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마지막 주말을 보내노라니 그래도 약간은 만감이 교차한다. 탁상의 달력은 이미 12월달로 넘겨놓고 '12월의 읽을 만한 책'을 꼽아본다. 하던 대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추천도서 목록에 관련서를 두어 권씩 더 얹어놓는 식이다. 즐거운 일보다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대종이었던 한 해를 보내는 일이 섭섭하진 않지만 내년의 전망이 밝지 않으니 새해를 맞는 기분도 그리 반갑지 않다. 그저 모른 체 지나는 수밖에 없겠다. 책에다 고개를 파묻고...

1. 문학

음, 맨처음 보이는 건 사막이다. 르 클레지오의 <사막>(문학동네, 2008). 비록 정신없는 사느라 이달에 내가 챙겨읽지는 못했지만 이미 지난달에 '이달의 읽을 만한 책'으로 꼽아놓았으니 이건 '꼽고 또 꼽고'다. 작가 신경숙 씨는 이렇게 적었다. "<사막> 또한 정교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서구 제국주의가 사하라 사막을 정복하게 되자 사막 민족들은 끝없는 유랑 길에 오르게 되며 겪는 수난사가 한 축이고 사막인의 후손인 랄라라는 한 사막소녀가 적십자단의 개입으로 프랑스의 항구 마르세유로 오게 되면서 겪게 되는 일들이 또 한축으로 소설은 진행된다. 숨 막히는 태양과 모래바람 속에서 살아온 랄라가 물질화된 도시에서 겪게 되는 삶을 통해 현대화된 문명이 어떻게 인간적인 것을 말살하는가를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르 클레지오 대신에 내가 고른 건 러시아어로 작품을 쓰는 우크라이나 작가 안드레이 쿠르코프이다(그는 사막 대신에 빙판을 보여준다). 사실 작가는 이번에 한국작가회의에서 주최하는 ‘세계작가와의 대화’에 초청되어 12월 2일부터 7일까지 한국에 방문한다(소개를 더 적으면 "12월 3일에는 서울대 러시아 연구소와 공동 주최하는 심포지움에서 '21세기와 동유럽 문학'을 주제로 발표가 있으며, 12월 5일에는 다원예술매개공간에서 열리는 문학공연 ‘동유럽 문학의 밤’에 참석할 예정이다").

Андрей Курков Закон улитки

이미 <펭귄의 우울>(솔출판사, 2006)이 처음 소개됐을 때 나대로 관심을 표한 바 있다(http://blog.aladin.co.kr/mramor/943794#comment_943794). 이번에 속편 <펭권의 실종>(솔출판사, 2008)이 작가의 방한에 맞춰 출간됐다. 아직 실물을 확인하지 못하여 러시아어본의 원제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영어제목은 짐작엔 표지의 <달팽이의 법> 같다(제목이 너무 달라서 미심쩍긴 하지만). 국역본의 제목은 영어본에 따른 것이다.  

2. 역사

역사저술가 이덕일 씨가 추천한 역사분야의 책은 에릭 힐딩거의 <초원의 전사들>(일조각, 2008)이다. 제목이 말해주는 바대로 유목민족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그 중에서 저자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유목민들의 군사적인 측면이라고. 추천사에 따르면 "만주족에 관해 기술한 12장은 조선의 병자호란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에 우리 역사를 읽는 듯 생생하다.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훈족, 몽골족, 만주족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에 맞섰던 스키타이족이나 십자군과 싸웠던 셀주크(투르크)족의 흥망에 대한 기술도 흥미롭다. 우리는 스스로를 농경민족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민족의 기원은 기마민족이다. 오랜 정착생활을 통해 농경성이 추가되면서 유목성(이동성)에 정주성이 가미된 독특한 민족성이 형성되었다. 우리의 잃어버린 반쪽의 민족성, 즉 유목성에 대해서 말해주는 이 책은 유목민족사의 고전인 룩 콴텐의 <유목민족제국사>와 함께 보면 금상첨화이다."

룩 콴텐의 <유목민족제국사>(민음사, 1984)는 너무 오래된 책이어서 알라딘에는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대신에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건 르네 그루쎄의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사계절출판사, 1998)이다. 800쪽이 넘는 분량이고 믿을 만한 전공자들의 번역이므로 나름 '고전'이지 않을까 싶다. 공역에 참여한 정재훈 교수의 <위구르 유목제국사 744-840>(문학과지성사, 2005)도 학술서이긴 하나 국내 학자의 학문 수준을 보여주는 책으로 골라놓는다.

유목민족사 이야기가 나온 김에 라시드 앗 딘이 쓴 <집사>도 기억해둠 직하다. 저자는 페르시아의 재상으로 13세기 몽골 제국 건설과정에 관한 방대한 기록을 남겼다. "몽골의 지배를 받던 이란에서 칸의 칙명을 받아 집필한 이 책은 지금은 사라져버린 '원자료'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었기에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진귀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는 고전 중의 고전이다. 그러나, 페르시아어 원본의 난해함과 방대한 분량 때문에 선뜻 번역본이 나오지 못했다."고 소개되는 책인데, 김호동 교수에 의해 현재 <부족지>, <칭기스칸기>, <칸의 후예들> 3권이 출간돼 있다. 

3. 철학 

철학분야의 책으로 김상환 교수가 추천한 책은 움베르코 에코의 <추의 역사>(열린책들, 2008)이다. 분류하자면 '미학'에 속하는 책이며, 추천사에 따르면 "혐오스럽고 역겨운 것, 불쾌하고 추한 것의 역사가 미(美)의 역사보다 광대하고 훨씬 더 흥미롭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책"이다. 물론 그 전에 나온 <미의 역사>(열린책들, 2005)의 속편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이미 알라딘 식구들에겐 잘 알려져 있는 책인지라 따로 군말을 보태진 않는다. 개인적으론 서평도 주문받은 책인지라 모처럼 '이달의 책읽기'를 해볼 수 있다는 점이 반갑다. 카를 로젠크란츠의 <추의 미학>(나남출판, 2008)도 (순전히 제목 때문에!) 같이 읽어보려고 한다.

4. 정치

손호철 교수가 추천한 정치분야의 책은 <열등감을 희망으로 바꾼 오바마 이야기>(명진출판, 2008)이다. 이미 '오바마 관련서'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만큼 놀랍지는 않더라도 좀 뜻밖이다. 추천의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 "미국의 유수한 전기 작가인 헤더 레어 와그너가 쓴 <열등감을 희망으로 바꾼 오바마 이야기>는 쏟아져 나오고 있는 버락 오바마 미국대통령 당선인에 대한 전기 중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좋은 책"이라고 하니까.

조금 더 들어보면, "이 책은 주로 ‘정치인 오바마’에 초점을 맞춘 대부분의 책들과 달리 ‘인간 오바마’에 초점을 맞추어 혼혈로 태어나 부모가 이혼을 하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등 청소년 시절 많은 방황을 했고 열등감에 가득 찼던 한 아프리카계 소년이 수많은 벽들을 어떻게 뛰어 넘어 성공을 거두고 미국인들에게 ‘희망과 변화의 상징’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가를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사실 그 희망은 미국인들의 것이고 우리야 이 책을 읽으며 상대적으로 더 절망하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현재 '오바마'로 검색되는 책은 모두 28종이다. 그 중에는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랜덤하우스, 2007)처럼 오바마 자신이 직접 쓴 책들도 상당수다(모두 판매량 상위권에 포진해 있다). 이제 당선됐으니 오바마 개인보다는 '오바마의 미국' 쪽으로 관심을 전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존 탈보트의 <오바마노믹스>(위즈덤하우스, 2008) 같은 책이 '오바마 정부하의 세계경제 전망'을 다루고 있다. 관심있는 독자는 일독해 볼 만하다.

5. 경제/경영

이준구 교수가 추천한 경제/경영서는 잭디시 세스의 <배드 해빗>(럭스미디어, 2008). 부제가 '성공한 기업의 7가지 자기파괴 습관'이니 내용을 얼추 짐작해볼 수 있다. 이른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뒤집어놓은 꼴. 추천의 변에 따르면, "그 동안 성공한 기업의 비결에 대해 쓴 책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처럼 성공한 기업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결과를 빚는 원인에 대해 분석한 책은 거의 없었다. 기업의 입장에서 볼 때 성공을 향한 도전도 중요하지만, 성공을 이룬 다음 그것을 지켜내는 것 역시 그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점에서 본다면 이 책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책의 목차를 보니 이렇다.

CHAPTER 01 왜 좋은 기업이 병들어가는가?
CHAPTER 02 현실부정 : 성공신화, 관습, 기존 신념에 갇히다
CHAPTER 03 오만 : 최고의 시절을 잊지 못하다
CHAPTER 04 타성 : 쉽게 흥한 자는 쉽게 망한다
CHAPTER 05 핵심역량 의존 : 권위가 저주로 돌아오다
CHAPTER 06 경쟁근시안 : 눈앞의 경쟁만 보는 짧은 시야
CHAPTER 07 규모 집착 : 원가 상승과 수익성 악화
CHAPTER 08 영역 의식 : 문화충돌과 내부 권력다툼
CHAPTER 09 최고의 치료는 치료가 아닌 예방

2-8장까지 '7가지 자기파괴 습관'을 다루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요약하면 '현실부정' '오만' '타성' '핵심역량 의존' '경쟁근시안' 규모 집착' '영역 의식' 등이 그 7가지이다. 기업뿐만 아니라 개인의 경우에도 그런 습관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따져봄 직하다. 반대로 좋은 습관에는 뭐가 있을까? 김태광의 <세상을 뒤흔든 7인의 습관>(경향미디어, 2008)을 보니 이런 목차로 구성돼 있다.

Part 1: ‘겨울 소녀’ 김연아의 성공 습관_ 노력
Part 2: ‘여름 소년’ 박태환의 성공 습관_ 도전
Part 3: ‘세계의 대통령’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성공 습관_ 꿈
Part 4: ‘토크쇼의 여왕’오프라 윈프리의 성공 습관_ 포용
Part 5: ‘애플컴퓨터 CEO’ 스티브 잡스의 성공 습관_ 위기 관리
Part 6: ‘투자의 신’ 워렌 버핏의 성공 습관_ 자기 관리
Part 7: ‘성공철학의 거장’ 데일 카네기의 성공 습관_ 인간관계

김연아와 박태환을 맨 앞자리에 내세운 건 이 책이 청소년을 겨냥한 책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습관'을 키워드로 한 베스트셀러 <이기는 습관>(쌤앤파커스, 2007)도 베스트셀러로 기억해둠 직하다. 어차피 '성공학' 책들이 팔려나간다면 국내서들이 분전하는 게 그래도 더 바람직해 보인다.

6. 사회

김문조 교수가 추천한 사회분야의 책은 노명우의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프로네시스, 2008)이다. 텔레비전 사회'란 말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여하튼 텔레비전이 일상에서 잡아먹는 시간은 무시하기 어렵다. 추천사에 따르면, " 대량생산-대량소비의 포드주의 시대를 대변하는 전형적 대중미디어 텔레비전은 피에르 부르디외와 같은 외국의 저명 학자들이 즐겨 다뤄온 문명비판 메뉴였다. 저자 노명우 교수는 우리는 왜 ‘바보상자’로 비하되는 텔레비전을 내치지 못하는가를 그들 못지않게 예리하고 명쾌하게 분석한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책은 <텔레비전에 대하여>(동문선, 1998)을 가리키는데, 우리말로는 읽을 수 없는 책이다.  

찾아보면 이런 책이 없었던 건 아니다. <TV: 가까이 보기, 멀리서 보기>(현실문화연구, 1999), <텔레비전 문화연구>(한나래, 1999)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문화연구가 한창 뜰 때 나온 책들이다). 대중문화와 일상을 다룬 책으로 가장 최근에 나온 팀 에덴서의 <대중문화와 일상, 그리고 민족 정체성>(이후, 2008)도 결들여 읽어봄 직하다.

7. 과학

장경애 편집장이 추천한 과학분야의 책은 데이비드 쾀멘의 <신중한 다윈씨>(승산, 2008)이다. 내년이 다윈 탄생 200주년이고,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이 되는 해인지라 '다윈 관련서'가 한동안 계속 출간될 듯싶다. '진화론의 후예들이 펼치는 생생한 지성의 만찬'을 다룬 장대익의 <다윈의 식탁>(김영사, 2008)이나 '20세기의 다윈'이라 불리는 에른스트 마이어의 <진화란 무엇인가>(사이언스북스, 2008) 모두 그 관련서 범주에 들어가는 책들이다. 특이한 제목을 갖고 있는 쾀멘의 책에 대한 추천사는 이렇다. 

다윈하면 제일 먼저 비글호 항해기를 떠올릴 독자들에게 이 책은 좀 낯설다. 비글호 항해를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 온 1837년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다윈이 항해의 성과를 정리하면서 생각이 어떻게 발전했고 그 당시 그의 주변에 누가 있었으며 생활은 어떠했는지를 스케치하듯 담아냈다. 오늘날 너무 당연하게 생각되는 진화론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회 분위기에서 갈등한 다윈의 모습, 하지만 결코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고 기록을 남긴 모습 속에서 인간적인 면모와 함께 자신이 얻은 정보를 종합해 새로운 지식으로 창출해낸 신지식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다윈 탄생 200주년, 종의기원 출간 150주년이 되는 2009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읽어볼 만한 책이다.

유감스러운 건 아직 국내에 다윈의 <종의 기원> 정본 번역이 나와 있지 않다는 점. 내년에는 그런 '갈증'이 해소되길 기대한다. 찾아보니 데이비드 쾀멘의 일러스트레트 버전 <종의 기원>(2008)이 나와 있는데, 같이 소개되면 더 좋겠다. 비글호 항해기의 경우엔 <찰스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샘터, 2006)가 정본이다.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가람기획, 2006)도 완역본인 만큼 비글호 '항해'에 동승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겠다.   

8. 예술

김춘미 교수가 고른 예술분야의 책은 이영희의 <파리로 간 한복쟁이>(디자인하우스, 2008)이다.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의 에세이집. 우리 안에 존재하는 '한복쟁이'라는 편견과 얕잡아봄에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당당히 세계로 나가 한복의 명품화와 세계화, 현대화를 이끌고 있는 이영희 선생의 패션 도전 30년의 여정을 담았다."고 소개되는 책이다. 1936년생이니까 원로 디자이너인데, 옷 또한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직접 보는 게 낫겠다.

 

이어령 선생의 추천사는 이렇다. "한국의 선線, 중국의 형形, 일본의 색色 동양 삼국의 미학적 특성을 이렇게 비교해왔지만 이영희가 만들어내는 한복은 오묘한 선과 대담한 형 그리고 독창적인 색상을 모두 보여준다. 이처럼 동양의 모든 미학을 함께 모아 놓은 것이 바로 바람의 옷이다." 흠, 내가 따로 덧붙일 말은 없다.

나대로 예술분야의 책을 꼽자면 고딕 문화를 다룬 캐서린 스푸너의 <다크 컬쳐>(사문난적, 2008)가 손에 들고픈 책이다. 카린 자그너의 <고딕, 어떻게 이해할까?>(미술문화, 2007)은 고딕 입문서가 될 수 있겠고, 크리스티얀 프라가가 엮은 <고딕의 영상시인 팀 버튼>(마음산책, 2007)도 고딕 애호가 혹은 염탐가라면 챙겨두어야 할 책. 

물론 크리스마스 시즌엔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의 악몽>도 꼭 보아주시고 말이다.

9. 교양

이한우 기자가 꼽은 교양분야의 책은 빌 브라이슨의 <아프리카 다이어리>(21세기북스, 2008)이다. <발칙한 유럽산책>(21세기북스, 2008)을 지난달에 '이달의 읽을 만한 책'으로 골라놓았으므로 우연찮게 '연짱'이 돼 버렸다. 브라이슨에 대해서는 더 언급할 것도 없고, 대신에 아프리카 관련서 두 권을 더 보탠다. 일주일간의 아프리카 체류를 바탕으로 한 브라이슨의 <아프리카 다이어리>가 '짧지만 진한' 여행기라면 생태학자인 마크와 델리아 오웬스 부부의 <야생 속으로>(상상의숲, 2008)은 7년간의 아프리카 오지 생활을 다룬 책이다.

이 경우는 원제가 '칼라하리 사막의 비명'인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들 부부가 쓴 책으론 <코끼리의 눈>과 <사바나의 비밀>, 두 권이 더 검색된다. 아프리카에 관해서라면 브라이슨이 범접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닐 듯싶다. 그렇게 보자면 남아공 출신의 저널리스트 막스 두 프레즈가 쓴 <나는 아프리카인이다>(당대, 2008)은 경지를 넘어선 경지이겠고. '한눈으로 읽는 아프리카 역사'라고 하는데, 생각해보면 아프리카의 역사는 어떻게 시대구분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바냐 아저씨> 버전으로 말하자면, 오늘도 그쪽은 꽤 덥지 않을까?..

10. 심리학/생리학

끝으로 맘대로 고르는 책이다. 오늘 발견한 <클루지>(갤리온, 2008)이란 책 때문에 뇌 심리학/생리학 관련서를 몇 권 읽어보기로 한다(<클루지>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2430088 참조). 연말이니 만큼 '커플'들의 생각도 복잡해질 듯싶은데,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되건 자신의 생각의 기원과 구조에 대해서 좀 알아두는 게 좋을 듯싶다. 대니얼 에이멘의 <사랑할 때 당신의 뇌가 하는 일>(크리에디트, 2008)은 '사랑과 섹스를 지배하는 뇌의 원리'를 밝혀주는 책이다. 원제는 'Sex on the brain'이니까 좀더 노골적이다.'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뇌로 하는 것이다'라는 게 책의 모토다(고등학교 성교육 교재로 써도 좋겠다).

작년말에 나온 토르 뇌레트라네르스의 <왜 사랑에 빠지면 착해지는가>(웅진지식하우스, 2007)은 '사랑과 배려, 욕망의 기원과 진화'를 다룬다. "사람들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을 위해 헌혈하고, 선로에 떨어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며, 불우이웃돕기 모금 ARS에는 수백억이 모인다. 이렇게 서로 돕고 배려하는 마음은 어디서, 왜 생겨나는 것일까? 이러한 이타적인 행동에 대해 지은이는 자연선택론 대신 다윈의 성선택론을 기반으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하므로, 진화심리학 관련서로 분류할 수도 있겠다. 아예 이 참에 <처음 읽는 진화심리학>(웅진지식하우스, 2008)과 <욕망의 진화>(사이언스북스, 2007) 같은 교과서적 교양서들을 독파하는 것도 좋겠다. 연애도 하다 말 게 아니라면 말이다 아직 짝을 찾지 못한 청춘남녀들에겐 부디 얼마 안 남은 기간에 좋은 결과가 있기를!..

08. 11. 29.

P.S. 12월의 읽을 만한 고전으로 고른 책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문예출판사, 1998/2006)이다. 너무도 잘 알려진 책이지만 역시나 완독할 일은 드문, 그런 의미에서 고전에 값하는 책이다. 요즘 자본주의 위기 국면과 관련해서 자본주의 정신의 기원을 탐색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자연스러울 수 있다. 개인적으론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코나투스, 2008)에 몇 차례 언급되고 있어서 다시금 상기하게 됐다. 해설서로는 노명우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노동의 이유를 묻다>(사계절출판사, 2008)가 눈에 띈다. 조금 전문적으로는 신학자 폴 틸리히의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대한기독교서회, 2004)도 참조할 수 있겠다. <그리스도교 사상사>(대한기독교서회, 2005)와 짝이 되는 책인 듯싶다. 요즘 루돌프 불트만 같은 신학자들에 관심을 갖게 된 탓에 폴 틸리히의 경우에도 눈길이 간다. 아마도 아감벤의 책이 자극이 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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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1-30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김용옥 씨의 성서해설서를 보면 불트만의 탈신화화를 깊이 있게 연구한 것 같아요.성서주석 공부할 때 필요하죠.초창기 베버 해설서는 서문당 문고에서 나온 황산덕<막스 베버>가 있었는데 요즘도 나오더라구요.

로쟈 2008-11-30 19:47   좋아요 0 | URL
김용옥 씨는 77년인가 78년인가 불트만 추모논문도 쓴 게 있어요. 신학대를 다녔다는 걸 상기시켜주더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12-01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도 번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성경번역이야기를 하더라구요.

로쟈 2008-12-01 23:52   좋아요 0 | URL
번역 문제의 '원천'이니까요...
 

이번주 관심도서를 다섯 권 꼽는다면 그 중 두 권은 뇌와 관련한 교양서이다. 하지만 교양지수로는 대니얼 에이멘의 <사랑할 때 당신의 뇌가 하는 일>(크리에디트, 2008)보다 한 단계 높은 책이 캐리 마커스의 <클루지>(갤리온, 2008)이다. '클루지'란 '서툴게 짜 맞춰진 기구'인데, 옛날 만화에 나오던 '깡통 로롯' 같은 걸 떠올려볼 수 있겠다. 문제는 그 '클루지스러운 것'이 우리의 뇌라는 점. 후회막급한 판단과 결정으로 자신의 지능을 의심해본 사람이라면 필독해볼 만한 책이다. 촘스키 왈, "나는 개리 마커스의 놀라운 업적 덕분에 인간의 정신 활동을 가능하게 한 생물학적 토대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한국일보(08. 11. 29) 당신의 충동, 미리 예상하고 결정하라

"인생은 짧습니다. 이혼하십시오." 시카고의 한 법률회사가 버젓이 내걸었던 광고 카피다.

우리가 정말로 합리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면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저따위 광고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여론의 압력에 못 이겨 2주만에 광고판을 내려야 하긴 했지만, 이 광고는 평소 이혼을 생각도 하지 않던 사람들까지도 그것에 대해 생각하도록 부추기는 효과를 실제 발생시켰다. 광고 내용이 현실적인 실체는 아니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삶의 맥락과 밀접한 생각거리를 제공, 신념은 물론 선택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클루지>의 저자에 따르면 이는 인간이 '클루지스러운 뇌'(132쪽)의 지배를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결혼을 낭만적인 연애와 화끈한 성적 만남의 관점에서 보도록 유도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요술을 부리는 요술쟁이가 바로 '클루지(kludge)'다. 저자에 따르면 클루지는 "어떤 문제에 대한 서툴거나 세련되지 않은, 그러나 놀랄 만큼 효과적인 해결책"(11쪽)으로 정의된다. 쉽게 말해 인간 진화의 중추에는 고장 나기 십상인 애물단지 컴퓨터가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왜 해로운 줄 알면서도 흡연, 섹스, 비디오게임, 인터넷 등의 중독에 빠져들까? 우리는 왜 그저 부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남들보다 더 부자가 되고 싶어 할까? 모든 게 진화의 오류 때문이다. 진화는 우리가 행복하도록 우리를 진화시킨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도록 진화시켰기 때문이다.

전체 자연계로 보자면 나약하기 짝이 없는 포유동물인 인간은 가혹한 자연 조건에서 생존하며 진화해 왔다. 저자는 그 진화라는 기제 때문에 인간의 신념과 정신은 형편없이 오염돼 있다고 말한다. 합리성이 상황 논리나 감정에 복속되고 만다는 것이다. 2003년 아들 부시 미국 대통령의 이라크 침공 결정이 좋은 예다. 부시는 말했다. "어쨌든 그는 내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던 녀석이다."(139쪽) 이 말을 보면 부시의 결정에는 확실하게, 감정이 개입돼 있었다는 이야기다.

왜 우리의 마음은 중요한 순간에도 이따금 딴 데 가 있는 것일까? 최근 영국의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회의 시간에 섹스에 대한 공상을 하는 사무원이 세 명 중 한 명 꼴이다. 그같은 심리적 공백으로 1년에 경제적으로 78억파운드의 손실이 난다고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주의결핍장애가 인간의 숙명과도 같이 된 것은 나약한 인간이 가혹한 조건에서 살아 남으려다 보니, 반사 기능과 숙고 체계가 어설프게 통합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책은 가장 인간적인 특징인 언어에서마저도 진화의 찌꺼기가 엄존하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한 장을 할애한다. 저자는 "영어에는 거친 조각들, 멍청한 틈들, 해롭고 도착된 불규칙성들이 가득하다"(191쪽)며 "진화의 흠 많은 걸작"이라 규정한다. 이 대목에 이르러 저자는 최근의 언어학적 통찰을 인용, 논의를 진지하게 이끌어 간다.

인간의 숙명적 맹점을 통렬하게 꼬집던 저자는 말미에 이르러 우리의 세계를 현명하게 만드는 13가지 방법을 일러준다. 불완전함을 통찰하라는 전제 하에서 이뤄지는 제안이다. 그 중 '자신의 충동을 미리 예상하고 결정하라' '누군가가 여러분의 결정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결정하라' 등의 제안은 이 책이 인간의 어두운 구석을 들추는 심리학 저서로는 대단히 드물게 사회통합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행복 가설>로 유명한 미국의 긍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기쁨과 통찰을 선사하는 놀라운 책"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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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개리 마커스는 고교를 중퇴하고 23세에 MIT에서 뇌ㆍ인지과학 박사학위를 취득, 30살에 뉴욕대 종신 교수가 된 진화심리학계의 스타 과학자. 책은 그의 이론이 낯설지도 모른다는 점을 제목에서 밝혀둔다. '생각의 역사를 뒤집는 기막힌 발견'이란 부제 옆에 '클루지'를 행여 '클러지'로 읽지나 않을까, 발음기호까지 달아 두었다.(장병욱 기자)

08. 11. 29.

P.S. '개리 마커스'란 이름이 왠지 낯설지 않다 싶더니만 <마음의 태어나는 곳>(해나무, 2005)의 저자다. 스티븐 핀커의 추천사는 이렇다. "마커스는 생각하는 인간, 말하는 인간에 대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지식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종합하여 보여준다. 재능이 넘치는 독창적인 이 책은 과학을 대중화하는 데, 그리고 과학 그 자체에 기여하고 있다." 이거 어디에 두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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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08-12-01 06:12   좋아요 0 | URL
뇌에 관심이 많아서, 뇌에 관련된 책을 좋아하는 저는
'고양이 생선 가게 그냥 못지나는' 것처럼 와서 읽고 말았습니다.(웃음)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로쟈 2008-12-01 08:33   좋아요 0 | URL
<뇌, 생각의 출현> 같은 책은 반응이 좋더군요...

L.SHIN 2008-12-02 06:3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로쟈 2008-12-03 16:13   좋아요 0 | URL
별 말씀을요.^^;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코나투스, 2008)의 에필로그 제목은 '경계 또는 토르나다'이다. '벤야민 전문가'로서의 관심과 역량을 내비치는 대목인데, 간략하게 정리해둔다. 내가 참조한 것은 국역본 외 <남겨진 시간>의 영역본(<The Time That Remains>), 그리고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의 대하여>(길, 2008) 등이다(성경의 구절들도 참조해야 한다). 벤야민의 글은 '역사철학테제'로 인용되고 있다('바울로'는 '바울'로 표기했다. 개신교에서만 '바울'이라고 표기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출판된 대부분의 책들에서 '바울'이라고 표기하고 있기에 그에 따른다).

아감벤은 먼저 제1테제에 등장하는 곱사등이 난쟁이를 상기시킨다. 벤야민은 "체스판 밑에 숨어서 터키풍 의상을 입은 기계인형을 조종하여 승리로 이끄는 난쟁이"의 이미지를 포우의 소설에서 차용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역사철학의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다른 위상을 갖게 된다. "오늘날에는 작고 볼품없으며 누구에게도 보여서는 안되는" 신학이 바로 그 '난쟁이'이다. 하지만 역사적 유물론이 두려운 적수들과의 역사적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바로 그 신학을 자기 편으로 취해야 한다는 것이 제1테제의 주장이다.

아감벤은 이러한 벤야민의 주장을 텍스트 자체에 적용한다. 결정적 이론투쟁이 전개되는 체스게임을 밑에서 조종하는 신학자?! 그렇다면 "저자가 테제의 텍스트 속에 매우 정교하게 숨겨둘 수 있었으며, 지금까지그 누구도 특별히 지목하지 못했던 이 난쟁이 신학자는 과연 누구인가?"(227쪽) 아감벤의 에필로그는 그러한 관심에 촉발되며 이미 짐작해볼 수 있지만 벤야민의 텍스트 속에 정교하게 숨어 있는 난쟁이 신학자는 바로 '바울'이다. 아감벤은 보다 구체적인 증거(흔적)들을 통해서 이를 입증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아감벤은 그 구체적인 '흔적'을 어떻게 찾는가? '인용부호 없는 인용법'을 실마리 삼아서다. 벤야민은 '파사쥬론' 즉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아예 이렇게 적었다. "이 작업에서는 인용부호 없는 인용법을 완전히 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섹션 N의 한 주석). 벤야민에게서 이 인용은 방법론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는 '서사극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말했다(국역본은 'Epic Theater'를 '서사시극'이라고 옮겼는데, 혹 일어본에서는 그렇게 옮기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어에서는 '오역'이다). "어느 텍스트를 인용한다는 것은 그것이 소속하는 컨텍스트를 중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크라우스에 관한 에세이에서는 "인용은 언어를 이름으로, 언어를 문맥으로부터 떼어내어 문맥을 파괴하며" 그럼으로써 그것을 "구제하고 벌한다."라고 적었다(국역본에는 '논고'라는 엉뚱한 단어가 들어가 있다).

이 인용의 방법으로 벤야민은 브레히트를 따른다. 벤야민이 보기에 브레히트의 서사극에서 "배우는 식자공이 글자 사이에 간격을 두는 것처럼, 그 동작에 간격을 둘 수 있어야 한다."(그러한 간격두기가 낳는 효과가 연기에서는 '소격효과'이겠다.) 여기서 '간격을 두다'란 말은 영어의 'spacing', 독어의 'sperren'을 옮긴 것이다. 어떤 단어를 강조하려고 할 때 이탤릭체를 사용하는 대신에 각 철자들 간의 간격을 띄우는 것을 말한다. 즉 'sperren'이라고 하지 않고 's p e r r e n'이라고 표기하는 것. 이렇게 간격이 주어진 단어는 보통 두번 읽히게 된다. '스-페-르-렌, 스페렌' 하는 식이 되는 것이다.

"이들 자간의 간격이 주어진 단어들은 어떤 측면에서는 과잉적으로 읽혀진다. 두번 읽혀지는 것이다. 그리고 벤야민이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이 두 번의 독해는 인용의 중복기입적인 독해로 불릴 만한 것이었다."(228쪽)

'인용의 중복기입적 독해'는 'palimpsest of citation'을 옮긴 것인데 '팔림세스트(palimpsest)'는 양피지에 지우고 다시 쓴 걸 말한다. 두 번 읽기가 인용의 거듭 쓴 양피지라는 것. 이제 이런 사전지식을 갖고서 아감벤은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 원고를 읽어보자고 제안한다. <남겨진 시간>의 표지에도 쓰인 수고의 제2테제이다.

끝에서 4행째부터 잘 보면 이렇게 씌어있다. "Dann ist uns wie jedem Geschlecht, das vor uns war, eine s c h w a c h e messianische Kraft mitgegeben."(때문에, 우리들에겐 앞선 모든 세대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도 약한 메시아적인 힘이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국역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는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세대와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함께 주어져 있는 것이고, 과거는 이 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332쪽)라고 번역된 부분이다.

수고본에서 알 수 있지만 's c h w a c h e'(weak; 약한)란 단어의 자간이 띄워져 있다. 어떤 인용가능성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한데, 메시아적 힘의 약함? 아감벤의 추정으로 "메시아적인 힘의 약함이 명료하게 이론화되어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의 텍스트에서이다." 그것은 바울이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고린도후서)가 그것이다. 바울은 간구한 끝에 주에게서 이런 계시(응답)를 얻는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12:9)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he gar dynamis en astheneia tele tai'이고, <남겨진 시간>의 역자는 "권능이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로 옮겼다. 영어로는 "power fulfills itself in weakness"이다. 그리스도의 권능이 '약함'에 있다고 하므로 바울은 흡족하여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으로는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리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의 강함이라."이고, 영어로는 "Therefore I take pleasure in infirmities, in reproaches, in necessities, in prosecutions, in distresses for the sake of the Messiah: for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이다.

물론 벤야민 참조한 성경을 독어본이었을 텐데, 루터의 번역은 이렇다고 한다. 'denn mein Kraft ist in den schwachen Mechtig.' 즉 'kraft(힘)'과 '약함(schwache)'이 모두 출현하고 있고, 또 대비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역사철학테제의 텍스트에서 바울 텍스트의 비밀스러운 존재야말로 자간을 비우는 것을 통하여 벤야민이 조심스럽게 제시하려고 했던 것이다."(230쪽) 그리고 이 발견을 아감벤은 자못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경험으로 기록한다.

벤야민에 대한 바울의 (가능한) 영향을 시사한 유일한 인물은 타우베스라고 한다(하지만 타우베스는 벤야민의 <신학-정치학 단편>을 로마서와 관련시키고 있을 따름이라고). 독일의 철학자 야콥 타우베스(Jacob Taubes, 1923-1987)를 말하며, 그의 <바울의 정치신학>(2004; 독어본1993)은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연 생전의 마지막 공개강의를 묶은 것이다(영어본으로는 150여 쪽의 얇은 책인데, 번역되면 좋지 않을까? 이번에 바울 관련서를 검색해봤지만 역시나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아감벤은 강의의 서두에서 타우베스를 추모하며 그 점을 상기시킨다. "우리들의 이 강의는 타우베스가 하이델베르크에서 행했던 강의로부터 11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메시아적 시간을 역사적 시간의 패러다임으로서 재해석하려는 시도이다."(14쪽) 참고로 아감벤의 강의는 1998년 10월 파리의 국제철학원에서 처음 행해졌다.

그럼, 다시 돌아와서 벤야민의 제2테제에서의 바울 인용이 시사해주는 바는 무엇인가? '역사철학테제'는 벤야민의 최후의 저작 중 하나이며 그의 메시아적 역사관이 일종의 유언적인 요약이라면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기계인형의 손을 비밀스럽게 이끄는 난쟁이 신학자"가 누구인가를 식별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리게 된다. 이미 답은 주어졌지만 아감벤은 몇 가지 '흔적'을 추가적으로 제시한다.

제5테제에서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빠르게 사라진다'(<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는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지나간다."로 옮겼다.) 그리고 마지막 제18테제에서 "메시아적 시간의 모델로서 전 인류사를 엄청난 단축 속에 요약하고 있는 지금의 때는 우주 속에서의 인간성의 역사의 그 형상과 철저하게 일치된다."("메시아적 시간의 모델로서 전 인류의 역사를 엄청난 축소판으로 요약하고 있는 지금시간은 우주 속에서 인류의 역사가 이루는 앞의 모습과 엄밀하게 일치한다.")에서 '지금의 때(Jetztzeit)'에 대한 분석 등이 추가적인 사례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서, 결론만은 말하자면,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의 어휘는 모두가 순수하게 바울적인 것이다."그리하여 "바울의 편지와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라는, 우리들의 전통에 있어서 메시아니즘의 최고의 두 텍스트가 2천 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에도 불구하고, 양자 모두 근원적인 위기 속에서 쓰여졌으며, 하나의 성좌배열적인 관계를 형성화고 있다는 공통된 사실로부터 우리드은 바로 오늘, 그 '독해가능성의 지금'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237쪽)

이 '지금'에 대한 분석은 보다 자세한 정리를 필요로 하지만 당장은 시간을 내기 어렵다. 남겨진 시간이 너무 적다...

08.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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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정체성(혹은 요즘 더 많이 떠들어대는 용어로는 '국가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며 어떤 기능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새로운 책이 나올 성싶지 않다. 다만, 보다 '대중적인' 접근을 시도한 책은 기대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짐작에 팀 에덴서의 <대중문화와 일상, 그리고 민족 정체성>(이후, 2008)이 그런 종류다. 찾아보니 책소개도 그렇게 돼 있다. "이 책은 민족 정체성에 대한 이론을 체계적으로 소개한다. 민족에 관한 지금까지의 이론들을 차근차근 정리하고 까다로운 ‘정체성’ 개념을 정리하는 데 필요한 근거자료들을 성실하게 모아 놓았다. 과거의 이론은 물론 최신의 논문 자료들까지 성실히 찾아놓은 덕분에 ‘민족’에 대한 최신 이론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특히 유용하다." 사실 그런 최신 이론에 관심이 없는 중고생들까지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우리가 기댈 건 똑똑한 중고생들 아닌가?).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08. 11. 29) 민족 정체성, 영화·車로 재생산되다

모든 나라를 하나로 묶는 세계화의 물결은 각 민족의 정체성을 약화시키기는커녕 더 강화시키지 않았을까? 끊임없는 격변 속에서도 어떻게 민족들은 고유의 색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의 저자는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 민족 정체성이 사회적 혹은 역사적 요인보다 대중문화, 일상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민족 정체성이란 다양한 문화요인들로 인해 끊임없이 변동하는 현재진행형 용어라고 주장한다. 책은 스펙터클하거나 놀랄 만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대중문화와 일상으로 민족 정체성이 배양되는 현상을 깊이 탐구한다.



저자는 민족을 둘러싼 다양성과 온갖 문화적 효과들(결국 민족 정체성의 기반이 되는 것들)이 문화요소들로 짜여진 거대한 문화적 매트릭스 안에서 구성된다고 말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문화 아이콘이 민족 정체성을 어떻게 재생산하고 변형시키는지, 영화 '브레이브하트', 롤스로이스 자동차, 영국의 밀레니엄 돔 등의 예를 통해 구체적으로 탐구한다.

롤스로이스와 애스턴마틴 등 영국 자동차들은 일견 사치스럽고 계급폐쇄적인, 혹은 쾌락주의적이고 도발적인(애스턴마틴은 제임스 본드와 이미지가 연결된다) 영국 민족의 한 단면을 형성해왔다. 하지만 1960년대 대중화된 새로운 영국의 아이콘 '미니'(자동차 모델)의 등장으로 자유분방함의 상징이 사회에 번져갔다. 저렴한 미니는 노동계층에 어필했고, 이전 영국의 민족 정체성을 또 다른 방향으로 진행시키는 요인이 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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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스코틀랜드인들의 민족 정체성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영화 '브레이브하트'를 꼽는다. 멜 깁슨이 감독과 주연을 맡은 이 할리우드 대작 영화는 스코틀랜드 독립투쟁사를 다뤘다. 영화가 상영되던 시기는 마침 스코틀랜드의 정체성이 새 전기를 맞는 중요한 시점이었다. 스코틀랜드 의회 설립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책은 이 영화가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되었고, 스코틀랜드인들이 신화와 역사의 사이에서 움직이는 이 영화의 스토리를 통해 어떻게 민족 정체성을 가다듬었는지 보여준다.

문화 지형 속에서 살아 숨쉬는 민족 정체성. 이것이 항상 진행형으로 변화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지금의 한반도에도 꽤나 유효한 개념이다. 10만원짜리 지폐에 들어갈 인물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갈등, 광복절과 건국절 논쟁에서 나타난 쟁점들이 모두 이 정체성 논의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양홍주기자)

08. 11. 29.

P.S. 정체성이란 주제와 관련하여 역시나 중고생도 읽을 만한 유익한 책은 데이비드 베레비의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에코리브르, 2007)이다. '정체성에 관한 과학'을 표방하는 책이다. 이 재미있는 책을 예전에 다 읽지 못해서 아쉬운데(찾아서 마저 읽어야겠다) 여하튼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것이 '편가리기'로 거부되는 시대에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를 알려주는 책. 다양한 연구 심리학 자료를 통해 인간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마음이 만들어내는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결과물임을 알려준다." 단, 저자는 실제적인 차별에 대한 반응으로서 생겨나는 '대타적 정체성'에 대해서는 덜 주목하는 게 아닌가란 의문도 든다. 그 역시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결과'라고 말하기엔 너무 쓰라린, 부당한 현실을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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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북리뷰를 미리 훑어보다가 관심을 좀 갖게 되는 책은 캐서린 스푸너의 <다크 컬쳐>(사문난적, 2008)이다. 고딕의 문화사를 다룬 책인 듯한데, 나름대로 희소하지 않나 싶다. 흠이라면 요즘 나오는 책들에 비해 분량이 좀 얇다는 것. 억지로 부피를 늘린 책들보다는 낫지만, 조금 싱겁다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다크'의 색감이 좀 엷은 게 아닐까 싶은 것. 실상은 읽어봐야 알겠다...

경향신문(08. 11. 29) 허락되지 않는 것들의 매력

2000년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처음 만나는 자유>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안젤리나 졸리. 그런데 트로피를 든 채 득의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스타일이 심상치 않았다. 새까만 붙임머리, 고딕풍의 베르사체 드레스…. 졸리는 할리우드 정상의 자리로 발돋움하는 순간 고스 스타일을 선택함으로써, 주류 스타이자 전위적인 아웃사이더라는 자신의 상반된 이미지를 모두 드러냈다.

애초 고딕(Gothic)이란 르네상스 사람들이 중세 건축을 야만적인 북유럽의 고트(Goth)족이 가져온 양식이라 비난했던 데서 시작된 표현이었다. <다크 컬처>(원제 Contemporary Gothic)는 소설, 건축, 영화, 패션, 음악 등을 아우르는 고딕 문화의 기원과 의미, 현대의 변형 등을 폭넓게 조망한다.

근대인들에게 고딕이란 이성의 전복이었다. 서구에서 가장 찬란한 문명을 이룩한 로마 문명을 멸망시킨 유목민이었기 때문이다. 말끔한 고전주의 양식 대신 뾰족한 아치, 기괴한 각도의 조형, 괴물 모양의 장식물 등으로 꾸며진 사트르트 대성당은 이성 대신 야성과 환상을 고취했다.

고딕은 복고주의지만, 그 소비자는 신흥자본가였다. 고딕 문학은 현재의 목을 조이고 개인과 사회의 진보를 방해하는 과거를 그렸고, 그러한 과거를 상품화하는 것이야말로 근대인의 몫이었다. 근대 프로테스탄트 독자들은 중세 후기 가톨릭을 혐오스러운 타자로 구성했고, 영국과 미국은 중동의 타자를 ‘문명화’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졌다.

현대 서구문화에서 고딕은 예상치 못한 구석에 숨어있다. 고딕은 잘 팔리기 때문이다. 여고생 버피의 뱀파이어 퇴치담을 그린 TV시리즈 <미녀와 뱀파이어>, 블록버스터 영화 <배트맨 비긴즈>, 록가수 마릴린 맨슨은 ‘10대 악마들’을 위한 고딕 상품이다.



고딕 인테리어는 세련된 주부의 사랑을 받고, 알렉산더 매퀸의 고딕풍 의상은 수많은 중저가 브랜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고딕의 역사는 줄곧 소비의 역사와 결부되어 왔다.” 자본이란 그것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의 생명을 빨아먹는 흡혈귀라는 마르크스의 비유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들어맞는 셈이다.

자본과 윤리, 하위 문화의 관계는 흥미롭다. 전자는 후자를 포섭하려들고 거의 성공하지만, 가끔 의도치 않은 실패를 경험하기도 한다. 고딕풍의 공포영화는 ‘섹스를 하면 죽는다’ ‘술과 마약을 해도 죽는다’는 교훈을 설파하지만, 폭력과 유혈의 쾌락은 검열 당국의 심기를 거스른다. 도중에 일어나는 사악한 행위들이 결말의 선의를 압도하는 것이다.

아무리 거나한 푸닥거리를 한다해도 이 ‘어둠의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고딕이 ‘개인과 집단의 불안’을 부인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어휘와 사전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캐슬’이라는 이름의 아파트, 교외에 자리한 고딕성당 풍의 모텔을 바라본다. “고딕에는 원본이 없다. …하나의 형식으로서 고딕은 언제나 위조에 관한 것이었다”는 저자의 말을 떠올린다면, 한국인이 경험하지 못한 서구의 중세를 위조하는 저 기괴한 건물의 유래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백승찬)

08. 11. 28.

P.S. 생각해보니 '고딕'에 관한 책은 2권짜리 두툼한 비평논문집을 포함해 여러 권 갖고 있다. 내년쯤에는 고딕 문학 작품들에 대한 강의를 하게 될 예정인지라 모처럼 들춰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국내엔 총서로까지 나오고 있는 고딕문학 작품집을 제외하면 건축과 영화(알다시피 팀 버튼이 독보적이다) 관련서들이 눈에 띈다...

아, 알고 보니 저자 스푸너는 고딕 전문가이고, 나도 그녀의 책을 한 권 이상 갖고 있다. <다크 컬쳐>(원제는 <현대의 고딕>) 외 다른 책들도 소개됨 직하다. 고딕은 잘 팔린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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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좋아 2008-12-04 15:32   좋아요 0 | URL
고딕이 건축양식만이 아니라 우리 문화 전반을 아우른다는 걸 이제야 눈뜨게 해준 책이 '다크 컬처'인데 로쟈 님의 글을 보니 고딕 문화에 대해 좀더 맥을 잡을 수 있네요.고맙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