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일이 있어서 외출하던 길에 집어든 신문에서 가장 인상깊게 읽은 기사는 북리뷰가 아니라 '세계의창' 칼럼이었다. 12년 전 동아시아 금융위기에 따른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이 현재의 미 금융위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시나리오'를 제시한 것인데, 설득력이 있다. 집에 돌아와 칼럼을 몇 편 더 읽고 두 편을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03. 14) [세계의창] 주택거품 붕괴는 동아시아의 복수

1997년 여름, 동아시아 나라들에 ‘금융 쓰나미’가 덮쳤다. 타이와 인도네시아, 그다음엔 한국과 말레이시아에서 투자자들이 공황 상태에 빠졌고 자본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통화가치는 곤두박질쳤고 잘나가던 대기업들이 파산을 면하려 발버둥쳤다. 이 나라들을 성공적인 경제개발 모델로 추어올리던 국제통화기금(IMF)과 이코노미스트들은 갑자기 태도를 바꿔, 투명성 결여, 회계기준 부실, 정실 자본주의 등 다양한 비난을 퍼부었다.  

국제통화기금은 가혹한 조건을 내건 구제금융 계획을 들이밀었다. 힘든 내핍생활, 그리고 외국 투자자들이 헐값으로 기업 주식을 사들일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을 요구했다. 국제통화기금은 또 이들 국가에 외채 상환을 요구했다. 구제금융을 받은 나라들이 빚을 갚을 유일한 방법은 ‘미친 듯이’ 수출하는 것뿐이었다. 이들의 수출길은 자국의 통화가치, 특히 달러에 대한 통화가치의 폭락을 통해 열렸다. 그 결과 미국 소비자들에게 아주 싼 값이 되어버린 이들 나라의 상품이 미국 시장에 쏟아져 들어왔다.  

물론 국제통화기금은 자율적인 기구가 아니다. 미국이 이 기구를 주도한다. 동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국제통화기금의 정책을 설계하는 데 가장 책임 있던 세 사람은 앨런 그린스펀 미국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 그리고 루빈의 수석 보좌관이었던 로런스 서머스였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세계를 구하는 위원회’(이하 구세위)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을 정도로 이 세 사람은 동아시아 및 다른 지역의 구제금융안을 디자인하는 데 너무나 두드러진 인물들이었다.  

국제통화기금의 동아시아 구제금융은 나머지 세계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신흥개발국들이 국제통화기금의 ‘아시아 구원’으로부터 뽑아낸 메시지는, 절대로 이 기구의 도움을 받아야 할 상황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한 가지 방법은 외환보유고를 크게 늘리는 것이었고, 그 유일한 방도는 무역수지를 흑자로 운용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미친 듯이’ 수출하는 나라가 동아시아 나라들뿐 아니라 중국을 포함한 전세계의 모든 개발도상국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7년 이후엔 엄청난 자금이 신흥국들에서 미국 등 경제부국으로 흘러들었다. 이런 자본유입은 미국 주택시장의 거품을 키웠다. 상품 수입으로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노동시장이 취약해졌다. 연준은 계속 금리를 낮췄고, 2003년 여름에는 금리가 1.0%까지 떨어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저금리가 거품을 유지시켰다. 거품은 수년간 지속된 과잉과 노골적인 기만을 은폐하는 데 일조했다. 집값이 연간 10% 이상 오르고 부동산과 은행 부문에서 기업이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는 세계에서는 많은 죄악이 감춰질 수 있다. 그러나 거품은 터지기 마련이다. 주택 거품의 붕괴는 주택 부문에서만 8조달러를 날려버리고 초대형 금융기관들을 파산시킬 것이다. 

역사에서, 두 번의 기회는 오지 않는다. 하지만 만일 ‘구세위’가 다른 길을 갔더라면 지금 세계는 어떤 모습일지 물음을 던져볼 가치는 있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수출에 그처럼 목매달지 않도록 국제통화기금이 동아시아 나라들의 채무의 상당액을 탕감해 주도록 했다고 가정해 보라. 나아가, 구제금융의 부담이 가벼웠더라면 신흥개발국들이 외환 비축에 달려드는 사태도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구세위가 이처럼 다른 경로를 택했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루빈의 씨티그룹 주식 지분(루빈은 씨티그룹의 최고경영자를 지냈다)의 가치가 오늘날보다는 훨씬 컸을 것 같다.(딘 베이커 미국 경제정책연구센터 공동소장)     

한겨레(08. 12. 27) [세계의창] 금융사기와 부패한 정치  

세상의 많은 이들이 미국에선 정치와 기업이 깨끗하고 개방돼 있다고 믿는다. 지난 10년 사이 미국 금융산업에 의해 만들어진 ‘독성 쓰레기’(부실 채권)의 홍수는 이러한 호의적인 견해를 무너뜨리고 있다. 가장 최근의 추문은 놀라울 만큼 단순하다. 버나드 메이도프는 지난 30년 동안 성공적으로 헤지펀드를 운영하면서 부자가 된, 겉으로는 대단히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의 펀드는 매년 높은 수익률을 냈다. 사람들은 그에게 돈을 맡기려 줄을 섰다.

그러나 메이도프가 투자를 해서 높은 수익을 보장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오래된 수법인 ‘폰지’(이전 투자자에게 새로운 투자자의 돈으로 수익을 돌려주는 금융 다단계 방식)를 활용했다. 메이도프는 지난해 모집한 투자자들에게 올해 모집한 투자자들의 돈을 지급했다. 메이도프에게 돈을 투자하려고 안달하는 사람들이 계속 줄을 잇는 한 사기행각은 계속될 수 있다. 이는 지난 30년 동안 메이도프 펀드가 500억달러 넘게 성장할 때까지 계속됐다. 메이도프는 지난해 예상외로 시장이 급락하면서 문제에 빠져들었다. 투자자들은 갑자기 다른 곳에서 발생한 손실을 메우기 위한 현금이 필요했다. 부유한 자산가나 은행과 다른 투자 펀드, 심지어 자선단체들도 자기 자산이 크게 줄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메이도프에게 투자했던 돈은 지금 사라졌다.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메이도프가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대규모 사기를 벌이려 했기 때문이 아니다. 메이도프 같은 사기꾼이 수십년이나 들통나지 않고 단순한 수법으로 엄청난 사기행각을 계속해 왔다는 점 때문이다. 이는 미국 금융시스템의 거대한 부패를 드러내는 것이다. 더욱이 메이도프의 불법 행위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금융사기 예방 책임이 있는 미 증권거래위원회(SEC)는 그런 불만들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 미 나스닥 증권거래소 설립자 가운데 한 명인 메이도프는 금융산업계의 모든 저명인사들과 교분이 있었고, 많은 자선단체들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메이도프와 같은 인물들은 증권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미국 금융시스템이 처한 문제다. 비윤리적이고 불법적인 행동들이 월스트리트 삶의 한 방식이다. 이상한 것은 이런 악당들이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고, 잡힌다고 하더라도 처벌은 아주 미미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미국 금융산업이 비범한 정치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속되고 있다. 금융산업은 민주·공화 양당에 손이 큰 기부자다. 정권 교체는 골드만삭스의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다른 인물에게 최고 경제 관료직을 넘겨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로버트 루빈은 클린턴 대통령 시절 재무장관을 지냈고, 헨리 폴슨은 현 부시 행정부의 재무장관이다. 둘 다 미국의 최대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의 최고경영자를 지냈다.  

금융산업은, 규제·감독권을 지닌 의회 위원회의 핵심 위원들의 선거에서 늘 최고의 기부자 노릇을 해온 터라, 의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결국 어떤 의원도 금융산업의 고삐를 바짝 죄는 일을 진지한 관심을 갖고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런 모든 것들은 미국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매우 나쁜 소식이다. 미국에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월스트리트에 대한 투자는 지금의 규제 환경에선 매우 나쁜 도박이라는 매우 분명한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만약 워싱턴이 그런 사기행위를 일소하지 않으면, 외국 투자가들은 월스트리트에 돈을 맡기기보다 카지노에 가는 게 더 나을 수 있다.(딘 베이커/미국 경제정책연구센터 공동소장) 

  

한겨레09. 03. 14) 인생 끝난 메이도프

“진심으로 죄송하고 부끄럽다.”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다단계 금융사기(폰지 사기)를 벌인 버나드 메이도프(70·사진)가 12일 뉴욕 맨해튼 법원에서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고 곧장 감방으로 향했다고 <에이피>(AP) 등 외신들이 전했다. 나스닥 증권거래소 위원장까지 지냈을만큼 유력 금융인이었던 메이도프는, 최대 46%의 수익률을 약속하며 신규 투자자들로부터 끌어모은 돈의 일부를 기존 투자자들에게 수익금으로 주는 사기 행각을 20년 동안 벌여온 혐의를 받고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피해자만 4800여명, 피해금액은 650억달러(약 97조원)에 이른다. 그가 인정한 혐의는 증권사기, 돈 세탁, 위증 등 11가지다. 오는 6월16일로 예정된 선고공판에서 유죄가 확정될 경우, 메이도프는 최대 150년의 징역형을 받게 될 전망이다.

메이도프의 유죄 인정에도 불구하고, 의문은 꼬리를 물고 피해자들의 분노는 끓어오른다. 메이도프는 “혼자만의 범행”이라고 주장한 뒤 입을 굳게 다물었다. 피해자들은 그가 어떻게 폰지 사기를 저질렀는지, 누가 연루됐는지 등 더 많은 답변을 듣고 싶었으나 소용이 없었다고 <워싱턴 포스트>가 13일 전했다. 그에게 돈을 맡겼던 샤론 리사워는 “내 저축 전부를 잃었고, 아무 것도 남은 게 없다. 그가 자산이 어디로 갔는지 밝히고 모든 투자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만 있다면…”이라며 눈물을 삼켰다. 미국 검찰은 메이도프로부터 약 1700억달러의 재산을 추징할 방침이다.(조일준 기자) 

09. 0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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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낭만거미의 생각
    from bluespy's me2DAY 2009-03-17 12:32 
    이것이 바로 미국 금융시스템이 처한 문제이다.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 문제라고 넓혀 볼 수 있을까?
 
 
bs0048 2009-03-14 23:19   좋아요 0 | URL
저도 오늘 재미있게 본 칼럼인데, 소개해주셨네요^^

로쟈 2009-03-14 23:31   좋아요 0 | URL
이심전심이군요.^^
 

지난주 눈길을 끈 뉴스 하나는 정부가 '신빈곤층'이란 용어를 금지어(금기어, 금칙어)로 지적했다는 소식이었다. <1984년> 같은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일이어서(MB의 대한민국은 유토피아다!) '재미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MB부터가 즐겨쓴 이 용어가 현 정부에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준다고 해서 '위기가정'으로 대체될 예정이라고 한다(신빈곤층 문제를 이렇게 간단히 해결하다니!). 스스로 '위기의 정부'임을 광고하는 것인지. 아무려나 '희귀한 사례'가 될 듯싶어서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이명박 대통령은 어제 경기도 안양의 한 보건복지종합상담센터를 방문한 자리에서 "신빈곤층의 사각지대를 찾아내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또 현장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서민들에게 직접 전화상담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경기도 안양의 보건복지종합상담센터를 찾았습니다. 이 대통령은 최근 늘어나고 있는 신빈곤층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원과 일자리 창출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한 모녀의 안타까운 사연을 언급하면서 빈곤층에 "사각지대가 많은 것 같다"고 지적했습니다.(KTV, 09. 02. 06)

경향신문(09. 03. 04) 이명박 정부 금기어 ‘신빈곤층’

3일 일선 지자체가 내놓은 각종 자료에 눈에 띄는 용어의 변화가 생겼다. ‘신빈곤층’이란 용어가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춘 것이다. 대신 등장한 용어는 ‘위기가정’이다. 전북도는 이날 ‘신빈곤층’으로 써 오던 관련 자료 용어를 모두 ‘위기가정’으로 바꿔 사용했다. 지난 주말까지만 해도 ‘신빈곤층’이란 용어는 공식용어였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민주노동당은 2일 민생브리핑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이 얼마 전 ‘봉고차 할머니’ ‘목도리 할머니’ 등 빈곤층 찾기 쇼를 할 때 현장에서 직접 사용까지 했던 용어를 며칠 만에 금지령을 내렸다”고 밝혔다. 민노당은 “신빈곤층이라는 용어가 현 정권이 만들어낸 빈곤층으로 들린다는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며 “이제 집권 1년이 지난 현 정권의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노당은 “용어 사용에 얽매이지 말고 그 용어 자체가 사라지도록 하는 정책에나 전념하라”고 꼬집었다.

지자체에서는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전북도는 공식적으론 “정부의 ‘신빈곤층’ 용어 자제요청은 없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자료 한쪽 면에 ‘청와대 신빈곤층 용어 사용 금지령’이란 제하의 인터넷판 뉴스를 복사해 첨부했다. 전북도 관계자는 “공식적인 요청은 없었지만 정황으로 볼 때 앞으로 모든 공문서에 신빈곤층 대신 위기가정이란 용어를 사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구시의 한 간부는 “이명박 대통령도 신빈곤층 복지사각 제도를 없애라는 말을 사용했다”면서 “정부 스스로 이 용어를 쓰지 말라고 했다면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남대 김모 교수는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문서작업시 이전 정권에서 주로 사용했던 단어들은 모두 금지어라는 점에 놀랐다”면서 “예컨대 ‘소외계층’ ‘혁신’ ‘참여’ 등의 단어를 보고서에 쓰면 혼쭐난다”고 말했다.(박용근기자)    

노컷뉴스(09. 03. 05)[변상욱의 기자수첩] 국민은 '신 빈곤층', MB정부는 '신 위기층' 

'신빈곤층'이란 용어가 금지어로 지정됐다고 한다. 지난달 26일쯤 관련 보도가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청와대 관계자가 밝히기로 "신 빈곤층이라는 용어 자체가 적절치 않다는 내부 검토에 따라 쓰지 않도록 조치했다. 국민을 계층화 해버리는 의미가 있어 일시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쪽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는 내용.

◈ 빈곤층은 '신新' 것인가? 쉰 것인가?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부터 "새롭게 발생하는 신빈곤층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며 경제 살리기를 공약했었다. 결국 신빈곤층이란 서민·중산층이 이번에 들이닥친 경제위기로 인해 빈곤층으로 추락하면서 생겨났다는 의미로 '신빈곤층'이라고 규정한 것. 노무현 정부가 미처 대응하고 돌보지 못한 새롭게 생겨나는 빈곤층을 새 정부가 예리하게 파악해 적절한 대응정책을 마련하겠다는 의미로 이명박 대통령이 목도리 할머니, 봉고차 할머니 만나고 어려운 가정들 돌아볼 때 마다 사용하던 용어이다.

그런데 새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지나도 신빈곤층은 계속 늘어만 가고 경제성장율이 마이너스가 예상되는 마당에 계속 늘어날 것이고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되자 '신빈곤층'은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생겨난 빈곤층이라는 이미지가 점점 강해지고 있어 황급히 지워버리고 싶은 게 속내인 걸로 짐작된다.(물론 설명으로는 국민을 계층화하는 부적절한 용어라 계층으로 굳어지는 게 아니라 일시적인 잠깐 고생하다 다시 중산층으로 상승할 계층이라는 이미지로 바꾸고 싶다고 하지만….)

노무현 정부 책임으로 귀책되는 빈곤층이냐, 이명박 정부 책임으로 봐야 할 빈곤층이냐. 그런 뉘앙스의 차이인데 어차피 신빈곤층이 줄어들거나 신빈곤층이 먹고 사는 데는 전혀 도움 안 되는 머리 굴림.

◈ 국민은 '신빈곤층'으로, MB 정부는 '신 위기층'으로? 

아직 확실히 결정된 용어는 아니지만 일단 대체해 사용하는 것이 '위기가정'인 모양이다. 왜냐하면 보건복지가족부가 '위기가구'라는 말을 계속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여기서 빌려 온 듯하다. 전재희 보건복지장관이 지난달 말 인터뷰 때 이야기한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 신빈곤층이란 말의 의미가 좀 모호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신빈곤층이란 법령적인 것도 학문적 개념도 아니다. 행정적으로 쓰는 용어이다. 경제위기로 인해 소득을 상실해 새로운 위기에 빠진 가정인 셈이다. 복지부는 '위기가구'라는 개념으로 씁니다"

보건복지부의 행정 처리상으로는 소득상실, 폐업, 실직, 주소득자 사망, 이혼, 화재나 교통사고 등으로 생계유지가 갑자기 어려워져 '긴급 복지지원'을 요청하는 경우가 '위기가구'이다. 청와대는 복지부의 '위기가구'를 그대로 베껴 쓰자니 자존심 상하고 개념의 차이도 있고 해서 '위기가정'으로 일단 바꿔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위기가정'이란 용어는 너무 포괄적이다. 조금 더 명확히 하자면 '경제 위기가정' 이렇게 써야 신빈곤층이라는 본래의 표현에 더 가깝다. 그러나 흔히 줄여서 '위기가정' 이렇게 쓴다. 뭔가 경제를 못살려 어려워진 가정, 정부 책임 이런 느낌을 덜 주고 그 가정이 문제가 있고 어려워서 힘을 못 쓴다는 느낌이 강하지 않은가. 은근히 국민에게 떠미는 느낌. 학문적, 행정적 용어를 정리하자면 사회의 계층은 최상위 부유층 - 부유층- 중산층 - 서민층 - 신빈곤층 - 차상위 계층 - 기초수급 대상자 로 이어진다. 위기가정이면 어디부터 어디까지인가?

신빈곤층의 특징은 사회안전망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 행정 용어로 '비수급 빈곤층'. 두 가지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복지부의 통게로 경제위기 가구는 8만5천5백 가구이다. 올 경제성장율이 마이너스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개념 정리를 어찌 해나가든 신빈곤층은 늘어만 갈텐데…. 국민은 '신빈곤층'으로, 해결 못해 쩔쩔매는 MB 정부는 '신 위기층'으로 가고 있는 중? 

09. 03. 08.  

P.S. 요점은 '신빈곤층'이란 말을 '위기가정'으로 대체함으로써 '정부 책임'이란 뉘앙스를 제거하고 싶다는 것(결국 빈곤은 가정 문제이고 가장의 책임이다?!). 아무래도 정부에는 이 방면으로 머리 쓰는 인재들이 많은 모양이다. 해서, 신빈곤층을 염려하던 이대통령의 멘트도 소급적으로 교정되어야겠다. "위기가정의 사각지대를 찾아내 지원해야 한다"라거나 "이 대통령은 최근 늘어나고 있는 위기가정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원과 일자리 창출이라고 강조했습니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남의 가정 일에도 세심하게 신경 쓰는 정부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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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3-08 14:59   좋아요 0 | URL
정권교체를 피부로 느끼라고 이렇게 금지 용어를 지정했군요.

로쟈 2009-03-08 16:11   좋아요 0 | URL
아니요, 요즘은 반대 같아요. 정권교체를 못 느끼게 하려고 애를 쓰니까요. '잃어버린 10년'이란 말도 요즘은 안 쓴다잖아요...

노이에자이트 2009-03-08 21:01   좋아요 0 | URL
내 남자의 여자 김상중 씨의 극중 배역명이 홍준표라고 하더라구요.그래서 홍준표 의원이 왜 하필 내 이름이냐...고 했단 뒷이야기가 있었답니다.

로쟈 2009-03-08 21:49   좋아요 0 | URL
금지된 이름인가요?^^

람혼 2009-03-09 04:04   좋아요 0 | URL
'위기가정'에 덧붙여 '위기국가' 또는 '위기정부'라는 신조어(?)를 자주 사용할 것을 권장하고 싶습니다. 현실에서 할 수 없고 하지 못하는 일을 '언어'의 레벨에서 수행하고자 하는 이 '상징적인 분서갱유'가 무서울 정도로 기가 막혀서 오히려 귀여울(?) 지경/경지이군요.

로쟈 2009-03-10 00:04   좋아요 0 | URL
'상징적인 분서갱유'가 현실화될까 염려됩니다...

쟈니 2009-03-09 13:11   좋아요 0 | URL
수구 정권이 늘 더 세심하게 언어를 쓴다는 생각이 드네요. 언어로 생각을 조정(? 조절?)하려는 건 어느 나라나 다를 바 없어요. 주구장창 외치던 잃어버린 10년도 안쓴다니, 저러다 선거 앞두고 또 당명 한번 바꾸는 건 아닐까 걱정되군요.

로쟈 2009-03-10 00:05   좋아요 0 | URL
재집권만 한다면 뭐라도 하지 않을까요?--;
 

용산 철거민 참사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경찰 무죄, 철거민 유죄’라는 결과를 내놓았다. 기대할 것 없는 수사였고, 예상되었던 결론이다.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것은 소위 '억압적 국가장치'로서의 경찰/검찰 권력이란 한갓 권력과 지배계급의 시녀에 불과하다는 것. "범죄수사를 통한 형벌권 행사 및 법원의 판단에 의하여 구체화된 형벌권의 내용실현을 지휘, 감독하는 국가권력작용"이란 사전적 정의만 놓고 보더라도 검찰(권)과 사회정의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해서, 권력의 충복으로서 검찰은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주권을 도둑맞은 국민이 못났을 뿐이다). 그것이 희생자 유족들이 주저앉아 있는 자리이고, 우리가 서 있는 자리이다(MB집단에게 국민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 곧 '니그로'다!). 바로 계급이 나뉘는 자리이다...    

‘용산 참사’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9일 오전 희생자 유족들이 서울중앙지검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 들어가려다 경찰에 저지되자 영정을 들고 청사 현관 앞에 주저앉아 있다.

경향신문(09. 02. 10) [책읽는 경향]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무언가를 말하지 않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어쩌면 더 강력한 통제수단이었음을 역사 속에서 우리는 배웠다. 인디언의 역사를 삭제한 채 구성된 아메리칸 드림, 승리자였던 조조 대신 유비를 중심으로 구성한 소설 삼국지 속에서도 배제의 정치적 혐의는 읽을 수 있다.  

최근 ‘용산 참사’를 보면서 충격적이었던 것은 우리 사회의 반응이었다. 사건 초기 각종 언론은 조금이라도 돈을 더 받아내려는 떼쟁이 이익집단의 과격한 이해관계 관철 수단(점거농성과 화염병)의 지긋지긋함에 초점을 뒀다. 시위를 한 절박한 이유나 배경, 이들의 삶의 조건과 철거 이후 어떻게 추락할지에 대한 인도적 관심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벨 훅스·모티브북)는 미국 사회가 엄존하는 계급간의 문제점을 왜 이야기하지 않는지를 다룬다. 저자는 “단순한 삶을 추구하고 탐욕·부·질시의 위험성을 공유하며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도록 배웠던 미국”이 쾌락적 소비주의의 만능 속에 빈자와 약자를 얼마나 당당하게, 그리고 죄책감 없이 무시하게 됐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렸을 때 늘 듣던 말이 있다. ‘부잣집 애들은 공부를 못하고 가난한 집 애들이 공부를 잘한다’는 것. 계급이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순환되고 있음이 반영된 이야기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부자는 영원히 부자이며 가난은 영원히 대물림되는 ‘신 계급사회’에 와 있다. 문제는 점점 이런 부분에 대해 말하지 않게 됐으며 죄책감조차 없어져 간다는 점이다. 약자에 대한 무감각을 한국사회가 어떻게 키우고 있는지 알려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우리 사회야말로 다시 계급에 대해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권미혁|한국여성민우회 상임대표) 

09. 02. 09. 

 

P.S.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에 이어서 지난해 말에 출간된 벨 훅스의 또다른 책은 <경계 넘기를 가르치기>(모티브북, 2008)이다. "인종.성.계급의 ‘경계 넘기’를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벨 훅스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이다. 따라서 이 책에는 벨 훅스가 그러한 목표를 실행하면서 겪었던 시행착오와 결실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너네 공부 안 하면 철거민 된다'라고 주입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과연 그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F4 판타지에 몰입하는 사회에서 나는 기대를 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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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느낌
    from seoulrain's me2DAY 2009-02-11 10:28 
    벨 훅스 읽기 : F4를 무리 없이 소화하는 사회가 우울하다.
 
 
Arch 2009-02-09 23:55   좋아요 0 | URL
기사의 한부분이 정정되어야하지 않을까요,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부분. 논의의 여지는 많겠지만, 다들 자신의 위치는 중산층보다 아래라고 생각하면서 자식의 교육이나 신분상승의 기회를 활용하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적극적이잖아요. 혹은 자신이 세워놓은 중산층의 위치가 너무 높아 그 정도면 되는데도 아니라고 생각한다거나.
경계짓기를 유머 코드로 사용하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개콘이고, 부자의 억울함을 이해해달라고 호소하는 드라마를 보며 대리만족이나 눈이 즐거워지는 체험을 한다니 할말없죠.

로쟈 2009-02-10 11:10   좋아요 0 | URL
저는 그것이 인간이 본성인지, 혹은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말하듯이 자본주의하의 '이차적 본성'인지 헷갈립니다. 어느 쪽이냐에 따라 처방도 달라질 듯싶은데요...

yoonakim 2009-02-10 12:20   좋아요 0 | URL
너네 공부안하면 철거민 된다.....밥 먹고 누우면 소된다...가 더 낫네요. 정말 끔찍한 가운데 살고 있단 생각이 듭니다. 감성구조의 변화와 그것이 고착화되는 속도는 놀라울 따름입니다. 막막함과 황당함 무력감을 기본으로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별로 없어요.

로쟈 2009-02-10 13:05   좋아요 0 | URL
인문학(혹은 책)이 뭘 바꿀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약간 지체시킬 수 있을 뿐인지, 그런 고민까지 하게 됩니다...--;

yoonakim 2009-02-10 12:22   좋아요 0 | URL
참, 이리 멘젤 영화는 비디오로 여러개 가지고 있는데 혹시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전주영화제 세미나용으로 받았던 테잎이거든요.^^

로쟈 2009-02-10 13:04   좋아요 0 | URL
오호, 그럼 나중에 신세를 좀 질게요.^^

게슴츠레 2009-02-10 13:35   좋아요 0 | URL
"F4 판타지에 몰입하는 사회에서 나는 기대를 꺾게 된다..." 완전 공감입니다. 나름의 '도덕'을 준수하려고 노력하는 공중파에서 <꽃남>이 방영되는 것도 신기하다만, 그걸 일체의 무리없이 완벽하게 즐기는 데 성공하는 이들의 존재는 정말이지 놀랍다고밖에 말 못하겠습니다. 단순히 '도'를 넘어섰다는 보수적 개탄을 넘어서 본격적인 미디어 비평들이 쏟아져 나오면 어떨까 싶습니다.

로쟈 2009-02-12 22:34   좋아요 0 | URL
그게 딜레마입니다. 미디어비평을 위해서 '꽃남' 시청자가 되고 싶진 않거든요...

2009-02-11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2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릴케 현상 2009-02-12 10:51   좋아요 0 | URL
F4가 뭐죠??

로쟈 2009-02-12 22:33   좋아요 0 | URL
흠, 산책님도 '따'시겠는데요...

릴케 현상 2009-02-13 12:08   좋아요 0 | URL
앗 농담이었다고 해도 될까요!
 

이번주 한겨레21의 '노 땡큐!' 칼럼을 옮겨온다. '푸닥거리 경제'란 제목으로 주류 경제학의 무능력과 함께 미네르바 체포 사건을 도마에 올려놓고 있다. 지금까지의 경제학 이론(경제 운영 기성 권력)이나 그에 근거한 예측이 '푸닥거리' 수준이라면 경제 전망과 더불어 경제학의 미래도 궁금해진다. 이건 또 한편 '푸닥거리 경제학의 미스터리'가 아닐는지...   

한겨레21(09. 02. 06) 푸닥거리 경제

나는 지금 박사 논문 지도교수가 사는 캐나다 몬트리올에 머물고 있다. 얼마 전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교수가 예전에 속해있던 금융조사 분석기관에서 일하는 이들도 함께했다. 단연코 뜨거운 화제 1위는 한국 정부의 ‘미네르바 체포 소식’이었다. 역시 선수들이었는지라 사건을 보는 시각에 남다른 것이 있었는데, 이 사건이야말로 현재 경제위기를 통제할 능력과 자신감을 상실한 전세계 지배 세력의 불안감의 극적 표출이라는 것이 그날 이야기의 대충의 결론이었다.   

기우제 올리는 신관의 불안감  

2차 대전 이후의 현대 자본주의 정치체제는 사실상 ‘경제 시스템의 조종 능력’에 그 정당성의 근거를 두어왔다. 국가의 경제정책을 통해 경제의 작동을 성공적으로 조종할 수 있다는 확신은 방향만 다를 뿐이지 케인스주의자들이나 하이에크주의자들이나 똑같다. 자신들이야말로 경제의 작동을 ‘정밀하게, 과학적으로, 수량적으로’ 관찰하고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오만의 목소리는 오히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 쪽이 더 시끄러웠다. 따라서, 하늘의 강우량이 그해 농사의 풍흉에 절대적이던 아득한 옛날, 신과 통해 그것을 통제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신관들이 그러했듯이, 이들도 지난 몇십 년간 일국 및 지구 차원의 경제 작동에 대해 거의 절대적인 힘을 발휘해왔다. 그런데 지금 벌어진 일국 및 지구 차원의 경제위기로 이들의 능력이라는 게 순식간에 거덜이 나고 만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홍수든 가뭄이든 책임은 무정한 하늘에 있지 열심히 기우제 올린 제사장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번 경제위기는 바로 이 신자유주의 경제학, 혹자가 붙인 이름으로 ‘푸닥거리 경제학’(voodoo economics)의 결과라는 혐의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는 중이다. 지난 십 몇 년간 벌어진 이른바 ‘금융 혁명’은 누구의 눈에도 각종 금융 사기와 대규모 금융 거품으로 이어질 것이 명백했지만, 그러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이들은 ‘우리가 알아서 한다. 너희가 뭘 안다고 떠드느냐’고 한마디로 일축해버렸다. 지금은 입에 올리기도 민망하게 된 ‘신경제’(new economy)니 ‘검은 물질’(dark matter)이니 하는 허망한 소리까지 떠들어댔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전 지구의 경제가 누구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그야말로 ‘검은 구멍’에 빠져버렸고, 모래알만큼 많은 경제학 박사들은 모두 침묵 모드로 들어가버렸다.

요즘 <파이낸셜타임스>나 <포천> 등 여러 유명 경제 매체의 지면에는 ‘혹시 현대 문명이 경제체제의 작동에 대한 통제력이 없는 게 아닐까’라는 불안감이 떠돌고 있다. 그리고 이를 떨쳐버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글들이 사설에 칼럼에 분석 기사에 넘쳐나고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욱 ‘안습’인 경우가 많다. 이는 악몽이다. 자신들이 키와 노를 쥐고 있다고 믿었던 지구 경제라는 배가 알고 보니 키질·노질 따위와는 상관도 없이 그저 급류에 떠밀려 표류하고 있었던 것에 불과하며, 이제 천길 폭포로 빠져들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이 전세계의 경제 담론에 유령처럼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미네르바 구속은 공포의 고백
한국에서도 이른바 ‘경제 운영 기성 권력’(economic establishment)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한다. 관계, 학계, 업계, 언론계 등으로 구성된 이 집단은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사실상 지난 몇 년간 한국의 경제 운영 방향을 독점하다시피 해왔다. 그런데 최근의 상황은 한국 경제가 위기의 블랙홀로 빠져들어가는 과정에서 이들은 거의 완전한 무능력 상태에 빠져든 상태다. 거창한 기우제를 무수히 지냈건만 몇 년째 최악의 가뭄에 시달리는 나라가 있다 하자. 그곳의 신관들은 얼마나 엉덩이가 따끔거릴까. 이 분위기 파악 못한 미네르바라는 이는 한국 정부에 의해 마땅히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게 그날 저녁자리의 중론이었다.

이것이 미네르바 사건의 ‘지구적 보편성’이지만, 이 사건의 ‘한국적 특수성’도 지적되었다. 지금 불안한 것이 한국 정부뿐인가. 이 공포 속에서도 모든 정부는 자신들의 상황 통제력이 불신당할까봐 아무 걱정 없는 것처럼 표정 관리에 골몰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한국 정부는 ‘믿거나 말거나’(oddly enough)난에 실린 이 엽기적인 사건을 벌임으로써 자신들이 얼마나 불안과 공포에 처해 있는지를 전세계에 공포하고 말았다. 여러모로 앞서가는 ‘선진화’ 정권이다.(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09. 02. 06.

 

P.S. 필자인 홍기빈 박사가 옮긴 소스타인 베블렌의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 외>(책세상, 2009)를 귀가길에 손에 들었다(같은 세대인 우석훈, 홍기빈 박사가 내가 의지하는 경제학 멘토들이다. FTA 문제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면서도 우석훈이 생태경제학이 관심이 많다면, 홍기빈의 전공분야는 지구정치경제학이다). 그가 다시 번역한 칼 폴라니의 <대변형: 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적 기원>(길, 2009)도 근간 예정인데, 덕분에 베블런과 폴라니의 경제사상에 대한 유익한 안내자를 우리를 갖게 될 듯싶다.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의 부록에는 '더 읽어야 할 자료들'로 베블런의 <유한계급론>과 함께 칼럼에서 '박사논문 지도교수'라고 언급된 조너선 닛잔의 <권력 자본론>(삼인, 2004)도 포함돼 있다. 심숀 비클러와의 공저인데, "저자들은 베블런의 '자본=권력'의 관점을 21세기까지의 현대 자본주의의 경험을 바탕으로 재해석하고 더욱 확장하여 독특한 이론을 개진하고 있다"고 소개된다.    

그밖의 책으로는 E. K. 헌트의 <경제사상사>(풀빛, 2005)와 로버트 하일브로너의 <세속의 철학자들>(이마고, 2008)이 추가된다. 전자는 "베블런의 경제사상에 대한 해설로는 한국어로 출간된 것 중에서 가장 충실하고 폭넓은 것"이라 하며, "경제사상사 입문서로서 군계일학의 위치에 있는" 후자는 "베블런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도 대단히 뛰어나다"고 평한다. 돌이켜보니 개인적으로는 유시민의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푸른나무, 1998/2004)에서 베블런의 경제사상에 관한 이야기를 인상적으로 읽고 그의 책들은 주섬주섬 몇 권 구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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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2-07 00:06   좋아요 0 | URL
베블렌은 학파가 없어졌다고 하는데 굳이 대중에게 알려진 후학을 찾는다면 갈브레이스 정도일까요? 제도학파라고 하는 이 학자들의 특징은 저술에 숫자나 도표가 없다는 것이죠.제가 가지고 있는 베블렌이나 갈브레이스 책을 봐도 정말 그래요.

로쟈 2009-02-07 00:17   좋아요 0 | URL
서문에서 역자는 신고전파와 마르크스의 자본 이론과는 다른 제3의 자본 이론으로 부각시키더군요. 베블런을 캐나다의 요크대학에서 '권력자본론'으로 계승하고 있나 봐요...

노이에자이트 2009-02-07 00:52   좋아요 0 | URL
예...미국의 마르크스 경제학자 한센은 베블렌이 마르크스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더군요.
우리나라에선 19세기 말의 미국 경제학자 중에선 베블렌보다 헨리 조지를 더 많이 연구하는 거 같아요.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한 이론제공자로 조지를 내세우는 것이지요.헨리 조지학회가 있더라구요.

로쟈 2009-02-07 21:34   좋아요 0 | URL
톨스토이의 <부활>도 헨리 조지의 영향을 받은 작품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08 15:09   좋아요 0 | URL
오호...러시아에도 영향을 끼쳤군요.
 

동네 도서관에 잠시 다녀오면서 우중충한 날씨 때문인지 프리모 레비가 생각났다. 홀로코스트에 관한 책들을 뒤적이다가 며칠 전 그의 자서전 <주기율표>(돌베개, 2007)를 비로소 펴본 탓도 있을 것이다. "우리 숨쉬는 공기 속에는 이른바 비활성 기체라고 하는 것들이 있다"란 문장으로 첫장 '아르곤'은 시작한다. 나는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았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이 비범한 전기를 아껴 읽고 싶은 마음과 차마 읽고 싶지 않은 마음이 교차해서다. 그리고 생각난 것이 며칠 전에 산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철수와영희, 2009). 재일 조선인 서경식 교수의 강연록인데, 마지막 4부는 ''솔직한 비관주의자' 서경식과 나눈 대화'로 전에 경향신문에 실린 인터뷰 기사의 전문이다. 이 기사는 작년 2월말에 '한국판 시라케 시대'(http://blog.aladin.co.kr/mramor/1938368)라고 옮겨놓은 적이 있다. 이번주 언론리뷰에 빠진 것이 좀 아쉬운데, 배본이 늦었던 듯하다. 소개기사가 없어서 작년말 '자서전 읽기'의 마지막 꼭지로 실렸던 연재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에 대한 것이다(서경식과 프리모 레비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949436 참조).  

경향신문(08. 12. 27)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

프리모 레비는 니스와 인연이 깊다. 자서전 <주기율표>(돌베개)에서 그 인연이 무엇이었는고 톺아보기에 앞서, 레비가 니스를 어떻게 정의하는지부터 알아보자. 사전적 의미에서 니스는 불안정한 물질이란다. 이 물질은 사용하는 어느 순간 액체에서 고체가 되어야 한다. 고체로 변화하는 순간이나 장소가 적절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만약 창고에 있는 동안 고체가 되면 폐기처분해야 한다. 너무 일찍 반응이 나타나면 안되는 것이다. 거꾸로 쓰고 났는데 굳지 않은 경우가 있다면, 이는 웃음거리가 된다. 너무 늦어도 안된다. 니스가 하는 일이란 무엇인고 하면, 결국은 치밀하고 단단한 망을 만드는 것이다. 

니스에 대한 설명을 듣다보면, 마치 화학으로 말하는 인생론 같다. 살아가는 것은 연금술과 비슷하다. 둘 다 비루한 것을 빛나는 그 무엇으로 바꾸고자 하는 열망을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 변화라는 열쇳말을 함께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결정적 변화가 적시적소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소용없다. 삶을 되돌아보며 회한에 빠지는 것은, 바로 이런 안타까운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파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칼바람을 맞으며 버티려면 우리를 감싸주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 갑옷은 관두고라도 삼베옷이라도 누군가 입혀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살아가면서 본의 아니게 원망과 한이 쌓이는 것은 헐벗은 채로 살아왔다 여기기 때문이리라. 곱씹어 볼수록 니스의 특징과 우리네 삶은 닮아 보인다. 



잠시 옆길로 샜다. 본론으로 돌아오자.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유대인 화학자다. 대학 재학 중 파시스트들이 만든 인종법으로 고난의 삶이 예고된다. 유대인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져 있음에도 주변의 배려로 잘 버텨나갔다. 하지만 파시즘은 예외를 두지 않았다. 저항의 길을 택했고, 그 결과 아우슈비츠로 갔다. 믿기지 않는 운과 복이 따랐다. 그 무간지옥에서 살아 돌아왔으니 말이다. 어찌 평상을 회복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인간이라는 것에 죄의식을 느꼈다.”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가까웠다. 시를 썼다. 그야말로 “피가 묻어나는 시”였으리라. 그것이 쌓여 한 권 분량이 되어가자 평온을 느꼈다.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일자리를 얻었는데, 그곳이 니스 공장이었다.

온 나라가 전쟁 후유증을 앓는데 공장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남는 시간에 글을 쓰면서 버텼다. 그러다 일이 떨어졌다. 버려진 니스 덩어리가 잔뜩 있는데, 원래로 돌리는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반은 화학자로, 반은 수사관으로” 일에 매달렸다. 젊은날, 그에게 화학은 구름이었다. 앞날을 가리는 걸림돌의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성경의 상징을 통해 무궁한 가능성을 뜻한다. “마치 시나이 산을 어둡게 둘러싼 구름” 같은 것이니, “그 구름 속에서 내 율법이, 내 내부와 내 주변, 세계의 질서가 나타나주길 기다렸다.”(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그는 과학에서 궁극적인 것을 얻으리라 기대했다. 거기에 “최고의 진리에 도달하는 새로운 열쇠”가 있으리라 믿었다. 처음에는 열쇠를 찾으려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는 열쇠를 만들기로 했다. 아니,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문을 열 거야”라고 마음먹었다. 아, 과학에 미친 어린 시절에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모든 것이 “저마다 그 신비를 밝혀달라고 졸라”대고 있었으니.

그는 이 시기에 비로소 절대 사라지지 않을 듯했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무게를 달고 나누고 측정하고 어떤 실험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그 이유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온 힘을 다하는” 화학자의 길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평생의 반려자를 만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마침내 기쁨과 활력을 안고 삶 속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 글쓰기가 그의 해방감을 더해주었다. 가혹했던 기억의 짐이 이제 희망과 기쁨의 씨앗이 되었다.

레비의 삶이 문제적인 것은 그가 훗날 자살했기 때문이다.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곳에서 돌아온 자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끊었다. 경악과 충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서경식의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창비)는 그 죽음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는 왜 죽었을까? 이 수수께끼를 푸는 데 실마리가 될 만한 이야기도 니스와 관련 있다.

생환한 지 22년이 되는 해였다. 역시 니스 관련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니스에 쓰는 수지 원료를 수입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니스를 공급한 업체는 독일의 대기업이었다. 정중하게 항의 편지를 썼지만 상대방은 뻔한 답변만 해왔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독일 쪽 책임자가 L 뮐러 박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퍼뜩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으나, 속단할 수는 없었다. 뮐러라는 이름은 남산에서 돌팔매질 하면 김씨나 이씨 집 마당에 떨어지는 격이다. 독일에서는 흔한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철자를 달리 쓰는 습관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바로 그 사람이었다, 아우슈비츠의 실험실에서 만났던.

레비는 그와 세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작업에 대한 질문만 했고, 두 번째에는 수염이 왜 기냐고 물었다고 한다. 면도기도 없고 손수건도 없는 데다, 월요일마다 떼거리로 수염을 깎는다고 대답했다. 세 번째 만났을 때 쪽지를 건네주었다. 목요일에도 면도할 수 있도록 해주고, 가죽 신발도 한 켤레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물었다. “왜 그렇게 불안해하느냐?” 기가 막힌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도저히 인류사회에서 벌어질 수 없는 방법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살육당하고 있는 현장에서, 언제든지 그 희생양이 될 수 있는 사람에게 던져서는 안될 질문이었다.

물품을 둘러싼 분쟁을 해결하면서 레비는 뮐러에게 자신의 저서를 보내주고 옛일을 기억하는지 묻는 편지를 띄웠다. 드디어 답신이 왔다. 자신이 그때 만났던 사람이 맞다며 레비가 살아남아 기쁘다고 했다. 이제 답장을 써야 한다. 예상할 수 있듯 레비는 당혹스러워한다. 특히 그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고 회고한다. 당장 “아우슈비츠는 왜? 판비츠(레비를 실험실에서 일하게 한 독일인)는 왜? 어린아이들은 왜 가스실로 가야 했는지”라고 묻고 싶었다. 편지가 오고가며 그의 고뇌는 더 깊어진다. 뮐러는 아우슈비츠의 사건들을 전 인류의 탓이라 했다. 실험실에서 일할 수 있도록 레비를 뽑은 사람이 자신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아우슈비츠의 공장이 유대인을 보호할 목적으로 운영되었고, 포로들에게 동정심을 품지 말라는 명령은 위장이었다고 말했다. 더욱이 자신은 아우슈비츠에 머무는 동안 “유대인 학살을 목적으로 하는 그 어떤 활동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고는 레비에게서 “유대정신을 극복하여 자신의 적을 사랑하는 기독교 신자의 계율을 잘 지키고 있으며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증거를 발견”했노라고 했다.

편지 어느 곳에도 진실한 반성과 참회의 마음을 읽어낼 수 없다. 개인이 막아낼 수 없는 체제의 폭력이었다고 발뺌할 따름이다. 가해 집단의 일원으로 돌팔매를 맞을 각오보다는 피해자의 용서를 서둘러 요구하는 꼴이다. 역사의 범죄 앞에서 어느 사람도 손을 씻으며 죄 없다 할 수 없는 법이다. 이미 레비의 절망은 여기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그는 편지의 초고내용을 다음처럼 썼다. 그러나 이 편지는 끝내 부쳐지지 않았다. 이탈리아로 찾아오겠다는 뮐러 박사가 급사해서였다.

“적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아마 그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그들이 후회의 표시를 보이는 경우에만, 그러니까 그들이 적으로 남아 있기를 포기한 경우에만 가능했다. 반대의 경우, 여전히 적으로 남아 있고, 남에게 고통을 가하려는 고집스러운 의지를 고수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용서해서는 안되었다.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고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겠지만(나누어야만 한다!)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일은 그를 심판하는 것이지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주기율표>는 최고의 자서전이라 평할 만큼 빼어난 책이다. 담고 있는 주제의식도 대단한데다 문장도 뛰어나다. 더욱이 삶을 연대순으로 정리하지 않고 주기율표를 원용해 글을 써나간 방식도 독특하다. 주기율표 순서대로 원소를 나열하고, 이것이 환기하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네그리 자서전 <귀환>은 알파벳 순으로 되어 있는데, 이 책의 구성도 상당히 특이하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가치를 다른 데서도 찾을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 책을 읽으며 내내 들었던 두 가지 의문이 바로 이 책의 또 다른 의미를 돋을새김해준다고 보는 것이다. 

그 하나는 우리가 과연 <주기율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교양도서로서는 잘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그렇지만 이 책에 담긴 디아스포라의 운명에 대한 절실한 이해에 과연 우리가 이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정주의 삶은 유목의 애환을 속 깊이 알 수 없다. 나는 그런 점에서 국내에 레비를 알리는 데 크게 이바지한 서경식을 주목한다. 재일조선인으로 살아가는 삶만이, 형제가 독재의 희생양이 되었던 경험이 있는 자만이 레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는 바로 이 두 층위로 레비를 읽고 있다.

또 하나는 자꾸 레비와 리차드 파인만을 비교하게 된다는 점이다. 둘 다 유대인이었는데, 유대적 전통에서 자유로웠다. 어릴 적부터 관찰과 실험을 즐겼는데, 여기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둘 다 많다. 나중에 친구하고 작은 회사를 꾸린 점도 비슷하다. 도전정신이 충만한 데다 자유로운 영혼들이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데도 그 둘이 맞이했던 운명은 달랐다. 유럽에서 살았던 한 사람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기 직전 살아 돌아왔다. 이후 과학자보다 문필가로 명성을 떨쳤다. 미국에서 살았던 사람은 노벨 물리학상을 받으며 과학계의 상징이 된다. 다시, 니스를 떠올린다. 한쪽의 반응은 예정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쪽은 제때 제대로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그렇다고 우리가 운명의 뒤웅박 팔자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개인에게 역사는 가혹하기도 하고 축복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역사는 고삐 풀린 망아지일까? 개인의 삶이 역사적 가치를 띠게끔 살았던 사람들은 그래서는 아니된다고 말하는 듯싶다. 결코 역사가 개인의 삶을 짓밟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자기의 삶을 걸고 주장하고 있다. 아마 자서전을 읽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싶다. 운명이라는 가혹한 발톱에 상처를 입고도 마침내 일가를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이니까. 그리고 그들의 성취가 개인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이웃과 공동체로 확대되는 이야기이니까. 삶은 모방이다. 그들의 삶을 뒤쫓고자 열망할 적에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법이다. 이제, 훗날 자서전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갈망해본다.(이권우 도서평론가)    

무참한 유대인 학살의 와중에 그는 운 좋게도 살아남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업무상 서신왕래를 하게 된 아우슈비츠의 학살자는 뉘우치고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을 거대한 역사와 전 인류의 탓으로 넘겼다. 진실한 반성과 참회 따위는 없었다. 적이길 포기하지 않는 적을 용서하는 것은 과연 의미 있는 일인가. 그는 과학보다 더 어려운 문제 앞에 절망했다. 삶이 던지는 수많은 모순과 불합리의 첨단에 서 있던 그가 끝없이 이루어내고, 성취하다 마침내는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궤적에서 우리는 그 고민의 일말이라도 읽어내고 우리 삶을 위한 지표를 깨달아야 한다. 

09. 02. 01.  

P.S. 페이퍼의 제목은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의 6장 제목에서 가져왔다. 루쉰의 산문<희망>(1925)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거기서 루쉰은 헝가리 독립운동 투사이자 시인이었던 페퇴피 산도르(1823-1849)의 시 '희망가'를 인용한다. "희망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매춘부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아양을 떨면서 모든 것을 바친다./ 그대의 귀중한 보배,/ 그대의 청춘을 다 바쳤을 때/ 그는 그대를 저버리노라" 그리고 루쉰이 덧붙인 코멘트. "절망이란 희망처럼 허망한 것이어라!"  

  

루쉰의 사례에서 서경식은 '희망'이란 번역어에 대한 루쉰식의 주체적 '해석'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안 그러면 다수자가 그러듯이 "그래도 희망이 있는데..."라는 식으로 "해석을 당하며" 넘어가버린다는 것. "'안 그렇다. 희망은 우리에게는 없다. 희망은 우리에게는 허망이다.' 하고 저항하고 충돌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수자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문제 제기할 수 있고, 어떤 새로운 개념으로 다가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전적으로 공감한다. 특히나 요즘, 어두운 경제 전망을 놓고 수시로 떠벌여대는 "위기가 기회다" "내년에는 국민에게 희망의 싹 보여줘야"라는 식의 수사에 넘어가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가 있다('일단 경제만 살려달라'는 여론은 또 뭔가?). 그런 '허무 개그'에 대항하여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당신들의) 기회가 우리에겐 더 큰 위기이다." "당신의 희망은 우리에겐 더 큰 허망이요, 절망이다."라고. 우리에게 희망이란 매춘부는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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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09-02-01 20:46   좋아요 0 | URL
프리모 레비... 로쟈님 덕분에 처음 알게 됐군요. 그의 책을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인용하신 기사를 읽으니 문득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 떠오르는 군요. 사실 이건 우리 현대사에서도 뼈저리게 느껴지는 문제이기도 한 것 같군요...

로쟈 2009-02-01 21:46   좋아요 0 | URL
레비의 책들은 재작년 겨울에 소개됐습니다. 생각만큼 널리 알려지진 않았나 보네요...

푸른바다 2009-02-01 22:11   좋아요 0 | URL
빅토르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는 아주 옛날부터 소개됐는데, 레비의 책들은 소개가 많이 늦었군요. 이탈리아어라는 한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얼핏드는군요. <이것이 인간이다>는 책의 제목이 의미심장하게 들리네요. 레비가 스스로 '존재하기를 멈춘 것'은 인간에 대한 절망 때문일까요..? 인성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포기하지 않았던 프랭클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로쟈 2009-02-01 22:53   좋아요 0 | URL
저로선 레비의 자살이 보다 '인간적'으로 여겨집니다. 긍정할 수 없는 것도 있는 듯해요...

virtuepeak 2009-02-01 20:41   좋아요 0 | URL
레비가 뮐러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읽으면서 루쉰의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가 떠올랐습니다.

"성실한 사람들이 부르짖는 공평한 도리 역시, 오늘날의 중국에서는, 좋은 사람을 구조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도리어 나쁜 사람을 보호해주기까지 한다. 나쁜 사람이 득세하여 좋은 사람을 학대할 때에는, 설사 공평한 도리를 부르짖는 사람이 있다 해도 나쁜 사람은 결코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부르짖음은 단지 부르짖음으로 그치고 좋은 사람은 여전히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어쩌다가 좋은 사람이 조금씩 일어서게 되면, 나쁜 사람은 본래 물에 빠져야 마땅한 것인데도, 성실한 공리론자들은 '보족하지 말라'느니, '너그럽게 용서하라'느니, '악으로써 악에 대항하지 말라'느니 하며 떠들어댄다. 이번에는 실효가 나타나서 헛부르짖음으로 그치지 않게 된다. 착한 사람은 그 말을 옳다 여기고, 그리하여 나쁜 사람은 구제 받는다. 그러나 구제 받은 뒤에 그는, 틀림없이 이득이 보았다고 생각하지, 회개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이 다른 곳에 있지 않고 희망이 사라진 곳이 곧 지옥이라 했다는데, 매춘부가 없는 곳은 지옥인가 하는 말장난 같은 생각을 잠깐 해봤습니다. ^^; 서경식의 루쉰 해석은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에 수록되어 있는 것인지요?

로쟈 2009-02-01 21:44   좋아요 0 | URL
아뇨, 바로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6장입니다. '매춘부가 없는 곳이 곧 지옥'이라는 건, 희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인데요.^^

비연 2009-02-01 22:36   좋아요 0 | URL
'주기율표'와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이것이 인간이다' 등을 읽으면서 쁘리모 레비 뿐 아니라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인생에 대해서 한동안 찾아보곤 했었죠.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무심하게 자살한 그의 최후가 내내 마음에 걸렸구요..

로쟈 2009-02-01 22:52   좋아요 0 | URL
또 다른 증언자였던 장 아메리의 <자살론>도 올해 번역돼 나옵니다. 아시겠지만 서경석 선생의 책에 두 사람 얘기가 나오죠. 아메리 또한 자살했구요...

비로그인 2009-02-02 00:50   좋아요 0 | URL
"우중충한 날씨 때문인지 프리모 레비가 생각"나셨다니 藏書家이자 학자다운 감수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

레비가 자살한 원인과 시점... 프랭클과 대비해서 생각해볼 가치가 있겠군요...

로쟈 2009-02-02 22:13   좋아요 0 | URL
장 아메리와도 비교해보아야 하구요...

모래한알 2009-02-02 07:54   좋아요 0 | URL
'이것이 인간인가'를 작년에 감명깊게 읽었는데, 기억해보니 로쟈님의 소개로 읽었던 것 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값싼 희망과는 무관하게....

로쟈 2009-02-02 22:13   좋아요 0 | URL
네, 절망을 즐기며 살고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02 15:27   좋아요 0 | URL
프리모 레비가 자살한 직접적인 원인은 독일에서 요아힘 페스트와 에른스트 놀테가 개시한 나치 상대화 작업인 것 같습니다.시기가 겹치거든요.독일 우익의 대대적인 기억선점 공작이니까요.그때문에 인간에 대해 절망한 게 아니었을까요?

로쟈 2009-02-02 22:15   좋아요 0 | URL
'직접적인' 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절망의 한 원인은 되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