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받은 책들 중의 하나는 들뢰즈의 <시네마1>(시각과언어, 2002)이다. <시네마2>는 갖고 있지만 <시네마1>은 이전 번역본인 <영화1>(새길, 1996)을 갖고 있어서 따로 구입해두지 않았었다. 한데, <시네마>를 자세히 읽어두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참고삼아 <시네마1>도 마저 구입한 것. 이 국역본들 외에 내가 갖고 있는 건 영역본과 러시아어본이다.

 

 

 

 

책은 출간 당시에 구내서점에서 한번 들춰보고 따로 확인해보지 않았었는데, 집으로 오는 전철칸에서 서문 등을 읽어보고 좀 짜증이 났다. 역자가 만 스물아홉에 '현역 번역병'으로 복무하면서 틈틈이 번역한 것이라고 '옮긴이의 글'에 적어놓고 있는데, 딱히 그런 것과 연관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번역이나 책의 만듦새가 일견 엉성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 글은 주로 그 서문 읽기에 할애될 것이다.

일단 서문의 첫문단부터가 눈에 거슬렸다: "이 연구서는 영화사가 아니다. 이것은 분류학이며 이미지와 기호의 분류에 대한 수기이다. 그러나 이 첫번째 권은 요소들, 심지어 분류의 오직 일부분의 요소들을 규정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이 책의 장르가 '수기'란 말인가? 가관인 건 책의 뒷표지는 같은 대목을 또 다르게 옮겨놓았다는 것: "이 연구는 영화사가 아니다. 이것은 영화에 나타난 이미지와 기호들의 분류에 대한 시론이다." 편집자의 불찰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자신이 시도하고 있는 게 영화사가 아니라 이미지와 기호의 분류학임을 천명하고 있는 대목인데, 물론 맞는 쪽은 '수기' 아니라 '시론'이다(영역본은 'an attempt'라고 옮겼다). 짐작에는 베르그송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donnees immediates de la conscience)>이라고 할 때의 그 '시론'(Essai)을 갖다쓴 게 아닌가 싶다. '한번 해본다'는 뜻의 '에세(이)' 말이다. 그건 '수기'와는 종류가 다르다고 해야겠다. 

영역본을 옮긴 새길판은 이 대목을 이렇게 옮겼다: "이 연구는 영화의 역사학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분류학, 이미지와 기호들을 분류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이 제1권은 분류의 요소들을, 그나마도 단지 한 부분의 요소들을 결정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 '영화의 역사학'이 아니라 그냥 '영화사(a history of the cinema)'로 충분하다.

이어지는 문단: "우리는 자주 미국의 논리학자인 퍼스(1839-1914)를 참조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이미지와 기호의일반적 분류를 수립했기 때문이고, 그것은 분명 가장 완전하고도 다양성을 지난 것이다. 그것은 자연과학에서의 린네의 분류와도 같은 것이며, 또는 화학에서의 만델례예프의 도표와 같은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문제에 새로운 관점들을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새길판: "우리는 미국의 논리학자 퍼스(1839-1914)를 자주 참조하게 될 것인데, 이것은 그가 이미지와 기호들에 대한 일반적인 분류법을 확립하였으며, 이 분류법이 의심할 바 없이 가장 완전하고 가장 다채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사에서의 린네의 분류법이나 화학에서의 멘델레프의 표와 비교될 수 있다."

들뢰즈가 영화에서의 이미지와 기호의 분류학을 시도하면서 최적의 참조대상으로 삼는 것은 미국의 논리학자/철학자 퍼스인데, 퍼스의 기호 분류학이야말로 린네의 종 분류법이나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에 비견할 만하다는 게 인용문의 내용이다. 내가 불만스러워한 것은 러시아 화학자의 멀쩡한 이름 'Mendeleev'가 '만델레예프'라고 엉뚱하게 표기돼 있는 것('멘델레프'라고 옮긴 새길판도 정확한 건 아니다). 불어로는'Mandeleiev'라고 병기해놓으면서(실제로 그런가?). 너무도 상식적인 이름이어서 오히려 읽는 독자가 당혹스럽다.

참고로, 마지막 문장 "영화는 이러한 문제에 새로운 관점들을 강요하고 있다"는 영역본과 새길판에 빠져 있는데, 러시아어본에는 "하지만 영화는 이 경우에(=이 분류학에 있어서) 얼마간 새로운 접근법을 요구한다."라고 돼 있다.

 

 

 

 

이어지는 문단: "여기에는 그 못지 않게 필연적인 또 다른 난제가 있다. 베르그송은 1896년 <물질과 기억>을 저술했다: 그것은 심리학의 위기에 대한 치료였다. 사람들은 더이상 외부세계의 물리적 현실로서의 운동과, 의속 속의 심리적 현실로서의 미지를 대립시킬 수 없었다. 운동-이미지, 더 심오하게는 시간-미이지에 대한 베르그송의 발견은 오늘날까지도 그것의 의의를 모두 이끌어낼 수 없을 만큼의 풍부함을 지니고 있다."

새길판: "또다른 비교가 이에 못지 않게 필요하다. 베르그송은 1896년에 <물질과 기억>을 쓰고 있었다. 그 책은 심리학에서으 위기에 대한 진단이었다. 외적인 세계의 물리적 실재인 운동과 의식 속의 심적인 실재인 이미지는 더 이상 대립될 수 없었다. 운동-이미지와, 더 심오한 것으로 시간-이미지의 베르그송적인 발견은, 과연 이 발견으 결과들이 모두 도출되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을 정도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풍부함을 갖추고 있다."

시각과언어판에서 '또 다른 난제'가 무엇의 번역인지는 모르겠지만 문맥상 어울려 보이진 않는다. 그리고 '치료'도 다른 번역서들에서는 모두 'diagnosis'에 해당하는 번역어들이 쓰이고 있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에 대한 베르그송의 발견이 들뢰즈의 영화론에서 핵심적이라는 것. 그러니까 들뢰즈의 <시네마>를 읽기 위해서는 퍼스와 베르그송에 대한 참조가 필수적이다.

비록 베르그송 자신은 영화이론의 구성에 있어서 자신의 기여/지분에 대해서 의식하지 못했었지만: "나중에 베르그송이 영화에 대해 행한 지나치게 간략했 비평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루었던 방식대로의 운동-이미지와 영화적 이미지를 연관짓는 일을 가로막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시각과언어판) "베르그송이 얼마 있지 않아 가했던 영화에 대한 다소 성급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것도 그가 숙고했던 것과 같은 운동-이미지와 영화적 이미지의 만남을 방해할 수 없다."(새길판)

베르그송의 '지나치게 간략했던 비평'은 영역본에서 '다소 성급한 비판(rather overhasty critique)', 그리고 러시아어판에서는 '지나치게 피상적인 비판'으로 옮겨지고 있다. 문맥상 '간략했던 비평'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들뢰즈가 <시네마>에서 하고자 하는 일은 운동-이미지, 시간-이미지 같은 베르그송 자신의 개념들을 그가 간과/무시했던 영화적 이미지들과 접속시키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그는 제1권에서 운동-이미지를, 제2권에서는 시간-이미지를 다룬다.

그렇다면 (고상한) '철학자' 들뢰즈가 왜 굳이 (하찮은)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 거창한 프로젝트를 작동시키는가? "우리가 보기에 영화의 위대한 작가들은 화가나 건축가, 음악가들뿐 아니라 사상가들에 비견될 만하였다. 그들은 개념 대신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를 가지고 사유한다."(시간과언어판) "우리가 보기에, 위대한 영화감독들은 화가나 건축가 및 음악가들분만 아니라 사상가들과도 비교될 수 있다. 그들은 개념 대신에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들을 가지고 사유한다."(새길판) 그러니까 위대한 영화감독들 자신이 바로 '위대한 사상가들'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들뢰즈의 자부심: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글을 위해 삽화가 될 어떠한 복제물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우리 각자가 많든 적든 기억과 감동, 또는 지각을 공유하고 있는 위대한 영화들의 삽화가 되고 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글이기 때문이다."(시각과언어판) "우리는 이 책에 어떤 복제사진도 도판으로 제공하지 않고 있다. 우리들 각자가 많든 적든 그것에 대한 기억과 감동 또는 지각을 보유하고 있는 그 위대한 영화들의 도판이 되기를 열망하는 것은 사실 이 책 자신이기 때문이다."(새길판) 

이 '글'과 '책'은 영역본과 러시아어본에서 모두 '텍스트(text)'이다. 따로 영화의 스틸사진 등을 제공하지 않은 것은 들뢰즈의 텍스트 자체가 그가 다루는 위대한 영화들의 '도판'이길 바라기 때문이라는 것. 그게 말하자면 들뢰즈와 이 책 <시네마>의 자부심이겠다. 덕분에 우리는 400쪽 안팍의 책을 아무런 이미지의 도움없이 읽어내려가야 한다. 마치 이미지들인 양!..

07. 02. 15 - 18.

P.S. 널리 알려진 건 아니지만 철학자 들뢰즈의 딸 에밀 들뢰즈(1964- )가 영화감독이란 사실은 더이상 비밀도 아니다(아버지를 많이 닮은 얼굴이다). 그녀의 첫 장편 데뷔작 <새로운 시작>이 국내 TV를 통해서 방영된 바도 있기 때문이다(단편영화는 1986년작이 데뷔작인 듯하다). 바로 재작년 2월 19일의 일이었다(나는 잠깐 보았었다). 당시 한 신문의 소개기사는 이랬다.

"철학자 질 들뢰즈의 딸인 에밀 들뢰즈(41)의 1999년 장편 데뷔작으로 칸영화제 비평가상을 받았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일과 인간관계에서 아무런 느낌과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게 된 한 남자가 새로운 출발을 시도한다. 그는 또 한 인간과 새로운 소통을 희망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인간들 사이의 소통의 벽, 인간 존재의 독자성 등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영화는 전문배우와 비전문배우를 한데 섞어 사실적인 연출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에릭 로샹 감독의 <토틀 웨스턴>에 출연했던 사무엘 르 비앙이 주연을 맡았다.

서른 살의 알랭(사무엘 르 비앙)은 세상이 지리멸렬하다. 아내와 딸은 그를 사랑하지만 그는 이렇다 할 감흥이 없다. 어느 날 갑자기 견디지 못할 것같은 무게감에 짓눌린 알랭은 지금까지의 모든 인간 관계를 버리기로 결심한다. 비디오 게임 테스터였던 이전 직업을 버리고 포클레인 기사가 되기 위해 직업훈련 센터를 다니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누’라는 남자를 만나면서 또 다른 변화를 겪게 된다."

그녀의 최신작은 <미스터 V.>(2003)이다. 그녀가 언젠가 자살로 생을 마친 '아버지 들뢰즈'에 대한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짓궂은 기대이지만 그런 기대를 갖는 건 또한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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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와보니 지난달 러시아에 주문했던 책들과 지난주 알라딘에 주문했던 책들이 한꺼번에 도착해 있다. 모두 16권이다. 복사를 맡긴 책들도 오늘 받게 되면 스무 네댓 권은 되겠다. 책으로만 치자면 흥부네가 따로 없다(해서 안팎으로 구박이다). 산악인들이 흔하게 말하는 것처럼 그저 '책이 있을 뿐'인 것을. 세월은 가도 책은 '옛날'처럼 남으리라.

 

 

  

 

오늘 받은 책들 가운데 제일 먼저 펼쳐본 것은 정현종 시인이 이번에 완역 출간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민음사, 2007). 그리고 서가에서 찾아와 나란히 펼쳐놓은 게 이전에, 사랑의 시와 절망의 노래를 포함해 모두 21편의 시 가운데 4편만을 번역해 실었던 네루다 시선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민음사, 1989/1994)이다. 언젠가 첫번째 시 '한 여자의 육체'에 대해서는 다른 번역 2편까지 포함해서 자세한 읽기를 시도한 바 있지만, 이번에 비교해보니 정현종 시인의 번역에도 많은 수정이 가해져 있다. 거의 '두 편의 시'라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그걸 비교해서 옮겨놓는다(색깔을 넣어 처리한 게 2007년판이다. 수정된 부분은 강조처리했다).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나를 내맡길 때, 너는 세계처럼 벌렁 눕는다.

야만인이며 시골사람인 내 몸은 너를 파들어가고

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나를 맡길 때, 너는 세계와 같다.

내 거칠고 농부 같은 몸은 너를 파 들어가고

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다.

그리고 밤은 그 막강한 군단으로 나를 엄습했다.

살아남으려고 나는 너를 무기처럼 벼리고

내 활의 화살처럼, 내 投石器의 돌처럼 벼렸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고,

밤은 그 강력한 침입으로 나를 엄습했다.

살아남으려고 나는 너를 무기처럼 벼리고

화살의 활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 벼렸다.


허나 인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피부의 육체, 이끼의 단호한 육체와 갈증나는 밀크!

그리고 네 젖가슴 잔들! 또 放心으로 가득 찬 네 눈!

그리고 네 둔덕의 장미들! 또 느리고 슬픈 네 목소리!

그러나 이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벗은 몸, 이끼의, 갈망하는 단단한 밀크의 육체!

그리고 네 젖가슴 잔들! 또 방심(放心)으로 가득 찬 네 눈!

그리고 네 치골의 장미들! 또 느리고 슬픈 네 목소리!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경이로움을 통해 살아가리.

내 갈증, 끝없는 내 욕망, 내 동요하는 길!

영원한 갈증이 흐르는 검은 河床이 흘러내리고,

피로가 흐르며, 그리고 가없는 슬픔이 흐른다.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우아함을 통해 살아가리.

내 갈증, 내 끝없는 욕망, 내 동요하는 길!

영원한 갈증이 흐르는 검은 하상(河床)

그리고 피로가 따르며 가없는 아픔이 흐른다. 

 

 

당장 여기서 실행하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번역상의 수정/차이를 음미해보는 일은 '시 번역' 일반론뿐만 아니라 정현종 시인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흥미로운 단서들을 제공해줄 것이라 믿는다. 잘 알려져 있다시지 네루다의 이 처녀시집은 그가 열아홉살에 낸 것이다. '해설'에서 역자가 평해놓은 바에 따르면, "이 시집은 우리가 다 겪게 마련인 젊은 시절의 욕망의 혼돈, 특히 성욕이 충동에 따른 즐거움과 괴로움, 사귐과 고독, 만남과 헤어짐 따위가 만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넘친다. 물론 그 소용돌이는 시라고 하는 형식을 통해서 질서를 얻은 것으로서, 품격을 잃지 않은 표현의 적나라함과 솔직함이 커다란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52-3쪽)

 

 

 

 

 

흔히 정현종 시인은 '교감의 시인', '에로티시즘의 시인'으로도 평가받지만 대개 그가 다루는 교감과 에로티즘은 식물적인 성향이 강하다. '헐벗은 가지의 에로티시즘' 같은 표현이 대표적이다. 나는 그 '에로티시즘'에서 '네 젖가슴 잔들'이나 '네 치골의 장미들' 같은 구절을, 혹은 그에 상응하는 구절을 읽어보지 못했다. 네루다의 "품격을 잃지 않은 표현의 적나라함과 솔직함"을 그가 매력으로 꼽고 있는 것은 그것이 그의 시의 '결여항'이어서 아닐까 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그것이 네루다가 정현종에게서 갖는 의의라고 보는 것이다). 

간략한 연보를 읽은 기억에 따르면 정현종 시인은 청소년 시절 카톨릭 교회에도 다닌 바 있고, 아마도 종교나 구원 같은 문제에 얽매였을 법하다. 한데 네루다의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나를 내맡길 때, 너는 세계처럼 벌렁 눕는다" 같은 세계는 그야말로 정반대편의 세계 아닐까? 시인은 '내 여자의 육체'를 말하는 대신에 '나는 별아저씨, 바람 남편이지'를 상습적으로 읊조리곤 했을 따름이다. 그의 '품격'은 '적나라함과 솔직함'의 결여태였다...

07. 0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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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4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14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그걸 내뱉지는 않는 게 시인의 '점잖음'이죠(네루다와는 다른)...
 

아침에 집에서 나오다 보니 우편함에 책 한권이 꽂혀 있다. <시인세계> 봄호였다. 짐작에 우체부 아저씨가 아침일찍 다녀간 모양이다. 그리고 드는 생각은, '시인의 마을'엔 봄도 일찍 오나 보다. 하지만 오늘 날씨는 아직은 겨울이라는 듯이 좀 쌀쌀하다. 올겨울 눈이 왔던 기억도 한번밖에 없어서 이 정도 '쌀쌀함'은 애교스러워보이지만. 오늘자 한국일보에 이 <시인세계> 봄호의 특집과 관련한 기사가 실렸기에 겸사겸사 옮겨놓는다. 기사에서는 다루어지고 있지 않지만 잡지에는 '강화도 시인' 함민복의 인터뷰 기사도 들어 있다. 흥미롭게 읽었다.

한국일보(07. 02. 14) 우리 시대 詩人들의 방 '서울 땅에 있어도 불우한 유목민'

1990년대 초반 시인 유하가 시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서 끌어 안은 것은 세속의 즐거움이었다. 이후 후기 자본주의적 질서와 쾌락의 얼개는 시 세계까지 삼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 시인들의 거개는 순응하지 않고 자신에게 허여된 공간과 삶의 불일치를 기꺼이 받아 들이며, 창작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시인세계> 봄호는 ‘시인의 집, 시 속의 집’이라는 기획 특집을 마련, 한국시인협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 주소록을 토대로 전국에 거주하는 1,434명의 시인들이 어디서 창작의 처소를 틀고 있는지 밝혔다. 그 간 간헐적으로 이뤄져 온 조사였지만, 이번에 최초로 현직 시인의 발품을 빌어 재구성한 것이다.

전체 시인의 35%인 547명이 살고 있는 서울은 숫자상으로 시인 공화국이다. 그러나 “그들이 서울 땅에서 부르는 노래는 불우의 연주이며, 서울서 충혈된 눈을 가진 그들은 현대적 유목민”이라고 조사를 진행한 우대식(42) 시인은 규정했다. “죽은 사람들만 불러 모아 사망자 주식회사를 만들고 영원히 죽고 싶은 나”로 스스로를 노래 부른 안현미 시인의 “활짝 핀 착란”만이 살아 있는 곳이다(<시구문 밖>ㆍ2006년).

한편 274명의 시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집계된 경기도에는 일산이 최대의 시인 군락(40여명)으로 나타났다. 대전(39명)도 그와 비슷한 수준. 이 밖에 인천(37명ㆍ함민복 등)을 비롯, 안성(고은 등) 용인(박이도 등) 양평(박용하 등)의 순으로 드러났다.

충남(38명)의 경우에 서산의 생활 서정을 즐겨 다뤄 온 김순일, 충북(32명)에는 속리산 산방에 은거하며 아픈 몸을 치유한 도종환, <가장 추운 곳, 외로운 곳>이라며 노래한 이성선 등의 시인을 가진 강원(35명), 안동소주를 노래한 인상학 시인을 품은 경북(32명), 섬진강 시편의 김용택이 거하는 전북(51명), 남도의 한을 깊이 아로새긴 송수권 등의 전남(26명) 순으로 시인들에게 땅뙈기를 내주고 있다.

광역시들의 존재가 이채롭다. 이성복의 상처가 시적 텍스트로 엄존하는 대구(69명)는 ‘아나키스트적’ 정서가, 헌걸찬 기개와 전위적 글쓰기가 공존하는 부산(85명)에는 특유의 시의식이, 광주(50명)에는 곽재구의 <사평역에서>에서 저류를 흐르는 반항의 혼이 각각 자신만의 서정을 구축해 오고 있다고 조사는 밝혔다.

잡지는 이와 함께 김태형 시인의 글을 통해 ‘집’의 외연을 확장,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시뮬라시옹(조작된 이미지)의 세계까지 논한다. 카페나 포털 사이트는 물론 블로그와 미니 홈피 등 가상 공간상의 집까지를 포섭한다. 고은에서 황학주까지 36명의 웹사이트는 이 시대 시인들의 성소라는 것.

2년 전 산문집 <죽은 시인들의 사회>를 내는 등 이번 연구를 위한 기초 작업을 해 온 우 시인은 “광주에서 문학전문지 <문학들>이 창간되는 등 지역의 독특한 서정과 풍토를 담아내는 움직임이 되살아 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무직의 전업 작가들에게 매달 생계비 지원 등 경제 논리 이상의 지원이 모색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래부 한국일보 수석논설위원은 “아무리 훌륭한 공간이라도 시가 생산되지 않는다면 한낱 고통스런 불모의 땅일 뿐”이라며 “정부나 사회는 지극한 섬세함을 전제한 가운데 그들의 집과 방에 대해 배려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주거와 창작 공간으로서의 시인의 방’) (장병욱 기자)

07. 02. 14.

P.S. 마지막 박래부 위원의 '충고'는 경청할 만하지만 막상 방도를 마련하는 건 어줍잖아 보인다(가령 월세 10만원짜리 함민복 시인의 집을 찾아가 쾌적하게 리모델링을 해줘야 하나?).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처럼 시인/작가들을 위한 아파트나 집단거주촌을 만들어줘야 할까? 시인들의 게토로? 뭔가 다른 방도가 있을까? 이런 건 시인들에게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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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도 두어 차례 다녀간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매트릭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1929- )의 책들은 나는 부지런히 사들였었지만 언제부턴가 자제하고 있다. 번역서들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영역본과 같이 읽지 않을 경우엔 읽는 게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아마도 기억엔 7년전 <예술의 음모>(백의, 2000)가 출간된 이후에 나름대로 주의를 기울이게 된 듯하다. 책을 읽을 수 없었으니까.

 

 

 

 

사실 <예술의 음모>는 출간당시 얇은 분량에 너무 고가이기도 했다. 내 재정형편을 고려하면 더더욱. 보드리야르의 예술론 6편과 보드리야르론 5편을 묶은 이 책을 나는 어제서야 다시 대출했는데(책은 이미 품절됐다), 그건 지난주에 책의 영역본을 구했기 때문이다(지난 2005년에 나온 영역본을 나는 작년에 도서관에 구입신청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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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본 또한 제목은 '예술의 음모'라고 돼 있지만 보드리야르의 짤막한 예술론들을 모아놓은 책의 제목이 국역본과 같은 것은 우연의 일치로 보인다. 왜냐하면 국역본이나 영역본 모두 불어본 원저를 번역한 게 아니고(불어본은 없다!) 각각 두 편(역)자가 잡지 등에 실린 보드리야르의 예술론들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제목이 같은 것은 '예술의 음모'란 표제의 글이 그의 예술론을 집약해서 보여주기 때문인 듯하다.

겨우 6편의 글을 모아놓은 국역본과는 달리 영역본은 보다 본격적이어서 인터뷰를 포함해 전부 21편의 글을 싣고 있다. 분량으론 2-3배 차이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얼마나 읽을 수 있느냐이지만. 예컨대, 표제글인 '예술의 음모'(1996)의 첫문단은 이렇다.

만약 욕망의 환상이 주위의 포르노그라피에 몰입했다면, 환상의 욕망은 현대 예술에 몰입했을 것이다. 포르노는 더 이상 만족스럽지 못하다. 모든 욕망의 대향연과 해방 후에, 우리는 성의 투명성의 의미에서 성전환으로 옮겨갔으며, 또한 성의 모든 비밀과 모호함을 없애버리는 기호와 이미지로 옮겨갔다. 즉 성이 욕망의 환상과는 아무 관련이 없지만, 이미지의 하이퍼리얼리티와 관련이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성전환으로 옮겨간 것이다.(7쪽)

지극히 '보드리야르스러운' 문장들인가? '지적 사기'라는 비아냥의 표적이 되기도 했을 만큼 보드리야르의 후기 저작들은 난삽하고 현란하다. 새로운 개념들을 마구 쏟아내는 것도 그의 트레이드마크이면서 독해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인이다. 한데, 그런 거 다 고려하더라도 인용문은 해독이 잘 안된다(나의 한국어 독해력에 문제가 있는 건가?). 독자의 무능인가? 영역본은 어떤가?

The illusion of desire has been lost in the ambient pornography and contemporary art has lost the desire of illusion. In porn, nothing is left to desire. After the orgies and the liberation of all desires, we have moved into the transsexual, the trasparency of sex, with signs and images erasing all its secrets and ambiguity. Transsexual, in the sense that it now has nothing to do with the illusion of desire, only with the hyperreality of the image.(25쪽)

내가 영역본을 갖다놓고 불어나 독어 번역의 오역을 지적할 때면 그게 아무래도 '중역'과 같은 것이어서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하는 분들이 있는데, 내가 바라는 건 그분들이 갖는 관심이나 걱정만큼 이런 일에 동참해주시는 거다(나도 이런 수고를 좀 덜고 싶다). 옮겨적은 영역본이 국역본과 갖는 차이점이라면 적어도 무슨 말인지는 이해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그리고 보드리야르의 생각이 재밌다는 것도 알겠고). 그럼 한 문장씩 대조해보기로 하자.

만약 욕망의 환상이 주위의 포르노그라피에 몰입했다면, 환상의 욕망은 현대 예술에 몰입했을 것이다. The illusion of desire has been lost in the ambient pornography and contemporary art has lost the desire of illusion.

먼저 'ambient' 같은 단어는 사전을 찾을 만한데, '주위의'란 뜻이고 'ambient air'하면 '주변 공기'를 말한다.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니까 그만큼 널려있다는 것이겠다. 구문상 병치되고 있는 것은 '욕망의 환상'과 현대예술이 갖고 있는 '환상에의 욕망'이다. 이때 '환상(illusion)'이란 말은 곰브리치의 <예술과 환영>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예술이란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라고 할 때의 '환영으로서의 예술' 말이다. 영역본의 문장은 내 식으로 다시 옮기면, "욕망에 대한 환영이 주변의 포르노에 푹 빠져있다면 현대예술은 환영에 대한 욕망을 잃어버렸다."

포르노는 더 이상 만족스럽지 못하다. In porn, nothing is left to desire.

불어 원문이 어떻게 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번역이다. 영역본으로 보자면, "포르노는 욕망에 더이상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는다." 즉, 욕망을 다 탕진시킨다, 정도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게 말이 되는 것 아닌가? 욕망이란 원래 금지의 베일 때문에 작동하는 것인데, 포르노는 모든 베일을 벗겨내는 것이니 욕망이 남아나질 않는 것이다. 해서 더이상 욕망할 게 없다!

모든 욕망의 대향연과 해방 후에, 우리는 성의 투명성의 의미에서 성전환으로 옮겨갔으며, 또한 성의 모든 비밀과 모호함을 없애버리는 기호와 이미지로 옮겨갔다. After the orgies and the liberation of all desires, we have moved into the transsexual, the trasparency of sex, with signs and images erasing all its secrets and ambiguity.

국역본에 아무런 강조 표시가 돼 있지 않지만, 영역본에 따르면 여기서 'transsexual'은 보드리야르가 '신조어'로 도입하고 있는 말이다. 적어도 그는 이 단어를 다시 정의한다. 한데 웬 '성전환'? 바로 다음 문단에 나오지만 보드리야르는 현대예술이 환영에 대한 욕망을 상실했으며 따라서 '초미적'(transaesthetic)이게 되었다고 말한다(국역본은 이 단어의 불어를 'transthetique'라고 오기했다). 그러니까 그가 오늘날의 예술적 상황을 지시하기 위해서 도입하고 있는 용어가 transaesthetic'이며 이것은 'transsexual'와 병렬적 관계에 놓인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transsexual'은 '성전환'과 무관하며 '성을 넘어선', 곧 '초성적인'이란 뜻이다. 발가벗은 성, 아무런 비밀/베일이 없는 성, 방탕 혹은 난교파티 이후에 도달하게 되는 '투명한 성'을 가리키는 말이 보드리야르에게선 '트랜스섹슈얼'인 것이다. 이성(들)의 육체와 성기를 봐도 '무심한' 상태 말이다. 그런 맥락으로 다시 옮기면, "모든 방탕과 욕망의 해방 이후에 우리는 성에서 모든 비밀과 모호함을 다 제거해버린 기호와 이미지 들과 함께 '초성적인' 상태, 성의 투명성에 도달했다."

즉 성이 욕망의 환상과는 아무 관련이 없지만, 이미지의 하이퍼리얼리티와 관련이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성전환으로 옮겨간 것이다. Transsexual, in the sense that it now has nothing to do with the illusion of desire, only with the hyperreality of the image.

"이제 욕망의 환영과는 무관하고 단지 이미지의 하이퍼리얼리티하고만 연관된다는 의미에서 '초성적인' 상태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은 (현대)예술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 보드리야르식 통찰이다: "예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술 역시 모든 것을 미적 평범한 것에 이르게 하기 위해 환상의 욕망을 없애버렸으며, 따라서 초미적인 것이 되었다."(8쪽) The same is true for art, which has also lost the desire for illusion, and instead raises everything to aesthetic banality, becoming transaesthetic.

 

 

 

 

'평범한 것의 미적 변용'은 미국의 철학자 아서 단토의 연구서 표제이기도 하다(이 책은 국역본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이 계열의 가장 대표적인 예술가들이 마르셸 뒤샹이나 앤드 워홀 이후의 팝아티스트들이다. 단토는 워홀의 '브릴로 박스'와 함께 예술이 종언을 고한 것으로 보았는데(<예술의 종말 이후>), 보드리야르의 입장도 대동소이하다. 그런 걸 기점으로 해서 미학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초미적인' 상태에 우리가 도달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다시 옮기면, "예술도 마찬가지다. 예술 또한 환영에 대한 욕망을 상실하고 대신에 모든 것을 미적인 평범함(범속함)으로 끌어올리면서 '미를 넘어선 것', '초미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 주변엔 포르노만큼이나 예술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예술이 범람하게 되었다. 보드리야르가 얘기하는 '예술의 죽음'이란 그러한 과잉과 범람을 가리킨다. 모든 것이 예술이 됨으로써 예술이란 말의 의미 자체가 실종돼 버리는 현상, 그리고 그런 시대.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가? 혹은 그런 시대로 진입해들어가고 있는가?..

07. 0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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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2-13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보드리야르를 읽고 있는데 이해가 잘되지 않는게 제 머리탓만은 아니군요.ㅎㅎ

로쟈 2007-02-13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교육을 받고도 읽을 수 없는 책의 80%는 번역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고난도여서 어려운 책은 세상에 20% 미만일 테니까요...

yoonta 2007-02-15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esire for illsuion--->desire for illusion ^^
정말 그런 경우가 종종 있더라구요. 독어본을 해석했다는 책들이 영어본보다도 읽기 힘든 경우. 영어본을 해석한 중역본이 더 읽기가 좋은 경우..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물론 영어본 자체에도 번역상의 오류가 빈발한다고는 합니다만..

로쟈 2007-02-15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정했습니다(yoonta님도 꼼꼼히 읽으시는군요^^). 영역본이건 독역본이건 오역이야 다들 있겠죠. 하지만 우리만큼 날림으로야 하겠습니까? 중국번역의 현황을 잘 모르고 제가 '중국산'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번역서들이 최소한의 기본과 성의를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이번주 '씨네21'을 아침에 사들었다. '필름2.0'을 사고서도 '씨네21'마저 집어든 것은 '설합본 특대호'였기 때문이다. 이런 거 일년에 두어 번밖에 안 나온다. 추석과 설 연휴가 낄 때 말이다. 게다가 '별책부록'이란 말에 혹해서 바로 가판대 아저씨에게 돈을 지불했는데, 달랑 잡지만 내준다. 잠시 머뭇거리다, '부록 없나요?' '없어요.' 이런 응답이 세번쯤 오고갔다. 그제서야 나는 이 '별책부록'이 '정기구독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는 걸 눈치챘다. 

인지상정으로 얼마간 낭패감이 들었는데, 그래도 제일 먼저 펼쳐 읽기 시작한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겨울영화 산책'이 그 낭패감을 100% 만회해주었다. 이 '아줌마'의 영화에 대한 수다는 갈수록 주체불능인 듯하다. 여하튼 재미있다. 나는 다 읽지 않고 좀 아껴두었는데, 다 읽고 나면 나중에 '정성일 아줌마와 자크 랑시에르'란 페이퍼를 쓸 예정이다.  

그럼 이건 뭐냐? 산책 혹은 수다의 말미에서 장이모의 <황후花>에 대한 소감을 적어놓다가 그가 내리는 결론: "항상하는 이야기. 자기 인생을 낭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허접한 영화들만 보러 다니면 된다. 여기에 이제 한마디 더 하고 싶다. 그런 영화들만 보러 다니면 점점 허접하게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그걸 오늘의 경구로 새겨두도록 하겠다.

왜 영화뿐이겠는가? 널리고 널린 게 또한 허접한 책들이다. 문득 그런 책들만을 읽어제끼다 죽음을 맞게 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란 생각이 들었다. 낭패다. 한데, 문제는 그런 책들만 읽다 보면 또 그게 그다지 허접한 책으로 읽히지 않는다는 것. 이보다 더 큰 낭패가 있을까? 그런 낭비에서 벗어나는 길은 물론 경이로운 영화들을 보고 경이로운 책들을 읽는 것이다. 정말로 허접하지 않은. 그럼 세상이 좀 달라보인다. 좀 멋있어 보이고 좀 진지해보인다. 눈물난다. 삶은 길지 않다...

07. 02. 12-13.

P.S. 몇 줄 쓰는 동안에 날짜가 바뀌어 이틀걸이가 돼 버렸다. 시간은 화살과 같다. 인생도 삼세번이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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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02-13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전에 화장실에서 비슷한 생각 했는데, 허접한 책들 1+1행사에, 쿠폰에 이벤트에 사두고, 허접한거 아니깐, 빨리 읽어서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막상 진지하고 두번 읽을 책들은 자꾸 뒤로 미뤄지고, 바보가 따로 없구나. 싶었어요. 말대로 저 위의 '영화'를 '책'으로 바꾸어도 꼭 맞는군요. 반성.

로쟈 2007-02-13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서를 살짝 바꾸시면 되겠네요.^^

비공개 2007-02-13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말씀에 저도 200% 공감이네요.. ^^; 인생을 알차게 살긴 참 힘든데 낭비하기는 왜 이리 쉬운지. 정말이지 우리의 삶이 단 한 번뿐이라는 건 비극이죠?

노부후사 2007-02-13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후화는 인생 낭비한 인간들이 자기는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다고 우기는 영화더군요. 그런데 정성일 씨가 '아줌마'였나요?

로쟈 2007-02-13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아줌마'인지는 칼럼을 읽어보시면 압니다. 술어논리에 의한 것인데, 아줌마는 수다스럽고 잘 삐친다. 정성일은 수다스럽고 잘 삐친다. 고로 정성일은 아줌마다, 대략 그런 논리에서 누군가 정성일씨는 '아줌마'라 평했다는군요...

노부후사 2007-02-13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집에 가다가 서점 들러서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moonnight 2007-02-13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저도 요즘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허접한 책들에 길들여지다보니 훌륭하나 읽기 힘든 책들은 자꾸만 뒤로 -_-;;;; 삶은 길지 않다. 뜨끔;;

2007-02-13 18: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14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예, 저도 좀 수다스럽죠?^^ 언젠가 페이퍼로 올려놓은 게 있습니다. 아줌마적 이성과 기하학적 이성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