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한국근대문학 번역총서인  '조선근대문학 시리즈'가 출간된다고 한다. 1차분으로 세 권은 이미 나왔고, 전 16권이 2009년말 완간예정이라고. 우리의 경우에도 사실 일본근대문학 작품들이 체계적으로 소개된 것 아니기에 이웃나라의 '뒤늦은' 관심을 그렇게 타박할 필요는 없겠다. 기획자들의 지적대로, 한국어 정본 확정 작업도 다 마무리하지 못한 형국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이 참에 우리 근대문학에 대한 텍스트비평 작업도 활발히 진행시키면서, 외국에서의 한국문학 소개현황에 대한 관심도 좀 가질 필요가 있겠다. 가장 가까운 나라의 형편이 이러하므로 다른 나라들의 사정은 안봐도 훤한 것 아닐까. 더불어, 국외의 한국문학 연구자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책도 마련했으면 좋겠다. 문학도 그렇지만 문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도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한겨레(07. 02. 13) “한국어 배우는 학생 많은데… 제대로 번역된 소설 없어 나섰어요”

한국 근대문학의 대표작들을 일본어로 옮기는 체계적인 작업이 진행 중이다. 오무라 마쓰오 와세다대 명예교수와 호테이 도시히로 와세다대 교수(국제교양학부)가 기획·편집을 맡은 ‘조선근대문학선집’ 시리즈가 그것이다. 오무라 교수는 중국 연변의 윤동주 묘를 처음으로 확인한 이로, 일본 내 한국문학 연구의 대부로 일컬어진다. 호테이 교수는 김윤식 교수의 방대한 저작 목록을 최초로 완벽하게 정리함으로써 국내 학자들을 부끄럽게 만든 일화로 유명한 이다. 이달 하순 서울대 졸업식에서 <초기 북한 문단 성립 과정에 대한 연구 ­ 김사량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예정이다.

지난 2002년 호테이 교수의 제안으로 시작된 조선근대문학선집 시리즈에는 두 사람의 기획자를 포함해 일본 내 한국 현대문학 전공자 대다수가 참여한데다 일본 굴지의 출판사인 헤이본샤를 출판 파트너로 삼음으로써 명실공히 일어판 한국 문학 선집의 결정판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05년 11월 이광수의 <무정>(하타노 세츠코 니가타단기대학 교수 옮김)이 첫권으로 나온 데 이어 강경애의 <인간문제>(오무라 마쓰오 옮김)가 지난해 5월에, 그리고 합동 소설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시라가와 유타카 규슈산업대 교수 등 옮김)이 9월에 나왔다. 호테이 교수가 번역을 맡은 채만식의 <태평천하>가 올해 5월에 나올 예정이며, 염상섭의 <삼대>, 이기영의 <고향>, 두 권으로 축약한 홍명희의 <임꺽정>, 그리고 김동인 단편집과 시선집 등을 포함해 모두 16권으로 2009년 말 완간될 예정이다.

“그동안 일본어로 번역된 한국 문학 작품은 주로 단편소설들이었습니다. 그나마 비전공자들이거나 일본어에 서툰 한국인들이 번역한 것이 대부분이었고 중역도 많았죠. 이광수의 <무정>조차 제대로 번역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저희는 장편소설들을 중심으로 한국 근대문학의 일본어판 결정본을 만든다는 각오로 번역에 임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일 도쿄에서 만난 두 기획자의 말에서는 학자로서의 사명감과 아울러 자부심도 넘쳐났다. “꼭 한국문학 전공자는 아니더라도 한국학을 공부하려는 학생들에게 한국과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데 소설 읽기는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그동안은 제대로 된 일본어 텍스트가 많지 않아 애를 먹었지요. 이번 선집 발간은 학교에서 쓸 교재를 저희 스스로 마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즈음 한국에서 일본 소설들이 이상 열기를 띠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일본 내에서 한국문학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극히 미미하다. 해방 이전 작품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 사정을 반영하듯 이번 선집 출간은 번역자들 쪽에서 한 권당 200만엔씩의 제작비를 출판사에 제공하는 조건으로 성사되었다. 이름을 밝히기를 꺼리는,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어느 일본 여성이 상당액을 희사해서 우선은 작업에 착수했지만, 16권이 모두 차질 없이 발행되기 위해서는 한국 쪽의 지원이 절실한 형편이다. 두 사람은 이에 따라 다음달께 한국문학번역원에 지원 신청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제가 근무하는 와세다대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은 모두 1700명이 넘는데 전임 교수는 달랑 저 한 사람입니다. 2년 임기인 한국인 객원교수가 두 사람 있고, 나머지는 시간강사들이죠. 한국 정부나 기업 쪽에서 교수 충원이나 한국문학과 개설을 위한 지원을 해 주었으면 합니다.”

이와 함께 이들은 한국 쪽 연구자들과 출판사들이 한국문학의 정본 확정에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밝혔다. “가령 윤동주의 시집이 그동안 수십 수백 종이 나왔을 텐데 그 가운데 윤동주 자신이 남긴 육필 원고와 일일이 대조를 하고 낸 게 몇 권이나 될지 의심스럽습니다. 윤동주만이 아니죠. 번역을 걱정하기에 앞서 한국어로 된 정본을 확정하는 게 우선돼야 하지 않겠습니까.”(도쿄/글·사진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07. 02. 12-13.

 

 

 

 

P.S. 말미에 한국문학 '정전' 확정 얘기가 나와서 덧붙이자면, 사실 그간에 우리의 연구 역량에 비해서 관심이 소홀했던 게 아닌가도 싶다. <바로 잡은 무정>(문학동네, 2003)이 나온 게 불과 몇 년전, 또 원전 비평에 근거한 <윤동주 전집>(문학과지성사, 2004)이 나온 게 또 불과 몇년 전이기 때문이다. '조선근대문학 시리즈'가 어떤 텍스트들을 번역대본으로 작업하는지 모르겠지만 '텍스트 확정' 문제마저 외국의 연구자들에게 맡겨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연구용이 아닌 보다 대중적인 차원의 정본 확정도 중요하다. 문학과지성사의 한국문학전집 같은 게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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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13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쩝 한국문학 전공자로서, 기분이 과히 좋지는 않네요. 현실적으로 '우리'가 돈을 대야지 번역이나 국문과 '자리'가 생긴다는 것이 그렇고,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한국에 대해 별반 관심이 없다는 것도 그렇고. 민족주의적인 감상이라기 보다는, 파워 차이와 약소국이라는 권력관계가 문화관계에도 정확히 반영된다는 것. 다시금 확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트남 전쟁의 가해자 중 하나인 우리 작가들이 베트남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관심이 증폭되고 반성되기를 바랍니다.

로쟈 2007-02-1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분이 나쁘더라도 당연한 현실이죠. 문학도 국력에 비례하니까요. 지난 연말에 한 학회에 가보니까 (재일교포나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이 일본어로 쓴 한국문학사는 한권도 없다더군요. 거기에 비하면 러시아에서는 지난 60년대말에 이미 <한국문학사>가 나오고 2004년에 개정판이 나왔었습니다. '가깝고도 먼나라, 일본'이 맞는 거 같습니다...

기인 2007-02-14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력과 같은 파워 문제가 아니라, 식민주의에 대한 반성으로서의 국문학에 대한 관심 또는 윤리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베트남에 대한 관심으로 제 생각이 나아간 것이고요 ^^; 일종의 '인간'이라면 그래야 한다, 혹은 '인문학'의 의무 같은 것을 생각해봤습니다. 일본의 인문학도가, 조선 식민지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면, 한국문학 전공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너무' 피해가는 것이 '인류' 차원에서 답답하다는 의미입니다.

로쟈 2007-02-14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민주의'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는 모호하며 어려운 문제 같습니다(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도 '식민주의'의 연장선으로 보시는 건가요?). 이게 관심을 '가져준다' 같은 시혜적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닐 테니까요. 더구나 그게 비단 베트남 문제에 국한되는 게 아니며, 소위 '내부 식민지'로서의 전라도 문제부터 성차화된 식민지로서의 '여성' 등 안 걸리는 게 없는 문제인 듯싶어요...

기인 2007-02-17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 안 걸리는게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관심을 '가져주는'것이 아니라,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언명령에 의해서!)
 

헨리 무어와 함께 20세기 구상조작을 대표한다는 이탈리아의 조각가 마리노 마리니의 대규모 전시회가 개최된다고 한다. 나로선 생소한 작가인데, 실상 조각과 관련한 책들 들춰본 게 하도 오래전이니 나의 무지에 핑계가 없는 건 아니다. 관련기사와 함께 몇 작품을 미리 감상해본다.

한국일보(07. 02. 12) 구상조각 거장 마리니, 그가 왔다

전후 세계의 불안과 비극을 표현한 기마상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조각가 마리노 마리니(1901~1980)의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국내 첫 전시가 덕수궁미술관과 선화랑에서 나란히 시작한다. 마리니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헨리 무어와 함께 20세기 구상조각을 대표하는 작가. 두 전시는 조각 뿐 아니라 미술작가로서 그의 출발점이었던 그림도 함께 소개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14일부터 덕수궁미술관에서 여는 <마리노 마리니-기적을 기다리며> 전은 조각과 회화 105점으로 그의 예술 생애 전반을 돌아보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크게 세 가지 주제, 기마상과 포모나, 초상조각으로 분류해 시기별로 전시를 구성했다.

고대 그리스ㆍ로마 작품에서 착안한 마리니의 기마상은 비극적 시대의 표상이다. 1930년대 후반의 초기 기마상에서 보이던 말과 자연의 조화로운 결합은 2차 대전을 지나면서 불안한 긴장감을 띠고 1950, 60년대로 갈수록 격렬하게 요동친다. 말은 난폭하게 몸부림치고 기수는 통제력을 잃은 채 간신히 매달려 있거나 땅으로 처박힌다. 60년대에 들어서면 말과 기수는 형체조차 무너져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사그라져 가는 비극의 절정에 이른다. 그의 작품 중 가장 거대한, 59년 네덜란드의 헤이그 광장에 설치한 높이 6m의 청동 기마상에는 말굽들 중 하나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우리는 건설하며 우리는 파괴한다. 이 세계에는 절망적인 노래만 남아 맴돈다.”



비극적 시대를 구원할 기적을 기다리는 마음은 풍만한 육체의 여성 누드, 포모나 시리즈로 표현됐다. 포모나는 고대 이탈리아의 에트루리아 문화에 등장하는 과일나무와 풍요의 여신이다. 마리니 자신의 발언에 따르면 포모나는 “비극적인 전쟁으로 망가진 행복의 시기를 의미한다.” 둥글게 부풀어오른 배와 커다란 가슴을 지닌 마리니의 포모나에서 풍기는 풍요와 관능은 대지의 치유력을 상징한다.



마리니의 조각은 특히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사진), 화가 샤갈 등 예술가의 초상으로 유명하다. 예술가의 예민한 기질과 내면을 포착한 걸작들이 이번 전시에 나온다. 색채에 매혹된 추상화가로서 마리니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강렬한 원색의 그림도 볼 수 있다.

22일 시작하는 선화랑의 마리노 마리니 전은 40여 점을 선보인다. 조각도 있지만, 그가 조각의 거장이 되기까지 작품의 바탕이 되었던 회화와 드로잉, 판화를 중심으로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덕수궁미술관 전시는 4월 22일까지, 선화랑 전시는 3월 21일까지 한다.(오미환기자)

07. 02. 12.

P.S. 마리니의 작품들을 검색해보았는데, 개인적으로 조각보다 더 흥미를 갖게 되는 것은 원색의 회화 작품들이다. 그리고 기수가 말안장에 얌전하게 앉아 있는 조각상이 아니라 목을 아주 길게 뺀 말 조각상. 마음에 드는 몇 작품의 이미지를 더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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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책읽기'가 무료해서 잠시 아침신문들을 훑어보니 외신면 톱기사가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발언에 관한 것이다. 국제회의석상에서 작심하고 미국에 한방 먹였다는 것이고, 다시금 신냉전체제로 들어서는 것 아니냐는 성급한 전망도 나오고 있는 모양이다(테러시대에서 신냉전시대로?). 미국 단일패권주의에 그간에 환멸스러웠다면 미-러 양극체제는 그보다 나을까. 이런 거 분석/전망해주는 책도 조만간 나왔으면 싶다. 기사는 참고자료로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7. 02. 12) 푸틴 ‘미 일극체제 더는 못 참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0일 작심한듯, 탈냉전 이후 ‘미국의 일극적 세계질서’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신냉전 선언’을 방불케 하는 고강도의 대미 비판연설이다. 다음날 연설에서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은 “냉전은 한번으로 족하다”며 정면 반박에 나섰다.

푸틴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들과 러시아, 이란 정상 등이 참석한 가운데 독일 뮌헨에서 열린 국제안보정책회의에서 “국제회의이기에 논쟁적 발언을 하겠다”고 말문을 연 뒤 32분 동안 미국의 대외정책을 조목조목 비난했다고 <에이피>(AP) 통신 등이 보도했다. 단상 앞줄에 앉은 소련 연구자 출신의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과 존 매케인 공화당 상원의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 서방 쪽 참석자들은 매우 놀라는 모습이었다.

푸틴 대통령은 “미국이 지배하는 단극체제는 권력과 힘, 의사결정의 중심이 하나이고, 지배자와 주권도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며 “내부로부터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미국의 군사행동을 두고 “일국적”, “불법적”이란 말을 쓰면서 “전세계 전쟁을 부추긴다”고 주장했다.

그는 “어느 나라도 국제법 뒤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없으므로 어느 나라도 더는 안전을 확신할 수 없다”며 “이로 말미암아 군비경쟁이 촉진되고 핵무기를 가지려는 생각이 들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나토 확장은 동맹 현대화나 유럽 안보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상호 신뢰를 잠식하는 심각한 요인”이라고 말해 러시아의 불만을 드러냈다. 또 미국은 “러시아에 민주주의를 가르치려 하면서 스스로는 민주주의를 배우려 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공박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이 반대하지만 이란에 무기 판매를 계속할 것이며, 세르비아가 반대하는 코소보의 독립을 저지하겠다는 점도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의 연설은 ‘옛소련의 영광 재현’을 목표로 삼은 자신의 정책이 완결단계에 있다는 자신감의 표출로 보인다. 또 그가 후견인이 될 ‘포스트 푸틴 러시아’가 녹록지 않은 상대가 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어 연설에 나선 메르켈 총리는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러시아는 신뢰할 만하고 예측 가능한 상대라는 느낌을 받아왔다. 서로 솔직하게 대화할 필요가 있고, 문제를 카펫 밑으로 쓸어넣을 필요는 없다”며 푸틴 대통령의 대립적 정세관을 넌지시 비판했다.

11일 연설에 나선 게이츠 장관은 “냉전은 한번으로 족하다”며 “에너지 자원을 정치적 압력 수단으로 쓰려는 시도 등, 러시아의 일부 정책들은 국제사회 안정에 역행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반박했다.(류재훈 기자) 

경향신문(07. 02. 12) 푸틴 “美 MD가 군비경쟁 조장” 직격탄

탈 냉전 이후 미국이 압도적인 우위를 지켜오던 군사력 균형이 흔들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중국이 최근 노후 인공위성을 미사일로 저격하는 실험을 통해 ‘스타워스’ 우려를 상기시킨 데 이어 에너지 수출로 경화를 여퉈둔 ‘푸틴의 러시아’가 미국 주도 단극화 세계질서에 공개 도전장을 냈다. 냉전식 군비경쟁시대가 재도래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9일(현지시간) 독일 뮌헨에서 개막한 43차 국제안보회의 연설에서 미국의 군사전략을 ‘일방적이고 불법적인’ 것이라면서 미국이 새로운 군비경쟁을 촉발시키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미국의 대 러시아 견제의 증거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동진과 미사일방어(MD) 시스템을 거론하면서 “러시아 국경 인근에 군사시설을 설치할 필요가 왜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미국의 MD 시스템이 냉전시절 상호확증파괴의 공포에서 이뤄진 냉전시절 군사력의 균형을 완벽하게 뒤집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토폴 M’으로 알려진 러시아의 신형 탄도미사일은 미국의 MD에 맞서기 위한 것임을 시사하기도 했다.

이라크전에서처럼 미국의 초대군사력 행사가 또 다른 분쟁을 유발하는 불안정과 위험만 증폭시킬 뿐이라며 미국의 아픈 부분에 소금을 뿌렸다. 구소련 국가들의 선거에 감시단을 파견하는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는 한 나라의 외교적 이해를 보장하기 위한 ‘야비한 도구’로 전락했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미국은 또 러시아내 반정부 단체를 은밀히 지원, 체제붕괴를 노리고 있다면서 집권 7년 동안 진행된 미국의 교묘한 대러 포위전략을 공개 비난했다. “베를린 장벽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지만 새로운 분할 선과 규칙들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세르게이 이바노프 러시아 국방장관도 미국의 MD시스템 구축을 공개 비난하고 나섰다. 그는 이날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나토 국방장관 회담 뒤 회견에서 “체코와 폴란드의 MD시설이 북한과 이란 미사일 위협 때문이라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면서 “당장 학생들이 보는 지구본을 보라”고 지적했다. 이란은 고작 최대사거니 1700㎞의 중거리 미사일을 갖고 있을 뿐인데 이를 빌미로 동유럽에 MD를 확장하는 것은 저의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체코·폴란드와 북한의 지리적인 위치를 지적하기도 했다. 또 “누군가 러시아와 다시 군비경쟁을 벌이자고 해도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바노프 장관은 새로운 세대의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과 핵잠수함, 항공모함, 조기경보 레이더 시스템 등이 포함된 야심찬 군비 현대화 계획을 공표했다. 구소련 군대의 전투대응력을 능가하는 것을 목표로 향후 8년간 1890억달러를 투입할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이바노프 장관은 최근 러시아 두마(하원) 연설에서 최근 매년 4기씩만 늘리던 탄도미사일을 올해는 17기 확보하고 34기의 신형 토폴 M 미사일도 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5년까지 토폴 M 미사일을 추가로 50기 배치할 것이라고도 밝혔다. 러시아의 군사예산은 올해 310억달러로 2001년에 비해 4배가 늘었다.

물론 러시아가 미국과 본격 군비경쟁에 나서겠다는 선언으로 보기는 힘들다. 올해 미국의 국방예산은 전쟁비용을 포함해 6246억달러로 한국전쟁 이후 최대 규모다. 하지만 최소한 미국의 MD 확충만큼은 더이상 좌시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군사전문지 에어포스타임스 10일 보도에 따르면 미 국방부는 북한 미사일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올해 알래스카 포트 그릴리에 3번째 MD 발사기지를 건설할 계획이다. 내년 말까지 포트 그릴리와 캘리포니아 반데버그 공군기지에 모두 30기의 MD용 요격미사일을 배치한다. 미국은 또 지난 7일 체코 정부와 MD용 레이더기지 건설에 합의하는 한편 폴란드 군기지에 10기의 요격미사일을 배치키로 했다.

국제안보회의에 참석한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과 유럽 지도자들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졌다고 외신은 전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고든 존드로 대변인은 “푸틴 대통령의 발언에 실망했다”면서 “그의 지적은 잘못된 것”이라고 응수했다.(워싱턴|김진호특파원)

07.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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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12 0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러한 변화가. 안 그래도 체코 갔을 때, 체코신문(물론 영문;;;; )보니까 1면이 미국 레이다 기지를 체코에 건설하는 것에 대한 반대여서, '흡족'하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러시아 친구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고 하면서 미국을 비판하는 것이 변화이기는 하군요. MD에 대해서 러시아가 위협을 느끼지 못하고 미국에게 받는 것이 꽤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세계 정세변화에 따라서 안티-미국을 결집시키려는 행동일런지, 그것이 더 이익이라고 판단된 것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것인지 흥미롭습니다. 그래도 다시 '양극'이라 하기에는 많이 힘든 것은 사실일터인데, 다윗 수십명이 돌 던지면 골리앗도 난감하기는 하겠지요;; 퍼갑니다. ^^

나비80 2007-02-12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윗 수십명이 돌을 던지는 것 보다 자기 편 몇이 돌아서는 게 더 큰 타격일텐데 아직 그런 징후까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블레어나 메르켈, 하워드 같은 총리들이 나서서 힘을 실은 연설이었다면 파장이 더 컸겠지요.
그리고 러시아의 자신감 운운하는데 정말 그만한 수준인지도 의문이고요. 중국 쪽과 모종의 의사교환이 있었을 것 같은 추정이 들기도 합니다. 미국의 단일패권은 눈꼴십니다. 그러나 얕은 생각이지만 현실적으로 수년 내에 주목할만한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로쟈 2007-02-12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사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다 계산된 외교적 언사일 테고, 한번쯤 과시/경고하는 것이죠. '나 물로 보지 마!'라구요...
 

"좋은 지적 감사드리지만, 좀 악의적인 지적인듯 하네요. 먼저, 제임슨 원문의 해독 어려움이야 잘 아실테니, 제가 잘했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전체 맥락에서 보면 지적하신 부분은 해독이 어려워야 저자의 뜻이 살아난다고 보고 일부러'두통만 나도록' 번역한 것입니다.(...) 그 밖에 지적해주신 오역 부분은 물론 부주의 때문에 발생한 것이긴 하지만 본 번역서의 가치를 떨어뜨릴만큼 심각한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좀 더 신중한 리뷰 부탁드립니다. 님의 말대로 3d업종에 종사하면서 제대로 인정도 못받는 상황에서 이런 식의 터무니없는 부당한 악평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난주에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앨피, 2007)의 서론을 읽고 문제가 되는 오역들을 '악의적'으로 지적한 페이퍼에 대해서 역자가 달아준 댓글이다. 역자로선 할말이 없지 않은 듯하지만 이후에 본격적인 반박을 아직 접한 바 없어서 그 '할말'이 무엇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지난주에 나는 서론과 1장을 읽고서 이 번역서가 겉모양새와는 다르게 '오역서'라 할 만큼 문제가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런 생각을 피력하는 페이퍼를 썼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이런 식의 터무니없는 부당한 악평을 받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을지 모르겠다(그럼 무고죄이다!). 문제는 내가 남 헐뜯기나 좋아하는 사악한 인간이어서 빚어지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나의 판단이 어긋나서 2장부터는 아주 똑부러지게 번역을 해놓았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래서 2장까지도 읽었다. 책의 1/3이다. 하지만 책은 나로선 오역이라고밖에 판단할 수 없는 '일부러 두통만 나도록 한' 대목들이 수두룩했다(어느 출판사의 기준으로 하면 이 1/3의 오역/오타만으로도 전부 회수한 후에 개정판과 교환해 주어야 할 일이지만 기준이 다 같지는 않은 모양이다). 물론 이런 걸 지적한다고 해서 이 번역서의 가치가 떨어질 리는 없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확신한다. 오역이 좀 있다고 해서 책값이 떨어지는 경우를 나는 못봤기 때문이다. 나부터도 동네서점에서 사느라 12,500원의 책값을 다 치렀다. 누가 억울한 건가?

하지만 억울하다는데 또 어쩔 것인가? 그래서 맘을 고쳐먹기로 한다. 사실 제임슨의 소개서가 많은 것도 아니고 자주 나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웬만한 오역 정도는 알아서 고쳐 읽어도 된다(제임슨 소개서들이 다 그렇다). 해서 이 자리에서 다시 오역을 들먹이는 건 '터무니 없는 부당한 악평'으로 역자나 출판사에 위해를 가하고자 하려는 게 아니라 어떨결에 책을 구입한 독자들에게 '친절한 로쟈씨'의 미덕을 발휘하기 위함이다. 오물이 좀 묻었더라도 잘 씻어내면 또 먹을 수 있듯이 약간의 오역으로 범벅이 돼 있더라도 교정해가면서 읽으면 '본전'은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곁들여 나처럼 원서를 갖다 놓고 같이 읽으면 원서 독해력의 향상이라는 부수적인 효과를 얻을 수도 있다).

이제부터는 이 책을 구입한 몇 안되는 분들을 위한 나의 '친절'이다. 당초에 '터무니없는 부당한 악평'이란 제목을 이 페이퍼에 달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로 고쳐달았다. 그리고 카테고리도 '지겨운 책읽기'에서 '즐거운 책읽기'로 옮겼다. 그래도 잘 보여야 이 '오역의 감옥'에서 빨리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교정을 하며 읽고자 하는 게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란 2장이다, 라고 적어놓고 다시 보니까 1장 '마르크스주의자'를 먼저 읽어야 한다(젠장). 원제는 'Marxist Contexts'이다.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를 얘기하기 전에 워밍업부터 하자는 얘기겠다. 왜냐구? "제임슨은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 사상가이며, 그의 작업 역시 대부분 직-간접적으로 20세기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한 제임슨의 대표적인 저작이 그의 출세작이기도 한 <마르크스주의와 형식>(1971)이다. 우리에겐 <변증법적 문학이론이 전개>(창비, 1984)라고 소개된 저작 말이다.

참고로, 앨피출판사에서 나온 초기의 '크리티컬 씽커즈'와는 달리 이번에 나온 <제임슨>이나 <데리다>에는 참고문헌에 국내 번역서 목록이 다 빠졌다. 방침이 바뀐 모양이지만 국역본을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조 표시를 하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뭐 이런 건 내 알 바가 아닌지도).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의 특징이자 동시에 가장 논쟁적인 개념으로 꼽히는 것은 아마도 '총체성'일 것이다. 이 용어를 애용함으로써 '헤겔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많다."(48쪽). 여기서 핵심 개념 하나 나왔다. 총체성. 이거 강조 표시다(미리 말해두자면, 제임슨에게서 또 다른 핵심개념 두 가지는 '소외'와 '사물화'이다. 이거면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 다 정리된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 애덤 로버츠가 강조하는 것은 '총체성'이란 말을 애용하는 덕분에 제임슨이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로 오해를 사고 있다는 것. 마르크스주의에도 그럼 종류가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 헤겔주의에 반대하는, 그러니까 목적론적인 '총체성'을 거부하는 알튀세르주의도 있다(번역서는 시종일관 '알튀세'라고 표기했지만 여기서는 '알튀세르'라고 해두겠다).이 '알튀세리앵'들은 "헤겔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전체화 작용을 우리를 억압하는 힘으로 간주한다."

그런 배경하에 주의해서 읽어야 할 대목: "어쨌든 제임슨을, 알튀세적 접근에 다소 적대적인 루카치와 아도르노의 지적 유산을 물려받은, 전형적인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로 간주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48쪽) 원문은 "It is worth noting, however, that Jameson is usually seen as a Hegelian Marxist, an inheritor of traditions of Lukacs and Adorno and more or less hostile to an Althusserian approach."(16쪽) 

보면 알겠지만, 원문 어디에도 '올바르지 않다'는 내용은 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제임슨이 일반적으론 알튀세르적 접근법에 다소 적대적인, 루카치나 아드르노의 전통을 이어받은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로 간주된다는 점은 지적해두어야겠다."가 나의 번역이다. 물론 그런 일반적인 견해에 저자는 동의하지 않으며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를 알튀세르 진영으로 많이 끌고가고자 하는 게 그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지적해두어야겠다'를 '올바르지 않다'로 바꿔치기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게 아닐까? 뭐 아니면 말고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마르크스에 관한 기본 초식들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세계는 변혁되어야만 한다." 이거 길게 따라갈 필요 없겠다. 넘어간다. 다만,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인용한 대목(이거 방대한 분량의 정전이지만, 아직 우리에게 완역돼 있지 않다. <독일 이데올로기1>(청년사, 1998)이 전부이다. 자칭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적은 것도 아닌데 이런 번역은 왜 안 이루어지는지? 신만이 아실 거다. 나도 두꺼운 영역본만 갖고 있다). 번역문과 원문을 나란히 제시하면 이렇다.

"공산주의는 지금까지의 생산과 유통의 모든 관계를 기초부터 전복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활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엇보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창조성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 따라서 그것은 필수적으로 경제에 바탕한 조직이다."(52쪽)

"Communism differs from all previous movements in that it overturns the basis of all earlier relations of production and intercourse, and for the first time consciously treats all natural premises as the creatures of men... its organisation is, therefore essentially economic."(17쪽)

부분역이긴 하나 국역본 <독일 이데올로기>를 나도 갖고 있는 듯한데 여하튼 지금은 없다(영역본도 박스에나 들어가 있겠다). 해서 그냥 보면, 나는 아무래도 표시한 문장이 껄끄럽다. 물론 movements'를 '활동'이라고 옮긴 것도 특이한 감각이라고 생각되지만, 'treat A as B'(A를 B로 간주하다)라는 구문이 어떻게 해서 'B를 A로 삼는다'가 되는지 이해불능이다. 독어본에 어떻게 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상식적 감각은 "공산주의는 처음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모든 자연적 자산을 인간의 생산물로 간주한다." 정도로 읽는다('premise'는 물론 '전제'란 뜻이지만 복수형일 경우 '토지'란 뜻도 갖는다).

하긴 '인간의 창조성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도 좋은 말이긴 하니까 그냥 넘어가도 대차는 없겠다. 'esssntially'도 여기선 '본질적으로'란 뜻 같지만 '필수적으로'라고 옮긴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 에잇,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다. 몇 줄 내려가서 "마르크스는... 모든 인간의 활동은 경제적 관계로 결정된다고 믿었다."에서도 '인간의 활동'이 'human life'의 번역이라는 게 좀 놀랍긴 하지만 뭐 의역이라는 게 있으니까.

겸사겸사 공부도 해야 하니까 정리성 멘트: :"요컨대 마르크스에게 인간의 모든 행동은 서로 다른 계급 사이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산층 부르주아와 노동계급 사이에서 벌어지는 돈을 둘러싼 경쟁, 혹은 경제학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부를 창출하는 근원인 공장과 자원 등의 생산수단을 둘러썬 경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53쪽)

 

 

 

 

 

이어지는 내용은 알튀세르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토대-상부구조론과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론을 어떻게 수정하였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ISA) 등에 관한 내용들 역시 상식에 속하므로 넘어간다. 이러한 알튀세르의 입장이 비평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러한 이데올로기와 상부구조 이론은, 문학과 문학비평 분야의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제임슨이 지적했듯, 1930년대 초반에 이미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문화 전체를 넓은 의미의 이데올로기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제임슨에 따르면, 문화는 '단순한 오인' 이상의 것이다. 문화는 이데올로기라는 말과 함께 고려되어야 하며, '불안정한 존재와 불확실한 상황'을 유지하고자 하는 억압적 힘으로 인식되어야 한다."(57쪽)

겉보기에는 아주 멀쩡한 문장들인데 속을 들여다 보면 그게 아니다. '제임슨이 지적했듯' 이하의 원문은 이렇다: "Culture, says Jameson, is 'to be thought of as something more and other than... the false consciousness, that we associate with the word idelogy', and is instead something that possesses an 'uneasy existence, an uncertain status'."(21쪽)

일차적인 문제는 that이란 관계대명사의 선행사를 역자가 'false consciousness'가 아니라 'culture'로 잘못본 데 있다(세상에 불가능은 없다!). 해서 "제임슨에 따르면, 문화는 '단순한 오인' 이상의 것이다. 문화는 이데올로기라는 말과 함께 고려되어야 하며"를 다시 옮기면, "제임슨에 따르면, 문화는 우리가 이데올로기라는 말에서 연상하게 되는 '허위의식'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그걸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 사고되어야 하며" 정도이다. 여기서 제임슨의 (허위의식을 넘어서는) 이데올로기론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수용한 것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인 것. 번역문의 뒷부분에서 '억압적인 힘'은 도대체 무얼 옮긴 것인지 알 수 없다. 이어서 마저 옮기면, "문화는 (그러한 허위의식) 대신에 '뭔가 불안한 존재성, 뭔가 불확실한 지위'를 갖는 어떤 것이다." 과연 어디에서 "'불안정한 존재와 불확실한 상황'을 유지하고자 하는 억압적 힘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찾을 수 있는 것인지?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를 단선적인 인과적 관계로 이해한 '속류 마르크스주의'와는 달리 새로운 마르크스주의는 문화와 사회의 관계,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를 훨씬 더 복잡한 것으로 본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러한 새로운 전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이 루이 알튀세이다."(59쪽) 여기서 '새로운 전제'는 'newer development'의 번역이다. 사전적 의미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 역자의 자유자재로움이 경탄스러울 따름이다.

"알튀세는, 소비에트 공산주의 연합이라는 명분으로 스탈린적 독재가 기승을 부리면서, 정치철학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던 시기인 1960년대 초반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59쪽) 원문은 "Althusser started writing at a time, the early 1960s, when the excesses of Stalinist dictatorship in the nominally 'communist' Soviet Union had done much to discredit Marxism as a political philosophy."(22쪽)

알튀세르의 커리어에 관한 대목인데, "the nominally 'communist' Soviet Union"을 "소비에트 공산주의 연합이라는 명목으로"라고 옮긴 건 아쉽다. "자칭 '공산주의' 국가라는 소련에서" 정도의 뜻이기에(국역본은 강조할 대목들을 상당수 누락했다). 그리고 1960년대 초반이면 탈스탈린화 바람이 불던 때이다. '스탈린적 독재'가 기승을 부린 시기는 20년대 후반부터(특히 3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반까지이다. 여하튼 그 여파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뢰가 이미 땅에 떨어졌던 시기에 알튀세르가 활동을 시작했다는 얘기. 

"알튀세는 마르크스를 재검토한 뒤 총체성 개념을 불신하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총체성은 전체적(*전체성) 혹은 전부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려는 방식이다. 다양한 소논문과 비평집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헤겔적 유산과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9쪽) 대신에 "알튀세에게 '역사는 (종결이나 목적을 의미하는) 텔로스 없는 과정이자 주체가 없는 과정이다.'"(70-1쪽)

하지만, 이러한 알튀세르의 기획(project; 국역본에서는 '주장')은 마르크스주의가 헤겔의 정치사상(political ideas; 국역본에서는 '정치적 이상')을 구체적인 현실세계(materal world; 국역본에서는 '물질세계')에 적용한 것이라는 생각이 당시로선 주류였기 때문에 잘 수용되지 않았다.

상식적이지만, 조금 내용을 챙겨두자면, "1965년에 쓴 <마르크스를 위하여>에서 알튀세는 비록 초기 마르크스는 헤겔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지만, 후기 마르크스는 헤겔을 극복하여 총체성과 관련한 위험한 논의와 단절했다며 진정한 마르크스에게로 돌아가자고 역설했다. (*알튀세르의 주장에 따르면) 실제로 마르크스를 주의 깊게 읽어 보면, 그의 이론 전개 과정에서 하나의 '단절'을 발견할 수 있다. 전기의 헤겔주의자 마르크스와, 초기 저작의 위험한 헤겔주의를 청산한 후기의 과학적 마르크스 사이의 단절이다."(63쪽)

"당연히 , 알튀세는 '사회질서'나 '전체 체계' 등의 용어를 동원하여 사회와 문화를 분석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다.(...) 알튀세는 사회가 단일하고 엄격한 구조라기보다는, 다양한 요소가 상호연관된 더 복합적인 체계, 다시 말해 탈중심적 구조임을 강조한다. '사회형식' 등 첨단용어를 사용하여, 알튀세는 총체성의 '해체'를 달성하고자 한다."(63-4쪽) 

알튀세르에 관한 ABC의 나열인데, 눈길을 끄는 건 '사회형식'이라는 첨단용어(!)이다. '첨단용어'라는 말 자체가 원문에는 없을 뿐더러 이게 'social formation'의 번역이다! '사회구성체' 말이다(이진경의 <사회구성체와 사회과학 방법론>이 재출간된다는 소식도 들리는데, 바로 그 '사회구성체', 줄여서 '사구체' 말이다)! 내가 요즘 사회과학서적을 좀 등한히 했기에 그간에 '사회구성체론'이 '사회형식론'이라는 '첨단용어'로 옷을 갈아입었는지는 잘 모르겠다(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건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무지의 소치이다...  

젠장,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즐거운 책읽기'를 계속하고 싶지만 내게도 '현실원칙'이란 게 있다. 먹고 살아야 한다. 1장에 남아있는 몇 페이지는 건너뛰고 대충 마무리하도록 한다(2장은 들어가지도 못했군). "거칠게 말해서, 예술을 결정하는 다양한 사회적-문화적 요소들은 해체되어야 하지만, 알튀세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또한 그것을 재구축해야 할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러한 재구축이 여전히 모순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본인이 행하는 작업의 분명한 경제적 의미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75쪽)

이 결론부분은 잘 나가다가 삼천포이다. 아무리 자유자재로운 정신의 번역이라손 치더라도 'political sense'를 '경제적 의미'로 번역할 수 있나? 정치, 그거 따지고 보면 다 경제야, 란 계산이 깔린 거라면, 거의 대붕의 경지라 아니할 수 없다. 그게 아니라면 나로선 이렇게 덧붙일 밖에: "번역자라면 본인이 행하는 작업의 분명한 윤리적 의미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나 같은 참새 머리로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로고...

07. 02.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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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하 2007-02-18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qualia 님, '토론의 공방에서 애초에 문제가 됐던 사안에 대해 그렇다/아니다 뭐라고 상대방 분께서 표명을 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아니다의 사항이 뭔지 궁금합니다. 로쟈 님의 논리적 허점을 논박하고, 재설명하고, 재재설명했는데도,... 논리의 기본 단위는 주장보다는 근거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님에게 근거의 형식을 갖추는 진술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런 제 생각은 지극히 상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짜증나실수도 있겠지만, 님의 주장 - 근거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진술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오스틴 2007-02-20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에 대한 비판을 찾아 읽어보니, 번역이 나쁘다고만 하고 왜 어떻게 나쁜지는 이야기하고 있지 않네요. 사실 이런 비판이 최악의 비판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모든 논의를 원론적인 논쟁의 자세로 되돌리는 것은 논쟁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고, 그럴 바에야 왜 문제제기를 했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말을 돌리지 마시고, 로쟈 님이 제기한 물음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시기 바랍니다.

qualia 2007-02-20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랜스 님, 트랜스 님의 위와 같은 반응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사태의 전말을 모르시니까요. 그러나 처음부터 말을 돌린 건, 제가 아닙니다. 첫글부터 객관적으로 읽어보세요. 심정적인/주관적인 해석은 미리부터 결론을 내리고 읽었다는 오해를 사기가 쉽습니다. (제가 오해이길 바랍니다.)

"모든 논의를 원론적인 논쟁의 자세로 되돌리는 것은 논쟁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고, 그럴 바에야 왜 문제제기를 했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 트랜스 님의 윗말은 앞과 뒤가 연결이 전혀 잘못된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습니다.

논쟁 상대자가 원론까지 부정한다면, 당연히 그 점을 따지고 들어가야지요. 상대방이 원론까지 부정하고 중언부언 자기자신의 주장만 되풀이한다면, 논쟁은 제자리 맴맴이니까요. 공정한/객관적인/생산적인 논쟁이 되려면, 오히려 원론부터 확실히 하고 가야 합니다. 저마다 자기주관에 끼워맞춘 원론(그런 것도 원론이라면)을 가지고 토론을 한다면, 아무리 토론 할애비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이죠. 사정이 이러할진대, 그냥 까짓 것 원론 따위는 뛰어넘을까요?

"그럴 바에야"라뇨? 어디 qualia 댓글에 그런 의도가 처음부터 표나게 드러나보이던가요? 자세히 증거를 대주시죠? 트랜스 님, 초장부터 논리의 비약을 하시는 것은 아닌지요? 이럴 바에야, 저는 댓글조차 달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제기를 왜 했느냐구요? 왜 한 게 아니라, 문제점이 보였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애초에 제 문제제기는 로쟈 님의 조롱조 비판글과, 남의 오류를 비판하는 마당에 자기자신까지 오류를 겹으로 저지르는 실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비판에 대해서, 로쟈 님이 피장파장식 반론을 qualia한테 가해 오면서, "그릇된 유추 논증의 오류"와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를 거듭 저지르셨구요. 그런 오류들을 그냥 눈감고 넘어갈 수는 없는 것이죠.

만약에 위의 오류에 대해서 피차 간에 매듭이 있었다면, 논의는 좀더 실질적인/생산적인 오역 논쟁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컨대 여러분이 궁금해 하시는, 왜 qualia가 그렇게 <괴델, 에셔, 바흐>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그 구체적인 오역 사례는 제시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 qualia는 로쟈 님 번역 비판글에서 무엇이 그렇게 지나치게 냉소적이라고 보는가 하는 점, 로쟈 님은 오역 사례의 교정에서 어떤 실수를 저지르시는가 하는 점... 따위를 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논쟁이 제자리 맴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몹시 부끄럽고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qualia 2007-02-20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 님, 푸하 님의 앞 물음에 대해서도 답변드릴 것입니다. 그러면서 좀더 자세하고 객관적으로 제 견해를 확실히 할 것입니다. 여기는 아주 시끄럽고 담배연기 매캐한 피시방이기 때문에 정신집중이 잘 되지 않는군요. 글을 올리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로쟈 2007-02-20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확인하지만, "논쟁 상대자가 원론까지 부정한다면, 당연히 그 점을 따지고 들어가야지요. 상대방이 원론까지 부정하고 중언부언 자기자신의 주장만 되풀이한다면, 논쟁은 제자리 맴맴이니까요"의 '상대자'가 접니까? 아니면 이것도 "저는 결코 로쟈 님을 지목해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에 해당하는 건가요?..

qualia 2007-02-21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님이 다음과 같은 요지로 물으신 것에, 트랜스 님처럼 최악의 비판이라고 강력 비난한 것에, 푸하 님이 근거를 대라고 하는 요구에 대해 "학실하게" 답하겠습니다. 로쟈 님과 푸하 님, 트랜스 님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취지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qualia 너는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에 대해 그렇게 (근거도 없이) 강력하게 비판만 하던데, 그러는 네가 로쟈 님의 번역 비판에 대해서 뭐라고 할 자격이나 있는 것이냐?" 특히 로쟈 님은 이러한 심사를 밑에 깔고 다음과 같이 qualia에게 우회적으로 역질문합니다.

로쟈 님 → "저는 부러 냉소적이고자 하지는 않았지만 '따뜻한 비평' 운운할 생각은 없습니다. 번역에서 오역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자가 어디까지 관대해야 할까요?(그냥 알아서 원서대조해가며 감지덕지 읽어야 할까요?) 아니면 이렇게 해야 할까요? "곽상순님이 번역한 <프레드릭 제임슨>은 완전한 오역의 종합판입이다. 이런 불량 번역판을 찍어낸 출판사와 번역자는 크게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번역자 곽상순님과 도서출판 앨피 측에게 엄중히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푸하 님은, 로쟈 님의 위 댓글에 대한 qualia의 논박/재논박/재재논박에 대해 아래와 같이 되묻습니다.

푸하 님 → "qualia 님, '토론의 공방에서 애초에 문제가 됐던 사안에 대해 그렇다/아니다 뭐라고 상대방 분께서 표명을 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아니다의 사항이 뭔지 궁금합니다. 로쟈 님의 논리적 허점을 논박하고, 재설명하고, 재재설명했는데도,... 논리의 기본 단위는 주장보다는 근거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님에게 근거의 형식을 갖추는 진술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런 제 생각은 지극히 상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짜증나실수도 있겠지만, 님의 주장 - 근거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진술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위 로쟈 님 대응에서 분명한 것은 "피장파장(너도 역시you, too)" 식의 되받아치기입니다. 즉 qualia가 맨처음 로쟈 님의 번역비판에서 지나치게 냉소적인 "조롱조 문체"를 지적하고 나오자 → 로쟈 님은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해야 할까요?" 하고 되묻고는 → 곧장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비판글에서 거두절미한 한 대목을 따와, → 자기자신의 문맥 속에 절묘하게 끼워넣습니다. 즉 직접적 관련이 없는 제3의 사안, 즉 <괴델, 에셔, 바흐>의 오역건에 대한 qualia의 언급을, 마치 qualia의 입을 빌어 로쟈 님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둔갑시켜 역질문을 던집니다. 즉 이것은 qualia 자신의 말로 qualia 자신을 논박해 qualia의 자기모순/자가당착을 폭로하겠다는 수(사)법입니다. 즉, 나 로쟈는 이렇게 했는데, 너처럼 그렇게 해야 하느냐? 그럼 결국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피장파장인데, 뭔 말이 그리 많으냐? 너도 할말 없지? 뭐 이런 식의 대응입니다.

허나, 이런 피장파장식 되받아치기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자신의 논리적 정당성/타당성/근거를 확보할 수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기자신의 오류를 스스로 역증명하는 자기파기적self-defeating 결과로 낙착된다는 게 기본적/초보논리적 사실이죠. 아니라면, 초보논리적 명제까지 부정하시겠습니까? 여기에 대해 그렇다/아니다로 택일해서 응답할 수 있는지요?

잘 아시다시피, 너도 잘못하고 있으니 내 잘못은 그리 문제될 게 없다는 식의 강변은 남의 잘못을 들어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려는 초보적인 어거지 수법이라는 것, 아시죠? 이게 아니라면, 대체 뭐하러, 애초에 사안도 아니었던, 엉뚱한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비판글을 인용하는 건가요? 더군다나,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번역비판 문맥은 로쟈 님의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 번역비판 문맥과 사뭇 다르기 때문에, 유추적으로 인용해 물귀신 작전을 펼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따로 곧 할 것입니다.

푸하 님, "문제는 님에게 근거의 형식을 갖추는 진술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는데, 위에서와 같이 qualia가 누차 답변하고 재답변하고 재재답변했는데도, 근거의 형식이 없는 건가요? 푸하 님은 qualia가 방금 설명한 로쟈 님의 의중이 안 보입니까? 과연 qualia가 말한 초보논리 중 비논리/반논리/무논리적인 점이 어디 드러나 보이는가요? 위 사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푸하 님이 인정하기 어렵다면, 대체 푸하 님이 말하는 근거의 형식을 갖춘 진술이란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습니까?

다시 부언하면, 로쟈 님 같은 분이라면, 똑같은 글귀/낱말이라도 그것만 달랑 떼어내서 원글과는 전혀 다른 문맥contexts 속에 가져다 놓을 경우, 미묘한 풍자/빈정댐/희화화의 극적인 효과를 거둔다는 사실을 잘 아신다는 것이죠. 본능적인/원초적인 글감각/풍자감각이 남다르다는 것입니다. 로쟈 님의 글에는 곳곳에서 이런 예민한 심리적 촉각/글감각이 반짝반짝 빛을 발합니다. 허나, 위 댓글들에서와 같은 예, 다시 말해 피장파장식 인용, 비린내 피우는 오류red herring fallacy(논점 회피의 오류), 그릇된 유추 논증의 오류,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 등등의 건에서는 그것이 지나친 나머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게 아니라고 강변하셔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글쓰기의 금과옥조를 순간적으로 망각하신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로쟈 님의 qualia에 대한 비난이 이러한 오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반 인터넷 대중에게 버젓한 진실로 전파된다면, 애먼 사람 하나(나 그 이상)의 양심을 손쉽게 죽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니 엉뚱한 누명을 뒤집어쓴 qualia가 논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평범한 진리가 때로 사람을 살리고 죽입니다. yoonta 님, 푸하 님, 트랜스 님이 위와 같은 왜곡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그래서 지극히 부당한 것입니다. 어느 누가 이런 부당한, 초보논리에도 닿지 않는, 잘못된 비난을 받고 그냥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qualia 2007-02-21 0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르시는 분은 모르시고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괴델, 에셔, 바흐>의 엉터리 번역은 이미 출판계/번역계에서 공인된 사실입니다. 제가 알기로, 이를 직간접적으로 다룬 박사학위 논문까지 있습니다. 검색하면 다 나옵니다. 그리고 번역가 이덕하 님께서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이 얼마나 심각한 엉터리 번역판인지 제법 상세한 영한대역식 대조를 해가면서 비판한 글을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기도 하셨습니다. "비평고원"(cafe.daum.net/9876)에 들어가보시면 이덕하 님의 <괴델, 에셔, 바흐> 비판글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 비판글에 다음과 같은 댓글까지 달려 있죠.

국역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얘기는 진작부터 있었는데, 생각보다 더 안 좋군요... 06.07.18 19:22
 
첫번째 이덕하님의 오역지적부분을 읽고 할말을 잃었습니다. -_- 번역본을 사놓고 아직 읽어보지 않은게 정말 다행이군요. 어서 영어본이나 구해놔야겠습니다. 06.07.28 01:42

그래서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비판이 어떠한 전후 문맥/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그 비판의 주된 초점이 무엇인지, 적어도 로쟈 님은 "학실히" 아실 것 아닙니까? 따라서 그러한 공인된 정황/사실에 근거하고, 심지어 로쟈 님까지 이미 알고 계시는, qualia의 비판 문맥을 로쟈 님이 "7-8년쯤 기다려보고"  "신랄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가"하겠다는 투로 조롱하며 전혀 엉뚱한 문맥으로 바꿔치기한 것은, 말그대로 qualia의 정당한 로쟈 비판에 대한 로쟈 님의 피장파장식 민감반응이라는 것이죠. 그 대응의 수사법은 말할 나위도 없이 빈정대기에 불과한 것이죠. 즉 개인적 감정이 담뿍 실린 대응이라는 것이죠. 즉 인신공격적 요소까지 있다는 것이죠. 즉 그 말의 진짜 의도는 진정한 번역비판이 아니라는 것이죠. 사실인 즉슨, 인용의 형식을 빌린 상대방 조롱에 있다는 것이죠. 부정하시겠습니까? 이것을 저는 누차 지적했고, 재지적했고, 재재지적했고, 그 가짜 진정성에 대해 그렇다/아니다로 로쟈 님이 표명하도록 (간접적으로) 묻고 물었던 것입니다. 차라리 qualia를 비아냥거렸다고 속시원히 토로하셨다면, 이렇게까지 소모적인 논쟁으로 굴러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어느 근엄한 학자님이 제정신으로, "7-8년 정도 수정/개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아무런 개과의 정이 보이지 않을 경우에 다시 신랄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가"하라는 어떤 정신나간 허수아비"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7-8년쯤 기다려보고 적도록 하지요" 하고 운운할까요? 이게 실없는 소리가 아니고 뭡니까? 아니라면, 그런 우스꽝스런 개그 코미디를, 그럼,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진짜로 하셨다는 건가요? 게다가, "님(즉 qualia)의 충고"라고 대놓고 말씀하시던데, 아니 어떤 삐에로가 그런 "헷소리"를 로쟈 님께 일러주던가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설의법스런 질문에 로쟈 님과 yoonta 님과 푸하 님과 트랜스 님은 어떻게 답하실 건가요? 요컨대 조롱이냐/말씀이냐 중에 무엇을 택일해 답변하겠습니까? 제발, 토 달며 또 회피하지 마시길!

분명히 하기 위해, 로쟈 님의 (에둘러 피하기식 = 역질문식) 재질문 기법(?)에 대해 거듭거듭 말씀드리죠. 푸하 님도 yoonta 님도 우회적 역질문 수(사)법을 편들면서 오히려 qualia를 누차누차 역공박했으니까요. 로쟈 님 왈,

"qualia님/ 님의 입장을 정리하자면 오역서가 발견되면 처음엔 정중하고 따뜻하게 예의를 갖춰서 오역사항을 조목조목 지적하여 역자나 출판사에 알리고 7-8년 정도 수정/개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아무런 개과의 정이 보이지 않을 경우에 다시 신랄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가한다, 가 되는 건가요? 님의 불만은 저의 비평방식인가요, 아니면 타이밍인가요?(둘다일수도 있겠군요.) 한편, <괴델, 에셔, 바흐>에 대해서 오역에 대한 비판은 있어 왔지만 그 상세한 내용을 저로선 접할 수 없었습니다(역자/출판사쪽에만 알리신 건가요?). 그건 현재도 마찬가지네요(님이 비공개로 돌리셨으니). 오역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경력으로 치자면 저도 그 정도는 됩니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오역들은 아직 많이 남아있지만, 님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7-8년쯤 기다려보고 적도록 하지요. 그때까지 절판되지 않는다면..."

위 글에 대한 qualia의 논박에 대해, 로쟈 님은 ""님의 입장을 정리하자면"이라고 제가 토를 달았습니다" 하고 그야말로 "토"의 "토"를 거듭 다시더군요.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는, 토에 불과하다고 발뺌하시면서, 그 토에 불과한 가정을 "<프레드릭 제임슨>의 오역들은 아직 많이 남아있지만, 님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7-8년쯤 기다려보고 적도록 하지요. 그때까지 절판되지 않는다면..." 운운하는 로쟈 님의 "결론/결심"으로 은근슬쩍 바꿔치기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로쟈 님은 정리도 틀린 정리를 가지고 가정을 한 다음 → 그 그릇된 가정을 전제삼아 → 분명히 qualia를 빈정대는 결론으로 슬그머니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이게 옳은 논리적 말법입니까? 이런 명백한 바꿔치기 지적에 대해 솔직하고 정면돌파적인 응답/인정이나 반박/부정을 로쟈 님과 yoonta 님과 푸하 님은 한 번이라도 했는가요? 그러기는커녕 (푸하 님의 경우, 바꿔치기 이전까지의 "토"만 전략적으로 인용하고 있다는 논리적 술수는 애써 숨긴 채), 거꾸로 qualia의 요점이 뭐냐고 자꾸 되묻는 역질문 전략을 집요하게 펴지 않았습니까(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것은 문제의 핵심을 슬쩍 회피하는 것입니다. 뭐랄까, 일종의 "비린내 피우는 오류(주의 전환의 오류)red herring fallacy"라고나 할까요. 뻔한 내용을 자꾸 반복 재반복해 역질문 하시니, 그에 대한 논박 재논박도 매번 비슷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논리적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아 다르고 어 다릅니다. 로쟈 님이 위와 같이 수상한 심리적 비웃음을 밑에 깔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아무런 혐의점도 없는 논쟁의 대상자한테 인신공격적인 분위기를 뒤집어씌우면, 로쟈 님같이 막강한 필력을 휘두르는 분의 글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수많은 인터넷 대중에게 그 대상자는 순전한 "비아냥거리"나 "비열한 놈"으로 낙인찍힐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애먼 사람 웃음가마리로 만드는 거 손가락 하나 까딱입니다. 게다가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번역자가 필요이상으로 조롱조인 로쟈 님의 비난 때문에 입었을 감정의 상처를 한번 생각해 보셨나요? 로쟈 님 말씀대로 "충고를 받아들여서" 약으로 쓸 만한 진정성 담긴 비판은 진정코 없는 건가요? 물론 아니겠지요.

그럼, 로쟈 님과 푸하 님과 트랜스 님은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 비판을 꼬투리잡던데, qualia는 이에 대해 뭐라고 답변할 건가? 거듭거듭 누차누차 말했듯이,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 비판은 로쟈 님의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 번역판 비판과 괘를 달리합니다. 즉,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 비판의 주된 초점은, qualia가 최초의 댓글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구체적인 번역내용이라기보다는 "번역가의 (독자/원저자에 대한 책임감과 같은) 마음가짐과 (번역에 대한 사명감/책임감/정성/엄밀성 따위의) 번역정신"입니다.

이미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의 심각한 문제점이 만천하에 밝혀진 마당에(이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까지 나왔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게다가 로쟈 님과 같은 번역비판가/번역비평가 분들이 속속들이 알고 있는 판국에, 또 다시 구체적인 오역 사례를 일일이 꼬집어내는 것보다는, 비판의 다른 측면 즉, 수많은 비판이 직접 해당 번역자한테  전달됐는데도, 그 문제의 심각성이 보통이 아니라는 게 명확하게 드러났는데도(예컨대, 로쟈 님이 주장하시듯 독자들의 돈낭비 시간낭비가 이루 말할 수 없을 텐데도), 번역자가 자신의 오역을 인지하고 충분히 검토/반성하고 구체적 소명이나 대책을 내놓을 시점이 훨씬 지났는데도, 무대책/무책임으로 일관하고 있는 번역자의 비양심적 작태를 비판한 것입니다. 이런 비양심적/반지식인적 행태야말로 제가 정면비판한 것입니다. 엄청난 지식의 부도 사태가 출판계/대학계/지식계에서 햇볕 쨍쨍하니 벌어지고 있는데도, 나몰라라식으로 동반책임을 유기하며 무책임/비양심/반윤리/반지식인적 행태에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작금의 비겁한 지식인 세태를 비판한 것입니다. 게다가 난센스의 극치는 서울대(서울대가 대한민국에서 어떤 명예감투/막강권력/상품가치로 작용하는지 아시죠?)까지 오역의 종합판 <괴델, 에셔, 바흐>를 100권의 추천도서로 앞뒤안팎 내막도 모르는 신입생들에게 강권(서울대라는 권력은 사회적 강권아닌 강권이라 할 만하다!)하고 있는 판국입니다. "TV, 책을 말하다"보다 서울대 추천도서 100권이 더 강력하고 더 지속적인 광고 효과가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저런 무책임한 번역자/출판사의 책을 국민들한테 버젓히 권할 수 있는가? 그동안 몰랐다고 변명한다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소위 한국 최고라는 자타의 공인 아래 막중한 책임감을 짊어져야 할 서울대가 이 모양이니, 희대의 세계적 과학사기꾼을 탄생시킨 이력에 <괴델, 에셔, 바흐> 100권 추천건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과연 이런 정황/사실/문맥을 알고도 <괴델, 에셔, 바흐>와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을 동급으로 비판할 수 있을까요? 동급으로 다루더라도 "동급최강" <괴델, 에셔, 바흐>의 번역자/출판사를 따라올 자 아무도 없습니다. 알라딘에 떠있는 번역자의 변명을 한번 들어봅시다. 다소 길지만 전문을 인용하죠.

번역의 부족함에 대하여 따끔하게 꼬집어 주신 독자들에게 미안함과 동시에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일차적으로 5년전에 도전한 이 번역에서 저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형태의 책을 한국어로 어느 정도나마 읽을 수 있는 모습으로 만드는데 만족했지만, 부족한 곳이 너무 많다는 점을 전적으로 인정합니다.

번역하면서 도중에 그만 두려는 생각을 한 두번 했던 것이 아닙니다. 저 이전에도 수 많은 번역자들이 포기를 했었고 저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번역자입니다. 독자는 읽기 싫으면 책을 닫으면 되지만 번역자는 자신의 번역으로 평생 칼도마위에 오른다는 걸 누구보다도 절감하는 입장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무모하게 번역한 이유를 아실 것입니다. 부족하고 오류가 있는 부분을 차후에 개정 번역하여 진일보한 명실상부한 GEB로 거듭 날 것을 약속드립니다.

다만 번역자 나름대로의 위안은 읽히지도 않고 인구에 회자되는 신비의 원서보다는 과감하게 번역을 해서 질정을 받는 것이 낫다는 생각입니다. 그 동안 번역의 오류를 꼼꼼이 지적해 주신 여러 분야의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영어판과 대조하면서 읽은 분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다른 번역자들의 글을 후련하게 비난하고 싶지만 저는 번역자라는 재귀준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애정과 격려가 있을 때 담론은 생산적이 되지만, 대안이 없는 비판은 비난이 되기 쉽다는 점입니다.

(2003년 11월 26일 알라딘에 보내주신 작가코멘트) - 박여성(옮긴이)

위 옮긴이 말은 겉으로는 반성하고 있는 듯합니다. 반성하는 사람한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것이 과연 진정한 반성일까요? 혹 반성의 형태를 빈 변명은 아닐까요? 그러나 반성의 진정성은 번지르르한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행동/조치에 있습니다. 게다가 위 글은 진정한 반성보다는 변명과 합리화에 기울어 있습니다.

"도저히 읽을 수 없는 형태의 책을 한국어로 어느 정도나마 읽을 수 있는 모습으로 만드는데 만족했"다는 둥, "독자는 읽기 싫으면 책을 닫으면 되지만 번역자는 자신의 번역으로 평생 칼도마위에 오른다는 걸 누구보다도 절감하는 입장"이라는 둥, "읽히지도 않고 인구에 회자되는 신비의 원서보다는 과감하게 번역을 해서 질정을 받는 것이 낫다는 생각입니다"라는 둥, "저도 다른 번역자들의 글을 후련하게 비난하고 싶지만 저는 번역자라는 재귀준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애정과 격려가 있을 때 담론은 생산적이 되지만, 대안이 없는 비판은 비난이 되기 쉽다는 점입니다"라는 둥, 실로 무책임하고 오만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는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과연 해당 번역자는 도대체 독자들을 뭘로 보기에, 저런 해괴한 논리를 갖다 대는가?

<괴델, 에셔, 바흐>의 원저가 도저히 읽을 수 없는 형태의 책이라고? 독자는 읽기 싫으면 책을 닫으면 그만이라고? 신비의 원서를 과감하게 번역해서 (독자를 시험에 들게 하고) 질정을 받는 것이 낫다고? 다른 번역자의 글을 후련하게 비난하고 싶지만 자기는 번역자라는 재귀준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모순을 안고 있다고? 대안이 없는 비판은 비난이 되기 쉽다고?

이에 대해 일일이 타박을 놓기는커녕 번역자의 궤변에 기가 질려 저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까마득하게 모르고, 재귀준거의 틀 운운하는 데는 헛웃음밖에...―,.― (사족이지만, self-reference는 괴델/호프스태터 문맥에서는 자기지시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이를 두고 재귀준거라고? 도대체 그런 개념으로 어떻게 <괴델, 에셔, 바흐>의 복잡한 논증을 읽어나갔는지?)

이덕하 님의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 비판 일부를 인용해보죠.

호프스태터가 쓴 <한국어판에 부쳐>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이 책의 번역자인 박여성 교수의 여러 해에 걸친 정성스런 번역은 독자들의 부담을 한결 덜어줄 것이며, 한국어로 정착된 독자적인 GEB의 운명을 짊어지고 책읽기의 색다른 묘미를 선사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xix) 

<역자 후기>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대부분의 번역판을 호프스태터 교수가 감수했듯이, 그는 한국어판에서도 검증을 요구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이 책의 가치와 번역의 엄정성을 위해서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984) 

위에 인용된 저자와 역자의 말은 이 책의 번역이 양호함을 암시한다. 이런 식 과대포장은 나를 더욱 짜증나게 했다.

하필이면 14<TNT 및 그것과 연관된 체계들의 형식적으로 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비판한 이유가 있다. 14장은 어떤 면에서는 이 책에서 가장 어렵고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14장은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의 증명이 완결되는 부분이며 이 정리는 이 책의 핵심 테마다. 이 정리를 이해하지 않고 이 책을 이해하려 한다면 수박 겉핥기를 넘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번역서로는 골치아픈 이 책의 핵심을 결코 이해할 수 없으며 아래의 구체적인 비판이 이런 결론을 충분히 뒷받침해준다고 나는 믿는다. 28(영어판 23) 분량의 번역문에서 이 글에서 내가 지적한 오역만 76개다.

문제의 내막이 바로 위와 같습니다. 더 중언부언할 것 없이, 문제의 심각성이 저 정도라면, 번역자와 출판사는 문제의 오역판을 당장이라도 전량 회수하거나, 그게 어렵다면 더는 서점에 깔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번역자 변명에도 나와 있듯이  "개정 번역하여 진일보한 명실상부한 GEB" 번역판으로 내기로 하였다면, 일차적인 조치가 뭔지는 깨달았을 것이 아닌가? 그러기는커녕 번역자와 출판사는 오역 문제가 불거지고 비난이 들끓고 있는 와중에서 오히려 1만 얼마하던 책값을 올려 상/하권 도합 4만원에 계속 출하를 하고 있습니다. 책값낭비, 돈낭비, 시간낭비를 결부시켜 표나게 번역판의 오역을 지적하시는 로쟈 님은 이런 후안무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보다 더 심각한 게 독자들을 엉터리 번역, 잘못된 지식으로 심각하게 오도하고 있다는 사실 아닙니까? 그런 엄청난 사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위와 같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책임회피적 발언으로 어물쩍 넘어가려는 반지식인적 행태는 어떻구요?

그런데 이 엉터리 번역판과 번역자/출판사의 엉터리 양식/양심에 놀아나며, 사정/내막도 모르는 순수한 독자들은 <괴델, 에셔, 바흐>를 놓고 자기자신의 무지를 탓하고 그 책의 심오함과 난해함에 경탄하며 금쪽같은 돈을 들여 금쪽보다 더 귀한 시간을 헛되어 소진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한 블랙 코미디가 과연 어딨을까요? 이런 블랙 코미디를 보고도 못 본 척 직무유기하는 한국의 고상한 지식인들처럼 시큰둥하고 비겁한 종족이 또 어딨을까요? 오히려 비리의 몸통은 보호받고 내부고발자는 철창 가는 게 당연한 대한민국, 양심가는 바보등신 취급받고 사기꾼은 거들먹거리며 사회 유지나 지도층으로 존경받는 대한민국, 이런 따위로 뒤집힌 나라에서는 <괴델, 에셔, 바흐> 오역쯤이야 아무런 문제 축에도 끼지 못할 것입니다. 젠장, 좋은 게 좋다고 그냥 만수산 드렁칡하고 살죠, 뭐... 이렇게 하면 됩니까?

위와 같은 여러 가지 까닭으로 qualia의 <괴델, 에셔, 비판> 번역판 비판과 로쟈 님의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 번역판 비판은 그 정황과 문맥과 초점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니 7-8년이니 뭐니 하는 숫자놀음을 가지고 qualia를 걸고 넘어진다면, 그것처럼 유치하고 우스꽝스런 꼬투리가 어딨을까요? 그러니 로쟈 님이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에 대해 qualia가 비판한 것을 가지고 qualia를 넌지시 조롱/비난한 것은 그릇된 유추 논증의 오류에다 피장파장의 오류에다 비린내 피우는 오류에다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까지 매우 복합적인 오류를 저지르신 것이 됩니다. 이런 오류들을 아예 못 보시거나 애써 외면하고 역공을 펼치신 yoonta 님, 푸하 님, 트랜스 님, 모두 똑같은 오류를 저지르셨다는 혐의를 벗어나기 힘들 줄 압니다.

트랜스 님, 비판이 추상같기에 이렇게 길게 지겨운 얘기를 했는데, 답변 됐는지요? 로쟈 님, 푸하 님 qualia의 답변에 지겹지 않으셨는지요? qualia도 사실 이런 뻔한 얘기 하기 싫습니다.


로쟈 2007-02-21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는 <괴델, 에셔, 바흐>의 오역 상태와 그 심각성을 qualia님이 잘 아시는다는 것이겠네요. 하니 다른 번역서들은 같이 놓고 비교하면 안된다? qualia님이 모르시는 건 그만한 오역서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블랙 코미디가 과연 어딨을까요? 이런 블랙 코미디를 보고도 못 본 척 직무유기하는 한국의 고상한 지식인들처럼 시큰둥하고 비겁한 종족이 또 어딨을까요?"라고 흥분하시지만 그에 대한 문제제기는 제 경우에도 오래전부터 해온 일입니다(<괴델, 에셔, 바흐>만이 문제라면 한국사회를 들먹일 일도 없습니다. 논리학 타령만 하지 마시고 언어의 경제학도 고려하시길). 그래서 제가 드린 질문은 qualia님이 '따뜻한 비평' 운운하며 문제삼는 게 제 비판의 방식인가 타이밍인가 하는 겁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다시 읽어보니까 qualia님의 입장은 저와 좀 다르군요. "진짜 문제는 오역을 확인한 다음입니다. 번역가가 어떤 마음가짐을, 어떤 번역정신을 보여주느냐가 문제의 핵심일 것입니다." 오역은 어차피 불가피하므로 그 이후가 문제이다? 즉, 번역가가 그걸 반성하고 고치느냐, 고치지 않느냐. 그러니까 얼마간 반성의 시간을 주고 교정본을 내는지 주시한 다음에 비평을 가한다? 그런데, 이런 절차는 이미 제 식으로 요약정리한 내용인데, 무엇이 '오독'이었나요? 뭐가 문제입니까?..

qualia 2007-02-21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님 → 논리학 타령만 하지 마시고 언어의 경제학도 고려하시길

qualia 답변 → 언어의 경제학 지적은 받아드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qualia 자신도 언어의 경제학에 신경써야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죠. 좋은 지적 고맙습니다.

로쟈 님 → 제가 드린 질문은 qualia님이 '따뜻한 비평' 운운하며 문제삼는 게 제 비판의 방식인가 타이밍인가 하는 겁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qualia 답변 → ① 비판의 방식: → qualia가 최초 댓글에서 문제삼은 것 중 하나는 바로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번역자를 로쟈 님이 지나치게 냉소적으로 비꼬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첫 댓글에 분명히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못 읽으셨다면 다시 찾아 읽어보시죠. 또 하나는 로쟈 님의 번역 비판에 도사린 오류에 대한 지적이었습니다. 제 지적이 옳지 않다면, 증거를 들어서 역비판해주시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qualia는 로쟈 님의 비꼬기식 비판 방식을 문제삼은 것입니다. (로쟈 님이 항상 그렇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비판의 타이밍: → 이에 대한 답변도 이미 드렸습니다. 7-8년이니 뭐니 하는 숫자놀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취지로 여러 차례 답변드렸습니다. 소위 비판의 타이밍은 qualia의 비판 항목이 결코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으시겠다고요?

그럼 좀 더 확실하게 답변드리죠. 비판의 타이밍이 1년이냐, 2년이냐, [...], 7-8년이냐 하는 장단의 문제만 따질 경우,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숫자놀음이고 꼬투리잡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비판의 타이밍이라는 단어조차 로쟈 님이 만들어낸 것일 뿐입니다. 맞죠? qualia는 비판의 타이밍을 결코 문제삼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문제삼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못 알아들으시겠다고요? 해당 번역자에게 번역에 대한 책임감, 사명감, 학문적 양심, 지식인의 자기 엄결주의가 확연하게 드러나보인다면 그깟 시기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또 번역비평가와 해당 번역가 사이에 얼마든지 서로 존중하는 의견교환/상호비판이 언제든지 가능하잖습니까. 게다가 둘 사이에 비판의 과정에서 갈등/상호불신/인신공격이 뜻하지 않게 발생할 수 있지만 그런 것 따위도 얼마든지 이성적/생산적/상호존중적인 대화로 풀어나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런 의미에서 로쟈 님의 지나친 조롱조 문체는 상호존중적 대화를 이끌어내기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 제 비판의 최초 동기였고 핵심이었습니다.)

이런 다차원적인 복잡다단한 절차와 과정을 어떻게 비판의 타이밍이라는 지극히 형식적인 개념으로 단순화할 수 있겠습니까? 진짜 문제는 이런 점들을 로쟈 님이 더 잘 아시면서, 자꾸 비판의 타이밍이라는 지극히 지엽적이고 형식적인 개념을 들고나와 qualia에게 들이대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qualia의 비판글이 불명확했기 때문에 로쟈 님이 그렇게 읽어들이셨다고 끝까지 주장하신다면, 그것은 qualia의 표현능력 부족으로 알고 모든 것을 제 탓으로 돌리겠습니다.

그래도 못 알아들으시겠습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이에 대한 답변은 앞으로 포기하겠습니다. qualia의 이 포기를 로쟈 님이나 다른 분들이 어떻게 해석하든 그것도 모두 받아들이겠습니다.

로쟈 님 → 다시 읽어보니까 qualia님의 입장은 저와 좀 다르군요. "진짜 문제는 오역을 확인한 다음입니다. 번역가가 어떤 마음가짐을, 어떤 번역정신을 보여주느냐가 문제의 핵심일 것입니다." 오역은 어차피 불가피하므로 그 이후가 문제이다? 즉, 번역가가 그걸 반성하고 고치느냐, 고치지 않느냐. 그러니까 얼마간 반성의 시간을 주고 교정본을 내는지 주시한 다음에 비평을 가한다? 그런데, 이런 절차는 이미 제 식으로 요약정리한 내용인데, 무엇이 '오독'이었나요? 뭐가 문제입니까?

qualia 답변 → 제 생각에 로쟈 님은 너무 형식적이고 단선적인 시각으로 번역비판 대 번역수정 절차의 평면적 도식을 qualia의 입장이라고 들이대시는 것은 아닙니까? 로쟈 님 왈, "즉, 번역가가 그걸 반성하고 고치느냐, 고치지 않느냐. 그러니까 얼마간 반성의 시간을 주고 교정본을 내는지 주시한 다음에 비평을 가한다? 그런데, 이런 절차는 이미 제 식으로 요약정리한 내용"이라고 하시면서 그것을 qualia의 입장인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로쟈 님이 위에서 언급한 비판의 타이밍과 직결된 요약이군요? 맞죠? qualia의 주장은 그런 형식적/단선적/평면적/도식적인 것이 절대 아닙니다. 어디 번역비평가와 독자와 번역자와 출판계 간의 의견교환 관계가 그렇게 일차원적으로 단순정리될 수 있겠습니까? (qualia는, 이 점에 대해서 로쟈 님도 분명 동의하시리라 생각하는데요.) 결국 로쟈 님과 qualia의 궁극적인 견해는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qualia는 로쟈 님의 기본적인 비판정신에는 모두 동의/동감합니다.

혹시 제 답변이 불충분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콕 찍어서 다시 질문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런데, 로쟈 님은 qualia의 질문에 대해서 한 번도 답변을 하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뭐 굳이 하시지 않겠다면, 그것 또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로쟈 님과 댓글 공방을 벌이며 다소 날것에 가까운 표현을 해서, 로쟈 님께 의도하지 않았던 비례를 저질러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무리 qualia가 깝죽댄다고 해도 로쟈 님 발꿈치나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제가 댓글 공방 이전부터나 공방을 거치면서 지금까지도 로쟈 님께 느꼈던 첫인상은 변함이 없습니다. 적어도 논쟁의 객관적 자세와 개인적 감정 사이의 엄정한 구별쯤은 항상 지키려고 노력했고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진리와 양심과 비판정신만은 그 어떤 것보다 먼저 챙길 것입니다. 다시 한번 제가 본의 아니게 로쟈 님께 누를 끼친 데 대해 마음으로 사과드립니다.

2007-02-21 16:06

 


qualia 2007-02-22 0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trawalk 님, extrawalk 님의 의견 존중합니다. extrawalk 님의 의견은 extrawalk 님의 자유입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extrawalk 님이 qualia를 비판하면서 좀더 구체적인 증거를 대면서 비판했으면, qualia가 받아들이기에 더욱 좋았을 것입니다. extrawalk 님이 qualia를 비판하면서, 어느 정도 객관적이었고, 어느 정도 공정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여기서 qualia의 개인적 의견은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 논쟁에서 뚝 떨어져 있는 제3자만이 어느 정도 객관성과 공정성을 평가할 수 있겠죠.

extrawalk 님 → 애초에 누가 먼저 말꼬리를 잡고 토를 단 건지 저로서는 참 의아스럽습니다

qualia 답변 → qualia의 맨처음 댓글은 로쟈 님의 비꼬기식 비판 방식과 오역을 비판하는 번역비평가 자신의 치명적 오류에 대한 지적이었습니다. 이것 가지고 말꼬리를 잡은 것이라고 extrawalk 님이 주장하신다면, 그런 extrawalk 님의 의견 존중하겠습니다.

extrawalk 님 → 로쟈님의 이번 페이퍼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qualia님께서 처음부터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씀이 무엇이었던가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위 qualia님께서 남기신 댓글의 문맥을 살펴보면 결국 "비평이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에 다름 아닌데, 이거 너무 맥빠지는 얘기 아닌가요. 다시 말해 상대방의 글쓰기에 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식인데, 이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습니다.

qualia 답변 → qualia가 말하고자 했던 동기, 핵심, 논점 모두 다 qualia의 최초 댓글에 들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지켜보셨다는 분이라면 어떻게 위와 같이 요약할 수 있는지요? extrawalk 님같이 요약할 수 있는 분도 있구나 하고 저는 그렇게 이해는 하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extrawalk 님의 요약은 빗나갔다고 생각합니다. 제 주장의 요점은 바로 윗글, 즉 로쟈 님께 드리는 답글에 더 선명하게 나와 있으니 정확하게 읽고 반박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말한 사실에 대해서만 비판하시길 바랍니다.

extrawalk 님 → 상대방의 글쓰기에 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식인데, 이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습니다.

qualia 답변 → 제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qualia는 어디서도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았습니다. 남의 글쓰기에 대한 비판이 가당키나 한 일이냐 하고 제법 준엄하게 충고하시는데요. 로쟈 님은 학생(이나 국민)을 가르치는 분인데, 게다가 수많은 누리꾼들이 로쟈 님의 글을 읽고/퍼가고/참고하는데, 그런 분이 저지르는 오류를 목도하고도, 가만히 못 본 척 있으라 이거군요? 저는 제 스승님한테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다른 것은 다 받아들인다 해도 이 점만은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extrawalk 님 → qualia님 스스로 자중지란에 빠지셨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요. 너무 자신의 생각에 빠져서 어떤 사안을 스스로 꼬아서 복잡하게 만들고 그러시지 말기 바랍니다.

qualia 답변 → qualia가 자중지란에 빠졌다고 하셨는데, 그 구체적 증거를 들어서 비판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떤 허점에 빠졌는지 날카롭게 증명해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저는 저의 허점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 강력하게 비판해주시는 분을 정말 존경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분석도 없이, 아무런 논증절차도 없이,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선입견이 스민 인상비평이나 감정적 편견만 내세우는 비난은 수긍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견도 있구나 하고 참고만 할 뿐입니다. qualia가 무엇을 복잡하게 꼬았는지 구체적 사례를 들어 비판해주시길 바랍니다.

만약에 qualia가 처음부터 extrawalk 님식으로 아무런 논증절차도 없이, 구체적 반박사례도 없이, 로쟈 님을 일방적으로 공격했다면, 댓글 대접조차 받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2007-02-21 17:40

 


푸하 2007-02-22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qualia 님, 공들인 글 잘 읽었습니다. 님 글의 주된 대상이 되는 저이기에 여러 1차적 판단과 인상 그리고 감정들이 머리와 가슴속에 물결 치듯했습니다. '아'와 '어'는 다르다는 것, 이게 논리적 판단의 기초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시기를 정하기 어렵지만 되도록 빠른 시간내에 구체적으로 검증가능하도록 이야기 하겠습니다.

로쟈 2007-02-22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게 답변드리지 않겠습니다. 요는 비판의 타이밍 문제가 아니라 비판의 방식이라는 것. 제 방식이 지나치게 냉소적이라는 것. 그리고 첫댓글의 표현을 빌면, '엄밀함과 치밀함과 매끄러움'이 부족하다는 것. 이 후자의 경우엔 따로 qualia님의 모범을 보여주시면 될 거라고 봅니다(바보에게 넌 왜 바보냐라고 몯는 건 소모적입니다. 바보가 아닌 방식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죠). '냉소적'이라는 건 가능한 평이긴 하나 정확한 건 아닙니다(제가 냉소적이었다면 굳이 이런 일에 시간낭비하지 않습니다). 조롱 섞인 비평이 차라리 적합한데, 그건 '블랙 코미디'에 대한 제 반응입니다. 너털웃음을 터뜨릴 수도 있고 이맛살을 찌푸리거나 비분강개할 수도 있을 사안에 대해서 조롱 섞인 비평을 늘어놓는다는 게(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오역의 정도에 따라서 제 반응은 조금씩 다릅니다) 특별히 비난받을 만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qualia님의 핵심적인 의견은 "번역자에게 번역에 대한 책임감, 사명감, 학문적 양심, 지식인의 자기 엄결주의가 확연하게 드러나보인다면 그깟 시기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또 번역비평가와 해당 번역가 사이에 얼마든지 서로 존중하는 의견교환/상호비판이 언제든지 가능하잖습니까"로 정리하겠습니다. 그런 경우가 흔하지 않다는 것일 뿐 저 또한 그런 '의견교환'을 나눌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괴델, 에셔, 바흐>의 경우에 "번역비평가와 해당 번역가 사이에 얼마든지 서로 존중하는 의견교환/상호비판이 언제든지 가능하잖습니까"를 경험하신 건지요? 그 경우에 역자는 "번역에 대한 책임감, 사명감, 학문적 양심, 지식인의 자기 엄결주의"를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시는 건가요?(거듭 말씀드리자면 <괴델, 에셔, 바흐>는 예외적인 사례가 아닙니다.)

제 경우엔 그게 모순적인 주장처럼 여겨지는데 "번역에 대한 책임감, 사명감, 학문적 양심, 지식인의 자기 엄결주의"를 갖춘 역자라면 매 페이지마다 오역이 속출하는 번역을 책으로 내지 않습니다(그게 가능하다고 보시면 저와 의견이 다른 겁니다. 무엇이 번역에 대한 책임감이고 사명감이며 학문적 양심이고 지식인의 자기 엄결주의인가에 대해서). 견해가 다른 만큼 다른 방식의 비평을 택한다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 싶네요. 저는 평면적 방식을 선택하겠습니다. qualia님이 '입체적인' 방식을 보여주신다면 상호보완이 될 거라고 믿어집니다. 건필하시길...

푸하 2007-02-24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qualia의 핵심적 입장을 정리하자면 <괴델, 에셔, 바흐>에 관한 비판은 구체적인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번역가의 마음가짐과 번역정신을 비판하는 것이다. 로쟈님의 비판은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구체적인 번역비판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역 비판에서 <괴델, 에셔, 바흐>와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을 같은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1. 다른 속성을 동일한 잣대로 비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두 책 모두 오역이 눈에 띈다는 것입니다. 로쟈 님도 이러한 두 책을 오역이라는 같은 속성에 기대어 같은 잣대로 판단한 것입니다. 물론 qualia님 입장에서는 번역가와 출판사의 마음가짐과 번역정신을 비판하는 주된 속성을 지닌 페이퍼가 구체적인 번역내용을 비판하는 로쟈 님의 페이퍼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어느 공통점을 비교의 대상으로 선정할 것인지 하는 것은 열려있습니다. 두 책은 오역서라는 무시 못 할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2. 로쟈 님의<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비판은 번역가의 마음가짐과 번역정신을 비판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초기단계만 보더라도 출판사와 번역가의 마음가짐과 번역정신은 파악 가능합니다. 구체적인 오역지적이 형식적일 뿐이겠습니까? 번역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은 번역가의 마음가짐과 번역정신에 대한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로쟈 님의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비판은 구체적인 번역비판인 동시에 번역가와 출판사의 마음가짐 번역정신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qualia님의 가장 기초적인 진술인 따라서 이후 로쟈 님을 비판하는 논리의 기본적인 토대를 이루는 ‘오역 비판에서 <괴델, 에셔, 바흐>와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을 같은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는 잘못된 진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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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에코리브르, 2007)과 함께 주문한 신간은 욜렌 딜라스-로세리외의 <미래의 기억 유토피아>(서해문집, 2007)이다. 저자나 역자 모두 생소하고 불어본의 번역이라서 망설여지긴 했지만, '토마스 모어에서 레닌까지'란 부제가 암시하듯이 러시아 근현대사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포함돼 있어서 일단은 '참고자료'로 구입을 결정한 것. 그러고 나서 리뷰들을 찾아보니 의외로 많이 뜬다. '유토피아'란 주제가 아직도 언론에서는 '먹히는' 이슈인가 보다. 한데 자세히 뜯어보니 리뷰의 시각이 제각각이다. 이 책에 대한 반응을 두고서도 '무리짓기'가 가능할 정도로. 두 가지 사례로 한국일보와 중앙일보의 리뷰를 차례로 읽어본다.

한국일보(07. 02. 10) 존재만으로도 큰 매력 '미래의 기억 유토피아' 

오늘날, 유토피아는 있는 것일까? 있다면 어떤 행태일까? 거칠게 말해, 책의 결론은 쓸쓸하다. 이상향에 대한 꿈 따위는 깨라고. 현실이 웅변하고 있지않은가. 베를린 장벽과 더불어 공산주의의 준거틀이 무너지자, 유토피아에 대해 유효하게 남은 것이라곤 미래에 대한 기억뿐이다. 궁지에 몰린 ‘최후의 인디언 부족’과 같은 운명에 놓인 정통 공산주의자들에게 주어진 길이라곤 새로운 혁명밖에 없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와 미국의 강고한 패권주의에 내몰려 역사는 막다른 골목에 처한 것만 같다. 유토피아에 대한 사유조차도 끝인가.

그 출발은 당연히 토머스 모어의 저작 <유토피아>다. 일체의 사유 재산과 화폐를 부정하고 노동을 사회적 책무로 부과하는 기독교의 근본 정신은 17, 18세기 계몽주의와 결합해 카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같은 평등주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작품으로 계승된다. 감성적 차원의 초기 유토피아론들은 프랑스 혁명을 겪으면서 실천적 강령을 갖춰 간다. 평등 아니면 죽음도 불사한다며 기득권에 대해 총칼을 든 그라쿠스 바뵈프에 의해 도구화ㆍ합리화되는 길을 걷게 된다. 유토피아에 대한 사유는 이어 생시몽 등 19세기의 선구적 공산주의 또는 무정부적 신질서론으로 모양새를 갖춰 나간다.

현실 사회의 원리와 공동체의 원리 중 어떤 것을 채택할지, 그들의 후예는 부단히 고민해 오고 있다. 폐쇄적 상업 국가가 될지, 사유 재산과 가족 제도가 사라지고 사랑과 노동은 모든 이해와 도덕 관계에서 해방되는 사회가 될지, 도대체 어떤 공동체적 사회의 모습을 취할지 그들은 현실 사회 질서에 대한 뜨거운 반명제들을 생산해 왔다. 그 열망은 오늘날에도 엄존한다. 프롤레타리아 없는 도시에서 모든 사람들이 높은 수준의 교육과 생활 수준을 향유해야 한다는 주장, 노동에서 해방된 유목민적 생활에의 강조, 나아가 모든 불합리와 억압이 일거에 사라진 ‘가짜 사회’와 그를 위한 어설픈 실험과 정교한 문학 작품 등.

어쨌든 확실한 것은 유토피아에 대한 희구다. 젊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반파시즘, 반인종차별주의, 반자유주의, 반제국주의 등 다양한 급진 운동은 유토피아와의 연관 없이는 설명할 길 없다. 또 현재 과학 문명이 일궈낸 가능성도 그에 동참한다. 이데올로기의 틀을 깨고 나온 새로운 전망, 즉 인터넷을 통한 가상 공간 등에서 새 길을 모색하는 움직임을 보라.

아무 데도 없는 나라로의 여행이라는 원칙. 공교롭게도 우리 시대가 찾아낸 새 비전은 토머스 모어가 제시했던 저 원칙으로 회귀 중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유토피아라는 허망한 꿈과 유토피아만이 줄 수 있는 가능성 사이의 방대한 공간을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모른 척 해오지 않았는지를 책은 묻고 있다. 현실이 가능성 보다 억압의 상징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유토피아는 존재 가능성만으로도 끊임없는 매력이다. 최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불거지는 대안적 공동체의 비전도 결국 유토피아의 가능성에 실질적 근거를 두고 있다.(장병욱 기자) 

중앙일보(07. 02. 10) 그대 아직도 유토피아를 꿈꾸나

현실과는 달리 행복한 세상, 그야말로 꿈같은 사회를 우리는 '유토피아'라고 부른다. 16세기 악덕 귀족의 횡포에 분노한 영국의 '모범 귀족' 토마스 모어가 기독교 정신으로 돌아간 이상적인 사회를 그린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파리10대학(낭테르)의 사회학과 교수인 지은이는 이 책에서 유토피아라는 매혹적인 개념의 역사와 본질을 깊이 있게 파헤친다. 그에 따르면 유토피아는 '풍요'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서로 상충하는 두 열매를 동시에 따먹으려는 인간의 모순된 욕망을 반영한다. 공산주의 유토피아인 '인민의 낙원'은 그런 모순 때문에 현실에서 사라졌다.

꿈꾸는 것은 공산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다. 20세기 초 논객인 앙드레 고다르는 '형제애로 단결된 유럽이 십자군의 기치 아래 문명과 기독교를 전파하는 과업을 수행하는' 꿈을 꾸었다. 조국.노동.가족.종교라는 예언자적 구호로 가득 찬 그의 사상은 국가사회주의, 즉 나치즘의 바탕이 됐다.

유토피아를 현실에서 구현해 보려는 사람도 많았다. 이탈리아의 무정부주의자 조반니 로시는 '사회적 화학실험실'이라는 공동체를 세우고 농민들에게 사회주의를 주입,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시도했다. 무정부주의자 세바스티앙 포르는 어린이에게 희망이 있다고 보고 1904년 시골에 교육공동체를 세워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쳤다. 1854년 빅토르 콩시데랑은 미국 텍사스에 땅을 사서 새로운 유토피아를 건설할 계획을 추진했다.

결과는 모두 실패다. 유토피아를 제시하는 몽상가들은 실현 가능성은 따지지 않으며, 현실과 상상을 교묘하게 섞어 사람들의 혼동을 유발한다는 지은이의 지적이 새겨들을 만하다. 그에 따르면 유토피아의 태반은 새로운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기존 정치시스템의 위험성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현실에 대한 불만이 가득 차야 유토피아를 꿈꾼다는 뜻으로,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미권이 아닌 프랑스의 학자가 지은 책답게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사상들이 상당히 낯설다. 그런 만큼 자극도 신선하다.(채인택 기자)

07. 02. 11.

P.S. 일단 타이틀에서 두 리뷰의 방점이 어디에 놓일지 암시된다. 전자는 역사상 수많은 시도와 그 실패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의 매력과 그 희구의 불가피성을 시사한다면, 후자는 그 매력보다는 '실패'에 초점을 둔다. 문제는 두 가지이다. (1)유토피아에 대한 희구는 언제나 나쁜 결과를 낳았다. (2)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유토피아를 꿈꿀 수밖에 없는 나쁜 세상이다. 과연 미덕은 현재의 나쁜 세상을 견디는 것인가, 아니면 (불확실하지만) 미래의 유토피아, 혹은 '나쁜 세상'으로 뛰어드는 것인가.

 

 

 

 

유토피아란 주제와 관련해서 예전에 읽은 책은 월러스틴의 <유토피스틱스>(창비, 1999)와 자코비의 <유토피아의 종말>(모색, 2000)이다. 그리고 <미래의 기억 유토피아>와 함께 이번에 더 읽어보려고 하는 것은 <유예된 유토피아, 공산주의>(부키, 2005)와 모처럼 나온 국내저작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책갈피, 2007)이다(후자는 엊그제 주문했다). 중량감 있는 책들은 아니지만 어떤 주제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데에는 얇은 책들이 더 유용할 때가 있다.

L'Utopie ou la mémoire du futur, De Thomas More à Lénine : Le Rêve éternel

참고로, 기사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이번에 번역된 <유토피아>의 저자 로세리외는 "파리 10대학(낭테르) 사회학과 교수"이면서 "공산주의와 유토피아 사상 전문가"라고 한다. 그런데, 프랑스 아마존에서 검색되는 책은 이 책 한권이다. '전문가'가 되는 루트가 따로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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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11 19:17   좋아요 0 | URL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 쟁겨두어야 겠네요. :) 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