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문학사이'의 이번주 연재는 <최순덕 성령충만기>와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의 작가 이기호를 다루고 있다(성령이 충만하면 갈팡질팡하게 되는가 보다). 문단에서 몇 안되는 젊은 기대주로 꼽히는 이 '육체파 소설가'(근육맨이란 뜻이 아니라 '막노동꾼'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의 '삽질'에 한번쯤 주목해보시길(최근에 작가는 인터넷방송 DJ와 대학강의를 맡아 더욱 바빠지게, 더욱 갈팡질팡하게 되었다). 그냥 삽질로 보이는 작품들도 없지 않지만, 사실 그렇게 파다보면 또 뭐가 되기도 하는 게 이 '소설-노가다판'이기도 하니까 기대는 버려두지 마시고. 관련기사와 인터뷰도 한데 모았다...

경향신문(07. 03. 24) [작가와 문학사이](11)이기호-삽질 같은 글쓰기

'소설 쓰는 노동자’. 어느 좌담에서 이기호는 스스로를 이렇게 정의했다. 이때 ‘노동자’란 샐러리맨으로 대표되는 임금 생활자라기보다는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에 더 가깝다. 문자 그대로 ‘삽질하는 사람’이라고 할까. 아니나 다를까. 이기호의 단편소설 ‘수인(囚人)’은 삽질하는, 아니 곡괭이질하는 소설가가 등장한다. 소설에서 삽질, 아니 곡괭이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 시대 소설가가 처한 곤경 혹은 광경을 잘 보여준다.

원래 ‘삽질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삽으로 땅을 파거나 흙을 파내는 일”을 말하지만, 군대용어로 전용되면서 요즘에는 대개 “엉뚱하거나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죽인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소설을 ‘전구나 라디오’ 같은 발명품과 같은 것으로, 아니 사실은 더 못한 것으로 보는 시대에 소설을 쓰는 일은 속된 말로 삽질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받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땅히 소설가라면 ‘삽질’을 거부할 것이겠지만, ‘수인’의 소설가는 자신이 소설가임을 증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삽을, 아니 곡괭이를 든다. 문자 그대로의 삽질을 하게 된 것이다. 25m의 시멘트벽을 뚫는 불가능한 ‘괜한 짓’은 그렇게 시작된다.



삽질로서의 소설쓰기. 그것은 ‘삽질하네!’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을 만큼 무용하고 비실용적인 일인 동시에, “바늘로 우물을 파는 듯한”(오르한 파무크) 고행에 가까운 힘겨운 노동이기도 하다. 원고료와 인세만으로 간신히 생활을 꾸려가면서 홀로 죽을 힘을 다해 소설을 써도, 소설가는 한심한 인간 취급을 받기 일쑤다. 그러나 언젠가 홈리스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속에서도, 아무도 자신의 소설을 읽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도, 소설가는 삽질 같은 소설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삽질은 소설가만 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삽질을 해서, 땅을 파서 그 흙을 먹고 사는 사람이 있다.(‘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 지하 벙커에 갇힌 채 6개월을 지내야 했던 ‘나’는 극도의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우연히 흙을 먹는다. 그러다가 ‘나’는 흙맛에 매료되고 급기야 ‘나’에게 흙은 밥이 된다. ‘그냥 삽으로 대충 몇 번 파헤쳐도’ ‘나’는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흙만 먹을 수 있다면 우리는 ‘밥’을 위해 그렇게 악전고투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그러나 ‘누구나 손쉽게’ 흙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흙맛을 알기 위해서는 ‘흙은 먹을 수 없다’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우리의 감각을 천편일률적인 것으로 만든 조미료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땅 파 먹기’도 쉽지 않은 것이다.



이기호의 소설에는 이렇게 삽질하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들의 삽질은 대개 보통의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한다. 그래서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스스로를 질책하지만, 그러면서도 자학과도 같은 삽질을 멈추지 못한다. 그 삽질은 대개 다음과 같은 양상으로 나타난다. 자해공갈을 하려다가 공갈(恐喝)은 못하고 자해(自害)만 한 경우(‘당신이 잠든 밤에’), 교통표지판을 잘라 고물상에 팔려고 하다가 되려 교통표지판을 수호하게 된 경우(‘아무 의미 없어요’), 국기 게양대에 걸린 국기를 떼어서 팔려다가 국기 게양대와 이상한 사랑에 빠진 경우(‘국기 게양대 로망스’). 역시 삽질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기호는 이들을 일러 ‘이시봉’이라고 한다. 이 시봉이들은 분명 우리 사회의 낙오자들이다. 그들은 사기조차 칠 수 없을 만큼 멍청하며 하는 일마다 되는 게 없는 머피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남을 탓하는 대신 자기 머리를 쥐어박는 자학을 선택한다. 물론 그들의 자학은 병리적 마조히즘도 자기 우월감의 반어적 표현도 아니다. 그런 멋 부리는 자학을 하기에 그들은 너무 우직하다. 어쩌면 그들은 그런 우직함으로 삽질을, 삽질 같은 소설쓰기를 계속하는지도 모른다.(심진경|문학평론가) 

한국일보(07. 03. 22) [길 위의 이야기] 정치적 올바름

요즘, 이곳저곳에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원래 '정치적 올바름'이란 차별적, 혐오적인 언어로 소수그룹을 모욕하는 것을 막자는 취지에서 생겨난 것이다. 한데 이 '정치적 올바름'이 근래 들어 자꾸 근본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길 없다.

단 한 가지 진리만 제시될 수 있다는 믿음, 그 외에 것들은 모두 아니라는 생각. 그것이 이 '정치적 올바름'을 왜곡시키고 있는 주범이다. 그 왜곡이 가장 크게 작동되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대학이다.

많은 대학의 선생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지닌 교육자로 평가받고 싶어한다. 해서, 자꾸 '정치적 올바름'외에 것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한다. 소수의 권리를 부르짖느라, 다수의 권리는 망각하는 선생들을, 나는 많이 봐왔다. 그것은 왜 그런 것인가? 그것이 오직 포즈로써의(*포즈로서의) '정치적 올바름'이기 때문이다.

실상은 그렇지 못한데, 인정욕망에 사로잡혀, 연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정치적 올바름'은 오히려 독이 되고 만다. 근본적이지 못한 근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런 근본주의는 종종 폭력의 형태로 우리 사회에 되돌아오곤 한다. 거 참, 문제다. 연기들 하지 말고 살자.(소설가 이기호)

주간한국(07. 03. 20) [이신조의 '작가와 차 한 잔'] <2> 소설가 이기호

영국의 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다고 한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해석을 하자면,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갈팡질팡이란 말 대신 우왕좌왕이나 우물쭈물, 오락가락이나 좌충우돌, 허둥지둥이나 전전긍긍이 들어간다 해도 크게 무리는 없어 보인다. 아무튼 버나드 쇼란 작가를 잘 알지 못하는 독자라도 이 문장을 통해 그가 작품 속에서 특기로 발휘했던 씁쓰레한 자조(自嘲)의 뉘앙스를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렇다면 묘비명이 아닌, 그 문장을 제목으로 내세운 소설책은 어떨까. 사실 갈팡질팡이든 우물쭈물이든, 좌충우돌이나 전전긍긍이란 말은 (한 작가의 일생보다는) ‘젊음’을 설명하는데 더없이 적절한 단어들이다. 물론 젊음은 싱그럽고 활기차고 아름답다는 희망과 긍정의 수식어를 우선 헌사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미 젊음을 통과해왔거나 지금 젊음을 통과하고 있는 당신이라면,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지’ 탄식 같은 혼잣말을 중얼거릴 것이다. 젊음에게 ‘혼돈’은 전공필수, ‘방황’은 교양필수다.

젊음은 헤매고 더듬고 망설이고 놓치고 속고 허방을 짚는다. 시행착오는 피할 길 없으며, 창피를 당하거나 헛걸음을 치기 일쑤다. 말 그대로 갈팡질팡, 우왕좌왕, 오락가락의 나날들. 만만찮은 대가를 치르며 인생을 위한 세련의 기술을 습득해가는 시절. 그러나 인생이 짐짓 서글퍼지기 십상인 것은 많은 경우 그 세련이 그럴싸한 포장, 능란한 거짓말, 어떻게든 상처나 갈등을 면해보려는 회피에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소설가 이기호가 그의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 역시 예의 ‘세련’의 문제다. 그러나 그는 애초부터 그럴싸한 포장이나 능란한 거짓말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방식임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라고 왜 번드르르한 세련의 포즈를 흉내내보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결과는 무참했던 것 같다. 세련의 포즈를 취하려다 그야말로 무참하게 ‘깨지는’ 극적인 사례들을 보고 싶다면, 지금 당장 그의 책을 펼쳐들면 된다. 그럴싸한 포장과 능란한 거짓말에 좌절한 이기호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래서 ‘정면 돌파’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기꺼이 고난의 가시밭길을 선택한 영웅이나 구도자라는 것은 또 아니다. 멋들어지게 돌파에 성공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시봉’이란 인물로 대표되는 이기호 소설의 주인공들은(이름부터가 벌써 좀 그렇다) 웬만한 소시민상(像)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안한 표현이지만 ‘지지리 궁상’에 가까운 캐릭터들이다. 그들의 정면 돌파는 대의를 위한 거창하고 폼 나는 ‘선택’이 아니라, 궁지에 몰린 나약한 자의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이자 발버둥이다. 예상대로 그들은 세상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 어느 때는 거의 린치를 당하는 수준이다.

소설 속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주인공의 좌충우돌에 킥킥 웃음을 터뜨리며 빠르게 책장을 넘기는 독자도 있겠지만, 멋지고 근사한 주인공을 자신의 분신으로 삼아 감정을 이입시켜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은 독자라면 고개를 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기호의 주인공들이 그런 수모를 겪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련’ 때문이다.

그들의 정면 돌파가 어쩔 수 없는 발버둥에 불과한 것이라도, 그들이 끝내 세련됨을 손에 넣을 수 없다 하더라도, 예의 이기호식(式) 정면 돌파는 당위성을 갖는다. 그것은 외면이나 도피가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삶에 대한 기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통은 솔직하고 정직하다. 애써 갑옷 같은 갑각류의 껍질을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는 것, 그러지 않았다는 것. 생살의 쓰라린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짐짓 건강하다는 뜻이다.

카페의 이름은 ‘제니스’. 좀 달콤한 것이 먹고 싶다던 그는 조언을 구한 뒤, ‘바닐라 카라멜 라떼’를 주문한다. 잠시 뒤 하트 모양의 하얀 우유거품이 떠 있는 예쁜 커피잔이 그 앞에 놓인다. 그가 웃으며 카페의 직원에게 묻는다. “와, 이런 건 어떻게 만드는 거예요?”

어줍잖은 ‘작업 멘트’가 아니다. 그러니까 그는 커피 위에 이런저런 모양으로 우유거품을 만들어 얹은 것을 ‘라떼 아트’라고 부르는지 모르는 ‘아티스트’인 것이다. 우유거품으로 하트 모양을 내기 위해 열심히 연습했을 그 직원을 ‘바리스타’라고 부른다는 사실 역시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뭐 어떤가. 와, 이런 건 어떻게 만드는 거예요? 순순히 물어보면 되는 것이다. 창피를 당할까 굳이 아는 척을 한다거나, 주눅이 들어 물어보지도 못한다거나, 그게 더 지지리 궁상이다.

두들겨 맞는 얘기에 일가견이 있는 소설가와 ‘맷집’ 얘기를 했다. 이기호는 현재 한국일보에 <길 위의 이야기>라는 짧은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세상살이에 대한 이런저런 단상들을 이기호 특유의 유머와 기지로 풀어내고 있는데, 무척이나 공감과 인기를 얻고 있는 모양이다. 재미있다는 반응도 많지만, 몇몇 민감한 사안이나 어느 특정 단체의 문제를 언급했을 때는 바로 악플이 달리거나 항의 메일을 받거나 했다. 소설이라는 픽션에 익숙해져 있는 터라 처음 써보는 칼럼이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역시 여러모로 맷집이 생기고 있다는 느낌이다. 독자의 반응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전달된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게 욕이건 칭찬이건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내가 잘 쓸 수 있는 건 역시 픽션이란 것도 확실히 깨달았다.”

모든 도식화(圖式化)엔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분류에 의하면 이기호는 ‘글월로 세상을 계몽하는 지식인’형(形) 소설가도, ‘글로 억압과 싸우는 투사’형 소설가도, ‘문자로 예술하는 고독한 댄디’형 소설가도 아니다. 신형철은 이기호를 ‘육체파 소설가’로 명명한다. ‘막노동꾼’에 가까운 소설가란 것이다. 그 말에 동의하듯, 그는 단편집 말미 ‘작가의 말’에 “소설이 잘 써지지 않을 때마다 내가 중얼거리는 말이 있습니다. / 겁 많은 두 눈아, 겁내지 마라, 부지런한 네 두 손이 다 알아서 해줄 테니”라고 썼다.

이기호의 단편소설 ‘수인(囚人)’은 핵사고가 일어난 가상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세상에 재앙이 벌어진지도 모른 채 산 속에 틀어박혀 소설을 쓰고 있던 신인작가 박수영은 그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휘말린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없게 된 수영은 자신이 쓴 소설책을 찾아내기 위해 폐허더미가 된 서점을 향해 이십오 미터 길이의 땅굴을 파기 시작한다. 곡괭이를 들고 자신의 책을 향해 콘크리트 벽을 내리치는 소설가의 손에는 물집이 잡히고 피가 흐른다.

곧잘 독자를 낄낄거리며 웃게 만드는 소설가 이기호는 스스로를 참 무취미하고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그가 술에 약하다는 사실은 문단에 제법 알려져 있다. 여느 작가들처럼 마니아급의 예술적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도 음악도 여행도 그저 그렇단다. 컴퓨터 게임 삼매에 빠지는 일도 없고 흥미를 느끼는 특별한 잡기도 없다. 중독이라 할 만한 거라곤 담배와 축구중계 시청 정도. 경치 좋은 곳을 오래도록 산책하는 것, 멍하니 이런저런 공상에 잠기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것들이라 말한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그의 어여쁜 아내는 “무슨 소설가가 그래요?”하며 첼로를 선물하기에 이르렀다.

“지금이야 첼로 앞에 앉아 있으면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어색한 게 사실이지만 덕분에 목표가 생겼다. 환갑이 되는 날, 첼로 연주회 겸 소설 낭독회를 열고 싶다. 과거의 작품이 아니라 그때 막 새로 쓴 소설을 가지고.”

이기호와 첼로! 그럴싸한 포장과 능란한 거짓말을 익히지 못해, 흠씬 두들겨 맞으며 미련하게 곡괭이질을 해야 했던 젊은 소설가는 어찌됐든 ‘세련’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기호는 발음이 어려운 외국 영화감독의 이름이나 아방가르드 미술 사조 앞에서는 그의 주인공 ‘시봉’처럼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이지만, 귄터 그라스와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책장이 나달나달해질 정도로 반복해 읽었으며 한나 아렌트와 다치바나 다카시의 글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소설가다. “내가 쓰고 싶은 얘기는 메타 픽션(소설가가 주인공인 소설)이 아니다.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아직 시작도 못했다”며 장편소설에 대한 은밀한 결의를 밝히는 그의 나직한 목소리는 더없이 진지했다. 갈팡질팡하다가 세련되어질 줄 알았다. 소설가 남편에게 첼로를 선물한 그의 어여쁜 아내는 올 5월에 한 아이의 엄마가 된다. 첫 장편소설에 매진하고 있는 소설가 이기호는 당연히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 정면 돌파. 그는 정직하게 글을 쓰고 정직하게 아이를 키울 것이다. 힘겹겠지만 더욱 세련되어질 그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참고로 작가와 필자의 친분관계상 대화는 이기호 소설의 그것처럼 지극히 리얼한 구어체로 진행되었으며, 곧 세상에 태어날 그의 아이는 필자의 예상대로 아들이란 점을 밝혀둔다.

07. 0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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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7-03-24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겁 많은 두 눈아, 겁내지 마라, 부지런한 네 두 손이 다 알아서 해줄 테니
멋있는 말이군요! 가져 갈게요.^^

이리스 2007-03-24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작품이 '그냥 삽질'로 보이시는지요?

로쟈 2007-03-24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님/ 가장이 됐으니 더 부지런해질 것 같은 작가입니다.^^
낡은구두님/ 너무 노골적인 질문이신데요.^^; 저는 '이시봉' 이야기들이 좀 싱겁다고 생각합니다. 페이소스를 느끼기엔 좀 작위적이란 느낌을 받고요. 제 주관적인 느낌이 그렇습니다...

2007-03-25 0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학술저널 담비의 리뷰를 가끔 스크랩해놓는데, 이번에 옮겨오는 것은 영국 비평가 매슈 아놀드의 '교양'론에 관한 것이다. '매슈 아널드'의 <교양과 무질서>(한길사, 2006)는 예전에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다룬 바 있지만 아직까지 손에 들어보지 못했는데 전공에 대한 관심사와도 맞물려서 조만간 훑어보기라도 할 작정이다. 아놀드 비평의 요체를 되짚어본 논문에 대한 리뷰를 워밍업으로 읽어둔다. 

담비(07. 03. 23) 매슈 아놀드의 '교양'을 다시 논하다

매슈 아놀드(Matthew Arnold, 1822~1888)는 영미 신비평(New criticism)이 활개를 쳤던 지난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국내 인문학 담론 전반에서 널리 인용된 학자이다. 비평의 인문주의적 기능을 확립시킨 그는 어떠한 사적 의도도 갖지 말고 작품을 대하라는 '몰이해적 관심'(disinterestedness), 이제까지 존재한 최상의 작품과 비교해보았을 때 손색이 없어야 비로소 뛰어난 작품이라는 '시금석 이론' 등으로 유명하다.

F. R. 리비스와 에즈라 파운드에 의해 정초된 문학 텍스트주의가 미국으로 건너가 남부 귀족 교수들의 보수적 세계관과 맞아 떨어지면서 제도권 평단을 석권했다는 비판이 있듯이, 이들의 사상적 鼻祖(비조)에 해당하는 매슈 아놀드 또한 그간 좌파 비평가들에게는 우파 부르주아 비평관의 원조격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소위 아놀드 때리기와 이에 맞선 아놀드 구하기가 영미 문학계 내부에서 진행되어온 것이다. 

아놀드는 프랑스 혁명 후 영국사회에 불어닥친 이념의 혼란상을 타개하기 위해 '비평' 기능의 회복을 주장하거나, 대중들의 민주주의적 열망이 대중주의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면서 '교양' 개념을 통해 대중의 문화적 수준향상을 꾀하려했던 인문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현 시기 비평의 기능'(The Function of Criticism at the Present Time, 1864)과 '교양과 무질서'(Clture and Anarchy, 1869) 등의 저작을 통해 새로운 비평을 제안하고 그 핵심으로 교양 개념을 제시했다.

이런 아놀드의 기획에 대해 전형적인 맑스주의적 비평을 가한 이는 테리 이글턴이다. 그는 아놀드가 당대 계급세력의 급진적인 재편을 지배블럭 안에서 효과적으로 달성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기존체제로 포섭하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고 비판했다. 귀족계급이 급속도로 정치적 헤게모니를 잃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부르주아의 정치적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문화적 패권 확보가 아놀드의 주된 관심사였다고 본 것이다. '문학에서 문화연구로'의 저자 앤서니 이스트호프 또한 "아놀드의 교양이념에서 문학이 계급갈등을 희석시키고 국가적인 조화를 긍정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본다.

이글턴과 이스트호프는 당연히 문학의 정치적 읽기로 나아간다. 이들의 단골메뉴는 대중문학(문화)과 고급문학(문화)의 위계철폐다. 그러나 요즘 이런 주장의 효력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의 대중문화는 대중들의 민주주의적 열망을 담아내기보다는 자본의 확장에 동원되는 측면이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점에서 철지난 '아놀드 때리기'와 '구하기'에서 벗어나 그의 핵심사유를 다시 읽어보려는 시도가 있어 눈길을 끈다. 김재오 영남대 교수(영문학)가 최근 '19세기 영어권 문학' 제10권 2호에 발표한 '아놀드의 사상-민주주의, 비평, 그리고 교양'이 그것이다. 김 교수는 "아놀드가 오늘날 대중문화의 자본종속과 같은 사태를 누구보다 우려하고 그 폐해를 실감했다"는 점에서 볼 때 "아놀드의 비판대상이 되었던 관점으로 아놀드를 비판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흐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평자들이 아놀드의 이데올로기적 입장만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아놀드의 주장을 거꾸로 읽어야 올바른 독자가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 효과'"라며 김 교수는 목소리를 높인다. 아놀드의 현실인식이 '정치적 정답'과 일치하느냐의 여부보다 그의 비평과 교양개념에 담긴 당대적 의의를 살펴보는 것이 인문학의 위기라는 오늘날의 현실을 진단하는 데 유용한 참조틀이 될 것이라며 아놀드 다시 읽기를 시작한다.

우선 김 교수는 아놀드의 첫번째 비평적 주저에 해당하는 '현 시기 비평의 기능'이 프랑스 혁명 후의 영국사회의 변화상에 대한 사상적 대응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아놀드가 보기에 당시의 문인들은 소포클레스나 셰익스피어처럼 '창조성'이 중요한 사상의 흐름 속에 있지 않았다. 그것보다 '인간의 힘'과 같은 것이 부족했고 필요했다. 아놀드는 바이런과 괴테가 위대한 창조력을 갖고 있었지만 괴테가 삶과 세계에 대해 폭넓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생명력이 더 오래갔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아놀드는 워즈워드를 비롯한 이전 세대 시인들이 프랑스혁명의 여파를 전 유럽적인 관점에서 파악하지 못했고, 그 이념의 전파가 몰고 올 영국사회의 변화를 넓은 시야에서 바라보지 못한 점이 불만스러웠다.

먼저 프랑스혁명과 영국혁명의 차이를 보자. 아놀드가 보기에 프랑스혁명은 이성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사상에서 그 동력을 발견한 것이었고, 영국의 경우는 법이나 양심 등의 실제적인 감각에 기초한 것이기에 보편적 호소력을 지니지 않았다. 하지만 아놀드는 프랑스 혁명을 두개로 쪼개서 보았다. 사상적 혁명에서는 성공했지만, 정치적 혁명에서는 실패했다고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 그는 에드먼드 버크에 동조했다. 버크는 프랑스의 과격한 혁명문화가 영국에 밀어닥칠 것을 우려한 대표적인 보수파 지식인이다. 주권재민의 원칙은 영국에서 시발되었으나 권리장전에 채택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것이 프랑스로 건너가 형멱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이에 대해 버크는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정리했다. "주권재민의 원리는 영국 토양에 전적으로 맞지 않으나 영국에서 자란 가공되지 않은 산물로서 어떤 사람이 이중의 사기로 불법적으로 선적해 [프랑스에] 수출한 위조품이다. 이 수출의 목적은 이 위조품을 향상된 자유라는 최신 프랑스식의 유행을 따라 다시 제조해서 영국에 밀수입하려는 데 있다."

대단히 역동적인 정리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여기서 아놀드가 읽어낸 교훈은 "훌륭한 사상들을 정치적이고 실제적인 부분에 즉각적으로 적용하려는 열광은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사상은 '그 자체로' 평가해야 하나 자신들의 요구에 따라 사상의 본질을 왜곡하면서까지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보았다. 김 교수는 여기서 "아놀드의 사상은 정치이념으로서의 성격보다는 한 문화를 성장시키는 정신적 토양에 가깝다"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 명제가 김 교수 논문의 핵심이다.

아놀드는 프랑스 혁명사상이 과연 보편적인가를 심각하게 질문했던 것이다. 그 방식은 바로 그것을 영국사회의 특수성 속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거기서 그것은 '추상적'이라는 판단을 받게 된 것이고.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현실세계에 작용하는 '사상'에 대한 필요성이 아놀드에게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교양' 개념은 이런 필요성에 따라 등장한 개념이라고 김 교수는 말한다.

이 '교양'이 '프랑사(*프랑스)의 사상'과 다르게 하기 위해 그는 독일에 눈을 돌렸던 듯하다. 쉴러 같은 독일 관념론자들에서 잘 나타난 '인격도야(Bildung)의 개념이 그것이다. 리딩스(Bill Reading) 등의 지적에 따르면 독일 관념론자들의 기획은 지식과 역사적 전통을 미학적 이데올로기를 통해 매개하여 변증법적 통일을 이루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교양(문화)의 이상을 드러내는 일과 개인의 발전을 하나의 과정을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독일과 영국의 국민적 기질은 거의 상반됐다. 민족적 정체성보다는 개인주의가 강력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따라서 아놀드는 개인적 도야를 역으로 틀어 당시 영국에 퍼지던 물질적 문명에 대한 맹신, 강한 개인주의, 융통성의 부족(똘레랑스의 실종?) 등의 문화적 에토스에 대한 대응으로서 '교양'을 설정했다.

교양이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학문적 열정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선행에의 충동, 인간적 오류를 개선하려는 사회적 동기와 결합한다. 무엇보다 아놀드는 교양의 이념을 국가 개념과 결합시키려고 노력한다. 노동계급이 오랜 봉건적 습속에서 벗어나 자유 그 자체를 숭배하는 무질서한 경향이 뚜렷해지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아놀드의 노동계급에 대한 시각은 일방적인 면이 있음을 김 교수는 인정한다.

계속 지적하자면 아놀드에게는 계급의 현실이 부차적이거나 항상 생략됐다. 교양의 작용이 계급을 없애려면 계급간의 정치적,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는 우선적 고려사항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레이먼드 윌리엄즈가 "아놀드 교양이념의 재료를 발견할 수 없다"고 비판한 것은 설득력을 지닌다. 우리의 탁월한 윌리엄즈는 "교양개념은 올바른 실천과 앎이 결합된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되지 않고 '앎'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일종의 '물신'이 되어버렸다"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결론에서 아놀드의 교양개념이 현실을 수용하지 못한 측면이 많지만,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로 나가는 길목에 '교양'의 이념이 있음을 강조했고, 그 이념을 당성하는 데 '문학'의 역할이 있음을 알렸다는 측면을 높이 평가한다. 김 교수의 논문은 아놀드 사상의 역사적 배경과 전개, 그 장단점을 잘 정리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교양이라고 일컬어지는 가벼운 것들과 아놀드의 교양을 비교해볼 필요는 충분히 있을 듯하다.(리뷰팀)

07. 0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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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7-03-24 17:16   좋아요 0 | URL
예전에 문학권력 논쟁하던 무렵에 강준만 교수가 덕성여대 영문과 윤지관 교수를 비판하면서 매슈 아놀드를 언급했던 게 기억이 나네요. 윤지관 교수가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철지난 보수적 이론가인 아놀드를 가지고 얘기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 같은데^^ 그 이상은 아는 바가 없네요. 그때의 논쟁은 어떻게 정리가 됐었나요?

로쟈 2007-03-24 23:0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기억은 나는데, 결말은 모르겠습니다(결말이 따로 지어졌는지도 모르겠구요).^^; 백낙청 교수의 경우도 그렇지만 '보수적 비평가'를 준거로 삼는 건 창비의 기본 포지션입니다. 그 자체가 비난받을 만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징후적이란 생각은 합니다...
 

이번주에 나온 신간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책은 <세계를 뒤흔든 열흘>의 저자 존 리드의 평전이다. 워렌 비티가 감독과 주연을 맡았던 영화 <레즈>(1981)의 원작이었다고도 하니까 로젠스톤의 원저 자체는 좀 오래된 책이다. <낭만적 혁명가(Romantic Revolutionary)>(1975)가 그 원제이다. 32년만에 번역된 것에 의의가 있다기보다는 러시아혁명 90주년을 맞는 해에 번역되었다는 사실이 더 뜻깊다고 하겠다. 프레시안에 실린 리뷰가 자세하기에 옮겨놓는다.

 

프레시안(07. 03. 22) 진정 이 시대엔 '혁명'이 사라졌는가

"철도공무원."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어린이가 장래 희망을 묻자 망설임없이 이렇게 답하는 것을 봤다. 그 어린 나이에 '장래 희망'을 구체적인 '직업'으로 콕 짚어 이야기한 것도 놀랍지만, 철도공무원이 되고 싶은 이유를 물어보자 "직업이 안정적이잖아요"라고 대답한 대목에선 경악을 금치 못했다(안타깝게도 그는 너무 어려 지난 2005년 철도청이 민영화돼 철도공사로 전환된 사실은 모르고 있는 듯 했다). 채 열 살도 안 된 어린 소년이 추구하는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안정적 삶'이라는 사실은 어느덧 '불안'이 사회를 지배하는 키워드가 돼버린 21세기 초 한국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
  
하지만 자아가 확립되기 이전 단계에서부터 '부'와 '안정적 삶'을 목표로 삼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 형성 이후 어느 사회에서든 일상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이게도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을 취재한 책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쓴 존 리드(Jhon Reed)의 평전을 통해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백만장자를 꿈꾸던 청년이 혁명가가 되기까지
  
최근 출간된 로버트 로젠스톤의 <존 리드 평전- 사랑과 열정 그리도 혁명의 투혼>(정병선 역. 아고라 펴냄)에 따르면, 대학 시절 존 리드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모든 것은 이렇게 요약된다. 행복과 모험, 아니면 돈과 판에 박힌 일상." 그리고 대학 졸업을 앞두고 몇 개월간 유럽을 여행한 뒤 미국으로 돌아오면서 리드는 두 가지 인생 목표를 설정했다. "백만장자가 되는 것과 결혼하는 것." 물론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돈과 일상'이 아닌 '행복과 모험'을 택했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의 삶에도 불행한 순간이 많았지만.


  
특히 기자로서 그를 변화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1913년 봄 뉴저지 주 패터슨 노동자 파업 취재였다. 그는 이 파업을 취재하다가 경찰에 체포돼 감옥에 구금됐다. 이 경험에 대해 그는 "나는 영웅도 아니고 순교자도 아니다. 모든 것이 한바탕의 장난일 뿐"이라고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지만, 대학시절 낭만주의적 발상으로 고기잡이 배를 탔던 것과 나흘에 불과했지만 노동자들과 함께한 감옥 생활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낭만주의적 지식인에서 실천적 지식인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은 1914년 판초 비야가 이끄는 멕시코 원주민 반군을 취재해 쓴 <반란의 멕시코>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 책에 대해 그의 친구는 "멕시코는 물론이고 너와 함께 약동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 그는 "멕시코 혁명을 취재하면서 대의가 삶보다 더 중요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리드는 유럽 전역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취재하면서 철저한 반전주의자가 됐다. 전쟁을 두고 미국 내 진보적 지식인과 예술가, 급진주의자들의 공동체가 혼란에 빠졌고, 종국에는 대다수가 전쟁에 찬성했지만, 그는 국회의사당에 출석해 전쟁 반대 주장을 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사실상 '실업자'가 됐다. 어느 매체도 공개적으로 전쟁 반대 입장을 밝힌 그에게 일거리를 맡기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혁명'의 기운을 감지하고 러시아로 건너가 1917년 11월 볼세비키 혁명을 목격했다. 그는 "대중의 승리"인 이 혁명의 기록을 담은 책을 두 달 만에 완성했다. 이 기록이 바로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와 함께 세계 3대 르포르타주로 평가받는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다.

한 세기의 시간을 두고 변한 것은 무엇인가
  
그는 볼세비키 집권 이후 소비에트 선전국에서 일했으며, 뉴욕 주재 소련 영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는 미국에서도 '대중의 승리'를 꿈꾸며 공산주의 노동당을 창당하고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으러 러시아로 갔다가, 1920년 모스크바에서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레닌을 비롯한 동지들의 애도를 받으며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크렘린에 묻혔다. 안타깝게도 그가 1776년 '독립 영웅'들 이외의 혁명가들은 존경받지 못 하는 미국인이라 점에서 자국민들의 기억 속엔 깊이 남아 있지 못하지만 말이다.

그나마 그에 대한 기억이 환기된 것은 1981년 이 평전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레즈(Reds)> 덕분이다. 이 영화는 그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착오로 보인다. 그해 작품상은 <불의 전차>가 수상했으며 <레즈>는 감독상과 여우조연상 등을 수상했다. 오래전에 본 이 영화를 며칠전에 상기할 수 있었는데, 보드리야르가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 대담에서 털어놓을 걸 읽었기 때문이다. 아래는 1927년 사망한 존 리드의 모스크바에서의 장례식).

서른셋 짧은 생을 불꽃같이 살다간 리드의 평전을 읽다보면 100년 가까운 시간과 미국과 한국이라는 공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현실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리드는 1913년 패터슨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뉴저지주 패터슨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한 전쟁이다. 일방적으로 한쪽, 다시 말해 공장 소유주들만이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들의 하수인인 경찰이 저항하지 않는 남녀를 곤봉으로 구타하고, 법을 준수하는 군중을 탄압하고 있다. 그들에게서 돈을 받은 용역 깡패들이 총탄을 사용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그들의 신문인 <패터슨 프레스>와 <패터슨 콜>은 선동적이고 범죄를 조장하는 기사를 씀으로써 파업 지도자들에게 폭력을 가하도록 조장하고 있다. 그들의 끄나풀인 캐럴 치안판사는 경찰서에서 잡아들인 평화 시위대원들에게 중형을 선고하고 있다. 그들이 경찰과 언론, 법원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자본가들과 경찰, 법원, 그리고 주류 언론의 '끈끈한 관계'는 사실상 변한 게 없다. 또 당시 패터슨 노동자들의 요구는 '8시간 노동'과 '최저 임금'이었다. 이는 현재의 대다수 노동자들도 여전히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 리드는 1916년 미국의 참전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 때 아래와 같은 이유를 들어 전쟁을 반대했다.
  
"근로대중은 자신의 적이 독일이나 일본이 아님을 깨달아야만 할 것이다. 국가의 부를 60%나 소유하고 있는 미국의 2%가 근로대중의 적이다. 근로대중의 재산을 빼앗아간 이 사악한 '애국자' 집단이 이제는 그들을 군인으로 동원해 자신들의 약탈재산을 보호하려 획책하고 있다."
  
존재하지도 않는 '대량살상무기'를 들어 이라크를 적으로 설정한 지금의 전쟁에서도 딕 체니 부통령의 헬리버튼 등 부시 정권과 결탁한 미국 군수업체들만 엄청난 이득을 보고 있다. 이 전쟁에서 죽어 나가는 것은 근로대중들의 자녀인 동원된 군인들과 점령국의 무고한 민중들이다.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
  
하지만 20대 초 백만장자를 꿈꾸던 평범한 청년이 혁명가가 된 것은 그의 특출함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여자를 밝히고, 한때 부인의 배신에 괴로워하고, 돈벌이를 위해 글을 쓰기도 하는 등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기도 했다. 다만 그는 역사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몸을 맡겼고, 자신의 방식으로 역사에 발자취를 남겼다.


  
그로부터 100년 가까이 지나 더 이상 '혁명'을 꿈꿀 수 없다는 21세기 초,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새로운 저항들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또 미국이 일으키고 있는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남미에선 여러 국가들에 좌파 정부들이 들어서고 있다. 이들은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리드는 <세계를 뒤흔든 열흘> 서문에서 "내 감정은 중립적이지 않았다"고 썼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이 과연 누구의 시각인가를 다시 한번 뒤돌아보게 만드는 말이다. 살아가면서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살다간 기자이자 혁명가인 그의 삶이 우리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전홍기혜 기자) 

07. 03.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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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23 0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3-23 1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3-24 12:35   좋아요 0 | URL
ㄱ님/ 품성론은 그래서 나오는 것인데, 그것이 '과학'과 결합되면 '인간개조론'이 되는 것이죠...
ㅁ님/ 러시아혁명 자료를 찾으면서 비디오로 보아서인지 전반부를 몰입해서 보지 못했습니다. 스크린으로 본다면 느낌이 좀 다를 거란 생각은 드네요.^^
 

레디앙의 연재물 '세계의 사회주의자'에 뜻밖에도 가라타니 고진 편이 다루어졌기에 옮겨놓는다. 단서조항이 없을 수 없는데, 편집자도 옮겨놓고 있는 필자의 견해에 따르면 "그가 사회주의자일 수 있다면, 자신이 새로 만들어낸 기획 속에서일 것"이라는 게 '사회주의자 고진'의 근거이다. 알다시피 고진이 "새로 만들어낸 기획은 NAM을 의미한다". 안 그래도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책상에 올려놓은 지가 오래인데 바쁜 일들이 얼른 지나가기만을 바랄 따름이다. 아래의 연재는 고진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로도 읽을 만하다.

레디앙(07. 03. 20) '몰락 이후' 쉰이 넘어 코뮨주의자 되다

잊고자 쓰는 사상가가 있다. 그는 개념으로 성을 쌓지 않는다. 남들이 자신의 착상을 하나의 방법론으로 차용할 때면 그 자리에 불을 지르고 떠난다. 형이상학을 극도로 경계하며, 따라서 세계를 하나의 이야기로 지어내는 예언을 멀리한다. 이런 성향을 가진 이에게 ‘~주의ism’는 사상의 죽음을 뜻한다. 예수가 아닌 바울이 기독교(예수주의)를 만들었듯, 마르크스주의가 엥겔스의 산물이듯 ‘주의’는 사상이 하나의 체계로 구축되며 시작된다. 그래서 이동을 감행하는 사상가에게 ‘~주의’는 사상이 멈춰선 자리, 즉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전망이 상실된 90년대에, 그것도 쉰이 넘고 나서야 그는 코뮨주의자가 되었다. 바로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의 이야기다.



비평은 위기적 상황으로 자기를 내모는 것

가라타니 고진은 1941년 일본의 효고현에서 태어났다. 10대에 문학 작품을 탐독했지만 문학을 하나의 장르로 다루는 데에 반감을 품고 있었으며, 결국 도쿄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행방은 문학비평가로 시작되었다. 스물아홉에 가라타니 고진은 <소세키론>으로 군조오 신인문학상을 거머쥐면서 문학계에 두각을 나타냈다. 물론 이 시기 그는 영문과 대학원을 진학했지만 경제학과 출신의 문학비평가라는 다소 어색한 그의 이력을 두고 의아해할 필요는 없다. 경제학이든 문학이든 그는 분과학문을 한다는 의식을 갖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는 형이상학과의 싸움이 절실한 문제였다.

형이상학은 역사의 배후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이념을 발견한다. 한국에서 널리 읽힌 그의 초기 저작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1978)과 『일본근대문학의 기원』(1980)은 형이상학과의 대결이라는 문제설정을 경제학과 문학이라는 각기 다른 방면에서 펼쳐낸 것들이었다. 그는 이 저작들에서 자본주의와 근대문학을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장치로 해명하여 근대인들을 속박하는 관념의 그물을 걷어내고자 했다.

아마도 가라타니 고진이 스물여섯에 발표한 첫 번째 평론 「사상은 어떻게 가능한가」는 이런 점에서 그의 사상적 원점을 이룬다고 하겠다. 그 일절을 주목하자. “사상과 사상이 격투한다고 보일 때도, 실상은 각자의 사상적 절대성과 각자의 현실적 상대성이 모순되는 지점에서 은밀히 행해지는 연기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사상이 각자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곳에서 결전이 이루어진 예는 한 번도 없다.”

확실히 가라타니 고진은 ‘비평가’로서의 자기의식을 갖고 출발했다. 그에게 비평은 다른 텍스트에 기대어 자신의 입장을 전하거나 편을 짓는 작업이 아니었다. 비평이란 사상의 결전이 치러지는 장소 밑바닥에서 이뤄지고 있는 역할극을 끝까지 주시하는 일이다. 대치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입장 가운데서 하나를 택하는 일이 아니라 그렇게 대치할 수 있는 조건, 그 무의식적 구조를 해명하는 일인 것이다. 그 조건과 구조를 밝힌다면 날이 선 온갖 사상적 입장들은 형이상학의 성채를 두르고 있던 부속물임이 드러난다.

물론 이러한 비평에는 으레 자신은 상처입지 않으면서 상황 밖에 서 있다는 푸념이 따르곤 한다. 하지만 고진은 홀로 옳은 곳에 서 있고자 비평하지 않았다. 그에게 비평(critique)이란 위기적인(critical) 상황으로 내몰리는 일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비평 대상만이 아니라 비평하는 자신도 그래야 한다는 점이다. 사상가가 자신의 발화를 자명하다고 여겨 더 이상 거리낌을 갖지 않는다면, 사상은 어느새 상업성을 띤 선교가 되고 만다. 가라타니 고진에게 비평이란 자신을 불명료함으로 내몰아 선교사의 입장을 피하는 일이었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가라타니 고진이 비평가로서 자신의 사상을 개척해나가던 60년대 후반은 서구 지성계에서 소련식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 시기이자 반체제 운동이 번져나가던 시기였다. 전공투의 역사를 지닌 일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았을까. 그는 다만 난무하는 여러 입장들을 곁눈으로 흘기며 자신의 속도로 걸어갔다. 당시 제기된 인간적 마르크스주의도 반체제 운동이 보여준 열정도 그에게는 ‘이념이 만들어낸 병’에 불과했다. 그 무렵의 학생들처럼 거리로 나섰으나 이내 회의를 느끼고는 이념을 걷어낸 자리를 끝까지 응시한다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어떠한 ‘주의자’도 아니었다. 젊은 시절 그에게 입장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입장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했다.



태도 전환

이후 가라타니 고진의 사상적 노정은 『탐구』에서 결실을 이룬다. 형이상학과 맞서 싸운다는 버거운 작업으로 삼십대에 심한 우울증을 앓기도 했지만, 그는 『탐구』를 통해 자신의 스스로 병을 치유했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 그는 잡지 『군조우』에 『탐구』를 연재했다. “내가 『탐구』를 연재하면서 계속 질문했던 것은 ‘사이’ 혹은 ‘외부’에서 살아가기 위한 조건과 근거였다 할 것이다.”(『탐구Ⅰ』후기) 가라타니 고진은 『탐구』에서 ‘타자의 문제’를 해명하여 역사에 대한 목적론을 부정하면서도 그 반편향으로 해체주의 마냥 어려운 지적 수사에도 빠지지 않는 ‘삶의 비평’을 일궈냈다. 90년대로 넘어가기 직전에 나온 이 책을 두고 일본의 사상지 『유레카』는 90년대 일본 최고의 책으로 선정했다.

그러나 정작 가라타니 고진은 90년대에 들어서자 『탐구Ⅲ』을 쓰겠다던 계획을 중단한다. 가라타니 고진이 90년대 이후 쓴 저작들을 보면 무언가 적극적인 발언을 하겠다는 충동이 가득 묻어난다. 하나의 선명한 입장을 갖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의 태도 전환이 응축되어 있는 저작이 바로 10년간 거듭해서 써낸 『트랜스크리틱』(2000)이다. 『트랜스크리틱』은 확신으로 씌어진 책이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광명을 보기 시작했다”고까지 표현하는데, 사상의 구석진 자리를 응시하려던 과거의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확실히 가라타니 고진은 1989년까지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경멸해 왔다. 그는 어떠한 입장에도 속하지 않고 비평하는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권이 몰락하자 자신이 과거 마르크스주의적 정당이나 국가를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들이 지속된다는 전제 아래 유효했음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사회주의는 역사의 ‘거대 서사’와 함께 종언했지만, 아울러 몇 가지 현상이 일어났다. 사회주의의 종언이 서구식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서사’가 등장했으며, 민족주의와 원리주의라는 ‘서사’가 부활했다. 아울러 모든 이념을 조소하는 냉소주의도 만연했다.

따라서 가라타니 고진은 사회주의가 현실적으로 끝났을지언정 사상적으로는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오히려 자본주의를 극복할 현실적인 기획에 몸을 담았다. 90년대의 상황이 학문적으로는 회의론적 상대주의가 범람하고 정치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의 우월성이 구가되었으나 그것들이 점차 파괴력을 잃어갔다는 사정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가라타니 고진이 시대의 변화와 아울러 새로운 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야 했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론적으로 구축된 실천의 방향

가라타니 고진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전망을 가다듬는다. 기억해야 할 대목은 그가 지극히 이론적인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폐절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그는 “이론적인 무지를 바탕으로 한 실천은 결코 변혁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자본주의는 정의감과 연민에 기반한 열정으로는 무너지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토대로 삼는 논리구조를 해명할 때 그것을 극복할 단서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가 ‘교환’에 내재된 근원적인 패러독스로 생겨났다고 이해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지양할 코뮤니즘 역시 종교적이거나 유토피아적인 상상이 아닌 새로운 교환원리를 통해 탄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선 자본주의를 스테이트(state, 국가)와 네이션(nation, 공동체)과 겹쳐 사고한다. 89년 이후 가라타니 고진은 ‘자본주의=네이션=스테이트’라는 자신의 정식을 설파하는 데에 경주했다. 그것들 각각은 등가교환, 상호부조, 강탈이라는 교환원리에 대응한다. 먼저 네이션 안에서는 ‘상호부조’가 이루어진다. 등가교환에 따르지 않고 공동의 감정에 기대 서로를 돕는다는 교환원리이다. 스테이트는 강탈을 자신의 교환원리로 삼는데, 그것이 교환인 까닭은 지속적으로 빼앗기 위해 수탈당하는 이들에게 보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가의 기원을 이룬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는 시장원리에 따라 화폐를 통한 등가교환을 취한다.

이렇듯 상이한 교환원리가 합쳐져 ‘자본주의=네이션=스테이트’라는 삼위일체를 이룬다. 자본주의가 강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만약 자본주의를 깨려고 하면 국가적인 관리가 뒤따르거나 네이션의 감정이 솟구친다. 그래서 우리는 공황에 직면하면 국가기구가 전면화되고 민족주의가 활성화되는 현실을 목도한다.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강력한 스테이트로 자본주의를 타도하려던 것이 레닌주의이고, 네이션으로 자본주의 극복을 꾀했던 것이 파시즘이다. 이들 모두는 ‘자본주의=네이션=스테이트’라는 사슬을 끊지 못했기에 역사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가라타니 고진은 세 가지 교환원리에 기반해 있는 ‘자본주의=네이션=스테이트’를 무너뜨리기 위해 새로운 교환원리를 제안한다. 그것이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이다.

또 한 가지 자본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이론적인 단서는 자본의 자본화 과정, 즉 화폐(M)-상품(C)-화폐'(M')에 있다. 여기에는 두 차례 개입의 여지가 있다. 첫째는 M-C의 계기, 즉 화폐가 상품으로 전환되는 순간이고, 두 번째는 C-M'의 계기, 즉 상품이 다시 잉여가치가 부가된 화폐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자본의 관점에서 이것은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을 구매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상품을 다시 파는 일이 된다. 무산대중에게 이것은 노동자가 되고 소비자가 되는 일로 나타난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 M-C-M'의 과정을 끊자고 제안한다. 즉 일하지도 상품을 사지도 말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이자 소비자인 대중이 일하지 않고도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안정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까닭에 가라타니 고진은 ‘생산자/소비자 협동조합의 연합’을 제시한다.



사상의 실패인가 새로운 사상인가

가라타니 고진은 이론적인 아이디어를 내놓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90년대 후반부터 그는 본격적인 실험에 나섰는데, 그것이 NAM(New Associationist Movement) 운동이다. NAM 운동은 그가 제안한 최초의 현실운동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NAM 조직을 만들고, 각 지역의 NAM 지부 사이에서 네트워크를 꾸려냈다. 간단히 말해 그가 제안한 NAM 운동은 새로운 교환원리인 어소시에이션에 기반하는 생산자/소비자의 협동조합 운동이었다. 어소시에이션은 개인들의 자유로운 계약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시장경제와 닮아 있지만 잉여가치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또한 공동체의 교환원리인 상호부조와 유사하지만 배타적이지도 구속적이지도 않다. 이러한 발상이 단지 낯설지만은 않다.

한국을 비롯해 세계 여러 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지역통화 운동은 원리적으로 어소시에이션이다. 그가 『가능한 코뮤니즘』이나 『NAM 원리』에서 제시한 LETS(Local Exchange Trading System) 운동 역시 자본이 되지 않는 화폐를 매개로 삼는 지역통화 운동의 일종이다. 그리고 NAM 운동은 노동자로서의 소비자와 소비자로서의 노동자의 연대를 목표로 삼는다. 화폐 경제에서 판매와 구매, 생산과 소비는 분리되어 있다. 이러한 분리는 노동자와 소비자의 분리, 나아가 노동운동과 소비자운동의 분리를 낳는다.

그러나 소비자운동은 실상 입장이 바뀐 노동운동이며, 노동운동 역시 소비자운동인 동안 자신의 국지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소비과정은 육아, 교육, 여가 등 생활세계 전영역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라타니 고진은 생산자/소비자의 협동조합을 통해 자본주의 바깥에서 생활의 지평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그렇다면 그가 기획한 현실운동은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가라타니 고진은 FA(Free Association)라는 또 하나의 조어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라타니 고진은 2002년 「FA선언」을 통해 NAM을 해산시킨다. 자신의 기대와 달리 NAM은 그의 유명세를 바탕으로 한 지식인들의 모임이 되었다. 가라타니 고진이 「FA선언」에서 밝힌 해산 이유 역시 NAM 운동을 지속할 운동체가 부재하다는 것이었다.

가라타니 고진이 현실에서 보여준 시도와 실패는 일본과 한국에서 그를 둘러싼 평가가 갈리는 지점이 되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그 평가는 예순이 넘은 가라타니 고진의 나이를 상기시키며 “가라타니 고진도 이제 다했다”는 것이 주종을 이룬다. 이것은 정녕 사상의 실패인가. 어떤 의미에서 그의 실패는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 않았을까. 그 사실을 알고도 그는 실패를 감행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현실적인 운동의 실패를 사상의 실패라고 단정짓는 것은 사회주의의 현실적인 몰락 이후 새로운 사회주의를 사상적으로 꾀했던 가라타니 고진에게는 공평치 못한 일이리라.

가라타니 고진은 이제껏 여러 사상적 입장에 가격을 매겨 왔다. 이제 자신의 사상적 궤적을 제작비이자 홍보비 삼아 하나의 입장을 상품으로 내놓았으니, 그것은 팔릴 것인가. 쉽지 않아 보인다. 나 역시 지금의 가라타니 고진에 대해 호의적이고 싶지 않다. 그의 시도는 자신이 서 있는 장소와의 긴장감을 놓쳤으며, 그의 실패는 그마저도 이론적 완결성을 위해 희생되었다. 그의 사상 언저리에서 느낄 수 있었던 그늘과 불쾌함을 더 이상은 찾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한 사상가를 진정 대면하려면 그 사상이 지닌 탄성을 제멋대로 줄여놓고 쉽사리 평가해서는 안 된다. 가라타니 고진은 지금도 움직이고 있다. 2007년 가라타니 고진은 재직 중이던 컬럼비아 대학과 긴키 대학에서 물러나 일본에서 지인들과 교류하며 또 한 번의 사상적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그는 이제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다. 하지만 자신의 명성에 사로잡히지도, 실패를 두려워하지도 않기에 그는 건강하다. 그리고 이 말도 보탤 수 있겠다. 기꺼이 실패하는 것. 그것이 사회주의자의 역사적 역할이다. 사회주의자는 하나의 입장에 관한 이름이지만 동시에 근본적으로 사고하는 자들이 공유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근본적인 사고는 현실에서 실패할지언정 불씨를 남긴다. 그 불씨는 타오를 것인가.(윤여일 /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07. 0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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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7-03-22 0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진의 책을 몇권 읽었는데, 어려우면서도 재밌고, 신선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식인의 사유가 이렇게 진행되는구나 보게되는 그런 재미와 참신함은 큰데
'사회주의적 기획'이라 할만한 설득력은 좀 떨어지지 않나, 싶은데.

기인 2007-03-22 0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로쟈 2007-03-22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 고진은 A급 비평가죠. 일본이 자랑해도 좋을 만한, 우리 주변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기인님/ 그람시로 바꾸신 건가요?^^

yoonta 2007-03-22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진의 자본주의=스테이트=네이션 이론이나 소비의 시각으로 보는 착취구조의 해명은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새롭게 보는 참신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더불어 이에 대한 전통적 노동가치론자들의 반박글들을 보고싶은데 생각보다는 별로 눈에 안 띄는것 같더라구요. NAM의 실패는 좀 예견되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원래 고진같은 이론가가 대중운동을 주도해 나가는데에는 애초부터 한계가 있었겠죠.
 

슬라보예 지젝이 지난 3월 5일부터 7일까지 3일간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네 차례 강연회를 가졌다. '러시아연구소' 등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이번 강연회에서 그가 다룬 네 가지 테마는 (1)톨레랑스 비판 (2)정신분석은 왜 여전히 중요한가? (3)글로벌 시대 주권국가의 전망(원탁회의) (4)할리우드의 가족신화 등이었다. 강연의 일부는 오디오 파일로 인터넷에 올라와 있기에 조금 들어봤는데, 러시아어로 동시통역돼 있는 데다가 잡음이 많아서 알아듣기 힘들었다. 관련사진과 현지 인터뷰 기사 하나만을 옮겨놓는다. 기사는 '노바야 폴리티카'(새로운 정치)란 저널에 게재된 것으로 직역하면 '정치적 올바름에는 뭔가 불공정한 것이 있다'란 제목이다(나중에 시간이 나면 번역해놓겠다).

07 марта 2007

Славой ЖИЖЕК

В политкорректности есть что-то неправильное

Москву посетил известный словенский интеллектуал Славой Жижек. Он известен как философ, публицист, эссеист, поклонник и толкователь психоанализа и марксизма, кумир левой публики в Европе. Его тексты намеренно провокативны – дабы побудить читателя думать, и обозначить проблему отчетливее и ярче. При содействии пиар-директора издательства "Европа" Инны Липатовой, Жижек согласился ответить на вопросы "НП".

– Вы – самый известный в Европе фрейдомарксист. Но многие мыслители, например, Карл Поппер, считают, что как марксизм, так и психоанализ – не наука. Они полагают, что эти феномены человеческой мысли даже ближе к религии. Что вы думаете по этому поводу?

– Все зависит от того, как люди определяют значение слова "наука". Психоанализ – не религия, но и не наука в строгом смысле слова. В нем нет объекта наблюдения, нет доказательств как в строгой научной дисциплине. Это нечто другое. Для меня отсутствие "объективности", то есть критика Поппера или Фейерабенда, не аргумент против психоанализа. Ведь тому как Поппер определяет науку ни одна из научных дисциплин не соответствует. Например, квантовая физика не будет являться наукой в строгом смысле подобного определения. Принято считать, что в нашем мире единственное "законное" знание есть наука. Но это лишь в узком смысле. Ведь есть иные очень важные сферы познания, например, мистическое прозрение, которое представляет собой другая сторону знания.

– Каково место марксизма в общественной мысли в начале XXI века?

– Конечно, сегодня мы наблюдаем великое поражение марксизма. И революция – как квинтэссенция марксизма, как его практика, – оставлена позади. Что для меня живо в марксистском наследии? Это проницательный взгляд во внутреннюю динамику капитализма. В капитализме остались (и всегда будут присутствовать) различные антагонизмы и контрадикции. В длительной перспективе капитализм не способен самостоятельно устранить собственные противоречия.

Вы – автор известной книги "13 тезисов о Ленине". Поэтому задам вам такой вопрос – если бы Ленин родился столетием позже, в 1970 году, с кем бы и бы где он был сейчас?

– Интересная особенность в Ленине – начало Первой мировой войны опрокинуло все его представления и ожидания, история пошла по другому пути, чем он полагал прежде. Я думаю, он был бы сегодня аналогично сбит с толку, растерян. Не считаю, что он бы стал социал-демократом. Но он и не примкнул бы к тем многочисленным революционным движениям, которые появились после Второй мировой войны. Ему бы пришлось сильно поломать голову, чтобы найти свое место.

– У нас в России многие опасаются прихода из Европы политической корректности. Что вы думаете об этих страхах и об этом феномене?

– Политическая корректность имеет две стороны. С одной, она противостоит привычному консервативному отношению ко многим вещам. И это весьма позитивно. В тоже время есть что-то фундаментально неправильное в политической корректности. Она ставит правильные задачи, но решает их в ложном направлении. В целом, политическая корректность – это не исключительно негативный феномен.

– Ваше отношение к распаду Югославии?

– Я не думаю, во-первых, что распад Югославии – это то, чего хотело большинство словенцев. Они стали думать о независимости только после провозглашения воинственной политики Милошевича. Большинство людей хотело существования Югославии в новой форме. Проблема заключалась в опасной динамике режима Милошевича в Сербии.

Сегодня ситуация сложная. Преобладающая часть жителей Словении, например, гордится тем, что у них есть своя страна, со своей столицей, что мы – часть единой Европы. Но сохраняется субкультура родства всех бывших югославов – сербов, хорватов, боснийцев и так далее. Нет подлинной ненависти наций друг к другу. Думаю, для большинства югославов распад Югославии – это трагедия. Но, повторюсь, после того, как власть сосредоточилась в руках Милошевича, все возможные формы сохранения югослав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а были мертвы.

– Как повлияло вступление Словении в Европейский союз на ее жизнь? Какие произошли изменения?

– Парадокс – с экономикой у нас не все так плохо. В бывшей Югославии Словения была основным экспортером продукции машиностроения. На нее приходилось 70 % экспорта и импорта в Европейский союз. Так что для нас вступление в Евросоюз в плане экономики не было шоком. А вот культурно мы стали провинциальней. Еще один парадокс – при коммунистах те же художники-авангардисты имели финансирование своих выставок, получали поддержку государства и так далее. Сегодня же преобладающая культура более консервативна. Да, сохраняется радикальная рок и панк музыка. Но в последние годы коммунизма она имели большее признание и одобрение чем сейчас. Сегодня у нас сильное влияние консервативной Католической церкви. Те, кто были маргиналами до 1991 года, нынче верховодят.

Недавно итальянские журналисты меня спросили: теперь, когда вы стали частью единой Европы, что вы можете ей дать? Я ответил – "ничего". Мы не некая маленькая нация, обладающая огромными духовными ценностями. Мы просто маленькая умеренная "нормальная" страна. Меня спросили также – почему же я, левак, поддерживаю присоединение Словении к Европейскому союзу? Я ответил, что мне не нравится, что во многих посткоммунистических странах наблюдается сильная консервативная реакция, например, не только у нас, но и в Польше. Я думаю, что в Единой Европе часть подобных издержек можно будет избежать. Вступление в Евросоюз позволит больше уважать права индивидуума. Ситуация сложилась бы хуже, если бы Словения оставалась вне Евросоюза. Ведь, если ты член Евросоюза, то должен соблюдать определенные нормы – уважать иные культуры, быть толерантным и так далее. Вот почему я за единую Европу.

Беседовал Максим АРТЕМЬЕВ

07. 0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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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2007-03-22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번역'을 하루 빨리 읽고 싶습니다.^^ 그런데 강연 전문이 영어로 번역되면 좋을 것 같은데 이건 전혀 불가능한 일인가요? 그리고 몇일전 '기인'님 서재에서 로쟈님 사진을 봤는데,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더라구요...^^

로쟈 2007-03-22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 빨리는 어렵고요(^^;) 아마도 방학 가까이가 돼야 시간이 날 듯합니다. 문제의 사진은 좀 이상하게 나왔는데 실물이 조금 더 낫습니다. 4월에 데리다에 대한 짧은 강연이 예정돼 있는데, 시간되면 한번 들르시길...

에바 2007-03-23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 장소만 알려주시면 꼭 가겠습니다. 그리고 문제의 사진에 관해서라면 '기대 이상'이라는 뜻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