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경향신문의 북리뷰를 읽다가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그린비, 2007)에 눈길이 머물렀다. 출판관계자를 통해서 이 책이 나올 거라는 이야기는 진작부터 듣고 있었지만 사실 나는 '동아시아 사상'은커녕 일본 근대사상에도 눈이 밝지 못하다. 마루야마 등의 이름을 일본의 근대사상가로 주워섬기는 것이니 아직 초급의 초식밖에는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해야겠다.

그렇다고 내가 특별히 과문한 것도 아니어서 국내 출간된 다케우치의 책은 <일본과 아시아>(소명출판, 2004), 그리고 <루쉰>(문학과지성사, 2003)이 전부인 듯싶다(그러니까 내가 기억하는 다케우치는 루쉰 연구자 다케우치였다). 전자는 '당신이 없는 사이에' 나온 책이어서 출간 사실도 이번에 알았고 <루쉰>은 내가 산 책인 듯도 싶지만 기억의 공백 때문인지 감이 없다. 여하튼 '다케우치 유시미라는 물음' 자체가 어떤 내용을 갖는 것인지는 리뷰나 읽으면서 알게 됐다. 한데, 경향신문의 리뷰는 기본사항들을 전제하고 있으면서도 '연이은 의문부호'들을 나열하고 있기에 좀 불친절하다. 지난주 서울시문의 리뷰를 먼저 읽어봐야 문맥이 잡힌다. '동아시아 저항사상의 계보'라는 문맥. 

 

서울신문(07. 02. 10)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지난해 국내에서 ‘근대 논쟁’ ‘해방전후사 논쟁’이 뜨겁게 불어닥치는 등 요즘 동아시아에서는 ‘탈근대’가 화두이다. 침략, 이식의 형태로 유입된 근대는 아시아가 극복해야 할 중요한 사상적 과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럽의 진보주의와 동양의 민족주의를 모두 넘어서는 ‘근대’를 사유한 일본의 비평가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1910∼1977)의 사상은 우리에게도 유의미하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유럽모델’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한 일본의 근대를 강력히 비판한 사상가로 유명하다. 메이지유신 이후 천황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한 근대화를 이루고, 자신을 유럽과 동일시하면서 근대화의 과정을 겪은 일본의 근대는 기본적으로 ‘저항’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일본은 어떤 저항이나 반성도 없는 패전을 경험했다는 게 다케우치의 생각이다. 일본의 패전 당시 중국에 있었던 다케우치는 일본군의 무저항 상태를 이렇게 묘사했다.“일제히 통곡했다. 그리곤 잠들어 버렸다. 다음날 눈을 뜨고 나서 그들은 일제히 귀국준비를 위해 몸단장을 했다.”



도쿄제국대학에서 중국문학을 전공한 다케우치는 루신(魯迅·1881∼1936) 연구에 한평생을 바친 루쉰 전문가이다. 최초의 저작이 1943년 발간한 ‘루쉰’이었고,65년 평론가 폐업을 선언한 이후 죽을 때까지 루쉰의 글을 번역하는 일에 전념했다. 평생 루쉰을 사상의 ‘참조점’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는 당대 일본내의 중국 및 중국문학 연구가 한학 중심이었던 것에 비춰볼 때 엄청난 차이점이었다.

이런 그가 루쉰을 통해 길어낸 사상은 ‘쩡자’ 다.‘쩡자’는 ‘저항’이라는 말로 옮길 수 있지만 ‘자기임과 자기이외임을 모두 거부하는’ 이중의 거부로 보인다.“아시아의 사상 자원은 겉으로 보기에 유럽에 대항하는 모습을 취하겠지만 반드시 ‘반유럽적’이지도 않다.”라는 다케우치의 말은 바로 이 ‘쩡자’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한다.

중국의 쑨거(孫歌·52)는 10년 이상 이런 다케우치의 사상에 매달렸다.‘루쉰-다케우치 요시미-쑨거’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저항’사상의 계보가 엮어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재작년 일본어와 중국어로 펴낸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쑨거 지음, 윤여일 옮김, 그린비 펴냄)은 다케우치 사상, 루쉰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듯하다.(박홍환 기자)

경향신문(07. 02. 17) ‘타자’로 자기해체, ‘주체’로 자기재건

다케우치 요시미를 대면한다는 것은 고통스럽다. 다케우치는 끊임없이 신원 증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소속 기관이 발부한 증명서를 가지고 가도, 관공서가 인증한 등본 서류를 제출해도, 다케우치의 반응은 싸늘하다. 쓰라린 비웃음만이 되돌아올 뿐이다. 무언의 눈빛으로 다케우치는 계속 추궁한다. 바깥에서 ‘주어진 것’이 어찌 너의 주체성을 보증할 수 있느냐. 어떤 외적 근거에 의지하지 않으면서, 온전히 네 자신만으로 너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가. 여기서 실질적인 증명 가능성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물음을 자신의 물음으로 끌어안을 때 당면하게 되는 일련의 또다른 질문들. 지금껏 자명성과 안정성을 자신에게 부여해 준 근거들을 향하는 연이은 의문 부호.

다케우치가 평생 씨름하며 고투한 ‘주체’의 문제는 ‘주체와 세계’ 혹은 ‘주체와 타자’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객관성-관찰 가능성 등의 이름으로 주체와 대상 혹은 타자 사이에 거리를 확보하면, 주체에게는 안정적 근거가 마련된다. 이 안정성이 주체의 주체성과 활동성을 보장해 주지만, 그 대가로 주체는 세계-대상에서 이탈하고 분리된다. 세계-속에 존재하는 주체가 세계의 전체상을 가질 수는 없다. 지구를 보려면 지구 바깥에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은 이미 세계의 전체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주체가 인지 가능한 방식으로 추상화하고 조작한 결과일 터이다. 통계 수치나 계량적 측정이 대표적인 수단이겠다. 주가 지수가 경제 상황의 전체상을 대신하고, 통계 수치가 현실의 움직임에 대한 지식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 주체의 자리는 3인칭 관찰자 시점이다. 단적으로 이른바 국가의 정책이 시행되는 자리는 늘 여기이다. 국민의 대상화가 불가피하므로, 어떤 국가-정부도 국민의 의지와 수렴될 수는 없다.

다케우치 식으로 추궁하자면, 국민을 대표할 수 없다는 뼈아픈 자각을 전제로 할 때, 국가의 정책은 어떤 의의가 있고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가능하다. 다케우치는 말한다. “지식은 그것을 부정하는 계기 없이는 지식으로 살아갈 수 없다.” 인문학이 정말 위기라면, 정말 근본적인 이유는 인문학에 자기 부정의 계기가 없기 때문이다.

주체가 세계를 관찰하지 않고 대상-타자와 더불어 세계 속에 내재해 있다면, 세계가 움직이는 한 주체는 늘 유동상태에 놓인다. 여기서 안정적인 실체성은 존립하기 어렵다. 제도화된 개념이나 객관적인 지식도 분명 존재하고 또 필요하다. 그렇지만 주체-세계의 유동 속에서 이러한 실체성은 늘 부정될 운명을 자각해야만 한다. 그래야 배반당하지 않는다.

주체의 부단한 자기 갱신은 타자와의 관계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타자라는 매개를 통해 자기 해체를 진행하면서도 타자를 따르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를 재건하는 길. 이 길은 바로 “타자를 타자로서의 자족성에서 해방하는 동시에, 자기를 자족적 배타성에서 자유롭게 만드는 부단한 과정이다.” 다케우치를 대면하는 일이 고통스러운 것은 이 때문이다. 잠 들지 않고 깨어 있다는 것은 고통스럽다. 달콤한 유혹과 자기 변명은 이미 수없이 유포되어 있지 않은가.

지난 20년 간 개혁 개방 시기 중국의 내적 혼란과 지식계의 변동을 몸으로 겪으면서, 바로 이 문제를 자신의 신체감각으로 예민하게 파악한 지식인이 이 책의 저자이다. 저자에 따르면 다케우치는 평가를 기다리는 역사상의 인물이라기보다는 당대 중국 및 아시아 지식인으로서 저자가 직면한 문제들을 대면할 수 있도록 만드는 ‘질문법’에 가깝다.

다케우치의 명성은 무척 오래지만, 아무도 그 일을 선뜻 맡겠다고 나서지는 않았다. 당연히 다케우치 자신이 아무에게나 말을 걸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장 중문학자인 서광덕, 백지운 두 분에 이어, 젊은 패기의 윤여일씨가 고된 일을 자임하고 나섰다. 다케우치 요시미가 기억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제목처럼, “다케우치 요시미” 자체를 “물음”으로 전환하는 능력은 너무도 절실하다. 다케우치 요시미에게 루쉰이 그러했고, 저자 쑨거에게 다케우치 요시미가 그러했듯이.(류준필|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07. 02. 18.

P.S. 국역본에는 중국어판과 일본어판, 그리고 한국어판 저자 서문이 모두 붙어 있다. 그건 한국어판이 맨마지막에 나왔다는 뜻도 된다. 이미지는 일본어판(2005)의 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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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2007-02-18 15:26   좋아요 0 | URL
좋은 글 퍼갑니다. 늘 신세를 지고 있네요.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올려주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로쟈 2007-02-18 17:31   좋아요 0 | URL
제 편의를 위해서 정리해놓는 것인데 도움이 되신다면 다행입니다. 앨런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베토벤 2007-02-19 12:04   좋아요 0 | URL
앞으로도 로쟈님이 '편의'를 계속 추구하셨으면 합니다. 저도 맘속으로 신세를 지고 있는 듯 하여서요. ^^;

로쟈 2007-02-19 18:58   좋아요 0 | URL
그러다가 '편의주의자'가 되겠는데요.^^
 

귀가길에 전철에서 문화일보의 북리뷰를 읽었는데 가장 크게 다루어진 책은 의외로 로빈 베이커의 <정자전쟁>(이학사, 2007)이다. 예전에 <정자전쟁>(까치글방, 1997)으로 처음 소개된 바 있고(이전에 한번 페이퍼로 다룬 바 있다), 이 책의 재판이 나온 것으로 생각했지만 리뷰를 읽어보니 이번에 나온 건 개정판 원저의 번역이다. 국역본 분량으론 398쪽에서 405쪽으로 거의 변함이 없는 것으로 보아 크게 보태진 내용은 없어 보이지만(신간은 2006년 증보판의 번역임에도 알라딘에는 1996년판이 원저로 기재돼 있다. 설마 출판사의 실수일까?). 어쨌든 같은 역자가 수고했고, 대신 출판사는 바뀌었다. 기억엔 재미에 비해서 그다지 팔리는 책이 아니었는데, 증보판 번역은 어떤 반응을 얻을 수 있을지(표지 이미지만을 놓고 보자면 이제나그제나 유치하긴 마찬가지지만. 제목도 '스펌워즈'가 낫지 않았을까? <정자전쟁>을 전철에서 읽을 수 있나?)...

문화일보(07. 02. 16) 불륜·자위 행위도 ‘정자 전쟁’의 전술

“여자와 그 애인이 바닥에 쓰러져서 삽입을 시작하기 직전이다. 여자의 몸은 이미 정자를 보유하고 있다. 여자의 남편이 앞선 주말에 둘의 주기적 성교 동안 통틀어 6억 마리의 정자를 주입했다. 대부분은 다양한 분출물을 통해 방출됐지만, 그렇다고 해도 얼마간은 아직 그녀의 몸 속에 남아 있다.(중략) 여자의 애인은 삽입 행위를 몇 번 하지도 않고 여자의 질 안에 자신의 정액고를 비축했다. 여자의 자궁경부는 정액고에 잠겨서 그대로 머물러 있고 남자의 전위부대는 자궁경부 점액 경로로 물결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군대는 약 5억 마리의 정자잡이(killer sperm)와 약 100만 마리의 난자잡이(egg getter), 약 1억 마리의 방패막이(blocker)로 이뤄져 있다. (중략) 누구 편이 먼저든, 어느 한쪽의 정자잡이가 상대의 정자와 처음 맞닥뜨리는 순간 바로 전쟁 경보가 내려진다. 한 시간 가량은 적진의 정자를 가급적 많이 찾아내기 위해 쌍방의 정자 모두가 평상시보다 빠른 속도로 헤엄친다. 목표는 머리에 쓴 모자 속의 치명적인 혼합물질로 상대방의 난자잡이와 정자잡이한테 독을 놓는 것이다.… 정자잡이가 적군의 정자를 발견하면 자신의 치명적인 머리 끝으로 상대의 허약한 옆구리를 찔러서 부식성 독을 바른다. 몇 차례 찌르고 난 뒤에는 상대 정자가 죽도록 내버려두고 계속 전진한다….”

다소 긴 인용문이지만, 책의 핵심을 담고 있는 대목이다. 정자가 난자와 결합하기 위한 과정은 그야말로 전쟁이다. 특히 경쟁자(다른 남자의 정자)와 싸워야 할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부대와 무기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전략과 전술을 적절히 운용해야만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인용문에서 드러나듯이 정자잡이와 난자잡이, 방패막이로 이뤄진 부대는 각각의 사명을 띠고 여자의 몸 속에서 대오를 지어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를 촉발시킨 이는 여자 자신이다. 자신도 모르는 새 본능적으로 경쟁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책은 남자와 여자의 섹스에 관련된 거의 모든 사항들을 철저하게 진화생물학적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남녀의 불륜과 자위 행위, 오르가슴과 동성애에 이르기까지 온갖 성적 행동과 심리상태를 생물학적 동기로 분석한다. 자신의 유전자를 최상의 조건을 지닌 유전자와 결합시켜 되도록 많은 후손에게 이어지게 하려는 종족보존의 본능에 따라 인간의 모든 성적 행위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녀의 부정 행위는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이득을 안겨줄 만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남자의 경우, 배우자에게 들키지만 않는다면, 자신의 유전자를 더욱 많이 퍼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선택할 만한 가치가 있다. 여자의 입장에서도 자신에게 맞는 최상의 유전자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점이 있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이득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배우자가 알아차릴 경우 외도로 인한 손실이 치명적일 수도 있다. 요는, 외도를 행하는 것이 이득이 될 것인지 아닐 것인지를 정확히 판단한 자들이 종족보존에 보다 높은 성공률을 보인다.
 


저자의 이 같은 견해는 결코 불륜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 차원에서 옳고 그름을 떠나 오로지 종족보존의 차원에서 인간의 ‘몸’에 깊숙이 새겨져 있는 본능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를 진화생물학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저자의 목적이다. 저자는 심지어 “상황을 오판해서 정숙해야 할 때 부정을 저지르고 부정을 행하는 것이 나을 때 정절을 지키는 것 역시 실수”라며 “대 잇기 게임에서 최선은 정확하게 판단하고 제대로 대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대부분의 사회에서 수치스러운 짓으로 비난받는 자위 행위는 왜 은밀하게 이뤄지는 것일까. 어떻게 자위 행위가 종족 보존에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남자의 자위 행위는 정액을 그냥 방출해버리는 무용한 짓에 불과한 게 아닐까. 저자는 “남자의 몸은 자위 행위와 성교를 구별할 줄 안다. 각각의 사정 물질은 동일하지 않다”며 “남자가 자위 행위를 할 때에는 지난번 사정을 한 이래로 (생산된) 시간당 약 500만 마리의 정자를 내보낸다. 이는 방패막이, 정자잡이, 난자잡이로서의 유효기간을 초과한 정자의 수치로 보인다”고 밝히고 있다. 즉, 남자가 성교를 갖는 사이사이에 자위 행위를 한다는 것은 보다 젊고, 역동적이며, 전투력 넘치는 정자를 여자의 몸 안에 주입하기 위해서다. 한마디로, 남자에게 최상의 정책은 일정 시점을 넘어선 늙은 정자를 자가 사정으로 스스로 내보내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것이 자위 행위의 기능 중 한 가지다.

책은, 일반적인 과학 저술과는 다르게, 생동감 넘치는 사례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남녀의 섹스에 얽힌 37개의 장면들은 마치 소설의 한 대목처럼 구체적이다. 등장인물들의 감정 상태까지 치밀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제시하고, 그 같은 사례에 내포돼 있는 정자(유전자) 전쟁의 이면을 들춰낸다. 부부간 주기적인 성생활뿐만 아니라 자위행위하는 여자의 모습, 외도의 현장, 집단 성교, 성폭행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성과 관련된 대부분의 양상들이 그려진다(*책의 부제가 '불륜, 성적 갈등, 침실의 각축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외설적이지 않다.
 


한 사람의 생명이 탄생하는 최초의 순간을 철두철미하게 파고들고 있는 책은 과학 저술의 한계를 넘어 사회적, 심리적으로도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 참고로, 한국에선 1997년 처음 번역·소개됐으나 원서 개정판이 나온 이후 새로운 내용들을 추가해 이번에 새롭게 선보였다.(김영번 기자) 
 
07. 0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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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인사동쪽에 나갔다가 반디북에 들렀었는데 도올 김용옥의 <요한복음 강해>(통나무, 2007)가 마침 나와 있길래 사들고 왔다(이 강의/강해에 대해서는 얼마전에 페이퍼를 올려둔 바 있다). 귀가길 전철에서 주로 훑어본 건 책의 '참고문헌'이었고 그에 대해서 몇 자 적으려다가 피곤해서 그만두었었다(오늘밤에라도 몇 자 적어둘지 모르겠다).

한데, 그 사이에 일이 터져 한겨레의 인터뷰 기사(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191139.html)에 이어서 여기저기에 도올의 EBS강의에 대한 논란이 시끄럽다(이 강의는 원래 '영어 강독'을 위한 강의임에도 불씨는 다른 데서 번지고 있다). 성서에 대해서 많이 공부하고 거기에 대해서 자기의 의견/해석을 가진 사람이 그걸 개진하는 것이야 문제삼을 일이 전혀 아니다. 그러한 해석에 대해 비판하는 일도 같은 수순을 밟으면 된다. 이건 순전히 말씀(로고스)에 관한 것이고 그 말씀의 영역에 한정되는 일이다.

논란을 전하는 오마이뉴스의 기사는 '도올과 교회, 누구의 성경해석이 맞나'라고 선정적인 제목을 달았는데, 실상 모든 해석은 오류가능성에 개방돼 있는 것이고 다만 어떤 해석이 보다 설득력이 있으며(말이 되며) 보다 생산적인가를 따져보면 그만이다('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라고 반박할 게 아니라). 내겐 <요한복음 강해>가 갖는 의의는 그런 것이다. 고색창연한 문어투의 고리타분하고 식상한 성경구절들을 새롭게 읽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 도올을 비판한다면 그의 해석보다 더 정교하고 멋들어진 우리말(혹은 번역서라도) 해석/주석/강해서를 추천하면 그만이다. 그리고는 도올은 아무아무개보다 못하다, 라고 평해주면 그만이다. 목숨 걸 일은 아닌 것이다... 

오마이뉴스(07. 02. 16) 도올과 교회, 누구의 성경해석이 맞나

성서 요한복음을 교재로 영어학습 강의를 하면서 '구약 폐기' 등의 주장을 내놓은 도올 김용옥 세명대 석좌교수와 보수 기독교계간의 논쟁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도올은 지난 5일부터 교육방송의 외국어교육사이트 'EBS랑'에서 <영어로 읽는 도올의 요한복음>이라는 유료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총 100강으로 계획된 이 강의는 현재 10강까지 진도가 나갔다. '성서를 통한 영어학습'을 목적으로 한 강의이지만, 이 강의에서는 성서와 기독교에 대한 도올의 새로운 해석과 주장이 펼쳐지고 있어 더욱 이목을 끌고 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 기독교계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한국교회언론회(대표 박봉상 목사)는 지난 8일 도올이 한 1~5강까지의 신학적 오류를 지적하는 보도자료를 냈다. 한국교회언론회는 "도올은 기자회견과 강의 도중 '정통신학 입장에서 요한복음을 강의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실제적으로 정통신학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는 '사도 바울 시대에는 성경이 없었다' '구약은 폐기됐다' 등을 거론하는 도올 강의 내용에 대해 이 단체는 "사도 바울 시대에도 이미 구약은 성경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마치 신약만이 성경이 되는 듯한 표현은 분명한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도올이 성서에 쓰인 그리스어 '메타노이아(μετανια)'를 '마음의 상태를 바꾸라'고 번역해야한다면서 '예수님은 '회개하라'고 한 적이 없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이 단체는 "사람들이 죄로 인해 마음이 정상적이지 못한 상태에서, 죄에 대한 자각 없이 단지 '마음을 돌이키라'고 하는 것은 전 포괄적인 의미를 놓치는 설명"이라고 주장했다.

또 성서에 등장하는 '로고스'(logos)를 '인간의 정신'·마음·'인간의 말할 수 있음' 등으로 해석, "로고스가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한 강의 내용에 대해서도 "희랍(그리스)의 로고스 사상과 요한복음이 말하는 로고스를 단순 연결한 것"이라며 "이것은 'the Word was God'의 의미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예수의 어록자료(Q문서)를 기초로 제자들이 서술형 문학적 장르를 넣어 드라마처럼 구성했다는 강의 내용에 대해서도 이 단체는 "복음서를 기록한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을 알고 이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라며 "제자들이 성서를 창안해 기록한 것으로 설명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도올은 한국교회언론회가 자신의 강의를 비판하고 나선 것을 역비판하면서 보수성향 기독교인들의 정치참여도 함께 비판하고 나섰다. 16일 보도된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종교인들이 거대한 사교클럽을 만들고 압력단체화해 정치권력을 행사하려 한다"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그는 "기독교가 학교를 많이 갖고 있으니 사학법에 대해서는 발언할 수 있다고 보지만, 정치·외교 문제까지 참견하면서 역사를 리드하려 하고, 제정일치 시대 신정정치로 가려 하고 있다"며 "종교권력이 역사를 이끄는 신정정치를 한 나라치고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다"고 말했다. "종교는 양보와 겸양의 자세로 사람들을 보살피고 안아주는 '품'의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

또 지난 8일 한국교회언론회가 보도자료를 통해 지적했던 '신학적 오류'에 대해 도올은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너희가 모세 율법을 믿느냐, 나를 믿느냐'는 물음을 한다"며 "구약의 모세를 믿으려면 유대교로 가야하고, 우리나라에서 성황당을 믿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말했다(*파격적이면서 흥미로운 견해이다). 구약성경은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조건으로 애굽(이집트)에서 해방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주겠다고 한 유대인들의 민족신 '야훼'(여호와)의 계약이라는 것. 예수가 지상으로 내려온 뒤 새로운 계약(신약)이 성립됐기 때문에 구약은 더 이상 효력이 없다는 것이 한국교회언론회의 지적에 대한 도올의 반박이다.

그는 또 "누가 과연 오류를 범하고 있느냐, 자신들의 신념만 종교고 나머지는 이단이라면 거꾸로 보면 자신이 이단이 될 수 밖에 없다"면서 "도올이 무슨 얘기를 하든 그 얘기로 신앙이 깨진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라며 기독교계 대표와 공개 토론을 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네티즌들도 이번 도올 강의와 관련한 뉴스에 댓글을 통해 의견을 개진하는 등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도올 - 보수 기독교계 간 논쟁이 철학과 신학의 전문적인 영역에 있어 네티즌 댓글 대부분은 구체적인 논리가 결여된 쌍방에 대한 비난으로 얼룩지고 있다. 기존 기독교 교리를 옹호하는 이들은 도올의 강의를 일방적으로 폄하하거나 도올 개인을 비하하는 수준이고, 반대로 기독교에 반감을 갖고 있는 이들은 일부 교회의 폐단을 지적하거나 기독교계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안홍기 기자)

07. 0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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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7-02-16 23:40   좋아요 0 | URL
기독교에 대한 선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강의를 듣고있는데 그냥 상식선의 애기라고 받아들였는데 결국 난리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는군요.
동일한 김용옥에 대한 비판 혹은 비난의 수순을 밟을것으로 생각도 드는데.
제가 직접 경험한것중. 예전 김용옥이 태권도에 대한 발표하는 자리가 있어 올림픽공원에 보러 갔었는데 태권도가 가라데다 뭐 이런 신문기사가 전날 나오면서 그 자리에 못나오고 출간된 논문집에 이름은 보이는데 내용이 삭제된것을 직접경험했었는데.
가장 기본적인 것도 까서 보여주면 뒤집어지는 세상에서 한바자욱 더나간다는것이 참 어려운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나이에 아직도 깡 좋다는 생각이. 허허 웃고 악수만 해주고 다녀도 대접받을 나이같은데.
근데 책은 아직 도착을 안하네요. 설이 껴서 그런지.

비로그인 2007-02-17 00:46   좋아요 0 | URL
저는 의도된(?) 논란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 만큼 홍보효과도 더 커지니.. 도올 강의는 돈 낼만 하게 재밌지요.

로쟈 2007-02-18 08:16   좋아요 0 | URL
biosculp님/ 새삼스럽지만, 워낙에 금기적인 '상식'이 많은 것이죠. 한국이란 나라에는...
테츠님/ 그 정도면 음모론이겠죠.^^ 소위 교양 강의 아닙니까? 영어 독해력 향상을 위한...
 

올초 출간한 소설집 <제비를 기르다>(창비, 2007)로 호평을 받고 있는 작가 윤대녕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작가의 근황과 함께 새로 구상중인 작품 얘기도 살짝 엿들을 수 있다. 인터뷰 내용 중 "작가는 독자에게 동정을 받아서는 안 되는 존재에요.”라는 말에 전폭적으로 동감한다(간혹 껌파는 작가들이 없지 않아서이다). 적어도 작가라면 독자보다는 반걸음쯤 앞서 가야 하지 않을까. 그만한 줏대와 고집과 여유, 그런 걸 동시대 작가들에게서 더 많이 보고 싶다. 요컨대, 작가들이여 자부심을 기르라...  

북데일리(07. 02. 15) [인터뷰] 소설집 ‘제비를 기르다’ 펴낸 작가 윤대녕

“작가가 독자에게 끌려 다녀서는 안 돼요. 독자들이 요구하는 대로 쓴 작품을 문학에 포함시키기는 힘들죠. 문학은 항상 뭔가를 견인해야 해요. 좋은 소설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합니다.”

3년 만에 신작 소설집 <제비를 기르다>(창비. 2007)를 발표한 작가 윤대녕(45). 그가 문학을 하는 작가의 태도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드러냈다. 최근 일산에 위치한 작업실 근처에서 만난 그는 “문체나 구성 면에서 기본적으로 품격을 유지하는 작품을 써야한다”고 강조했다.

타인보다는 스스로를 향한 조언이자 격려다. 윤대녕은 데뷔작 <은어낚시통신>(문학동네. 1994)으로 우리 문단에 ‘시원으로의 회귀’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독자의 뇌리에 박힌 강렬한 첫 인상은 이내 그를 옭아매는 족쇄가 되었다. “나에 대한 강박관념이나 오해가 너무 오래가는 것 같아요. 데뷔작이 나오고 지금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처음의 이미지가 아직도 새 소설에 적용되고 있어요. 실제로 중간에 발표한 책들은 이전과 비슷할 거라고 짐작하곤 안 읽은 사람들이 많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포기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 독자가 많지 않은 건지도 모르죠. (웃음)”

독자의 소리를 무조건 ‘나 몰라라’ 하는 건 아니다. 요즘은 문학계에 불어 닥친 일류열풍과 관련, 일본소설을 정독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현재 독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하고 파악하기 위해서다. 작가로서의 신념도 독자와의 공감과 소통이 유지되는 선에서 지켜나가야 한단다. <제비를 기르다>는 독자에 대한 배려가 눈에 띄는 작품. 현실감 있는 캐릭터, 구체적인 상황 묘사, 수식어를 배제한 문체로 전작들이 지녀온 모호함을 덜어냈다.

“제가 2003년에 제주도에 가서 2005년에 돌아왔는데, 내려가기 1년 전부터 딜레마 스트레스가 굉장히 심했어요. 문학에 대한 요구가 치환되지 않았던 거죠. 기관지 때문에 몸도 안 좋았고요. 삶의 터전이 옮겨지니까 조금씩 변화가 생기더라고요. 세밀하게 인생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생기고, 그 동안 만나왔던 사람들에 대해 사색을 하게 됐어요.”

서울로 돌아온 후 변화는 더욱 구체화됐다. 소설에 있어 서사적 구조, 타인의 내면에 대한 묘사에 욕심이 생겼다. 그리고 이는 곧 작품으로 형상화됐다. 문학평론가 정홍수는 “윤대녕의 이번 소설집에는 시간의 경과를 알려주는 표현이 도처에 보인다”며 “세월의 나이테를 천천히 펼쳐 보이는 이러한 서사적 조망 속에서 짧은 시간의 단면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인간 운명의 유장함과 곡진함이 드러난다. 동시에 그것은 인간사의 진실을 좀더 긴 호흡으로 살피게 만든다”고 평했다.

이에 대해 윤대녕은 “그동안 써왔던 것들에 대한 회의나 부정은 아니”라며 “다만 삶을 살아가고 세계를 이해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방법론이 변하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사실 윤대녕은 자부심이 대단한 작가다.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꼿꼿함과 자존심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명심해 왔다. 문인은 가난하고 술을 많이 마시고 사생활이 불안정하다는 선입견은 그야말로 개탄할 노릇. 그는 얼마 전 보도된 신춘문예 당선자의 생활이 어렵다는 기사에 대해서도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어려움을 토로하는 일은 도리어 부작용을 가져오기 쉽습니다. 힘든 상황에서 쓴 글을 독자가 좋아하지 않는 시대가 왔어요. 그리고 어떤 분야든 데뷔만 했다고 해서 미래가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매년 신춘문예로 2.30명이 등단하는데 그 중에 살아남는다고 할까, 계속 작품을 쓰는 작가는 1.2명에 불과해요. 늘 그래왔죠.” 가난과 고통에 대한 각오 없이 무작정 뛰어든 작가에게 가하는 따끔한 충고인 셈이다. 1988년 단편 ‘원’으로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지만, 당장의 밥벌이를 위해 7년간 각종 직장을 전전한 그이기에 주장에 힘이 실린다. “저는 글을 잃지 않으려고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글을 쓰는 생활을 이어왔다. 그 때의 습관이 여전히 남아 지금도 하루에 8시간은 자료조사, 독서 등 집필과 관련된 일을 하거나 글을 쓰며 보낸다고. 2.3일 정도 일을 못하면 우울증이 온다는 이야기에서 그의 열정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저에 대한 오해가 굉장히 많아요. 문단이나 언론까지 제가 독자가 많고 책이 잘 팔리는 걸로 생각하죠. 현실은 그렇지 않거든요. 전업 작가로 생계를 꾸려가기가 힘들지만 누추한 이야기는 절대로 안 해요. 혼자 견뎌낼 몫이잖아요. 작가는 독자에게 동정을 받아서는 안 되는 존재에요.”

전업 작가로 들어선 후에는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냐는 기자의 물음에 이 같은 답이 돌아왔다. 윤대녕의 고정 독자 수는 1만 명 안팎. 작가는 그의 독자가 곧 문학 독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문학동네 강태형 대표가 문예지 팔리는 숫자가 문학 독자 수가 아니겠냐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게 1만 부가 안 되거든요. 제 독자가 대략 1만 여명인데 주로 문학 공부하는 학생들, 문창과 학생들에 집중돼 있어요. 문학 독자가 바로 제 독자인 것 같아요.”

작가가 지녀야할 품위를 중시하는 그이지만 그렇다고 권위만 내세우는 건 아니다. 윤대녕은 발로 뛰는 작가로 유명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는 일일이 답사한다. 표제작 ‘제비를 기르다’는 바람을 쐬러 간 강화에서 우연히 작부집을 발견하고 떠올린 이야기. 구체적인 내용 구상을 위해 작품엔 잠깐 등장하는 태국 취재까지 감행했다. ‘마루 밑 이야기’에 나오는 대관령 휴게소 역시 직접 방문해서 현장을 살폈다. “여행 정보를 보고 쓰는 건 표시가 나요. 저 같은 경우엔 직접 가보지 않으면 문장 자체가 안 나오더라고요. 소설의 구조나 생생한 표현을 위해서는 취재를 다녀오는 게 좋죠. 작가한테는 의무라고 생각해요.”

직접 체험이 중요하다는 말. 그래서 작가는 인터넷 자료도 신뢰하지 않는다. 표피적인 정보만 얻기에 글을 쓰는데도 별 도움이 안 된단다. 작업실에 인터넷을 설치하지 않은 이유다. “인터넷만 사용 안하지 집필은 노트북으로 해요. 원고가 완성되면 프린트해서 퇴고를 하죠. 요즘도 등단 초기에 그랬던 것처럼 3.4번은 고쳐 써요. 그래서 단편 하나만 쓰더라도 굉장히 지쳐요. 편집자는 좋아하더라고요. 손 볼 데가 별로 없다고.”

사정이 이렇다보니 사람을 만날 시간이 없다. 기껏해야 한 달에 1.2번 정도 아주 가까운 사람들하고만 어울린단다. “사소한 흐트러짐 때문에 생활 패턴이 바뀌거나 시스템에 에러가 나는 걸 경계합니다. 재미없게 사는 거죠. 매일 매일 운동, 독서, 집필만 반복하고 있어요.” 작가의 삶이 재미없을수록 독자는 신이 난다. ‘자발적 유배’ 속에 깊어진 상념을 선사받기 때문이다.

윤대녕은 차기작으로 “근력이 있을 때 한 번 타 넘어가고 싶은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고려 중”이라고 한다. 자신의 공력으로 가능한 작품인가를 엄밀히 계산하고 있다. “아마 독자에게 굉장히 신선한 시도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작가의 말에 신작을 내놓을 때 까지 만이라도 단조로운 삶이 계속됐으면, 그래서 작품이 빛을 볼 수 있으면, 이란 ‘불순한’ 바람을 품은 이가 기자 하나만은 아니지 싶다.(고아라 기자) 

07. 0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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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16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나비80 2007-02-16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거의 모든 작가들이 자신의 공력을 역사물로 입증하려는 지 모르겠습니다.

로쟈 2007-02-16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자의 소리를 무조건 ‘나 몰라라’ 하는 건 아니다"에 힌트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역사물' 자체가 문제는 아니고 문제는 '공력'이겠죠...

나비80 2007-02-16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길로 들어서든 윤대녕에게 결론은 문체와 문장이겠지요. ^^

짱꿀라 2007-02-16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윤대녕 작가의 맛은 그의 문장과 문체가 아닐런지요. 잘 읽고 갑니다. 로쟈님, 설도 잘지내시고요. 감기도 조심하세요. 감기가 극성이라고 하네요.

kleinsusun 2007-02-17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이번 연휴는 넘 짧네요. 달랑 월요일 하루. 그럼에도 불구하고.... happy한 명절 보내세요!^^

로쟈 2007-02-18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anta님/ 올해는 감기에 잘 안 걸리네요. santa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klein님/ 전 뭐 방학이라 '연휴' 개념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필름2.0'에서 지난주에 읽었던 칼럼, 보다 정확하게는 편집장 직무대행이 쓴 '편집장의 말'을 옮겨놓는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달에 '사회적 독서' 목록에 올려놓았던 케빈 스미스의 <순결한 할리우드>(Media2.0, 2006)에 대한 코멘트가 포함돼 있어서이다. 나로선 연휴나 지나서야 들춰볼 수 있을 듯한 책이지만 책의 성격을 미루어짐작해볼 수 있도록 해준다. 더불어, 칼럼 자체도 읽어봄 직하다.

필름2.0(07. 02. 13) 가볍고 싶은 무거운 마음

지난 주말 TV를 보는데 쇼 프로그램에 ‘컨츄리 꼬꼬’가 나왔다. 온갖 버라이어티 쇼를 잠식하고 있는 엔터테이너 탁재훈과 신정환이 아니라 둘이 짝을 이룬 그룹 컨츄리 꼬꼬다. 검은 선글라스로 한껏 멋을 낸 그들이 “헬로우~ 콩가~ 달나라 꿈꾸는 나의 허니~” 하며 그들의 마지막 히트곡 ‘콩가’를 신나게 부르는 순간, 내 몸이 일종의 무중력 상태에 들어간 듯 함께 들썩인다.

나는 그들의 그 가벼움을 사랑한다. 마치 세상의 모든 엄숙한 것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컨츄리 꼬꼬는 새벽잠 깨우는 수탉 마냥 사람들을 부산하게 깨워놓고는 한바탕 놀아보자고 유혹한다. 그런데 그들의 유혹에는, 이른바 ‘그루브’라는 게 있다. 노래를 썩 잘하는 것도 아니고, ‘동방신기’처럼 아크로바틱한 몸놀림을 선보이는 것도 아닌데, 대신 그들은 놀고 싶어 안달이 나 옆 사람까지도 꼬드기고 마는 날라리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그들의 퍼포먼스에서 그 어떤 음악적 성취나 대중문화적 맥락을 따지는 것만큼 무용한 짓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피로감을 가벼움의 미학으로 돌파한다는 측면에서만큼 컨츄리 꼬꼬는, 싸이나 DJ DOC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뮤지션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다.



가끔 이렇게 가벼움을 체현하거나 몸소 실천하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고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 읽은 <순결한 할리우드>라는 책의 저자 케빈 스미스는, 가벼움이라는 측면에서는 장인적 경지를 보여준다. <점원들>이나 <제이 앤 사일런트 밥> 같은 엉뚱하고도 생기 있는 영화를 찍어온 미국 독립영화계의 스타 감독이자 만화작가인 케빈 스미스는, 근엄한 척하는 주류사회에 ‘퍽큐’를 날리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기서 즐거움을 찾는 인물인 것 같다.

책 속에서 그는 리즈 위더스푼을 거침없이 '왕재수'라 부르며 독설을 퍼붓는가 하면, 인터넷 칼럼에 대한 독자들의 빈정거림을 더 강도 높은 빈정거림으로 응수한다. 과장과 거짓이 난무한 칼럼을 통해 만화광은 프리섹스를 즐기는 변태들이라는 근엄 세계의 편견에 한방 먹인다. 물론 절친한 친구 벤 애플렉을 묘사할 때는 지나치리만큼 개인적 애정에 경도돼 있긴 하지만, 육중한 몸무게의 이 괴짜는 층위를 가리지 않는 온갖 텍스트들의 숲에서 스카이 콩콩을 탄 것처럼 풀썩풀썩 뛰어 다닌다.

19세기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인간이 모두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렸다고 안타까워했지만, 그래서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은 숙명에 대한 경건한 수용만은 아닐 것이다. 버트란트 러셀이 시니컬하게 충고한 대로 삶을 견디는 무기로 ‘지성과 의지’를 발동하고 싶지만 그것도 말만 쉬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가벼움에 몰입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불가해한 삶과 모순투성이의 세계를 견디는 가장 유효하고도 현실성 있는 대안이라는 직관 때문일 것이다.



설 연휴에 맞춰 개봉하는 두 편의 영화 <1번가의 기적>과 <복면달호>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휴먼코미디를 표방한 두 영화는 누추한 삶의 조건에 내몰린 사람들, 혹은 꿈과는 거리가 먼 현실의 질퍽함을 보여주고는 관객들로 하여금 눈물을 쏟게 만든 뒤 그 현실에 낙관의 베일을 덮어씌우며 막을 내린다. <1번가의 기적>에서 필제는 철거 현장에서 울부짖는 아이들에게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를 부르게 하고는 깡패들한테 맞아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괜찮아 괜찮아”를 연발한다. <복면달호>의 달호는 트로트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됐으므로 복면을 벗어 던지고도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에 선택을 맡긴다. 우리는 그것이 거짓 낙관이며 거짓 희망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어쨌든 두 대중 영화는 현실의 무게를 이 앙다물고 가슴에 새기는 다짐이 아닌, 그냥 가볍게 툭툭 털고 일어나는 가벼움의 힘으로 돌파하고 싶어 하는 관객들의 욕망에 흔쾌히 부응한다.

아직 영화를 못 봤지만 지난 호에 실린 장문일 감독의 인터뷰 기사를 읽으니 <바람피기 좋은날>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는 영화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장 감독은 가볍고 자유롭고 싶은 우리의 욕망이 제도의 굴레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나는 풍경을 담아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불륜’이라는 수사로 가둘 수 없는 그 아수라장의 미학이 사뭇 기대되지만, 혹시라도 이데올로기의 폐허 위에서 깊이 팬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 본 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들판을 바라보는 듯한, 그런 허허로운 가벼움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살포시 고개를 든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그렇기 때문이다.

고백컨대, 나도 한때 ‘촐랑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가벼운 녀석이었다. 어떻게 하면 한 사람이라도 더 웃길 수 있을까, 유행하는 온갖 유머를 수첩에 적어놓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지금? 매일 ‘에헴’ 하느라 후배들과의 소통장애에 시달리며 살고 있는 ‘꼰대’가 됐다. 아, 가볍고 싶은 무거운 마음이여.(최광희 편집장 직무대행) 

07. 02. 15.

P.S. 고백컨대, 나는 한번도 '촐랑이'라 불려본 적이 없다. 하지만 알라딘의 이 서재 덕분에 간혹 상당히 수다스러운 '아줌마'란 평도 뒤에서 듣는다. 내게는 아마도 이 서재가 '가볍고 싶은 무거운 마음'을 풀어놓는 공간인가 보다(순결한 로쟈?). 내 수준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한편, 편집장 대행 체제가 오래 가는 걸 보면 이지훈 편집장의 건강이 아직 호전되지 않은 모양이다. 직무대행 또한 만만찮은 '말발'을 자랑하지만 그럼에도 빈자리는 느껴진다. '필름2.0'을 손에 들면 언제나 가장 먼저 읽었던 게 맨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편집장의 말'이곤 했다는 걸 빌미로 그의 쾌유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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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2-15 22:57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수다'는 수다치고는 너무 어렵죠. 로쟈님의 레이더망은 한계가 어디입니까. 필름 2.0은 한번도 안봤는데. 전 아주 가끄음씩 씨네21만 봐요. 유토피아 디스토피아가 좋아서 봤더랬는데 막상 본문은 별로 안보게 되더라구요.

로쟈 2007-02-16 00:14   좋아요 0 | URL
'수다'도 여러 종류가 있을 뿐이겠지요. 글고, 필름2.0은 저렴해서 자주 사봅니다(신문 2부 값이니). 씨네21을 가끔 보고요. 물론 한주만 기다리면 다 온라인으로 서비스가 되지만...

2007-02-16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비80 2007-02-16 10:45   좋아요 0 | URL
'순결한 로쟈?'에서 마시던 녹차가 사레걸렸어요. ^^

로쟈 2007-02-16 12:52   좋아요 0 | URL
**님/ 그 '수다'는 다른 곳에서도 듣는 얘깁니다.^^
소이부답님/ 저는 책임 안 지겠습니다.^^

노부후사 2007-02-16 15:39   좋아요 0 | URL
'로쟈의 순결한 19' 진행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 ㅎㅎ

로쟈 2007-02-16 15:57   좋아요 0 | URL
나름대로 19+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곧잘 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