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의 한줄'을 오랜만에 적어둔다. 아니 정확하게는 '로쟈의 한 단어'라고 해야겠다. 최근 번역돼 나온 <독일 비애극의 원천>(새물결, 2008)의 첫 페이지를 들춰보다가 발견한 '한 단어'이다. '인식비판적 서설'로 시작하는데, 이 대목은 벤야민 선집 6권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외>(길, 2008)에도 '인식비판적 서론'이라고 포함돼 있다. 각주에 보면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최성만/김유동 옮김으로 2008년 중반에 한길사에서 출간될 예정이다."라고 돼 있다. 출간은 좀 미뤄지는 듯한데, 이 '서론'은 최성만 교수가 맡은 부분이고 한길사의 양해를 얻어 수록한다고 밝히고 있다. 

 

벤야민이 이 서설/서론에서 제사(에피그라프)로 끌어오고 있는 것은 괴테의 '색채론 역사의 자료'('색채론의 역사에 관한 자료')이다('자료'이니까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국역본 <색채론>에는 빠져 있을 듯하다). 두 번역본에 약간 차이가 있는데, 일단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건 한 단어이다. 두 번역을 차례로 옮겨본다.

"지식에는 속이 없고, 반성에는 겉이 없어서 지식에서든 반성에서든 전체는 엮어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에서 어떻게든 일종의 전체성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학문을 필히 예술로서 사유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전체성을 보편적인 것이나 초월적인 것에서 찾아서는 안되고 예술이 언제나 전적으로 개개의 예술작품에서 스스로를 나타내듯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학문도 역시 매번 전적으로 각기 개별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바에서 입증되어야 한다."(새물결, 11쪽)

"전체라는 것은 지식에서든 성찰에서든 조립될 수 없는데, 그것은 지식에서는 내부가, 성찰에서는 외부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학문에서 모종의 전체성과 같은 것을 기대한다면 그 학문을 예술로서 사유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도 우리는 그 학문을 어떤 일반적인 것, 과도하게 넘쳐나는 것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되고, 예술이 각각의 개별 예술작품에서 재현되듯이 학문 역시 각각의 개별 대상에서 그때그때 온전히 입증되어야 할 것이다."(길, 145쪽)

말하자면, 이 대목은 벤야민 번역이 아니라 괴테 번역이고, 비교해서 읽어보다가 발견하게 된 건, 의아하게 생각한 건 강조한 두 단어의 차이다. 다른 부분들에서의 차이야 번역 문체상의 차이로 넘어갈 수 있지만 똑같은 단어를 '전체성'과 '학문'으로 다르게 옮길 수는 없을 것이다. 제3자 대조를 위해서 영역본을 찾아보니 이렇게 돼 있다.

Neither in knowledge nor in reflection can anything whole be put together, since in the former the internal is missing and in the latter the external; and so we must necessarily think of science as art if we expect to drive any kind of wholeness from it. Nor should we look for this in the general, the excessive, but, since art is always wholly represented in every individual work of art, so science ought to reveal itself completely in every individual object treated.(Verso판, 27쪽)

문제의 단어는 this(이것을)로 번역돼 있다. 짐작대로 지시대명사다(그건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에서도 마찬가지다). 국역본의 두 역자는 이 '이것'을 서로 다르게 본 것이다. 그렇다면 문맥상 무엇이어야 할까? 괴테가 이 대목에서 '기대하는' 것이 '전체성'이므로 '찾으려는' 것 역시 '전체성'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려나 이 대목의 번역은 어느 한쪽이 수정되어야 한다.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 의역/직역과도 무관하기 때문이다. '번역가의 과제'를 실행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08. 11. 07.

P.S. 참고로, 차봉희 편역, <현대사회와 예술>(문학과지성사, 1980)에도 '인식비평 서론'이 번역돼 있는데, 같은 대목이 이렇게 옮겨져 있다. "지식은 성찰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인 것이 파악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전자에서는 내적인 것이, 후자에서는 외적인 것이 빠져 있으므로, 어떤 유형으로든지간에 우리가 학문에서 전체성을 기대한다면, 학문을 필연적으로 예술로서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더구나 학문은 일반적인 것이나 전체적인 것 안에서 추구될 것이 아니라, 마치 예술이 늘 개개 예술 작품 속에서 구현되듯이, 학문도 역시 모든 개개의 분야에서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180쪽) 여기서도 선집에서와 마찬가지로 '학문'을 번역어로 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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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11-07 13:22   좋아요 0 | URL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Da im Wissen sowohl als in der Reflexion kein Ganzes zusammengebracht werden kann, weil jenem das Innre, dieser das Äußere fehlt, so müssen wir uns die Wissenschaft notwendig als Kunst denken, wenn wir von ihr irgend eine Art von Ganzheit erwarten. Und zwar haben wir diese nicht im Allgemeinen, im Überschwänglichen zu suchen, sondern, wie die unst sich immer ganz in jedem einzelnen Kunstwerk darstellt, so sollte die Wissenschaft sich als jedesmal ganz in jedem einzelnen Behandelten erweisen.

문제 삼으신 곳은 독일어에서도 역시 지시대명사 "diese"로 언급되고 있는 부분인데요, 예를 들어 이 부분이 첫 문장에서처럼 "jenem(Wissen)"과 "dieser(Reflexion)"로ㅡ두 명사의 위치와 성이ㅡ확연히 구분될 수 있는 문맥이었다면 그것이 "전체성(Ganzheit)"을 가리키는 것인지 "학문(Wissenschaft)"를 가리키는 것인지 좀 더 확연히 드러났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 두 단어 모두 여성 명사라 "diese"가 지시하는 것을 명사의 성으로 따져보려는 노력도 무위로 돌아가는군요.^^;

다만 1) 문법적인 관점에서 "diese"가 그 이전 문장 안에서 가장 나중에 등장했던 단어를 받는 것이라는 원칙을 상기해본다면, 그것이 가리키는 말은 "전체성(Ganzheit)" 또는 "모종의 전체성(eine Art von Ganzheit)"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2) 내용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학문 역시 예술의 방식을 따라 일반적인 것(das Allgemeine)과 과도한 것(das Überschwängliche) 안에서가 아니라 개별적인(einzelnen) 것 안에서 전체성을 찾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으므로, 역시나 "diese"는 "전체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두 번째 번역에서 "학문"으로 옮겨진 목적어를 '전체성을 사유하고자 하는 학문' 정도로 이해한다면 내용적인 면에서 크게 어그러질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축자적인 면을 고려하는 적확한 번역을 생각할 때는 두 번째 번역이 수정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로쟈 2008-11-07 23:26   좋아요 0 | URL
네, 짐작대로군요. 러시아어에서도 '전체성'과 '학문'이 모두 여성명사입니다.^^;

2009-03-03 0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03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랑구 2009-03-10 01:35   좋아요 0 | URL
로자님, 아직 책을 구입하지 않았으면 한 권 부쳐드리고 싶습니다.
주소 좀 가르쳐 주세요. 학문과 전체성 얘기의 힌트에 감사하는 마음에서요.
그리고 지난 번 글은 꼭 '비밀 댓글'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됐네요.
체크하는 난이 있기에 어리버리 체크하는 바람에..

최근에 제가 학생들과 스터디하면서 아감벤(남겨진 시간), 바디우(사도 바울), 랑시에르(미학안의..), 지젝(죽은 신..)의 글들을 죽 읽고 있는데 재미있네요. 벤야민이 간섭되고 있는 글들이고요. 그들이 서로 비슷한 측면을 공유하면서도 미세한 차이들을 드러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차이가 우리에게도 와 닿아야하는데, 그 점은 계속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서양 사상가들을 허겁지겁 따라가기에 바쁜 우리, 그런 우리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로쟈님도 그런 쪽으로 생각을 좀 해보시길 권합니다.

아 참, 기술복제도 최근에 로쟈님 지적을 숙고하면서 좀 손질을 봤습니다. 그에 대해서도 감사^^ 그 때 제가 반응을 했었죠. 여하튼...

로쟈 2009-03-10 06:20   좋아요 0 | URL
아, 책은 바로 구입했습니다.^^ 내달에나 읽어볼 듯합니다. 여러 철학자들의 벤야민 커넥션에 대해선 좋은 글을 써주시기를!^^
 

어제오늘 '오바마 혁명'으로 들떠 있지만, 내일 11월 7일은 러시아혁명 기념일이다. '10월 혁명'이라고 보통 불리지만, 그건 구력으로 1917년 10월 25일에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고 요즘으로 신력으로는 11월 7일이다(그러니까 신력으로는 '11월 혁명'이다). 러시아에서는 몇년 전부터 국경일에서도 제외됐지만, 다행히 이를 기념할 만한 책이 올해도 출간됐다. 프레더릭 코니의 <10월 혁명>(책세상, 2008)이 그것이다. 2004년에 나온 책이니까 '고전'이라기보다는 '최신' 연구서다. 부제는 '볼셰비키 혁명의 기억과 형성'. 나는 주초에 책을 구입했지만 아직 읽어볼 틈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거를 수는 없어서 러시아 혁명에 관한 읽기 리스트라도 만들어둔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들로 골랐다(기대만큼 많이 소개되진 않았다. 절판된 책들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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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혁명- 볼셰비키 혁명의 기억과 형성
프레더릭 C. 코니 지음, 박원용 옮김 / 책세상 / 2008년 10월
23,000원 → 20,7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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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혁명의 시간- 러시아 혁명 120일 결단의 순간들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지음, 류한수 옮김 / 교양인 / 2008년 3월
29,000원 → 26,100원(10%할인) / 마일리지 1,450원(5% 적립)
2008년 11월 06일에 저장
구판절판
지젝이 만난 레닌- 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슬라보예 지젝.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닌 외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08년 5월
32,000원 → 28,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600원(5% 적립)
2008년 11월 06일에 저장
절판
레닌이 있는 풍경
이상엽 사진.글 / 산책자 / 2007년 11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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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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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독일 비애극의 원천>(새물결, 2008)이 출간됐다(원래는 한길사에서도 출간한다고 예고돼 있었는데 그건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아직 별다른 리뷰들이 뜨지 않아 그냥 마이리스트만을 만들어둔다. 벤야민에 관한 리스트는 뽑아놓은 적이 있기 때문에 대신 바로크 관련서들을 찾았다. '독일 비애극'이 주로 바로크 드라마들이기 때문이다(러시아어본의 제목은 아예 <독일 바로크 드라마의 기원>이다). 바로크 관련서라면 음악, 미술, 건축 등이 떠오른다. 바로크 미술에 대해서는 이번에 열리는 '서양미술거장전'이 좋은 볼거리가 되겠다...


13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독일 비애극의 원천
발터 벤야민 지음, 조만영 옮김 / 새물결 / 2008년 11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2008년 11월 04일에 저장
품절
바로크
신정아 지음 / 살림 / 2004년 11월
9,800원 → 8,82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7월 7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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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의 꿈 : 1600-1750년 사이의 건축
프레데릭 다사스 지음 / 시공사 / 2000년 8월
7,000원 → 6,300원(10%할인) / 마일리지 3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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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바로크, 어떻게 이해할까?
토마스 R. 호프만 지음, 이주영 옮김 / 미술문화 / 2007년 9월
12,000원 → 12,000원(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7월 8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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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사랑 2008-11-05 11:12   좋아요 0 | URL
한길사에서는 현재 편집중에 있는데 곧 출간될 것으로 보입니다. 번역자는 김유동(강원대 교수, 독문학)과 최성만(이화여대 교수, 독문학) 선생입니다. 특히 김유동 교수는 독일에서 박사학위논문으로 "독일 비애극의 원천"으로 써서 이 분야의 진정한 탁월한 연구자입니다. 역주가 아주 깐깐하고 풍부하게 달려있다고 들었습니다. 기대해보죠.

geistes 2008-11-05 11:37   좋아요 0 | URL
김유동교수는 서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혹 정말 독일에서 논문을 썼다 하더라도 '독일에서 논문으로 써서...진정한 탁월한 연구자'라는 말은 논리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문제가 있네요.

하지만 '새물결'이라는 말만 들어도 짜증이 확 나긴 하네요. 동문선과 함께 경계하는 출판사 중 하나입니다.

로쟈 2008-11-05 18:45   좋아요 0 | URL
동문선보다는 그래도 나은데요.^^

책사랑 2008-11-05 16:53   좋아요 0 | URL
물론 전공자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번역을 보장하지는 않지요. 그러나 수년 간 연구해온 성과는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알려드리고자 한 것은 그래도 전공자에 의한 번역이 그나마 좋은 번역을 위한 최소의 조건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예, 서울대에서 학위를 하신 듯 합니다. 알아보아야 할 듯... 뭐, 그것이 번역의 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요.
그리고 벤야민 전공자라고 하더라도 벤야민 사상의 스펙트럼이 워낙 넓어서 국내 벤야민 전공자들도 세부 분야를 전공했죠. 그런 점에서 김유동 교수는 바로 "독일 비애극의 원천"으로 학위를 해서 '진정한 탁월한 연구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 점을 믿고 번역을 기다려보자는 취지에서... 이해를 부탁합니다.

로쟈 2008-11-05 18:44   좋아요 0 | URL
아마 다른 분과 혼동하신 것 같습니다. 김유동 교수는 아도르노 전공자이고, <아도르노 사상> 등의 저작을 갖고 있습니다. <계몽의 변증법>의 역자이기도 하구요. 연구와 번역은 성격이 좀 다른데, 아무튼 이름을 걸고 나오는 책인 만큼 기대는 해봅니다...

책사랑 2008-11-05 19:17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경상대 독문과 김유동 교수가 아도르노 전공자이시고, 제가 말씀드린 김유동 교수는 지난 해인가 강원대 독문과 교수로 임용된 동명이인의 다른 분입니다. 제가 두 분을 모두 알기에 말씀드립니다.

로쟈 2008-11-05 21:11   좋아요 0 | URL
동명이인이었나요?!..

geistes 2008-11-06 00:15   좋아요 0 | URL
호기심에 찾아봤는데 정말 강원대독문과에 김유동이란 분이 계시네요.
국회도서관에 검색해보니 그 분이 쓰신 것으로 추정되는--경상대 김유동교수도 비슷한 '업계'종사자이시니 헷갈립니다^^--벤야민 논문이 2편정도 있네요.
박사학위를 어디서, 무엇으로 했는지, 내신 책도 없는 것 같고, 앞으로 기대를 해봐야겠군요. 근데 윗분은 저분을 '진정한 탁월한 전공자'로 인정해주시는 것을 보니 저 분이 쓰신 박사학위논문을 읽어보셨나 보군요.
번역에 나서신 분이 그 분이라면 한국에서 만들어내는 자신의 첫번째 학문적 업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최x만교수님은 새물결의 벤야민 번역에 분개하시던데, 여하튼 새물결의 번역은 믿음이 안갑니다. 책값만 얄굿게 비싸구요.

바벨의도서관 2008-11-06 13:11   좋아요 0 | URL
geistes 님, 이제는 물론 확인하셨겠지만, "서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아도르노 전공자로서 경상대에 재직 중이신 김유동 교수님과 독일에서 [독일 비극의 원천]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책사랑 님 말씀대로- 강원대에 재직하고 계시는 김유동 교수님은 다를 뿐 아니라, 이 김유동 교수님은 벤야민 전공 이전에 [독일 비극의 원천] 번역의 적임자인 게지요.

geistes 님의 말("근데 윗분은 저분을 '진정한 탁월한 전공자'로 인정해주시는 것을 보니 저 분이 쓰신 박사학위논문을 읽어보셨나 보군요.")에는 솔직히 비아냥이 느껴집니다. 박사학위논문을 읽어보지 않아도 그런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제일 간단한 방법은, 벤야민 전공자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지의 여부를 알면 됩니다(국내의 벤야민 전공자들이 많지 않아, 저도 대부분의 전공자들(강사와 교수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책사랑 님이 김유동 교수님의 박사학위논문을 읽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진정[…] 탁월한 연구자"라는 평가는 필경 이전에 한길사에 계실 때 알게 된 최성만 교수님을 통해 접하게된 평가를 그대로 반복한 것일 테지요. 그러나 그 평가의 근거로 내세운 "독일에서 박사학위논문으로 "독일 비애극의 원천"으로 써서"라는 표현이 그렇게 다그칠 정도의 문제인 지는 모르겠습니다. [독일 비극의 원천]에 대해 박사 학위 논문을 썼으니 국내에서는 흔치 않은 이 분야의 전문가다 정도로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말일 텐데 말입니다.

......

그러잖아도 그제 김유동 교수님과 이 난데없는 번역본 때문에 통화했습니다. 최성만 교수님이 이미 전화로 알려주었다면서, "이런 책에는 번역본이 여러 개 있는 것이 좋지요"라고 말하며 웃으시더군요. 물론 진짜로 웃을 기분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선점 효과의 문제가 있으니까요).

geistes 2008-11-06 18:50   좋아요 0 | URL
책사랑님과 카이로스님은 출판계에서 일하시는 것 같고, 서로 일면식이 있으신 분 같습니다.
뭐 대단한 논쟁을 벌이자는 일도 아니니 간략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책사랑님이 가지고 계신, 아니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몇가지 편견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특히 학문의 경우, 어떠한 근거로 그 사람의 업적을 평가해야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해외학위의 경우 한국에서 검증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수사회를 봐도 동료교수가 해외에서 학위했다고 하면, 같은 전공자일 경우 그것을 구해 읽어보는게 '업계' 윤리상 당연한 학문적, 인정적 윤리(!)일텐데 그런 것조차 무시될 경우가 태반입니다. 지도학생이 지도교수가 무슨 논문을, 저작을 썼는지 모르는, 그리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경우가, 동료가 쓴 책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이 대부분은 한국에서 논문을 쓴 이에 대한, 한국에서 한국어로 공부를 하는 이에 대한 편견에 쌓인 무지 도는 무관심에 기인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나마 한국에서 나온 학위, 학술지 논문은 논문 쓸 때 찾아나 보지요, 해외에서 나온 논문은 거의 체면치레로 참고문헌에 올려놓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강원대 김유동 교수님의 학문적 업적이 정말 업계에서 인정받는다면, 그래서 '진정한 탁월한 연구자'라는 평가를 내릴려면, 동료 학자들의 구술로 된 인정이 아니라 평가주체인 동료학자가 쓴 논문을 읽어보면 됩니다. 그 논문이 학문적 인정을 받는다면 동료학자가 읽었을테고 참고문헌으로 인용을 했겠지요. 이 정도는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사항입니다. 이 정도만 상식적으로 확인을 하시고 기획이나 편집을 임하신다면, 뭐랄까요, 동료학자들의 입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물론 가장 편하고 권위있는 방식이 동료들의 평가에 의한 것이라는 거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편집인은 책에 가장 적합한 연구자를 물색하고 확인하고 검증할 책임이 있는 역할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학자에 대한 평가는 학자가 내리는게 다르고, 기자가, 출판편집자가 내리는 평가는 또 다른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한 분야의 전문가라면, 특히 인문학의 전문가라면 당연히 자국어로 된 연구서나 번역, 논문으로 평가해야 되지 않을까요. 소문으로만 떠도는 해외 학위로 무엇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제가 국회도서관에서 그 분의 논문을 찾아본 것은--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 분이 자신의 전공분야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교수까지 오르신 분이 연구서 하나 없고, 학술지 논문이 두편 정도밖에 안된다는 사실이--물론 더 되는데 제가 못 확인한 것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의외로 여겨집니다. 저는 그 분이 동료들사이의 평가 외에는 아직 벤야민 전공학자로서 검증이 되지 않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 분의 해외학위 하나로 전문분야의 탁월한 성취 운운하는 것이 나이브하다고 생각하는 제 판단이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일까요.

저는 오히려 한길사 번역이 나오면, 새물결 번역과 비교해 진정 번역자의 전문가로서의 검증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학위여부가 아니라 번역서의 번역 정도가 진정 학자로서의 진검승부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아무런 가치판단을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제가 자주 들르는 싸이트에 나름 지적권위를 가진 한 분은 새물결 번역을 소개하면서 벤야민의 사상이 너무 난해해서 '공들인 번역본을 가지고도 읽어낼 수가 없다'라고 평하시더군요. 저는 직접 두 번역으로 평가해보려 합니다.

여하튼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geistes 2008-11-06 14:35   좋아요 0 | URL
그리고 제가 최성만교수님께 벤야민 번역에 대한 분개--아케이드프로젝트등에 대한--를 우연히 낀 술자리에서 사담으로 들었던게 2005년 초봄이었는데 벌써 3년반도 훨씬 넘었습니다. 물론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겠지만 솔직히 이젠 그런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출판돼나온 책으로만 평가하자 싶습니다.

바벨의도서관 2008-11-10 15:58   좋아요 0 | URL
geistes 님, 답글 잘 읽었습니다. 이상하게 위의 글에는 답글이 달리지 않네요. 며칠 동안 답글을 못 단 이유입니다. 오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글에 딸린 '댓글달기'를 눌러보니 여기는 열리네요.

전에 상당히 큰 규모의 인문사회과학 출판사 편집부에서 한동안 일했지만, 책사랑 님과는 일면식도 없습니다. 그분이 작년 말에 이곳, 로쟈 님의 '북'로그에서 자기의 이력을 간단히 언급한 것을 통해 알 뿐입니다.

로쟈 2008-11-06 23:30   좋아요 0 | URL
설왕설래가 많은 듯한데, 책이 출간되면 다 해명될 수 있겠죠...

lefebvre 2008-11-07 11:55   좋아요 0 | URL
흥미로운 얘기들이 오고갔었군요! 저도 호기심에 강원대 김유동 교수님의 박사학위 논문을 찾아봤더니 논문 제목은 "Walter Benjamins Trauerspielbuch und das barocke Trauerspiel: Rezeption, Konstellation und eine raumbezogene Lektüre"이네요. 지도교수는 Klaus Garber인 듯하고('-인 듯'한 이유는 감사의 말을 보내곤 있는데 지도했다 안 했다는 분명히 명시되어 있지 않아서. 참고문헌을 보니 가버 교수의 벤야민 연구서 2권이 있기는 합니다만), 2004년에 출판된 걸 보니 굉장히 빨리 국내에서 교수자리를 차지하셨네요! 단 4년만에! ㅎㅎㅎ 아참 학교는 처음 들어보는 대학이네요. 오스나브뤽대학(Universität Osnabrück). 하노버라는 도시로 유명한 니더작센 주의 또 다른 도시 오스나브뤽에 있는 공립학교라고......

로쟈 2008-11-07 23:27   좋아요 0 | URL
조사가 확실하네요.^^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 관한 김교수의 논문을 읽어봤는데, '서술구조'만 다루고 있어서 좀 아쉽더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11-08 16:08   좋아요 0 | URL
오스나브뤽은 경제사에 나오는 한자동맹의 일원인 상업도시로 유명했는데 여기서 일생을 보낸 학자 유스투스 뫼자는 헤르더와 괴테에게도 영향을 준 인물입니다.독일 낭만주의의 주요 인사 중 한 명이지요.괴테의 <시와 진실> 13장 끝무렵에 이 도시와 뫼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읽어보세요.그다지 길게 나오지는 않습니다.
독일어 잘하는 사람들 부러워...저는 이름만 독일어지 단어 몇개 밖에 몰라요.

로쟈 2008-11-08 16:53   좋아요 0 | URL
그 몇 안되는 단어에 '오스나브뤽'도 들어가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11-08 17:25   좋아요 0 | URL
고유명사는 꽤 많이 안답니다.일반명사는 안되지만요.하하하...
 

아침에 주간지를 읽느라고 신문은 챙겨보지 못했는데, 경향신문에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도서출판b, 2008)의 저자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책에 대한 소개는 며칠 전에 스크랩해놓았고(http://blog.aladin.co.kr/mramor/2378599), 내친 김에 인터뷰 기사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8. 11. 03) "고착화된 시스템에 우리 문학 갇혀 있다”

“황석영 작가의 최근작들은 수준 미달인데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이름값 덕에 무조건 높은 평가를 받고 있어요.”

문학평론가 조영일씨(35·사진)가 최근 펴낸 첫 비평집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도서출판b)에서 작가 황석영씨를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그동안 인터넷 공간을 통해 발표해온 글들을 모은 이 책에는 우리 문학을 향한 쓴소리로 가득하다.



조씨는 2006년 <근대문학의 종언>을 비롯해 <세계 공화국으로>, <역사와 반복> 등 가라타니 고진(67)의 저서를 꾸준히 번역해 소개해온 ‘가라타니 전문가’다. 가라타니 고진은 2004년 겨울 ‘문학동네’에 게재된 자신의 강연문 <근대문학의 종언>을 통해 한국문학의 급격한 영향력 상실을 지적했고, ‘한국문학의 위기’ 논쟁을 불러일으킨 일본의 문학비평가. 조영일씨는 이번 비평집 제목에 가라타니의 이름을 빌렸지만, 자신의 잣대로 국내의 작가와 비평가를 포함해 한국문단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세웠다.

<근대문학의 종언> 후 4년이 지났지만 이 시대의 한국문학은 문제를 해결했다기보다 단지 회피하고 있을 뿐입니다. 제가 가라타니 고진에 천착하는 이유도 한국에 가라타니 고진만한 비평가가 없기 때문이죠. 책 제목에 그의 이름을 내세운 것도 폐쇄적인 한국문단에 이질적 요소를 집어넣어 그것을 깨보자는 의도입니다.”

그는 우리 문학이 제도화되면서 스스로 그 안에 갇히고 말았다며 고착화된 문학 시스템을 우려했다. “ ‘창작과비평’, ‘문학동네’, ‘문학과사회’ 등 유력 문예지와 출판사 위주로 편성된 시스템으로는 새로운 세대의 문화운동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저는 젊은 작가나 비평가들이 더 딱합니다. 새로운 문학을 말하면서 기존 시스템에 속할 생각만 하고 시스템 내부에 들어가면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해요.”



인터넷을 통해 자유롭게 쓰고 싶은 글을 써왔기 때문일까. 그는 문단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한국문학의 르네상스’를 말하는 작가 황석영씨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 ‘국민작가’라는 월계관 뒤에 숨어 입담으로 승부하고 있습니다. <객지>, <한씨연대기> 등 초기 작품은 굉장히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오랜 외국 생활 뒤에 쓴 <오래된 정원> 이후의 작품들은 솔직히 수준 미달인데, ‘황석영’이라는 이름의 후광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신작 <바리데기>가 작품으로선 실패인데, 문단의 찬사를 받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에겐 성역이 없다. 비평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에 대해서도 ‘비평의 노년’이라며 “한국문학의 위기에 대해 객관적 평가 없이 낙관론에 젖어 있다”고 비판했다. “비평가 백낙청 선생은 문단의 어른이십니다. 어른이니까 자꾸 과거를 돌아보고 자기가 쌓아올린 것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현재를 바라보려 합니다. 일부 신세대 유명 작가들을 ‘한국문학의 보람’이라 칭하시는데, 보람은 어떤 일을 한 뒤에 회고를 하는 것이죠. 앞을 보지 않고 현실에 자족함이 안타깝습니다.”

그는 자정능력을 상실한 우리 문단의 시스템 문제를 해결할 방안도 제시했다. “최근 조경란씨 소설과 관련, 표절 의혹을 덮고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문단 내부의 문제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사회적 발언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죠. 젊은 사람들이 돌파구를 찾아야 합니다. 새로운 문예지와 동인지의 등장이 필요해요. 그런데 젊은 작가들은 신춘문예 등단의 출세코스를 밟으려고만 하니….”

그는 동인지를 낼 계획이라고 했다. 현재 운영 중인 인터넷 카페 ‘비평고원’에 연재한 글들을 모아 올해 말 무크지 형태로 낸다. “계속 인터넷 글쓰기를 통해 비평작업을 하겠습니다. 제 문제제기에 대해 문단이 귀 닫지 않기를 바랍니다.”(이영경기자)

08. 11. 03.

P.S. 황석영의 <바리데기>에 대한 저자의 비판에는 십분 동의한다(많은 비평가들이 그럴 테지만 그들은 대놓고 말하지 않는다). 한편, 카페 '비평고원'에는 나도 발을 담그고 있는데, 요즘은 좀 뜸하게 활동했다. 흠, 이러다가 자아 비판을 해야 하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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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08-11-03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바리데기를 읽고 대체 뭐에 그토록 감동을 받았는지 의아했죠. 하지만 제가 제대로 못느끼는거라고 셀프플레임을 해버렸는데. 다른 시각이 있고, 그것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조차 없는 문단이란. 자아비판, 섬짓한데요^^

로쟈 2008-11-05 07:03   좋아요 0 | URL
저는 용두사미가 돼버린 소설로 읽었습니다. 기획은 거창하지만 마무리가 따르지 않는. 자아비판은 서재에서도 해야 하는데, 당체 글을 제대로 쓸 만한 짬을 못 내고 있어서요...--;

노이에자이트 2008-11-04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서점에서 선 채로 통독했는데 되게 재밌어요.일본에선 윤흥길의 <장마>가 황석영의 소설보다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해요.황석영 씨는 자기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고 나카카미 겐지를 우익이라고 혹평했다는 이야기도 있고...그리고 문지나 창비에서는 가라타니 번역서가 한권도 없다는 것도 지적했어요.

로쟈 2008-11-05 07:01   좋아요 0 | URL
반 이상은 가페 비평고원에서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나의왼발 2008-11-05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리도 죽고 철학도 죽고 신학도 죽고 예술도 죽고 문학도 죽고 인간도 죽고 역사도 죽고 정치도 죽고 죽고 죽고 죽고 죽고... 죽음의 시대

로쟈 2008-11-06 23:31   좋아요 0 | URL
'종언'은 죽음처럼 부정적인 것만 아니어서 '완성'이란 의미도 갖습니다. 정년퇴임 같은 것이죠...

쉽싸리 2008-11-07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리데기가 그렇군요.비판적인 얘기를 들은게 없어서. 찾아보면 있었겠지만,,
바리데기 읽으면서 결말이 허무하다. 그냥 다 아우르려하는구나 정도 생각이 들었던것 같네요.

로쟈 2008-11-07 23:29   좋아요 0 | URL
기대만큼의 작품들을 쓰고 있진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달 <고교 독서평설>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세계화시대 언어의 운명과 관련한 몇 가지 이슈를 짚어본 것이다. 타이틀과 소제목은 편집부에서 붙인 것이며 글의 일부 내용은 '거꾸로 바벨탑 이야기'(http://blog.aladin.co.kr/mramor/2341396)에서 따왔다. 알고 보면, 두 글은 거의 같은 시기에 작성된 것이다.    

고교 독서평설(08년 11월호) 세계 공통 언어, 과연 필요한가?

바벨탑 이후 - 지구상엔 왜 이렇게 많은 언어들이 생겨났을까?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보자. “처음 세상에는 하나의 언어만 있었고, 단어도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때 사람들은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바빌로니아의 어느 평야에 정착하게 되었고, 자신들의 이름을 떨치기 위해 하늘까지 닿을 탑을 쌓기 시작했다. 잘 아는 대로 이때 여호와가 등장한다. 여호와는 사람들이 하는 짓을 보고서 분노했다. “저들은 한 민족이며 하나의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저들이 이런 일을 시작하였으니 앞으로 마음만 먹으면 해내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가서 저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여호와가 언어를 혼잡하게 하자, 사람들은 서로 소통하지 못해서 사방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이것이 언어의 기원에 대한, 좀 더 구체적으로는 언어 다양성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다.

“지구상에는 왜 이렇게 많은 언어들이 생겨났을까?”라는 의문에 나름대로 답해 주는 이 이야기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는 바벨탑 이전과 그 이후로 구분될 수 있다. 적어도 언어에 관한 한 말이다. ‘바벨탑 이전’이란 모든 인류가 단 하나의 언어, 하나의 ‘보편 언어’를 통해 서로 소통할 수 있었던 시대를 말한다. 그리고 ‘바벨탑 이후’란 인간의 오만에 대한 신의 징벌이 있은 뒤, 너무도 많은 언어들이 생겨나서 서로 소통할 수 없게 된 시대를 뜻한다. 물론 언어의 다양성은 어느 한순간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이루어진 언어적 변화의 산물이다. 그 결과 인류는 불행해졌을까?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서 오해와 반목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른바 ‘바벨탑 이후’에 인간의 언어는 분화에 분화를 거듭하였고, 현재 지구상에는 최소로 잡아도 5,000개가량의 언어가 제1언어로 사용되고 있다. 한 공동체 내에서 여러 언어가 공용되는 것을 ‘다언어적 상황’이라고 한다면, 현재의 지구 공동체 또는 지구촌은 그러한 상황의 전형적인 사례다. 아니, 인류가 살아온 세계는 언제나 ‘다언어적 세계’였다. 우리가 여기서 갖게 되는 의문은 이런 것이다. 이러한 다언어적 상황에서 ‘보편성’을 추구하는 세계시민주의, 혹은 세계주의의 이상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먼저 고민했던 폴란드의 한 안과 의사의 이야기는 참고할 만하다.

세계어 - 에스페란토의 탄생
폴란드의 옛 도시 비알리스토크에 자멘호프(1859~1917)라는 유태계 안과 의사가 살았다. 그가 태어난 비알리스토크에는 러시아 인, 폴란드 인, 게르만 인 그리고 히브리 인의 4개 민족이 살고 있었는데,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했기에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자멘호프는 이러한 다언어적 상황이 인간을 서로 분리시키고 적대적 관계로 만드는 주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인간은 한 형제라고 믿은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창안해 냈다. 그것이 1887년에 나온 에스페란토다.

사실 그가 살았던 19세기는 국민 국가의 정치적·문화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세계시민의식이 성장하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세계 공통 언어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새로운 인공 언어를 창안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자멘호프의 에스페란토는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경우로, 유럽 전역에서 폭발적인 성원과 지지를 받았다. 에스페란토 잡지가 창간되고 많은 문학 작품이 에스페란토로 번역되었다. 우리의 경우도 한국 근대 시사(詩史)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김억(1896~?)의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1921)가 에스페란토로 번역된 서양 시들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것이라고 하니, 에스페란토 열풍에서 비껴 나 있지 않다(참고로, 국내에도 에스페란토 사전이 발간되어 있으며, 1994년에는 제79차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됐다.). 

이상주의자였던 자멘호프는 에스페란토의 활용이 각 지역과 국가에 속한 개인들의 세계시민적 공동체 의식을 고취시키고, 결과적으로는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이룩하는 데 기여하기를 희망했다. 에스페란토의 말뜻 자체가 ‘희망을 가진 자’인 것은 그의 이러한 바람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그 자신은 1914년 제10회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 참석을 위해 파리로 향하던 중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는 것을 목격하였고, 전 유럽이 전쟁의 도가니로 변화하는 광경에 큰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이 상처로 인하여 전쟁이 끝나기도 전인 1917년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이러한 생애는 이상으로서의 세계어가 놓여 있는 오늘날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자멘호프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1905년 프랑스에서 제1차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가 개최되었고, 또 1908년에는 세계 에스페란토 협회가 결성되면서 세계적인 보급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에는 전 세계적으로 200만 명이 에스페란토로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에스페란토는 아직 세계 공통 언어로서의 위상을 얻기에 역부족이며, 공식적으로 그런 대우를 받고 있지도 못하다. 사실, 에스페란토 자체가 각 국가어로부터 거리를 둔 중립적인 언어를 표방했지만, 가장 주요한 어원은 라틴 어, 에스파냐 어, 프랑스 어, 독일어 그리고 영어 등이고, 그런 탓에 동아시아의 아이들은 유럽과 미국의 아이들보다 배우는 데 시간이 두 배 정도 더 소요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그런 까닭에 자멘호프의 기대와 달리 오늘날 현실적으로 세계어에 근접해 있는 언어는 ‘국제어’라 불리기도 하는 패권 국가들의 언어다.



영어의 힘 - 소수 언어의 종말이 다가온다
현재 지구상에는 약 5,000개의 언어가 남아 있다고 했지만, 이 숫자는 이미 상당수가 사라지고 남은 언어의 숫자다. 언어학자들의 전망에 따르면, 앞으로 21세기에만 이 중 절반가량의 언어가 더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평균 2주에 1개꼴로 언어가 사라지는 셈이 된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200년 이내에 200개 정도의 언어만이 남게 될 것이라고도 한다. 이 200이란 숫자가 국가의 수와 대략 일치한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앞으로 국가어 외의 소수 언어는 대부분 소실될 것이라는 게 언어학자들의 예측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국가어들의 운명 또한 장담할 수 없다. 현재와 같은 정치적·경제적 세계화 추세가 강화될수록, 국민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소통될 수 있는 세계어나 국제어에 대한 요구도 점차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가장 유력한 세계어의 후보가 현재로선 단연 영어다. 이미 현실에서 많은 나라가 영어를 국가어로 채택하였고, 또 전 세계적으로는 제2언어, 제3언어로 급속하게 확산되어 가고 있다. 그리하여 능통한 영어 사용자가 세계적으로 18억 명에 이르며, 영어 학습자 수가 세계 인구의 3분의 1에 육박한다는 통계도 나오고 있다. 이만하면 영어와 함께 ‘바벨탑 이전’으로 회귀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일로 비친다.

하지만 그 ‘회귀’는 바벨탑을 쌓은 인간에 대한 신의 분노와 징벌만큼이나 폭력적인 과정을 수반한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중세 때만 하더라도 앵글로-색슨의 한 부족어였던 영어가 어떻게 세계적인 언어로 성장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언어학자 앤드류 달비가 <언어의 종말>에서 지적한 내용에 따르면, 영어와 과거 로마 제국의 공용어였던 라틴 어의 확산 과정에는 세 가지 유사점이 있다. 이 두 언어의 ‘제국주의’는, 첫째로 식민화의 결과로 비롯되었다. 로마와 마찬가지로 영국은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에 걸친 방대한 식민지를 경영했고, 영어는 식민지 이주자들의 유일한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 공통 언어, 곧 모국어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상호 이해를 위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뜻함)였다.

둘째로 제국과 속국 사이의 관계가 불러온 결과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제국의 속국에서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자기 발전과 부(富)를 얻는 최선의 경로는 영어를 아는 것이었다. 고위 관리가 되거나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적이었고, 모든 고등 교육은 영어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인도처럼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국가들에만 한정된 사례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영어는 여러 사회적 특권에 대한 진입 장벽으로 간주된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영어 실력은 제도화된 문화 자본이며, 이를 갖지 못한 집단으로부터 능력과 성공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강력한 문화 재생산의 기제(機制,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의 작용이나 원리)다.” ‘세계어’이기 이전에 영어는 ‘제국의 언어’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이러한 언어 제국주의의 발생은 원거리 교

역, 특히 해상 교역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영어로 이루어지는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영어와 영어의 친척어인 피진어(pidgin, 비즈니스의 중국식 발음으로, 주로 상거래에 사용되며 문법이 간략화되고 어휘가 극도로 제한된 영어를 말함)는 점점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사정은 ‘세계는 평평하다’고도 말해지는 오늘날도 예외가 아니다. 영어는 무엇보다도 비즈니스 언어로서 널리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언어가 몇몇 언어로, 특히 영어로 집중되는 현실의 뒷면에서는, 소수 언어들의 소실과 언어 다양성의 상실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은 이미 지적한 대로다. 그리고 앞으로 ‘언어 전쟁’, 개별 국가어와 영어와의 전쟁 또한 더욱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한국어가 사라지게 될는지도 모른다. 이미 10년 전인 1998년 영어 공용화 논란이 벌어지던 당시 한 언론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영어 공용화에 찬성하는 의견이 45%였고, 이듬해 교육 방송(EBS)에서 찬반 토론이 벌어진 뒤의 여론 조사에서는 찬성 비율이 62%까지 증가했다. 그렇다면 어림잡아도 한국 국민의 절반가량은 영어 공용화에 찬성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공용어’란 말 그대로 공공 생활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가리킨다. 영어 공용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쪽에서는 영어가 이미 국제어로서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언어 사용자들이 영어를 선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주장한다. 

그런데 처음 공용어론을 제기한 소설가 복거일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영어 공용화는 예비적인 단계일 뿐이고, 아예 모국어를 영어로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영어 공용화에 반대하는 쪽에서는 한 나라의 경제력이 영어를 잘한다고 해서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비판한다. 지구 제국이 형성되리라는 기대는 강대국들의 패권주의적 논리일 뿐이며, 이에 따르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더불어 영어 공용화가 그 자체로 국민의 영어 실력을 향상시켜 주지는 않으므로,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은 공용화가 아니라 영어 교육의 질적인 개선이라는 의견도 제시한다. 실제로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있는 인도의 경우에도 영어로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한 인구는 2%에 지나지 않으므로, 공용화 자체가 궁극적인 해법인가는 미지수다.



이중 언어 - 다양한 언어가 공존하는 사회
영어 공용화에 반대하는 입장이라 하더라도, 지금 같은 전 지구화 시대에 모국어와 국제어의 이중 언어 사용이 대세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단일 언어를 통한 소통이 국민 국가 형성의 주된 바탕이었고, 이에 따라 민족(또는 국민)을 언어 공동체로 규정해 오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 체제 아래에서는 이러한 단일 언어적 상황보다는 이중 언어적 상황이 보다 표준적인 것이 되었다. 따라서 이렇듯 변화된 언어 현실에 적응하면서도 언어적 다양성을 보존하는 일을 앞으로의 지향점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바벨탑 이후의 기억을 온전히 보존하면서 바벨탑 이전으로 회귀해야 한다. 이는 개별적인 자연어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세계어를 배워 나가야 한다는 것으로 풀어서 말할 수도 있겠다.

소수 언어들이 지속적으로 사라져 가고, 국가어마저도 존립을 위협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언어적 다양성이 보존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러한 다양성이 ‘세계’ 자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벨탑의 신화를 다시 상기하자면, 인류가 하나의 무리를 지어 살다가 사방으로 흩어져 살게 된 것은 언어적 혼잡성·다양성이라는 신의 징벌 이후다. 곧 세계는 그러한 혼잡성·다양성으로 구성되며, 결국 그것의 산물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세계주의는 이러한 혼잡성·다양성 자체를 보존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는 각기 다른 언어로 달리 전승되고 보존되어 온 지식을 보존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 각 언어는 세계를 보고 인식하고 구분 짓는 각기 다른 관점을 갖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것이 그려 내는 현실 세계의 지도도 다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각각의 언어는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서 각기 다른 통찰력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한 언어의 소실은 곧 인간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대안의 상실을 뜻한다. 게다가 보다 중요하게는 다른 언어와의 상호 작용만이 우리 각자의 언어를 더욱 유연하고 창조적으로 만들어 준다. 영어만 하더라도 새로운 단어와 리듬과 생각들을 다른 언어들에서 얻음으로써 활력을 얻고 번영을 누려 왔다. 세계어는 그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언어들과 공존 가능하며 또 그래야만 한다.

08. 11.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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