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에 인상적으로 읽은 기사는 경향신문의 '책읽는 경향' 코너였다. 바슐라르의 <새로운 과학정신>(인간사랑, 1990)을 소개하는 것이었는데, '한국 지식사회의 편식증'을 꼬집고 있어서 눈길이 갔던 것. 오랜만에 바슐라르 과학철학의 의의를 상기시켜주는 글이기도 해서 옮겨놓는다. 사실 <새로운 과학정신>은 절판된 지 오래된 책이다.  

 

경향신문(08. 10. 17) [책읽는 경향]경기·인천에서-새로운 과학정신

한국에서 가스통 바슐라르의 과학적 세계관을 만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의 지식 사회는 편식증에 지독히 걸려 있다. 편식증의 핵심은, 문과형 지식에만 근거해 세상을 바라보려는 아집이다. 그들에게 바슐라르하면 물, 불, 촛불, 꿈, 상상력과 같은 단어들이 주로 연상될 것이다. 기하학, 유기화학, 진화생물학 같은 학문에 등장하는 언어들이 바슐라르를 이해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을지, 그들은 생각해볼 겨를이 없다.

바슐라르, 조르쥬 캉길옘, 미셸 푸코로 이어지는 프랑스의 사상적 계보는 바슐라르의 또 다른 차원 때문에 형성됐다. 과학사와 과학철학이 이런 계보를 가능하게 한 학문적 기둥이 됐다. <새로운 과학정신>(인간사랑)에서 독자들은 그의 전복적인 사고를 만날 수 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 비뉴턴 역학, 비아르키메데스 측정학, 비맥스웰 물리학, 비피타고라스 논리학, 비데카르트적 인식론 등 기존의 과학적 세계를 뒤집어보려는 그의 독창적인 사유가 이 작은 책을 관통하고 있다. 이런 전복적인 사고를 이해할 때, 바슐라르의 문학적 세계도 더욱 명료하게 밝혀진다.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한국의 지식 문화에서 바슐라르는 허공을 맴돈다.

계량적 업적과 성과만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그를 흉내내다가는 숨도 쉬지 못하고 바로 매장된다. 바슐라르는 단호히 말한다. “새로운 과학 정신이 가능하려면, 새로운 정치·경제적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이 부러운가. 선결 과제가 무엇인지 이 책은 말하고 있다.(이종찬 아주대 의대 교수)

08. 10. 18.

P.S. 바슐라의 과학철학서로 <새로운 과학정신>과 함께 나왔던 책은 <부정의 철학>(인간사랑, 1991)이다. 개인적으론 복학한 이후에 야심을 갖고 구입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두 권 다 나로선 읽을 수 없는 책이었다. 독해력/이해력이 부족했던 것인지 번역에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결론을 보진 못했는데, 언제 시간이 나면 확인해봐야겠다. 짐작으론 기사의 필자도 국역본으로 읽지는 않았을 성싶다. 바슐라르의 또다른 과학철학서로는 <현대물리학의 합리주의적 활동>(민음사, 1998)이 이후에 더 출간됐다. 서두에서의 흥미로운 구절을 자주 인용했던 기억이 난다(입자설과 파동설에 관한 것이었다). 몇 차례 언급한 적이 있지만, "바슐라르, 조르쥬 캉길옘, 미셸 푸코로 이어지는 프랑스의 사상적 계보"를 다룬 책은 도미니크 르쿠르의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새길, 1996)이다. 이들 대부분이 품절/절판된 상태인데, <부정의 철학>만이 아직 구입가능한 것으로 돼 있어서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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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연재 '자서전 읽기'의 한 꼭지를 스크랩해놓는다. 저명한 문학비평가이자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게오르크(죄르지) 루카치의 자서전 <맑스로 가는 길>(솔, 1994)을 다루고 있다. 하도 오랜만에 접하는 책인데다가 장문의 기사여서(원고지 25매 가량인데, 일간지 북리뷰로서는 파격적인 분량이 아닐까) 눈길이 머물렀다. 나도 오래전에 읽은 책인데, 현재는 절판된 지 오래인 듯싶다.  

  

경향신문(08. 10. 11) 게오르크 루카치의 자서전 ‘맑스로 가는길’

분명히 가슴 찢어질 듯한 고통이었으리라. 한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모진 풍파를 겪은 스승이 죽어가며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장면을 지켜봐야 하니 말이다. 혁명과 반혁명, 전쟁과 숙청의 시대를 견뎌낸 노철학자이건만 생명의 순리는 어길 수 없었다. 암에 걸린 데다 동맥경화가 심해져 죽음을 준비해야 했다.

기실 서둘렀어야 했다. 혁명의 동지이기도 했던 아내에게 자서전을 쓰라고 권했지만, 작업을 하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그때부터 썼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죽음을 선고 받고서야 자신의 삶을 정리하기로 했다. 자료를 뒤지고 문서를 찾을 시간이 없었다. 책을 쓸 때 흔히 했던 대로 초안을 잡는다는 심정으로 타이프를 쳤다. 죽음을 앞두고 서둘러 썼으니 제대로 된 글이 될 리 없다. 기억의 사금파리만 널려 있을 뿐이니, 난수표도 이런 난수표가 없었다. 미완성의 문장인 데다 머리글자만 적혀 있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스승의 육신을 떠나보낼 수는 있으나, 삶과 정신의 흔적마저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스승을 녹음기 앞에 앉혔다. 초안을 읽으며 무슨 내용인지 물었다. 87세의 노철학자는 죽어가며 답변해주었다. 그것은 경이로운 의지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미 포기했을 일이다. 엄습하는 죽음 앞에, 밀려드는 육체의 고통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발음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래도 노철학자도, 그의 제자도 포기하지 않고 작업에 매달렸다. 이제 자서전이 아니라 유언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1971년 5월 작업이 끝났다. 그리고 6월4일, 별을 바라보고 가야 할 길을 알았던 시대는 얼마나 복되더냐고 말했던, 헝가리 출신의 철학자 게오르크 루카치는 영면했다.

루카치 자서전 <맑스로 가는 길>(솔)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우리말 번역본은 루카치의 초고와 대담인 <삶으로서의 사유>, 그리고 자전적 글과 또다른 대담을 부록으로 덧붙여 펴냈다). 숱한 오해와 곡해, 그리고 비판으로 얼룩진 삶이 비로소 복원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상당히 곤혹스러워지게 된다. 헝가리 역사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펼쳐진 유럽혁명사를 알지 못하고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숱하게 나와서다. 이런 상황은 루카치를 다시 보게 한다.

우리는 흔히 루카치를 세계적인 철학자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자서전을 읽다보면, 그는 헝가리라는 배경을 떼어 놓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문인과 예술인, 그리고 혁명가들이 즐비하게 나온다. 이래서는 자서전을 읽기가 곤란하다. 헝가리 혁명사를 공부하면서까지 그의 자서전을 읽을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걸림돌을 피하면서 루카치 삶의 핵심에 도달하는 방법은 없을까. 다행히 있다.



자서전 서문은 공동대담자였던 이슈트반 에외르시가 썼다. 그는 여기에서 루카치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말을 한다. 널리 알려졌듯 토머스 만의 <마의 산>에 나오는 나프타는 루카치를 모델로 하고 있다. 자서전에 토머스 만과의 관계와 그의 작품에 모델로 나온 소감을 피력하는 대목이 나온다. 에외르시는 바로 이 점을 주목하고 있는데, 토머스 만이 루카치 삶의 미묘한 모순을 잘 파악했다고 본다.

“나프타는 예수회 회원이다. 즉 그는 세계 지배를 추구하는 조직의 이데올로기적 전위 투사인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의 날카로운 이지력 탓으로, 자신이 전력을 다 쏟는 운동의 바깥에 서 있기도 하다. 비록 그에게는 운동이 자유를 보장하긴 하지만 운동 쪽에서는 그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이것은 결국 그 스스로 유발한 것이다. 즉 최종적인 결론으로까지 파고드는 집요함으로 이단에 거의 가깝게 되는 그의 과감한 구상에 의해서 이러한 일이 유발되는 것이다.”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날 이미 미학자로서 우뚝 섰던 사람. 서양 철학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 그리고 마르크스를 가장 높이 평가했고, 속류화한 마르크시즘을 건져내려 했던 사람. 이념과 문학의 갈등에서 진정한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이를 해결하는 글을 지속적으로 써냈던 사람. 중부 유럽의 변방 출신이지만, 서구 사회에 충격을 가한 사람. 그러나 줄곧 자신이 믿고 따랐던 당은 그를 못미더워했다. 늘 숙청과 망명의 대상이었고, 마침내 당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그는 반복하거니와, 나프타였으니, 여기에서 루카치의 삶은 보편성을 띤다. 지식인과 권력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느냐는 화두거리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을 뒤쫓으며 지속적으로 드는 의문이 있다. 도대체 어떤 연유로 공산주의자가 되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서양 지성사의 수수께끼일 터이다. 남부럽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나 배울 만큼 배운 데다 그의 지적 도반들이 대체로 자유주의적이긴 하나 좌파적 성향을 띠지 않은 탓이다.



먼저 어린시절의 독서편력을 들 수 있다. 그는 아버지가 매우 올바르고 사려깊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성공만이 올바른 행동을 판가름하는 기준이라고 여겼다. 아버지와 다른 생각을 품게 된 것은 <일리아드>와 <모히칸 족의 최후>를 읽고 나서다. 그는 이 책들에서 “성공이 올바른 행동의 기준은 아니며 올바르게 행동한 사람들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이제 안락한 부르주아적 삶을 거부하는 반항아로 성장할 자격을 얻은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 읽은 <공산당 선언>으로 마르크스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때의 인상을 “매우 강렬했다”고 했으니,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알 만하다. 대학에 들어가서 <브뤼메르의 18일> <가족의 기원> 등을 읽었고, 특별히 <자본> 1권을 깊이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지닌 몇 가지 핵심 지점들의 정당성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토로했다. 어린 휴머니스트가 세계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틀을 얻은 셈이다.

그러나 루카치가 곧바로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 만하임, 하우저 등과 같이 공부했던 일요서클 시절만 해도 그는 아직 뚜렷한 혁명적 성향을 보이지는 않았다. 단지 피히테에 빗대어 그 시대를 죄악의 시대로 보았을 뿐, 사회 전체를 근본적으로 변혁해야 한다는 전망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의 사상적 방황은 1918년 가을 장미혁명에 대한 회상에서 드러난다. 역사에서 폭력이 차지하는 긍정적 역할을 믿고 있으면서도 막상 “내 자신의 행위로써 폭력을 촉진할 것인가를 결단해야 했을 때” 큰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그의 사상적 전회를 자극한 것은 1차 세계대전이었다. “도대체 누가 영국과 프랑스의 문화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애매한 이 표현을 이해하려면 에외르시가 쓴 서문을 참조해야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은 현존하는 권력과 제도, 그리고 세계를 열광에 휩쓸리게 하면서 파국으로 몰고가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루카치의 경멸을 강화했다고 풀이한다. 예상할 수 있겠지만, 루카치는 10월 러시아 혁명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다. 1918년 12월 막스 베버와 게오르그 짐멜의 제자였던 그는 헝가리 공산당에 가입한다.



루카치는 본디 작가가 되고 싶었다. 18세에 희곡을 썼는데 스스로 보기에도 형편없다 싶어 불태워버렸다. 그러고는 문학사가가 되길 꿈꾸었다. 그러다 베르테르의 눈색깔이 검은색이냐, 파란색이냐를 놓고 벌이는 논쟁에 환멸을 느껴 철학에 관심을 돌렸다. 그의 철학은 “변증법적 유물론, 마르크스의 학설은 날마다 매 시간 실천에 의거해 새로이 다듬어지고 자기화되어야 한다”는 데 충실했다. 하지만 당은 늘 그에게 자기비판을 강요했다. <소설의 이론>과 <역사와 계급의식>에 실린 서로 다른 서문은 그 갈등이 낳은 산물이다. 세계 지성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존재를 걸고 혁명 대열에 동참했으나, 당은 그를 사상적으로 박해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스탈린 시대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그의 자서전을 읽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나는 스탈린주의가 일종의 이성의 파괴라는 것을 한번도 의심해보지 않았고 또 늘 그렇게 주장해왔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런 답변에 쉽게 물러설 수는 없다. 알면, 왜 맞서 싸우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는 당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히틀러의 멸망이었고, 그를 대적할 수 있는 집단은 스탈린의 소련뿐이었다고 변명한다. 파시즘에 맞서려면 그를 지지해야 하나, 그의 전제적 통치는 인정할 수 없다. 그런데 그에 반대하면 유리해지는 것은 파시즘 세력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 루카치의 고민이 있었다. 물론 그는 스탈린 체제에서 빨치산 투쟁을 했다고 말한다. 스탈린의 말을 인용해서 검열자를 만족시키면서 그 체제를 비판하는 글을 써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얼마나 빈약한 저항이었던가.



더욱이 “나는 항상 사회주의의 가장 나쁜 형태가 자본주의의 가장 훌륭한 형태보다 살기에 더 낫다고 생각해왔다”는 발언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당연히, 양차대전을 낳을 수밖에 없었던 자본주의적 폐해를 극복할 대안으로 공산주의를 선택한 루카치의 윤리적 결단을 폄훼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20세기의 이념 지형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발언이 이념에 눈 멀어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는 비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현실사회주의 몰락으로 드러난 체제의 속살은 얼마나 보잘것없었던가.

루카치는 벌라주를 평가하면서 공산주의에 공감하는 부르주아 작가로 남았어야 할 사람이라고 했다. 자서전을 읽다보면 루카치가 현실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실천적 지성으로 남았더라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의 스승인 베버는 “학문상의 모든 ‘성취’는 새로운 ‘질문’을 뜻한다”고 말했다. 루카치가 줄곧 학문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도 정치적으로 패배한 것은 그의 새로운 질문이 체제를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느 체제나 당이 내부 구성원의 성찰적이고 비판적인 질문을 참아주겠는가. 모든 지식인은 결국 나프타로 분한 루카치와 같은 운명을 안고 있다. 결국 권력의 품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비판적 지성이 있어야 할 자리는 따로 있으니, 그를 기리는 조사에 나와 있다. “쉴 사이 없이, 그리고 지칠 줄 모르고 그는 인간을 옹호하는 데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발휘했습니다.”(이권우 | 도서평론가)

08. 10. 12.

P.S. 내가 읽은 범위 내에서 루카치를 이해하는 데 가장 유익했던 책은 하우저와의 대담을 담은 <변증법적 미학에 이르는 길>(문학과비평사, 1990)이다. <소설의 이론> 번역자인 반성완 교수의 편역으로 나왔던 책이다. 더불어, <맑스주의의 향연>(이후, 2001)에 실린 마샬 버먼의 글도 좋은 참고문헌이다. 흔히 브레히트와 많이 비교되기도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루카치와 벤야민을 비교해보는 것이 서로를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나중에 에세이로 써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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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10-13 02:25   좋아요 0 | URL
반가운 기사 옮겨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편애'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루카치에 대한 글은 어떤 글이라도 항상 반갑습니다. 저 또한 루카치와 벤야민의 비교에 개인적으로 큰 관심을 두고 있는데, 어서 에세이를 완성해주시기를 고대할 뿐입니다.^^

로쟈 2008-10-13 21:40   좋아요 0 | URL
'나중에'는 '좋은 시절이 오면'이란 뜻이죠...^^;

소경 2008-10-13 14:53   좋아요 0 | URL
마르크스 역사철학에 대해 발표를 놔두고 있는데 (기한은 널널하지만) 쫌만 더 욕심을 내야 겠네요 ^^:;

로쟈 2008-10-13 21:41   좋아요 0 | URL
<역사와 계급의식>까지 포함하려면 욕심을 많이 내셔야겠는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10-13 16:21   좋아요 0 | URL
이권우 씨는 루카치가 1956년 헝가리의 임레나지 정권을 지지했다는 죄로 고초를 당한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군요.그걸 언급했다면 스탈린주의에 너무 약하게 저항했다는 평가는 유보했을텐데요.

로쟈 2008-10-13 21:44   좋아요 0 | URL
지젝은 루카치와 반목했던 브레히트가 오히려 '스탈린주의의 내적 위대성'을 보여주는 시인이라고 평했죠. <역사와 계급의식>에 대한 해제도 썼는데, 아직 못 읽어보고 있습니다...

히드라 2008-10-14 18:44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쓰신, P.S.를 읽고, <변증법적 미학에 이르는 길>을 읽어봤는데, (루카치가 아니라) 주로 하우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특히, 앞쪽에 실린 (세 편의) 대담 중 두 편이 (루카치가 아닌 다른 이들과 했던) 하우저와의 대담이고, 루카치도 동참했던 하우저와의 대담에서도 루카치는 별다른 발언을 하지 않아서, 사실 책을 읽고 조금 실망....^ ^;; --로쟈님으로부터 자주 공부에 도움을 받고 있어 고마워하고 있는 독자로부터 --


로쟈 2008-10-14 20:55   좋아요 0 | URL
네, 하우저에 초점이 맞춰진 책이 맞습니다. 제가 주목한 건 '진리는 단수이다'라는 루카치의 단언이었어요. 하우저는 단수가 아닐 수도 있다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지요. 저는 그게 핵심이라고 생각하여 자주 인용하곤 했습니다.^^;

히드라 2008-10-15 01:40   좋아요 0 | URL
부정확한 사실 수정 추가 : <변증법적 미학에 이르는 길>에 만하임과 나눈 대담은 없습니다. 로쟈님 덕분에 루카치의 '진리는 단수이다'라는 단언에 다시 한번 더 주목하게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

로쟈 2008-10-15 07:17   좋아요 0 | URL
아, 하우저를 만하임으로 잘못 썼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10-15 16:44   좋아요 0 | URL
혹시 루카치의 정치적 유언이라는 <사회주의와 민주화 운동>을 보셨는지요? 비교적 차분한 마음으로,자아비판 당할 염려도 없이 솔직하게 인간적 사회주의 노선을 밝힌 책입니다.

로쟈 2008-10-15 17:07   좋아요 0 | URL
<사회주의와 민주화운동>이나 <이성과 파괴> 등은 사놓기만 하고 안 읽은 듯합니다. 90년대엔 루카치도 '매장' 분위기였죠. '인간적 사회주의'라는 노선 자체도 스펙트럼이 넓어서(스탈린주의도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니까요) '진의'가 무엇인지는 살펴봐야 할 거 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16 16:06   좋아요 0 | URL
스탈린주의자가 보기엔 수정주의겠지요.그런데 이성의 파괴 아닌가요?

로쟈 2008-10-16 21:16   좋아요 0 | URL
<이성의 파괴>는 흔히 루카치의 최악의 책이라고들 얘기해서 읽게 되지 않던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10-17 15:32   좋아요 0 | URL
예.그 책이 그다지 평이 좋지 않더군요.유물론과 관념론으로 도식적인 분류를 하다 보니 그런 것 같아요.그런데 위에 오타가 났어요.이성과 파괴.

로쟈 2008-10-17 23:45   좋아요 0 | URL
네, 이성의 파괴죠...

독립만세 2008-10-17 23:20   좋아요 0 | URL
<딩통의 죽음> 이란책도 있나요?

로쟈 2008-10-17 23:45   좋아요 0 | URL
<당통의 죽음>인데, 어디 오타가 났나 보네요...
 

미국식 탐욕의 대명사라면 단연 '월스트리트이다. '금융자본 권력의 역사 350년'을 다룬 존 스틸 고든의 <월스트리트 제국>(참솔, 2002)은 그런 점에서 '뒤늦게' 눈길을 끄는 책인데, 마침 참고할 만한 칼럼이 있어서 옮겨놓는다. 미국 관련 기사들을 연이어 스크랩해놓은 계기가 된 칼럼이다.



경향신문(08. 10. 11) [서재에서]탐욕의 거리, 월스트리트

“탐욕스러운 월스트리트 금융귀족들의 실패를 왜 납세자의 돈으로 구제해야 하느냐. 월스트리트 스스로 구제금융 자금을 조성하라.”

부시 미 행정부가 마련한 7000억달러 구제금융안을 연방 하원에서 처음 표결할 당시 반대표를 던진 의원들의 격앙된 주장이다. 표결 토론을 보면서 마이클 더글러스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영화 <월스트리트>가 먼저 떠올랐다. 이 영화에서 기업 사냥꾼인 주인공 고든 게코(더글러스)는 텔다 페이퍼 주주총회에서 소리 높여 연설한다.



탐욕은 좋은 것입니다. 탐욕은 옳은 것입니다. 탐욕은 효과가 납니다. 탐욕은 명료하게 하고, 헤치고 나가게 하며, 전진하는 정신의 진수(眞髓)를 북돋웁니다. 탐욕, 그 모든 것들 중에서 인생, 돈, 사랑, 지식에 대한 탐욕은 인류를 도약시켰습니다. 탐욕은 텔다 페이퍼를 살릴 뿐만 아니라 미국이라고 불리는, 또다른 삐걱거리는 기업도 구해낼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주주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은 이 연설만큼 월스트리트를 상징하는 말도 찾아보기 어렵다. 월스트리트만큼 모든 사람들이 돈이라는 한 가지 욕망을 탐닉하는 곳도 드물기 때문이다. 미국의 저명한 경제사가 존 스틸 고든의 역작 <월스트리트 제국>(참솔)도 야누스의 얼굴을 지닌 금융제국의 탐욕적인 게임과 심판 없이 글로벌화한 금융시장의 파국을 경고했다. 월스트리트의 욕망은 마약왕에 비견될 정도다. ‘곰과 황소는 돈을 벌지만 돼지는 돈을 벌지 못한다’는 월스트리트의 격언에 무지했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사람들의 말로를 그린 대목은 타산지석이다. 강세시장에서도 돈을 벌고 약세시장에서도 돈을 벌 수 있지만 과욕으론 결코 돈을 벌 수 없다는 뜻이다.



2000년에 첫 출간된 이 책에서는 월스트리트가 자유화·시장화·규제완화라는 레이건 경제철학을 등에 업고 ‘탐욕의 전성기’를 구가한 1980년대, 인터넷 거품으로 ‘탐욕의 극치’를 달린 90년대가 가장 극적으로 그려진다.



350여년간의 ‘월스트리트 통사’이면서도 드라마처럼 흥미로운 것은 다채로운 등장인물 때문이다. 거대한 게임 같은 드라마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화려무비하다. JP 모건 같은 위기의 구세주, 가치투자의 선구자 벤저민 그레이엄, 도덕 귀족의 대표적인 인물 코닐리어스 반더빌트,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 같은 주연급 거물이 있는가 하면 한 시대를 풍미한 악당 대니얼 드류, 감방에 가야 했던 뉴욕 증권거래소 회장 리처드 휘트니 같은 사기·협잡꾼들, 피눈물로 범벅이 된 개미들에 이르기까지. 물론 미국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에서부터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에 이르는 정부 고관들의 배역도 생생하게 소묘된다. 그러잖아도 월스트리트의 역사는 많고 많은 신화와 일화, 우화로 점철돼 있다.

영국인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네덜란드인들이 쌓은 나무 담장에 불과했던 월스트리트가 오랫동안 무소불위의 금융 권력을 휘두르는 제국으로 군림한 역사가 굴곡지게 펼쳐진다. <부의 제국>으로 이름을 더욱 널리 알린 고든이 월스트리트를 하나의 제국으로 파악한 것은 더없이 적절하다. 월스트리트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순진한 인간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는 지적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미국민들은 이제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된 월스트리트의 탐욕과 악마 같은 습성을 비난하고 분노한다. ‘어떤 나무도 하늘까지 자라지 않는다’는 또 다른 월스트리트의 격언을 막상 자신들은 잊고 살았던 데 대한 업보가 아닐까. “사회주의의 최대 약점은 사회주의 그 자체이고, 자본주의의 최대 약점은 자본가 그 자체”라며 전 지구적 금융감독기구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고든의 정문일침(頂門一鍼)이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용’이라도 되면 다행이겠다.(김학순 선임기자)

08. 10. 11.

P.S. "사회주의의 최대 약점은 사회주의 그 자체이고, 자본주의의 최대 약점은 자본가 그 자체”라는 저자 고든의 지적은 음미해볼 만하다. 새로운 지적은 아니지만 '월스트리트 통사'를 훑은 저자의 말인지라 무게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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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0-12 16:14   좋아요 0 | URL
유럽의 로스차일드,미국의 모건 집안...돈으로 세계를 쥐락펴락한 괴물들...마이클 더글라스의 영화가 궁금하네요.

로쟈 2008-10-12 19:43   좋아요 0 | URL
저도 극장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찰리 쉰과 같이 나온 거 같은데요...
 

세계 경제의 불황 국면을 맞이하여 미국 경제의 추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대선도 앞두고 있기에 미국 정치도 연일 기사화되고 있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떠올리게 된 책은 모리스 버만의 <미국 문화의 몰락>(황금가지, 2002)이다. 책을 읽어서가 아니라 이 참에 읽어볼 마음이 생겨서이다(알라딘에는 품절로 뜬다). 리뷰기사를 찾으니 생각보다 오래전에 나온 책이다.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미국 문화의 몰락'이 결코 남의 나라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모르겠다. 미국식이라면 몰락마저도 황홀해 할 한국인들도 있지 않을까?). 오래전 기사 두 편을 스크랩해놓는다.

오마이뉴스(02. 09. 05) 미국문화,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나

80년대 초 나는 원로시인 고은 선생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선생은 미국에 다녀온 경험을 토대로 "미국은 머지않아 멸망할 것이다"라고 일갈했다. 선생은 주로 도덕의 붕괴에 따른 미국의 멸망을 말씀하시는 듯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올해 나는 저명한 미국의 문화역사학자 모리스 버만(Morris Berman)이 쓴 <미국문화의 몰락(The Twilight of American Culture/심현식 옮김/황금가지 펴냄)>을 읽게 된다. 미국은 고은 선생이 멸망할 것이라고 진단한 이후 20년이나 버텼다. 하지만 이제는 미국의 학자가 자기 나라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다.

미국은 지금 세계를 점령할 듯이 호령한다. 테러분자들을 소탕한다고 아프가니스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이라크 대통령 후세인을 축출하겠다고 을러댄다. 여중생들을 장갑차로 깔아 죽인 미군을 내놓으라고 하면 죄가 없다고 강변하고, 우리나라, 우리 문화의 상징인 덕수궁터를 짓밟으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배 정도나 되는 규모로 대사관과 아파트를 짓겠다고 으르렁거린다.

더구나 미국기업인 맥도날드, 코카콜라는 상품으로 세계를 평정한다. 세계 어디나 맥도날드의 햄버거로 도배하여 '맥도날드화(McDonaldization)'를 이룩하며,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까지 '가구가락(可口可樂:cocacola)'을 마구 뿌려댄다. 미국이 생산한 군수물자 등 미국의 상품을 사주지 않으면 미국정부의 압력에 당해낼 국가가 없을 정도이다.

이렇게 21세기는 미국의 독무대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모리스 버만의 지적처럼 미국문화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지 않을까? 글쓴이는 미국문화가 멸망할 거라는 정황으로 다음의 4가지를 들고 있다.

1.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즉, 부익부 빈익빈은 극에 달해 있으며, 미국의 중산층은 붕괴됐다. 2. 사회보장제도가 위기에 빠져 있다. 3. 반지성주의에 따른 지적 수준이 전반적으로 하락하고, 문맹률은 급증한다. 4. 상업주의 문화가 지배하는데 따른 정신적 황폐함이 극심하다.

중산층은 전체 사회의 허리 구실을 한다. 이 허리가 붕괴됐으니 사회 전체가 온전할 리 없다. 글쓴이는 말한다. 고대 로마 시민들이 검투경기와 서커스에 넋이 나가 있었던 이후 고대로마제국의 멸망이 온 것처럼 오늘날 미국 시민들이 할리우드가 만든 블록버스터 영화에 열광하는 것은 미국 멸망의 징조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대중들이 지엽적인 문제에 온통 정신이 팔리거나 문화적인 삶이 끊임없는 오락거리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된다면, 그 국가는 분명히 문화적인 죽음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의 첫머리에서 버만이 진단한 말이다. 미국 문화는 엉망진창으로 죽어간다고 판단한다. 겉보기에는 활력이 넘치고 경제도 호황을 누리는 것으로 보이지만,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책의 부제로 '기업의 문화 지배와 교양 문화의 종말'이라고 한 것처럼 기업이 지배하는 상업주의 문화에 목적의식도 창조력도 매몰되어 버렸다고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미국 사회의 활력은 상업주의 문화의 광란일 뿐이다.

물론 그는 이 멸망을 해결할 방법으로 수도사적 해법을 제시한다. 수도사적 해법이란 어떤 조직적 운동이 아니라 개인 차원에서 이뤄지는 일종의 생활방식을 뜻한다. 즉 거창하거나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 대신 미술관이나 음악회를 찾고, 베스트셀러 대신 고전을 읽는 등의 작지만 의식있는 실천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미국문화의 몰락이 아니라 한국문화의 몰락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버만이 지적하는 미국문화 멸망의 정황 4가지는 한국의 사회에서 드러나는 정황 그대로이다. 특히 IMF 이후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모두가 이 책을 읽은 다음 경각심을 갖고 한국문화의 몰락을 방지할 수도사적 해법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할 일이다. 미국문화의 몰락은 미국만이 걱정할 일이 아니라 바로 한국의 우리 자신들도 걱정해야할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김영조 기자)

주간동아(02. 07. 04) "미국, 지금 너 떨고 있니?”

‘멍청한 백인들’(나무와 숲 펴냄)에서 마이클 무어가 미국 사회의 제도적 부조리와 정경유착 문제를 통렬히 비판한 데 이어, 문화역사학자 모리스 버만은 ‘미국 문화의 몰락’을 예고한다. 4~5세기경 로마제국처럼 미국은 화려했던 전성기를 뒤로하고 몰락의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버만은 ‘미국 문화의 몰락’에서 얼핏 보기에 미국이 에너지와 활력이 넘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이러한 활력이 상품 구매와 소유 이상의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혼란스러움에 불과한 이런 에너지가 미국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공허함을 숨기는 구실을 해서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고 경고했다.

사실 미국 지식인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비슷한 경고를 했다. 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플란은 “미국이 겉으로는 민주주의라는 화려한 장식을 했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몇몇 기업이 권력을 휘두르는 과두정치 체제로 바뀌고 있다”고 지적했고, 사회비평가인 토머스 프랭크는 “인간 의식에 대한 시장의 화려한 승리”라며 ‘암흑시대’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버만이 “미국은 몰락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독일 철학자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저서 ‘서구의 몰락’에서 찾을 수 있다. 슈펭글러의 종말론적 역사관에 근거해 저자는 미국 몰락의 징후를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가속화, 둘째 사회·경제적 문제를 사회 차원에서 해결하기 위한 비용투자에 따른 한계이익 감소, 셋째 비판적 사고 및 지적 의식수준 등의 급격한 저하와 문맹률의 확산, 넷째 정신적인 죽음(문화의 저급화). 21세기 미국은 이미 이 네 가지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둔재 생산국 미국’의 현실은 참담하다. 미국 성인의 42%가 세계지도에서 일본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15%는 미국조차 찾지 못한다. 1996년 10월 설문조사에서 대통령 후보가 누구인지 모르는 유권자가 10명 중 1명. 저자는 과거 정신병원에서 환자들의 정신병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대통령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던 것을 상기시켰다. 그 밖에도 한 토크쇼에서 미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무작위 인터뷰를 한 결과, 지구에 달이 몇 개 있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한 학생(천문학 수업은 A학점이었다고 함)이 있는가 하면, 3의 제곱을 6 혹은 27이라고 대답한 경우도 있다. 일본의 저술가 다치바나 다카시도 ‘도쿄대생은 바보가 됐는가’라는 책에서 일본 대학생들의 무식함을 개탄한 적이 있는데, 일본의 추락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미국 문화의 몰락’은 역설적으로 몰락을 막아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여기서 저자는 ‘수도사적 해법’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문화를 지키기 위한 역사적 선례를 보면 로마제국의 혼란기에 그리스 로마가 남긴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 앞장선 것은 수도사들이었다. 이들은 그리스 로마시대의 책과 필사본을 모으고 베껴 600년 후 새로운 유럽 문화 태동에 쓰일 수 있도록 했다.

현대의 정신적 수도사들은 상업주의 광고에서 거짓과 진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으며, 컴퓨터와 인터넷을 유용한 도구로 활용하지만 삶과 도구를 바꿀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이들은 다니엘 스틸 대신 호머를 읽고, 자녀를 데리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러 가는 대신 캠핑이나 박물관을 찾는다. 진리의 탐구, 예술의 함양, 비판적 사고방식은 바로 이들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즉 쇼핑이라는 오락에 빠져 있는 98%를 제외한 나머지 2%가 미국 사회를 구해낼 정신적 수도사가 될 것이다.

‘미국 문화의 몰락’은 미국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문화비평서이나 몇 가지 아쉬운 점도 드러난다. 먼저 저자는 미국이 직면한 문화적 위기를 경고하는 데 급급해 정작 지켜야만 하는 ‘미국 문화’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또 ‘수도사적 해법’이 담고 있는 엘리트주의나 지나친 고급문화 취향은 거부감을 준다. 그러나 ‘지구를 살리자’ 유의 구호성 문화운동이 지닌 한계를 감안하면 소수가 조용히, 그렇지만 맡은 소임을 다하자는 ‘게릴라성 문화재건 운동’에 기대를 걸어봄직하다. 세계화 과정에서 더 이상 ‘미국 문화’가 미국만의 것이 아니듯, ‘미국 문화의 몰락’은 한가한 남의 나라 걱정거리로만 읽히지 않는다.

08. 10. 11.

P.S. <미국 문화의 몰락>(2000)에 이어지는 버만의 책은 <미국의 암흑시대: 제국의 마지막 국면>(2006)이다. 타이틀로 보아 '속편'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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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ol 2008-10-11 21:05   좋아요 0 | URL
'미국 문화의 몰락'이라는 제목이 섹시하군요. 그런데 미국 문화의 흥성한 시절을 언제로 보는가에 따라 얘기가 달라지겟죠. 아마도 이 책과 저자는 미국에서 신보수주의의 등장과 함께 벌이진 '문화 전쟁'의 맥락에서 읽지 않으면 위에 소개 기사처럼 헛다리만 짚게 될 것 같습니다. 사회의 자유주의 분위기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광범위한 신보수주의 운동의 차원에서 말이죠 -- 동성애, 낙태 등을 둘러싼 논쟁, 대중문화의 폭력성 논쟁, 교회가 미국인의 삶에서 점점 덜 중요해짐 등등. 점점 도덕과 규율과 종교와 '가족의 가치' 같은 것을 내세우면서 대중 문화에 대한 검열 같은걸 확대하려고 하는 이 운동의 맥락에서 놓고 읽어야 할 책인거 같습니다.

로쟈 2008-10-11 21:10   좋아요 0 | URL
버만의 입장이 앨런 블륨류의 보수주의와 비슷한 입장인지, 좀 다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위키에 나오는 모리스 버만에 대한 소개가 너무 간략해서요. 반지성주의에 대한 비판에서는 비슷한 면도 있는 거 같고...

cretois 2008-10-12 00:43   좋아요 0 | URL
앨런 블룸이나 사무엘 헌팅턴처럼 노골적이진 않습니다. 제목처럼 미국의 패권과 그 몰락에 대해서가 아니라 '건강한 나라'라는 미국의 이미지의 상실에 대한 '통분'에 가깝습니다. 물론 그 통분이 이문열 따위처럼 감상적인 차원이 아니라'문화적'이고 '학술적'인 비판에 근거하지요.
기본적으로 버먼은 퓨리터니즘에 대한 향수가 깊습니다. 부제처럼 기업(자본)의 지배 아래 놓은 미국의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스탠스를 취하지만, 그에 대한 해결책은 아마도 좀 몽상적이었던 듯(읽은지 오래돼서).
evol님의 지적, 적절합니다.

로쟈 2008-10-12 10:28   좋아요 0 | URL
부제만으로도 내용 정리가 되는 책이라 제쳐두었다가 다시 관심을 갖게 됩니다. 유익한 코멘트 감사.^^

노이에자이트 2008-10-12 16:04   좋아요 0 | URL
토마스 카알라일이 <과거와 현재>에서 당시 영국의 속물성을 지적한 것과 비슷하군요.상업성과 속물성은 사이가 좋은가 봐요.

로쟈 2008-10-12 19:42   좋아요 0 | URL
속물성을 이용할 줄 알아야 팔리니까요...
 

교수신문의 '서평' 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6945). 인문사회과학 시리즈에 대한 '품평'을 담고 있는데, 유명시리즈에 대한 비판과 별로 주목되지 않았던 시리즈에 대한 호평을 포함하고 있어서 한번쯤 읽고 참고할 만하다. '인문사회과학 시리즈의 가벼움 혹은 뚝심'이 부제다...

교수신문(08. 10. 06) 저자의 유명세를 감당할 진정성은 있는가

아마도 대다수가 동의할 인문사회과학의 성격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그 본질이 기성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 제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의식 자체의 창조와 환기에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경쟁과 생존의 방정식으로 환원되는 이 시대의 일차원성이 심화될수록, 비루하기 짝이 없는 문제틀 전복해 새롭게 읽어내겠다는 인문사회과학의 야심은 절실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인문사회과학의 이러한 야심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학자들의 연구가 활성화돼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연구 성과를 흡수하고, 다시 비판적으로 내뱉을 대중의 존재와 그 대중과 인문학을 접선시킬 ‘가독성’ 있는 책들의 존재가 요구된다. 요즘 서점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문사회과학 시리즈물은 바로 이 가독성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관심을 끄는 시리즈로는 우선 생각의 나무의 ‘問라이브러리’ 시리즈가 있다. H(Humanities), A(Arts), L(Literature) 등 세부 시리즈로 이루어진 이 시리즈에 대해 출판사는 ‘답이 아닌 질문의 절실함을 위하여’라는 모토 아래 20세기 극복과 21세기 비전 추구를 통해 지식의 공공성 회복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기획됐다고 밝히고 있다.

김우창, 도정일, 최장집, 장회익, 강수돌, 윤평중과 같이 무게감 있는 논자들을 통해 ‘정의와 정의의 조건’,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등 오늘의 우리가 제기해야 될 물음들을 제기하고 있고, 이후에도 박명림, 임지현, 이어령 등 저명한 필진들의 책을 준지하고 있다.

우선 윤평중 교수가 ‘극단의 시대에 중심잡기’에서 리영희, 송두율 교수에 대해 차분하게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 눈에 띈다. 윤 교수는 리영희 교수에 대해서, 분명 한국 지성사에 남긴 흔적이 작지 않지만, 그 과오도 분명히 해야한다면서, 특히 리 교수를 옹호하는 일부 교수들의 비합리적이고 편향된 자세를 비판하고 있다. 이미 일간지를 통해 문제가 됐던 윤 교수의 이러한 지적에 대해 앞으로 지식인 사회가 어떻게 반응을 할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강수돌 교수가 경쟁의 내면화를 자기소외와 연결하는 대목도 주목해야 하는데, 어떤 사안에 대해서든 목소리 높이기 좋아하는 우리 사회(특히 지식인들) 특유의 풍토가 실은 자기비판과 성찰이라는 의무는 방기했음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정일 교수가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에서 시장전체주의를 인문학 위기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있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김우창, 장회익, 최장집의 책들은 촌철살인의 맛이 다소 떨어지긴 해도 무난하게 시대의 문제점과 해법을 진단하고 있다.

그런데 윤 교수가 표현한 자기 비판적 계몽의 정신을 바로 이 ‘問라이브러리’ 시리즈 자체에 적용하면 어떨까. 이 시리즈는 저평한 필진에서 수려한 표지 그리고 일목요연한 내용 전개에 이르기까지 가독성을 최대한 고려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런데 페이지를 술술 넘기게 하는 바로 그 깔끔함이 오히려 마음에 걸린다. 왜냐하면 인문사회과학의 생명은 우리의 ‘지금과 여기(jetzt und hier)’를 불편하게 만들고, 페이지 하나를 두고서도 며칠 밤을 고심하게 하는 거친 생경스러움에 있기 때문이다. 출판사 측은 유명 지식인들이 직접 집필한 책이라는 점을 자랑스레 내세우고 있지만, 저자의 유명세가 책의 무게를 더하는 그러한 책이 과연 진정성이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일종의 우울증 속에 있는 듯이 보이는 사회와 학계에 신선한 화두를 던져보기 위해 기획됐다는 새물결의 ‘What’s up’시리즈는 보다 발랄한 외양을 띠고 있다. 바디우, 지젝, 아감벤 등 국제적으로 명성이 있는 필자들을 통해 ‘사도 바울-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호모사케르-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등의 제목으로 한층 세계적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문제인가. 승승장구(?)하는 자본주의의에 대한 문제제기라면 이미 지겹게 들어오지 않았던가. 필자들의 새로움은 자본주의, 제국, 시대에 대한 문제제기를 생명, 사도 바울, 쓰레기와 같은 독특한 우회로를 통해 행하고자 한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언어와 개념의 독창성이 국내 논자들의 신문 사설 같은 건조함보다 인기가 있는 이유일 것이다. 다만 외국 학자들의 논의를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책의 내용에 대한 설명도 부족해, 대체 우리의 어떤 현실 문제와 연관할 수 있을지 쉽사리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지젝, 아감벤이나 바디우의 이름이 그 자체로는 신선할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이름이 일종의 지적 트랜드로서 유행하고 있는 국내에서는 그다지 신선해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이다. 지젝, 아감벤이 정말로 그렇게 중요하고 대단한 사람들일까

이후 출판사의 ‘아주 특별한 상식 NN(NO-NONSENSE)’ 시리즈는 세계화, 기후변화, 공정 무역, 테러리즘 등 시대의 중요한 쟁점들을 친절하게 검토하고 있다. 일목요연한 구성은 짜임새가 있으나, 문제를 절실하게 제기하는 인문학서적이라기보다는 논술용 참고서라는 느낌이 강하다. 이와 비슷한 포맷으로 시중에는 웅진 지식 하우스의 고정관념 Q시리즈 외에 다양한 시리즈물들이 나와 있는데, 가독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인문학서라고 보기에는 무게가 한참 떨어지는 책들이라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



유려하지만 가독성에 대한 요구에 강박당한 시리즈물들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귀감이 될 만한 시리즈물도 있다. 그 중 하나가 선인 출판사의 구술자료 총서다.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내가 겪은 민주와 독재’, ‘내가 겪은 건국과 갈등’, ‘빼앗긴 시대 빼앗긴 시절-제주도 민중들의 이야기’ 등의 제목을 단 시리즈는 유명한 학자도 아니고, 세련된 문체를 구사하는 필자들은 아니지만, 진실함의 곡진함 곧 삶의 진정성을 가장 절절하게 전달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의 신산했던 삶이 오늘의 우리를 얼마나 부끄럽게 하는지를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가독성을 이유로 밋밋한 시리즈물을 찍어내기에 여념이 없는 풍토를 반성하게 한다.



아르케의 ‘희망제작소 뿌리총서’도 진지한 문제의식으로 뭉친 시리즈이다. 일본 저자들의 책을 번역했다는 점이 다소 눈에 걸리지만, ‘창발마을 만들기’, ‘1% 너머로 보는 지역활성화’등 이른바 풀뿌리 자치 운동에 대한 실천적 모색을 한다는 점이 돋보인다.  한편 가독성은 거의 고려하지 않고 뚝심있는 행보를 보여주는 시리즈물들도 꽤 눈에 띈다.



성균관대 출판부의 ‘유학사상가 총서시리즈’나 다할미디어의 ‘호남 역사문화 연구총서’도 유행과는 거리가 먼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다만, 학술적 가치는 높으나, 인문학적인 문제의식을 불어넣기에는 독자들에 대한 배려가 아쉬운 시리즈들이다.(오주훈 기자)

08. 10.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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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8 0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7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8 0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08 17:00   좋아요 0 | URL
부모님들의 신산한 삶이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애매하네요.

로쟈 2008-10-08 17:35   좋아요 0 | URL
기자의 선호 같습니다. 구술자료 자체가 인문학은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