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들의 신을 읽지 않아도
내게 로이는 신성한 이름이었지
근대문학의 종언을 알리는 이름
첫 장편 작은 것들의 신으로
부커상을 수상하고도 로이는
문학을 떠났지 세상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문학에 구멍을 냈지
구멍난 문학에 인도를 매달 수는 없었다네
인도는 무거운 나라
인도는 가난하고도 무거운 나라
하지만 12억 인구의 나라 인도는
엄청난 부자들의 나라이기도 하지
100명의 재산은 3억의 국내총생산에 맞먹지
부자 중의 부자 무케시 암바니의 집을 보라
그의 집 안틸라는 사상 최고가의 집
27층짜리에는 헬기 이착륙장이 세 곳이라네
공중정원에 무도회장, 여섯 층의 주차장
그러자니 600명의 하인이 필요하지
하지만 암바니는 그곳에 살지 않아
아무도 알지 못하지 부자들의 부자는
아무데나 살지 않지 안틸라는
어쩌다 들르는지도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갖는 게 세상의 이치
로이는 그걸 분수효과라 부른다네
뿜어져 나오는 저 분수를 보라
무케시 암바니는 점점 더 부유해지고
걷잡을 수 없이 부유해지고
법원도 국회도 모두가 암바니의 친구들
우리네 못지않은 돈독한 친구들
나머지 인도인은 들러리로 충분하네
인도에는 8억의 유령이 있네
있는 거 없는 거 빼앗기고 가난에 내몰린 유령들
하루 20루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건 400원도 안 되는 돈이지
가난과 빚에 쪼들려 25만의 농민이 목숨을 끊는 나라
인도는 놀라운 나라라네
너무 놀라 로이는 문학을 떠났네
3억의 중산층처럼 입 다물 수 없어서
이것이 세상의 이치인가 다시 묻네
이것이 세상인가 로이는 묻네
아룬다티 로이를 읽는 밤
나는 생각에 잠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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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 시로 오늘 쓰려던 건
로쟈,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니코프였지
라스콜리니코프로 불렸던 라스콜니코프
청량리를 지나간다는 생각에
삼천포로 빠져 버린 라스콜니코프
로지온의 애칭 로쟈를 닉으로 쓰고 있으니
나는 언제든 쓸 수 있다는 생각
무얼 쓰더라도 라스콜니코프가 된다는 생각
라스꼴니꼬프도 어렵지 않다
라스꼴이라고 떼줄 수도 있다
라스콜은 분열이란 뜻이니 라스콜니코프는
분열적 인간, 나는 분열증 환자 같으니라구
라고 적었지 아주 오래전 리포트에
그 라스콜니코프가 도끼를 외투 안쪽에 걸고
전당포로 걸어갈 때 나도 동행했던가
칠백 삼십 보를 걸어갈 때 망이라도 보았던가
전당포 노파 알료나의 정수리를 도끼로 내리칠 때
(연소자 관람 불가랍니다)
도끼날도 아니고 도끼등으로 내리칠 때
나도 옆에 있었나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알료나는 쓰러졌지
오 로지온!
나는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일까
라스콜니코프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
알료나의 장롱과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지
무엇이건 뒤져야 했지
인기척이 느껴져 화들짝 뛰쳐나왔네
리자베타가 거기에 있었네
알료나의 이복자매 리자베타가 거기에
있다니 라스콜니코프는 다시 도끼를 치켜들었다네
리자베타의 이마를 내리쳤다네
(제발 연소자는!)
맙소사, 리자베타는 전당포에 없어야 했다네
리자베타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네
라스콜니코프는 정신이 없었다네
모든 걸 계획해도 소용 없는 일
우리는 하려고 하는 일만 하는 게 아니라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알지 못하듯이
머리가 하는 일을 마음이 따라가지 못하듯이
완벽한 범죄이론이 있어도 완전범죄는 없다네
라스콜니코프는 정신없이 하숙집으로 돌아왔다네
어제의 라스콜니코프는 더이상
오늘의 라스콜니코프가 아니라네
오 로쟈, 사랑하는 아들아
어머니의 편지가 서랍에 있었지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아들을 이해하지 못할 테지
로쟈는 다시는 어머니를 껴안지 못할 테지
오 로쟈는 자기 자신을 죽였다네
이렇게 써도 될까 싶지만
(요즘은 죄와 벌도 안 읽는다고 하니)
로쟈의 일은 내가 잘 아는 일
무얼 쓰든지 라스콜니코프의 이야기
에필로그까지는 아직도 한참 남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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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수에서 환승하여 오랜만에
서울역 지나 청량리 가는 길
아니 청량리는 지나쳐 외대앞까지 가는 길
오래 전 나는 청량리까지만 갔었지
청량리 588 부근에서 자취하던 신학생 친구
지금도 목회일을 하는지 진작
그만 두었는지 알 수 없지만
연락이 닿은 지 오래라
알 수 없지만
그때는 더더욱 알 수 없었고 다만
가난한 신학생이어서 저렴한
동네도 허름하고 겉보기에도 저렴한
자취방에 살았지 자취방이 거기에 있었지
한겨울에 나는 왜 그곳에 갔을까
심리학개론 기말리포트를 원고지에 적던 기억만 있는
그곳에 무슨 심리였는지 나는
(알 것도 같은 심리다)
홍등가를 돌아가지 않고 한복판을 가로질러 갔다네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도 그랬을까
진한 화장 언니들의 손을 한참 뿌리치고서야
나는 신학생 친구와 라면을 먹을 수 있었지
한 번은 아니었을 테지만
(지금은 없어졌다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때
나는 소냐를 만났던가
만났던가
어느 사이 로쟈가 되어
러시아문학을 강의하러 가는 길
신설동 지나 외대앞까지 가는 길
곧 청량리도 지나가리라
내리실 곳은 오른쪽이지만
나는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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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04-30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한 화장 언니들 사이를 용감하게 걸어가는
어린 로쟈(샘)는 어떤 얼굴이였을까 궁금하네요~

로쟈 2018-04-30 19:20   좋아요 0 | URL
파마머리로 다녔던 시절.^^

로제트50 2018-04-30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부산에서 주욱 살다가 서울사람과 결혼해서 상경했답니다.
고궁들 안국동 대학로가 추억과 애착이 깃든 장소입니다.
부산에서 대학다닐 때 내성적이어서
집 학교 가끔 큰서점이 있는 시내가
다 였지요 ㅠ 여기서 궁금, 서울의
로쟈님이 대학시절 주로 다녔던 곳은 어디였을까요?^^

로쟈 2018-04-30 19:20   좋아요 0 | URL
저는 주로 신림동.

sprenown 2018-04-30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또옙스키는 거짓말장이다!
쏘냐 같은 창녀는 없다.

로쟈 2018-04-30 19:19   좋아요 0 | URL
러시아 얘기니까요.
 

죽은 자로 하여금
소설 제목보고, 죽게 하여라
중얼거린다 다른 무엇이 있을까
하지만 언제 죽는단 말인가
이미 죽었사옵니다, 그러게
그러니 죽게 하여라
죽음을 허락하노니
모든 필연은 각자의 자리에서 본분을 다하라
아침은 오거라 매일같이 오거라
해는 바삐 중천으로 가거라
각자의 포지션을 지켜라
필연이 필연다울 때
물이 역류하지 않고 콧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을 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거나
두 번 죽지 않을 때
인연이 두 번 꼬이지 않을 때
그리하여 모든 것이 차례에 맞을 때
아침먹고 점심먹을 때
(먹고 체하지 않을 때)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태평성대에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태평성대에
일없이 중얼거리노니
죽은 자로 하여금
죽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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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월이지만 봄은 다 가고
이삿짐차 떠난 뒤에 남은
살림 같은 버릴 것만 남은
살림 같은 봄만 남은 것 같다
가장 잔인한 달 지나가면
덜 잔인한 달
(차라리 잔인하기를!)
오월은 그렇지 않았는데
등나무 꽃그늘 같은 시절이 있었는데
(대체 언제적인가?)
지금은 사월만 지나면 봄도 다 가는가
늦게 온다고 더 오래 머물지 않고
일찍 떠난다고 미안해 하지 않는다
사월에 만났던 사람 그렇게 떠났고
오월에 헤어진 사람도 그렇게 떠났다
내게 남은 사월 언제부턴가
먼지 뿌옇고
오월은 봄도 아니고 봄인 척
사월과 오월 사이에
나는 시를 쓰고 빈집에서
걸레질하고
(할 필요가 없다고요?)
굳이 걸레질하고
사월의 방문을 닫는다

오월의 문을 열면 이미 다른 집
이제 오월이지만 봄은 다 가고
봄은 다 가고야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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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04-30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월을 누가 덜잔인한 달이라고 하는가?
한국에서 딸도 며느리도 엄마도 아니라야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로쟈 2018-04-30 08:06   좋아요 0 | URL
어린이날, 어버이날 때문인가요? 저는 날씨만으로.~

로제트50 2018-04-30 0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일하는 가게는 서향이고 전면이
유리로 되어 사월부터 에어컨을 틀어
놓곤 합니다. 그러다 해가 숨어면
춥네, 하며 끄는 일이 하루 여러차례 반복되죠. 저의 사월은
여름 미리맛보기, 더운 계절 앞둔
심호흡 같은 것.

로쟈 2018-04-30 08:07   좋아요 0 | URL
계절의 여왕이란 말도 예전엔 썼는데 옛말이 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