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작가 순 뢰에스에 관한 기사들을 읽다가 떠올린 작가는 재작년에 러시아의 한 서점에서 사인행사를 가졌던 작가 '에를렌드 루'이다(지금도 사인회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김기덕의 <빈집>을 다룬 모스크바 통신문 서두에 관련내용을 적어둔 바 있는데, 모스크바 통신을 비공개로 돌렸기 때문에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때의 일기를 다시 불러내 창고에 넣어두도록 한다.  2004년 12월초의 일기 한 대목이며, 뒷부분은 <빈집>에 대한 감상('환대의 윤리학과 유령의 존재론')으로 이어졌었다. 아래 사진은 사인회 장소였던 '모스크바 서점'.

오후에 서점엘 다녀왔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집과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의 소설 등을 사는 게 목적이었는데, 결과적으로 허탕이었다. 먼저 ‘류뱐카’역(이전에 KGB본부가 있었던 곳이다)에 있는 '비블리오 글로부스' 서점에 가서는 셰익스피어의 <자에는 자로>를 펭귄북으로 샀는데, 그 작품이 들어 있는 책으로 보아둔 러시아어본이 없었다. <셰익스피어 희극>이라는 다른 작품집들에는 <자에는 자로>가 빠져 있다(*셰익스피어 작품집은 나중에 구했다). 할 수 없이 발품을 좀 팔아서 '모스크바서점'까지 걸어갔다.

‘루뱐카’에서 이전 역인 ‘아흐트느이랴드’까지는 걸어서 10분쯤 걸린다. 그 정도 걸어가면 정면에 크레믈린이 보이고, 오른편에 볼쇼이극장이 나타난다(사진. 생각해 보니까 아직 한번도 볼쇼이 구경을 하지 않았다. 발레를 꼭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에 어쩌면 갈 일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지하도를 건너가서 볼쇼이극장의 오른편 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서는 다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서 계속 걸어갔다. 이전에 한번 가본 길이었다. 그렇게 한 블록을 더 걸어가서 길을 건너면 모스크바예술극장(=므하트)이 있는 거리이다. 거리의 끝무렵에 있는 체홉 동상을 지나면 트베르스카야 대로가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으로 틀어서 5분쯤 걸어가면 <모스크바 서점>이 있다(아마 이런 루트는 이전에 한번 소개한 듯하다).  

예정에 없이 들른 서점인데 우연찮게도 한 작가의 팬사인회가 진행중이었다. 작가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에를렌드 루(Erlend Loe). 최신작을 포함해서, 1969년생인 이 작가의 작품들 대부분이 러시아어로 번역돼 있고, 그의 두번째 작품(<나이브하게. 슈퍼>. ‘Super’가 작품에서 무얼 뜻하는지 모르겠기에 그냥 그렇게 옮겨둔다) 같은 경우는 13개 국어로 번역되었다고 하니까 과히 지명도를 알 만하다(*에를렌 루의 <나이브? 슈퍼!>(문학동네, 2009)로 번역됐다!).

러시아의 아즈부카 출판사에서는 그의 작품들을 아예 문고본 클래식으로 출간하고 있는데(나도 오다가다 자주 보던 책이다), 나는 그 문고본들 중 두 권을 들고서(값이 다른 것들보다 싸서였는데, 권당 2,800원) 잠시 줄을 섰다가 ‘미래의 거장’에게서 사인을 받았다(지난번 뤽 베송 사인회만큼 붐비진 않아서 나는 5분 정도밖에 기다리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나라>라는 책은 내 이름으로(For me), 그리고 그의 데뷔작인 <여자들의 권력 속에서>는 ‘마님’의 이름으로(For my wife). *아래는 당시 사인회의 빌미가 되었던 책 <쿠르트 이야기>의 러시아어판 표지.



현대 노르웨이 작가의 작품들이 국내에 직접 소개되는 일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루의 소설들이 언제 우리말로 번역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유럽 다른 나라에 번역되는 걸로만 봐서는 그는 노르웨이의 가장 확실한 젊은 거장이다. 그리고 어쩌면 10-20년 후에 노벨상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아주 오랜만에 노르웨이 작가에게 주어진다면). 그러면, 내가 받은 사인본들이 꽤나 값나가는 ‘유산’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잠시 했지만, 그런 건 일단 백일몽으로 접어두고, 머리를 빡빡 밀어서 뚝심 있는 신부님이나 선량한 조폭처럼 생긴 이 작가에 대해 약간 소개하면, 그는 노르웨이에서 인기 있는 작가이자 비평가이며 이미 여러 차례 국내외 문학상을 수상했다.  

문학에 입문하기 전에 그는 많은 직업을 전전했는데(이건 작가로서 예외적인 건 아니다), 연극무대에 선 적도 있고, 단편영화들과 뮤직비디오 등도 찍었으며 정신병원에서도 일했고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고서는 1993년, 그러니까 24살에 <여자들의 권력 속에서>로 ‘혜성같이’ 노르웨이 문단에 등장한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에 대해 “너무나 재미있으며 아주 능수능란하다”, “아주 강력하며 동시에 시대를 앞질러 간다. 이런 데뷔작은 노르웨이 문단에 오랫동안 없었다. 루는 모든 걸 뒤집어엎었다!” 등등으로 평했다. 그리고 낸 두번째 작품이 전유럽적인 베스트셀러가 됨과 동시에 그는 노르웨이 젊은이들의 우상이 됐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나라>는 2001년작이며, 주인공은 저널리스트이고 핀란드에 관한 얘기라고(그러니까 제목이 가리키는 나라는 ‘핀란드’이다. 핀란드는 노키아의 나라이면서, 영화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나라이기도 하다). 그다지 두꺼운 책들은 아니지만(각각 224, 288쪽) 내가 언제쯤 이 책들을 읽게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나라>를 읽는 일은 그런 나라에서 사는 것보다는 빨리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그게 역설적이지만, ‘책읽기의 괴로움’이다).

하여간에, 그래서 루의 책을 두 권 샀다. 그런데, 정작 지난번에 봐둔 <셰익스피어 희극>은 여기서도 다 나가고 없었고(또 들어올 거라고는 하지만), 오스트롭스키의 책도 없었다. 나는 직원에게 분명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가 있느냐고 물었는데, (예상대로) 직원은 19세기 극작가 알렉산드르 오스트롭스키의 작품집을 보여주었다. 다시 한번 ‘니콜라이’라고 말하니까 그때서야 그의 책으론 나와 있는 것이 없으며 ‘고서 코너’에 한번 가보라고 했다(혹시나 싶어 아래층 고서 코너에 내려가봤지만, 역시 없었다). 이 역시 절반은 예상한 바이지만(지난번 고리키의 사례를 통해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소설가 오스트롭스키는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의 작가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를 말하며, 그의 작품은 아직 한국에서도 구할 수 있는 책이다(두 종의 번역서가 있었던가?). 하지만, 러시아에는 없다! 오스트롭스키만이 아니라 과거 수십 만부씩 찍어대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작가들은 종적을 찾아보기조차 힘들다. 파제예프니 푸르마노프니 하는 작가들 말이다. 그나마 숄로호프 정도는 노벨상 수상 작가여서인지 간간이 눈에 띈다. 하지만, 내가 들은 바로는 그마저도 중고등학교의 필독서 목록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고요한 돈강>이 빠진다면, 러시아 학생들이 가장 지겨워할 문학작품은 <전쟁과 평화>가 될 것이다(이건 가정이다). 그런 식으로 러시아의 ‘사회주의’는 서점에서도 서서히 지워져 가고 있다.

사실 나는 오스트롭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를 읽지 않았다(그는 보통 대학의 ‘20세기 러시아문학사’에서 다루어지지 않는다). 다만, 몇 년 전 1920-30년대 러시아 문학장이란 걸 재구성하고자 기획하면서 그에게 한 꼭지를 할애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기획이 엎어지면서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지난 가을에 작가의 몇 주년인가를 기념하는 기사들이 <문학신문>에 게재되면서 그를 다시금 기억하게 됐는데, 다음주 수업시간에 그 작품에서 발췌한 몇 페이지를 읽게 돼서 이 참에 책을 구하려고 한 것이다.

러시아문학, 혹은 더 나아가 문학에서의 ‘레닌주의’를 이야기하거나 이해하고자 할 때, 반드시 참조해야 하는 소설들이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 고리키의 <어머니>, 그리고 오스트롭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3인조이다. 이들은 각각 당대에 가장 많이 읽혔던 작품들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다섯 번이나 읽었고, 그의 정치 팜플렛에다 아예 <무엇을 할 것인가>란 제목을 붙였다(참고로 체르니셰프스키는 투르게네프의 소설들을 좋아했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는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문학적 대응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머니>와 <강철>의 주인공 이름은 둘 다 ‘파벨’이다(물론 오스트롭스키가 우연히 갖다 붙인 이름은 아닐 것이다).

지난 80년대에 한국에서는 이들 작품들이 ‘과대’평가됐었다. 물론 거기엔 시대적 필연성이란 게 걸려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요즘엔 지나치게 ‘과소’평가되고 있다. 그건 작가들의 조국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도 시대적 필연성인가? 과거에 나는 이 작품들의 과대평가에 동의하지 않았었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과소평가에 동의하는 것도 않는다. 역사 속에서 작가/작품엔 제 몫의 역할과 운명이 주어진다. 아니, 작가/작품은 그런 걸 짊어진다. 문제는 그런 역할/운명을 제대로 평가하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하는 것이지 열광하거나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조금 다른 예로서, 박찬욱의 <올드보이>에 대한 열광을 들 수 있다. <복수는 나의 것>을 냉대했던 관객들이 갑작스레 ‘마니아’들로 둔갑한 것을 나는 신뢰할 수 없다. (러시아)미래파 선언문에서 인용하자면,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걷어붙이고 싶다).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대에의 편승이 아니라 ‘반시대적 성찰’이다.

나는 사려던 책들 대신에 작년에 나온 니콜라이 1세(1825-1855)의 전기와 러시아시 각운사전을 사들고는 예의 피자전문점 스바로에 가서 이태리 피자와 맥주, 그리고 스파게티를 먹었다. 헛걸음한 걸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끼니를 때우고 되돌아가던 길에 플라톤의 <대화>나 사들고 갈까 하고 다시 서점에 들렀지만, 책은 없었다. 가장 두껍고 가장 저렴했던 플라톤 선집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나중에 구했다). 이래저래 되는 일이 없는 날이다. 루의 사인본마저 받지 못했더라면(15분 정도만 늦게 갔어도 사인회는 끝났을 터였다), 오늘은 말 그대로 공친 날이 될 뻔했다.  

서점을 나서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이 계산대에 홍보용으로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제목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는데, <해변의 카프카>였다(*아래는 러시아어판 표지).



아마도 하루키의 모든 책이 러시아어로 번역되는 듯한데, 그런 의미에서라면 하루키는 (스시를 제외한다면) 일본 최고의 문화상품이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거기에 대응하는 한국 최고의 문화상품은 김기덕이다. 나는 들어가보지 않았지만, 어제 <빈집>을 같이 본 후배가 전해준 바에 따르면 러시아 인터넷의 김기덕 사이트는 열광적인 숭배자들을 거느리고 있다고(그들은 전문가 수준의 비평들을 계속 올린다고 한다). 아래는 <빈집>의 러시아판 DVD 타이틀.

사실 후배가 엊저녁 8시에 상영하는 <빈집>을 보기로 결심한 것도 그런 열렬한 반응에 고무되어서였는데(도대체 어떤 영화이길래?), 나는 이미 지난주에 <올드보이>보다 <빈집>을 보려고 했으므로 기꺼이 한번 더 동행하게 되었다(영화관에서 보는 김기덕은 <파란대문>에 이어서 두번째였다). 

영화관은 지난 주와 마찬가지로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예술극장'이었고, 이번엔 <올드보이> 때와는 달리 대극장이 아닌 소극장이었다. 50석 규모였는데, 새로 만들어놓은 듯싶었다. 모든 시설이 새것이었기 때문에. 화면의 크기가 (당연히) 작다는 것 말고는 만족스러웠는데, 김기덕의 영화는 대형화면을 요구하는 스펙터클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굳이 흠이 될 것도 없었다. 8시가 되자 프랑스와 오종의 신작 예고편이 나오고 나서는 바로 “Happinet Pictures”란 로고가 떴다. 그리고 시작된 영화의 첫 장면은 골프 스윙 소리와 망이 출렁이는 모습. 영화는 더빙이 아니라 자막 처리돼 있는데, 사실 알다시피 <빈집>은 대사란 것 자체가 많지 않은 영화이다. 두 주인공에 국한하자면, 거의 ‘무성영화’이니까...

04. 12. 05./ 06.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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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 2006-12-21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는 아주 특이한 청춘소설이라고 생각해요.

로쟈 2006-12-21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이한' 관점이시네요.^^

Sati 2009-08-09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스트로프스키를 찾을 수가 없으셨다는 말씀 들으니, 91년도에 '우데엔' 1층 화장실에 들렸다가, 창가쪽 한 구석으로 몇차 공산당 전당대회 연설집 이런 류의 브로셔들이 산처럼 쌓여서 회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것을 보고... 기분이 많이 이상했던 기억이 나요.
 

아침신문을 도배하고 있는 문학관련 기사는 노르웨이 작가 순 뢰에스의 소설 <아침으로 꽃다발 먹기>(문학동네, 2006) 출간과 이에 맞춰 한국에 온 작가 순 뢰에스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만 소개하면 별 특이사항이 없는 듯 보이지만, 작가는 '지선'이란 한국이름을 가진 입양아출신이다. 노르웨이의 저명한 문학상 수상작가가 되어 '금의환향'한(그녀는 자신의 '모국'을 남편과 함께 방문했다) 또다른 '성공담'이 관련기사들의 주조이다.

작가는 <올드보이>나 <빈집> 같은 한국영화들도 재미있게 보았다고 하는데, 박찬욱 감독의 신작을 비틀어서 말하자면 '입양아지만 괜찮아'쯤 될까? 실제로 이번에 출간된 소설은 정신질환의 문턱을 넘나들면서 자기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는 17세 소녀의 불안한 내면과 독백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 작가 자신이 정신병원에 간호사로 근무한 경험에 바탕을 둔 작품이기도 하다고. 이래저래 흥미를 끄는 작품이다(정군님은 벌써 리뷰를 쓰셨군!).

경향신문(06. 12. 19) 입양아출신 노르웨이 소설가 고국품에 ‘책’을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쌍둥이 오빠와 함께 노르웨이로 입양됐던 아기가 30년 만에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신진작가가 돼 고국땅을 밟았다. 18일 오후 6시 서울 성북동의 주한 노르웨이대사관에서는 한국계 작가 쉰네 순 뢰에스(31·한국명 지선)를 위한 특별한 만찬이 열렸다. 2002년 노르웨이 최고 문학상인 브라게상을 받은 장편소설 ‘아침으로 꽃다발 먹기’ 한국판 출간(손화수 번역·문학동네 펴냄)에 맞춰 한국에 온 작가를 환영하고 격려하는 자리였다.

아직 앳된 얼굴의 작가 뢰에스는 “작가로서 한국을 방문하고 많은 환영을 받게 돼 기쁘다”면서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구사하는 언어는 강하고 색다른 뉘앙스를 갖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런 소재의 작품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 4년간 정신병동 간호사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2002년 발표한 이 소설은 그해 노르웨이 도서상재단이 수여하는 브라게문학상 청소년 부문상을 수상했다. 1999년 발표한 ‘요코는 홀로’에 이어 두번째 작품이다.

뢰에스는 “책이 나왔던 해, 친부모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 온 적이 있다”면서 “빨리 생각하고 빨리 말하고 빨리 걷는 편이어서 서울의 빠른 속도가 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줬다”고 밝혔다. 또 “친부모를 만나는 게 긴장되고 즐거웠으나 그들은 죄의식 때문인지 나와 느낌이 많이 달라 당황스러웠다”면서 “이번에는 삼촌과 할머니도 만났다”고 말했다.

뢰에스는 쌍둥이 오빠 시그비엔과 함께 1976년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노르웨이 외스트폴의 의사부부 집에 입양됐다. 그들을 낳은 스무살의 산모는 몸져누웠고 시그비엔은 심장이 좋지 않아 인큐베이터에 있는 상태였다. 집 월세보증금마저 병원비로 나간 데다 아들의 병이 국내에서는 고치기 어렵다는 판정을 받자 친아버지는 아내에게 알리지 않고 두 아이를 입양시켰다. 양부모의 영향으로 오빠 시그비엔은 의사가 됐으며 뢰에스는 간호학을 전공했다.

이들이 친부모와 연락이 닿은 것은 2001년. 일본에서 일했던 오빠 시그비엔이 귀국길에 한국에 들렀다가 홀트아동복지회에 연락하면서 친부모와 상봉했다. 다음해 뢰에스도 한국에 왔다. 친아버지는 뢰에스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계속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울었다고 한다. 그는 “성장하면서 남들과 다른 얼굴 때문에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컸지만 또래의 노르웨이 청소년보다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뢰에스의 출세작 ‘아침으로 꽃다발 먹기’는 정신질환의 문턱을 넘나들다 정상적인 삶을 되찾은 17세 소녀 미아가 경험한 세 계절 동안의 변화를 의식의 흐름에 따라 그린 작품이다. 쇠락의 길로 빠져드는 가을, 주인공의 절망적 상황을 생생히 묘사한 겨울에 이어 마지막 봄 부분에서는 서서히 생의 의지를 찾아가는 미아의 심리상태를 표현했다. ‘주인공이 지닌 세상과 가족, 친구를 향한 비뚤어진 시각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브라게상 심사위원들은 격찬했다.



이번 국내 출간은 한국에 사는 한살 아래 여동생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언니처럼 글쓰기에 관심이 많은 여동생은 브라게상 수상소식을 들은 뒤 출판사에 연락해 작품검토를 부탁했다. 오는 22일까지 한국에 머무는 뢰에스는 21일 오후 3시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에서 자신의 삶과 문학에 대해 강연할 예정이다.(한윤정 기자)

06. 12. 19.

P.S. 순 뢰에스 부부를 그제 한 문학상 시상식장에서 볼 수 있었다. 더불어, 사진에 비해서 굉장히 작은 얼굴과 체구의 작가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남편은 사진 그대로였지만...

06.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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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12-19 10:19   좋아요 0 | URL
저도 아침에 이 기사 봤어요.1면에 배치되어 있더군요.^^
도저히 기를 능력이 안돼서 아이를 머나먼 이국으로 입양시켜야 하는 부모의 마음은 어땟을까 싶어요.

로쟈 2006-12-19 13:53   좋아요 0 | URL
기본적으론 국내 입양이 안되기 때문이겠죠. 입양아 수출 1위국이라니까...

sommer 2006-12-19 16:56   좋아요 0 | URL
번역되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아미 탄생만으로는 모자라고 번역의 우회를 거쳐야만 고국에 기입된다는 것...아직도 귀환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이름 없는 것들'을 생각하게 되네요. 이 나라에선 실재의 귀환과 동시에 상징이 잠시 그 가능성을 엿본다는 생각까지 함께...

로쟈 2006-12-19 21:52   좋아요 0 | URL
"번역의 우회를 거쳐야만 고국에 기입된다는 것"을 일반화시키고픈 유혹은 느끼게 되네요. 그것은 인류학적이면서 동시에 철학적인 어떤 절차...
 

오늘 아침신문들을 들춰본 이라면 온갖 신문들이 최근 <로마인 이야기>(전15권)를 완간한 일본의 저술가 시오노 나나미 인터뷰로 도배돼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한국일보와 경향신문을 전철에서 읽었는데, 두 신문 모두 거의 전면이 그녀에게 할애돼 있다. 인터넷에서 다른 신문들을 검색해봐도 사정은 비슷한다. 과연, 어느 한국작가의 책이 이런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아주 드문 경우 아닌가?). <로마인 이야기>에 대한 평가는 일반 대중과 역사가들의 평이 사뭇 갈리지만 15년간 매년 한 권씩 출간하기로 한 약속을 지켜낸 저자의 의지와 노고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할 만하다. 비록 나로선 <로마인 이야기>를 집어들 엄두는 내지 못하고 고작 두어 권의 에세이를 읽는 데 그쳤지만 말이다. 내년/내달초에 마지막 15권이 번역돼 나올 거라고 하는데, 작가와 역자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고 잠시 '로마 제국'에 대해서 음미해본다.

경향신문(06. 12. 18) 시오노 나나미 “천년로마 비결은 공존의 지혜”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69)는 1992년 ‘로마인 이야기’의 제1권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를 출간하면서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이 책을 2006년까지 해마다 한 권씩 발표해 전 15권으로 완결짓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작가 스스로 퇴로를 차단한 모험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제2권 ‘한니발 전쟁’을, 94년엔 제3권 ‘승자의 혼미’를 발표하는 등 매년 어김없이 약속을 지켰다. 1년의 절반은 자료를 읽고, 나머지 절반은 집필에 매달려온 산고(産苦)의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지금, 그는 제15권 ‘로마세계의 종언’을 내놓으면서 ‘로마 천년사’를 담은 방대한 저작의 마침표를 찍었다.



“민족, 생각, 습관, 종교 등이 다른 사람들이 공생하는 게 가능했던 세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쓰고자 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의 존재를 위협하고 인정하지 않는 비관용의 세계입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다른 생각을 갖고도 함께 살았다는 것을 생각하고 책을 읽어줬으면 합니다.”

23일 도쿄 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만난 시오노는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15년분을 한꺼번에 인터뷰하느라 책을 끝낸 감회를 생각할 여유가 없다”면서도 “확실한 사실은 1년에 한 권씩 책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여름 휴가를 갈 수 있다는 것”이라며 웃었다. 고희(古稀)를 눈 앞에 둔 노작가는 국가경영, 리더십, 한·일 관계 등 쏟아지는 질문에 대해 차분하면서도 진지하게 답변을 이어갔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지는 로마인들이 왜 그토록 번영할 수 있었을까.” ‘로마인 이야기’의 집필은 지금은 너무도 유명해진 이같은 물음을 그 스스로 풀어가는 과정이었다. 시오노는 로마가 그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를 묻자 “로마인이 모두 해먹으려고 하지 않고 다른 민족이 더 뛰어나면 그 사람에게 충분히 맡겼다는 점”이라고 간명하게 답했다. 그는 국가의 흥망성쇠와 관련, “가장 나쁜 건 힘과 정신력이 있는데도 눈 앞의 이익을 보고 문제의 본질을 놓치는 경우”라고 지적했다. “작은 문제에 너무 집착하면 큰 걸 놓치게 된다”면서 “일본인에겐 내셔널리즘이 이런 경우”라고도 했다. 그는 또 “조직의 성원 모두를 위해 자기 배를 채우지 않는 것”을 리더의 첫째 요건으로 들었다.

“인터뷰할 때마다 받는 질문”이라는 한·일 관계에 대해선 열띤 답변이 길게 이어졌다. 그는 “역사적인 사실은 공유할 수 있지만 그에 대한 인식은 공유하기 힘들다”면서 “한국에선 독도, 일본에선 다케시마라 부르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하나의 역사를 만들기보다 한국과 일본이 각각 책을 써서 상대방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적 열광과 내셔널리즘을 배제하고 냉정하게 타협점을 찾으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또 ‘팍스 로마나’(로마에 의한 평화)와 비교되는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에 의한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미국은 그럴 각오도, 의욕도 없다”는 것이다. 이어 ‘팍스 차이니즈’를 거론하면서 “팍스와 패권(헤게모니)은 다른데 중국이 패권을 잡고 나서 국제질서를 이루려는 의욕이 있을까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라고 덧붙였다.

시오노는 “역사는 위대한 교훈이자 탁월한 오락”이라고 말해왔다. ‘로마인 이야기’는 재미와 교훈을 동시에 충족시켜주면서 광범위한 독자층을 형성했다. 그는 “역사학자들은 역사가 재미있다고 말하면 자신의 권위가 떨어지니까 그같은 자세 자체를 거부한다”고 꼬집었다. “역사에 어둡다는 것은 인간에 어둡다는 뜻입니다. 역사란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일을 한 것이니까 잘 읽으면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굉장히 재미있어요.”

마지막권인 제15권은 로마 제국이 어떻게 멸망했는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지난 15일 일본 신초사(新潮社) 출판사에서 출간됐으며 국내에서는 한길사에서 내년 1~2월에 번역돼 나올 예정이다. 시오노는 “국가로서의 종말이 아니라 로마 문명의 종말을 쓰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로마 세계의 종말은 지중해의 수평선 위에 이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할 때, 다신교의 세계가 일신교의 세계가 되는 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서로마가 멸망한 476년이 아니라 7세기를 마지막으로 잡은 이유입니다.”

향후 집필 계획이 “아직 없다”고 밝힌 시오노는 “이제 나이가 들어서 얌전한 남자를 그리고 싶다”며 미소지었다.(도쿄|김진우기자) 

◇“철저한 고증…빈틈은 상상으로 메워”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는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고교 시절부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등 그리스·로마 문화에 심취했다. 가쿠슈인(學習院)대를 선택한 것도 그곳에 그리스·로마사를 가르치는 교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1963년 대학을 졸업한 뒤 이탈리아로 건너간 그는 독학으로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의 역사를 탐구해갔다. 처녀작 ‘르네상스의 여인들’부터 시작해 ‘체사레 보르자, 또는 우아한 냉혹’(마이니치 출판문화상) ‘신의 대리인’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여류문학상) ‘바다의 도시 이야기’(산토리 학예상) ‘콘스탄티노플 함락’ 등 전쟁 3부작과 ‘주홍색의 베네치아’ 등 살인 3부작 등을 뽑아내며 굵직한 문학상을 연거푸 수상했다.

‘로마인 이야기’는 그가 필생의 작업으로 집필한 책으로 준비에만 20년, 시리즈 완간에만 15년이 걸렸다. 200자 원고지 2만1천장에 달한다. 책은 기원전 753년 전설의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때부터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천년이 넘는 역사를, 제1~5권의 ‘융성기’, 6~10권 ‘안정기’, 11~15권 ‘쇠퇴와 멸망’ 세 단계로 나눠 담아냈다. 국내에선 1995년 제1권과 2권이 동시에 첫 선을 보이면서 출판계에 인문·교양서 열풍을 일으켰다. 각 권당 10만부 이상이 팔렸고, 지금까지 2백만부 넘게 팔렸다(*한길사의 '곳간'이라 할 만한 책이다. 비록 역사의 '고전'이자 '그레이트북스'로 남을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그레이트북스'를 먹여살린 책이다!).

시오노는 명쾌한 논리와 도전적인 역사 해석으로 독자들을 매혹시켜왔다. “철저한 고증과 사료에 바탕을 두었으되 역사적 기술로부터 벗어나 있고, 사료가 채워주지 못한 부분에서는 상상력을 발휘했으되 픽션에 빠지지도 않았다”는 평가다. 그러나 이처럼 사료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상상’에 의존하는 그의 역사서술을 비판하는 학자도 적지 않다. 또 힘(권력)과 제국주의를 깔고 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인터뷰에서 저자가 '팍스 아메리카나'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부정하는 점에서도 알 수 있지만, 로마(제국)과 미국(제국주의)를 구별하는 게 저자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한국일보(06. 12. 18) 김석희 "'로마인 이야기'같은 책, 왜 우리는 아직 없을까"

“번역이 힘들면 그건 재미없는 책이에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전권을 번역해 온 김석희(54ㆍ소설가)씨는 “그와 함께 한 세월은 언제나 신났고, 그래서 행복했다”고 말했다.

<로마인…>의 첫 독자였던 그에게, 저자와 책의 매력을 물었다. “그의 문체는 남성적인 활달함이 있어요. 로마의 도로처럼 거침없이 뻗어가는 힘과 표현의 묘(妙)가 독특한 흡입력을 발휘하지요. 알다시피 <로마사…>는 기본적으로 역사물이지만, ‘왜?’를 묻는 학문이 아니라 ‘어떻게?’를 묻고 답하는 책이잖아요. 상상력과 재해석이 필요하지요.”

‘사실(史實)+알파’의 그 ‘알파’ 속에 나나미적 글쓰기의 특징이 숨어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역사의 재해석이란 역사와 현실의 끊임없는 대화를 주선하는 과정이거든요. 로마인을 이야기하면서 시사적 관심을 유발하고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죠. 가령 이 책 1권 초판이 일본에서 출간된 1992년은 일본 경제 버블 10년이 구체화하던 시기였어요. 제대로 된 리더에 목마른 시민들 앞에 로마의 제왕들을 내세운 것이지요. <로마인…>의 흥망사 중심에는 리더십의 문제, 지도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잖아요.”

리더십은 우리 독자들이 느껴온 갈증이기도 할 것이다. 거기에 ‘세계화’라는 또 하나의 시대적 담론이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세계화’ 구호에 <로마인…>이 호응한 측면이 있어요. 세계 경영, 포용력, 현지화 등 로마의 제국화 과정이 세계화 담론의 주요 단서들과 맞물렸던 거지요. 실제로 이 책 1~3권 번역본이 나왔던 초창기에는 일반 독자들보다는 재계 사람들과 공무원들이 많이 봤어요.”

지금 그는 “진행 중이던 작업들을 모두 매듭짓고, 마지막 권이 올 때까지 손목을 풀고 있다”고 했다. “하루 평균 원고지 100매 남짓씩 해서 18일 정도면 번역 원고를 넘길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고 나면 정말 시원섭섭할 것 같다”고 했다. <로마인…>이 초대형 스테디셀러가 됐지만 그가 번 돈은 많지 않다. 인세 계약이 아니라 매절 계약(원고지 매수당 번역료를 받는 계약)을 했기 때문이다. 인세 계약을 하시지 그랬냐고 농담처럼 묻자 “그런 거 따지면 인생살이가 고달파진다”고, “그래도 출판사에서 섭섭치 않게 챙겨주더라”며 웃었다.

<로마인…>이 잘 나가자 일각에서는 전공 학자도, 학자도 아닌 아마추어가 쓴 책이라고 폄하하기도 했고, 일본 우익의 대동아공영권 부활 음모가 숨겨진 제국사라는 비난도 있었다. 그런 지적들에 대해 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전문 학자의 역사 서술에 다른 차원이 있겠지만, 왜 우리에게는 <로마인…>과 같은 책이 없는지 반성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저자의 각광 뒤에 이 탁월하고 성실한 번역가가 있었다는 사실, 그의 문장이 있어 <로마인…>의 현지화ㆍ한국화가 가능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는 <로마인…>과 함께 한 세월이 행복했다고 말했지만, 저자 역시 그 같은 번역가를 만난 행운을 누렸다. 그리고 독자들도 이 두 비범한 저자와 역자를 만나 행복했다.(최윤필 기자)

06. 12. 18.

 

 

 

 

P.S.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 대중적인 '역사 이야기'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지만, 내가 읽은 건 주경철 교수의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문학과지성사, 1999) 정도이다. 전15권이 완간된 만큼 총체적인 재평가와 함께 "왜 우리에게는 <로마인 이야기>와 같은 책이 없는지"에 대한 답변도 함께 제시되었으면 좋겠다. 눈에 띄는 로마사 관련서들 가운데, 국내 저자의 책은 (아동용을 제외하면) 한두 권밖에 눈에 띄지 않는다. 일차적인 건 역사에 대한 '애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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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6-12-18 12:18   좋아요 0 | URL
시오노 나나미의 뚝심과 뛰어난 번역가 김석희의 재능이 만나 한국어판 [로마인 이야기]가 탄생한 것은 "행복"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겠지만, 역시 과대평가된 면이 많지 않나 싶습니다. '로마인 이야기' 현상은 저 정도 수준의 대중 교양서를 펴내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반작용이기도 하겠지만요. 일본 책들을 훑어보면서 놀라는 건, 아무리 대중지향적인 책을 쓰더라도 철저한 자료조사와 꼼꼼한 논리가 뒷받침된다는 겁니다(물론 그만큼 쓰레기 같은 책도 엄청나게 많지만). 그게 일본 사회에 있어 일종의 '진통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게 좀 마음에 걸리지만요.

Mephistopheles 2006-12-18 12:2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메피스토입니다.
전 한권도 읽은적이 없다보니 뭐라 평을 할수는 없지만..
작가의 노력만큼은 대단하다고 보고 싶습니다..^^

비로그인 2006-12-18 15:31   좋아요 0 | URL
저는 로마인 이야기를 '긍정'합니다. 한국의 모든 정치적 사회적 제도는 서구에서 비롯된 것이지요.(조선왕조로 부터 물려 받은 것이라고는 세글자의 성명표기와 제사 정도랄까요?ㅋ)하지만 한국사람들은 동양성에 대한 과잉집착이라고 할까요. 착각이라고 할까요.뭐 그런 것에 빠져있지요. 우리나라의 현 정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양 정체의 원형(prototype)으로서 로마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인에게 최고의 영예인 시민관은 동료시민을 '구한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였지요.
시민적 연대를 로마공화국이 얼마나 중시 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면에서 최근 FTA시위에 대한 동료시민들의 '짜증'은 이 사회의 시민적 연대가 얼마나 파괴되어(어쩌면 없는 것일수도) 있는 지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런 것은 '무지'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지요. 그런면에서 로마인이야기는 더 많이 읽힐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로쟈 2006-12-18 17:19   좋아요 0 | URL
제가 긍정하는 건 일종의 '유인효과'입니다.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로마사를 전공하고 싶어할 청소년들도 있거든요. 그런 건 다른 '진지한' 역사서들이 해주지 못한 일이지요...

딸기 2006-12-19 11:13   좋아요 0 | URL
대중적이면서 꼼꼼한 역사책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로마인이야기가 '틈새'(굉장히 컸던 틈새)를 제대로 파고들었다는 것은 분명해요. 참 재미있었거든요. 그런데 시오노 나나미의 초인 지향 세계관은 좀... '저자의 노고'를 치하해주는 것도 좋지만, '저자가 쓴 책의 내용과 역사관'에 대한 검증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니었나 싶어요.

비로그인 2006-12-19 12:14   좋아요 0 | URL
이분의 책, '남자 이야기'를 오래 전에 읽었습니다.
100m육상선수 칼 루이스에대한 예찬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분도 천상 '여인'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쓰신, 로마인 이야기는 다소 자의적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더군요..


로쟈 2006-12-19 12:38   좋아요 0 | URL
초인지향적이고, 자의적이군요.^^ 일반론이긴 하나, 저는 그런 '고집'이나 '편견' 없이 어떻게 15년 동안 책을 쓸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저자가 내놓고 말하듯이, 그 또한 마키아벨리스트 아닐까요?).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야기였다면 그렇게 '재미'있었을까 의문이구요. 전문 역사학자들이 왜 이런 책을 쓸 수 없는지에 대한 해답을 나름대로 찾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정사(正史)'를 써야 할 테니까요...
 

토요일밤에 올겨울 들어 눈다운 눈이 처음 내렸고, 덕분에 학회 뒷풀이를 마치고 늦은 귀가길을 재촉하는 마음도 그럴 듯했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도 잠시 가벼운 폭설에 대한 감상을 몇 자 적으려고 컴퓨터를 켰건만 악성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은 탓인지 인터넷이 먹통이었다. 진종일 복구하느라 애를 썼지만(물론 애를 쓴 건 집사람이고 나는 욕만 먹었다) 성과는 없어서 결국 당분간은 노트북에 연결해서 쓰기로 했다(해서, 이 페이퍼는 노트북으로 작성하는 첫 페이퍼이다).

 

 

 

 

기분도 무거운 김에 첫주제를 '전체주의'로 잡았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탄생 100주년을 맞은 해의 끝물은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1,2>(한길사, 2006)가 장식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 테마와 관련해서는 이전에 쓰거나 옮겨온 '한나 아렌트 르네상스' '두 개의 전체주의'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테러리즘' 등의 페이퍼들을 참조할 수 있다. 이번에 '전체주의'를 검색하다가 박노자 교수가 몇 년전에 쓴 칼럼을 발견했는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함께 아렌트의 명성을 각인시켜준 이 노작을 읽기 전에 미리 읽어봄 직하다.

한겨레21(03. 11. 06) 누가 진짜 '전체주의'인가

독일인 의사로 북한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하다 북한 체제 비판으로 추방당한 뒤 최근 남한과 미국을 무대로 “북한 체제 전복” “북한 주민 해방”을 부르짖으며 이색적인 행동으로 자주 스캔들을 일으키는 폴러첸(Norbert Vollertsen)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인터뷰를 보면 그는 북한 체제를 ‘나치 정권’과 비교하고 그 체제에 ‘전체주의’라는 딱지를 붙이곤 한다. 북한에 대한 어떠한 포용책도 히틀러에 대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의 영국·프랑스 등의 일관성 없는 유화정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옛 동독의 멸망이 대량 피난으로 시작되었듯, 북한 체제 붕괴도 중국으로의 대량 피난으로 시작돼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폴러첸은 나치 정권·옛 동독·북한은 동질적인 ‘전체주의’이며, 자신은 ‘전체주의에 맞서는 자유의 투사’로 여기는 듯하다.

 

 

 

 

 

 

 

 

 

북한을 포함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을 송두리째 나치와 동일하게 보는 것이 폴러첸뿐인가 냉전의 발발(1946~47년)부터 오늘날까지 소련식의 체제를 ‘나치식 전체주의’로 규정하고 ‘미국식 자유주의 사회’와 대조하는 것이 구미 보수언론들의 기본 논조다. 사회과학을 독자적으로 학습한 적이 없는 폴러첸이나 ‘악의 축’ 망발로 누명을 쓴 부시 현 대통령도 이 논조를 충실히 따를 뿐이다.

보수 신문이나 방송만으로 ‘상식’을 배우고 독서할 줄 모르는 부시와 같은 ‘지도층’으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최근의 사회과학 저서를 한번이라도 본다면-소수의 극우·우파 편향적 학자들을 제외한- 대다수 전문 학자들이 현실 사회주의의 억압성과 경직성을 인정하면서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과 나치를 동일시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전체주의’(totalitarianism)라는 용어의 사용 자체를 자제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세계의 어떤 독재의 잔혹성을 강조할 때-특히 나치 독일의 파트너이던 일제 말기 총동원 사회 경험을 바탕으로 한 동아시아 개발 독재(1980년대 말 이전 남한·대만 정권)를 이야기할 때- ‘파시스트적’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그리고 ‘매우 억압적인 사회’라는 의미에서 ‘전체주의적’이라는 수식어도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사회학적 범주로서 전체주의라는 용어는 요즘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보수언론들이 반세기 넘게 이용해온 ‘전체주의’ ‘나치와 소련 사회주의 동질론’등의 담론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학술적인 입장에서 어떤 결함을 내포하고 있는지가 밝혀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기 때문이다.

냉전 초기인 1940년대 말~50년대 초, 당시 미국 사회과학 학계에선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이 나타났다. 미국 학계에 새로운 역동성을 가져온 독일계의 자유주의적 망명 지식인들은 그들의 고향 독일이 왜 파시즘과 전쟁을 맞이하는가에 대해 뼈저리게 고민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 소련과 중국이라는 생소한 ‘미지의 세계’들이 미국의 주적이 됐기에 관(官) 주도의 ‘지역 연구’가 붐을 이루었다. 안보기관과 각종 재벌기금의 전례 없는 지원과 미 중앙정보국(CIA)과 국무성의 끈질긴 ‘지도’ 아래 1946년 콜롬비아대학의 러시아연구소, 1947년 하버드 대학의 러시아연구센터 등이 각각 설립됐다.

학생 시절부터 안보기관의 연구비를 받고 소련이나 중국을 인류의 숙적으로 알고 있던 ‘지역 연구기관’ 출신의 관 학자들에게는 공산주의의 본질적 악질성을 증명하는 이론이 필요했는데, ‘최고의 자유 지성’으로 인정받던 독일 계통의 망명 학자들로 인해 그 이론을 제공할 수 있었다. 비극적인 것은 이 과정에서 자유주의적 지성인들의 고뇌가 생각지 않은 방향으로 이용당한 것이다.

공산주의의 악마화에 ‘황금의 기회’를 준 것은 독일계 유대인 여성 철학도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75)가 발표한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이었다. 그 후 ‘전체주의’라는 용어는 이론적 권위를 얻을 수 있었다. 정통 자유주의자 아렌트는, 자신을 망명객으로 만든 독일 파시즘을 ‘전체주의’의 모범으로 파악했다. 소련을 ‘전체주의 국가’의 명단에 넣었던 그녀는 1968년 <전체주의의 기원>을 재판(再版)할 때 “소련은 더 이상 전체주의 국가로 불리면 안 된다”고 명시하는 등 애써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그는 전체주의 사회의 특징으로 핵화(核化)돼 무기력해져 천편일률적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기 꺾인 개인’ 등을 삼았는데, 이는 1950년대 초 소련 사회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웃 공동체가 아직 해체되지 않고 향촌 사회에 대한 중앙의 통제가 완벽하지 않았던 당시의 소련과, 전통 공동체의 관계가 그대로 잔존하는 오늘의 북한에 ‘개인의 완전한 고립’과 같은 테제를 적용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녀에게 이 책은 주로 독일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반성의 의미를 가졌음에도 미국의 수많은 관학자들은 이 <전체주의의 기원>을 발판 삼아 현실 사회주의에 악마의 얼굴을 씌우기 시작했다.

 

 

 

 

이 일에 가장 앞장선 자는, 미국중앙정보국과 국방분석연구부(IDA)의 지원으로 운영되던 대표적인 ‘지역연구’ 기관인 콜롬비아대학교 부속 공산권문제연구소 소장이던 브레진스키(Zbigniew Brezezinski, 1928년생, 카터 대통령의 국가안보 보좌관이 됨)였다. 그의 <전체주의적 독재와 전제(專制) 정치>(1965)에 따르면 소련 정권은 나치와 동질적이고, 무차별적 공포정치, 언론 완전 장악, 무력 수단, 국가의 철저한 경제 통제 등의 특징을 안고 있었다. 스탈린과 그 후계자들, 북한과 같은 ‘약소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의 실리주의적 대외정책, 스탈린 죽음(1953년) 이후 대사회적 억압은 지속돼도 ‘무차별적 공포정치’가 거의 종언을 고한 점 그리고 정부의 무기·경제·통신수단에의 관여 내지 부분적 통제가 대다수 근대국가들의 특징이라는 점 등은 철저히 무시됐다.

브레진스키류의 관 학자들에 의해 왜곡돼버린 아렌트의 ‘전체주의 이론’은 극우들에게 전가의 보도처럼 됐지만, 1960년대 말 좌파는 물론 실사구시적 접근법을 고수하려는 수많은 자유주의적 학자들은 노골적인 편향과 현실에 대한 무지로 점철한 ‘전체주의 담론’의 허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파시즘 연구자인 캘리포니아대학의 사우어(Wolfgang Sauer) 교수는, 자본주의의 선진화 과정에서 신분을 상실한 소시민적 낙오자를 중심으로 한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즘이라는 극우운동이 후진 지역의 선진화를 목적으로 하는 ‘좌파적 극단적 개발주의’인 볼셰비즘과 정반대 위치에 섰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입증했다.

 

학계에서 주류가 된 이 주장을 이론화한 학자는 폴란드 출신으로 현실 사회주의를 체험한 영국 리즈대학교의 바우먼(Zygmunt Bauman) 교수였다. 그에 따르면 선진 지역의 ‘천민 극우 근대주의자’인 파시스트들이 식민지에서 대량학살 경험을 유럽에 이식시켜 홀로코스트 등을 저질렀고, 후발 근대화 지역의 볼셰비키 등의 ‘좌파적 근대주의자’들은 대중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전통적 기제들(조국사랑, 지도자의 가부장적 이미지 조작, 간부층과 노동자층의 대가족적 관계 강조 등)을 이용해 상당히 공고한 ‘합의’를 바탕으로 하는 독재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상당수 학자들의 북한 사회 이해 역시 ‘전통주의적 기제들과 일부의 일제 시대의 통제 메커니즘을 이용하고 근대 주권국가 건설·방위를 강조하는 개발주의’ 학설을 중심으로 한다. 물론 북한 사회가 일제 말기의 총동원 사회로부터 이어받은 일부분의 파시스트 연한 요소(육탄정신 찬양, 천황제를 이은 듯한 수령제의 종교화 등)를 내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소수 우파 학자를 제외한 대다수는 역사적 형성 과정과 정통성 부여 방식, 대외정책 방향이 이질적인 나치 독일과 북한을 전면적으로 단순비교하는 것을 학술로 보지 않는다. 문제는 구미 지역의 주요 보수언론들이 극우의 구시대적 견해를 십분 활용하면서 ‘전체주의’와 같은 수사적 어휘를 마치 학술용어인 듯 구사하는 데 있다. 결국 40~50년 전 미국중앙정보국 지원으로 만들어져 언론자본에 의해서 계속 재생산되는 전체주의의 담론이 지금 폴러첸의 모험주의적 대북 행동과 부시의 세계적 횡포를 받쳐주고 있는 것이다.

전체주의 담론에 대항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접근은 무엇인가 북한 사회의 구성요소들을 구체적으로 해석, 규명해 북한 사회의 성격에 대한 객관적 정론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북한 사회를 이끄는 ‘극단적인 좌파적 근대주의’의 기원이 규명되는 동시에, 북한식 ‘합의 독재’와 ‘위로부터의 근대화’의 어두운 면도 과감하게 밝혀져야만 한다. 전체주의 담론을 붙잡는 극우들이 북한 인권 문제를 비방의 도구로 이용하지만, 남북의 민중 모두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한 20세기 근대주의에 대한 남북의 경계를 초월하는 해부·해체 작업이야말로 ‘민중을 위한 21세기’를 열어갈 수 있게 할 것이다.(박노자 | 오슬로국립대 교수 · <아웃사이더> 편집위원) 

06. 12. 18.

P.S.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리뷰들이 뜨지 않고 있다. 알라딘의 '새로나온 책'에서 발견했을 뿐 나도 아직 실물로는 보지 못했다(대신에 나는 하코트에서 나온 원서를 갖고 있다). 한편, 박노자 교수의 글을 읽다가 새삼 생각난 건 폴란드 태생의 걸출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1925- )의 주저들이 국내에 소개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물론 두어 권의 책은 소개돼 있다). 가령, <모더니티와 홀로코스트> 같은 책. 더불어 포스트모더니티에 관한 그의 몇몇 책들. 나도 고작 몇 권을 갖고 있을 따름이지만, 내년에는 바우만의 책들이 적어도 아렌트만큼은 소개되었으면 한다. 해가 가고 오는 게 다른 의미를 갖는 게 아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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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18 00:41   좋아요 0 | URL
오~ 드디어 나왔군요. 한나 아렌트의 대표작! 당장 신청해야겠습니다.히히

로쟈 2006-12-18 01:18   좋아요 0 | URL
네, 연말에 반가운 책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한데, 입이 좀 나오게 되는 건 우리책들이 너무 비싸다는 것. 원서보다 비싼 책들이 언제부턴가 일반화되고 있는 듯합니다(물론 하드카바인 걸 고려하면 더 비싼 건 아니지만, 우리의 경우 소프트가 따로 나오는 건 아니니까 결과적으론 더 비싸죠). 난치병 환자들의 구호에 "약이 없어서 죽을지언정 약값이 없어서 죽지는 말자!"라는 게 있는데, '책값'을 떠올리는 일이 잦아져서야...

드팀전 2006-12-18 09:13   좋아요 0 | URL
친절한 페이퍼네요.^^ 한나 아렌트의 <폭력의 세기>를 보다가 -제 혼자 생각인지-번역된 국문법이 영 낯설어서 중간에 접었던 기억이 납니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도 올해 보관함에 넣고 못 읽은 책중에 하나였는데 <전체주의의 기원>도 일단 보관함에 들어가야겠어요.지그문트 바우만의 <자유>는 몇 년전에 봤는데 얇지만 두툼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로쟈 2006-12-18 11:05   좋아요 0 | URL
<폭력의 세기>는 번역에 대한 지적들이 많은 책입니다(드팀전님의 혼자 생각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저도 사놓고 아직 들춰보지 못했는데, 또 두툼한 책이 나와 대략난감입니다. 거둬야 할 식솔들이 늘어날 때의 기분이 비슷할까 싶네요.--;
 

일본의 여성 동물행동학자 다케우치 구미코의 책이 또 번역돼 나왔다. <진화의 원동력 짝짓기>(디오네, 2006)이 그것이다. 이미 10년도 더 전에 <남과 여의 진화론>(일출, 1995)가 처음 소개되었을 때 나는 흥미롭게 읽은 바 있는데(그래서 <호모 에로티쿠스>도 갖고 있다), 저자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한다기보다는 남녀의 진화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재담가 스타일이다. '구미코의 진화론 이야기' 정도가 딱 알맞지 않나 싶다. 내용이나 분량에서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는 것도 장점이다(하지만 나로선 좀 불만스러운 부분이기도 하다). 한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지금까지 나온 여섯 권의 책이 여섯 군데의 출판사에서 출간됐다는 것. 사이좋아 보이긴 하나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며, 저자로서도 불운한 것 아닐까?(저자는 무슨 생각으로 저작권을 배분하는 것인지?). 분량에 비해 비교적 자세한 서평기사 떴길래 옮겨놓는다. 제목이 아주 그럴 듯하다. '아담이 연애에 눈뜰 때..." 

 

 

 

 

한국일보(06. 12. 16) 아담이 연애에 눈뜰 때...

동물학자 데스몬드 모리스는 대표작 <털 없는 원숭이>에서 인간은 수렵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지능이 발달했다고 주장한다. 머리가 좋을수록 사냥 도구를 잘 만들고, 그 도구가 좋을수록 사냥을 잘했다는 것이다. 머리 좋은 그들은 많은 사냥감을 손에 넣고 많은 자손을 남겼다. 지능 발달의 또 다른 계기는 전쟁이다. 머리가 좋아야 무기를 잘 만들고 군대도 조직할 수 있다. 전쟁이 반복되면 머리 좋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몰아내 지능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일본의 동물행동학자 다케우치 구미코(竹內久美子)는 여기에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능력을 추가한다. 사냥이나 전쟁 이외의 이유로 언어가 발달했고, 언어 발달은 두뇌 발달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사냥, 전쟁 이외의 이유가 무엇일까. 남자는 사냥하고 여자는 집이나 그 주변에 머무는 생활 양식이다. 다케우치 구미코는 이를 ‘남편은 아내의 정절을 믿고 사냥하러 나가고 아내는 남편이 사냥에만 전념할 것을 믿고 전송하다’고 표현한다. 늑대, 사자, 고릴라, 침팬지 등 어떤 동물 사회에서도 찾을 수 없는 인간 만의 방식이란다.

그러나 집을 떠난 남편이 문제다.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사냥하다가 여유가 생기자 더 많은 자손을 남기기 위한 ‘과외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형질의 개체를 얻어 개체의 생존 확률을 높이려는 행위다. 새 여자를 유혹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능숙한 말솜씨다. 이렇게 해서 남자는 설득 능력을 발달시켰다.

아내는 남편의 바람을 막을 수단이 필요하다. 남편이 다른 여자에 열중하면 갖고 돌아오는 먹이가 줄고 최악의 경우 남편이 안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택한 대응책이 이웃 아줌마들과의 수다다. 가까이 사는 여자들끼리 정보 제공의 동맹을 맺는 것인데, 이 때도 언어가 필요하다. 남자는 여자를 설득하기 위해, 여자는 남자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언어 능력을 발달시킨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언어 발달은 남녀 관계, 즉 짝짓기가 그 원동력이다.

고릴라 침팬지는 인간과 같은 영장류임에도,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화했다. 하지만 거기에도 역시 핵심은 짝짓기다. 가령 고릴라는 지능이 매우 높지만 인간처럼 언어가 발달하지는 않았다. 대신 암컷을 둘러싸고 수컷끼리 싸워서 승자가 돼야 짝짓기를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수컷은 몸무게가 200㎏이나 돼 암컷의 2배 가까이 커졌다. 반면 침팬지는 난혼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강력한 정자 생산이 필요하다. 그 결과 고환이 발달해 그 무게가 120g이나 된다. 체중이 자신의 다섯 배나 되는 고릴라의 고환 30g보다 4배나 무겁다.

잠자리는 수컷이 암컷의 목을 잡고 곡예비행 하듯 교미한다. 수컷이 교미 도중 암컷에 먹힐 수 있기 때문에 그 위험을 피하려는 뜻이다. 그런데 교미 후에도 암컷의 목을 잡고 있는 녀석이 있다. 암컷이 다른 수컷과 교미하지 못하도록 즉 불륜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꽉 붙잡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책은 다양한 짝짓기 전략을 소개하고 그 의미 분석을 시도한다. 물론 짝짓기 방식은 동물에 따라 다르고 그 배경에서도 차이가 난다. 하지만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책이 강조하는 것은 분명하다. 짝짓기는 동물 진화의 핵심이고, 모든 짝짓기에는 고도의 생존 전략이 있다는 것이다.(박광희 기자)

06. 12. 16.

P.S. 이미지는 <남과 여의 진화론>(1995)의 원서. 표지가 더없이 촌스럽군. 출판대국도 표지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건지, 아니면 좀 '야시꾸리'한 책의 내용을 살려주기 위한 고려인지 헷갈린다(알고보니, 중국어판이다. 그럼 이해가 된다. 그러고 보니 구미코는 동아시아권 대표주자인가?). 참고로, '생존기계'가 아닌 '구애기계'로서의 인간의 마음에 대한 생물학적 해명은 제프리 밀러의 두툼한 책 <메이팅 마인드>(소소, 2004) 등을 참조할 수 있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조만간 따로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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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6-12-16 01:17   좋아요 0 | URL

저 표지 아무래도 중국판인 듯 합니다. '~의'를 '的'으로 표현한 것도 그렇고...
일본 웹사이트에서 찾아보니 원서 표지는 이렇군요. 이것도 과히 센스가 좋다고 하긴 힘들지만... -_-;
원서에는 부제가 달려 있군요. [남과 여의 진화론 - 모든 것은 착각에서 시작되었다]




2006-12-16 0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2-16 09:53   좋아요 0 | URL
페일레스님/ 그렇군요, 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님/ 별걸 다 챙기시네요(한데, 저는 여자분인 줄 알았어요).^^

비로그인 2006-12-18 00:35   좋아요 0 | URL
처음 글 남기네요... 알라딘에서 책을 구입하다보니 님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었다는ㅋ 종종 들러서 좋은 글들 보고 갑니다.
정신분석, 진화심리학 모두에 관심을 갖고 계신 것 같네요.
아무래도 계속 공부를 해봐야겠지만, 지금으로서 전 그 둘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혹 이와 관련해서 참고할만한 글이나 책이 있을까요?
(초면에 대뜸 질문부터 드려 죄송합니다;;)

로쟈 2006-12-18 01:20   좋아요 0 | URL
제가 좀 나대는 편이죠. 하지만, 그래봐야 알라딘은 업종 4위인가에 턱걸이하고 있을 뿐인 걸요(^^;). 눈치를 채신 바대로, 정신분석과 진화심리학에 모두 관심을 갖고 있고 또 그 분야의 책들을 좋아합니다. 둘다 건드린 사람으론 딜런 에반스가 대표적이죠(정확히 말하면 정신분석에서 진화심리학으로 전향한 경우이지만). 지젝이 정식화해놓은 바에 따르면, 정신분석은 자연적 본성의 '오작동'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해서 저는 '작동'면은 진화심리학을 참조하고 '오작동'에 대해선 정신분석에 의존하고, 그런 식입니다. 그러니까 둘이 모순적이라거나 양립불가능한 건 아니라고 보는 쪽입니다...

비로그인 2006-12-18 19:44   좋아요 0 | URL
나대신다니요ㅋ 적어도 제게는 도움이 많이 되고 있습니다. (부담스러우시죠? 하하) 사실 저도 지젝같은 사람은 뭐라 했을까 궁금했었는데, 딱 말씀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구체적인 내용들은 제가 직접 공부해봐야겠죠...

다만 당장 너무 궁금해서 한가지 더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진화심리학이 제시하는 윤리학(?)은 대략 어떤 거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자연적 본성을 잘 알아낸 다음 어떻게 살자는 건지 아직은 모르겠네요.
간단한 답변이 가능한 질문이 아니라면 읽어볼 만한 책이나 글이라도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로쟈 2006-12-18 20:35   좋아요 0 | URL
글쎄요, <도덕적 동물>에 뭐라 써있는지 모르겠지만(옛날에 원서를 몇 십쪽 읽은 게 전부라) 진화심리학에서 얘기하는 건 우리가 갖고 있는 도덕감정이나 관념의 생물학적/진화론적 기원(이익) 같은 거 아닌가요? 거기서 어떤 당위가 나오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돼먹었느냐를 보여주는 것이고, 그래서 어쩔거냐라는 건 별개의 문제일 테니까요...

비로그인 2006-12-19 00:01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진화심리학자들이 그런 부분까지 취급하지는 않나보네요...
사람 불편하게 만드는 것까지만 하나 보죠?ㅋ 그 불편함이 매력이긴 하지만.

아무튼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종종 들르게요, 빙판길 조심하시구요^^

evopsy 2006-12-19 05:22   좋아요 0 | URL
빠라바람님/ "도덕적 동물"도 괜찮은데 저자의 주관적인 견해가 많이 반영된 편이라서 차라리 핀커의 "빈 서판"에서 윤리학 부분을 찾아 읽으시면 적절할 듯 합니다. 원서도 괜찮으시면 올해 나온 Marc Hauser의 [Moral MInd]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비로그인 2006-12-19 22:2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evopsy님 :)
닉네임에서부터 포스가 느껴지네요..ㅋ

어부 2006-12-21 03:58   좋아요 0 | URL
음.. 적어도 진화심리학 진영에서만큼은 양립할 수 있다고 봐주진 않는듯 합니다.. 그쵸?? -_- '변절' 이후의 딜런의 정신분석에 대한 코멘트만 봐도 실망스럽기 그지 없구요... 제가 진화심리학에 대해선 굴드진영의 시선에 더 공감이 가는바라(그래서 진화심리학과 정신분석이 대칭구도로 대립한다고 느껴지지 않네요.) '적응'이란 말로 두드려 맞추려는 그런 말투에 거부감 가는것도 있구요..

로쟈 2006-12-21 08:44   좋아요 0 | URL
네, 진화심리학자 혹은 인지과학자들은 대개 강경하죠. '프로이트여, 안녕'이라는 게 기본적인 포지션이니까요. 지젝도 언급하고 있지만, 적응만 있는 게 아니라 적응에서의 일탈 내지는 부적응이라는 것도 있고, 그런 점에서 '오작동'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호모 사피엔스이면서 호모 데멘스인 게 인간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