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 분야에도 '노벨상'이 주어진다고 한다. 노르웨이 정부가 주관하는 홀베르상이 그것이란다. 처음 듣는 상인데, 상금이 자그만치 10억이 넘는다고 하니 '노벨상' 맞는 듯싶다(상금은 더 많은 것 아닌가?). 2003년에 제정됐다고 하니 나만 과문한 건 아니겠다. 이미 줄리아 크리스테바, 위르겐 하버마스, 쉬무엘 아이젠스타트, 로널드 드워킨 등이 수상을 했고, 올해 수상자가 미국의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이라고 한다. '연로한' 제임슨의 근황 소식도 겸하고 있어서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8. 11. 14) "세계문학은 보편 가치를 좇는 공간 아니다”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74)이 노르웨이 정부가 주관하는 홀베르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제임슨은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듀크대에서 10일 오후(현지시각) 수상 기념 강연을 했다. 듀크대에서 연구년을 보내고 있는 영문학자 신명아 교수(경희대)가 직접 강연을 듣고 글을 보내왔다.

11월26일 <포스트모더니즘: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의 저자인 미국의 좌파지식인 프레드릭 제임슨이 78만달러(10억6천만원 가량)의 상금이 수여되는 홀베르상을 수상한다. 제임슨과 더불어 미국의 좌파 문화이론을 선도하면서,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생산관계를 현대판 노동자인 다중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제국>을 네그리와 함께 쓴 마이클 하트는 <한겨레> 독자를 위해 이 수상이 “문학과 문화분석을 위한 마르크스주의의 가치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정”이라고 정의해 주었다.

지난 10일 듀크대는 ‘세계문학은 외국 사무소를 가지는가?’라는 제임슨의 기념 강연과 저명한 작가, 인문학자들의 축하 논평으로 이 수상을 축하했다. 제임슨은 “각각 다른 국가의 비평가들과 사고가들의 관계망”으로서의 세계문학은 독일 작가 괴테가 영국 시인 바이런의 텍스트를 읽는 2자적 관계가 아니라 양쪽 독자(작가)들이 양쪽 나라의 역사적·국가적 상황에 매개되어 쌍방의 텍스트를, 저항이든 수용이든, 자신의 국가적 상황과 관계하여 접근하는 “(각 나라의) 역사들과 구체적 역사적 상황들 사이의 복잡한 접촉”의 장으로서 4자적 관계를 가진다고 규정했다.

제임슨은 작품이 자신의 고유 형태와 그 바깥(역사, 사회)의 변증법적 산물이듯이, 현대사회는 국가를 무화시키기는커녕 전지구적 자본의 유동성을 위해 국가의 이름으로 주체들의 임금이나 권리를 희생하는 변증법적 모순의 관계를 가진다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세계문학은 “국가적 산물의 관계이자… 투쟁, 경쟁 및 대립의 장이자 공간”으로서 “고전들의 (죽은 것을 위한) 신전이나 ‘상상적인 박물관’이 아니라 각 차이들이 어떻게 관계하고, 어떻게 국가성이 보편화되고, 전지구적 복수성이 중심이 없이 생각되어질 수 있는가라는 수수께끼에 대한 다른 이름”임을 지적한다.

제임슨은 “가치는 역사적이다”라는 신념 아래 세계문학은 보편적 가치의 추구가 아니라 “급진적 차이와 대립은 물론이거니와 또한 불균등한 정전성”이 허용되고 보편과 개체성의 변증법적 양가성이 다양하게 전개되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제임슨은 자신의 이번 수상은 헤게모니적 유럽 중심 기관으로부터의 수상이 아니라 비헤게모니 국가로부터의 수상이라는 점에서 ‘중심이 없는 세계문학’의 의미가 특히 부각된다고 보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월레 소잉카는 특히 미국과 같은 패권국가 독자들의 문학적 고립성을 지적하면서, 세계문학은 어린 아이가 자기 나라의 문학이 아닌 다른 세계의 이야기에 매료되는 그런 순수한 감각으로 다양한 지역과 물질성에 기초한 이야기들이 세계인에 의해 서로 애호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논평했다. 라틴 계열 극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은 라틴 작가 카르펜티에와 미구엘 아스투리아스가 파리에서 유럽과의 마찰로 더 고유한 문학을 창출해낼 수 있듯이, 각 문화의 산물은 시장을 통해 원심력적으로 혹은 구심력적으로 왔다갔다 하며 자신의 문학을 창조적으로 교환하고 생산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제임슨의 홀베르상 수상은 우리 사회의 진보지식인에 대한 냉소적 시각에 균형을 가져다 줄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백낙청 교수가 수상식 전날 같은 곳에서 개최되는 홀베르상 학술대회에서 페리 앤더슨 같은 5명의 저명한 학자들의 일원으로 논문을 발표한다는 사실은 이 분야에서 우리 학계의 세계적 위상을 잘 보여준다. 우리 지식인들과 문학인들이 자기 고유의 국가적 상황에 기초한 텍스트를 창조하면서 전지구적 복수성의 일원으로서 세계문학의 무대에 동참하기를 기대해본다.(신명아/경희대 교수 영문학)

■ 홀베르상은

2003년 노르웨이 국회에서 작가 홀베르(1684~1754)의 이름으로 제정된 이후 줄리아 크리스테바, 위르겐 하버마스, 쉬무엘 아이젠스타트, 로널드 드워킨 같은 세계적 석학들에게 수여된 상으로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노벨상으로 일컬어진다.

08. 11. 13.

P.S. 주저인 <정치적 무의식>이나 <포스트모더니즘: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도 아직 소개되지 않은 형편인지라 제임슨에 대해서 따로 뭘 기대한다는 건 사치에 불과하겠지만, 그의 신작 가운데 SF문학을 다룬 <미래의 고고학>(2007)이나 출간예정작인 <변증법의 가치>(2009) 등은 소개되면 좋겠다. '노벨상' 수상 이론가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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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1-14 13:28   좋아요 0 | URL
20대 30대 인문학 연구자들,특히 문학이론 연구자들이 요즘도 제임슨을 많이 읽나요?

로쟈 2008-11-14 22:47   좋아요 0 | URL
제가 연구자들과 교류하는 편이 아니어서 잘은 모르겠습니다. 대학원 강의실에서는 더러 읽히는 것 같습니다...

책사랑 2008-11-15 05:39   좋아요 0 | URL
"미래의 고고학"은 현재 두 번역자에 의해(한 명은 제임슨 제자) 번역중에 있으며, "변증법의 가치" 역시 같은 출판사에서 저작권 계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로쟈 2008-11-15 16:44   좋아요 0 | URL
반가운 소식이군요...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기사 몇 편을 스크랩해놓는다. 지난 주말에 한국학술단체협의회 창립 20주년 기념 학술행사가 개최되었는데, 이와 관련한 기사가 두 편이고, 거기에 덧붙인 건 피아니스트 강충모 교수의 인터뷰 기사이다. 학단협 20년에 대한 회고의 주조음이 '뼈저린 반성'인 것이 이채롭다(관심을 끄는 발표주제들이 있어서 홈피의 자료실을 찾았더니 고작 서너 편의 발표문만 덩그러니 올려져 있다. 역시나 반성은 말뿐인 듯싶다). 대저 학문이란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더불어, 이 학문/예술과 삶, 그리고 엘리트와 대중 사이의 간극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본다. 개인적인 스크랩이지만 혹여 관심을 갖고 있는 분이 더 계실까봐 '공개'로 해놓는다...  

한국일보(08. 11. 06) 2008년 한국사회 진보의 자기반성

2008년 한국 사회에서 '진보'란 어떤 목소리일까. 한국학술단체협의회가 창립 20주년을 맞아 '21세기 진보와 진보학술운동의 과제'를 주제로 연합 학술대회를 7, 8일 건국대에서 연다. 학단협은 6월항쟁의 열기가 남아 있던 1988년 진보적 학술단체들이 결성한 협의회로, 현재 26개 단체 5,000여명의 회원들이 '학술활동을 통한 사회 민주화'를 목표로 각종 연구를 진행 중이다.

이번 대회는 신자유주의의 전지구적 확산과 국내 보수정권 출현이라는 환경 속에서 진보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자 마련됐다. 두 편의 발표 논문을 통해 2008년 오늘, 진보의 목소리를 미리 들어본다.

김범춘 건국대 강사(철학)의 발표문 '지연되는 미래와 진보 철학'은 진보의 뼈저린 자기반성을 담고 있다. 그는 "우리 사회의 진보는 때때로 악수를 두는 멍청한 보수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갖고 있는 '저항'이라는 낡은 콘텐츠마저 잃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주장한다. 해방적 콘텐츠로서 진보가 행사하던 이론적 우위가 사라진 지 오래인데도 "진보는 진보를 가능케 하는 새로운 콘텐츠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그는 진단했다. 그는 "이 처참한 현실을 메우기 위해 이론의 과잉은 불가피"하지만 그렇게 끌어들인 레비나스, 로티, 벤야민, 들뢰즈도 제대로 소화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현실에 맞는 레시피(조리법)도 없이 그저 번역하고 세미나하고 논문 쓰고 토론한 결과, 진보적 지식인은 새로운 지식의 홍보전문가이거나 출판전문가로 변신했다"고 통렬히 비판했다.

김재현 경남대 교수(철학)는 '민주주의의 심화와 확장을 위하여'라는 발표문을 "민주주의가 갖는 문제에 대한 처방은 더 많은 민주주의다"라는 존 듀이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시대정신이 따로 있고, 진보진영의 시대정신이 따로 있는가"라고 물은 뒤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미성숙한 것"이라고 스스로 답한다. 그리고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기 위해 사회권, 인정투쟁, 민주주의 등의 개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김 교수는 '진보, 개혁의 위기는 민생의 위기이고 민생의 위기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문제의식은 민주주의의 확장을 통해 해결 가능한 것으로 본다. 비정규직, 소수자 인권, 실업자 생존권 등의 문제를 들며 이것이 아직 남아 있는 '반민주 대 민주'의 전선이라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한국사회는 민주화의 과제를 안고 있다"는 최장집 교수의 말을 다시 인용하며 끝을 맺었다.(유상호 기자)

한겨레(08. 11. 06) 학단협 20돌 ‘학술운동 제도권화’ 자성 목소리

국내 진보적 인문사회과학 연구단체의 협의기구인 학술단체협의회(학단협)가 창립 20년을 맞았다. 1988년 11월 한국산업사회연구회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국정치연구회 등 10개의 진보적 학술단체가 모여 출범한 학단협은 “연구와 학술 활동을 통해 사회 민주화에 이바지한다”는 정관이 말해주듯 학술 ‘운동’ 단체로서 실천적 지향이 뚜렷했다. 이론을 매개로 현실을 비판하는 ‘이론적 실천’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변혁을 위한 ‘실천적 이론’을 안출하려 했고, 일부는 그 이론을 들고 현실의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20년이 흐른 지금 학단협 안팎에선 “학술운동이 제도권 내부의 ‘교수운동’이 되어버렸다”거나 “운동의 정체성을 잃고 국가기관의 ‘협치’(governance) 파트너로 전락했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서유석 학단협 상임대표도 “학술운동이 상당 부분 ‘제도권 학회’의 연합운동으로 축소된 측면이 있다”고 인정한다. 핵심 회원단체들이 정부 지원을 받는 제도권 학회로 자리매김되고, 연구활동 역시 사회과학논문인용색인(SSCI)이나 학술진흥재단(학진)의 등재지 기준에 따라 규율되면서 지식생산 역시 특정 방향으로 구조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88년 문학예술연구소 회원으로 학단협 창립에도 참여했던 조정환 ‘자율평론’ 상임만사(만드는 사람)는 이런 현상을 ‘학문의 국가종속’이란 관점에서 비판한다. 그는 “종속은 두 가지 형태로 이뤄졌는데, 하나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연구자들 일부가 통치시스템에 적극 가담하는 형태였다면, 다른 하나는 학술진흥기금을 매개로 학술활동이 정부 통제체제에 편입되는 방식이었다”며 “두 가지 모두 학문 자율성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진단했다.

연구공동체 ‘수유+너머’에서 활동하는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는 ‘학술운동’이란 명칭 자체에 회의적이다. 이 교수는 “연구자 대부분 대학에 자리를 얻고, 단체들 역시 정부 지원을 받으면서 학단협은 제도권 안에서 공식 지분을 가진 ‘좌파 학계’가 됐다”며 “특히 학술지를 운영하거나 학진의 심사에 참여하는 좌파 연구자들의 행태는 과거 그들이 비판했던 우파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꼬집었다.

90년대 중반 산업사회연구회 활동을 통해 학단협과 인연을 맺은 신진욱 중앙대 교수도 “진보 학술지들이 학진의 등재(후보)지가 되면서 연구자들에게 표준화·획일화된 글쓰기가 강요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게재 기준을 충족시키려다 보니 대중과의 소통 지점은 좁아지고, 운동에 대한 실천적 고민도 약화되는 문제점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학단협 안에서도 자성과 쇄신의 움직임이 감지된다. 2003년 상임대표를 지낸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학술운동이 외부 권력과의 싸움은 중시하면서도 내부의 제도·문화·관행을 개혁하는 데는 소홀했던 게 사실”이라며 “우리 스스로를 권력대상으로 성찰하지 않는 한 운동의 발전은 없다”고 진단했다. 조 교수는 8일 열리는 2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와 함께 △탈국가·생태·여성주의 시각의 내재화 △복합적 신계급담론의 정교화 △제도권·비제도권의 경계 허물기 △학벌주의·학진 질서 타파 △신자유주의적 지식생산 규칙의 극복 등을 진보 학술운동의 과제로 의제화할 계획이다.

80년대 초반 김진균·변형윤 등 해직교수들을 중심으로 분과학문별 소규모 연구그룹이 생겨난 뒤 대학원생·사회운동가를 주축으로 세를 규합해간 학술운동은 88년 6월 서관모 충북대 교수의 논문에 대한 검찰조사에 공동 대응하는 과정에서 상설 협의체인 학단협을 탄생시켰다. 현재 26개 단체 5000여명의 연구자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매년 한 차례의 연합 심포지엄을 열며, 수시로 사회 쟁점과 관련된 정책토론회를 개최하고 있다.(이세영 기자)



경향신문(08. 11. 10) 피아니스트 강충모 “클래식의 대중화? 그건 난센스”

피아니스트 강충모(48·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참 ‘미련한’ 사람이다. 서울이 월드컵 열기로 한창 뜨겁던 2002년 초여름, 그는 바흐의 피아노 음악을 암보(暗譜)로 연주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바흐의 느리고 차분한 음악을 연주하면서 “월드컵도 중요하지만 나같은 사람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었다.

그의 고집스러운 행보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바흐 전곡 연주’를 펼친 그는, 곧바로 해설과 연주를 병행하는 ‘렉처 콘서트’를 시작했다. 이 또한 5년 계획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이달 15일에 마침내 마지막 방점을 찍는다. 6일 서초동에서 만난 강충모는 “이제 좀 지쳤다. 앞으로 4~5년 연주를 쉬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두 가지 문제를 풀어보려고 렉처 콘서트를 시작했지요. 피아노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악보만 들여다보는 게 답답했어요. 음악은 오선지 속에만 들어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작곡가가 살았던 시대를 이해해야 하고, 왜 그 곡을 작곡했는가, 담겨 있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등등, 악보의 이면(裏面)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죠. 또 하나의 동기는 ‘클래식 대중화’라는 구호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죠. 제가 90년대 초반에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당시 한창 인기있던 <열린 음악회>를 보면서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클래식을 ‘대중화’한다는 발상 자체가 난센스 아닙니까? 대중화라는 말만 앞세우면서, 오히려 사람들을 클래식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 방식이죠.”

그는 “한국의 음악문화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불편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라고 했다. “외국 연주자들이 내한해 한국 청중을 우습게 보는 연주를 펼치는 걸 심심찮게 본다”면서 “그 무성의한 연주를 지켜보노라면 같은 연주자로서 분노가 치민다”고 했다. 또 “허명(虛名)뿐인 연주에 청중이 열렬히 기립박수를 치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다”고도 했다.

제가 한창 바흐를 연주하고 있을 때, 외국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한 분이 내한했어요. 저도 그 콘서트에 갔었지요. 그 사람이 연주할 곡도 바흐였거든요. 바흐의 ‘프랑스 모음곡’이었어요. 상당히 기대를 하고 갔었는데, 연주가 아주 무성의한 겁니다. 심지어 펼쳐놓은 악보를 군데군데 건너뛰면서, 그야말로 ‘대충’ 하더라고요. 한국 청중을 너무 ‘쉽게’ 본 거죠. 또 어떤 연주회에서는 중간에 그냥 나와버린 적도 있어요.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 문제 많았던 연주에 청중이 열광하더라고요.”

한국의 연주회장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일부 청중의 키치(Kitsch)적 태도. 강충모는 신분이나 교양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음악회장을 찾아오는, 속물적인 ‘문화 귀족’들에게도 일침을 놨다. 그는 “입장료가 비싼 연주회일수록 그런 청중이 많다”며 “콘서트홀이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사교장으로 변질돼선 곤란하다”고 강조했다.

연주자를 꿈꾸는 후학들에게는 ‘해석의 깊이’를, 콘서트홀을 찾는 청중에겐 음악에 대한 ‘이해와 견해’를 갖게 해주고 싶어서 5년간 렉처 콘서트를 이끌어왔다는 강충모. 그는 ‘인투 더 클래식’이라고 이름붙인 이 장기 프로젝트를 1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마감하면서 세 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한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 대곡(大曲)으로 꼽히는 ‘21번 B플랫장조 D.960’, 베토벤 후기의 초탈한 음악성을 대변하는 ‘소나타 32번 c단조’, 쇼팽이 작곡한 3곡의 소나타 중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받는 ‘3번 b단조’ 등이다. 3곡의 공통점은 세 작곡가의 마지막 소나타라는 점. 그래서 연주회 이름도 ‘마지막 소나타’로 붙였다. 특히 베토벤의 소나타 32번은 강충모가 “가장 사랑하는 음악”이라며 애착을 표하는 곡이다.

그는 “죽을 때 가져가고 싶은 음악이 있는가?”라는 마지막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있다”고 답했다. “어떤 곡이냐?”고 묻자, “베토벤의 32번, 말러의 ‘대지의 노래’,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2악장”이라고 답했다.(글·문학수 선임기자)

08.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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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11-11 09:20   좋아요 0 | URL
^^ 콘서트홀이야말로 '과시적소비'를 가장 세련된 형태로 표현할 수 있는 공간 중에 하나일겝니다. 강충모가 좋아하는 곡은 저도 좋아하는 음악들이네요. 가을 요맘때는 중국 한시에 곡을 붙인 말러의 '대지의 노래'가 귀에 잘 들립니다.

로쟈 2008-11-12 00:53   좋아요 0 | URL
청중들의 키치적 태도 못지 않게 문제인 건 공연비평 같습니다. 좋은 공연과 부실한 공연을 가려주는 비평문화가 제대로 자리잡고 있다면 허술한 공연이 발붙이기 어려울 듯싶은데, 사정은 그렇지 못한 듯해서요...

수유 2008-11-11 09:44   좋아요 0 | URL
슈베르트 D.960은 이 계절하고도 아주 잘 어울리죠..저도 좋아하는 곡들입니다.
나이들면서 슈베르트의 곡들의 어떤 진정성들이 와닿아요..
별 관련없는 이야기입니다만.

콘서트홀의 '키치적 행태'야 익히 보아온 것들이고..그래도 요즘 많이 나아진것 같기도 한데
뭐 그렇습니다.

로쟈 2008-11-12 00:56   좋아요 0 | URL
공짜표 청중과 '문화 귀족' 없이도 고급 공연문화가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11-11 16:35   좋아요 0 | URL
학단협...가물가물 기억나는 단체...한나라당이 재집권했으니 예전 군사정권 때처럼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을까요.

로쟈 2008-11-12 00:51   좋아요 0 | URL
별로 기대가 가지는 않는데요.--;
 

중앙대 대학원신문에서 학술 동향 관련기사를 몇 편 스크랩해놓는다(http://www.cauon.net/news/articleList.html?sc_area=I&sc_word=jaewoni). 기초학문 및 인문학에 대한 지원체계의 부족, 이로 인한 연구자의 정체성 위기와 타개 전망의 불투명이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대학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학문 자체는 절대적인 것인지 의문이다). 독일 인문학계도 침체돼 있는 형편이라고 하니, '인문학은 어디로 가는가'란 물음만큼은 두루 적용될 듯싶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8. 10. 03) 위협받는 기초학문과 인문학의 위상

곧 한국사회에 공룡이 출현한다. 2008년 기준 한 해 예산 약 1조 원의 한국학술진흥재단과 1조5천억 원의 한국과학재단, 6백억 원의 국제과학기술협력재단이 ‘한국연구재단’으로 통합될 예정이다. 정부발표에 따르면, 한국연구재단은 인문학, 사회과학, 과학을 통틀어 한 해 약 2조5천억 원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의 학술연구 지원활동을 전담할 예정이다.

여러 곳으로 분산된 연구지원체계를 하나로 통합하고 프로그램매니저(PM) 제도를 도입하면 연구자의 불편이 해소되고 전문성이 강화될 것이라 정부는 예상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이번 통합으로 “기초원천연구투자 확대”와 “기초연구지원시스템 효율화 및 선진화”가 이뤄져 “기초원천연구의 창조적 역량 극대화, 지식기반사회의 성장잠재력 확충, 과학기술 5대 강국 구현의 기초체력 강화”를 이룰 것이라 예상한다.

그런데 이 엄청난 규모의 통합이 실제 학술연구활동에 미칠 영향에 관해서는 아직 심도 깊은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3개의 재단을 하나로 통합했을 때의 장단점에 관해 정부는 분명하고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단순히 연구지원체계를 일원화해야 효율적인 관리가 가능하다는 주장만 있을 뿐이다. 지난 8월 8일 학술단체협의회, (전국)인문과학연구소협의회, (전국)사회과학분야중점연구소협의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공개토론회는 이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 토론회에 참여한 학자들은 이번 통합이 성과주의와 관료주의를 따르는 발상일 뿐만 아니라 기초학문과 인문학의 위상 자체를 뒤흔들 수 있다며 우려를 드러냈다.

연구활동을 위축시키는 연구지원체계
기본적으로 이번 통합은 정부의 공공기관 선진화 계획의 일부이다. 29개 공공기관을 13개 기관으로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한국연구재단이 설립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통합은 학술연구지원정책에 대한 진지한 고민보다 공공기관의 구조조정과 더 많이 연관되어 있다. 자연히 한국연구재단의 설립은 학문의 과정보다 효과적인 결과물에, 학술연구의 다양성보다 국제경쟁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따라서 가시적인 성과를 낳을 수 있는 분야에만 예산이 집중될 것이다.

물론 인문한국(HK)이나 두뇌한국(BK21), 누리사업(NURI)처럼 이미 진행되고 있는 사업들이 갑작스레 중단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 재단의 통합이 학문후속세대의 삶을, 특히 인문학이나 기초학문과 연관된 학문후속세대의 삶을 지금 당장 위협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원을 위한 ‘조건’을 고려하면 그 위협은 곧 드러난다. 그동안 학술진흥재단 지원의 여러 문제점들이 지적되어왔는데, 이번 통합은 한국연구재단의 사무총장과 PM에게 더 많은 권한을 집중시켜서 ‘학문의 편향성’을 더 심화시킬 예정이다. 특히 심사자의 생각이 반영될 수밖에 없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의 경우, 권력을 가진 이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연구지원사업이 결정될 것이다. 그러니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학계의 연구방향도 요동치리라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연구성과에 대한 양적인 평가를 보완하겠다고 밝히지만 그 질적 보완은 한국의 특성보다 소위 ‘글로벌 스탠다드’를 따를 것이다. 그러니 학문후속세대의 능력이 자기 전공에 대한 열정이나 능력보다 영어논문 작성능력으로 평가받는 왜곡된 현상은 더 심각해질 것이다. 또한 학계의 동향을 파악하고 인력을 끌어올 수 있는 능력이 연구능력보다 더 빛을 발할 것이다. 이런 정책은 대학원 내부에도 영향을 미쳐 한정된 프로젝트를 놓고 대학 내에서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고, 교수는 마치 기업체의 팀장처럼 자신의 학생들을 훈련시킬 것이다. 학제간 연구는 상품일 뿐이고 대학원사회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기업으로 변할 것이다.

대학을 바꿔야 학문이 산다
이런 분위기에서도 정부와 대학은 소위 ‘세계 수준의 연구중심대학’(WCU) 사업을 놓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다. 해외의 석학을 유치해서 한국 대학의 수준을 세계 수준으로 높이고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겠다며 정부는 5년간 1조 원에 가까운 예산을 쏟아 부을 예정이다. 많은 돈을 주고 해외에서 모셔온 소수의 석학이 한국 대학의 수준을 높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예산은 한국의 수많은 학문후속세대에게 쓰여야 할 예산에서 전용된 것이고 이를 통해 학문의 종속성이 더 심화될 것이다. 사실 학문후속세대가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조건은 국가나 기업같은 외부환경이 아니라 대학이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사학재단들은 그런 기본적인 투자를 외면하고 있다. 매년 엄청난 액수의 적립금이 쌓이지만 등록금은 늘어나고 연구에 필요한 돈마저 프로젝트를 통해 마련해야 한다. 외국의 학자를 서로 데려오려고 꼴사나운 경쟁을 벌이면서도 정작 시간강사들의 처우는 기본적인 보장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학문후속세대의 미래를 논할 수 있을까?(하승우/ 지행네트워크 연구위원)

중앙대 대학원신문(08. 10. 26) 흔들리는 연구자의 정체성, 어려워지는 소통

최근 '학력 인플레'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지난 9월 3일 한국교육개발원이 발표한 ‘2008년 교육기본통계조사’(올해 4월 1일 기준)에 따르면 대학 진학률은 84%에 육박했다. 이는 해외 주요 국가들의 대학 진학률이 50% 안팎에 머무는 것을 감안하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 평균 최종학력의 전반적인 상승 탓에 학력의 가치 자체가 저하되는 현상을 뜻하는 학력 인플레가 더욱 가속화된 것이다. 

흔히 학력 인플레는 대학 졸업생이 고교 졸업생의 일자리를, 대학원 졸업생이 대학 졸업생의 일자리를 차지하는 ‘하향 구직’ 현상을 낳는다. 그리고 이 현상이 뒤집힌 형태로, 저하된 졸업장의 가치를 만회하기 위한 ‘묻지마 진학’ 현상을 낳는다. 문제는 이 두 현상이 장기간의 경제침체로 인한 고학력실업 문제, 날로 높아지는 등록금 문제와 결부되어 비자발적인 학업중단(포기)이나 휴학 비율의 상승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등 대학원생들의 ‘연구자로서의 정체성’까지 위협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연구성과로 소통하기?
이런 상황에서도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거나 유지해갈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자신의 연구성과를 공개적으로 소통시키는 것이다. “각종 언론매체나 잡지에 실린 반응이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지난 98년 석사논문을 단행본으로 출판했던 김정한 씨(서강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박사수료)의 말이다. 김씨는 석사논문을 마친 뒤 ‘계속 공부를 해야 할까’, ‘내가 연구자로서 능력이 있나’와 같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김씨는 그때 주변에서 들은 평가에 힘입어 연구자로 살아가야겠다는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제 연구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기보다는 ‘내 문제의식이 소통되고 있구나’라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더 공부해서 더 많이 소통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죠.”

그러나 지금은 김씨처럼 소중한 경험을 누릴 기회가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다. 현재 출판사들을 통해서 자신의 학위논문을 공간(公刊)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취업과 박사과정 진학의 기로에 놓인 석사의 경우에 논문 출판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다. 수익성을 중시하는 대부분의 출판사들이 박사논문, 그것도 인맥으로 소개받거나 이미 다른 경로로 실력을 ‘검증’받은 사람들의 박사논문만을 출판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바로 단행본으로 출판해도 될 만큼 내용이 알찬 학위논문들이 아니면 출판이 힘들 것이다”라고 돌베게 출판사의 김희진 인문팀장은 말한다. “그리고 현실적이고 시의성 있는 주제, 출판시장에서 원하는 주제들을 다룰수록 좋다.” 요컨대 출판계에서 교양서나 대중서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면 대학원생들이 연구성과를 출판하기가 불가능한 셈이다.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이렇게 말한다. “논문형 글쓰기로는 대중독자를 사로잡을 수 없다. 하물며 펜과 종이보다 마우스와 스크린에 익숙한 젊은층을 유인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내 논문을 읽어줘!
물론 자신의 연구성과를 소통시킬 수 있는 통로가 단행본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학술지가 있다. 현재 학술진흥재단의 등재학술지는 902종, 등재후보학술지는 533종에 달한다. 이에 포함되지 않은 학술지까지 포함한다면 그 종수는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학술지는 특유의 폐쇄성 때문에 소통이 내부적으로만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또한 한소장의 지적처럼 “대부분의 등재지가 내용의 참신함보다는 논문형 글쓰기만을 암묵적으로 강제하므로 발랄한 글쓰기를 봉쇄한다”는 단점이 있다.

또 다른 통로로 잡지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작년 10월 한국언론재단이 발표한 ‘잡지 경영 현황과 발전 전략’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에서 발행되는 학술/학회지는 123종이다. 그러나 이는 아동지ㆍ교육학습지까지 포함한 숫자이다. 실제로 활발히 유통되고 있는 학술/학회지는 30종 미만이라는 게 출판계의 정설이다. 그나마 이 적은 종수마저도 숱한 잡지들의 휴간·폐간·신간이 반복되면서 불안하게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온라인상의 블로그를 적극적으로 활용해보라는 출판관계자들도 있다. 블로그 글쓰기를 통해 논문형 글쓰기가 아닌 대중적 글쓰기를 훈련하고 불특정 다수와 소통하는 경험을 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데 있다. 출판계에서 말하는 대중적 글쓰기가 소통을 원활하게 해줄 수 있을지언정 만병통치약은 아닐 것이다.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방법이 꼭 대중과의 소통이어야만 할 이유도 없다. 중요한 것은 연구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스스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다.(이재원 편집위원)

중앙대 대학원신문(08. 10. 26) 침체된 독일의 인문학계

임마뉴엘 칸트, 게오르그 헤겔, 칼 맑스, 프리드리히 니체, 에드문트 후설, 마르틴 하이데거, 발터 벤야민, 테오도르 아도르노, 칼 포퍼, 위르겐 하버마스 등 위대한 사상가들을 낳으며 전세계의 지적 논쟁을 주도한 독일 인문학계가 긴 침묵에 빠져 있다. 인문학자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인문학의 경제화와 국제화가 독일 인문학계의 비판정신을 짓누르고 있다고 한다. 독일의 사례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편집자주>

여전히 많은 철학·문학잡지들이 발행되고, 인문학 서적들도 계속 집필·번역되고 있지만 독일의 인문학계는 긴 침묵상태에 빠져 있다. 1960년대의 실증주의 논쟁, 1970년대의 해석학 논쟁만큼의 철학사적 의미를 갖는 건 아닐지라도 1986~7년 홀로코스트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위르겐 하버마스와 에른스트 놀테 사이에서 벌어졌던 ‘역사가 논쟁’, 1999년 유전자 복제기술과 관련해 페터 슬로터다이크가 휴머니즘 전통을 도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섬으로써 촉발된 ‘슬로터다이크 논쟁’ 이후로는 현실 문제나 시대적 진단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내세울 만한 인문학적 논쟁이나 쟁점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올해 6월 15일 만하임대학의 요헨 회리시 교수가 SWR2 라디오 인터뷰에서 지적한 것처럼 현재 독일의 인문학자들은 자기 분야의 전문적·서지적 문제들에만 매달리면서 현실 문제에 어떤 테제를 제기할 만한 자신감은 잃어버린 듯하다. 왜 그럴까?

인문학자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인문학의 경제화·국제화
여기엔 무엇보다도 독일사회 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는 대학, 특히 인문학과들의 거센 구조조정이 작용하고 있다. 지난 정권 때부터 시작된 독일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얼마 전부터 대학에도 변화를 요구하며 본격화됐다. 그중 인문학이 가장 큰 개혁 대상이었다는 것은 1995~2005년 사이에만 총 663개의 인문학 교수 자리가 통폐합으로 없어졌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프리드리히 니체 등의) 독일 인문학적 전통을 이어가던 문헌학과ㆍ교육학과는 이 기간 동안 35%의 교수자리를 삭감당해야 했고, 지금도 많은 인문학과들은 퇴직 교수의 후임을 선출하지 않는 방식으로 교수정원을 줄여가고 있다.

이로 인해 1999년 1인당 75.3명이었던 인문학과 교수 대 학생 비율은 2003년에 93.7명으로 늘어났다. 이는 인문학 교수들이 더 많은 수업과 행정 부담을 맡아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나아가 지금까지 정부 예산으로 이뤄지던 대학운영을 등록금 도입과 기업스폰서를 얻는 방식으로 자율화하려는 방침에 따라 인문학자들에게도 개별 연구와 저술 활동보다는 기업 등으로부터 재정후원을 얻기 쉬운 공동연구 프로젝트가 권고되고 있다.

‘인문학의 경제화’와 ‘국제화’라는 모토로 진행되고 있는 이와 같은 대학의 실용주의적 전환은 학생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1999년부터 독일 대학들은 연구 중심의 전통적인 마스터 과정(우리나라의 학사와 석사가 통합되어 있는 과정) 대신 졸업 후 취업준비에 더 역점을 두는 바첼러 과정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에 대해 프랑크푸르트대학 철학과 교수 마르틴 젤은 인문학자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공동연구, 연구평가, 기업스폰싱 등이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연구를 구조적으로 가로막고 오히려 큰 시간낭비를 초래하고 있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힘을 잃어버린 비판이론의 토포스
또한 독일 인문학계의 침체는 독일에서 진보적 지식인들의 입지가 협소해지고 있는 상황과도 관련되어 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독일 인문학계를 지배하던 비판이론의 토포스는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유토피아적 전망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나라보다 선진적인 노동조건과 사회보장을 갖추고 있던 사회민주주의 국가 독일이 세계화된 자본주의 경제의 압력에 밀려 이를 후퇴시키고 사람들에겐 열악한 조건의 일자리나마 감사히 받아들이게 하는 현재의 상황은 현실 비판의 토대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2년 전, 별로 새로울 것도 없던 하버마스나 귄터 그라스의 나치 전력을 문제 삼아 독일을 대표하는 이 두 비판적 지식인들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려는 시도가 이뤄진 이후 소위 ‘새로운 시민성’을 내세우는 보수주의 흐름으로부터 좌파에 대한 이념적 공세가 강해지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이다.

이는 무엇보다 올해 40주년을 맞이한 68혁명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작년 <슈피겔>(44호)이 “68세대에게 자비를, 전부 다 나빴던 것만은 아니다”라는 교묘한 제목의 타이틀 기사로 포문을 열었다. 그 뒤 68세대는 서구 문화의 업적을 경멸ㆍ거부하고, 가족파괴와 출산율 저하에 책임이 있으며, 결국 오늘날 모두가 받아들여야 하는 성과중심의 사회원리를 속물적이라고 거부함으로써 많은 이들의 현실 적응력을 상실케 했다고 비판받았다. 68년 학생운동의 주역이자 현재 독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역사가 중 한 명인 괴츠 알리는 <우리의 투쟁>(2008)을 통해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패러디한 제목이 암시하듯) 심지어 68세대가 나치즘에 열광했던 1933년 독일 젊은 세대들의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답습하고 있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최근 미국 금융시장의 붕괴로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의 몰락이 예견되고 있는 가운데, 독일에선 자본에 대한 사회적 규제의 요구가 점점 높아져가고 있다. 이것이 독일 인문학의 위축된 비판정신을 부활시키는 방향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오히려 경제와 사회 전반에 걸쳐 국가의 행정권력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나아갈지는 현재의 인문학자들이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김남시/ 독일 훔볼트대학 문화학과 박사과정)

08. 1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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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1-09 15:43   좋아요 0 | URL
귄터 그라스가 소년 시절 나치 친위대원이었다는 고백을 하자 요아힘 페스트는 엄청난 분노를 퍼부었지요.평소에도 반공우익 색채가 진했던 페스트인지라 그라스 너 잘 걸렸다 생각하고
그랬을 거에요.노인네가 너무 격노하면 건강에 안 좋죠.얼마 못가서 페스트는 죽더라구요.년도는 잘 기억이 안나지만 네오나치들이 그라스를 구타해서 병원신세 지게 한 적도 있었죠.폭력성은 독일우익들이 일본우익보다 훨씬 더한것 같아요.

로쟈 2008-11-09 20:49   좋아요 0 | URL
전에 그라스 건 관련 기사를 스크랩해놓은 적이 있는데, 비공개로 해놓았습니다. 크리스타 볼프 건과 함께 현대 독일문학에선 양대 스캔들이 아닌가 싶어요...
 

주말 북리뷰들을 둘러보다가 눈에 띈 기사를 옮겨놓는다. 서울에서 개최되는 세계출판인포럼에 참석차 내한한 일본의 한 원로 편집자의 인터뷰 기사다. 일본 출판계에 대해 잘 모르지만 대표적인 인문서적 출판사인 헤이본사의 대표편집국장을 역임했다고 한다. 출판 편집자의 역할에 대한 자부심이 눈길을 끈다. 이렇게 저렇게 안면을 튼 편집자들이 열명은 되고, 나 역시도 '편집간사'라는 직책을 맡고 있어서 그가 던지는 '위대한 편집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란 물음에 흥미를 느낀다. 대답은 간명하다. 읽는 것! 그가 참여했다는 '독서회'가 우리 출판계에도 있는지 문득 궁금하다...  

한겨레(08. 11. 08) “위대한 편집자는 끝없는 독서가”

한국출판인회의가 창립 10돌을 맞아 기획한 세계출판인포럼을 이틀 앞둔 지난 4일 서울 세종호텔에 여장을 푼 류사와 다케시(63·사진) 전 헤이본(평범)사 대표편집국장의 손에는 노란 포스트잇 딱지들이 잔뜩 끼워진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정말 좋은 책이어서 두 번째 읽고 있다”는 그 책은 <조선전쟁의 사회사>,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가 쓴 <전쟁과 사회>의 일본어 번역본이다.

편집자는 무엇보다도 ‘읽는’ 존재다. 그밖에도 다양한 역할과 중요한 일이 편집업무에 포함돼 있기는 하지만 편집의 진정한 핵심은 ‘읽는 것’이다. 그게 거의 대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글쓴이가 하지 못하는 것, 글쓴이 이상으로 편집자에게 가능한 것, 그것은 읽는 것이고 정독하는 것이며 비평하는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이야말로 편집이라는 끝이 없는 일의 출발점이 아닐까?”

이번 포럼에서 발표할 글의 주제인 ‘위대한 편집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대답을 그는 ‘읽는 것’, 이 한마디로 요약했다. 전세계 출판인 50여명이 함께한 이번 포럼에는 출범 4년째인 동아시아출판인회의 제7차 대회의 확대판으로 세계편집자포럼도 함께 열렸다.

게이오대학 경제학부에서 사상사를 전공한 그가 일본의 대표적 인문서적 출판사 가운데 하나인 헤이본사에 입사한 건 1968년. 신출내기 편집자 시절부터 담당했던 대표적 혁신계 사회과학자요 인문학자인 후지타 쇼조(5년 전 작고)를 따라 대여섯명 규모의 독서회에 참가했다. 고전학자 사이고 노부쓰나와 함께한 또다른 독서회는 그가 지난 1월 타계할 때까지 37년간이나 계속했다.

일본 고전과 구미의 고전 중에서 번역되지 않은 문학이론이나 역사이론서들을 “한 줄 한 줄 소리내어 가며 매우 엄밀하게 읽었던” 독서회는 매월 1회 일요일 오후에 6시간씩이나 이어졌다. “매번 준비하고 사전조사를 하는 게 몹시 힘들어서 거의 죽을 지경”이었고 직무상의 일과는 직접적인 관계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이라 여겼고, 거기서 읽는 일의 즐거움과 깊이를 느꼈다. “30여년이나 계속된 독서회는 아마 드물겠지만, 헤이본사 내에도 독서회가 여럿 있었을 정도로 일본 출판계엔 70년대까지는 그런 모임이 상당히 많았다. 그게 일본 출판계 힘의 원천이었다.”

2000년까지 32년간 헤이본에 근무하면서 8년간 편집일 전체를 총괄하는 이사로서 대표편집국장직을 맡았고 방대한 백과사전의 디지털화라는 선구적 작업까지 해낼 수 있었던 것도 충실한 ‘읽기’가 바탕이 됐나 보다. 근대 일본의 발전은 왕성한 지적 호기심과 이에 조응한 방대한 서책(書物) 발간의 상호 상승작용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그는 말했다.

“1960~80년대까지만 해도 이와나미 신서의 권당 10만부 판매 여부가 성패의 척도가 될 정도로 책이 많이 읽혔다. 대형 출판사들은 매년 대졸자들을 5~6명씩 뽑았고 그들의 월급은 일반 대기업 사원들보다도 월등 높았다. 그들은 최고급 지식인들이었으며 유명작가들도 편집자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80년대부터 조락의 기미가 보이더니 90년대 들어서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이와나미, 주오고론, 고단샤에서만 나왔던 신서들도 여기저기서 출판됐으나 비슷한 기획들로 차별성이 없어졌으며, 그나마 괜찮다는 이와나미 신서 초판이 1만여부 판매 수준으로 졸아들 정도로 기운은 쇠락했다. 탈활자화가 무섭게 진행됐다. “2000년 도쿄대 사회정보연구소(신문연구소의 후신)에서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신문 읽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했더니 5% 정도가 손을 들었다. 호세이(법정)대 강의 때도 매년 그렇게 물었는데 손 든 사람은 3~5%밖에 되지 않았다.”

편집자들도 여유가 없어졌다. “예전엔 편집자 한 사람이 연간 6~8권의 단행본을 만들었으나 지금은 그때의 2배인 10여 권이나 된다.” 부수가 적더라도 수십년 이상 꾸준히 읽히면서 영향력이 지속되는 좋은 책이, 일시적으로 폭발적인 관심을 끌지라도 단기간에 그 영향력이 끝나버리는 매체나 책보다 훨씬 더 낫다고 그는 생각한다. “하지만 편집자를 소모품처럼 취급해서는 좋은 책이 나올 수 없다.”

독서행위 자체를 지식과 사람들의 역사가 얽혀 있는 ‘공동행위’로 파악하는 그는 과잉 시장화·상품화가 부른 출판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도 다양한 사회 주체들이 ‘공동전선’을 결성해 반지성주의에 맞서야 한다고 했다. 동아시아출판인회의에 성실하게 참여하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국경을 넘은 공동전선이 필요한 것이다.

1년에 3~4차례나 방문할 정도로 한국에 관심이 많은 그는 “독재체제 아래서 한국 젊은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 해적판을 구해 읽었다는, 상상도 하지 못한 놀라운 사실에서, 만든 이들의 손을 떠난 순간 읽는 이의 것이 돼버리는 책의 엄청난 침투력을 새삼 실감했다”고도 했다.(한승동 선임기자)

08. 11. 07.

P.S. 독서행위 자체가 지식과 사람들의 역사가 얽혀 있는 ‘공동행위’라는 주장에 눈길이 간다. 일종의 '독서 코뮤니즘' 아닌가? 음미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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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8 0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08 0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량 2008-11-08 10:53   좋아요 0 | URL
<책으로 찾아가는 유토피아>의 표지가 참 인상적입니다. 찾아보니 국내 디자인 팀의 작업이네요. 이래저래 책은 영물인가 봐요. 덕분에 좋은 기사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8-11-08 16:42   좋아요 0 | URL
책만한 물건도 드물죠.^^;

노이에자이트 2008-11-08 15:43   좋아요 0 | URL
책으로 찾아가는 유토피아엔 정말 재미있는 일화가 많아요.소련 지식인들에 관한 이야기도 있구요,칼 쇼르스케가 일본 방문한 이야기도 있어요.한때 일본에 함스부르크 황혼기에 대한 책이 많이 팔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로쟈 2008-11-08 16:4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1-08 15:49   좋아요 0 | URL
독서회에 모여서 저렇게 책을 읽는군요.정말 대단한 직업의식입니다.

로쟈 2008-11-08 16:42   좋아요 0 | URL
저런 모습이 '스탠다드'라면 좋을 텐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11-08 17:33   좋아요 0 | URL
저도 80년대의 일본의 인문사회과학 번역본들을 90년대부터 헌책방에서 꽤 사모았죠.지금도 도움이 많이 된답니다.그리고 광주의 모 도서관에는 아사하라 쇼코(오옴 진리교 교주)의 저서<최후의 해탈자>도 있답니다.이 이야기를 광주사는 일본 남성에게 했더니 와...한국 대단하다고 하더라구요.

로쟈 2008-11-08 19:51   좋아요 0 | URL
찾아보니 어지간한 대학도서관에도 없는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11-09 15:44   좋아요 0 | URL
아사하라 쇼코가 광주에 오옴 진리교 한국지부를 두려고 그랬을까요.

로쟈 2008-11-09 20:52   좋아요 0 | URL
ㅎㅎ 광주 분위기가 그런가요?..
 

바슐라르의 과학철학서 얘기가 나온 김에 지난달에 있었던 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거대강입자충돌기(예전엔 그냥 '입자가속기'라고 불린 듯한데) 실험과 관련한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이후 소식을 접하지 못했는데 실험 자체가 연기된 듯싶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투여된 장치인 만큼 그 실험결과의 사회적 효용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어떠한 물리학이 필요한가?'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지난 9월 초 완공된 거대 강입자충돌기(오른쪽)와 건설 전 조감도. 현재 LHC는 연결 장치의 문제로 가동이 중단된 상태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는 내년 봄 재가동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 제공.

한겨레21(08. 10. 17) 어떠한 물리학이 필요한가

지난 9월 초 과학계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막 가동을 시작한 ‘거대 강입자충돌기’(LHC·Large Hadron Collider)에 관한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14년 동안 순제작비만 55억달러가 소요된 세계 최대의 입자가속기인 LHC는 이전까지 가장 큰 가속기였던 미국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의 ‘테바트론’(Tevatron)보다 7배나 큰 에너지를 얻을 수 있고 둘레 길이만도 27km에 달하는 거대한 장치다. 고에너지 물리학자들은 높은 에너지를 가진 양성자를 서로 충돌시킬 때의 반응을 ‘관찰’함으로써 1964년 영국의 물리학자 피터 힉스가 예측했던 ‘힉스 입자’(Higgs boson)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LHC의 실험 소식은 ‘빅뱅 실험’이니 ‘우주 탄생 순간의 재현’이니 하는 수식어들과 함께 대중 매체에서도 높은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LHC 가동에 관한 언론 보도들은 이번 실험이 갖는 과학적 의미에 대한 소개와 전례없는 규모의 실험에 대한 호기심만이 가득 차 있을 뿐, 그러한 대규모 과학의 배경이 되는 정치사회적 맥락에 대한 설명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SSC. 미국 주도 패권주의 과학의 실패
사실 1960년대에 완성된 테바트론을 넘어서는 거대 입자가속기를 만들자는 계획은 LHC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0년대에 이미 미국의 물리학자들은 테바트론의 20배에 달하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거대 입자가속기인 ‘초전도 슈퍼콜라이더’(SSC·Superconducting Supercollider)의 건설을 추진한 적이 있다. 1983년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서 약한 핵력을 매개하는 입자인 W입자와 Z입자의 발견 사실을 공표하자 미국 내에서는 소련과 유럽에 맞서 미국이 고에너지 물리학의 주도권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는 주장이 부각되기 시작했고, 이듬해 제안된 SSC는 그러한 패권주의적 발상의 산물이었다. SSC는 완성될 경우 둘레 길이가 87km에 달하는 거대 장치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이 계획을 승인한 1987년에는 건설에 44억달러가 들어갈 것으로 예상됐다.

노벨상 수상자인 리언 레이더먼과 스티븐 와인버그를 포함한 저명한 과학자들은 SSC를 통한 빅뱅 직후 초기 원시 우주 상태의 재현을 ‘신의 음성’에 비유하거나 입자가속기를 성당에 비유하는 식의 종교적 수사를 동원해가며 프로젝트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캠페인에 나섰다. 특히 레이더먼은 힉스 입자를 ‘신의 입자’(God particle)라고 부르면서 SSC의 건설이 곧 신성(神性)에 이르는 첩경이라는 식의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SSC는 이내 불운한 종말을 맞았다. 애초 44억달러였던 예상 건설비는 눈덩어리처럼 불어나 공사가 시작될 즈음인 1990년에는 79억달러로 상향조정됐고, 1993년 일반회계국 조사에서 또다시 110억달러로 뛰어오르자 미국 의회는 1993년 결국 프로젝트를 백지화했다. SSC가 실패를 맛본 데는 규모와 체제 경쟁에 집착하는 냉전적 사고방식과 미국 중심의 국가주의적 태도가 크게 작용했다. 계획 초기에 SSC를 국제적인 과학 프로젝트로 만들 것을 주장했던 일본 물리학자들은 “SSC는 미국의 시설”이라는 면박을 들어야 했는데, 미국의 이러한 오만함은 이후 예산 부족에 허덕인 SSC를 구해내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SSC보다 조금 늦게 시작한 LHC 역시 추진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LHC가 처음 제안된 것은 1981년으로 SSC보다 오히려 앞서지만,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서 LHC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시작된 것은 한참 뒤인 1988년부터였다. 당시에는 규모가 훨씬 큰 SSC 계획이 미국에서 추진 중이었기 때문에, LHC 건설을 주장한 사람들은 LHC가 SSC가 잘 안 될 때를 대비한 일종의 ‘보험’으로서, 또 여러 가지 종류의 실험을 할 수 있는 다용도 충돌기로서 가치가 있다는 주장을 폈다. 1991년 11월 유럽입자물리연구소 이사회는 LHC가 “고에너지 물리학의 발전과 연구소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기계”라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LHC 건설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완공 예정 2002년으로부터 6년 더 걸려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이 모이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 이사회에서 LHC 건설 계획안이 승인되는 과정은 험난했다. 1993년에 1차로 계획안이 제출됐지만, 예산 증가에 비판적인 일부 회원국들은 비용의 추가적인 감축을 요구했다. 특히 영국과 독일은 LHC가 위치해 더 많은 혜택을 보게 될 스위스와 프랑스가 추가로 더 많은 금액을 기부할 것을 요구하면서, 제안된 예산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94년에 유럽입자물리연구소는 LHC에 설치될 전자석의 3분의 1 정도를 일단 제외해 건설 비용을 절감한 뒤 나중에 예산이 확보되면 빠진 전자석을 채워넣는 임시변통 방식을 제시함으로써 이사회의 최종 승인을 얻었다. 이러한 상황은 1995년 비회원국인 일본이 상당한 액수를 기부하기로 약속하고, 러시아·인도·캐나다·미국 등과의 협상이 긍정적으로 진행되면서 조금씩 호전됐다. 예산이 웬만큼 확보되면서 1996년에는 LHC 전체를 한번에 건설하는 쪽으로 수정 계획안이 다시 제출됐다.

그러나 LHC의 어려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동·서독 통일에 수반된 엄청난 비용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독일이 국제적 과학 프로젝트에 지원하는 예산을 대폭 삭감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 들어가는 예산을 감축하기 위해 기회를 계속 엿보고 있던 영국도 여기 가세했다. 결국 연구소는 1997년 이사회의 동의를 얻어 차관을 들여와 부족한 공사비를 메우는 길을 택했다. 적자 운영은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LHC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던 것이다. LHC는 애초 2002년 완공 예정이었으나 예산 문제로 여러 차례 연기돼 결국 올해 들어서야 완성이 됐다.

태초의 비밀·신의 마음… 수사들의 향연
SSC의 ‘실패’와 LHC의 ‘성공’은 거대한 실험 장치의 존재에 결정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거대과학 분야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SSC는 냉전기의 체제 대결 의식에 뿌리를 둔 거대과학 프로젝트가 변화한 상황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에 비해 LHC는 일견 성공한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자금 압박과 프로젝트의 의미에 대한 회의적 태도가 계속해서 위기의식을 조성했음에도 국제적 공조와 여러 임시변통 수단을 동원해 어렵게나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LHC는 탈냉전 시기에 거대과학이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는 한 방법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LHC의 ‘성공’은 다른 점에서는 더 큰 물음을 낳고 있다. 과연 LHC가 추구하는 목표들이 그것의 실현 가능성 여부와 무관하게 그토록 엄청난 지출을 정당화할 만한 것인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고에너지 물리학자들은 태초의 비밀을 밝혀낸다느니, ‘신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느니 하는 수사들을 이용해 자신들의 연구를 정당화해왔지만, 갈수록 엄청난 비용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연구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인지는 논의의 여지가 많다. 그런 점에서 이번 LHC의 가동은 “우리에게는 어떠한 물리학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깊은 숙고가 필요함을 역설적으로 웅변해주고 있다.(김명진 성공회대 강사)

08. 10. 18.

P.S. 내친 김에 한겨레의 관련기사도 옮겨놓는다. '김명남의 과학책 산책' 꼭지인데, 정재승 교수의 연재를 김명남 번역가가 이어받은 듯하다. 앞에서도 언급된 '힉스 입자'가 무엇인지 설명해준다. 정확히는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해주는 책을 소개해준다.

한겨레(08. 10. 18) 도대체 ‘힉스 입자’가 뭐길래

지난주는 노벨상 수상자가 줄줄이 발표되는 이른바 노벨상 주간이었다. 평소에는 그에 앞서 발표되는 기상천외한 ‘이그노벨상’에 더 흥미를 쏟는 나지만, 올해만은 본상에 관심이 갔다. 일본 출신의 과학자들이 네 명이나 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픈 심정인 것은 아니다. 물리학상의 세 수상자들은 줄기차게 0순위 후보로 거론되었던 사람들이고, 올해 드디어 수상을 하게 된 것도 생각해보면 놀랄 일이 아니다. 올해는 유럽의 거대강입자가속기(LHC)가 가동을 시작한 해로서 입자물리학 분야의 전기가 될지도 모르는 시기인데, 수상자들은 현 시점에서 입자물리학의 모범답안이라 할 수 있는 표준모형을 완성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표준모형은 더는 쪼갤 수 없는 17개의 기본 입자들로 자연의 모든 물질과 힘을 설명한다. 여기에 쿼크 6개도 포함되는데, 이번 수상자 중 마스카와 도시히데와 고바야시 마코토는 마지막으로 발견된 한 쌍의 쿼크를 예측했다. 한편 난부 요이치로는 표준모형을 뛰어넘는 끈 이론에서까지 중요한 기여를 했지만, 노벨상의 대상이 된 연구는 자발적 대칭성 깨짐이라는 현상을 발견함으로써 표준모형의 기틀을 다진 업적이다.

그런데 표준모형이라는 퍼즐은 마지막 한 조각, 곧 열여덟 번째 입자가 아직 맞춰지지 않았다. 힉스 입자라는 조각이다. 9월10일에 역사적인 가동을 시작한 (비록 이후 고장이 나 두 달여간 중단된다고 하지만) 거대강입자가속기는 여러 과제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이 힉스 입자 확인에 초점을 맞춘다.

대체 힉스 입자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수천명의 과학자들이 수조원의 돈을 써서 둘레 27킬로미터의 가속기를 지어서 확인해야 할 정도인가? 거기에 정말로 물리학의 미래가 달렸을까? 이런 궁금증들이 떠오를 때 <신의 입자를 찾아서>를 펼쳐야 한다. 고등과학원 연구원인 물리학자 저자가 표준모형에서 정점을 이룬 현대물리학의 발자취와 전망을 풀어냈다. 5장을 읽으면 힉스 입자가 왜 ‘신의 입자’라고 불리는지, 어째서 그것에 표준모형의 명운이 걸렸는지 알 수 있다. 거대강입자가속기의 실험 결과에 따라 어떤 식으로 물리학의 행보가 나아갈지도 짐작해볼 수 있다.

입자물리학을 깊이 알고자 한다면 분량에 아쉬움이 있는 이 책보다 다른 책을 집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만, 이 책은 가장 최근에 씌어졌다는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 땅에서 연구하는 과학자의 시각이 담겼다는 점이 중요하다. 관련 주제의 책을 이미 여럿 읽은 사람이라도 이 책을 읽어봄 직한 이유는 그것이다. 정부는 5년 노벨상 계획이 어쩌고 하며 옆집의 노벨상을 부러워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1949년에 첫 물리학상 수상자를 냈고 54년에는 수학계의 노벨상인 필즈상 첫 수상자를 배출했던 오랜 저력의 일본 기초과학을 단기적 대책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절감하게 된다.(김명남 과학책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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