명한 김수임의 어머니, 삯바느질을 하여 딸을 대학 보내고 동경까지 보냈던 혼혈아의 할머니였다. 김수임의 이화여전 동창생인 시인 모윤숙의 회상기에 나온다. 딸이 전쟁 직후 대전형무소에서 총살된 뒤에 시신을 수습한 것도 할머니, 미군 헌병사령관이 버리고 떠난 혼혈아를 고등학교 때까지 거두어 기른 것도 그 할머니였다. 그는 입양기관의 도움으로 십대 소년을 넘기고 나서 미국에 도착했다. 그가 전쟁을 겪은 한국에서 받았을 여러 어려움은 침묵 속에 다 들어 있었다.

피난지 학교에서도 적응이 어려워 할머니에게서 한글을 배웠다고 한다. 나는 곧 귀국하여 구속되게 되는데 미국을 떠나기 전에 로스앤젤레스에 망명하여 '한국청년연합'을 꾸려가던 광주사태 수배자 윤한봉에게 그와 연락하라고 전해 두었고, 뒤에 들으니 그는 평화시위나 연대활동에 적극적인 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도 지금쯤은 늙었을 게다.



이러한 일화는 내가 너무나 많이 겪은 일이라 끝이 없다. 예를 한 가지만 더 들어보면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한 세대나 지나서 작가 방현석과 김남일의 소개로 알게 된 베트남 작가 바오 닌은 <전쟁의 슬픔>이라는 작품을 써서 유명한데, 그는 전쟁 당시에 17세의 소년병이었다. 시간대를 맞추어 보니 그는 플레이쿠와 호이안 전선에 있던 월맹 정규군이었고 바로 같은 시각 나의 맞은편에 있던 적이었다. 이제 우리는 아시아의 평화를 얘기하는 친구다.

아아, 정말 끝이 없고 장황하다. 한 가지가 백 가지라고 요즈음의 <요코 이야기>에서 또 한 번 씁쓸한 회한의 느낌이 감돈다. 나는 당시에 만주를 거쳐 평양을 지나 서울까지 내려오면서 부모님, 누나들과 함께 개성까지 와서 피난민 수용소에 있던 기억도 남아있다. 당시 해방된 뒤인 48년에 남한에서 유명했던 베스트셀러가 <내가 넘은 38선>이라는, 지금 요코라는 아이의 어머니 세대의 이야기였다.

당시에는 아무런 편견 없이 '인간의 이름'으로 겪은 고초의 기록이 모든 이에게 감동적으로 읽혔다. 염상섭도 같은 소재로 당시에 단편소설 두 편인가를 썼다고 한다. 미국에서의 일은 당연히 그냥 책이 아니라 부교재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 소동을 보면서 나는 어느 낯선 공항에 서있는 것처럼 타인의 '시선'에 발가벗겨지는 것 같은 자의식에 빠진다. 우리의 이 복잡한 정체성과 단순하지 않은 표정을 어떻게 하리.

내가 '민족'의 이야기를 이렇듯 길게 공들여 쓰는 것은 우리에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이 이런 종류로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네 마을과 골목에서 벌어지는 일은 바그다드나 이스탄불이나 파리에서도 벌어진다. 그런 나는 모국어를 지고 다니니 어디로 튀랴.



'우리 민족끼리'가 중요하면 그건 식구들의 공간인 저 안쪽에 안방 쪽이라 할 '6·15 민족문화협의회'에서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민족'의 헛것에서 놓여날 때에 통일을 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을 얻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나는 이미 유럽이나 아메리카와 대등한 '아시아 공동체'를 꿈꾼다. 이제 젊은 후배들은 '제3세계' 연대로 80년대의 한계와 범위를 시원스럽게 넘어가고 있다.

07. 02.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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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2-05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황구라 선생님의 생각에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저는 <아시아>라는 계간지를 읽고 있는데 그게 좀 설익고 아직은 미흡해 충분히 만족스럽진 않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건 현재까지도 문학계에서 '민족'을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고 있는 현실이겠지요. 백낙청 선생은 현재 온유한 입장으로 선회하셨다 하지만, 저는 선생에 대한 가열찬 비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현재의 문단권력구조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테지만) 그의 시민문학론, 민족문학론, 분단체제론 등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여 문단의 '민족'주의가 고착된 면도 없지 않은 것 같아서요.
저는 <민족문학작가회의>에 몇 번 발을 걸친 적이 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그냥 <작가회의>라고 부릅니다.

로쟈 2007-02-05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부답님도 작가시란 말씀?!..

나비80 2007-02-05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까지는 아니고 그냥 언저리에서 쭈뼛대는 수준입니다.^^

짱꿀라 2007-02-06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석영 선생님 팬인데, 기사 잘 읽고 갑니다. 늘 도움만 받아서 감사해요.

기인 2007-02-06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머리가 하얀 사진은 처음 보는데, 그래도 만년 청년이신 황선생님.

비로그인 2007-02-06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원시원하신 말씀... 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