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에서 '강유원의 Book소리'를 옮겨온다(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5255). 이달의 책으로 올려놓은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 강의>(안티쿠스, 2008)를 다루고 있어서다(오늘 교보에 나갔었지만 책은 구경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한권도 비치돼 있지 않은 것인지?). 겸사겸사 요즘 문제가 된 '영어몰입' 교육에 대해서도 한마디 덧붙이고 있는데, 십분 동감한다.

미디어오늘(08. 02. 05) 번역·일본·단테의 신곡

요즘 대통령직 인수(引受)위원회인지 국민에게 인내심을 닦게 하는 인수(忍修)위원회인지 때문에 날이면 날마다 시끄럽다. 시끄럽다가 드디어 아주 기발한 발상을 내놓았다. 누구나 알고 있는 영어 교육에 관한 것이다. 많은 분들이 정확한 이야기를 했으니 그것에 대해 한마디 보탤 마음은 없다. 나는 ‘번역과 일본의 근대’(이산)라는 책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겠다.



알려져 있듯이 일본은 번역이 앞선 나라다. 그러면 왜 이렇게 번역을 열심히 하는 걸까? 이 책에서 본 내용을 말해보겠다. 1800년대 후반 일본에서 모리 아리노리라는 사람이 ‘영어를 국어로 삼자’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대해 바바 다쓰이라는 사람은 “일본에서 영어를 채용한다면 어찌될 것인가, 상류계급과 하층계급 사이에 말이 전혀 통하지 않게 되고 말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는다. 이런 주장이 점차 힘을 얻어 일본은 ‘번역주의’라는 입장을 택하게 되고 이것이 오늘날 뭐든지 번역되어 나오는 일본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번역을 하면 뭐가 좋은가. 자기네 나라말로 편하게 읽으니까 좋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번역이 습관되면 그것은 단순히 문헌번역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의 문물 전반을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것으로 ‘번역’하게 된다. 일본의 이러한 번역주의는 세월의 두께를 얻으면서 서구의 근대를 나름대로 소화하여 독자적인 근대를 이룰 수 있게 한 정신적 바탕이 된다. 이것이 사실 오늘날 일본을 선진국으로 만든 힘일 것이다.



이런 번역의 성과가 잘 드러난 책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 강의’이다. 우선 이 책 뒤에는 1910년대 이후 일본에서 출간된 ‘신곡’ 완역본 목록이 나와있는데 15종이 넘는다. 이 책은 15회에 걸친 이마미치 교수의 강연을 책으로 묶어낸 것이다. 

엔젤 재단이 개최한 이 강연은 끝난 후 매회 바이올린 연주와 다과회를 함께 열었으며, 단테와 관련있는 이탈리아 포도주도 마셨다고 한다. 청중석에는 학계의 인사나 젊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쇼와 전공 주식회사 최고고문과 같은 이도 참여했다. 비디오 촬영과 강의 녹음은 후지제록스 종합연구소가 담당했으며, 그것에 후지제록스의 회장과 사장이 직접 관여했다고 한다. 책이 출간된 경위를 적은 저자 후기를 읽다보면 부럽다못해 화가 날 지경이다.

이마미치 교수의 이 강연은 일본이 학문에 있어서도 이미 선진국에 올라섰음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는 고대 희랍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등 서구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청강자들은 알아듣는 외국어가 있으면 더 좋겠지만 다양한 종류의 일본어 번역본들을 놓고 필요에 따라 골라가며 읽는다.

전문 학자들이 대중을 위해 많은 일을 해놓은 덕을 보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그들은 외국인과 만나서 이야기할 때 주고받을 수 있는 고급스러운 ‘콘텐츠’를 흥미진진하게 습득한다. 2007년에 한국에서 클래식음악 돌풍을 불러일으킨 ‘노다메 칸타빌레’라는, 만화를 드라마로 만든 것은 또 어떤가. 이런 게 되어야 선진국인 것이다.

30대 후반의 새파란 나이에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을 거쳐 민주정의당 전국구 의원까지 역임한 이경숙 위원장은 orange juice(나는 영어 발음이 엉망이니 그냥 로마자로 적겠다)를 앞에 두고 서양인과 무슨 말을 나누었는가.

혹시 ‘신곡’에 대해 이야기해본 적이 있는가. 아니 영어번역본으로라도 읽어본 적이 있는가. 대학의 총장이면 이 정도는 자연스럽게 떠들어줘야 기본을 갖춘 것이라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아니 그것이 기본이라고 스승에게 배운 적이 있는가. 발음이 엉망이어서 선진국 못된다는 그 발상, 한마디로 상스럽다.(강유원_철학자)

08. 02. 05.

P.S. 이마미치 교수의 책으론 <동양의 미학>(다할미디어, 2005)이 더 번역돼 있다(중국과 일본의 전통미학을 다루고 있는데, 와병으로 한국에 관한 장은 마저 채우지 못했다고). 간단히 소개된 약력으로 보면 그는 "1922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1948년 도쿄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을 거쳐 파리대학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강사로 근무했다. 1962년부터 동경대학 문학부 교수를 지내고, 1982년에 정년 퇴직했다. 1996~1999년 파리대학 국제연구소 소장, 국제 형이상학회 회장, 국제 미학회 명예회장, 국제 에코에티카 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기억에는 박이문, 정명환 교수 등의 책에서 이름을 본 듯하다. 우리의 학술원 회원들께서도 말년에 이런 정도의 책들은 써주셨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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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08-02-06 00:09   좋아요 0 | URL
이마미치 교수의 신곡은 지난주에 주문하고서 미리 볼겸 교보에 갔을 때도 품절 상태여서 실망스러웠는데, 아직도 갖춰지지 않은 모양이네요. 실제로 책을 받아보니, 알라딘 미리보기에서와는 달리 단테의 옆얼굴 초상이 들어간 부분은 책 표지가 아니라, 책의 케이스라서 놀랍고 반가웠습니다. 실은 신곡강의에 단테 초상이라는 디자인이 너무 뻔하고 상투적이라서 재미없다 싶었거든요. 실제 책 표지는 좋은 질감의 깔끔한 백색이라서 공들인 책이라는 느낌이 제법 들더라구요. 신곡은 사놓은지는 오래인데 아직도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언제 이 책을 읽을지 알수는 없습니다만, 머리맡에 두고 있는 것만으로 뭔가 새로운 세계의 열쇠를 쥔 기분이었습니다. 발간소식을 듣고서부터 워낙 기대했던 책인 덕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로쟈님께서 학술원 회원님들께 원하시는 저작은 '신곡 강의' 같은 책인가요? 아니면 '동양의 미학'같은 책인가요? 두 책의 차이도 잘 모르지만, 괜한 궁금증이 들어서요. 제 생각엔 신곡강의가 그 난이도와 무관하게 대중에게 열려있다면, 동양의 미학은 역시 그 수준과 상관없이 비교적 학자들 사이의 저작이라는 느낌입니다.

로쟈 2008-02-06 00:17   좋아요 0 | URL
저는 연휴가 끝나야 구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리고 말미에 덧붙인 건 <단테 신곡 강의>를 염두에 둔 것이긴 한데 <동양의 미학>도 상관은 없겠다 싶습니다. 학술적이긴 하나 '교양서'로도 읽을 수 있겠다 싶어서요...

드팀전 2008-02-06 00:23   좋아요 0 | URL
로쟈님..새해에 드린 복이 조금 부족했다면 설날 다시 담아서 보냅니다.
지젝이 저를 즐거움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미로에 빠지게도 하는군요.켁켁...
명절 연휴에 서울 본가에 가고 또 처가에 가고 바쁩니다.아기가 자는 시간에는 잠깐 책이나 볼 수 있을까 싶군요...읽던 지젝은 명절과 어울리지 않아서 데려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치프킨의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에 달린 수잔 손택의 서문을 화장실에서 봤는데...대단한 펌핑이군요.

설 연휴 평화롭게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로쟈 2008-02-06 00:42   좋아요 0 | URL
네, 드팀전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명절과 어울릴 만한 책은 저도 찾기가 어렵네요.^^; 손택의 서문에 대해서는 페이퍼를 쓰려고 했다가 몇 주째 미뤄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나온 <문학은 자유다>에도 수록돼 있는데 비교해서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람혼 2008-02-06 00:56   좋아요 0 | URL
"우리의 학술원 회원들께서도 말년에 이런 정도의 책들은 써주셨으면 싶다." 이 말을 오늘의 명문(明文)으로 꼽고 싶군요.^^

로쟈 2008-02-06 11:55   좋아요 0 | URL
요즘은 40대만 돼도 그냥 서열로 '원로급'이 되는 분들이 많아져서요. 학자는 '학식'과 '업적'으로 원로가 되어야 하는데...

수유 2008-02-06 11:10   좋아요 0 | URL
저도 교보에 갔다가 없어서 영풍에서 구입했습니다. 딱 2권 있더군요...

로쟈 2008-02-06 11:53   좋아요 0 | URL
동네서점도 아니고 교보에도 없기에 좀 어이없었습니다...

이름없는괴물 2008-02-06 11:24   좋아요 0 | URL
얼마전 일본 가서 정말 놀랬습니다. 일본의 교보문고라는 기노쿠니야에 갔더니 정말 놀랄 노자더군요. 우리나라엔 기껏해야 주저만 근근히 번역된 철학자들의 전집이 없는 게 없더라구요. 칸트 전집, 헤겔전집, 플라톤 전집, 하이데거 전집, 라이프니츠 전집, 자본론 2종, 중세 철학 전집, 키케로 전집 등등등... 정말 일본어가 배우고 싶은 순간이었고, 우리나라와 격차를 실감했습니다.

로쟈 2008-02-06 11:52   좋아요 0 | URL
'학문어로서의 한국어'에 대해서 좀 회의하게 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오륀지' 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바벨의도서관 2008-02-06 11:36   좋아요 0 | URL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저작 중에 [에코에티카](솔출판사)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재밌게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국어판 서문도 있습니다.

로쟈 2008-02-06 11:5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기억이 나네요. 얇은 책이었는데. 한국 학자들과도 교분이 많은 분이죠...

biosculp 2008-02-06 12:09   좋아요 0 | URL
요즘 인수위에서 시작된 영어논란의 편차가 너무커서 종잡을수가 없네요.
십몇년전 부터 영어학하시는 분들은 실용영어를 주장하셨는데, 그정도 영어 배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것이고요. 더불이 시험제도자체를 바꾸어야 되는것도 애기를 하구요.
그렇다고 영어애기 나오기 전에 한국번역상황이 뭐 좋은것도 아니고, 앞으로 좋아질것 같은 희망이 크게 보이지도 않고요.
인수위 얘기가 워낙 우좡좌왕이지만 비즈니스나 실용영어 애기하는데 단테의 신곡번역얘기하는것이 뭔가 어긋나는것 같기도 하고요. 종잡을수가 없네요.
아예 영어 애기에 공무원시험에 영어 없애도 되지 않냐 이런 애기가 더 맞는것 아닌가도 생각이 되고요.
민추가 국가기관이 된것도 작년이고 대학에서 번역으로 학위준다고 신문에서 본것이 작년인것 같은데.

로쟈 2008-02-06 22:22   좋아요 0 | URL
영어를 잘할 수 있게 하겠다는 건 좋은데, 그게 가능한지 그리고 '잘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선 의견들이 다른 것이죠('1000단어 회화'를 말하는 게 아니라면 한 언어를 잘 구사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심지어 모국어라 할지라도). '오렌지' 건에서 단적으로 보여지는 건 요즘 힘깨나 쓰는 발언자들의 비상식적인(천박한) 문제의식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군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고 오늘 뉴스를 보니 '고1학생'도 잘 지적을 했더군요. 저는 도구적인 언어관 자체부터가 지극히 '비즈니스-후렌들리'한 상(商)스러운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교수신문에서 포커스 기사를 옮겨온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509). 최근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아카넷, 2008)을 번역해낸 정해창 교수가 '실용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답하고 있는 글이다. 실용주의에 대한 개관 정도로 읽을 수 있겠다.

교수신문(08. 01. 29) '가능한 대안’ 모색하는 실천의 언어

1.
최근 서구에서 실용주의가 부활하고 있다. 지난 세기 미국의 철학을 주도해온 분석철학이 ‘분석을 위한 분석’에 매달리다 그 생명력을 소진하면서 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자신들이 무의식 중에 딛고 있던 실용주의 지반을 인식하고 그 진면목을 되찾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부활을 알리는 대표적인 사건이 ‘분석철학의 트로이 목마’라고 불리는 로티의 『철학과 자연의 거울』의 출간(1979)이다. 고전 실용주의자들인 퍼스, 제임스, 듀이가 활동하던 19세기말 20세기 초를 실용주의의 탄생기라고 하고, 20세기 중엽을 실용주의의 확장 및 정체성 확립의 시기라고 한다면 『철학과 자연의 거울』 이후를 실용주의 부활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세 시기 뿐 아니라 당대의 실용주의자들도 실용주의에 대하여 다양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로티와 같은 신실용주의자는 퍼스가 실용주의에 이름만 제공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누구나 한 곡조씩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실용주의는 어떤 것인가. 19세기말 20세기 초 태동기의 실용주의는 사후 한 세대 이상 묻혀 있던 비운의 천재 퍼스를 제쳐 놓는다면 제임스가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의미론이자 진리론으로서 실용주의는 제임스의 『실용주의』가 출간(1907)되면서 그 대강의 모습을 드러냈다. 초기 실용주의자들은 전통적으로 철학을 정의해온 인식론과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관념은 그 의미와 진리를 행동을 안내하는 유용성으로부터 전적으로 도출된다는 실용주의의 주장은 얼핏 인식론을 부정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실용주의자들은 앎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들이 문제 삼는 것은 전통적으로 철학이 추구해온 앎의 ‘객관적’, ‘토대주의적(foundational)’ 준거이다. 달리 말하면 앎은 다양하고 도처에 널려 있는데 어찌 한 가지 그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기준을 통과한 것만 고집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실용주의는 인간의 끊임없이 인식작용에서 사변보다 실천, 행위를 우선시한다. 실천에 대한 강조는 실용주의를 인식론적 지평을 넘어서 가치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킨다. 즉 전통적 인식론이 ‘객관’이라는 제약 아래에서 평면적이고 수동적으로 되기 쉬운 반면에 실용주의는 광범위한 실천을 바탕으로 변화와 새로움 그리고 발전을 추구하기 때문에 바로 가치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고전 실용주의가 탄생하는 배경에는 다윈의 진화론이 있다. 우주가 진화한다는 것은 우주가 성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대륙에 비해서 문화적으로 처녀림이나 다름없었던 미국은 그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가진 나라였다. 다위니즘은 이런 지적, 문화적 환경과 잘 융합하는 이론이었고, 실용주의는 전통적으로 무시간적 진리만을 고집하던 철학에 시간 즉 변화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변화는 곧 행위를 의미하고 “모든 관념, 사유는 행위를 위한 계획이다”라는 실용주의의 언명은 모든 지적인 노력은 인식자와 무관한 관념에 의해서 결정되는 순수하고 이론적 앎으로 귀결된다는 전통적 주장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실용주의자들은 일상생활에서 아무런 차이를 만들지 않는 사유 양상은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사유가 행위로 이어지지 않거나 종료되지 않는다면 그 사유는 공허하다는 것이다. 실용주의자들에게 정신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는 기질들의 집합일 뿐이다. 이와 같이 개인적 노력에 따라서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다는 언명은 ‘개간해야할 땅이 너무 많았던’ 미국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서 미국으로 건너 온 논리실증주의자들이 가져온 과학적 철학관이 실용주의와 유사하여 일종의 상승 작용을 하며 발전하였다. 참 또는 거짓으로 판단될 수 없는 명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논리실증주의의 검증이론은 실용주의가 천명하는 ‘현금가치’로서의 의미 개념과 매우 유사하게 보였다. 이 개념들을 명료하게 하는 과정에서 실용주의자들은 실증주의자들의 자연과학적 방법, 실험주의 정신을 받아들이고 거대한 경험주의 물결에 합류하였다. 즉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과학적 태도가 실용주의 전통에 접합되면서 실용주의가 보다 기술주의적(technocratic)인 특성을 가미하게 되었다. 즉 퍼스나 제임스가 강조하던 공동체적이고 참여적 성격이 개인적 자유와 사적 추구에 관한 보다 광범위한 영역을 강조하는 진보적 성향으로 기울었다. 두 번째 시기는 실용주의와 논리실증주의가 뒤범벅되면서 듀이의 해명을 기다려야 했고, 도구주의에서 그 전형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전환의 과정에서 실증주의화되고 과학화된 실용주의는 이데올로기의 긴장을 완화하고 나아가 종식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실용주의 부활의 단계인 세 번째 시기는 로티의 신실용주의가 중심에 있고 포스트모더니즘과 연결되어 있다. 현재의 상황은 사실상 과학화된 실용주의에서 과학주의를 털어버리려는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1960년 초 인간을 달에 보내면서 과학기술이 마치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 같은 분위기가 팽배하였으나 곧 그 부정적인 면이 함께 부각되었다. 삶의 세계를 지배하는 요인들은 과학적 세계관이 요구하는 좁은 의미의 경험적 합리성, 객관성보다 광범위하다. 즉 과학주의가 배제하는 윤리적, 미학적 고려, 제약 없는 표현, 공동체적 협력 등과 같은 보다 일상적이고 익숙한 관념들을 소홀히 하는 것은 삶의 세계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던의 발원지가 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패러다임의 전환은 곧 실증주의적 사유방식에 대한 거부로 이어졌고, 실용주의는 실증주의와 결별하고 인문학적 ‘이야기’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원래 분석철학자였던 로티는 전통적으로 철학이 매달려 온 유일한 진리, 합리성, 선의 추구는 연기를 손에 잡으려는 시도 또는 불의 색깔을 찾으려는 시도와 같이 허망하고 불가능하다고 비판하며 ‘철학의 종언’을 선언하였다. 소위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현대 철학이 메마른 땅에서 겉도는 이유를 경직된 관념적 질서에서 찾는다. 이들은 철학을 고귀한 추상의 세계에서 끌어내려 우리의 이야기로 되돌리려고 한다. 이런 흐름을 주도한 로티는 자신이 철학의 종언을 이야기한 하이데거, 비트겐시타인, 듀이의 맥을 잇는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모두 전통적 의미의 철학이 그 수명을 다했다는데 동의하고 대안으로서 하이데거는 시적 언어, 비트겐슈타인은 일상언어, 그리고 듀이는 도구적 사유를 제시하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철학의 과학화가 철학의 고유한 기능을 포기한 재앙이라는 인식이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과학적 언어의 추구는 사실상 플라톤의 이상, 실재의 비밀을 열어주는 하나의 진정한 언어라는 덫에 걸려 있는 것이고, 로티는 철학의 종언이 사람들을 이런 족쇄로부터 해방하는 문화적 결과를 동반한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모든 종류의 사유, 탐구에서 동료 인간들과의 대화적 제약을 제외하고는 어떤 궁극적 토대, 기준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언명은 바로 자유 진보주의의 천명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신실용주의자들은 진정한 의미의 자아창조는 진보주의가 우리의 선조들을 취하게 하였던 인간성, 자연권 등과 같은 토대에서 자유로울 때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철학이 이런 본질적인 토대를 추구하는 한, 서양철학사가 플라톤의 주석에 불과하다는 선언은 유효하게 남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위험하고 변덕스러운 삶을 떠받쳐 줄 어떤 확고한 것이 없다면 우리의 삶이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리라는 ‘데카르트적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런 심리적 불안감은 오랫동안 신학이 인간을 길들이고 협박하는 수단으로 주입한 것에 불과할 뿐 실체가 없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고전 실용주의 철학자들이 재해석되고, 현금의 일류 철학자들, 예컨대, 퍼트남, 데이비슨, 굿만과 같은 철학자들은 스스로를 넓은 의미의 실용주의자로 포함시키고 있다. 이십세기 초의 언어적 전환 이후 철학은 지금 또 하나의 전환 즉 실용주의적 전환을 맞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듀이가 사망한 이후 실용주의는 철학사의 한 구석으로 퇴장하는 듯 하였으나 이제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 부활이 근대 서구 철학을 지배해온 이성중심주의 그리고 이원론적 사유에 대한 포스트 모던적 저항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2.
내가 실용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관념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 이론을 실천으로 대체하려는 욕구, 동료들과의 대화적 제약을 제외하고는 대화에 어떤 제약도 없음을 인식하는 것, 삶의 우연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내가 관념의 주인이 될 때 이데올로기에 대한 맹신은 더 이상 설 땅이 없어진다. 이 세계를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드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관념론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거대한 관념만 옳고 그것으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 예컨대, 레닌이나 히틀러와 같은 광기와 결합할 경우 커다란 재앙으로 나타날 수도 있음을 지난 세기에 이미 목격한 바 있다.

‘맑은 정신’의 현실주의자 벌린에 의하면, 이 세계에서 최선의 희망 즉 품위 있는 사회의 건설은 대안에 대하여 명확하게 사고하는 것, 즉 다양한 수단과 목적들 가운데 겸손하게 선택하고 선택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날 수도 있음을 전적으로 인식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품위 있는 사회는 잔인함을 최소화하고 그 구성원들이 인내할 수 없는 선택을 강요받지 않도록 노력하는 사회이다. 관념론자들은 덧없고 구질구질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신기루 같은 이상에만 매달린다. 더 나아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까지도 이상적으로 재건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과거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미래는 상상에 불과할 뿐 인간에게는 현재만이 있다. 물론 기억하지 못하고 상상할 수 없는 인간은 현실적으로 죽은 인간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현실을 냉철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에게 과거와 미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 세기 이상 미국사회를 정신적으로 뒷받침해온 실용주의는 당초 실용주의를 대수롭지 않게 폄하하던 유럽에서도 부활하고 있다. 예를 들면, 퍼스에 대한 연구는 철학 뿐 아니라 기호학 분야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제임스, 듀이는 심리학자나 종교학자, 교육학자로서가 아니라 철학자로서 부활하고 있다. 그런데 가장 미국화된 아시아의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미국적인 것의 정신적 토대는 가장 덜 알려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의 실용주의 연구는 고전 실용주의자들보다는 로티에 집중되어 있다. 퍼스선집을 제외하고는 제임스와 듀이의 주요 저술이 다수 번역되어 있고 로티 번역도 여러 권 나와 있다. 그 외에 루이스, 미드와 같은 실용주의자들은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다. 퍼스에 대한 연구는 현재까지는 한권의 저서(정해창)가 유일하다. 제임스에 대한 연구는 철학 보다는 심리학이나 종교학 분야에서 시도되고 있는 실정이고, 듀이에 대한 연구도 단연 교육학 분야가 지배적이다. 철학 쪽에서는 오래 전에 듀이를 학계에 소개한 김태길이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로티에 대해서는 다수의 저서, 역서를 낸 김동식이 단연 두드러지고, 이유선, 엄정식, 노양진, 김혜숙 등의 비판적인 글이 관심을 끌고 있다. 사실상 소수의 학자들만 실용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는 셈이다.  

철학은 물론이고 인문학의 위기가 지속적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우리의 실정에 비추어 보면 실용주의 연구자가 몇 명 안 된다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런데 ‘맑은 정신’으로 보면 인문학의 위기는 관념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인문학자들의 케케묵은 관념을 들어 줄 고객이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고객을 위해서 새로운 관념을 제시해야 할 일이다. 칸트의 말대로 철학자들은 모두 시시포스이다. 돌(관념)을 굴려 정상에 올려  놓을 때마다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돌은 영락없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20세기만 보아도 서구의 철학자들은 인식론적 전환, 언어적 전환, 포스트모던적 전환, 실용적 전환이라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 시시포스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청중이 지루해 하기 보다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인문학의 르네상스가 펼쳐진 것이다.

철학자들은 기존의 관념이 설득력을 잃어갈 때 끝없는 대체놀이에 의해서 대안을 제시한다. 물론 실용주의 철학자들은 왜 우리가 바윗돌을 정상에 올려놓아야만 하는가라고 회의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거대한 관념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탐험 정신이야말로 실용주의가 주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인문학의 위기는 정부가 천문학적 예산을 쏟아 붓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인문학자들이 돈을 쫒아 헤매고 있는 한, 인문학은 더욱 답답해질 것이다.(정해창/ 한국학중앙연구원·철학)

08. 0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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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2-05 04:02   좋아요 0 | URL
Peirce가 생각했던 pragmatism의 의미와 후대의 '응용'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간극이 있는 듯 합니다. 그나저나 중국 여행은 즐거우셨는지요? ^^

로쟈 2008-02-05 09:54   좋아요 0 | URL
아시다시피 퍼스 자신은 아예 'pragmaticism'이라고 다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듀이나 제임스와는 거리를 두지요. 로티는 그를 '칸트주의자'로 분류하여 실용주의의 본류와는 다르게 보고(아예 퍼스가 과대평가되고 있다고까지 하니까요). 중국은 50년만의 폭설로 사정이 안 좋은데, 저로선 우연히 50년만의 '설경'을 보고 온 것이니 나름으로는 의미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지난주인가 타대학 도서관에 복사를 신청한 자료가 도착했다는 문자메일을 받았다. 한때는 자주 애용했던 도서관 서비스인데 요즘은 그래도 뜸하게 이용하는 편이다. 신청했던 자료는 월터 카우프만(1921-1980)의 <인문학의 미래>(미리내, 1998) 원서이다. 'The Future of the Humanities'(1995; 초판은 1977). 국역본 자체는 번역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으로 잘 '알려진' 책이다. 예컨대, 출판평론가 표정훈에 따르면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우리말로 번역된 이 책은 번역 문장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해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책"이다. 그럼에도 필요 때문에 원서와 대조해가며 읽어 보기 위해 '고가의' 번역본까지 입수했다(IMF시기이던 1998년에 나온 책이 2만원이다!). 표정훈씨의 리뷰를 자료로 옮겨놓는다(http://www.kungree.com/book/good63.htm).

The Future of the Humanities : Teaching Art, Religion, Philosophy, Literature, and History (Foundations of Higher Education)

월터 카우프만, <인문학의 미래>

인문학의 위기를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높다. 최근에는 대학의 인문학 관련 연구소 소장(교수)들이 모여서 관련 당국의 정책적 배려와 지원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인문학이 정부의 지원이 없어서 그 위기가 심화되리라는 인문학 교수들의 생각은 가당치 않다. 오히려 정부를 비롯한 외부 기관의 지원으로부터 자유로운 편이 인문학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 바람직하다. 말하자면, 최근 논의되는 인문학의 위기는 대부분 인문 관련 학과의 위기 아니면 그 학과에 몸담고 있는 교수들의 위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인문계 대학 학과가 모조리 없어지고 인문계 대학 교수들이 모두 직장을 잃는다고 해도, 인문학은 죽지 않는다. 대학이 아닌 다른 곳에서, 대학 교수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요컨대 새로운 터전에서 새로운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방식으로 그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그러한 새로운 터전과 새로운 방식이 당장은 대학에 비해서 비효율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우리 나라 대학의 비효율보다는 사정이 좋지 않을까 한다.

사실, 여기 소개하는 책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 나라의 '학과 또는 교수'의 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헤겔의 <법철학>과 <논리학>을 각각 <권리의 철학>, <논리의 과학>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물리학>으로, 졸라의 <제르미날>을 <저미날>로 번역해 놓은 것은 그렇다 치고, 미로 속을 헤매는 듯한 번역문이 'The Future of the Humanities'와 독자들이 만나는 것을 방해한다. (앞서 언급한 책제목의 오역은 원서의 영역 제목을 무책임하게 그대로 옮겨 놓은 결과들이다.) 물론 저자인 카우프만의 문장 자체가 까다로운 편이기는 하다. 실존주의에 대한 카우프만의 논문을 읽어 본적이 있는데, 영어를 독일어식으로 구사한다. 그러나 나랏돈은 제대로 쓰여져야 한다.

이 책은 한국학술진흥재단번역총서의 하나로 출간되었는데, 번역 지원을 하려면 번역자의 선정에서도, 번역의 질에서도 끝까지 관리, 감독해야 하지 않을까? 궁리닷컴의 '좋은 책' 코너에서 소개하기는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The Future of the Humanities가 좋은 책이라는 뜻일 뿐, '인문학의 미래'가 좋은 책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시기 바란다.

번역문의 미로를 헤매본 결과, 카우프만은 대략 이런 말을 들려준다. 우선, 인문학을 가르치거나 배워야 하는 까닭 네 가지. 1. 인류가 남긴 위대한 작품들을 보존하고 그것을 보존할 사람을 양성한다. 2. 인생의 존재 이유, 인간 존재의 가능한 목적, 궁극적인 목표에 대한 여러 가지 대안을 탐색한다. 3. 비젼(vision)을 가르친다. 4. 비판적인 정신을 기른다.

그리고 카우프만은 인문학의 이상과 같은 존재 이유들이 무시되는 까닭은, 빠르게 변하는 환경에 본래부터 걸맞지 않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도 각광받는 인문학자들이 있기 마련인데, 언론적 성향을 지닌 인문학자들이 대표적이라고 한다. 새로운 것, 최신의 유행에 대한 관심으로 무장하여, 인간 정신의 위대한 산물들의 보존을 위태롭게 하는 주범들인 셈이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를 언론인으로 치부해 버리기까지 한다(*얼마전 강유원도 한 서평에서 아렌트에 대한 카우프만의 견해를 인용했다).



카우프만은 인문학 교육의 핵심은 글읽기, 즉 독서라고 한다. 인문학의 개혁은 학생들에게 읽는 법을 가르치는 것에서 출발해야 성과를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소개하는 네 가지 독서 방식은 다음과 같다. 1. 해석적 독서. 저자의 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다. 책 자체의 문맥에 관심이 없고, 완전히 자기 방식에 따라 읽는 것이기도 하다. 2. 독단적 독서. 해석적 독서와 비슷한데 그에 비해서 더욱 현학적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3. 불가지론적 독서. 오래되고 드문 책이라는 이유로 책을 읽는 것이다. 글의 스타일이나 아름다움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지엽적인 것에만 주목하며, 내용의 완성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4. 변증법적 독서가 있는데, 카우프만은 이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책을 통해 문화적 충격을 추구하고, 자신을 돌아 볼 기회를 갖고자 노력한다. 책일 단순히 읽는데 그치지 않고 책에게 질문을 던지고 책과 대화한다. 또한 저자가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저자의 전체 작품 및 저자의 지적 발전 과정 속에서 특정 저작이 어떤 의미,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등을 고민하고, 저자가 처한 여러 배경과 저자가 미친 영향을 고려한다.

카우프만은 서평에도 시비를 건다. 대부분의 정기간행물들은, 보다 긴 안목에서 영향을 미칠 독창적인 책보다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책을 다루는데 익숙하다는 것. 구체적인 사례로, 카르두치, 오이켄, 에케가레이, 미스트랄 등, 노벨상 초기에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들을 들고 있다. 그들과 동시대인들인 입센, 카프카, 릴케 등은 노벨상을 받지 못했지만, 과연 오늘날의 우리는 어느 쪽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가? 말하자면, '서평을 하는 사람들이, 출판사 개최한 서커스의 호객꾼이 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인 셈이다.

번역도 카우프만의 시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카우프만은 중요한 고전의 영역본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오류들을 구체적인 사례로 들어가며 이야기한다. (도대체 이 책의 한국어판 번역자들인 두 명의 대학 교수들은 이 부분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학술진흥재단의 번역 지원금 생각? 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온 사람들인데, 카우프만이 질타하는 미국 인문학의 현실이 사실인 것 같다.)

전체적으로 보면, 탄탄한 고전학 훈련을 쌓은 유럽의 지식인이(카우프만은 나치의 압제를 피해 독일에서 이주한 지식인으로, 프린스턴 대학에서 오랜 동안 철학을 가르쳤다.), 미국 인문학계의 현실에 대해 불만을 표명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미국 나름의 학풍이랄까 그런 것의 상대적 가치를 인정해주는 태도가 부족하다는 단점을 지니기는 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례들을 풍부하게 원용하면서 인문학의 목표, 의의, 방법 등에 대한 포괄적이면서도 근본적인 성찰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영어 원서를 읽거나 제대로 다시 번역할만한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08. 01. 23.

P.S. 국내에 몇 권의 저작이 번역돼 있지만(나는 그의 <헤겔>을 읽었었다) 카우프만은 무엇보다도 니체의 영역자이자 연구자로 유명하다(청하판 니체 전집에 카우프만의 해설들이 번역돼 실렸었다). 하지만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그의 책은 단 한권도 없는 듯하다. 한때는 가장 유명했던 니체 연구서의 하나였던 <니체: 철학자, 심리학자, 반그리스도>조차도 한국어와는 인연이 없었던 것이니 (아렌트와는 상반되게도) 이젠 잊혀진 철학자의 대열에 합류하는 게 아닌가도 싶다. 그의 홈피(http://www.acsu.buffalo.edu/~adspear/Kaufmann%20entrance.htm)라도 링크시켜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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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학은 인문학의 무덤인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10-29 08:46 
    미국의 저명한 니체 번역자이자 연구자였던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동녘, 2011)이 다시 번역돼 나왔다. 과거 <인문학의 미래>(미리내, 1998)라고 한번 출간된 적이 있지만 미진한 번역으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던 책이다.에드먼드 윌슨이나 한나 아렌트 같은 '저널리스트'에 대한 비판으로도 유명한데, 실상 초점은 '인문학의 무덤'이 된 1970년대 대학을 향하고 있다.재번역되길 기대했던(그리고 직접 독려하기도 했던)1인으로
 
 
람혼 2008-01-24 01:25   좋아요 0 | URL
정말 청하 출판사 니체 전집의 앞머리마다 놓여 있던 카우프만의 서문들이 떠오르네요.^^

로쟈 2008-01-24 23:27   좋아요 0 | URL
한 시대의 지표쯤 되겠습니다.^^
 
프루스트와 신경과학

며칠 매달렸던 일이 끝나서 30분 정도 쉬기로(놀기로?) 했다. 그래봐야 도서관에서 새로운 책을 몇 권 대출하고 서재에 새로 페이퍼를 올리는 것 정도이지만. '만남'이 오늘의 화제인 듯해서 컬처뉴스의 한 칼럼기사도 옮겨놓는다. 조나 레러의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지호, 2007)는 지난달에 소개 페이퍼를 올려놓기도 했는데, 그동안 책상에 올려놓고 아직 펴보지도 못한 책이다. 막간에 리뷰를 하나 더 읽어둔다.

컬처뉴스(08. 01. 16) 예술과 과학의 매혹적인 만남

우리는 감각을 통해 살아 있음을 느낀다.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는 행위를 통해 세상과 접촉하고 타인을 인식하면서 자아를 형성해간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의 모습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감각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 그래서 우리의 세상은 감각계가 우리와 다르게 작동하는 동물들의 세상과 다르다. 외계 지성이 존재한다면 그들이 인식하는 세상의 모습도 분명 우리와 다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의 모습을 흥미롭게 재구성하기도 한다. 예술 활동이 대표적인 예이다. 예술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을 배울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고 이상적인 미를 구현해낸다. 이것 역시 감각 기관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 인간들에게 새의 소리가 아름답게 들리고 나비의 무늬가 매혹적으로 보이는 것은 순전히 우연의 일이다. 아서 클라크의 SF 소설 『유년기의 끝』에서 오버로드 종족이 인간의 음악을 들으며 당혹해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감각이 우리와 다르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유기체의 감각 기관의 작동 방식에 따라 달리 인식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세상이 객관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 의해 ‘구성’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술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가 된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예술의 본분이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자연을 충실하게 묘사하는 것이라 믿어왔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과학적 사고가 사회과학의 방법론에 파고들면서 역으로 예술가들은 인간의 심리적 내부, 주관적인 세계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당대의 대중들은 이런 예술에 놀라워하고 일부는 혐오감마저 드러냈지만 역사는 결국 이들 예술가의 판단이 옳았음을 보여준다. 세상은 주관적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예술과 과학이 흥미진진하게 만난다. 지난 2-30년 동안 신경과학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면서 우리의 인식의 비밀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실험 장비가 개선되고 실험 방식이 정교해지면서 이제 우리는 인간의 뇌가 어떻게 보고 듣고 느끼는지, 그리고 이런 감각자료들이 어떻게 종합적인 인식으로 구성되는지 상당히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의 인식이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양상을 띤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모더니즘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드러냈던 경험의 양상이 과학에 의해 하나씩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조나 레러의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는 바로 인간의 인식의 비밀을 두고 예술과 과학이 어떻게 서로 조응되는지를 흥미롭게 파헤친 책이다.

감각과 인식의 선구자들
어렵고 따분한 줄로만 알았던 신경과학이 가장 역동적이고 흥미진진한 학문 분야로 떠오를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으랴. 인간의 뇌의 미묘한 비밀을 밝혀내는 신경과학은 올리버 색스라는 스타급 필자를 낳으며 흥미로운 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조나 레러도 만만치 않다. 대학에서 신경과학과 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인문학적 사유와 과학적 데이터를 오가며 우리를 인간 두뇌의 내밀한 세계로 안내한다.

이 책에는 모두 여덟 명의 예술가들이 등장한다. 다들 고정관념을 깨고 우리의 인식의 틀을 새롭게 정의한 예술가들이다. 오귀스트 에스코피에는 현대 요리의 기초를 확립한 프랑스의 전설적인 요리사이다. 그의 요리의 비밀은 송아지고기 육수에 있었다. 고기를 적절히 눌어붙게 해서 단백질을 화학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기막힌 소스를 만들어냈다. 그가 경험적으로 터득한 이 맛의 비밀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마침내 과학적으로 설명되었다.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의 입맛을 끄는 음식에 글루타메이트라는 분자가 공통적으로 들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그 맛을 해독할 수 있는 수용체의 존재가 우리 혀에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한편 에스코피에는 음식의 풍미가 그저 혀에서 감도는 맛일 뿐만 아니라 후각적인 경험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고, 우리의 혀가 상황에 좌우되는 변덕스러운 존재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 또한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우리의 기대감이 맛을 규정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같은 맛과 냄새라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 그 인식이 달라질 수 있음이 신경학적으로 설명되었다.

에스코피에는 다행히도 당대에 인정을 받아 부와 명성을 누렸지만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화가 폴 세잔과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대중들의 편견과 몰이해로 고통을 받은 사례에 속한다. 폴 세잔이 회화에서 이룩한 혁신은 빛이란 보는 과정의 시작일 뿐임을 간파했다는 점이다. 그는 눈이 아니라 뇌로 그리는 그림을 그렸다. 세잔의 화폭은 어떻게 보면 미완의 그림처럼 보일 만큼 본질적인 요소들만을 남겨둔 다분히 추상적인 경향을 띤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거기서 비어 있는 요소들을 찾아내 그림에 채워 넣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불완전한 감각들을 취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감각자료들을 일관된 재현으로 묶어내는 뇌의 작용이 없이는 세상을 인식할 수 없다. 우리는 현실을 사진처럼 이미지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추상화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의 능동적인 작용을 통해 이미지를 조합해낸다. 이런 신경학적 진리를 세잔은 이미 알고 있었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음악사상 가장 떠들썩한 스캔들이었다. 조성 화음을 근간으로 하는 예측과 해결의 익숙한 패턴을 벗어던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불협화음으로 밀어붙이는 이 곡은 아름다움과 가장 거리가 먼, 청중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음악이었다. 스트라빈스키는 왜 이런 음악을 작곡했을까. 그것은 아름다움도 학습을 통해 새롭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보다 음악의 경계를 확장시키고 싶어했다. 여기서 조나 레러는 우리에게 피질푸가 네트워크라는 것을 설명한다. 아무리 흉한 소음도 반복적으로 들으면 패턴을 기억해 점차 수월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기제이다. 그리고 여기에 도파민이라는, 음악적 정서와 관련 있는 신경전달물질이 관여한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그의 말대로 <봄의 제전>의 초연은 청각의 경계를 밀어붙이는 극단적인 실험이었지만, 이후 청중들은 점차 여기에 익숙해졌고 그래서 현재 이 음악은 나름의 아름다움을 갖춘 고전적인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위의 세 명이 미각, 시각, 청각이라는 개별 감각의 본질에 대해 알려주었다면, 작가들은 주로 우리의 정신 작용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기억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우리의 기억이 늘 현실을 왜곡하는 불완전한 것임을 간파했다. 우리의 뉴런은 고정된 회로로 연결되어 전기적 자극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시냅스라고 하는 틈새를 통해 소통한다. 그래서 기억은 회상의 순간에 시냅스 간의 전이를 통해 매번 새롭게 활성화된다. 우리의 기억이 변덕스러운 것은 우리의 욕망 때문이 아니라 신경적 기제 때문이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자동기술을 통해 언어에서 의미와 구조를 분리하려고 했는데, 훗날 촘스키에 의해 언어 배후에 심층구조가 있음이 드러나면서 그녀의 시도가 정당했다는 것이 확인된다. 인간 심리의 내면을 파고든 버지니아 울프의 양식은 우리의 자아가 감각자료들을 해석하는 가운데 창발하는 것임을 선취한다. 자아가 단절된 순간들이 끝없이 이어지면서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현대 신경과학을 통해 밝혀진 바이다.

이렇게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는 과학과 예술이라는 상이한 두 분야를 흥미진진하게 오가면서 우리에게 모더니즘 예술가들이 벌인 작업이 얼마나 과학적인 개연성을 확보한 실험이었는지 확인시켜 준다. 이를 통해 저자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과학의 오만함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과학이 제아무리 인간의 모든 비밀을 풀 것처럼 보여도 여전히 신비는 남을 수밖에 없으며, 과학이 전지전능한 신처럼 군림하는 시대에도 예술은 여전히 맡은 바 소명이 있다는 것이다. SF 소설가들의 상상이 미래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주듯, 오늘날 예술가들의 작업에서 인간의 인식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발견될지도 모른다. 예술가의 상상력은 일종의 과학 실험실인 셈이다. 이렇게 과학과 예술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정이창_문화비평가)

08. 0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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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학과 뇌과학이 만나는 곳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8-14 11:47 
    어제 주문한 책 중의 하나는 석영중의 <뇌를 훔친 소설가>(예담, 2011)이다. 지난주에 나온 가장 흥미로운주제의 책인데다가 저자가 러시아문학 연구자여서더더구나 놀랍다.소개기사를 미리 읽으니 문학과 뇌과학의 만남이불가능한 만남은 아니다. 오히려 앞으로 더 장려되면 좋겠다...연합뉴스(11. 08. 14) 문학과 뇌과학이 만나는 곳"공상의 행복한 힘으로/ 다시 살아난 허구의 인물들,/ 쥘리 볼마르의 연인,/ 말렉 아델과 드 리나르,/ 격정의
 
 
2008-01-17 0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7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연세대 대학원신문에서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이학사, 2007)에 대한 서평을 옮겨온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8072). 서평에 관한 글을 쓸 일이 있어서 서평들을 간간이 둘러보는데, 읽다 보니 재미있기에 스크랩해놓는 것이다. 책은 예전에 소개하고(http://blog.aladin.co.kr/mramor/1584851) '이달의 읽을 만한 책' 목록에도 올려놓았었지만 개인적으론 극히 일부분밖에 읽지 못했다(책상에 쌓여 있는 책들 가운데 하나다). '견물생심'이라고 서평 덕분에 또 읽고 싶은 충동을 갖게 되지만 여러 사정을 고려해 일단은 참아두기로 한다...

연세대 대학원신문(157호) 질 들뢰즈의 수업 시기

하나의 텍스트가 국경을 넘어 올 때 변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아마 우리의 경우에는 저자의 생각을 알아들을 수 없게 하는 번역도 한 몫 할 것이다). 변하는 것들 중 하나는 바로 제목일 텐데, 그것을 원서의 제목과 비교해 번역본 앞에서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대략 ‘생각 없는 제목’과 ‘생각 있는 제목’으로 나눌 수 있다면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박정태 옮김, 이학사, 2007)는 ‘생각 있는 제목’에 속한다.

번역본의 프랑스어 텍스트는 들뢰즈 사후, 들뢰즈가 생전에 이런 저런 지면들을 통해 발표했지만 하나의 단일한 텍스트로 묶여 출판되지는 않았던 글들이 라퓨야드(David Lapoujade)의 편집을 통해 두 권의 텍스트(L’i^le deserte et autres textes : textes et entretiens, 1953-1974 Paris : Editions de Minuit, 2002, Deux regimes de fous : textes et entretiens, 1975-1995, Paris : Editions de Minuit, 2003)로 출판된 것이다.

한국어 번역본은 이 두 텍스트에서 12편의 소논문과 철학저널에 발표되었다가 나중에 단행본에 실린 것들 가운데 7편의 소논문을 번역하여 싣고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후에 묶여 나오는 텍스트들의 특징인 발표 시기에 따르는 연대기적 배열과는 상관없이 철학자들에 대한 소논문들이 플라톤부터 연대기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철학사의 재구성
이렇게 사후에, 생전에 여기저기에 발표했던 글들이 독립된 텍스트로 묶여 나오는 것은 들뢰즈만의 고유한 것은 아니어서 이미 푸코의 경우도 Dits et ecrits(Gallimard)로 그의 이런 저런 짧은 글들이 사후에 묶여 나왔으며 그렇게 실린 글들은 우리에게 푸코의 철학을 이해하는데 더 없이 소중한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들뢰즈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텐데, 이렇게 두 권의 텍스트가 ‘철학사’에 초점을 맞춘 제목과 플라톤에서 푸코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에 대해 연대기적으로 배치된 내용을 가진 하나의 텍스트로 출판된 사연은 역자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 들뢰즈 철학의 유행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이 지니는 난해함 때문에 수용에 있어서 어려움이 많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한 난해함을 체계적으로 공략하기 위해 역자가 제안하는 방법은 그의 철학적 연대기를 구분하여(1953년 『경험주의와 주관성』에서부터 1968년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까지의 첫 번째 단계, 1968년 『차이와 반복』과 1969년의 『의미의 논리』의 두 번째 단계, 마지막으로 실제적이며 실천적인 문제로 관심을 돌리는 1972년의 『앙티 오이디푸스』이후의 세 번째 단계) 초기의 철학사 연구를 중심으로 들뢰즈 철학의 굵은 줄기를 잡은 다음에 중기의 수렴과 후기의 발산을 따라 들뢰즈의 사유를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역자의 생각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의 중추에 해당하는 제3장「사유의 이미지」에서 보여준 작업은 서양고전철학에 있어서 사유의 임의적인 전제들을 추출하여 고전적 사유의 임의성을 보여주고 이에 대해 필연적인 사유의 형식을 마주침의 사유로 설립하는 작업이었으며 이러한 임의적인 전제를 추출하는 방식은 동일하게 『앙티 오이디푸스』에서 욕망의 임의적인 전제(오이디푸스)를 추출하는 작업과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임의적 전제’의 시굴작업은 그의 니체 연구시기에 이미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완료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초기의 철학사 연구를 통해 들뢰즈의 중기로 수렴해 들어갈 수 있으면서 또한 후기의 발산들을 따라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그래서 나는 들뢰즈 철학의 가장 좋은 입구는 『니체와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들뢰즈에 도달하는 간략한 지도
그렇다면 들뢰즈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초기의 철학사 연구의 효용성은 지적된 셈인데, 과연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에 실린 철학자들에 대한 소논문들과 들뢰즈의 초기의 철학사 연구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질 들뢰즈의 수업 시기’의 결과물들은 이미 우리에게 『베르그손주의』, 『니체와 철학』, 『칸트의 비판철학』,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등과 같은 개별적인 연구서로 출간이 되어있다.

그러나 이런 연구서들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연구대상인 철학자의 생각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전유하는 들뢰즈의 사유 스타일(스피노자와 니체 그리고 베르그손 연구자들에게서 들려오는 끝없는 비난들-그것은 스피노자의, 니체의, 베르그손의 것이 아니다!)과 그 스타일을 통해 전개되는 들뢰즈 사유의 만만치 않은 두께에 고전을 면치 못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에 실린 짧은 소논문들은 문제의식과 그 전개에 있어서 큰 차이 없이 개별적인 연구서를 요약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초기의 철학사 연구 시기가 들뢰즈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중요하다면 이 소논문들은 우리를 들뢰즈에게 가장 빠른 길로 안내하는 간략한 지도와도 같다.

예를 들어, 이 텍스트에 실린 「베르그손, 1859~1941)」은 그간 들뢰즈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베르그손에게 있어서의 차이의 개념」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던 소논문이다. 그러나 “지속duree”, “기억memoire”, “생의 약동elan vital”, “직관intuition” 과 같은 베르그손 고유의 개념으로 베르그손의 철학을 정리할 때 들뢰즈는 베르그손의 핵심에 가장 빠르게 다가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차이와 반복』의 구조를 앞서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이 짧은 소논문은 사후적으로 우리가『차이와 반복』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물론 『차이와 반복』으로 들어가는 소논문은 이 뿐만이 아니다. 「드라마화의 방법」은 『차이와 반복』의 다른 방식의 요약이기도 하다).



철학사 해설을 위한 최대치의 변화
따라서 들뢰즈의 저서가 거의 대부분 번역되어 있으면서도 수용에 있어서의 어려움이 여전히 크다는 것이 현재 우리의 상황이라면, 한국어로 번역·재구성함에 있어서 이렇게 배치하는 것은 우리를 기대에 들뜨게 하는 초청장일 듯하다.

하지만 나는 역자의 친절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려움은 남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소논문들을 통한 접근이 주는 효용은 읽어야할 텍스트의 페이지수가 줄어드는 정도의 효용에 불과할 뿐, 들뢰즈의 사유 그 자체를 따라가기 위한 어려움은 그리 크게 감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르그손, 1859~1941)」을 읽으면서 우리는 당연히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시론』이나 『물질과 기억』과 같은 베르그손의 저작을 꺼내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며 베르그손 본인의 생각이 정말 그러했던가? 라는 어리둥절함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베르그손은 그의 가장 난해한 저서에서”와 같은 들뢰즈의 표현을 보면 울화가 치밀 수도 있다(“이봐 들뢰즈! 당신이 더 어려워!”).

그러나 들뢰즈 철학에 대해 관심이 있지만 『차이와 반복』같은 대작 앞에서 시간적으로 망설여진다면, 우선적으로 「드라마화의 방법」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한글 번역의 페이지수를 계산하면 『차이와 반복』은 708페이지이만 「드라마화의 방법」은 23페이지밖에 되지 않는다.

한편으로 이런 식의 배치는 단지 난점들에 대한 효과적인 공략법만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역자도 언급하고 있지만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 서문에서 니체적 영감에 힘입어 말하고 있는 콜라쥬(collage)의 문제이기도 하다. 니체 이후로 현대 철학이 처한 어떤 비가역적 상황 가운데 하나는 바로 철학 책 쓰기의 문제이다.

철학사는 이미 고정된 것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철학 자체의 재생산이다.” 따라서 “철학사에서 해설은 [해설되는 철학의] 진정한 분신으로 기능해야 할 것이며, 이 분신에 적절한 최대치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방식을 들뢰즈는 「어느 가혹한 비평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철학자들에 대한 비역질을 통해 괴물을 낳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따라서 플라톤에서 푸코에 이르는 들뢰즈의 소논문들의 연대기적 배열은 들뢰즈에 의해 변용된 하나의 사유의 계보 또는 괴물의 계보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유일무이한 철학사를 만나게 된다. 역자가 붙인 제목처럼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를.



마지막으로 책의 표지에 대해서 한 점의 불만을 토로해보자.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에 등장하는 철학자들 가운데 일부의 초상화를 이 책은 표지에 배열했는데. 과연 그 철학자들에 대한 들뢰즈의 글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을까? ‘최대치의 변화’를 겪은 얼굴인데도?(정재화│철학 박사과정)

08. 0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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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소개)『이미지와 생명, 들뢰즈의 예술철학』
    from 도서출판 그린비 2008-08-11 14:34 
    ‘생명의 철학’으로 다시 읽는 들뢰즈『시네마』—탈인간의 가능성을 창조하는 예술의 역능 『이미지와 생명, 들뢰즈의 예술철학』클레어 콜브룩 지음 정유경 옮김|도서출판 그린비|갈래 : 철학, 인문발행일 : 2008년 8월 5일 | ISBN : 9788976823151신국판변형(150*220mm)|304쪽리좀 총서의 네 번째 권으로서 들뢰즈의 독특한 이미지론을 통해 철학과 영화 그리고 예술의 역능을 살핀다. 살아 있는 인간 신체가 이미지화하는 능력으로 세...
 
 
2008-01-15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5 2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8-01-16 16:58   좋아요 0 | URL
순간적인 착오였지만, 처음에 제목을 "이봐 들뢰즈, 당신이 더 더러워!"로 읽었다는.ㅜㅜ

로쟈 2008-01-16 17:57   좋아요 0 | URL
'더럽게 어려워'로 정리하면 될 거 같네요.^^

람혼 2008-01-18 10:47   좋아요 0 | URL
저는 정말 개그에 약한 것 같습니다. 또 혼자서 웃고 말았다는.^^;

린(隣) 2008-01-18 02:39   좋아요 0 | URL
들뢰즈 어려운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 뭐라 할 말은 없고..^^;;

그래서 이 페이퍼와 아무 상관없는 소리지만, 작년 말 나온 옵세르바퇴르의 미셸 투르니에 대담 기사를 읽었는데, 들뢰즈를 거론하는 내용이 있어요. 들뢰즈보다 한 살 많은 그가 표현하길 들뢰즈는 가장 친한 친구였고, 나의 형제였다. 나는 그를 보호했고, 나는 그의 노예가 됐다. 허참 두 사람이 친구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돌 줄이야...
고교 2학년 때 신입생인 들뢰즈를 만나 철학을 알려준 이도 투르니에 자신이었다는데, 들뢰즈가 철학을 공부하고는 모두를 그에게 무너졌다는..후후 완죤 무협지? 투르니에는 그걸 어떤 거대한 창조자였다고 회고하더군요.
저는 사실 그 다음 이야기가 더 흥미롭더군요. 저역시 들뢰즈가 얼마나 피로와 권태, 자신의 비관주의와 싸우며 철학했던가를 느끼지만, 투르니에는 그에게 모든 것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고, 모든 것이 불가능했다고 표현하더군요. 아예 고흐와 비교된다고 보더군요.

나름 힘들게 사유했던 사람이니, 그에게 연민을..

로쟈 2008-01-18 23:09   좋아요 0 | URL
제가 듣기에도 투르니에가 들뢰즈 때문에 철학을 접었다고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