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에서 학술동향 기사 한 편을 스크랩해놓는다. '환경과 생태의 역사'를 주제로 한 학술대회의 발표문을 정리해주고 있다. '환경사'(란 말을 쓰는 모양이다)와 '생태사'에 대한 비판적 소개로도 유용해 보인다. 논문의 발표자인 김기윤 박사는 크로스비의 책 <콜럼버스가 바꾼 세계>(지식의숲, 2006)의 역자이면서 과학사 전공자이다.

교수신문(08. 09. 29) 20세기 생태학, 제국과 식민지의 은밀한 시선 결합돼 있다

지난 19일 서울대에서 열린 제12회 한국서양사학회 학술대회의 주제는 ‘환경과 생태의 역사’였다. 역사 연구를 본업으로 하는 학자들이 ‘환경과 생태’에 눈을 돌렸다는 것은 흥미롭다. 기존의 환경 담론이 지닌 제국주의적 속성을 지적하면서도, 제국과 식민지의 이분법을 넘어서 다각적 차원에서 환경사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고 역설한 김기윤 한양대 강사의 논문 「환경의 비교사적 연구 : 제국의 눈과 식민지의 눈」이 눈길을 끈 것도 이런 맥락 때문이다.

김 박사는 국내 서양사학계에서는 드물게 환경사를 주제로 논의를 전개했다. 그의 논문은 환경을 단순히 역사적 관점에서 다루자는 주장이 아니라, 환경에 대한 역사적 논의가 가질 수 있는 위험성과 전망을 짚어줌으로써 향후 환경사 관련 논의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환경을 역사적 맥락 특히 세계사적 맥락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는 90년대 들어와 활발해졌다. 세계사 관련 학술잡지인 <Journal of World History>가 기후, 환경, 질병 등을 비중 있게 다루게 되는 동시에, 세계적으로 환경이 중요한 정치적, 대중적 이슈로 부각되면서 환경사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그런데 환경 담론은 흔히 갖는 반제국주의적 외양과 달리 그 이면에는 빈부 격차의 은폐라든가, 사회적 모순의 외면, 거대 기업 및 국가의 주도 등 제국주의적인 면도 갖고 있다. 이는 환경사를 비롯해 환경 관련 담론이 갖는 제국주의적 측면의 문제성을 지시한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제국과 식민지라는 단일한 실체들을 전제해 대립시키면서 큰 이야기로만 환경을 말하려는 관점 자체가 문제임을 지적한다. 그간 환경을 세계사에 접목시키는 시선은 엘니뇨, 소빙하기와 같은 큰 시간의 흐름 즉 자연사적 관점을 강조하거나 혹은 제국 대 식민지라는 일면적인 대립을 통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 박사는 이러한 관점이, 환경과 자연을 둘러싼 소규모 집단의 역사나 개인들의 실천을 사상함은 물론이고, 제국과 식민지의 관점을 넘나들며 전개된 다층적이고 복잡한 역사의 지형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요점은 환경사가 거대 역사(Macro History)의 관점이 아니라, 파편화된 작은 역사(Micro History)들의 접합과 굴절을 통해 연구돼야 한다는 것이다. 곧 제국과 식민지의 이분법을 넘어서 환경사를 다중적으로 바라보자는 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다.

김 박사는 논문의 초두에서부터 “중심부의 힘을 강화하려는 노력이 결국 주변부의 시각을 발굴해내는 시도로 이어진 것이다. 주변부의 역사적 문화적 또는 물리적 힘을 보여주려는 시도가 결국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는 경우는 더 흔히 볼 수 있다”면서 제국주의적 기획이 식민지적 의도로 이어지거나, 식민지적 기획이 제국주의적 의도에 봉사하는 경우가 많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자연, 환경, 생태를 조망하려는 역사의 프리즘이 결코 일면적이지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그 예로 18세기 린네의 식물분류학과 19세기 훔볼트의 자연학 그리고 20세기 생태학 및 환경 보호론을 든다.

우선 린네의 자연사에 대해서 김 박사는 “학문 분야로서의 자연사는 개인적 집단적 이해관계를 떠나서 순수한 자연의 연구라는, 일견 제국의 정복의제에 반하는 활동형태를 취하면서, 실상 지구를 자원의 창고로 보는 제국의 눈이 돼 주었으며, 또 그 자원을 수탈해 내는 도구가 돼줄 것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곧 린네가 과학을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과학으로 인해 지구 전체가 상업, 정치, 식민 지배의 대상이 될 수 있었으며, 이어서 유럽 부르주아 계급의 경쟁, 착취, 폭력의 그림자가 지표 여기저기에 각인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의 경제나 관리를 논하는 린네의 입장이 제국주의적 자연관으로 전용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김 박사는 바로 린네의 경우조차도 주변부적 시선이 교착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린네는 전형적인 제국의 부르주아와는 거리가 먼 학자였고, 스웨덴 역시 제국의 중심지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제국의 눈이라는 집합적인 실체를 상정함으로 해서 너무 많은 역사적 행위자들의 실체가 가려져 왔음”을 의미한다.

김 박사는 환경사학자로 저명한 프랫(Pratt)의 논의를 따라가면서, 19세기의 훔볼트를 “제국의 눈을 형성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그려보고 있다. 훔볼트는 “그가 여행했던 지역의 지형과 기후 그리고 동식물들을 높은 곳에서 조감하듯 측정하고 도표화하면서 훨씬 공격적인 방식으로 제국의 도구로 활약했다.” 특히 “제국의 의지가 담긴 훔볼트의 자연학 특히 자연지리학은 남아메리카 문화에 갖가지 흔적을” 남기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려는 남미 사람들로서도 훔볼트가 남겨 놓은 그 지역 자연에 대한 서술은 훌륭한 도구”가 돼 주기에 이른다. 이는 결국 남미인 등의 현실과 관련이 깊을 포스트 식민주의적 기획 자체가 제국의 또 다른 이면이자 사생아로 드러남을 의미한다. 그런데 김 박사는 여기에서도 “훔볼트는 남미의 자연 뿐 아니라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도 상당량의 저술을 남겼으며, 노예제도나 부당한 경제제도 등에 대해서도 강경한 반대의 입장을 견지하곤 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단일한 제국의 눈이란 없으며, “제국의 눈이라는 분석틀 속에서도 다층적인 서사와 다양한 분석 단위들”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20세기 생태학의 경우는 보다 극명하게 제국의 눈과 식민지의 눈이 자웅동체처럼 은밀한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다. 생태학은 흔히 급진적이고 진보적이며 지극히 반제국주의적 입장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김 박사는 “현대적인 학문분야로서의 생태학이 형성되고 정립돼 온 과정은 전혀 다른 역사적 배경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의 논지에 따르면, 생태학은 본래 “1900년대에 식물상의 천이 과정을 이주민이 정착민을 제거하면서 서식지를 점유해 나가는 모습”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1920년에서 1930년대에 생태계의 개념을 확립한 영국인 탠즐리의 경우는 “영국 연방의 효율적인 관리를 염두에 두었다.” 이는 설령 환경이 인류 미래를 위협할 수 있다는 자각 자체가 중심부 제국에서 연원하지 않았더라도, 제국의 시선이 없이는 불가능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게다가 극단적으로 순수 자연을 찬양하는 목가적 경향의 경우에도, “동물보호구역을 설정하면서 그리고 국립공원을 지정하면서 그곳에 살고 있던 주민들을 몰아내는 과정을 승리를 향해 진행되는 환경사로 그리는 행태”를 통해 제국주의적 면모를 보인다. 김 박사는 이를 두고 “인간의 개입이 배제된 원생지 또는 원생 자연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인 열광적인 숭배 역시 제국주의적 시선이 만들어낸 관념인 듯싶다”고 평하는데, 이는 곧 제국의 질서를 회의시하는 환경 담론이 제국의 질서 내에서 배태됐으며, 제국과 식민지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혀 서로를 바라보는 중층성이 20세기 생태학의 진실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김 박사는 논문 말미에서 “사회경제적인 상황, 법률제도, 제국주의적인 힘 등, 지형, 기술은 물론 시간, 공간, 진보에 대한 개념과 같은 추상화된 길과 같은 구체적인 마당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제국의 눈과 식민지의 눈을 나누어 대조시켜 보거나 국가단위의 차이를 살피는 데서보다 훨씬 더 다양한 장소에서 다층적 층위로 길을 찾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김 박사의 논의는 환경사, 생태사를 둘러싼 논의가 조야한 환경 보호 담론이나 혹은 제국과 식민지로 모든 것을 환원하는 거친 분류법의 한계를 인식하게 한다는 점에 그 중요성이 있다. 다만 김 박사의 다원론적 접근법이 환경 담론에 대한 제국주의적 접근법의 위험성을 흐릿하게 하는 것 아닌가라는 문제점이 제기될 수 있다. 또한 환경사를 미시적 관점에서 조망해야할 필요성이 보다 풍부한 사례와 분석을 통해 그려지지 않고, 주장에만 그친 감이 있는 점도 한계로 보인다.(오주훈기자)

학계동향

국내 학계에서는 동양사 분야의 유장근 경남대 교수, 정철웅 명지대 교수 등이 환경사 연구자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서양사 학계에서는 주경철 서울대 교수와 김기봉 명지대 교수 등이 오래 전부터 꾸준한 관심을 보여 왔다. 이번 학회를 계기로 성영곤 관동대 교수, 박흥식 서울대 교수 등이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연구자들의 등장이 기대된다.



거대사 또는 지구사로서의 환경사의 문을 연 앨프리드 크로스비의 책이 『콜럼버스가 바꾼 세계: 신대륙 발견 이후 세계를 변화시킨 흥미로운 교환의 역사』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있다. 생태학의 역사를 사상사의 시각에서 다루면서 동시에 환경에 미친 산업자본주의의 힘을 보여주는 고전이 된 도널드 워스터의 책도 『생태학, 그 열림과 닫힘의 역사』로 소개돼 있다. 포스트 식민주의 담론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그 연구 결과들을 잘 보여주고 있는 데이비드 아널드의 책은 『인간과 환경의 문명사』로 번역됐다.

08. 10.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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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예기치않게 병원에서 시간을 죽이게 됐다. 빈손으로 TV만 바라보는 건 불쾌한 일이어서 부랴부랴 편의점에서 신문을 사들고 와 꼼꼼하게(!) 읽었다(그래도 시간이 남아 여성지까지 들췄지만). 그 중 마음에 든 칼럼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원전인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다시 읽으며 미국 금융위기의 교훈을 되새기고 있다(오늘의 빅뉴스는 미국의 금융구제안이 하원에서 부결됐다는 소식이어서 타결을 전제로 한 아침신문의 기사들이 '어제' 신문의 기사가 돼버렸다).    

경향신문(08. 09. 30) 맥베스의 ‘보이지 않는 손’

김정환 시인이 셰익스피어 전집 번역에 나섰다. 그 첫 결실이 지난달 5권짜리로 나왔다. 4대 비극 가운데 나는 ‘맥베스’부터 손을 댔다. 인간의 야망과 탐욕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빠른 템포로 보여주기도 하거니와, 세계 경제를 뒤흔들어 놓고 있는 월스트리트의 금융위기 상황 탓이기도 했다. 월가의 이른바 금융공학의 ‘천재’들과 정부가 끼어들지 말아야 시장의 창의성이 발휘된다고 목청을 높여온 시장 만능주의자들이 ‘탈(脫)규제’의 신주단지로 떠받들다가 막상 위기가 터지니까 보이지 않게 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 그 첫 발설자인 맥베스의 육성을 김 시인의 번역으로 다시 듣고 싶었던 것이다.

'맥베스’는 스코틀랜드의 장군 맥베스가 마녀의 예언에 혹해 던컨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지만, 예언대로 제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못하고 던컨의 아들에게 복수의 죽임을 당한다는 줄거리다. 그 과정에서 맥베스는 역모에 동참한 친구 뱅쿼의 아들에게 왕위가 돌아갈 것은 두려워해 이들 부자를 살해하려 자객을 보내는데, 불안해하는 아내에게 “모르는 게 좋아, 내 여보는, 나중에 박수만 치면 돼”라며 이렇게 말한다.

- 이기심에 대한 파멸이 原典 -

“오라, 눈꺼풀 꿰매는 밤, 가려다오, 목도리로, 가여운 날의 부드러운 두 눈을, 그리고 피비리고 보이지 않는 네 손으로 말살하고 갈가리 찢어라, 그 위대한 생명의 임대 계약을, 그것이 나를 계속 창백하게 하노니. …나쁘게 시작된 일은 나쁜 짓으로 스스로를 강화하노니.”

이것이 애덤 스미스의 말이라며 경제를 안다는 사람들이 입에 올리는 ‘보이지 않는 손’의 원전이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각 개인이 최선을 다해 자기 자본을 국내 산업의 지원에 사용하고 노동생산물이 최대 가치를 갖도록 노동을 이끈다면, 각 개인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연간수입을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치가 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된다…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목적을 증진시키게 된다”고 했다. 탈규제론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그것이 누적돼 결국 더 나은 사회가 된다’며 보이지 않는 손을 시장 만능주의의 제단(祭壇)에 모셔왔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를 지낸 경제학자 존 케이는 이게 잘못이라고 꼬집는다. 셰익스피어와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얘기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기원을 스미스의 책에서 찾으려 하거나, 현대 경제를 이해하는데 그의 말을 끌어다 쓰는 것은 실수”라고 잘라 말한다. ‘도덕감정론’을 쓴 윤리학자이자 셰익스피어의 팬이었던 스미스는 인간의 마음이 나쁜 것에 물들기 쉽다고 보았던 만큼 자유주의를 찬양하기 위해 이 말을 쓰지도 않았을뿐더러, 맥베스의 이기적 행동이 사회 전체의 후생을 증진시키기는커녕 자신까지 파멸로 이끈다는 교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월가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그렇다. 시장 만능주의자들의 신주단지는 헛것이었지만, 맥베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섭리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규제를 피해가며 첨단 금융공학을 통해 고위험 고수익의 복합 금융상품을 팔아 재미를 봤던 투자은행들이 몰락했다. 보이지 않는 손은 규제 받지 않는 이기심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봉사한 것이 아니라, 탐욕의 종점이 언제나 비극일 수 밖에 없음을 증거하고 있다.



- 美금융위기도 ‘탐욕의 종말’ -

실물을 뒷받침해 경제를 돌리는 도구이어야 할 금융이 ‘몸통을 흔드는 꼬리’가 된 것이 ‘금융 무정부 위기’의 근본 원인이라는 데 국제사회에 이견은 없다. 금융뿐 아니라 경제시스템에 대한 대대적 수리가 필요하다는 게 금융선진국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그런데 우리 정부만 규제개혁 속도론을 외치며 워싱턴과 월가 사람들이 용도폐기한 신주단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400년 전의 셰익스피어를 다시 불러내고, 맥베스의 피비리고 보이지 않는 손을 지금 읽어야 한다며 슬그머니 번역을 내놓은 김 시인의 혜안이 돋보일 뿐이다.(유병선|논설위원)

08. 0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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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EAV 2008-10-01 08:49   좋아요 0 | URL
'원전읽기'의 중요성이랄까요, 혹은 유사-과학(공학)이고 싶거나, 지식-권력이고 싶은 경제학사 없는 경제학의 한계랄까요? 아무튼 『도덕감정론』은 커녕 『국부론』도 읽지 않는 경제학자들을 비꼬던 『아담 스미스 구하기』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로쟈 2008-10-01 20:24   좋아요 0 | URL
안 읽어도 생색을 낼 수 있나 봅니다.^^;
 

러시아의 FSB(연방보안국) 간부가 2차대전 패전을 앞둔 일본군이 철군에 앞서 사할린 지역에서 저지른 한인 민간인 학살사건을 사실적으로 다룬 소설을 펴냈다고 한다(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08/09/23/0902000000AKR20080923057300096.HTML). 기사를 읽다보니 책상맡에 놓여있는 신문에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제 때 스크랩을 해놓지 못하고 미뤄놓은 것인데, 호주국립대의 개번 매코맥 명예교수가 정부수립 60주년의 '슬픈 진실'을 밝히고 있는 칼럼이다. 한국전쟁시 죄수와 양민 학살이라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칼럼에 대한 별다른 반향을 접하지 못했다(다 아는 내용이란 말인가? 만약 사실이라면 역사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하는 것 아닌가?). 역사 교과서 개편논의가 다시 일고 있는 듯한데, 엉뚱한 거 건드리지 말고 이런 '슬픈 진실'이나 후손들에게 똑바로 교육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   

경향신문(08. 09. 02) [개번 매코맥 칼럼]정부수립 60주년의 ‘슬픈 진실’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 정부가 수립된 지 60주년이 됐다. 생일은 미래를 계획할 뿐만 아니라 과거를 되돌아보는 시기다. 하지만 슬픈 진실은 1948년에 출범한 공화국(Republic)이 6개의 공화국 중 첫번째 공화국에 불과하고, 그 역사에는 축하할 것보다 한탄할 것이 많다는 점이다.

우선 이 공화국은 유엔(본질상 미국)의 창조물이다. 한국인의 역할은 최소한에 그쳤다. 미국은 1947년 한국 문제를 유엔에 위임했고, 명목상 독립적이고 단일한 정부수립을 감독할 기구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을 준비했다. 그러나 미국은 자신들이 관리하고 있는 한반도 남쪽에서 별도의 선거를 치르도록 강요했다. 임시위원단의 주요 회원국이었던 캐나다와 호주, 의장국이었던 인도는 이에 저항했다. 국토의 반쪽에서만 선거를 실시하는 것은 그들의 사명이 아니었다. 테러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에서 민주적인 선거는 할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

美에 의해 창조된 ‘反共 공화국’
임시위원단이 1948년 3월11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치러진다는 것을 조건으로’ 선거 여부를 표결에 부쳤을 때 캐나다와 호주는 반대표를 던졌다. ‘자유로운 분위기’란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한의 단독 선거가 국가의 분열을 강화할 것이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결국 임시위원단은 투표를 실시했다. 의장인 인도 외교관 KPS 메논이 이상하게도 입장을 바꿨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시인 모윤숙)을 향한 그의 사랑이 그의 더 나은 판단을 압도했다. 그가 회고록에 썼듯이 그것은 “외교관으로 봉직하는 동안 내 심장이 내 머리를 이기도록 허락했던 유일한 경우”였다. 사적이고 경솔한 행동에서 더 나은 결과가 도출되는 일은 거의 없다.



단기적으로 남북의 단독 선거는 제주에서 소요를 야기해 수만 명이 살해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20세기 아시아에서 벌어진 대규모 잔학행위 중 하나였다. 장기적으로는 두 개의 한국 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2년 후 전쟁이 터질 무대가 준비된 것이다. 12월 유엔 결의는 이승만 정부에 대해 ‘한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정통성을 부여했다. 제1공화국이 수립된 지 2년 후, 유엔은 공화국을 방어하기 위해 전례 없는 참전 조치를 취했다. 그 전쟁이 끝난 후 60여 년이 흐른 지금, 그 방어에 수반됐던 끔찍한 사실의 세부 내용들이 계속해서 밝혀지고 있다.

조선인민군이 남쪽으로 진격하자 이승만 정부는 감옥에 수감돼 있던 북한 협력자를 제거하고, 감옥을 빠져나간 정적을 추적해 가능한 한 많이 살해하기 위한 단계를 밟았다. 한국 암흑세계의 중심은 대전이었다. 유엔과 남한군의 연락장교로 복무하던 호주 육군장교 2명은 7월9일 대전에서 공주로 가는 길에 죄수들을 태우고 남쪽으로 향하는 트럭 호위대를 목격했다. 장교들 중 하나인 스튜어트 피치 대령은 1982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바로 내 눈 앞에서 2~3명이 사망하는 것을 봤다. 그들의 머리는 라이플총의 개머리판에 맞아 계란처럼 부서졌다.” 후일 공주에서 그는 죄수들이 총살당했다고 들었다.

영국 런던에서 발행되던 사진잡지 ‘픽처 포스트’에 실린 사진 한 장은 트럭 한 대 분량의 죄수들을 보여준다. 사진 설명은 “금강 둔치에서 남한의 반역 혐의자들이 처형을 기다리고 있다”고 밝히고 있고, 유엔이 이 문제에 관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며칠 후인 7월13일 북한군은 금강을 건넜고 7월20일 대전을 포위했다. 그들과 함께 공산주의 성향의 신문 ‘데일리 워커’의 특파원인 영국인 기자 앨런 위닝턴이 도착했다. 위닝턴은 대전 근처 ‘낭월’이라 불리는 마을에서 대규모 무덤을 보았다. 마을 주민들과 논의한 끝에 그는 대전 지역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 7000여 명에 대한 집단 학살이 일어난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런던에서 위닝턴의 기사가 보도된 시점에 북한의 ‘조선 인민보’도 희생자가 7000여 명이라며 이 학살 소식을 전했다. 미군 무관 또한 이것을 백악관에 보고했다. 이 보고는 남한군에 책임이 있으며 죄수를 처형하라는 명령이 (이승만 대통령을 의미하는) ‘최고위급 당국’에서 내려왔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조사도 실시되지 않았다. 대신 (아마도 워싱턴에 있는) 누군가가 이 사건을 전쟁 중에 있었던 특이하면서도 단일한 북측의 학살로 뒤바꾸기로 결심했다. 사건은 (미군이 묘사한 대로) “ ‘난징의 강간’ ‘바르샤바 게토’와 함께 역사적 사료로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꾸며졌다. 사건의 이 같은 각색본이 1953년 10월 전세계에 출판되면서 대전 학살은 북한이 유난히 잔인하게 행동했던 주요 사례가 됐고, 북한이 ‘악의 축’으로 지명되는 데 일부 기여했다.

사건이 발생하고 40년 이상이 흘러 한국의 월간지 ‘말’이 진실을 보도하기 시작한 것이 1992년의 일이다. 한국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2005년 설립)가 조사 결과물을 발표하기까지는 그로부터 16년이 더 걸렸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처음 한 달간, 즉 제1공화국이 수립되고 3년이 흐른 시점에, 적어도 10만명의 양민이 바로 그 공화국이 세우고 통제하는 군대의 손에 학살됐다. 대전 학살은 수많은 참사 중에서 최악의 사례다. 대량 학살은 남한 땅의 남북과 동서에 걸쳐 일어났고 셀 수 없이 많은 시체가 얕게 판 무덤에 던져지거나 광산 혹은 바다 속에 버려졌다. 진실·화해위는 수백건의 다른 사례들을 조사하고 있다. 이 사례에서 미군은 대부분 공중에서 ‘흰 옷을 입은 사람들’(한국 양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을 소사하고 네이팜탄으로 공격한 것으로 비난받고 있다.

‘10만 양민 학살’ 이승만은 전범
이 참사들에 대한 폭로는 2008년 들어 꾸준히 발표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반응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공화국의 고위급 정치 지도자들이나 미국, 유엔은 어떤 논평도 하지 않았다. 어떤 신문도 관련 사설을 쓰거나 칼럼을 게재하지 않았다. 한국 바깥의 보도도 균일하지 않았다. AP통신이 공들여 작성한 기사를 일부 미국 신문과 영국 BBC 방송이 다시 보도했지만 미국과 유엔의 책임에는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우리는 세르비아나 다르푸르의 잔혹 행위, 티베트와 그루지야, 때로는 북한의 인권 침해를 비난하지만, 우리에게도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점은 너무 고통스러워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 결과 두 가지의 불명예가 정부수립 기념일을 장막으로 가린다. 첫째, 한국이라는 국가는 유엔과 한국인들에게 강요된 미국의 창조물이다. 이 국가의 존재 이유는 민족주의도 민주주의도 아닌, 反공산주의다. 둘째, 공화국의 첫번째 대통령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이것은 오늘날 비난받고 있는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가 저지른 전쟁 범죄를 훨씬 뛰어넘는다. 그 책임은 맥아더 장군과 트루먼 대통령, 트리그브 리 유엔 사무총장에게 있다. 진실을 알고 있었거나 혹은 알았어야 했던, 하지만 한국전쟁이 우리의 이름으로 치러진 방식에 눈감아버렸던 모든 나라의 정부와 시민들도 그 책임을 나눠 져야 한다.(정리 최희진기자)

Korea at 60
 
 The Republic of Korea has turned 60. Birthdays are a time for looking back over the past as well as for planning the future. The sad truth, however, is that the Republic that was born in 1948 was only the first of six, and that its record contains little to celebrate and much to lament. It is unlikely that many Koreans today remember it with pride or pleasure.
 
 In the first place, this Republic was uniquely a United Nations (which at that time meant essentially a US) creation. Koreans played a minimal role. The United States entrusted the Korean problem to the UN in 1947 and saw to the establishment of UNTCOK (UN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as a body nominally to oversee the creation of a unified, independent Korea, but then pressed for separate elections in its southern controlled zone. Three key members of the committee - Canada, Australia, and India (its chair) - resisted. To conduct elections in half a country was not their mission, and there could be no democratic elections under the then prevailing conditions of police state terror.1) When the Commission voted on 11 March 1948 to observe elections "provided they were held in a free atmosphere," Canada and Australia both voted against, because there plainly was no "free atmosphere," and they deplored what they saw as a step towards entrenching the division of the country But the vote was carried in the Commission because its chair, the Indian diplomat KPS Menon, did a bizarre volte-face. He switched his vote because his love for a Korean woman (the poet Marian Mo or Mo Yun-suk) prevailed over his better judgment. It was, he wrote in his Memoirs, "the only occasion in my service when I allowed my heart to prevail over my head."2) Rarely did greater consequence follow from personal indiscretion.
 
 In the short term, separate elections led to the uprising in Cheju where tens of thousands of people were killed (in one of the great atrocities of 20th century Asia) and in the longer term to the establishment of separate Korean regimes under conditions that that set the scene for war two years later. In December, a UN resolution conferred legitimacy on the Rhee government as "the only legal government in Korea." Australia proposed this resolution, thus abandoning its pursuit of autonomous middle power principle and adopting instead the principle of "Follow the United States," (what in Korean might be known as sadae) which it was to follow thereafter for much of the remainder of the 20th century.3)
 
 Two years after founding the Republic, the UN itself took the unprecedented step of going to war to defend it and now, nearly six decades after that war ended, horrendous details of what that defense entailed continue to come to light.
 
 As the Korean People's Army advanced south the Rhee regime took steps to clear its prisons of possible Northern collaborators and to track down and kill as many as it could of those opponents who were not already in prison. The heart of the Korean darkness was Daejeon.
 
 On July 9, two Australian army officers, liaising between the UN and South Korean forces, were on the road from Taejon to Konju when they saw a convoy of trucks loaded with prisoners going south. One of them, Colonel Stewart Peach, recalled in a 1982 interview with this author: "Before my very eyes I saw at least two or three killed, their heads broken like eggs with the butts of rifles."4) Later, in Konju, he was told that prisoners were being shot. A contemporary photograph in the London Picture Post shows a truckload of such prisoners, described as "South Korean suspected traitors," on the banks of the Kum River "on their way to execution," adding that the matter was under investigation by the UN.5) Days later, on 13 July, the North Korean forces crossed the Kum River, and on 20 July captured Daejeon. With them came the British journalist (correspondent for the communist Daily Worker) Alan Winnington. Winnington saw mass graves at a village called "Rangwul" near Daejeon, and from discussions with villagers, he too concluded that a major massacre had occurred, with approximately 7,000 prisoners from the jails of Daejeon and nearby summarily executed and buried in mass graves dug by locally press-ganged peasants.6) Around the same time that Winnington's report was published in London, the North Korean Choson Inminbo reported the massacre, giving the figure of 7,000 victims.7) The US military attache also reported it to Washington, making clear that South Korean forces were responsible and that the orders to execute the prisoners had come from "the highest authority" (which could only mean President Syngman Rhee).
 
 No investigation was conducted. Instead, somebody (presumably in Washington) decided to turn this into a Northern massacre, the characteristic, single atrocity of the entire war, one worthy (as the US Army described it) "of being recorded in the annals of history along with the Rape of Nanking, the Warsaw Ghetto."8) As that version of events was published around the world in October 1953,9) the Daejeon Massacre became the centrepiece of the case that North Korea was exceptionally brutal, an impression that remains alive today and accounts in part for the designation "Axis of Evil."
 
 It was 1992, more than 40 years after the events occurred, before the South Korean monthly Mal began to tell the true story,10) and it took another 16 years before the South Korean government's semi-official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established in 2005) began to publish its findings. According to the TRC, during the first months of the Korean War, Year Three of the Republic, at least 100,000 citizens were slaughtered by forces set up and controlled by that very republic.11) Daejeon was only the worst of a litany of horrors. Mass murder took place the length and breadth of the country, countless bodies being dumped in shallow graves or abandoned mines or into the sea. The TRC is also investigating hundreds of cases in which the US military is directly accused of indiscriminate bombing, strafing, or napalming of "people in white" (ie, Korean civilians) mostly from the air.
 
 Revelations about these horrors have flowed steadily during 2008. Yet they have met little response: no comment from senior political leaders of the Republic itself, or the United States, or the United Nations, nor (so far as I am aware) has there been a single newspaper editorial or significant "opinion" essay in Korea itself. Coverage outside Korea has been patchy. The story as painstakingly told by Associated Press has been carried by some US newspapers and by the BBC, but rarely with a focus on the American and UN responsibility.12) While we unequivocally denounce atrocities in Serbia or in Darfur, and human rights denials in Tibet or in Georgia, or for that matter North Korea, those for which we ourselves bear responsibility seem too painful to contemplate.
 
 Two grim reflections therefore cast their pall over the birthday celebrations: first, that the South Korean state was a US creation, imposed on the United Nations and on the Korean people, whose raison d'etre was neither nationalism nor democracy but simply anti-communism, and, second, that the first president of the republic was guilty of war crimes far exceeding those of which the Bosnian Serb leader Radovan Karazic is accused today. That responsibility is shared by General Macarthur, President Truman, UN Secretary-General Trygve Lie, and by the governments and citizens of all those countries that knew, or should have known, but turned a blind eye to the way the war of 1950-53 was fought in our names.

 <이하 주석>
 
 1) The Australian delegate on UNTCOK referred to the torture and murder of political opponents as “accepted and commonplace.” See my Cold War Hot War: An Australian Perspective on the Korean War, Sydney,, Hale and Iremonger, 1983, resumed in subsequent books, including Target North Korea: Pushing North Korea to the Brink of Nuclear Catastrophe, New York, Nation Books, 2004 (Korean edition from Icarus Media, Seoul, 2007).
 2) K.P.S. Menon, Many Worlds Revisited: An Autobiography, Bombay 1981, p. 259. Menon‘s waxed poetic and nostalgic in his memoirs, describing the accord he felt with Mo on “such elemental things as the sun and moon and stars, love and grief and joy.” Mo pinned all her hopes on him and wrote poems to him as “saviour of Korea.” He did not disappoint her.
 3) J.W. Burton, The Alternative, Sydney, 1954, p. 90. (Burton, Secretary of the Australian Department of Foreign Affairs between 1947 and June 1950, was the first to describe Australia’s foreign policy shift in these terms.)
 4) Interview with this author, Sydney, 14 August 1982.
 5) Stephen Simmons (journalist) and Haywood Magee (photographer), “War in Korea,” Picture Post, vo.l 48, No. 5, July 1950, p. 17. (The caption describes the incident as a matter “which has been investigated by a United Nations observer.”)
 6) Alan Winnington, “U.S. Belsen in Korea,” The Daily Worker, 9 August 1950. (The British government gave serious consideration to trying Winnington for treason over this report.)
 7) Park Myung-lim, [Pak Myong-nim], Han‘guk 1950: Ch?njaeng-gwa P’y?nghwa (Korea 1950: War and Peace), Seoul, Nanam, 2002, p. 324 (According to Park, these orders were issued “at the highest levels” and were not limited by geographical area.).
 8) “Korean Historical Report,” War Crimes Division, Judge Advocate Section, Korean Communications Zone, APO 234, Cumulative to 30 June 1953, Copy in Australian Archives, Victorian division, MP 729/8, Department of the Army, Classified Correspondence Files, 1945-1957, File 66/431/25.
 9) See, for example, Daily Telegraph(Sydney), 30 October 1953.
 10) No Ka-Won, “Taejon hyongmuso sachon sanbaek myong haksal sakon” (The massacre of 4,300 men from the Taejon prison), Mal, February 1992, pp. 122-31.
 11)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Republic of Korea, “Alleged communists massacred under the eyes of American soldiers,” Seoul, 16 June 2008, (with photographs released on 5 May 2008 by US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http://www.jinsil.go.kr/English/Information/notice/read.asp?num=193&pageno=&stype=&sval=&data_years=&data_month=
 Associated Press has made great efforts to investigate and publish this story. See especially Charles Hanley, “Fear, secrecy kept 1950 Korea mass killings hidden,” May 18, 2008, http://news.yahoo.com/s/ap/20080518/ap_on_re_as/korea_mass_executions_covered_up,
 And Charles J Hanley and Jae-Soon Chang, “Impact: Thousands killed by US‘s Korean ally” Associated Press, 18 May 2008,
 http://ap.google.com/article/ALeqM5h2rT2wzhviymfyfyRdmdKw6tciagD90O9DJ80.
 and the remarkable “Inter active” file, with its video testimony of one of those involved in the mass killings:
 http://hosted.ap.org/specials/interactives/_international/korea_masskillings/index.html?SITE=AP.
 Gregory Henderson, then employed in the US embassy in Seoul and later prominent historian and author of a classic study of Korean politics (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 Cambridge, Mass., Harvard UP, 1968, p. 167) also put the figure of “probably over 100,000” on those summarily executed at this time.
 12) Despite Australia’s involvement in the events surrounding the establishment of the Republic and in the War itself, the findings of the Commission are yet (as of late August 2008) to be reported there.

08. 09. 23.

P.S. 매코맥 교수의 책으론 <일본 허울뿐인 풍요>(창비, 1998)와 <범죄국가, 북한 그리고 미국>(이카루스미디어, 2006)이 소개돼 있다. 후자는 "30년 넘게 남북한, 중국, 일본 등 동북아 국가들에 대해 연구해 온 학자 개번 맥코맥 교수가 최근 북한을 둘러싼 국제정세를 분석하고 앞으로의 전망과 조언을 담은 책이다." 이런 조언을 정작 들어야 할 사람들은 다 귀를 막고 있는 듯하여 유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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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3 2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23 2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26 18:10   좋아요 0 | URL
매논과 모윤숙의 로맨스는 찢겨진 산하를 통해서 유명해졌죠.모윤숙 씨는 자신이 대한민국 탄생에 공헌했다며 생전에 상당히 자랑스러워 했다고 합니다.

로쟈 2008-09-27 12:53   좋아요 0 | URL
영화화될 수도 있겠는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9-27 16:00   좋아요 0 | URL
에로물이 될 것 같은데요...
 

바르트 관련자료를 검색하다가 오래전 기사가 눈에 띄어 (먼지를 털어내고) 옮겨놓는다. 97년(07년이 아니라!) 봄이니 10년도 더 전의 기사다. "국내 최대의 단행본 출판사인 고려원(대표 김낙천)의 부도가 출판계를 강타하고 있다."란 기사와 나란히 떠 있으므로 세월의 더께를 짐작해볼 수 있다. 롤랑 바르트 전집의 첫권으로 나온 <텍스트의 즐거움>(동문선, 1997)을 소개하고 있다.  

한겨레21(97. 04. 03) 텍스트의 즐거움

미셸 푸코, 피에르 부르디외, 자크 라캉, 루이 알튀세르, 질 들뢰즈 등과 함께 90년대 한국의 지식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프랑스 현대 사상가의 대열에 한사람을 더 추가한다면 아마도 기호학자 롤랑 바 르트가 될 것이다. 특히 문화현상에 대한 기호학적 접근이 크게 유행하면서 문학기호학의 창 시자인 바르트에 대한 지적 관심은 문학 분야뿐 아니라 비평계 전반에 걸쳐 증폭되어 왔다.

도서출판 동문선이 20여권이 넘는 바르트의 모든 저작을 출판키로 기획한 것도 이런 관심을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동문선은 최근 `텍스트의 즐거움'을 시작으로 앞으로 5년간 모두 28권으 로 이뤄진 ‘롤랑 바르트 전집’을 펴내기 시작했다. 첫권으로 나온 `텍스트의 즐거움'(전집12)은 바르트의 후기 사상을 이해하는 출발점 구실을 하는 책이다.

바르트 후기 사상 이해의 출발점
문학기호학의 창시자이자 후기구조주의 사상가의 일원으로 알려진 바르트 의 학문적 편력은 기호학에 전력한 전반기와 이른바 텍스트 이론에 주력 한 후반기로 크게 대별된다. `텍스트의 즐거움'은 `사랑의 단상'과 함께 바로 후기 바르트를 대표하는 저서로 꼽힌다. `텍스트의 즐거움'은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 이론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화두들, 즉 작품에서 저자의 위치, 독자는 누구인가, 작품과 텍스트는 어 떻게 다른가 하는 점 등 그의 문학기호학의 기본적인 논제들을 그 자신이 쓴 글과 책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책의 편집도 앞머리에 편역자인 김희 영 교수(한국외대 불어과)의 해제와 ‘저자의 죽음’(1968) ‘작품에서 텍스트로’(1971) 등 바르트의 짧은 글을 배치한 다음, 후기 작업의 이론적 틀을 제시한 유명한 저서 ‘텍스트의 즐거움’(1973)과 1977년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취임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설명한 연설문 ‘강의’ 등을 수록해 독자들이 바르트의 텍스트 이론에 접근하는 데 용이하도록 했 다. 이 밖에 바르트가 생전에 출판을 허락한 유일한 일기 ‘심의’와 바르트 의 사유체계를 비교적 잘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한 세편의 대담 등을 덧붙이고 있다.

롤랑 바르트(1915~1980)는 40세 때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 사회학 연구원이 된 뒤부터 기호학에 관한 많은 글을 발표하여 학문적 명성을 쌓기 시작해 1976년 프랑스 지식인의 최고 영예라고 할 수 있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선임됐다. `신화학' `모드의 체계' `사랑의 단상' `텍스트의 즐거움' 등 20여권의 저서와 글들을 남겼다.

유럽에서도 난해하기로 이름난 바르트의 사유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기호학 이론이나 텍스트 이론 등은 자주 거론되고 인용되지만 정확히 그 의미를 파악하는 독자들은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후기 사상의 핵심인 텍스트 이론은 작품의 생산자인 “저자를 죽임으로써 ” 비로소 출발한다.

작품에서 작가를 죽여야 진정한 의미의 독자가 탄생한다는 그의 발언은 난해하다. 무슨 뜻일가? 바르트에 따르면 작품을 만든 저자는 “역사적으 로 보아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자본주의 산물”이다. 따라서 진정한 글쓰 기는 “저자가 철저히 배제되는 것이고, 그 지점에서 독자가 탄생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의 텍스트 이론에서 저자의 개념은 그 지위를 상실 한다. 저자는 사라지고 오로지 “글쓰기를 배합하고 조립하는 조작자, 또 는 남의 글을 인용하고 베끼는 필사자가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없는’ 작품, 즉 텍스트는 무엇인가? 여전히 난해하기 는 마찬가지지만 바르트의 설명을 들어보면 “‘작품’이 단일하고도 안정된 기호체계라면, ‘텍스트’는 이런 고정된 의미로 환언할 수 없는 무 한한 시니피앙(기의)들의 짜임”이다. 작품이 “의미를 변경할 수 없는 고정된 것이라면, 텍스트는 의미생산이 무한하게 가능한 열린 공간”이라 는 것이다.

“작가는 합리적 자본주의 산물이다”
따라서 독자는 해독해야 할 의미가 사라진 텍스트의 자유로운 공간 속에서 텍스트를 만난다. 롤랑 바르트에게 텍스트란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구체적이고 관능적인 공간이고, 비로소 그 둘은 경이롭고도 소중한 욕망의 여행을 시작”하는 빈 공간이다.

바르트의 주장은 권력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도 명확히 나타난다. “언어는 파시스트적”이라며 언어 자체가 가지는 권력성을 갈파한다. 그의 텍 스트 이론에 따르면 “언어의 폭력성, 지배 견해의 폭력, 상투적인 것에 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역사성의 회복과, 능동적인 글쓰기가 필요”하다. “언어가 권력을 행사하려고 들 때마다 그 언어를 버리고 다른 자리 로 옮겨가는 것”이다. 권력이 우리를 이용할 수 없는 곳으로. 그곳은 어디인가? 바르트는 그곳을 “도덕성 또는 소설적인 것”이라고 가리킨다. “진실의 불확실성을 깨닫고, 끝없이 새로운 것을 향해, 불가능한 지평을 향해 나아갈 때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 바르트 이론의 결론이다.(이인우기자)

08. 09. 21.

P.S. 알라딘에서도 검색이 되지만, 바르트의 책은 <텍스트의 즐거움>(연세대출판부, 1990)으로도 출간된 적이 있다. 그다지 즐겁게 읽히는 텍스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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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2008-09-21 17:23   좋아요 0 | URL
'그다지 즐겁게 읽히지 텍스트는 아니었다'면 아주 후한 평이십니다. ^^;

로쟈 2008-09-22 16:38   좋아요 0 | URL
연대출판부본을 읽어보신 모양이군요.^^;
 

필요 때문에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1>(문학동네, 2000)을 영역본과 같이 좀 보다가 관련자료를 검색해봤다. 동아일보의 기획기사 중 한 꼭지가 <진리와 방법>을 다루고 있고, 교수신문에도 국역본의 역자 중 한 사람인 임호일 교수의 소개가 실려 있다. 현재 나와 있는 국역본은 전체의 1/3 정도인데, 이르면 연내에 나머지 부분도 출간예정이라고 한다(늦어도 내년까지는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기사들을 자료삼아 스크랩해놓는다.  

동아일보(08. 03. 26) [인문과 자연의 경계를 넘어 30선]<18>진리와 방법

《“해석학적 현상에서는 진리의 경험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진리의 경험은 철학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일종의 철학적 사유 방식이기도 하다.”》

‘진리와 방법’은 철학자 가다머(1900∼2002)의 주저(主著)일 뿐 아니라 해석학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가다머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에 걸쳐 집필한 이 역작은 해석학을 독일 철학계의 중심적인 논제로 대두시킨 계기가 되었다. 워낙 오래된 저서인 만큼 비판과 지적도 따랐지만 아직껏 이 책을 능가하는 해석학 저서는 나온 것이 없다는 게 철학계의 평가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선 해석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9세기 중반 자연주의적 과학주의적 정신의 득세로, 철학의 고유한 연구 대상이었던 인간 정신은 자연과학의 부속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해석학은 철학의 문제 영역인 정신과학이 자연과학의 일종이 아니라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가다머가 진리와 방법이라는 제목을 생각해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철학적 해석학의 기본 특징들’을 염두에 두었지만 출판사 발행인이 ‘해석학’이라는 용어를 낯설게 여겨서 제목을 바꾼 것. 그러나 진리와 방법이라는 제목은 적절했다. 진리에 이르는 ‘방법’이란 자연과학의 객관적 방법론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가다머의 의도는 과학주의·객관주의의 방법론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경험 세계를 찾아, 여기에서도 진리가 획득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경험’이 중요하다. 경험이란 자연과학에는 없고 정신과학에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경험은 주체와 객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변화를 끌어내는 것을 가리킨다. 가다머는 정신과학의 진리의 ‘경험’을 찾아내 고유한 정당성을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상이한 세 영역의 연구를 이행했지만 이 영역들은 철학적으로 통일성을 갖고 있었다. 세 영역이란 예술과 역사, 언어의 철학적 분석을 말한다. 2000년 국내에 번역된 ‘진리와 방법Ⅰ’은 예술 경험의 진리 문제를 탐색한다. 이론을 세우는 게 아니라 경험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예술에 대한 논의는 정신과학에 속한다. 해석학에 따르면 예술은 개인의 사사로운 영감에서 발동한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보편적인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예술 ‘경험’, 즉 예술작품에서 다른 방식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진리를 경험한다는 것은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맞서는 예술의 철학적 의미를 형성한다.

가다머는 이렇게 예술 경험에 대한 이해 지평뿐 아니라 예술작품의 존재론과 그 해석학적 의미를 물음으로써 예술 경험의 자기정체성을, 나아가 정신과학의 독자성을 규명한다. 가다머는 고대 그리스철학부터 딜타이, 칸트, 후설, 하이데거 등 철학사를 훑으면서 예술의 고유한 인식 방법과 진리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난해하기로 소문난 텍스트다. 고려대 이길우(철학) 교수, 강원대 이선관(철학) 교수, 동국대 임호일(독문학) 교수, 강원대 한동원(철학) 교수가 이 책의 번역에 함께했다. 역사와 철학에 대해 논의한 ‘진리와 방법Ⅱ’도 번역 중이며 이르면 연내 출간될 예정이다.(김지영 기자)

교수신문(01. 05. 28) 가다머를 통해 본 인문학의 이해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은 기술(과학)문명의 범람으로 익사 직전의 위기에 처한 인문학이 우리의 현실에서 왜 중요하며, 왜 필요하고, 인문학이 왜 복권되어야 하는가를 웅변해 준다. 인간의 삶은 인간이, 그리고 인간과 사물이 서로 지배관계가 아닌 공존관계를 이룰 때 진정한 행복을 구가할 수 있다. 그러나 기술문명은 지배욕구를 은폐하고 있다. 달리 말해 기술문명은 자연뿐 아니라 인간을 대상화시켜 점령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확립한다. 이러한 지배이데올로기에 반기를 드는 것이 인문학, 즉 가다머의 표현을 빌리면 ‘철학적 해석학’이다.

기술문명에 대한 저항의 잠재력
가다머는 무엇보다도 전통을 중요시한다. 가다머에게는 전통이 곧 인문학의 출발점이요, ‘진리의 生起’를 가능하게 해주는 원천이다. 그가 의미하는 전통이란 철학분야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대변되는 고대철학과 칸트 및 헤겔로 대변되는 근대철학이다. 그밖에도 그는 신화와 예술작품도 이 전통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그는 이러한 전통 속에서 확장 일로를 걷고 있는 과학의 지배요구에 대한 저항의 잠재력을 본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전통의 이해’를 전통에 무조건적으로 권위를 부여하는 행위로 파악하거나, 전통의 단순한 습득 및 이해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가다머에 의하면 인간의 이해와 마찬가지로 전통의 이해는 반드시 대화와 질문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한 인간의 이해를 통해 우리의 지평을 넓히듯이, 전통의 이해를 통해 ‘새로운 빛’을 보게 된다. 가다머는 특히 예술작품과의 만남에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예술작품은 친숙함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데, 알 수 없는 일은, 이 친숙함은 동시에 충격과 익숙한 것의 붕괴를 동반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해석학을 출발점으로 삼는 가다머의 해석학은 바로 이 전통과 현재의 매개를 제일 과제로 삼는다. 여기서 매개란 곧 대화를 의미하며, 이 대화는 이해를 통해 구현된다. 그러나 가다머의 이해는 결코 어떤 대상을 제것으로 만들기 위한 도구적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 이해에는 자기 비판이 선행되며, “이해하는 사람은 결코 우월한 지위를 고집하지 않고, 자신의 불확실한 진리가 검증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선입견’이 이해를 촉진
가다머는 “모든 이해는 필연적으로 역사적으로 자리매김 되어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이해는 이해하는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역사적 상황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이다. 그가 대상화를 거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항상 역사의 한 가운데 있으며, “매 순간마다 과거로부터 우리에게로 오는 것, 즉 전수되는 것과 더불어 우리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 속에서 존재한다.” 이렇듯 이해에서 자신의 고유한 역사성을 함께 성찰하는 의식을 가다머는 ‘영향사적 의식’이라고 부른다.

가다머가 전통을 중요시하고, 계몽주의 이래로 박탈당했던 선입견의 권리회복을 역설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에 의하면 이해는 선입견을 근거로 해서 작용한다. 여기서 선입견이란 이해하는 사람, 즉 해석자에게 축적된 모든 정신적 자산 일체를 뜻하며, 이러한 선입견이 ‘선이해’, 즉 ‘현재의 견해’로 작용하면서 이해를 촉진시킨다. 이 정신적 자산, 즉 ‘기대의 지평을 형성하는 전래된 견해들’이 없는 한 그 어떤 이해과정도 작동할 수가 없게 된다. 가다머는 계몽주의자들이 ‘고유한 반성적 노력의 결과’로 인정한 ‘판단’을 개인적이라고 폄하하는 반면에, 선입견에게는 ‘비개인적’, 또는 ‘선개인적’이라는 속성을 부여함으로써 선입견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킨다.

가다머는 개인적 또는 주관적 인식을 경계하는 한편, 공동체적 계기들을 중시한다. 그가 공동체적 계기들을 중시하는 이유는 그것이 역사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동체적 계기들을 전통 속에서, 예술작품의 ‘세계’ 속에서 또는 ‘생활세계’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들은 역사적 변화와 더불어 그 존재를 증대시켜 왔으며, 개인을 그 속에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들은 개인으로부터 분리되어 대상화될 수 없다. 그 때문에 가다머는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생기와의 만남을 통해 진리를 인식한다.

‘방법’으로 파악될 수 없는 ‘진리’
가다머에 의하면 사물을 대상화시키는 진리는 ‘방법’을 통해서는 파악될 수 없다. 진리는 계획적이고 통제성을 띤 방법과는 대립적인 관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진리는 ‘현재의 것과 역사적인 것의 존재가 표현되고 이해’되는, 즉 ‘삶의 실행’과 연관된 생기이다. 다시 말해 진리는 이 양 존재가 만나는 사건이다. 생기로서의 이러한 진리는 사유의 발전과정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사유의 변화와 무관한 그 어떤 존재’도 허용하지 않는다.

가다머가 그의 해석학에서 언급하는 ‘이해의 역사성’도 바로 이 사유의 변화와 같은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가다머의 이해는 슐라이어마허나 딜타이의 그것과는 달리 역사적 지평과 현재의 ‘지평의 융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진리생기의 한 중요한 계기이다.(임호일 동국대 독문학)

08. 09. 15.



 

 

 

P.S. 중고생을 위한 책으로 <가다머가 들려주는 선입견 이야기>(자음과모음) 같은 책도 나와 있지만 가다머에 관한 본격적인 소개서나 연구서는 아주 빈약한 편이다. <진리와 방법> 국역본이 나오기 전에는 리처드 팔머의 <해석학이란 무엇인가>(문예출판사)가 (철학적) 해석학에 대한 표준적인 입문서 역할을 했었다. 아마도 조지아 윈키의 <가다머>(민음사)가 거의 유일한 소개서였던 듯싶고, <한스-게오르그 가다머>(한양대출판부, 2001)를 보탤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다(관련서로 가장 인상적인 책은 짱 롱시의 <도와 로고스>(강, 1997)였다). 최근에 나온 책으론 정연재의 <윤리학과 해석학>(아카넷, 2008)이 있는데, '그리스 철학의 수용과 재해석의 관점에서 본 가다머 철학'가 부제이며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에 토대를 둔 것이다.

한편, 작년 여름 <진리와 방법>을 펴들었다가 맛보기로 쓴 페이퍼로 '파도타기와 공잡기'(http://blog.aladin.co.kr/mramor/1364280)도 참조. '가다머 읽기'를 더 길게 쓰고도 싶지만, 요즘은 파도탈 시간도, 공잡을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군. 날씨는 여름이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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