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13명이 술 때문에 죽는다
다른 이유는 없다는 듯이
죽는다, 죽는다고 한다
매일 13명이, 이 순간에도 주정을 한다
술주정을 하다가 숨이 넘어간다
정말 다른 이유는 없다는 것인가
이 얼마나 순도 높은 죽음인가
매일 13명이, 작당하지도 않은 채로
분명 주정의 이유는 있을 테지만
아아, 과묵하게도 매일 13명이
순전히 다른 이유는 없다는 듯이
술을 토하는 심정으로
죽는다, 죽어간다
하필이면 13명인가
하지만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마다
매일 13명이 채워진다
어디선가 술에 취한 인생들이
차례로 순번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그날을 맞이하는 것인가
오랜 습관과 염원이 만나는 것인가
마지막 한방울과 마지막 호흡이라니
생각하면 눈이 뜨끈해진다
매일 13명의 명단이 뜨는 건 아니지만
나는 이 죽음을 기억하기로 한다
비록 13명이 모두 시인은 아닐지라도
한두 명은 시인일 거라고 믿는다
얼마나 많은 술주정이 시가 되었던가
얼마나 많은 푸념과 탄식이 안주가 되었던가
생긱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다른 이유는 없다
매일 13명이 술 때문에 죽는다
나는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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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아래서 책을 읽었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동네
한달 넘게였지
밥상에 촛농으로 받친 촛불 아래
책을 읽다가 눈을 비비고
책을 읽었지
숨결에도 흔들리는 건 촛불의 습관
책장을 넘기며 
촛불의 그늘을 읽었지
눈가에 그늘이 졌지
촛불에라도 읽어야 할 것이 있었지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랬다고 믿었지
그리고 안경을 쓰게 되었지
촛불 아래 책을 읽다가
촛농 대신 시력을 떨어뜨렸지
안경을 쓰고 읽었지
전기가 들어와도 안경을 써야 했지
촛불 아래 책을 읽다가
한 세월을 보낸 것만 같아
아직도 못 읽은 책들이 가물거리지
촛불의 습관을 나도 갖게 되었어
책장을 넘기며 마음이 흔들리네
읽어야 하는데 읽을 수 없네
촛불 아래서 너무 많이 읽었네
이제 침침해서 읽을 수 없네
누가 나를 읽을 것인가
촛불처럼 흔들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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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50 2019-08-20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자전적 이야기 맞죠? 어디선가 본 듯 해서요.
어릴 때 저희집에 전기밥솥이 방에 있었어요.
버튼의 노랗고 둥근 빛으로 책을 본 기억이 있어요...
정말 그렇게까지라도 읽어야 했던...

지금은 방도 많고 책 살 돈도 많건만...
그 절실함은 사라지고...

쌤! 휴가 이후 시가 계속이니
일 폭탄? 책 폭탄 맞으신건가요?

로쟈 2019-08-20 21:56   좋아요 0 | URL
중학생때. 일폭탄은 맞아요. 손놓고있지만.~

뭉개림 2019-08-20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촛불 세대가 아닌데도 마음이 아련하고 애잔함이 느껴집니다. 시인이셨군요. 몰라뵀습니다~.

로쟈 2019-08-21 07:18   좋아요 0 | URL
^^
 

정신의 거품을 말하려 한다
거품 정신이 아니다 함부로
거울을 들이밀면 안 된다
왼쪽과 오른쪽이 바뀌면 안 된다
정신은 고귀하기에

고귀한 정신의 거품을 말하려 한다
정신은 고귀할 수밖에 없으며
고귀한 것은 거품일 수밖에 없기에
푸른 지구가 그러하고
지구를 푸르게 만든 것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 고귀함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렇다, 그 정신의 거품
아득하고도 아련한 정신의 거품
합법칙적 정신의 당당함
납득할 만한 세상의 아름다움
그런 건 
거품에 불과하다

세상을 향해 한껏 배를 내미는 거품
부풀어 오르는 거품
거품 속 거품들까지도 고양시키는
거품의 기예
거품의 마법
거품의 섭리
거품의 기적
그리고

이윽고 터지는 거품

쭈그러진 정신을 말하려 한다
정신의 바닥을 말하려 한다
바닥의 정신이 아니다
정신은 고결하다
정신은 숭고하다
정신은 내 맘 같지 않다

그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
푸른 지구가 희소한 별이듯
가까스로 존재하는 정신
그 거품을 기려야 한다
정신의 거품을 돌봐야 한다

어제는 내가 당번이었다
정신의 거품을 생각하느라 뒤척였다
오래 뒤척였다

정신의 바딕에 발이 닿곤 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정신의 거품을 되살려야 한다
정신을 대변해야 한다
정신은 고귀하기에
고귀한 모든 것은
거품이기에

거품을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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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로 가려고 돌아섰다
지구를 한바퀴 도는 일이 남았다

바다를 몇 번 건너는 일이 남았다
산맥을 넘고

사막도 여러 번 가로지르겠지

몇 걸음일지 헤아릴 수 없다
밤에는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이 
친구가 되어 주겠지

밤하늘 가로지르는 유성들이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주겠지
어디로 가느냐고
어디로

꼬리를 물다보면
날이 새겠지

태양을 등지고 태양을 향해 가는 길
그대에게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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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맘 2019-08-20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대에게로 가려고 돌아섰다!
지구를 한바퀴 돌아 그대에게 가는 길이라니!
감히 말씀드리자면,
참, 참, 좋은 시입니다~
잠못이루는 새벽인데 더 말똥해졌습니다ㅎㅎ

로쟈 2019-08-20 11:07   좋아요 0 | URL
너무 늦게 주무시네요.^^

2019-08-22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22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23 2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27 0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찹쌀떡에 밥알이 들어가 밥알찹쌀떡
팥도 들어가고 밥알도 들어가고
왜 들어가느냐고 묻지만 않으면
팥도 편하고 밥알도 편하지
쑥은 청정지역 제주 참쑥
충청 노은 쌀에 국내산 팥
그런데 호두는 캘리포니아 호두
밥알찹쌀떡을 위한 긴 여정이구나
굳이 그렇게까지 오느냐고 묻지만 않으면
쑥도 편하고 호두도 편하지
밥알찹쌀떡으로 끼니를 때우며
나는 어떤 떡의 속일지 헤아려본다
굳이 묻지만 않으면 속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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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맘 2019-08-20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묻지 않겠습니다ㅎㅎ
선생님 스스로가 물어보실것같아
그게 탈이지만요ㅎㅎ

로쟈 2019-08-20 11:07   좋아요 0 | URL
네 서로 묻지 않는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