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인에 기고한 <지식인을 위한 변명>의 리뷰기사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약자'가 아닌 지식인, 혹은 '약자'가 아니고자 하는 지식인이 득세할 때 '지식인의 시대'는 종언을 고한다. 사회는 이들이 비워놓은 자리를 다만 '사이비 지식인'(혹은 '집 지키는 개')들로 채워놓을 따름이다. '지식 계급'은 '지식층'으로 용해되고, '지식층'은 또 자연스레 사회 '지도층'으로 편입된다. 이것은 애도할 만한 일일까? 그나마 아직은 '양심고백'과 '지지 선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지식인 시대의 흔적을 다행스러워해야 할까?"

마지막 문장에서 '얌심고백'은 물론 삼성 비자금에 대해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의 고백을 가리킨다. 그리고 '지지 선언'은 그에 대한 지지를 표하면서 '전국 철학자 앙가주망 네트워크(PEN)’의 이름으로 낸 삼성 특검법도입 촉구성명을 염두에 둔 것이다. PEN의 성명 발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김상봉 교수와의 인터뷰가 기사가 있길래 옮겨놓는다(사실은 나도 얼마전에 PEN으로부터 성명에 동참해달라는 메일을 받았는데, '철학자'가 아니어서 따로 의사표시를 하지는 않았다. '문학자 네트워크'에서 보냈다면 사정은 달라졌겠지만)...  

경향신문(07. 11. 27) ‘철학자…’ 김상봉 교수 “삼성의 협박에 끌려다녀선 안돼”

지식인이 사라진 시대, 2007년이 저물어가는 한국사회에서 철학자들이 발언하기 시작했다. 참여연대 느티나무 카페에서 이용철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의 삼성 뇌물 500만원 폭로가 있었던 그 날(11월19일).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앞에서는 전국의 철학자들이 ‘전국 철학자 앙가주망 네트워크(PEN)’의 이름으로 삼성 특검법 도입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 참여한 철학자는 210명이다. 김남두 서울대 교수, 유초하 충북대 교수, 홍윤기 동국대 교수, 박상환 성균관대 교수, 강신익 인제대 교수, 신승환 가톨릭대 교수 등 참여자들의 면면은 한국 철학계를 이끄는 주축들이다. 이 전 비서관의 폭로와 맞물려 국회의 특검법 통과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 이번 성명 뒤에는 신속하게 철학자들의 뜻을 모은 김상봉 교수(47)가 있었다. 김교수를 25일 오후 서울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만났다.

김교수는 한사코 자신은 ‘잡일’을 했을 뿐이라고 했다. 시작은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이 음해성 시비 등으로 본질에서 벗어날 조짐을 보이던 2주일 쯤 전 홍윤기 동국대 교수와의 대화에서였다. “우리가 뭔가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김교수의 말에 홍교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홍교수가 ‘격문’을 쓰기로 하고 김교수는 ‘연락책’을 맡았다. “과연 시민과 성직자의 양심이 이렇게 무시되고 경시돼야 하는가”를 묻는 홍교수의 ‘명문’이 나왔다. 김교수는 전국 각지에 분포된 10여명의 철학 교수들에게 연락했다. 철학자들의 중지를 모아달라고. 이윽고 210여명의 교수의 이름이 모였다.

철학자들이 발언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민교협 같은 운동단체와는 좀 다른 느낌을 주죠. 같은 말이라도 ‘철학자들은 저렇게 말하는구나’ 하는 걸 보여줄 수 있어요. 똑같은 정치·사회 이슈를 철학의 눈으로 봤을 때 더 근본적으로 성찰 수 있는 지점이 있는 겁니다. 이번 경우 다들 비리가 어떻고 얘기들을 많이 하고, 그것도 일리가 있지만, 철학자 입장에서는 한 인간이 양심선언이라고 해서 발언할 때 우리는 그 양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봤어요.”

철학자들이 모여 성명을 낸 것은 이번이 여섯번째다. 2004년 탄핵 후 4·15 총선을 앞두고 정동영 열린우리당 선대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한 것을 시작으로(실제로 정위원장은 사퇴했고, 여권은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다) 이라크 파병 반대 성명, 송두율 교수 사건을 맡은 서울고법 항소심 재판부에 보낸 무죄 석방과 국보법 폐지 성명, 보수단체의 전시작통권 환수 반대 서명에 전·현직 한국철학회 회장들이 악의적으로 활용될 때 학회장의 사퇴를 촉구한 성명 등 고비고비마다 이들은 발언하고 개입했다.

“PEN은 사실 실체가 없는 조직입니다. 회장도, 대표도, 사무실도 없어요. 일종의 유목 네트워크죠. 하지만 몇 차례 이런 경험을 공유하며 한국사회에 중요한 사안이 터지면 신속하게 중지를 모아 지식인들의 목소리를 내는 체계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들은 문구 하나도 치열하게 토론한다. 이번에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것은 ‘삼성제품 불매운동’ 문구이다. “불매운동 안하겠다는 얘기는 그냥 한 번 짖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네(삼성)들이 뭘 겁내겠느냐는 말이죠. ‘이 녀석들아, 또 떠들어라’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국가경제 어쩌고 하는 여론몰이 때문에 불매운동 못하겠다는 것은 저쪽이 바라는 바이자, 노리는 바입니다. ‘공포의 동원’이죠.”

그는 삼성 불매운동 때문에 국가경제가 위험에 빠진다는 논리는 박정희 독재 때 독재를 비판하면 북이 남침해 올 지 모른다는 논리와 똑같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에는 국가권력이든 삼성이든, 황우석이든 자신을 국가(또는 국민)의 이익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가 위험에 처하면 국가가 위험에 처한다는 얼토당토 않은 동일화의 논법으로 전국민을 협박합니다. 삼성 족벌체제가 무너진다고 해서 삼성이 망하겠습니까. 백번 양보해 삼성이 망한다고 해서 국가경제가 무너지겠습니까. 평소엔 세계 12위 경제대국을 자랑하다가도 매번 비리 척결 얘기만 나오면 유아기로 퇴행해버립니다. 언제까지 삼성의 협박에 끌려다닐 건가요. 인간을 억압하고 노예화시키는 것은 국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도 할 수 있고 기업도 자본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PEN에 동참한 철학자들은 조만간 대학 내에서 ‘쟁점 강의’를 시작하기로 했다. 강의명은 ‘아직도 삼성 제품을 쓰십니까?’다. “부도덕한 기업의 제품을 쓰는 것은 부도덕을 방조하는 것입니다. 각자가 한 학기에 30분이라씩이라도 할 것입니다. 기왕의 삼성제품은 마크를 지우고 쓰고, 다 쓰면 다른 회사 제품을 사도록, 민교협과 함께 지속적으로 홍보할 것입니다. 언젠가 삼성 제품 들고 있으면 부도덕하고 교양없는 사람처럼 받아들여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김교수는 지난 4월 전남대가 정몽준 의원에게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려 했던 계획을 철회토록 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죽고 사는 것은 돈이나 건물이 아니라 정신입니다. 정신이 죽으면 철학은 끝입니다. 정몽준씨가 대학에 어떤 건물을 지어주기로 되어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돈을 주기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학이 기업 찾아다니며 ‘앵벌이’ 한다는 것은 학문의 독립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학자들이 양심의 가책 없이 인간을 위한 학문을 한다는 말을 한다는 게 너무 놀랍습니다. 400억~500억원 들여 삼성관, 엘지관을 지은 대학들은 언젠가 그 건물이 수치스러운 기념물이라는 것을 깨닫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에는 그들에게 분명히 물어야 합니다. 당신들 자랑스럽냐고. 그러고도 당신들이 국민 세금을 지원 받을 존재 이유가 있느냐고.”

정의원에 대한 명예철학박사 수여를 철회하라는 요구는 교수들이 먼저 내서, 대학원생, 학부생, 학생회까지 한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더 많이 배우고 더 책임이 무거운 교수들이 청년학생들보다 먼저 알고, 먼저 얘기를 하는 게 마땅합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사회적인 발언, 비판의 몫이 계속 학생들에게만 돌아가다보니 젊은 학생들이 그에 대한 비판까지 모두 떠안아야 했습니다. 학생들이 모든 걸 다 떠안게 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하게는, 그러면 학생들이 공부를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번 일은 일종의 교육적 효과도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자기 선생들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된 거죠. 저 사람들은 가르치는 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이구나. 교수회의에서도 그 점이 크게 작용했어요.”

자본의 공세에 거의 모든 대학들이 무릎을 꿇은 지금 전남대 철학과 혼자만으로는 너무 미약하지 않을까. “아직은 그런 걸 물리칠 줄 아는 대학은 전남대 그것도 철학과 뿐이죠. 그러나 처음이 어려워요. 이런 식의 사례가 생겨난다면 다른 데서도 이런 비슷한 일들에 직면할 때 생각 안할 것을 한 번 생각하고, 한 번 생각할 것을 두 번 생각하겠죠. 대학 사회가 자본의 매수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만은 않는다는 사례를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전남대 철학과와 PEN에서 새로운 지식인 운동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진보적인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 내에서는 신뢰를 못 받는 경우가 많았어요. 자기가 선 자리를 진보적으로 견인하지 못하면서 밖에 나가서 세상을 진보적으로 견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철학계는 한창 공부하는 사람들이 일관되게 진보적 목소리를 내니까 학문후속세대도 그런 쪽으로 견인되고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을 보고 누가 ‘김상봉이 공부하기 싫어서 저 짓 하고 다닌다’고 하겠습니까. 이런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어떤 새로운 공동체의 전망을 열어줍니다. 한국 학계 초유의 일입니다.”

그는 “1970~80년대 진보운동 진영을 문학계와 역사학계가 견인해 왔다면 앞으로는 철학계가 견인할 것”이라고도 했다. 사실 문학계 안팎에서는 이미 근대문학의 역할은 끝났다는 얘기가 나온 지 오래다. 지금까지 PEN의 활동은 새로운 지식인 운동을 위한 준비였고 어느 정도 검증도 됐다.

“정파를 만들지 않고 교조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오직 이성을 신뢰하고 약자의 편에 서서 한국사회를 진보적 방향으로 견인해 나가려 합니다. 사실 지난 100년간 한국 철학은 외래철학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그 덕에 지식이라면 많이 축적했어요. 이제는 현실과 만나며 현실을 철학적으로 해석해내고 현실을 끊임없이 참된 방향으로 견인해나갈 것입니다. 한 사회 내에서 왜 철학이 필요한가를 보여줄 자신이 있습니다.”

그날 새벽차를 타고 상경해 인터뷰를 하고 월요일 아침 강의가 있어 광주로 내려가야 한다며 총총걸음으로 돌아서는 김교수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지식인이 사라진 시대에 철학자가 발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손제민기자)

07. 11. 27.

P.S. 아래는 PEN의 성명 소개기사이다.

경향신문(07. 11. 27) [성명] PEN “양심선언을 지지하고 엄정한 특검 수사를 촉구한다”

전국 철학자 앙가주망 네트워크 (PEN, Philosophical Engagement Network)

특수부 출신 전직 검사이자 전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 그리고 현재 변호사인 대한민국 시민 김용철 님의 양심고백을 근거로 지난 10월 29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삼성그룹 비자금 전모에 대한 수사를 촉구한지 한달이 되어가고 있다. 그 동안 우리 철학하는 이들은 우리의 직업인 철학에서 가장 기본적 윤리 개념인 ‘양심’의 입장에서, 과연 우리 국가와 사회가 바로 이 양심을 알아보고 지원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를 비상한 관심으로 주시해 왔다. 그리고 지금 우리 철학하는 이들은 ‘삼성제국’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경제적 독재권력이 중심에 놓인 이 사건을 두고 국가 기관, 각종 사회권력들, 특히 청와대와 여야 정당, 그리고 언론의 반응을 보면서 크게 절망한 끝에 더 이상 사태를 좌시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 우선 첫째, 우리는 검찰이나 금융감독원이라는 국가권력 담당자들이 자기 인생을 걸고 삼성제국의 거대한 비리를 짚어낸 한 인간의 양심을 알아볼 그 어떤 의지도 없다는 데 실망한다.
― 그리고 둘째, 우리는 언론을 비롯한 이 사회의 각종 권력들이 침묵의 카르텔을 고수하면서, 김용철이라는 한 시민의 양심이 묻히고 그가 파렴치범으로 각인되기를 기다리는 것 같은 처신을 보이는 데에 절망한다.

10월 29일 기자회견에서 사제단은 김용철 전 삼성 구조본 법무팀장 명의로 우리은행 삼성센터지점에 개설된 차명계좌 세 개와 굿모닝신한증권 도곡동 지점의 증권 계좌 한 개의 번호, 그리고 그 계좌들에서 발생한 이자소득의 액수까지 제시했다. 과거 노태우 전대통령의 4천억원 비자금 사건은 당시 박계동 신한국당 의원이 제시한 예금잔고 조회표 한 장으로 그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까이는 2006년 현대차 비자금 사건의 경우 A4 서너 장에 불과한 내부 실무자의 회계자료 제보 하나로 정몽구 회장의 구속까지 이르는 데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 사건들 모두 대검 중수부가 바로 수사에 착수했었다. 

그리고 올해 들어서는 한 고위공직자의 사소한 권력형 비리와 남녀 스캔들이 뒤얽힌 학력 관계 사문서위조사건을 갖고 유력한 사립대학의 행정을 마비시킬 정도로 털어내다 급기야 쌍용그룹 전 회장이 집안에 은닉한 막대한 비자금까지 찾아냈다. 무소불위의 권력과 만능의 수사력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검찰과 경제계의 검찰격인 금융감독원은 김용철 변호사와 사제단이 생명과 인격을 걸고 제시한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신속한 수사 착수는커녕 마치 범인들로 하여금 증거를 인멸하고 입 맞출 시간을 갖게 할 요량인 양 계속 시간을 끌었었다. 어떤 경우에도 검찰과 금감원의 수사 능력이 아니라 수사 의지가 문제다. 과연 시민과 성직자의 양심이 국가기관에 의해 이렇게 무시되고 경시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힐 시간이 지체되는 동안 삼성제국의 비리를 토설한 김용철 전 법무팀장을 파렴치범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파상적으로 행해져 그 사건을 보는 보통 시민들의 시각을 호도한다는 것이다. 한 학력 위조자에 대해서는 그 알몸 사진이나 사생활까지 샅샅이 캐던 족벌언론들은 이번 사건의 기사를 최대한 축소하고 김용철 변호사의 신상은 어두운 쪽으로 최대한 키워 드러냄으로써 ‘삼성 감싸기’에 급급했다. 호사법 제1조 1항에 따르면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는 변호사들의 모임인 대한변협은 명백히 공익을 저해하고 국가 전체를 오염시키는 은밀한 범법집단인 삼성제국의 행태를 토설한 김용철 변호사가 “의뢰인 비밀 유지 의무”를 위반했다며 징계를 검토하겠다고 나서 양심 모욕이라는 추태의 정점에 섰다.

국가권력과 사회권력의 이런 비호를 등에 업은 가운데 삼성제국 안에서 드디어 비장의 승부수가 연출되었다. 김용철 변호사와 마찬가지로 검찰의 고위 간부 출신으로 삼성의 현직 법무실장인 이종왕 변호사가 변호사직까지 내던지며 김 변호사의 언행을 “모두 거짓”으로 단정하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 실장의 사직으로 삼성은 김 변호사 개인을 ’파렴치범’으로 부각시키고 자신들의 ’결백’을 호소해 이번 ’진실 공방’에서 여론을 유리하게 끌고 나가려는 의도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이제 싸움은 ‘삼성제국의 비리 대(對) 한 내부고발자의 시민적 양심’이 아니라 ‘변호사 대(對) 변호사’의 격투기로 축소될 전망이다. 이렇게 우리 사회와 국가는 한 시민의 양심을 알아볼 능력도 없단 말인가?

양심이란 자기 신념이나 사고 또는 행위가 옳다고 믿는 주관적 확신이다 그래서 어떤 개인이 자기의 양심으로만 그 객관적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양심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어떤 사회나 국가의 정의도 ‘실천적 실체성’을 확보할 수 없다. 이 때문에 한 개인이 양심을 걸고 나설 때 그 ‘진정성(眞情性)’을 알아채는 것은 그 사회나 국가가 올바르게 발전하는 데 꼭 필요한 사회능력 또는 국가능력이다. 그럼 시민 김용철은 지금 양심적 언행을 하고 있는가?

자기 양심을 걸고 삼성제국의 비리를 고백한 김용철 변호사는 지금까지 착하고 올바른 인생만 산 인물이 아니다. 5공 살인정권의 수괴 전두환의 비자금을 기어이 찾아낸 특수부 검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실토했듯이, 삼성제국 안에서 제국의 범죄를 진두지휘한 그 범죄의 “공범자”이자 경우에 따라서는 “주범”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 철학자 앙가주망 네트워크(PEN)’에 참여한 우리 철학자들은 지금 이 순간, 변호사이기 이전에 이 얼룩진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점에 서서 제국의 비리를 외부에 알린 이 ‘평범한 시민 김용철’의 뒤에 서고자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철학적 분별력에 따르면 바로 이 순간 시민 김용철이야말로 양심의 절실함을 갈구하는 ‘양심적 인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그는 삼성정치자금 사건,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을 통한 불법 상속 및 증여 시도 사건, 삼성 X파일 사건 등으로 점철되는 삼성제국의 비리 행진 안에 그것을 추동하는 내부 부패 구조가 있다는 것을 여실히 열어 보임으로써 우리 사회와 국가에 만연한 권력불신과 권력불안의 또 하나 근원이 어디인가를 분명히 알려주었다. 그의 양심선언의 내용은 우리 사회에 아주 유의미한 것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통해 우리 삶을 더 잘 알 수 있는 더 많은 진리를 획득할 수 있었다.(양심 진정성의 유의미성 조건 충족)

이제 삼성을 빼놓고는, 우리 사회와 국가의 민주주의와 청렴함을 더 이상 논할 수 없다. 삼성은 더 이상 단순한 경제권력이 아니다. 국세청을 비롯한 관료, 검찰, 사법부 판사, 그리고 여야정치권 등의 국가권력, 금융, 재계, 언론 등의 사회권력, 나아가 학계는 물론이고 심지어 시민사회와 청와대까지도 장악하려는 전체주의적 독재권력이고자 하는 야망의 화신으로 분명히 부각되었다. 그들이 꿈꾸는 것은 국가 안에서 국가 위에 군림하는 제국(帝國)이다. 그런데 시민 김용철이 말했듯이 “삼성의 역기능은 임계점에 달했지만 자정능력이 없다.”

한 법무법인의 동료들부터도 배척을 받았다. 이런 그의 처지는 어쩔 수 없이 자기 이익에 초연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그를 내몰았다. 그는 자기 행위가 이익에 초연함을 보임으로서 자기 양심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을 충족시켰다.(양심 진정성에 있어서 이익초연성 조건 충족)

그리고 그는 분명히 나약한 인간이다. 그는 생래적으로 의로운 인간이 아니고 그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이런 자신의 나약성에 저항하기 위해 수도원 안으로 자기를 가두었다 그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는 곳에다 자신을 묶었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는 돌아가면 자기파멸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곳에다 스스로를 결박했다. 언제든지 굽혀질 수 있는 자기 양심의 나약성에 대해 그는 스스로 저항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양심 진정성에 있어서 자기나약성에 대한 자기저항의 조건 충족)

무엇보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 양심의 진정성에 쏟아질 수 있는 모든 의혹과 비난 앞에 스스로를 드러내고 스스로 시험대 위에 올랐다. 우리는 그 앞에서 그에게 어떤 비난도 해도 되고 어떤 의혹을 제기해도 된다. 그는 비난과 비판 앞에 스스로를 드러내고 해명한다.(양심 진정성에 있어서 恒常的 自己試驗用意의 조건 충족)

이러고도 우리 철학하는 이들이 시민 김용철을 믿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인가?
이러고도 그를 믿을 능력과 용기가 우리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없다는 얘기인가?
양심은 오직 착하고 선량한 인간만이 가지는 선한 인성의 발동이 아니다. 아무리 악한 인간일지라도 그 어떤 계기를 통해, 그리고 스스로 올바르고 싶고 남들로부터 올바른 인간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원천적 욕구를 갖기 때문에, 자신의 양심을 공표하고 그 진정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절실함이 있을 수 있다.

우리 철학이 통찰한 이런 양심 진정성의 요건들에 비추어 우리 철학하는 이들은 거침없이 ‘시민 김용철’의 뒤에 서고자 한다. 한 나라가 ‘발전’하는 데 경제발전의 능력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한 나라가 ‘지속 적으로 발전’하려면 그 경제발전 속에서 양심을 발휘하고 그 양심을 알아보고 그 양심대로 정의로운 사회와 국가를 만드는 더 고차적인 능력이 필수적이다. 삼성의 저력은 그 경제 능력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의 사랑과 긍지에 있다. 그러나 족벌체제로 굳어진 삼성제국은 국민의 이런 사랑과 긍지를 끊임없이 배신해 왔다. 족벌제국 삼성은 이제 국민기업 삼성 발전의 족쇄이고 그 질곡이 되려고 한다. 양심을 알아보는 능력, 우리에겐 이제 그것이 절실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대한민국의 국민에게 우리가 추구해 온 철학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三星帝國, 그 非理를 吐說하는 良心을 알아보자!’
삼성제국은 이 나라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잠식하는 국가 안의 제국이며, 이 나라 지배엘리트 전체를 오염시키려는 반국가 범법집단이다. 따라서 우리 철학하는 이들은 삼성제국의 해체와 삼성의 진정한 발전, 그 위에서 꽃필 대한민국의 정의로운 번영을 위해 다음과 같은 것을 요구한다.

1. 여야 정치권과 청와대는 이 삼성제국에 대한 조사와 수사를 주저하는 검찰과 금융감독원의 고위층을 직권정지하고 삼성제국 해체를 위한 특검제를 도입하라! 그리고 특검 수사가 종결될 때까지, 삼성 관리 대상자로 지목된 임채진 차기 검찰총장 내정자의 임용을 철회하라!

2. 청와대는 부패척결의 부담을 차기정부에 전가하지 말고 임기 중에 삼성사태 진상 규명에 전력을 질주하라. 청와대는 참여정부 5년간 삼성권력이 급속하게 비대해지는 것을 방치했을 뿐만 아니라 해괴한 논리를 동원하여 특검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공언함으로써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삼성 감싸기에 나서고 있다. 청와대는 삼성 감싸기를 중단하고 특검법 통과에 적극 협조하라!

3. 금융감독원과 국세청은 변양균 사건과 현대/쌍용 비자금 수사에서 보여준 수사 강도를 능가하는 정도의 방식으로 삼성제국의 범죄기획처인 삼성 전략기획실의 운용과 그 비자금 전모를 낱낱이 밝혀내라!

4. 경제관련 정부 당국과 국회는 단 2%도 안 되는 주식으로 60개 대기업을 좌우하는 삼성가의 족벌경영체제를 이 기회에 종식시키고, 산업자본/금융자본 분리 원칙을 폐기하거나 약화시키려는 어떤 음험한 발상도 금지하며, 금융기관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정책 기조를 공고하게 확립하라!

5. 국민의 진정한 알 권리를 외면하는 족벌언론들은 침묵의 카르텔을 해체하고 국민 앞에 사과하며 삼성제국의 진면모를 분명히 알리는 데 앞장서라!

6. 대통령 자리에만 눈멀어 삼성제국의 작태에 눈감으려는 통합신당과 한나라당의 기회주의적 정치인들은 김용철 변호사의 증언을 청취할 청문회를 조속히 개최하여 삼성제국의 반국가 음모를 전 국민 앞에 공개하고 공적 기록으로 남기도록 하라!

7. 이런 모든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우리 철학하는 이들은 그 어떤 명목으로 지급되는 삼성의 사회적 기여금이나 기부금도 사회적 뇌물이나 매수로 간주할 것이다. 모든 언론, 학술단체 그리고 시민단체는 삼성 사태가 종결될 때까지 그 어떤 삼성의 기부금도 거부하여 경제권력 독재 음모의 분쇄에 동참하라!

8. 그리고 이 기회에 삼성제국의 반국가적 망동을 응징하고 진정한 삼성의 경쟁력을 확립시킬 채찍을 가한다는 취지에서 삼성의 족벌체제가 종식될 때까지 일체의 삼성 제품에 대해 범국민적 불매운동을 벌일 것을 시민사회에 제안한다.

2007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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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1-27 08:59   좋아요 0 | URL
역시 김상봉, 홍윤기 선생님이시군요!

로쟈 2007-11-27 13:43   좋아요 0 | URL
'잡일'하는 철학자들이 좀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잡일만 할 수는 없겠으나...

섬나무 2007-11-27 12:53   좋아요 0 | URL
전남대에 이런 교수님이 계셨군요. 얼마 전에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삼성비자금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 얘기가 나오는데 얘기의 갈래가 김용철씨의 폭로 저의에 대한 궁금함이라든가 그의 학창시절의 일면에 대한 얘기들이었습니다. 옆에서 듣기에 열이 뻗치는 내용이었지요... 도대체 왜 우리나라는 이런 상황을 보고 모두들 조용한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삼성공화국이라는 자조적인 단어에 안주하려는건지... 그나마 역할을 하려는 지식인과 언론의 기능을 하려는 언론이 그나마 있음에 위안을 삼아야겠습니다. 기사 전달 감사합니다.

로쟈 2007-11-27 13:44   좋아요 0 | URL
지식인 시대의 종언은 대세인 듯하지만 아직은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송연 2007-11-28 09:47   좋아요 0 | URL
김상봉선생님에게는 겸손함이 홍윤기 선생님에게는 당당함이, 그분들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정말로 이제는 철학계도 그들만의 철학이 아니라 현실속으로 움직일 필요가 절실해진 시점입니다.

로쟈 2007-11-28 18:10   좋아요 0 | URL
학술활동도 열심인 분들이죠...
 

, 스캔들몇 달전(이라고 적다가 다시 확인해보니 지난봄이다)에 지라르의 <그를 통해 스캔들이 왔다>(문학과지성사, 2007)이 출간됐다(소개기사는 http://blog.aladin.co.kr/mramor/1104858). 책은 바로 구입해서 꽂아두었는데(아직 영역본은 나오지 않은 듯하다) 중앙일보의 '테마읽기'를 보고 다시 떠올리게 됐다. 게다가 최근에 <희생양>(민음사, 2007)이 재출간되기도 해서 잠시 지라르 읽기 목록도 다시 챙겨두었다. 바로 이전에 소개된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문학과지성사, 2004)와 <문화의 기원>(기파랑, 2006)에 대해서는 따로 정리한 바가 있기에(http://blog.aladin.co.kr/mramor/909949, http://blog.aladin.co.kr/mramor/920680 참조) 이번엔 <스캔들>과 <희생양>을 읽어볼까 한다(<희생양> 혹은 <속죄양>은 문학평론가 김현이 <르레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에서 지라르의 가장 좋은 책이라고 평한 바 있다). 지라르가 생소한 독자라면 아래 기사를 참고해서 '인문학의 다윈' 혹은 '인류학의 도스토예프스키'(나는 그렇게 부른다)와 한번쯤 만나보시길...

중앙일보(07. 11. 24) [테마읽기] 르네 지라르

문화인류학자 르네 지라르는 흔히 다윈에 비교된다. 한 주제를 두고 평생에 걸쳐 끈질기게 탐구하고 있어서다. 그의 지적 화두는 ‘희생양과 모방적 욕망’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다룬 그의 대표적인 책은 여럿 나와 있으나, 대담집은 의외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그를 통해 스캔들이 왔다』(문학과지성사)의 2부는 정치학자와 나눈 대담이다. 『문화의 기원』(기파랑)은 두 명의 문학 전공자와 벌인 논쟁적인 토론을 기록한 본격적인 대담집이다.

두 권의 책을 읽다 보면 대담집 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된다. 이론서에는 결코 나오지 않는 자전적 기록을 볼 수 있어서다.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건만, 지라르는 인디애나대학에 재직할 적에 논문을 발표하지 않아 교수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고 한다. 대담집에는 비판적이고 공격적인 질문도 제법 들어 있다. 학계의 오해를 받기도 했는데, 그 유명한 레비스트로스가 대표적인 경우다. 이에 대해 지라르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충실히 설명한다.



그의 모방 메커니즘을 거칠게나마 요약하면 “모방적 욕망에서 시작하여 모방적 경쟁을 거쳐 모방위기 또는 희생위기로 격화되었다가 마침내 희생양의 해결로 끝나는 모든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풀이하자면 이렇다. 지라르의 이론이 놀라운 것은, 욕망이 모방적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는 데 있다. 우리는 모델 되는 사람의 욕망을 욕망할 뿐이다. 이 관계는 끝내 두 사람을 경쟁으로 몰아가게 된다. 욕망의 대상은 사라지고, 상대를 이기는 것이 목적이 되는 셈이다. 이 상황은 전염된다. 두 사람이 경쟁하며 욕망하는 것은 제3자도 탐낼 만한 법이다. 마침내 경쟁자들의 난투극이 벌어지고 만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이 위기를 어떻게 중지시킬 수 있을까. 공동체 구성원이 만장일치로 지목한 희생양을 살해하는 것이 그 해결책이었다고 지라르는 분석한다. “집단적 폭력을 자의적으로 선택한 공동체의 한 구성원에게 집중적으로 향하는 것”이다. 신화나 고대종교는 희생양을 보는 관점이 동일했다. 위기의 원인을 희생양에게 두고 있었고, 공동체의 평화를 되찾았다는 이유로 희생양을 신적인 존재로 추켜세웠다. 그런데 기독교는 다르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리스도가 공동체의 미움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공동체의 만장일치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바로 희생양이 무고하다는, 오랫동안 감추어졌던 비밀을 폭로한다. “성서의 희생양은 무고한 존재여서, 비난 받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는 기꺼이 죽어줌으로써 희생양 메커니즘의 종식을 불러왔다. 지라르는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진정으로 개종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롭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개종이란, 자신이 박해자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우리 욕망의 모델로 선택한다는 것을 뜻한다(그리스도가 욕망한 것을 욕망하라!).



우리는 지금 얼마나 많은 희생양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세대로는 청년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으며, 민족으로는 제3세계 출신을 차별하고 있고, 노동현장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억압하고 있다. 이들은 무고하며 외려 우리들이 박해자라 고백할 때 더 이상의 희생양이 생겨나지 않을 터다.(이권우_도서평론가)

07. 11. 25.

P.S. 지라르의 오이디푸스론과 도스토에프스키론이 정식으로 번역/소개되기를 기대한다는 얘기는 예전에 적은 바 있는데, 최근에 나의 관심을 자극하는 책은 그의 셰익스피어론이다. <질투의 극장>(1991/2004)이 그것인데 영역본으로 366쪽 분량이니까 오이디푸스론과 도스토예프스키론을 합한 것보다도 더 분량이 많다. 그럼에도 이 책 또한 번역/소개되면 좋겠다. 최근에 500쪽이 넘는 인문 번역서들도 드물지 않게 출간되고 있으므로 무망한 기대는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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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6 0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1-26 08:25   좋아요 0 | URL
반가운 소식이군요.^^

람혼 2007-11-26 15:07   좋아요 0 | URL
<희생양>은 예전에 이데아 총서를 통해 출간되었던 판본을 갖고 있는데, '쌔끈한' 새 표지를 보니 '견물생심'이라는 사자성어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설마' 개역판은 아니겠죠? ^^

로쟈 2007-11-26 18:42   좋아요 0 | URL
개역판일 리는 없는 것 같습니다.^^

소경 2007-11-26 18:39   좋아요 0 | URL
얼른 관심 가지고 읽을 돈을 마련해야겠네요. 전 여태 청동기시대 토기를 가지고 단지 형식으로만 기억하고 있던 것 같으니. 주위엔 형식과 문양을 가지고 문화권이나 시기만 다루는 지루한 고고학만 어울리는 것 같으니깐요. 그쪽도 부족한 것 많지만 우선 책을 읽어야겠습니다. ^^

로쟈 2007-11-26 18:43   좋아요 0 | URL
고고학은 왠지 땅 파는 것만 연상이 돼서요.^^;
 

'11월의 읽을 만한 책'(http://blog.aladin.co.kr/mramor/1670896)의 한권으로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책세상, 2007)을 올려놓았었는데, 잠시 인사치레의 자료를 옮겨놓는다. <모나드론>은 지난봄 한겨레의 '고전 다시읽기'에서 다루어졌고 이 글은 단행본 <고전의 향연>(한겨레출판, 2007)에 재수록되었다.

한겨레(07. 03. 03) 내 안에 너 있고 네 안에 나 있다

현대의 철학은 근대 철학이 남긴 유산을 잇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한계를 직시하고 또 그 ‘말류’가 남긴 문제점들을 해결하려 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전통과 탈근대 사이에는 미묘한 연계선이 형성되고 있다. 우리는 결코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언제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거기에서 어떤 유산들을 길어 올릴 수 있다. 근대의 사유들은 전통을 뿌리 채 부정하곤 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근대와의 대결을 통해서 진행되고 있는 현대 사유는 근대가 버렸던 전통을 새롭게 음미하고 거기에서 결코 버릴 수 없는 요소들을 새롭게 발굴하는데 일정한 노력을 바치고 있다.

‘전근대’와 ‘첨단’ 동시에 갖춘 철학
서구 철학사에 눈길을 맞출 경우, 우리는 그 ‘전통’의 마지막에서 라이프니츠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라이프니츠는 서구 전통 철학의 대미를 장식하는 대형이상학자이다. 서구 형이상학은 헬라스(그리스)에서 꽃피었고 중세로 이어졌으며, 17세기에 이르러 다시 한번 꽃피게 된다. 그 후 ‘계몽사상’에 의해 매도되지만, 독일 관념론을 거쳐 니체, 베르그송을 시발점으로 다시 세 번째 아름답게 개화하기에 이른다. 이런 흐름에서 볼 때 라이프니츠는 서구 전통 형이상학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철학자라는 위상을 가진다.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시대를 분열의 시대로 보았다. 30년 전쟁으로 대변되는 종교전쟁이 전 유럽을 휩쓸었고, 갖가지의 분열상들이 팽배했다. 라이프니츠가 ‘종합’과 ‘조화’의 사유를 펼친 데에는 이런 유럽의 상황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다채로운 존재들을 포용할 수 있는 철학, 이질적인 존재들을 조화 속에 화해시킬 수 있는 철학을 모색했다. 그의 사유에는 논리학, 자연철학, 인식론, 정치철학 등등 여러 계기들이 존재하지만, 결국 모든 요소들이 종합과 조화/화해의 존재론으로 귀결된다.



라이프니츠의 생각은 그의 <모나드론>에 체계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주저’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소략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라이프니츠는 거대한 종합을 추구한 그의 사유 내용과는 상반되게 글 자체는 간략하게 쓰기를 즐겨했다. 그 자신이 너무나도 다재다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체계적인 저작들을 쓸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글들은 그 누구의 글들보다 논리적으로 정치하며 압축적이다. <모나드론>은 짧지만 그의 사유 전체를 조망해 주는 저작으로 손색이 없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한 개체를 규정해 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 개체의 설계도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의 전통 철학은 ‘제작’을 모델로 한 경우가 많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고, 중세 철학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7세기 철학 역시 세계를 제작 모델로 보는 사유를 벗어나지 못했다. 제작 모델이란 어떤 조물주가 있어 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사상을 말한다. 라이프니츠 역시 이런 신학적 구도 아래에서 사유했으며, 모나드가 일종의 ‘설계도’로 이해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라이프니츠는 낡아빠진 형이상학의 대명사이기도 하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황당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생각들을 많이 담고 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낡아빠진 그 만큼이나 또한 참신한 철학이기도 하다. 그의 생각들은 ‘전근대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맥락을 달리 해서 읽으면 바로 그 만큼이나 ‘첨단의’ 얼굴을 띠기도 한다. 이것은 라이프니츠가 신과 인간 사이에 설정한 관계를 인간과 기계 사이의 관계로 이전함으로써 가능하다. 생명체들이 ‘설계되었다’는 신학적 구도에서 기계들이 ‘설계되었다’는 보다 설득력 있는 구도로 옮겨감으로써, 우리는 현대 문명을 읽어낼 수 있는 참신한 존재론으로서 라이프니츠를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한 개체“의” 본질이다. 이 말은 서구의 전통 철학의 도식에 비추어볼 때 놀라운 면이 있다. 왜일까? ‘본질’이란 개체성을 넘어서는 보편자의 차원에서만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인간의 본질, 나무의 본질이라는 말은 써도 철수의 본질, “저” 나무의 본질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철수의 곱슬머리, 거무스름한 피부, 유난히 명랑한 성격 등등은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본질’이라는 인간이라는 범주에 속한 모든 개인들이 공유하는 보편적 성격에만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철수의 본질, “저” 나무의 본질 등을 말한다. 본질을 나타내는 영어 표현인 “~ity”(우리 말의 ‘~성’에 해당)는 개체에는 붙지 않는다. “humanity”는 가능해도 “Jackity”라는 말은 불가능하다. 인간‘성’은 가능해도 철수‘성’은 이상한 표현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사유 구도에서는 바로 이런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이 대목이 라이프니츠 철학의 가장 독창적인 측면들 중 하나이다.

관우 ‘모나드’, 유비·장비 전제로 가능
‘모나드’는 한 개체의 설계도이다. 이 설계도에는 한 개체의 성질들 및 사건들이 내장되어 있다. ‘제갈량’이라는 모나드는 몸을 갖기 이전의 제갈량의 설계도이다. 그것은 제갈량의 성질들(머리카락 색깔, 코 높이, 목소리, 눈빛, 성격 등등) 및 그의 사건들(“유비를 만나다”, “적벽에서 조조를 물리치다”, “오장원에서 죽다” 등등)을 내장하고 있다. 제갈량의 모나드는 이런 성질들과 사건들의 총 집합이다. 그리고 이 모나드가 바로 제갈량이라는 개인의 본질인 것이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조물주가 세계를 설계할 때 단 한 장의 설계도만 그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건축가가 한 건물을 설계하기 위해 여러 도면들을 그려보듯이, 조물주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무수한 설계도들을 그려 보았다. 그리고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설계도를 실현시킴으로써 지금 이 세계를 만든 것이다. 따라서 예컨대 관우의 모나드는 원래 한 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은 다 같은데 청룡언월도가 아닌 방천화극을 쓰는 관우, 다 같은데 수염이 짧은 관우, 다 같은데 적토마가 아닌 다른 말을 타는 관우 등등 현실의 관우와 조금씩 다른 관우들이 무수히 존재한다.(라이프니츠는 이런 관우들을 ‘모호한 관우’들이라고 부른다) 그 중 조물주는 가장 관우다운 관우를 창조한 것이다. 이런 생각이 라이프니츠의 ‘낙천주의’의 근간을 이룬다. 이것은 기독교의 조물주가 세계를 만든 후 “좋았더라”라고 말했다는 이야기의 철학적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현대적으로 번역하고픈 충동 느껴
그런데 이런 모나드들은 하나하나 별도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를 모두 고려해서 만들 수밖에 없다. 예컨대 관우의 모나드만 만들고 유비나 장비의 모나드를 만들지 않는다면 ‘삼고초려’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세 사람의 어느 한 모나드는 당연히 다른 두 사람을 전제한다. 또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사람의 모나드가 있다면 필수적으로 패한 사람의 모나드도 있어야 한다. 이런 생각은 매우 세밀하게 내려갈 수 있다. 누군가가 칼로 베었다면 당연히 베인 사람도 있어야 한다.

이렇게 각 모나드들의 관계는 모두 맞물려 있어야만 성립한다. 라이프니츠는 이런 관계를 ‘공가능성(compossibility)’이라고 부른다. 관우의 모나드 안에 “유비를 만나다”가 있어야 하고 유비의 모나드 안에 “관우를 만나다”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두 사건이(사실상 하나의 사건)이 “함께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가능성 개념은 라이프니츠 사유의 심장부에 있는 개념이다. 흔히 라이프니츠 철학을 ‘예정조화’ 같은 것으로 설명하는데 이것은 다소 피상적인 설명이다. ‘예정조화’란 공가능성 개념의 결과로서 성립하는 것뿐이다.

라이프니츠의 사유를 읽다 보면 그의 사유를 컴퓨터, 로봇, 가상현실, 분자생물학 등등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맥락으로 번역하고 싶은 철학적 충동을 느끼게 된다. 모나드는 정보체계로, 그 성질들, 사건들 하나하나는 ‘비트’들로, 설계도들은 가상세계로… 번역할 수 없을까? 현대문명을 철학적으로 개념화해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라이프니츠는 가장 전근대적이면서도 가장 현대적인 철학자로서 다가온다.(이정우_철학자)

07. 11. 22.

 

 

 

 

P.S. 그러한 '철학적 충동'의 산물이 서평자 자신이 쓴 <주름, 갈래, 울림>(거름, 2001)과 들뢰즈의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문학과지성사, 2004) 등일 테다. <모나드론>이 새로 번역된 김에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 라고 <주름, 갈래, 울림>을 책장에서 찾았지만 보이지 않는다(하긴 책들이 하도 쌓여 있어서 무얼 찾을 수 있는 형편이 못된다). '현대적 번역'을 음미하는 일은 다음으로 미뤄야겠고, 다만 <모나드론>을 들춰보다가 새삼스레 생각난 번역어 문제에 대해 잠시 적는다. 그건 '우유'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하나의 모나드가 어떤 다른 피조물에 의해 질적으로 혹은 내적으로 변경되거나 변화될 수 있는지 또한 설명할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모나드 내부에서는 위치를 변경하거나 생산, 증가, 감소하는 운동을 지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합적인 것에는 부분과 부분의 변화가 있으므로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모나드에는 만물이 들락날락거릴 창(窓)이 없다. 스콜라 철학자들이 감각 종(種)을 그렇게 취급했던 것처럼, 우유는 실체와 분리할 수도 없고, 실체와 별도로 외부에서 배회할 수도 없다. 따라서 실체나 우유는 모나드의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갈 수 없다."(7항, 34쪽)

여기서 '우유'는 '창'이나 '종'과는 달리 한자가 따로 병기돼 있지 않은데, 그만큼 '친숙한' 용어라고 역자가 판단한 것인지 신기하다(그렇다고 앞부분에 미리 나왔던 용어도 아니다). 내가 이해하기에 '우유'는 '우연히 있음'이란 뜻으로 '우유(遇有)'라고 병기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단어는 국어사전에 등재돼 있는 단어가 아니다. 순전히 철학용어이며 어떤 출처를 갖는지는 모르겠다. 이 7항 후반부의 영역은 이렇다.

The Monads have no windows, through which anything could come in or go out. Accidents cannot separate themselves from substances nor go about outside of them, as the ‘sensible species’ of the Scholastics used to do. Thus neither substance nor accident can come into a Monad from outside. 

대응시켜 보자면 '우유'는 'accident'와 같은 말이다. 문제는 그걸 꼭 우리말로, 아니 우리말이 아닌 '우유'라고 옮기는 것이 우리의 이해를 용이하게 하거나 혹은 증진시켜주느냐 하는 것이다. 일종의 '학술적 은어'로서 자주 입에 올리다보면 그 나름대로 익숙해지는지 모르겠지만(아마도 역자나 다른 전공자들처럼) 나로선 기껍지 않은 선택이다('우리말로 철학하기'는 이런 용어들에 우선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런 '우유'와 짝이 될 만한 용어로 '분유'(!)가 있다.

 

 

 

 

'분유'는 중세 스콜라철학의 용어로 한 후배가 읽던 코플스턴의 <중세철학사>(서광사, 1989)에서 처음 본 듯하다. 라틴어 'participatio'의 번역인데 'ens'를 '유(有)'라고, 'ens contigence'를 '우연유'(이게 '우유'로도 옮겨지나?)라고 옮기는 식이라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하지만 한국어는 아니라는 얘기다. 비록 '분유(分有)'는 '나누어 가짐'이란 뜻으로 등재돼 있지만 나는 이게 일본어의 잔재가 아닌가 한다. 아무려나 '우유'건 '분유'건 너무도 고색창연한 중세틱한 번역어들이며 내게는 별로 연상시켜주는 바가 없는 용어들이다. 나보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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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11-23 16:10   좋아요 0 | URL
그렇지않아도 요즘 플라톤책좀 뒤적이고 있는데 "분유"이야기가 나오더군요. 분유는 그정도면 타먹을만하다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는데.."우유"는 제가 생각해도 좀 배탈날수있을것 같습니다..^^ 우유accidents와 관련된 책들을 뒤적여보니 두개 다 중세철학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기긴 합니다만..그리스철학에서 먼저 사용된것으로 보이더군요..그런데 이러한 철학용어번역과 관련된 적절한 역자주는 찾기 힘들더요. 이런게 늘 아쉽게 느껴집니다. 한국어로 철학 공부할때마다 느끼는..

로쟈 2007-11-23 18:11   좋아요 0 | URL
문제는 '우유'보다 'accidents'라고 해야 더 이해하기 쉽다는 것이죠. '번역'의 효용에 대해서 의문을 갖습니다...
 

이미 몇 차례 다룬 것이지만, 영국의 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의 저작이 일년 사이에 지난 일년 사이에 3권이나 번역돼 나왔다. <우리시대의 비극론>(경성대출판부, 2006), <성자와 학자>(한울, 2004), <성스러운 테러>(생각의나무, 2007)이 그 세 권의 책이다(<성스러운 테러>에 대해서는 두어 차례 페이퍼를 쓴 바 있다). 마침 연세대 대학원신문의 기획서평으로 '테리 이글턴 새롭게 읽기'가 다루어졌기에 자료삼아 옮겨놓는다(출처는 담비이다 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7135). 개인적으론 지난 겨울에 읽지 못하고 미뤄놓은 <우리시대의 비극론>을 이번 겨울에 읽을 계획이다(사실 원서를 찾지 못해서 미뤄놓았었다). 관심있으신 분들도 서평을 빌미 삼아서 독서계획을 꾸려보는 게 좋겠다.

연세대 대학원신문(제156호) '세련된’ 변증법이 아닌, 현실에 밀착된 변증법을 향하여

아일랜드 출신인 테리 이글턴의 첫 저서는 『망명자들과 이민자들: 근대 문학 연구』(1970)이다. 이 책은 제대로 된 20세기 영국문학은 영국 본토 출신 보다는 아일랜드 출신(제임스 조이스, 예이츠), 폴란드 출신(콘래드) 등 제3세계 출신이거나 영국 내의 제3세계라고 할 수 있는 빈한한 탄광출신 (D. H. 로런스)이거나, 미국에서 영국으로 귀화하거나(T. S. 엘리어트) 영국에서 미국으로 귀화 (W. H. 오든) 했던 작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후 포스트모더니즘과 다문화주의가 횡행할 때에도 이글턴은 어디까지나 ‘우선적으로 계급과 민족을 거쳐서만’ 문학과 예술을 논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것이 이글턴적 맑스주의의 특이성을 구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노동계급 출신과 아일랜드 출신임을 항상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녔다.

70년대 중반은 이글턴이 한참 알튀세를 받아들여서 매우 ‘영국적인’ F. R. 리비스의 이른바 휴머니즘적 문학이론 및 비평을 비판하고 나서던 때였다. 『비평과 이데올로기』(1976), 『맑스주의 문학이론』(1976) 등이 이 시기의 저서이다. 그 후 『발터 벤야민, 혹은 혁명적 비평을 위하여』(1981)와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페미니즘 이론 등을 소개하는 『문학이론입문』(1983)을 쓰면서는 이전의 이른바 ‘과학주의적’ 비평에서 탈피하여 정치적 비평, 수사학적 비평을 주창하고 나섰다. 물론 이전의 작업에서 이미 ‘문학’과 ‘작가’의 아우라는 ‘생산’이라는 이름하에 탈신비화된 것이지만, 더 나아가 문학교육 및 연구제도 자체의 정치성을 전면화하면서 특히 ‘영문학’, ‘정전’ 등이 푸코적인 ‘권력’ 관계에 의하여 ‘구성’된 것임을 드러내었고, 그 파급력은 상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치적’ 비평을 표방하는데 있어서 문제는 푸코 이래로 모든 것이 ‘이미’ 정치적임이 밝혀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정치적’ 비평은 ‘더’ 정치적이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질적으로 다른 ‘정치’를 말하는 것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모든 것이 정치적임을 계속적으로 주장해야 하는 것인지 라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글턴이 이론적으로 명쾌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이른바 헤겔주의적 혹은 아도르노적인 ‘정치성’(프레드릭 제임슨을 포함하여)은 ‘변증법’이라는 밤에 모든 대립을 해소해버린다고 비판하는 점에서, 그는  실제로 존재하는 저 계급적이고 민족적인 거친 현실, 그것을 직시하는 바로 그것이 정치라고 역설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저 세련된 변증법이 밥 먹여주냐’라는 것이다. 이는 브레히트의 거친 진실, 혹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세속적’ 비평과 통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런데, 가장 생존과 직결되는 이 너무나 ‘자명한’ 것들이 ‘이론’과 ‘언어’라는 이름으로 증발되기 일쑤라는 점 또한 이 후기 자본주의 현실의 문제인 것이다.   



결국 언어의 힘을 믿어야 한다

『성자와 학자』(1987)라는 소설은 풍자와 위트라는 수사학을 동원하여 아일랜드의 현실에 눈을 돌리게 하는 한편, 그 참상이 참상임을 전달하는 데 있어 언어가 갖는 한계의 문제를 다루고, 1916년 부활절 봉기의 현실과 그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죽음이 과연 헛된 죽음인지 아닌지를 논구하고 있다. 미하일 바흐친의 형인 니콜라이 바흐친은 먹고 마시는 데 탐닉하는 그야말로 바흐친적(카니발적) 인물인가 하면, 동성애적 욕망을 감추고 있으면서도 ‘내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혹은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비트겐슈타인은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여기에 아일랜드 시민군 총사령관 제임스 코널리가 총살당하기 직전에 이들과 잠시 합류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코널리의 행위도 하나의 ‘언어 게임’이라고 주장한다. “그건 아마도 육체의 언어, 다시 말해서 죽음, 순교, 부활의 언어라고 부를 수 있겠죠. 다른 모든 언어를 번역해낼 수 있는 한 개의 순수한 언어요.” 이글턴의 결말에 의하면 코널리는 총살당함으로써 결국 하나의 언어로만 남지만, 그것은 “새 공화국의 탄생을 알리는 첫 울음소리”가 되고, 비트겐슈타인은 그 앞에서 통렬한 패배감에 사로잡힌다. “죽은 자들이 일어난다면 나는 끝장이다. 만약에 저 작자가 성공한다면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글턴은 실재 앞에서 언어는 무력하지만, 그 무력하다는 사실 또한 언어를 통해서 말해진다는 역설에 주목한다. 결국 언어의 힘을 믿어야 한다. 그의 노력의 상당 부분은 부르주아 혹은 우파가 전유물로 사용하는 언어를 해체하고 탈환하는 작업에 쏟아진다. 이는 단순히 미학적, 혹은 문학적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학 및 문학을 적극적으로 전유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지점은, 문학 및 문학제도를 탈신비화시키고 정전논쟁과 ‘문학에서 문화로’라는 슬로건을 촉발시킨 장본인이 어째서 과거의 미학이나 문학에 ‘집착’하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는 셰익스피어나 콘래드를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가 구현되어 있다고 비판한 다음 내치기보다는 역사와 정치의 장으로 끌어내어 수사학적 설득의 자료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그가 넘나드는 영역은 광범위하다. 철학, 미학, 역사, 소설, 시, 희곡 등 그가 ‘정치적’ 수사를 위하여 동원하는 언어와 텍스트의 집적체는 방대하고, 특유의 신랄함과 위트로 무거운 주제들을 적절하게 요리하여 전달하는 재능은 놀라운 바가 있다.



비극을 낳는 실재로서의 자본주의

『우리 시대의 비극론(원제:달콤한 폭력?비극의 사상)』(2003)은 비극이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비극론에 대하여 반기를 든다. 비극의 핵심이 죽음, 순교, 속죄양, 정화, 부활 등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것은 과거의 신화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고통당하고 죽음을 당하며 내쳐지는 사람들이 있는 한 비극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들은 하나같이 그 안에 역설을 포함한다. 죽음과 순교는 각자의 몫으로 일어나지만, 공동체의 생존과 재생에 관여하고, 그것은 다시 말해 그러한 죽음을 필요로 할 만큼 공동체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공포는 개개의 폭력적 죽음 자체에 대한 것을 넘어서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러한 죽음이 오늘날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전지구적 체계 즉 실재 자체가 공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국 이글턴은 비극이란 치명적인 하마르티아를 가진 영웅적 인물이 운명적으로 몰락하되 실재에 대한 비전을 얻는 것이라는 식의 비극론에 내재한 엘리트주의를 비판하고 비극을 지금 이 시대에 전유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 핵심을 지구적 자본주의의 작동에 없어서는 안 될 희생양들, 박탈당한 다수의 계급현실에 두는 것이다. 이쯤에서 이글턴의 수사적 전략을 읽어 본다면, 비극이라는 고급화되어 있는 장르의 핵심을 오늘날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부여함으로써 그 숭고함을 이 계급에게 돌리는 한편, 이 비극을 낳는 ‘실재’로서의 자본주의 현실을 환기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 헤겔적인, 더 변증법적인

『성스러운 테러』(2005)는 이 비극론의 연장선상에서 종교와 윤리의 문제를 좀더 적극적으로 다룬다. 사실 프레드릭 제임슨이 지적하고 있듯이 윤리의 문제가 전면에 대두한다는 것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해결이 가로막혀 있다는 징후일 수 있다. 이를테면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부르주아가 완전히 패권을 장악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기대가 전무하던 시대에 박애주의에 기초한 종교분파들이 극성을 부리던 것을 상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윤리의 언어를 먼저 장악하는 쪽은 지배계층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자유와 정의와 평등은 부르주아의 전유물이 되었다. 민주주의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이글턴은, 이 말들을 그냥 저들이 가져가 마음대로 쓰게 내버려둘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마치 니체가 선악의 계보를 따라가서 그 계급적 성격을 밝혀내듯이 계보학적으로 추적하고 해체하여, 탈환해야 것은 탈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테러라는 말은 지배계급이 그 타자에 대하여 사용하는 언어이다. 그런데 계보학적으로 따져 올라가보면 (이글턴은 아감벤의 작업에 크게 빚지고 있다), 그것은 희생양이 가진 ‘성스러움’의 이면이다. 이 양면성이 서로 분리가 되면 희생을 위한 희생이 되어버리거나, 폭력을 위한 폭력이 되어버려 단지 죽음충동의 먹이가 되고 만다. 아니면 희생과 폭력이 도구화되어 버려 그 성스러운 성격을 잃고, 목적과 수단이라는 이원론의 끝나지 않는 지리한 갈등 속에서 ‘테러리즘’이 된다.

이글턴은 데리다처럼 죽음 자체에 뭔가 불가해한 신비적인 측면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이 갖는 성스러움은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삶과 관련이 있고, 따라서 개인주의적이고 휴머니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접근은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알랭 바디우와 상당히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른바 인간성 내지 ‘인권’을 본질화하게 되면 또다시 근본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고 이것은 다시 다른 것을 수단화하는 테러리즘으로 갈 수 있음도 경계한다. 어쩌면 이글턴의 작업은 스스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헤겔적인 것과 변증법을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젝을 경유한 (지젝은 다시 라캉을 경유한다) 것이기는 하지만 헤겔이 이전보다는 훨씬 더 많이, 그리고 보다 긍정적으로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이경덕 연세대 영문과 강사)

07. 11. 13.

After TheoryFigures Of Dissent

P.S. 적어도 이글턴의 책 두 권 정도가 앞으로 국내에 더 소개될 예정인 것으로 안다(내년에는 나올까?). <이론 이후>와 <반대자의 초상>이 그 두 권의 책이다. 하니 올해 나온 책들은 미뤄두지 말고 미리미리 다 읽어두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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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1-13 21:08   좋아요 0 | URL
<우리 시대의 비극론> 정도는 저도 읽어보려 합니다..

로쟈 2007-11-14 08:28   좋아요 0 | URL
확인들어갑니다.^^
 

컬처뉴스에서 롤랑 바르트의 <글쓰기의 영도>(동문선, 2007)에 대한 리뷰를 옮겨온다(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6&title_down_code=002&article_num=8585). 요즘은 출판기획자로 일하고 있는 이재원씨의 리뷰이다(낮에 잠시 담소를 나누었다!). <글쓰기의 영도>에 대해서는 '바르트-글쓰기의 영도-진중권'이란 페이퍼(http://blog.aladin.co.kr/mramor/1501205)에서 출간 소식을 전한 바 있는데, 나로선 쌓아두기만 한 책을 이렇듯 미리 읽고 리뷰를 쓰는 이도 세상엔 있는 것이다! 언론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책인지라 아마도 가장 자세한 리뷰가 될 듯싶다(필자와 나는 취향이 아무래도 비슷한 모양이다).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와 최근 다시 번역돼 나온 <지식인이란 무엇인가>까지 덩달아 다시 읽고 싶어진다...   

컬처뉴스(07. 11. 02) 바르트를 '바르게' 읽는 한 가지 방법

어느 사상가의 사유를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흔하게는 ‘주요 저작’을 징검다리 뛰듯이 읽는 방법도 있고, 해당 사상가에 대한 입문서에서부터 시작하는 방법도 있다. 내가 선호하는 방법은 ‘전작’(全作) 읽기인데, 그것도 발간 연도별로 읽기이다. 이 방식의 단점은 전작이 모두 국역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흔하고, 그럴 경우 원서를 구입해야 하기 때문에 돈이 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말하는 ‘바르게’는 ‘옳게’(right)가 아니라 ‘정당하게’(just)에 가깝다. 즉, 내 식으로 사상가를 읽는 것도 정당한 방법이다, 혹은 그렇게 읽는 것이 한 사상가를 사상가로서 대접해 주는 정당한 방법이다.

어쨌거나 내 식으로 보면 우리는 이제야 롤랑 바르트(1915~1980)를 사상가로서 맞이할 준비를 마친 셈이다. 바르트의 데뷔작 『글쓰기의 영도』(1953)가 ‘드디어’ 국역됐기 때문이다(사실 이 책은 지난 1994년 『영도(零度)의 에크리뛰르: 기호학의 원리』라는 제목으로 국역된 바 있다. 정확히 말하면 국역이라기보다는 ‘외계어’역이라는 표현이 더 가깝다).

바르트는 20세기의 주요 사상을 다 넘나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맑스주의, 실존주의, 기호학, 구조주의, 정신분석학, 탈구조주의 등 바르트는 단 한 번도 특정한 사조에 오래 매여 있지 않았다. 그래서 바르트를 단 한 단어로 정의해야 한다면 그 단어는 (일체의 수식어를 뺀, 말 그대로의) ‘비평가’일 수밖에 없다. 『글쓰기의 영도』는 바로 그 ‘비평가’로서의 바르트가 지닌 사유의 맹아를 담고 있다. 좀 과장되게 말하면 이 책 이후에 발표된 바르트의 모든 책은 이 책의 기본 논지에 대한 확장이나 수정, 혹은 거기서 벗어나려는 시도에 가깝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상식이 됐듯이 『글쓰기의 영도』는 1964년 노벨문학상을 거부한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1905~1980)의 『문학이란 무엇인가?』(1947)에 대한 응답으로 씌어졌다. 당시의 젊은 프랑스 지식인들이 사르트르를 비켜가기란 거의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이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바르트와 사르트르의 이론적 조우, 혹은 대결은 남달랐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글쓰기의 영도』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신속한’ 반박이었다. 『글쓰기의 영도』가 출간된 것은 1953년이나, 이 책은 원래 알베르 카뮈(1913~1960)가 편집장을 맡고 있던 일간지 『콩바』의 1947년 8월 1일자에 동명으로 연재를 시작한 기사들이 기반이 된 책이다. 사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자체도 사르트르가 창간한 잡지 『레탕모데른』 17~22호(1947년 2월~7월)에 연재된 기사들이 기반이 된 책이니, 바르트는 사르트르의 연재가 끝나자마자 당시 시간감각으로서는 실시간으로 사르트르를 비판한 셈이다. 가령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비판 중 무게감 있는 또 다른 글로서는 모리스 블랑쇼(1907~2003)의 「문학과 죽음에의 권리」가 있는데, 이 글은 1948년 1월에야 발표됐다(이 글은 조르주 바타이유[1897~1962]가 편집장으로 있던 『크리티크』 제20호에 발표됐다).

게다가 바르트의 비판은 ‘도발적’이기까지 했다. 그 도발성은 『글쓰기의 영도』 제1장의 제목이 「글쓰기란 무엇인가?」라는 점에서도 쉽게 확인되는데(『문학이란 무엇인가?』 제1장의 제목도 「글쓰기란 무엇인가?」이다), 더욱 중요하게는 사르트르의 야심찬 프로그램, 즉 ‘참여문학’(littérature engagée)이라는 프로그램에 직격탄을 날렸다는 점에서 그 도발성은 근본적이기까지 했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참여문학의 핵심은 이런 것이다. 전후의 냉전시기를 살아가는 작가로서는 당대의 지배질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자유(즉, 혁명의 가능성)를 대중들에게 돌려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 지유에 직접 몸담기 위해서 글을 써야만 한다는 것. 그래서 사르트르는 혁명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언어’(langue)를, 대중들이 이해하기 쉬운 ‘스타일’(style)로 전달해야 한다고 믿었다. 사르트르가 시(여기서 사르트르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시를 염두에 두고 있다)가 아니라 산문(여기서 사르트르는 『레땅모데른』 식의 저널리즘을 염두에 두고 있다)을 특권화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바르트가 보기에 스타일은 언어를 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다. 혹은 바르트가 보기에 사르트르는 스타일과 ‘형식’(form), 더 나아가 ‘장르’(genre)를 혼동하고 있었다. 바르트에게는 스타일 자체도 언어처럼 “하나의 고유한 자연과 같은 것”이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언어란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것인데 반해 스타일은 ‘개인사적’으로 형성된다는 점뿐이다. 즉, 대문자 역사(Histoire)를 우리가 선택할 수 없듯이, 소문자 역사(histoire) 역시 우리의 선택 밖에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주장대로 스타일 역시 우리의 선택 밖에 있다면 우리는 사르트르처럼 특정한 스타일, 더 나아가 특정한 장르(즉, 산문)를 특권화할 수 없게 된다. 요컨대 바르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특정한 스타일을 낳은 ‘역사’를 비판해야지, 그 스타일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다. 혹은, 다르게 말하면 이미 스타일 자체도 언어와 마찬가지로 지배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있다.

그렇다면 작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특정한 ‘글쓰기’(écriture)만을 선택할 수 있다. 여기서 바르트가 말하는 글쓰기는 단순히 글을 쓰는 행위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학작품이 지닌 내적인 속성 일체, 예컨대 어조, 에토스, 리듬, 분위기 등의 총체를 말한다. 바르트의 말을 인용하자면 “언어와 스타일은 대상들이다. 반면에 글쓰기는 하나의 기능이다.” 즉, 작가는 이미 자신에게 자연처럼 주어져 있는 언어와 스타일을 버릴 수는 없고, 단지 그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목적에 따라 글쓰기라는 방식으로 그것을 변모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바르트에 따르면 글쓰기 자체도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글쓰기조차 “대문자 역사와 전통의 압력을 받아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 압력 속에서 글쓰기조차 “점진적인 응결의 모든 상태들”을 통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로서는 자유로운 언어를 창조하려고 해봤자 소용이 없는데, 언제나 그것은 규격화된 형태로 작가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궁지가 있으며, 그것은 사회 자체의 궁지이다.”



예컨대 바르트가 자기 저서의 제목으로 삼을 만큼 칭찬해마지 않았던 (특히 『이방인』에서의) 카뮈의 글쓰기, 즉 ‘영도’(Degré zéro)의 글쓰기조차 이 궁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스타일의 이상적 부재 상태”를 보여준 글쓰기, 그래서 일체의 이데올로기 혹은 “한 언어의 사회적‧신화적 특징들”에서 벗어난 “중립적인 글쓰기”이자 “무색의 글쓰기”(l’écriture blanche)였던 카뮈의 혁명적인 글쓰기마저 오늘날에는 부르주아 문인들에 의해서 ‘좋은’ 프랑스 문학의 전범으로 제시되지 않는가?

『글쓰기의 영도』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향한 직격탄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르트의 주장은 영원히 혁명적일 수 있는 글쓰기(혹은 사르트르의 스타일)는 없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이고, 그런 점에서 참여문학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사르트르가 너무나 간단히 치유하려 했던 “현대 작가들의 상황”이 생각보다 더 복잡하다는 사실을 밝혔던 것이다(사르트르는 이듬해인 1948년과 13년 뒤인 1965년, 각각 「검은 오르페우스」라는 글과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라는 강의를 통해서 바르트의 비판에 대해 신속하게/때늦게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일까? 바르트는 현대 작가들의 임무에 대해 사르트르처럼 명쾌하지 말하지를 않는다. 그렇지만 오히려 사르트르보다 현대 작가들의 상황을 더 정확히 짚어낸다. “문학적 글쓰기는 역사의 소외와 역사의 꿈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필연성으로서 그것[즉, 문학적 글쓰기]은 언어들의 찢김, 계급들의 찢김과 분리할 수 없는 찢김을 증언한다. 자유로서 그것은 이런 찢김의 의식이고 그것을 뛰어넘고자 하는 노력 자체이다.” 소외와 꿈 사이에서 진동하는 ‘시시포스’, 그도 아니면 소외될 것을 알면서도 꿈꾸기를 그치지 않는 ‘시시포스’, 그것이 바로 바르트가 보는 작가들의 형상이다.



바르트는 『글쓰기의 영도』를 쓰던 당시 카뮈를 필두로 한 프랑스 현대 작가들의 글쓰기를 “글쓰기에 대한 하나의 고유한 수난극에서 마지막 에피소드”라고 말한 바 있다. 그때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그 에피소드가 ‘마지막’(last)으로 끝날지 그도 아니면 ‘최근’(latest)의 것이 될지는 오늘날의 작가들이 새로운 에피소드를 일으킬 수 있을지 없을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어쨌든 비평가 바르트는 그때 이후로 30여 권 분량의 책을 집필하며 그 시시포스로서의 운명을 당당히 헤쳐 나가다가 1980년 2월 25일 차에 치었다. 이는 카뮈가 자동차 사고로 죽은 지 약 20년하고도 52일 뒤의 일이었다. 영국의 문예이론가 테리 이글턴(1943~  )의 말을 살짝 비틀어 말해보자면, “신은 실존주의자도, 구조주의자도 아니었다.”(이재원_출판기획자)

07. 1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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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을뭐라하지 2007-11-02 23:15   좋아요 0 | URL
아, 흥미롭군요. 비교해가면서 봐야겠어요.

로쟈 2007-11-03 11:00   좋아요 0 | URL
좋은 독서법이십니다.^^

열매 2007-11-03 02:10   좋아요 0 | URL
이 서평을 읽고 이재원씨가 이번에 번역된 책을 꼼꼼히 읽었는지에 대해서는 평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교보에서 이 책을 사서 한 챕터 정도 영역본과 비교해 본 결과 이 번역본에 대해서 신뢰를 보낼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게 된 저로서는 , 이 서평이 번역서평으로서 어느 정도의 의미가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물론 이 책의 가치 평가를 하는 의미 정도는 있을지 모르겠으나--서평자가 번역본으로 읽었는지, 바르트에 관심이 있어 다른 판본으로 읽었는지도 이 글로서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개인적으론 국역본으로 읽은 것 같진 않다는 판단을 합니다.제가 읽은 번역본과 영역본(그 불어 원본)과 판본상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을 제시하지 않은 것을 본다면 말이지요 -- 국역본의 가치를 평가해 주는 서평은 아닌 것이지요.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를 읽은 이후에 김웅권 번역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번역 역시 꼼꼼히 체크해봐야 하지 않을까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lefebvre 2007-11-04 10:39   좋아요 0 | URL
열매/ 위 글을 쓴 이재원입니다. ^^;; 예, 사실을 말하면 이번에 번역된 <글쓰기의 영도>는 읽기가 좀 어려운 점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일례로 제가 인용한“글쓰기에 대한 하나의 고유한 수난극에서 마지막 에피소드”라는 구절 중 제가 "수난극"이라고 쓴 부분을, 김웅권 씨는 "열정"이라고 옮겼죠. 그러나 불어본도 그렇고 영어본도 그렇고 대문자 Passion을 써서 (그리고 맥락상으로도) 저는 "수난극"이라고 정정해 인용했습니다(이런 사실까지 적기에는 제게 주어진 지면이 너무 짧아서......). 그런 점에서 확실히 위 서평은 반쪽만 "번역서평"이죠. ^^;; 그러나 <영도(零度)의 에크리뛰르>보다는 확실히 읽기가 편합니다. 그리고 책을 증정받은 출판사에게 미안하기도 하고(돈 주고 샀다면 모르겠는데 말입니다) ㅠ.ㅠ 저는 국역본을 읽다가 어색한 부분을 영어본을 참조해 이해(?)했고, 국역본과 영어본이 너무나 많이 차이나는 부분은 불어본을 참조했습니다. 언제쯤 좋은 책들을 국역본으로 안심하고 읽을 수 있을지...... ^^;;

부리 2007-11-03 09:00   좋아요 0 | URL
맘 잡고 읽었는데 스타일과 쟝르...여기서부터 헷갈리기 시작... 특정한 글쓰기밖에 선택할 수 없다에서는 그냥 외웠답니다^^ 전 바르트가 구조주의자로 알고 있었는데 그런 게 아니라는 것, 샤르트르와 바르트가 서로 대화를 했다는 점 등이 새로 깨달은 점입니다 역시 이런 글은 줄치면서 읽어야....^^

로쟈 2007-11-03 11:03   좋아요 0 | URL
이런 글을 올려야 부리님의 댓글을 접할 수 있군요.^^ 바르트는 구조주의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 맞습니다.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사르트르에게 한방 먹이는. 다만, 구조주의 이전과 이후(포스트구조주의)를 두루 보여준다고 생각되네요...

열매 2007-11-03 15:54   좋아요 0 | URL
워낙 국역본을 안 읽고 서평을 쓰는 학자분들을 많이 보아서인지 흥분한 것 같습니다. 어떤 책이 탄생하게된 그땅의 배경을 짚어주는 것에 못지 않게 그 책이 이 땅에서 가지게 될 의미에 대해 평가하는 것도 서평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사상을 다루는 사람들은 이 땅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무지한 것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하튼 이 책은 김웅권씨의 상당수 번역이 그러한 것처럼, 국역본 외 다른 판본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읽을 수 없는 판본임에 틀림없습니다. 도대체 이 출판사는 자신들도 읽지 못하는 책들을 지치지도 않고 꾸역꾸역 왜 만들어내는 것일까요? 김웅권씨는 깜냥도 되지 않으면서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저작들을 왜 번번히 망치는 것일까요? 신성대사장님께서는 <전교조의 정체>같은 책은 잘 만들어내시면서, 십팔기十八技에만 너무 매진하시지 마시고 자신들이 만든 책에도 신경 좀 써주시길 하는 자그마한 바램이 있습니다. 조그마한 실수에도 목숨이 날아가는 <무덕武德>을 아신다면 말이지요.

로쟈 2007-11-03 16:11   좋아요 0 | URL
번역/오역에 대한 문제제기는 저도 많이 해온 것인데, 김웅권씨의 번역이 모두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라마톨로지> 같은 경우에도 이전에 나온 민음사본이 더 낫다고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전공자라고 해서 반드시 더 나은 번역서를 내는 건 아니라는 게 제 경험적 판단입니다. 이건 단칼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깜냥있는 역자들이 나서주길 기다리기만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닌 것 같아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번역에 관한 사회적 피드백입니다. 서로 읽고 지적하고 고쳐나가는 '문화'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가운데 좋은 번역들이 걸러지거나 산출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열매 2007-11-04 00:51   좋아요 0 | URL
김웅권씨의 번역에 대한 개인적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안쓰러운 번역'입니다. 나름 고민하며 정말 애쓴 것도 같은데, 글을 제대로 전달하지도 못하는.
그이의 번역은 저자의 문체를 휘발시켜 버립니다. 아무리 좋은 문장도 그저 전달을 위한 도구로서의 가치밖에 얻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저는 김웅권씨의 번역은 일단 믿지 못하는 편인데, 근래 나온 고전들에 대한 그의 번역들은 별로 신뢰할만하지 않습니다. 그의 과욕이 불러온 것인 만큼 오역에 대한 오욕은 그 스스로가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그라마톨로지>는 비전공자가 오랜 전공 공부의 내력이 필요한 책을 맘대로 번역하면 어떤 꼴이 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문장을 토막내서 풀기는 했는데, 어김없이 저자의 개념어에서는 엉뚱한 오역을 합니다.
선생님과 그 책을 한줄한줄 짚어가며 읽으면서 전공서적을 왜 전공자가 번역해야 하는지에 대해여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로쟈 2007-11-04 00:45   좋아요 0 | URL
오역에 대한 지적도 구체적으로 해주시면 좋겠네요(열매님의 활동을 기대합니다.^^). 굳이 번거로운 일을 벌이지 않는 게 한국 학계의 풍토이지만 덕분에 발전이 없는 것도 한국 인문학이 아닌가 싶습니다. 애써 번역하지 않고, 애써 지적하지 않고, 애써 '진탕'에 발을 빠뜨리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남는 건 냉소(주의)밖에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