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이에 무슨 책이 또 나왔느냐고 의아해 하실 분도 있을 듯하다(*이 글은 지난번 에피소드(4)에 연이어 씌어진 것이다). 그럴 리는 없고 이 자리는 지난번에 책소개를 하면서 빼먹은 책 몇 권을 보충하기 위한 자리이다. 세상은 넓고 읽을 책은 너무도 많다. 물론 그보다 더 많은 책들은 (고맙게도) 안 읽어도 좋은 책들이지만!..

 

 

 



김선욱의 <한나 아렌트 정치판단이론>(푸른숲)이 지난달에 나왔다. 나는 책의 2/3쯤 읽었는데, 등잔밑이 어둡다고 지난번 소개에서 빠뜨렸다. 이 책은 아렌트의 <칸트 정치철학 강의>를 읽고 그에게서 판단의 문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궁금해 하던 독자들에게 아주 유익하다. 내가 그런 독자의 한 사람이었는데, 저자는 그런 고민을 딱 집어서 해결해준다. 물론 아렌트 철학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만하다. 하지만, 읽기 전에 같은 저자의 <정치와 진리>(책세상)을 먼저 읽어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책의 부록으로 상세하면서도 유익한 아렌트 연구서지가 정리돼 있다. 일반 독자에게라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부분이지만, 이런 문헌서지와 더 읽을 거리에 대한 소개 등은 내가 어떤 책에서든지 가장 감명깊게 읽는 부분들이다(*아렌트 전공자인 김선욱 교수의 최신간은 <한나 아렌트가 들려주는 전체주의 이야기>(자음과모음, 2006)이다. 청소년 교양도서이지만, 나이만 먹는다고 교양수준이 '업'되는 건 아니므로 아렌트에 입문서로서 권장할 만하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번역돼 나왔다.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론>(서광사)란 제목에 현사실성의 해석학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역자는 역시 이기상/김재철 교수. 하이데거의 정치적 행적에 대해서는 옹호보다 비판의 여론이 많지만, 그가 20세기 철학의 거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데에는 거의 의견이 일치한다. 물론 중요한 철학자가 하이데거만 있는 건 아니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그의 경우에 전문번역자가 있다는 것. 나는 역자인 이기상 교수의 철학서들을 그다지 인상깊게 읽지 못했지만(<하이데거 철학의 안내>를 제외하고), 그의 번역서들은 언제나 감탄스럽다.(*2004년엔 <진리의 본질에 관하여>가 역시나 이기상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조건을 말하지만, 인간은 동시에 언어 속에서, 언어와 함께 존재한다. 즉, 우리 존재의 가능성의 상당부분 한국어의 가능성 안에서 규정된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어 하이데거'는 우리 사유의 깊이를 더하고, 폭을 넓혀나가는 데 아주 유익한 자산이다. 사유의 모험이란 게 어떤 것인가 궁금한 이들에게 한번쯤 하이데거를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다(*이기상 교수의 <존재사건학>(서광사, 2003) 같은 책을 옆에 끼고서 읽어도 좋겠다). 아니 바쁘면 그냥 책장에 꽂아만 두어도 된다.

 

 

 



몽상의 철학자, 바슐라르의 책들이 다시 나오고 있다. <순간의 미학>(영언문화사),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문학동네) 등이 최근에 나온 번역서들이다. 후자는 이전에 삼성출판사 사상전집에 들어 있었던 거 같기도 하다. 어쨌든 <공기와 꿈>(이학사, 2000) 이후에 다소 뜸하던 그의 책들을 다시 서점에서 발견할 수 있어서 반가웠다. 물론 나로선 요즘에 그를 읽을 만한 여유를 갖고 있지 않다. 도대체가 '휴식'이나 '몽상'의 짬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그냥 바라만 볼 따름이다.

이전에 그의 과학철학서들도 몇 권 번역됐었는데, 모두가 수준 이하였다(바슐라르로 학위를 받았다는 사람이 번역했었다). 바슐라르에 대한 균형잡힌 이해를 위해서도 그의 과학철학서들이 제대로 다시 번역되기를 기대해본다. 과학철학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소개하고 있는 책으론 도미니크 르쿠르의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새길, 1996)이 있다. 바슐라르, 캉키옘(캉길렘), 푸코로 이어지는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를 조명한 책이다.(*바슐라르에 관한 가장 부담없는 입문서는 홍명희의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살림, 2005)이다. 나도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딜런 에반스의 <감정>(이소출판사>이 번역돼 나왔다. 저자가 생소할지 모르나 <진화심리학>(김영사, 2001)이란 유익한 만화책의 저자이다. <라캉 정신분석사전>의 저자도 딜런 에반스라는 같은 이름인데, 나는 이들이 동일인인지 동명이인인지는 모르겠다. 동일인이라면, 정말 괴물같은 녀석이다. 하여간에 서점에서 빨간 표지에 팬시용 상품같은 책을 집어든 것은 순전히 저자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는데, 조금 읽은 바로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듯하다. 책을 고르는 것도 다 연줄이다.

연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최근에 산 헤르만 헤세의 전기 <헤르만 헤세>(더북, 2002)는 저자가 <한나 아렌트>(여성신문사, 2000)의 알로이스 프린츠이다. 아마 저자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헤세의 전기를 손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러시아 작가 표도르 솔로구프의 <작은 악마>가 책세상의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왔다. '작은 악마'라는 제목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의 모티브를 이어받은 것인데, 19세기 후반 러시아 상징주의 산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두툼한 러시아어책을 언제 읽나 싶었는데, 우리말로 가뿐하게 읽어치울 수 있게 됐다. 이 책세상의 세계문학 시리즈는 장용학의 <요한시집>을 필두로 하인리히 뵐,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들이 이어진다. 소설 독자들에겐 또 숙제가 생긴 셈이겠다...

 

 

 



끝으로 베케트의 단편집 <첫사랑>(문학과지성사)이 문지스펙트럼으로 나왔다. '하이데거의 모든 책'이란 말에 각운을 맞출 수 있는 저자 목록에 사뮤엘 베케트도 망설이지 않고 집어넣을 수 있다. 즉 '베케트의 모든 책'. 그래서 읽건 안 읽건 그냥 사둘 필요가 있다. 사실 베케트는 우리말 번역이 상당히 까다로운 작가이며, 잘 이해되는 작가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중요한 작가이다. 좀 모순적인 말 같지만, 사정이 그렇다. 그러니 읽고 우리 것으로 소화할 필요가 있다.

베케트의 희곡은 이미 선집이 나와있다(번역은 만족스럽지 않지만). 아울러 그의 소설 3부작(<몰로이>와 <말론 죽다>는 번역돼 있지만)이 마저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참고로, 아도르노의 <미학이론>은 원래 베케트에게 헌정하고자 했던 책이다. 내가 읽은 베케트의 작품 중에서 번역이 가장 잘 된 건, 역시나 <고도를 기다리며>(민음사, 2000)이고, 가장 흥미로운 건, <엔드게임>(몇 가지 번역본이 있다)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아도르노의 평문 중에 '엔드게임을 이해하기 위하여'란 비평문도 상당히 중요한 글이다(아직 번역되지 않았다).(*이맘때인가 나는 베케트 관련자료들을 긁어모아두었다. 10여권은 더 되는 분량인데, 올해 몇 권 읽어보는 게 목표이다. 계획상으론).

2003. 0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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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뀌어도 책은 나온다. 이주에 나온 신간들은 아직 발행년도에 2002라고 돼 있는 것들이 많지만. 지난번에 소개한 책들 이후에 나온 책들 가운데 나의 눈길을 끌었던 몇 권의 책을 여기에 소개한다.(*이 글은 2003년 1월에 씌어졌다.)

 

 

 



해가 바뀌기 전에 나온 책이지만, 니진스키의 일기 <영혼의 절규>(푸른숲)는 나에겐 2002년의 책이다. 나는 문예출판사에선가 나온 같은 역자의 발췌번역본을 복사해서 갖고 있는데, 이번에 완역본이 나온 것. 물론 아직 읽기 시작하진 않았지만, 책의 만듦새만으로도 가슴을 뛰게 한다.(*나중에 리뷰를 올렸고, 2004년 러시아에 가서는 러시아어본도 구했다). 아래 사진은 1916년, 딸을 안고 있는 니진스키.

사실 그의 발레나 '발레 뤼스'(세기초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러시아발레단. 불어로 '러시아 발레'란 뜻)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지만,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문제삼는 건, 무용가 니진스키가 아니라 '작가' 니진스키이기 때문이다. '눈물의 일반이론'이란 글에서도 인용한 바 있지만, 그의 언어는 간결하면서도 절묘하다. 거기엔 눈물어린 진실과 인간적 의지가 강하게 배여 있다. 누군가 러시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이 책을 도스토예프스키의 책들과 함께 권하겠다. 그것은 누군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고진의 <유머로서의 유물론>(문화과학사).(*이 책에 대해서는 따로 리뷰를 쓴 탓에 자세히 다루지 않았다.) 그리고 동문선에서 나온 홍성민 편의 <문화와 계급>. 제목만으로 부르디외를 떠올렸다면, 당신의 인문학 교양도 어지간한 편이다. 이전에 현택수가 편한 <문화와 권력>(나남, 1998)이 나온 바 있는데, 한국 학자들의 부르디외 이해를 보여주는 일종의 소개서였다. 이번의 책 <문화와 계급>은 보다 진전된 '적용'을 보여준다. 아직 책을 받아보지 못했지만, 내가 주목하는 이는 연대에서 박사논문을 쓴 장미혜씨이다. 그녀는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이란 부르디외적 문제틀을 가지고 한국사회를 실증적으로 분석한 논문을 쓴 바 있다. 이전에 신문기사에서 보고 퍽 궁금해 했었는데, 책 목록에 그녀의 논문이 포함돼 있다.

 

 

 

 

엘리자베스 라이트의 <무의식의 시학>(인간사랑, 2002)이 번역돼 나왔다. 역자는 김종주 부녀인데(그래서 번역에 대한 신뢰는 좀 떨어진다), 내가 분석하고 싶었던 두 작품, <하녀 볼기치기>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 대한 분석을 포함하고 있기에 부득불 비싼 값의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책은 현재 오고 있는 중이다). 라이트는 얼마전에 작고한 저명한 정신분석 비평가이며 우리말로도 몇 권의 책이 번역돼 있다. 특히 절판된 <정신분석비평>(문예출판사)는 원저가 증보개정판을 냈을 정도로 성가가 있었다. <페미니즘과 정신분석학 사전>(한신문화사, 1997)도 그녀의 책이다. 덧붙여 말하면, 장 라플랑슈의 <정신분석의 새로운 기반>(인간사랑)도 김종주의 번역으로 나왔다. 라플랑슈 역시 라캉 정신분석학 사전(<정신분석의 언어>이던가?)으로 유명한 학자이자 정신분석의이다(*이 사전은 작년 2005에 <정신분석사전>으로 번역돼 나왔다). 그러나 이 역시 번역에 대한 신뢰는 상당히 떨어진다(누가 확인해 주었으면)...

 

 



 

알 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하버마스의 신간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나남)도 번역돼 나왔다. 우생학에 대한 비판을 담은 비교적 얇은 책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그의 주저들은 언제 (재)번역돼 나오는 것인지 나는 그게 더 궁금하다. 이전에 언급했던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의 경우도 마찬가지. 한국해석학회에서 열심히 학회지도 내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정작 중요한 일은 빼먹고 있다. 번역을 안 하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설마 번역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일까?(*알다시피, 하버마스의 주저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올해 번역서가 나왔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딜타이의 <체험, 표현, 이해>(책세상)도 이한우의 번역으로 나왔다. 얇은 책이지만, 해석학 입문서로서 요긴할 듯싶다. 부록으로 해석학에 대한 국내문헌 해제가 붙어 있다. 역자는 하이데거를 전공하고 가다머 연구서 등을 번역했으며 현재는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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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문학과지성사)이 드디어(!) 번역돼 나왔다. 메를로-퐁티 연구자가 몇 명 되기 때문에, 그리고 철학아카데미 같은 데선 강의도 계속 열리고 있기 때문에, 예감은 갖고 있었지만, 그래도 뜻밖이다. 조광제에 의하면 영역본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닌데, 국역본은 어느 정도 기대에 부응할지 궁금하다(*그에 따르면 국역본도 오역이 적지 않다). 먼저 읽으시는 분이 있다면 소감을 적어주시길 바란다. 오늘자 한겨레에 실린 이정우의 서평은 개략적인 내용만을 담고 있어서 정확한 '맛'의 감을 잡기가 어렵다. 번역서의 경우는 우리말 번역서를 대상으로 서평을 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서평자들이 원서의 의의와 가치를 운운하는 경우가 많다. 역시나 감을 못잡은 경우들이다(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

 

 

 



그리고 사서는 읽지 않을 책 한권. <분별없는 열정: 20세기 지식인의 오만과 편견>(미토)이란 책이 번역돼 나왔는데, 소칼의 <지적 사기>가 주로 잘나가는 철학자들의 논리와 개념의 남용을 문제삼은 데 비해 <열정>은 그들의 위험한 역사/정치의식을 비판한단다. 하이데거, 슈미트, 벤야민, 코제브, 푸코, 데리다 등 6명이 비판의 표적인데, 고작 250쪽 정도의 분량을 가지고 이들과 대적하고자 하는 오만 혹은 만용도 가상하지만, 동아일보의 서평대로라면, "마르크스주의에 호의를 보인다는 이유로 나치 협력자와 동일시"하는 빈곤한 논리로는 그만한 분량도 벅차지 않았을까 싶다. 대중의 지식인 혐오증에 편승해서 책이나 팔아보려는 심사가 아니라면 별로 의미없어 보이는 책이다.

그런데, 이걸 동아일보는 톱으로 다루면서, "'20세기 폭력' 그 이면엔 지식인들이..."라는 폭로성 타이틀까지 붙여놨다. 물론 내용은 '아니면 말고'이다. 원래 의심스러웠던 기자들의 양식이 한번 더 의심스러워지는 대목이다. 사실 <전체주의의 기원>의 저자 한나 아렌트 역시 하이데거의 의심스러운 행적에 대해서는 비판을 서슴지 않지만, 그녀의 사상이 얼마나 하이데거에게 빚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부인하지도 않는다. 그녀의 <인간의 조건>(1958)은 명백히 <존재와 시간>(1927)을 의식하고 씌어진, 그와 대결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씌어진 책이다(그 대결은 장관이다!).

 

 

 



끝으로, 미셀 투르니에 연구서가 (내가 알기엔) 국내에서 최초로 나왔다. 이용주의 <소설과 신화>(동문선)이 그것이다. 나로선 당장에 읽을 짬이 없지만, 투르니에 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한 가지 좋은 소식이 될 듯하다. 물론 책값은 비싸다...

2003. 0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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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4 0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매주 각 일간지 서평담당자의 책상에는 200-300권의 신간이 올라온다고 한다. 그 중에서 지면에 단평이라도 오르는 책은 10% 정도에 불과하다. 프랑코 모레티가 문학사의 비유로 든 '도살장'의 사례를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는 셈이다. 이름하여 '도서 도살장'이라고나 할까? '최근에 나온 책들'이란 걸 연재(?)하면서, 나도 덩달아 그 도살업자 대열에 끼게 된 것 같아 우쭐하기도 하고 겸연쩍기도 하다. 우쭐하다는 것은, 내가 평가/판단의 주체이기 때문이다(권력은 그렇게 영혼을 잠식한다!).

 

 

 



하여간에 책들은 쏟아져나온다. 출판평론가라면 지난주에 두어 일간지 프런트에 오른 이태원의 <현산어보를 찾아서>(청어람미디어) 같은 책에 눈길을 주어 마땅하다. 정약전의 <자산어보>(<현산어보>라고 해야 맞다고 한다)를 다시 번역하고 그것을 오늘의 관점에서 보완하고 있는 책이라는데, 몇몇 서평을 읽은 감으로는 '올해의 책'으로도 손색이 없다. 한 30대 고교 생물교사가 그 저자라는 것도 놀랍고, 7년의 준비기간을 거쳤다는 그 노력도 경탄스럽다. 물론 그런 저자를 발굴하고 책으로 만들어낸 기획력도 치하할 만하다. 5권짜리 중 3권이 먼저 출간되었고, 2권은 내년에 나온다고 하는데, 어찌됐든 장서용으로 꽂아둘 만하다(*책은 2003년 11월에 완간되었다). 하지만 이 물고기책들을 사들고 가는 건 나에겐 아직 모험에 가까운 일이다. 돈벼락을 맞기 전까지는...

 

 

 

 

두어 주쯤 됐지만, 최근에 나온 책 중에서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건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폭력의 고고학>(울력)이다. 그의 이름을 처음 본 건, <오늘의 프랑스 사상가들>(문예출판사,1998)이란 책에서인데, 거기서 소개된 프랑스 사상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생소한' 이름이었다(국내에 번역된 책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바로 그 클라스트르의 이름을 일간지에 신간소개도 나기 전에 교보의 신간코너에서 처음 발견했을 때 반갑고 신기했다. 물론 바로 책을 사지는 않았지만(나는 가급적 인터넷 할인서점을 이용한다), 곧바로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민음사, 1997; 진중권이 <폭력과 상스러움>이라고 패러디한 책이다)과 같이 읽을 책의 목록에 올렸다. 나에게 클라스트르는 지라르의 짝패인데, 그 둘이 어떻게 다른지는 읽어본 다음에 말하도록 하겠다(<폭력의 고고학>은 현재 주문중이다).(*책은 바로 샀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클라스트르의 책으론 작년에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가 마저 출간됐다. 이건 구입했던가? 대신에 <폭력과 상스러움>을 다 읽은 기억이 있다.)

  

 

 



<폭력의 고고학>만 아니었다면 가장 먼저 언급되었을 책은 <카프카의 편지>(솔출판사)이다. 990쪽의 만만찮은 분량인데(*2004년에 후속으로나온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는 더 두껍다!), 사실 나는 이 책이 언제나 번역되나 고대하던 참이었다. 올해 나온 편지로는 서중식의 <옥중서한>(야간비행)과 쌍벽을 이룰 만하다. 그 책도 831쪽짜리이다.

 

 

 

 

카프카의 편지에 대해서 내가 관심을 갖게 된 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문학과지성사, 1999) 덕분이다(*국역본은 3종이 나와 있다). 언젠가 서평에서도 썼지만, 그 편지들에는 카프카 문학의 비밀이 고스란히 숨겨져 있다(아니 드러나 있다!). 그래서 그의 편지들을 찾았는데, 영역본으로는 두꺼운 펭귄북이 있었다. 하지만, 펭귄북을 제본한다는 게 얼마나 속쓰린 일인가 하는 건 아는 사람은 안다! 그래서, 다 읽을 수도 없고, 제본할 수도 없이 망설이다가 그냥 우리말 번역본이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는데, 이번에 드디어 책이 나온 것.

책을 자세히 뒤적거리진 못했는데, 카프카는 약혼녀인 펠리체 바우어 말고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들도 포함돼 있는지 모르겠다. 빠져 있다면 그마저 번역돼야 할 테고, 더불어 그의 방대한 일기들도 번역 소개되어야 할 것이다. 카프카 전집이 언제 완간될지는 모르겠지만(한국카프카학회원들도 모를 것이다) 완간의 그날까지 다들 좀더 노력해주었으면...(사실 아직 괴테 전집도 다 나오지 않았다.)

 

 

 



인터넷 서점을 검색하다가 뜻밖에 발견한 책이 마이클 루스의 <다윈주의자가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가?>(청년정신)이다. 내가 '발견'이라고 한 건 책이 아니라 저자이다. 마이클 루스는 저명한 생물철학자로서 나도 그의 원서 몇 권을 갖고 있다(나는 생물학도 좋아하고 철학도 좋아한다). 때문에 그의 책이라면 일단 사서 읽을 만한 준비가 돼 있는 터였는데, 우연찮게 <다윈주의자...>를 발견한 것. 주문을 해놓고 아직 만지지도 못한 책이지만, 기다려지는 책이다. 참고로 생물철학 입문서로는 데이비드 헐의 <생명과학철학>(민음사, 1994)가 있고, 한스 요나스의 <생명의 원리>(아카넷, 2001)도 '철학적 생물학을 위한 접근'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루스의 책으론 2003년에 <생물학의 철학적 문제들>이 더 출간됐다. 엘리엇 소버의 <생물학의 철학>도 2004년에 나온 이 분야의 책으로 소장할 만하다.) 

 

 

 



김동춘 외 3인의 인터뷰 <인텔리겐차>(푸른역사)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소개돼 있어서 더 언급하지 않겠다. 나는 대담이나 인터뷰들을 좋아하는데, 특히 지식인들에게 접근하는 가장 유용한 통로는 사실 '글'이 아니라 '말'이다. 우리 출판계에서 이런 인터뷰 기획이 많아지고 있는 건 작년에 나온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민음사) 덕분이다. 그 책의 (기획의) 성공 때문에 이러한 유사 기획이 탄력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다. 어쨌든 우리는 더 많이 대화하고 더 많이 소통할 필요가 있다. 지식과 교양은 그러한 과정에서 자극을 받으며 성장한다. 이종영의 <내면성의 형식들>(새물결)이 출간됐다. 그의 전작 2권(<지배와 그 양식들>, <성적 지배와 그 양식들>)도 사두고는 있지만, 아직 읽지 않은 나로서는 뭐라 말할 수 없다. 다만, 자신의 이론적 기획을 성실하게 밀고 나가는 추진력만큼은 높이 사고 싶다.

 

 

 

 

그와 함께 두 권의 주석서도 기록해 두고 싶다. 하나는 이진경의 <노마디즘1,2>((휴머니스트). 전체 15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혹은 <천의 고원>) 주석서이다. 사실 <천 개의 고원>도 방대하지만, 이 주석서는 한술 더 뜬다. 아마 영미나 프랑스에도 이만한 주석서가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나는 <천 개의 고원>은 커녕 아직 <안티 오이디푸스>도 읽지 못했지만(후자가 전자보다 어렵다), 때문에 당분간은 <노마디즘>과 대면할 시간이 없을 터이지만, 두꺼운 책들은 하여간에 나를 즐겁게 한다(!?) 다만, 다른 고전들의 주석서들은 왜 그리 굼뜬 것인지 의아할 따름이다.

재미있는 건 <노마디즘>이 지난주 한겨레와 조선일보 서평에서 모두 1면에 올랐다는 사실. 한겨레의 것은 고명섭 기자가 썼고, 조선일보의 것은 들뢰즈 전공자인 서동욱씨가 썼다. 그런데, 과연 조선일보는 들뢰즈를 지지하는 것인지?(조선일보의 얄팍한 지식인-대중주의가 읽히는 대목인데) 문제는 '아무생각없이' 그런 지면에 서평을 쓰고 하는 행태이다. 들뢰즈라면 조선일보에 기고했을까?(이종영의 말대로 파시스트라면 그랬겠지.) 그런데, 왜 들뢰즈 연구자라는 사람(들)은 아무런 고민없이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가? 부르디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부르디외라면 조선일보에 기고했을까? 그런데, 부르디외 전공자라는 한 교수는 조선일보에 칼럼까지 연재하곤 했다. 분명 사상은 유행과 구별되어야 한다. 체 게바라 티를 입고 다닌다고 체게바라주의자 혹은 혁명가가 되는 것이 아니듯이, 들뢰즈를 들먹이고 다닌다고 들뢰즈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노마드가 되는 것도 아니다(노마디스트는 될지 모르겠다). 유능한 연구자가 생각없이 행동하는 것은 보기에 거슬린다.

 

 

 



또 한권의 주석서는 김동식 교수의 <로티-철학과 자연의 거울>(울산대출판부)이다. 소리소문없이 나온 이 책을 나는 구내서점에서 구입했는데(인터넷서점에도 없다), 현재 미국의 가장 흥미로운 철학자인 리차드 로티의 출세작 <철학과 자연의 거울>을 쉽게 소개한 책이다. 그 책은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까치글방, 1998)로 이미 번역돼 있다(우리말로 어색하게 '그리고'가 제목에 들어간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중의성을 피하려고 한 거 같은데, 생각이 얕다.).

물론 두툼한 책이고 초보자가 읽기엔 어려운 책이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까지는 교양서 범주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따라서 이번 주석서를 참고서삼아 좀더 많은 사람들이 한번 도전해 보시기를 권한다. 김동식 교수의 <로티와 신실용주의>(철학과현실사, 1994)가 분량은 좀 많지만(532쪽) 로티 철학 전반에 대한 친절한 해설서이다.(*로티 입문서로는 2003년에 나온 이유선 교수의 <리처드 로티>도 추천할 만하다.)

 

 

 



끝으로, 존 롤즈. 알마전에 <정의론>의 저자 존 롤즈 하버드대 교수가 타계했다. 철학에 조금이라고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1971년에 처음 출간된 그의 <정의론>은 미국 분석철학에 일대 방향전환를 가져왔다고 평가를 받을 만큼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물론 그 책은 일찌감치(1979년) 우리말로 번역됐지만, 고전답게 거의 읽히지 않는 책이다. 나도 원서는 갖고 있지만, 번역서 구입은 미루다가 아직도 사지 못했다. 그 사이에 4,000원하던 책값은(내가 대학 1학년때) 지금 19,000원으로까지 뛰었다. 어쨌든 조만간 <정의론>(서광사)과 <공정으로서의 정의>(서광사)를 구입할 예정이다(*<정의론>만 구입한 것 같다).

다행히도 롤즈의 다른 주저들인 <정치적 자유주의>(동명사, 1999)와 <만민법>(이끌리오, 2000)가 모두 번역돼 있고, 단행본 연구서도 하나 나와 있다. 때문에 롤즈는 기다릴 필요없이 그냥 읽기 '시작'하면 된다. 롤즈와 관련한 연구서로 스테판 뮬홀 등이 쓴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한울, 2001)이 권할 만하다. 이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논쟁의 중심에 존 롤즈가 있기 때문에 그의 이론이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저자인 뮬홀은 하이데거와 스탠리 카벨 연구서를 갖고 있는 소장 학자이다.(*롤즈에 관한 연구서들은 기억에 두세 권쯤 된다. 엄수균의 <롤즈의 민주적 자유주의>는 그 중 한 권이다.) 



하여간에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할 책의 목록은 끝이 없다. 말이 나온 김에 라캉의 <에크리> 새 영역본이 출가됐다는 소식을 전한다. 역자는 예고된 대로 브루스 핑크이고, 지난 11월에 선을 보였다(*핑크는 <에크리>의 선역본과 완역본을 잇따라 선보였다. 몇달 전에 구한 두툼한 영역본이 지금은 서가에 꽂혀 있다). 인터넷 교보를 통해서 다른 책 몇 권과 함께 주문을 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쉐리단의 번역보다 훨씬 읽기가 수월하기를 기대한다. 더불어 계속 유예되고 있는 <에크리>의 국역본도 빨리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라캉의 재탄생'은 제비 몇 마리가 떠들어댄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런 식으론 풍문만이 늘어갈 뿐이다. 라캉의 '실체'와 맞대면하는 것이 최선이다. 라캉주의자들의 분발을 촉구한다(물론 분발해야 할 사람들이 어디 라캉주의자들 뿐이랴!)...

2002. 12. 10.

 

 

 

 

P.S. 저명한 탈식민주의 이론가인 호미 바바의 <문화의 위치>도 이맘때 출간된 책이지만, 다른 분들의 소개가 있어서 생략했었다. 탈식민주의와 바바의 입문서로서는 바트 무어-길버트의 <탈식민주의! 저항에서 유희로>(한길사, 2001)가 좋은 평을 얻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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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금/토요일이면 4-5개 각일간지의 북리뷰란을 꼼꼼히 읽는다. 2/3 정도는 같은 책들을 다루고 있지만, 그 나머지 1/3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고, 어쩌다 고대하던 책들과 그 리뷰를 만나게 되면 반갑기 그지 없다. 하지만 어차피 일간지 북리뷰에서 다루는 책들이란 관심범위가 한정돼 있어서 그냥 지나치게 되는 책들도 적지 않다. 그런 책들은 서점에서 직접 만나봐야 한다! 지난번에 언급한 <향락의 전이> 개역판 같은 것도 일간지에서는 눈을 씻고 봐도 그 출간소식이나 리뷰를 찾을 수 없었다. 뭐든지 발품이 필요한 법이다...

 

 

 



그간에 나온 책들이 많지는 않다. 가장 나를 놀라게 한 책은 역시나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의 역사2>(동문선)이다. 전체 4권 중에서 그 제2권이 4년만에 출간된 것이다('나오다 만 책들'이란 글에서 다룬 바 있다). 나는 대략 출판사에서 포기한 줄 알았는데, 동문선 번역의 1/5 정도는 맡아서 하는 걸로 보이는 김웅권의 번역으로 이번에 나온 것. 다루고 있는 시기는 1960년대니까 바야흐로 구조주의의 전성기이다. 이 책이 갖는 강점은 현장감이다. 역사학쪽보다는 저널리즘쪽으로 분류되는 게 타당하다 싶을 정도로, 현장감 넘치는 인터뷰들이 페이지 곳곳에 배치돼 있다. 때문에 구조주의가 '숨쉬던 공기'를 느껴보든 데 가장 적합한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2권이 4년만 나왔으니까, 다음 3권은 아마 독일 월드컵때나 구경하게 되는 걸까?(*2003년에 3,4권이 모두 나와 완간되었다, 예상보다 빠르게.)

 

 



 

한국학술협의회의 석학초청 강연으로 이번에 내한했던 다니엘 데넷의 책이 나왔다. 그가 쓴 책이 아니고, 그에 관해 씌여진 논문 모음집 <다니엘 데넷>(몸과마음)이다. 조선일보가 공동주최하고 있는 이 강연에 작년에는 리처드 로티가 왔었고, 나는 직접 강연회를 찾은 적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여유가 없기도 했지만, 물론 데넷보다는 로티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조선일보가 꼴보기 싫어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데넷의 '환원주의'는 심리철학에서 내가 가장 지지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콰인의 제자였던 데넷은 옥스포드에서 길버르 라일(<마음의 개념>의 저자)의 지도로 학위를 받고 이후에 인지과학이라 불리는 분야를 개척한다. 그의 대중적인 대표작은 <설명된 의식>과 <다윈의 위험한 생각> 등인데(후자는 나의 애장서이기도 하다), 인간의 의식현상을 신경생리학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것이 대략 내가 이해하는 그의 입장이다. 심리철학에서는 그런 입장을 강한 환원주의라고 부르는 모양이다(심리철학쪽을 읽은 지가 좀 오래됐다). 그와 유사한 입장을 취하는 철학자가 수반이론을 제시했던 김재권이다. 그의 <수반과 심리철학>(철학과현실사,1994)은 쉽게 읽히진 않지만, 상당히 계발적이다. 특히 '비환원적 유물론의 신화' 같은 논문은 아주 파워풀하다.

어쨌든 데넷의 흥미로운 작업은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그의 책으론 <마음의 진화>(두산동아, 1996)과 호프스태터와 함께 편집한 <이런, 이게 바로 나야!>(민음사, 2001, 원제는 '마음의 자아')가 나와 있다(*<마음의 진화>는 올해 재출간됐다. 이 책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됐다).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을 위한 기초놓기>(책세상) 새번역본이 나왔다. 책세상의 고전의 세계 시리즈로 나온 것인데, 이미 최재희, 이규호 등의 번역본이 있는 책이지만, 한글세대의 감각에 맞는 새로운 장정과 번역이라 반가운 마음으로 사들었다. 원저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1781)을 쓴 4년 뒤에 나온 것으로 그보다 3년 뒤에 나오는 <실천이성비판>(1788)을 미리 집약해서 보여준다. 칸트 도덕철학에 대한 유명한 주석가인 허버트 페이튼은 이 책을 분량은 짧지만, 서양윤리학사에서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비견될 만한 책으로 평가하고 있다.

뒤쪽에 실린 역자의 해설도 친절하다(152-3쪽에서 선험적 판단을 후험적 판단이라고 잘못 적어놓기는 했지만). 요컨대, 교양인이라면 이 정도는 읽어야 한다. 좀 방대한 <실천이성비판>(백종현 역, 민음사,2002)은 미뤄두더라도. 사실 고진의 <윤리21>을 읽기 전에 먼저 읽어두어야 하는 책이지만, 나중에 읽는다고 해서 고진이 눈쌀을 찌푸리지는 않을 것이다(*알다시피 작년에 <윤리형이상학의 정초>가 백종현 교수의 번역으로 완역돼 나왔다).

 



 

 

김춘수의 마지막 시집 <쉰 한편의 비가>(현대문학사)가 나왔다. 아직 생존 시인이지만(*시인은 재작년에 작고했다), 시인 자신이 아마도 마지막 시집이 될 거란 얘기를 했고, 남은 여생엔 자서전을 집필할 계획이라 한다. 민음사에서 나온 전집 이후에 묶인 그의 시집은 <의자와 계단>(1999), <거울 속의 천사>(2001)에 이어 세번째인 듯싶다. 제목에서 알 수 있지만, 그에게서 릴케의 영향은 압도적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기(깃발)란 시 구절(제목인지?)도 초기시에 있었고, 그 전에 시인으로서의 입문 자체도 일본의 한 책방에서 발견한 릴케 시집 때문이었다고 하는 시인으로선 마지막 시집을 릴케풍(시인은 패러디라고 말한다)으로 끝내는 것이 자연스러워도 보인다.

한국시사에서 김춘수는 넌센스의 시인이면서 가장 논리적인 시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때 논리란 것은 그가 시작 못지 않게 시론에 열심이었던 사정과도 연관된다(사실 넌센스란 것은 정확한 논리의 배경하에서만 의미있는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의 시의 강점은 허튼 감정의 낭비가 없다는 점. 1950년대 이후 한국 현대시 전부는 김수영의 의미과잉의 시와 김춘수의 의미부재의 시 사이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적어도 논리적으론!). 그래서 현대시를 읽겠다면, 먼저 김수영을 읽으라, 그리고 김춘수를 읽으라...

 



 

 

두어 주쯤 됐지만, 고종석의 책들이 나왔다. 한 2년만인데, <자유의 무늬>와 <서얼단상>(개마고원)이 함께 나왔다. <자유의 무늬>가 좀 짧은 글 모음이고, <서얼단상>이 좀 긴 글 모음이다. 그는 워낙에 잘 쓰는 저널리스트이므로 나는 좀 긴 글이 더 좋다. 이제껏 그는 10여권의 단행본을 냈는데, 영어단어공부책 빼고는 나는 그의 책을 다 갖고 있고 절반 이상을 읽었다.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고종석의 유럽통신>(문학동네)과 <감염된 언어>(개마고원)이다. 아니 사실은 모든 책이 다 좋아할 만하다.

그는 내가 무조건 사는 몇 안되는 한국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한국어 사랑이 믿음직스럽다. 그의 글은 김훈이나 김규항 같은 칼잡이의 글이 아니어서 부드럽고 유연하다(*나는 세 사람의 문체에 대해서 나중에 글을 쓰게 된다). 그리고 치밀하면서 오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문필가의 교양이나 상식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표준적인 인물이 고종석이다. 또한 그는 한국 저널리스트(저널리즘적 글쓰기)의 한 자존심을 대표할 만한 인물이기도 하다. 요컨대, 고종석을 읽으라...

 

 

 



높은 수준의 제너럴리스트를 기치로 내세우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들이 나오고 있다. <나는 이런 책들을 읽어왔다>에서 <도쿄대생들은 바보가 되었는가>(청어람미디어)까지. 나는 그의 책들을 사지도 않았고 읽지도 않았지만(그의 고양이 빌딩은 부러워한다), 그의 입장들에 절반쯤 공감한다. 하지만 앞으로도 돈주고 사서 읽지는 않을 거 같다(*이 말은 절반만 지켜졌다. <뇌를 단련하다>를 샀지만 읽어보지는 않았기에). 사실 그와 무관한 인연은 아닌데, 그의 책을 내는 출판사의 편집장이 절친한 대학 선배였다. 하루는 그 선배로부터 일어로 음역된 지식인들의 이름을 확인하는 전화가 왔었는데, 내가 확인해준 몇 사람의 이름에는 마샬 맥루한도 들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는 이런 책들을 읽어왔다>란 책 얘기였다.

그럼, 내가 공감하지 않는 나머지 절반. 그가 자기 전공분야 외에도 과학 분야나 시사 쪽에 상당한 식견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한는 데는 공감하지만, 그래서 그가 픽션쪽보다는 넌픽션을 더 강조하는 데는 공감하지 않는다(도쿄대 철학과 출신이고 서구 고전을 두루 섭렵한 그이지만, 문학을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다). 실제의 현실은 가능한 현실들의 일부일 따름이다. 첨단과학에 대한 지식이 지식에 깊이를 주는 건 아니다. 다방면의 걸친 그의 박식이 그다지 부럽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어차피 관심분야가 서로 다른 것을 어쩌겠는가...

2002.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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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엇지 2007-09-11 14:54   좋아요 0 | URL
분야별 책의 판매량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봐 왔기 때문에,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과학 분야의 책들은 거의 팔리지도 읽히지도 않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치바나씨의 안타까움은 이렇게 균형잡히지 않은 독서와 지식의 축적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세상의 절반을 이루고 있는 것을 잃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 사회는 첨단과학의 기반 위에 구축되어 있고 그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지요. 물론 자동차를 움직이는데 있어서 정비와 운전의 분야는 다르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균형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과학기술에 대해 공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을 넘어서 이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고 운영되는가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입니다. 그렇게 두 분야가 연결이 되어 시너지를 발휘했으면 하는 것이 아마도 두 분야를 섭렵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타치바나씨의 안타까움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첨단과학에 대한 공부가 지식에 깊이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종교와 철학이 空에 대해 고민해 온 것 만큼, 자연과학에서도 도대체 空이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탐구해 왔습니다. 그것의 결과가 노벨상 수상분야이기도 한 양자전자기동역학 입니다. 하지만 이 두 분야는 전혀 연관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 것이 안타까운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래서 사회 전체의 지식 균형을 위해서 극단적으로까지 자연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주장하는 타치바나씨의 의견이 심히 동감됩니다.
 

'최근에 나온 책들'이란 연재는 2002년 가을부터 한 카페의 게시판에 올리기 시작했었다(정확하지는 않다). 이번에 인터넷에 떠있는 자료들을 정리하려고 하니까 아무래도 알라딘에 한데 모아두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30회부터인가는 동시에 올려놓았었기 때문에, 따로 옮겨오는 것들은 대략 29회분이 아닌가 싶다.

아주 먼 과거는 아닌지만, 3-4년전에 나온 책들을 원래대로 '최근에 나온 책들'이라고 옮겨올 수는 없기에 '에피소드'라는 말을 덧붙이기로 한다(스타워즈 시리즈의 '에피소드'에서 힌트를 얻었다). 말하자면 '최근에 나온 책들'의 잃어버린 고리들이다. 말미의 날짜는 글을 최초로 띄운 날짜이다. 옮겨오면서 새롭게 구겨넣은 말들은 (*)를 달았다. 어쨌거나 앞으로 짬짬이 옮겨올 이 글들에서 2-3년 정도의 시간차여행을 해보는 것도 나쁜 경험은 아닐 듯싶다.그것이 나만의 판단이 아니기를 바랄 뿐...

최근에 무게있는 (교양)학술서들이 몇 권 출간됐다. 관심분야가 한정돼 있기 때문에, 모든 분야의 책들을 망라할 수는 없지만, 인문사회쪽의 몇몇 주목할 만한 신간을 소개하고자 한다. 물론 나는 이 책들을 읽을 계획이지 아직 읽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장담하지 못하지만...



 

 

 

지젝의 <향락의 전이>(인간사랑)의 개역판이 나왔다. 나부터도 여러 차례 그 번역 수준에 대해서 비판해왔는데, 이번에 얼마나 교정/개역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궁금하지만 물론 그 책을 다시 사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에 하드카바로 장정이 바뀌면서 책값은 70%가 뛰었다(2만5천원). 양식있는 출판사라면 초판에 대해서 리콜을 실시해야 마땅하지만(열린책들의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의 경우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리콜을 실시한 바 있다), 그런 건 전혀 기대도 하지 않는다. 다만, 개역을 해서 과연 읽을 만한 책이 됐는가가 궁금할 따름이다(*나중에 알게 되는 것이지만, 역시나 기대를 배반한 책이었다).

역자의 '반성문'적인 개역판의 서문을 읽어봤는데, 그 진의야 누가 의심하겠는가? 다만, 지젝의 판권을 갖고 있는 출판사나 역자가 좀더 세심하게 책임감을 가지고 책을 만들어주었으면 하고 바랄 따름이다. 개역판 <향락의 전이>를 읽으시는 분은 조만간 서평을 올려주시기 바란다. 인간사랑에서 나온 <환상의 돌림병> 또한 <향락의 전이>보다는 낫지만, 그 번역이 신뢰할 만한 수준은 아닌데(그런 심증을 갖고 있다) 이번에 원서를 구하게 됐다. 부분적으로라도 조만간 번역의 장단점에 대한 글을 올릴 예정이다(*<향락의 전이>에 대한 리뷰는 예정대로 올렸었다).

 

 

 



한나 아렌트의 <칸트 정치철학 강의>(푸른숲)가 번역돼 나왔다. 역자는 이미 <정치와 진리>(책세상)이라는 아렌트 해설서를 쓴 이이다. 그 책의 서평 말미에서 나는 아렌트의 다른 저작들보다는 <칸트 정치철학 강의>의 역간을 기대한다고 썼는데, 생각보다 빨리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어 무척 반갑다(원서는 도서관에 주문중이다). 내가 아는 상식에 의하면, 아렌트는 특이하게도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전거로 삼아서 그의 정치철학을 재구성해내는데, 이것은 리오타르의 <판단력 비판> 다시 읽기인 <칸트의 숭고미에 대하여>(현대미학사)와 함께 <판단력 비판>에 대한 20세기 연구/해석 중 가장 중요한 문헌에 속한다. 더불어 3대 비판서 중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온 <판단력 비판>이 재평가되는 데 기여한 책이다. 내 생각에 아렌트의 책은 레오 스트라우스 <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아카넷)와 함께 정치철학 분야에서 올해 번역돼 나온 가장 중요한 책이다.

 

 

 



생물학자 에른스트 마이어의 <이것이 생물학이다>(몸과마음)이 번역돼 나왔다. 500쪽 가까운 분량을 최재천 교수를 비롯한 생물학 전공자들이 우리말로 옮겼다. 원저는 1997년에 나온 마이어의 21번째 책이라고 한다. 20세기의 다윈이라 불리는 마이어의 책으론 <진화론 논쟁>(사이언스북스)이 나온 적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그렇게 강한 인상을 받지는 못했는데(후배 다윈주의자들인 리처드 도킨스나 스티븐 제이 굴드와 비교해서), 이번 저작은 기대감을 갖게 한다.

평소 생물학 교양서를 갖고 싶었는데(킴볼 생물학 같은 책 말고), 마이어의 책이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줄 듯하다(주문해놓은 책이라 아직 만져보지도 못했지만). 인터넷을 검색해보니까 <하인리히 슐리만의 트로이발굴>이란 책도 저자가 에른스트 마이어로 돼 있는데, 그가 생물학자 에른스트 마이어언지 아니면 동명이인의 고고학자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김상환 교수의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창작과비평사)가 출간됐다. 김교수는 그간에 소위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의 현대철학(푸코의 규정)에 대해서 가장 정통한 이해를 선보여 왔는데, 이번에 그 성과들이 단행본으로 묶였다. 아직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짐작에 대부분의 글들이 이미 발표된 것들이지 싶다. 하지만 아직 묶이지 않은 글들도 많이 있는 걸로 봐서 그의 무게 있는 저작 목록은 당분간 이어질 것 같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도 곧 역간될 거라는 소문이 있다(*알다시피 재작년에 역간되었다). 개인적으로 그의 데리다와 라캉에 대한 깊이있는 번역/연구서가 기다려진다. 김교수의 신작과 비슷한 주제(니체 이후의 해석학)를 다룬 책으로 애런 슈리프트의 <니체와 해석의 문제>(푸른숲)가 권할 만하다.

 

 

 



김동식 교수의 <프래그머티즘>(아카넷)이 출간됐다. 김교수는 리처드 로티 전공자로서 이미 <로티의 신실용주의>(철학과현실사)를 출간한 바 있는 중견학자이다. 흔히 실용주의로 번역돼온 프래그머티즘이 한국에 수입된 지 수십년이 되었지만, 대개의 다른 학술분야와 마찬가지로 내놓을 만한 성과가 별로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저작은 조금은 뒤늦게 전공학자들의 '책임'을 반영하고 있다. 분석철학과 함께 현대 미국철학을 대표하는 사조인 프로그머티즘에 대한 개괄적 이해가 이번의 저작과 함께 가능해질 거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덧붙여 말하자면, 국내 연구자에 의한 분석철학 입문서는 아직 없다. 박이문 교수의 <현상학과 분석철학>이라는 개론서가 있을 뿐이다. 몇 사람이 돌려보는 전문적인 논문보다도 교양 수준의 개론서/입문서들이 많아져야 그 나라의 '학술'수준이 올라갈 수 있다는 게 개인적인 믿음이다. 연구자들의 책임(밥값!) 의식을 다시금 촉구하게 된다(학문하는 사람이 학문이 뭐 별거냐고 말하는 건 도통한 게 아니라 천박한 것이다. 학문하는 사람은 별거아닌 학문을 별거인 걸로 만들기 위해 죽어라고 노력해야 된다. 그게 책임이고 윤리이다!).

2002.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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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타 2006-05-03 02:24   좋아요 0 | URL
멋지심돠~

로쟈 2006-05-03 07:18   좋아요 0 | URL
옛날에 쓴 글들을 올린다는 게 좀 멋쩍은 일이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