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시에르의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 2007)의 '서문'에 대한 새로운 번역을 옮겨놓는다. 며칠전 컬처뉴스에 리뷰를 썼던(http://blog.aladin.co.kr/mramor/1945199) 출판기획자 이재원씨의 번역이고 그의 블로그에서 가져온 것이다. 비록 '서문'에 한정된 것이긴 하나 우리에게 주어진 국역본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가와 우리가 랑시에르를 얼마나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가를 동시에 보여준다. 참고로 문단은 편의를 위해서 원문/번역문보다 더 잘게 쪼갰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실제로 있지도 않았던 공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로 프랑스를 불안에 떨게 만드는 어느 여인, 학교에서 히잡을 벗지 않으려는 여학생들, 적자를 내고 있는 사회보장제도, 바칼로레아 제시문 중 왕좌를 차지했던 라신과 코르네유를 끌어내린 몽테스키외·볼테르·보들레르, 자신들을 위한 연금제도를 지키기 위해 시위를 벌이는 임금생활자들, 대안적 입시제도를 도입한 그랑제콜, 날로 대중화되어 가는 리얼리티 TV·동성결혼·인공수정…….

이처럼 그 성격이 이질적인 사건들을 한데 묶어 볼 수 있게 해주는 특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수많은 철학자들, 사회학자들, 정치학자들, 정신분석가들, 저널리스트들, 그리고 작가들은 진작부터 줄줄이 책과 기사와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면서 답변을 내놓고 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이 모든 증상은 동일한 질병의 발로인데 이 모든 결과들에는 오직 단 하나의 원인이 존재할 뿐이다. [역시 그들의 말에 따르면] 그 원인은 현대 대중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끝없는 욕망이 군림하는 통치체제, 즉 흔히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그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이런 비난의 독특함을 구성하고 있는지 살펴봐야만 한다. 분명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새로울 게 없다. 실상 그 증오는 민주주의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것인데,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민주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증오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에서 다수[데모스]의 지배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 속에서 정당성을 갖춘 모든 질서의 붕괴를 목도한 자들이 일종의 욕으로 사용한 단어이다.

권력이란 당연히 [남을 지배할 수 있는] 그런 운명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이나 그에 걸맞은 역량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혐오의 동의어였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신성한 법의 계시만이 인간의 공동체를 조직해 주는 유일한 합법적 토대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그러하다. 확실히 민주주의를 향한 이와 같은 맹렬한 비난은 동시대의 의제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런 비난 자체가 이 책의 목적은 아닌데, 그 이유 역시 단순하다. 나는 이런 비난을 퍼뜨리는 자들에게 전혀 공감하지 않고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과 이에 대해서 논쟁할 것도 없다.

이와 같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와 더불어, 역사는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목도하기도 했다. 이 비판은 민주주의에 뭔가 알맹이가 있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그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민주주의 비판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두 가지 형태가 존재해왔다. 먼저 귀족주의적 입법자들과 전문가들의 술수가 있는데, 그들은 민주주의를 무시할 수 없는 현실로 보고 그와 타협하려고 애썼다. 미국 헌법의 제정 과정은 이런 술수의 고전적인 예인데, 미국 헌법은 민주주의라는 현실에서 최대치를 얻어내고자 권력들을 조직하고 공공 기구들간의 균형을 맞추는 한편, 서로 동의어로 간주되는 두 가지 [공공]선(善)을 보호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엄격히 한정했다. 최선의 정부와 소유질서의 보존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런 실용적 비판의 성공은 자연스레 또 다른 비판의 성공을 북돋웠다. 청년 맑스는 공화주의 헌법의 토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소유권임을 손쉽게 폭로할 수 있었다. 공화주의 입법자들은 그런 점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맑스는 아직까지 그 원천이 고갈되지 않은 사유의 전형을 정립할 수 있었다. 형식적 민주주의의 법과 제도는 단지 외양이자 도구일 뿐으로서, 그 외양 아래서 혹은 그 도구를 통해서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들의 권력을 관철하고 있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이 외양[즉, 형식적 민주주의]에 맞서는 투쟁은 '진정한'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되었다. 진정한 민주주의에서라면 자유와 평등은 더 이상 법제도나 국가에 의해서 대표[대의]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과 감각적 경험이라는 형태 자체를 통해서 구현될 것이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이 책의 주제인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는 이 두 가지 모델에 모두 딱 들어맞지 않는다. 비록 그 두 모델에서 빌려온 요소들을 결합하고는 있지만 말이다. 이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의 주창자들 모두는 자신들이 단순히 민주주의적인 국가인 게 아니라 딱 잘라 말해 민주주의 자체라고 공언하고 있는 나라들에서 살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의 주창자들 중 더 실제적인 민주주의 같은 것을 요청하는 자는 없다. 오히려 이들은 누구나가 민주주의를 너무 많이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비록 인민들의 권력을 구현하고 있다고 자임하는 제도들에 불평을 늘어놓거나, 그런 권력을 제한하는 어떤 조치를 취하자고 주장하지는 않고 있지만 말이다.

몽테스키외, 매디슨, 토크빌의 동시대인들을 열광시켰던 제도적 장치는 이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이들이 불평하는 것은 인민들[이라는 존재] 자체, 그리고 인민들의 습속이지, 인민권력의 제도들이 아니다. 이들이 보기에 민주주의는 타락한 통치체제가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사회를 들볶고, 그럼으로써 국가를 들볶는, 문명의 위기이다. 도대체 왜 이들이 이처럼 오락가락하는지는 일견 놀랄 만한 일이다. 실제로 차이의 존중, 소수자들의 권리, 차별철폐 조치 등과 관련된 모든 악을 우리에게 퍼뜨림으로써 [프랑스] 공화국의 보편주의를 위태롭게 만든다는 이유로 미국식 민주주의를 끊임없이 비판하는 바로 그 자들은, 미국이 무력을 통해서 전세계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확산시키려고 하면 앞장서 박수를 쳐대는 자들이다.

확실히 [이와 같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중 담론은 전혀 새로울 게 없다. 우리는 여타의 모든 통치체제 중 민주주의가 최악의 통치체제라는 말을 듣는 데 이골이 나 있다. 그렇지만 [앞서 말한] 새로운 반민주주의적 정서는 이 통상적인 공식을 훨씬 더 논란을 일으킬 만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요컨대 민주주의라는 통치체제는 모든 이들이 평등하고 모든 차이가 존중받기를 원하는 민주주의 사회가 자신을 붕괴시키도록 내버려둔다면 나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달리 민주주의 사회 탓에 허약해진 개인들을 다시 결집시킴으로써 문명의 가치들, 문명들간의 충돌과 관련 있는 그 가치들을 방어하기 위한 전쟁에 활기를 불어넣는다면 민주주의라는 통치체제는 좋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이 새로운 증오가 제시하는 테제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이렇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 좋은 민주주의란 단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민주주의 문명이라는 재앙을 억압하는 민주주의이다. 이어질 본문에서 나는 이 테제의 구조를 분석하고, 이 테제가 맺고 있는 이해관계를 도출해볼 것이다. 여기서 쟁점은 동시대의 이데올로기 형태를 단순히 묘사하는 데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분석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현황을, 그리고 이 세계가 정치라는 말로써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분석은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양산한 스캔들을 명확히 이해하고, 민주주의라는 이념의 활기를 재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08. 03. 05.

P.S. 새 번역문을 읽다 보니 거듭 국역본에 유감을 표하게 된다. 그런 공적인 유감에다가 사적인 유감까지 보태고 싶은데, 알고 보니 역자는 몇몇 포스트를 통해서 번역상의 문제를 제기한 나를 명예훼손으로 이미 1월말에 고소까지 했다. '허위사실'을 유포함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훼손시켰다고. 다시 책을 펴들고 역자 서문을 보니 이런 구절이 있다. "독자가 주의해야 할 점은 저자의 반어적 표현과 반전을 거듭하는 논의 전개 방식이다. 아마도 저자는 민주주의의 혼란스러움과 반목현상을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이러한 논점을 택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7-8쪽)

이건 혹 역자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고쳐 읽게 되니 말이다. "독자가 주의해야 할 점은 역자의 반어적 표현과 반전을 거듭하는 번역 방식이다. 아마도 역자는 말도 안되는 번역의 혼란스러움과 자신의 몰이해를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이러한 번역 방식을 택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나는 그 점을 미처 고려하지 못한 듯싶다. 독자들이여, 역자를 주의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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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과학 철학 그리고 모순
    from 내가 사귀는 이들, 翰林山房에서 2008-03-06 11:06 
    * 로쟈님의 2008년 3월 5일자 페이퍼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 중에서 발췌 - 이처럼 그 성격이 이질적인 사건들을 한데 묶어 볼 수 있게 해주는 특징은 존재하지 않는다. - 이 세상에 좋은 민주주의란 단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민주주의 문명이라는 재앙을 억압하는 민주주의이다.
 
 
anathema 2008-03-06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지적한 번역 오류를 "허위사실"이라고 보는 '구체적'인 이유를 역자 백승대에게 직접 듣고 싶네요. 자신의 무식을 인정하고 더 공부할 생각이나 할 것이지.

로쟈 2008-03-06 22:5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궁금합니다.

마립간 2008-03-06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부 내용을 저의 서재에 옮깁니다.

로쟈 2008-03-06 22:50   좋아요 0 | URL
^^

닉네임을뭐라하지 2008-03-06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다른 맥락일 수도 있겠지만,
새삼 이윤기 선생의 '장미의 이름'(강유원)에 대한 대응(?)이 참 대단하다 생각되네요.

로쟈 2008-03-06 22:48   좋아요 0 | URL
번역에도 급이 있고 격이 있지요...
 

컬처뉴스에서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 2007)에 대한 리뷰를 옮겨놓는다. 이미 여러 차례 지적한 바 있지만 이 번역본은 (한국어임에도!) '읽을 수 없는 책'이다. 그걸 지적하는 게 명예훼손과 무슨 관련이 있나 싶지만 여하튼 역자는 집요하게 자신의 명예를 챙기고 있다(리뷰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나의 페이퍼는 알라딘의 책소개 페이지에서 블라인드 처리돼 있다). 한번 더 이야기하지만, 출판사나 역자나 책을 전량 폐기하고 전면 개역판을 내는 게 그나마 '명예'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싶다.  

컬처뉴스(08. 02. 29) 랑시에르, 데뷔전에서 곤욕을 치르다

“맑스주의라는 단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이단적인 사유에 대한 가장 위대한 표현들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면, 가장 이단적으로 맑스주의를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정통적인 맑스주의이다.” 프랑스의 맑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의 이 말을 살짝 비틀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알튀세르라는 이름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이단적인 맑스주의자에 대한 가장 위대한 이름들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면, 가장 이단적으로 알튀세르를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정통적인 알튀세르주의자이다.”

올해 초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2005), 『감성의 분할』(2000)을 통해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자크 랑시에르(1940~  )는 ‘이런 의미에서’ 가장 정통적인 알튀세르주의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랑시에르는 알튀세르가 『«자본»을 읽자』(1965)를 통해 화려하게 데뷔시킨 제자 4인방, 즉 피에르 마슈레(1938~  ), 로제 에스타블레(1938~  ), 에티엔 발리바르(1942~  ) 중 ‘셋째’로서 알튀세르가 그랬듯이 그 누구보다 자신의 분야에서 ‘파격적인’ 사유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공식 데뷔작 『알튀세르의 교훈』(1974)을 통해 스승과 떠들썩하게 결별한 랑시에르가 이 말을 들으면 펄쩍 뛸 일이겠지만 말이다.

랑시에르의 사유가 파격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그것은 자신의 분야, 즉 철학에 대한 그 자신의 ‘파격적인’ 정의에서 기원하지 않을까 싶다. 랑시에르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북유럽판에 수록된 인터뷰(2006년 8월 11일자)에서 철학을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저는 철학이 그 자체에게 뭔가 독특한 임무를 부여해 주는 독특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철학에는 독특한 대상이 없는 셈이죠. 따라서 저는 차라리 철학을 끊임없이 움직이는 위치/자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정의에 부합하게 랑시에르는 문학, 정치학, 미학, 역사학, 사회학, 영화학, 교육학 같은 분과학문의 주제/대상뿐만 아니라 스테픈 말라르메의 상징주의 시, 마르셀 브로타에스의 설치미술,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등을 종횡무진 넘나들며 끊임없이 움직였고, 그 여정을 통해 미학과 정치를 조우시킬 수 있는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을 주조해냈다. ‘감각적인 것의 배분/나눔’(le partage du sensible)이 바로 그것이다.

 

 

 

 

 

 

 

 

 

 

랑시에르에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치는 ‘치안’(la police)이다. 즉, 한 사회를 위계적으로 조직하고 통치하는 구조 일체가 바로 치안인 것이다. 그렇지만 치안이 단순히 어떤 구조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구체적인 권력, 예컨대 곤봉을 든 경찰력으로 상징되는 어떤 억압의 구조이기 이전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즉, 감각적인 것)을 나누고 할당하고 분배하는 상징적 구성원리이기도 하다.

이와 달리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la politique)는 치안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말할 수 없게 만든 존재들,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보편적 평등이라는 개념(“우리도 우리의 몫을 가지기에 합당한 존재이다”)에 근거해 각자의 몫을 스스로 주장하는 것이다. 즉, 치안이 만들어놓은 질서(특정한 분할선에 의거해 감각적인 것을 배분하고 나눠놓은 질서)를 거슬러 감각될 수 있는 것을 다시 나누고 할당하고 분배하려는 행위가 정치이다.

이런 점에서 랑시에르의 정치는 곧 민주주의와 동의어이며, 민주주의는 또 하나의 정치체제라기보다는 치안이 자신의 지배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우는 일체의 아르케(근본 원리)에 대한 부정이고, 아르케에 대한 이런 부정은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라는 평등의 공리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랑시에르에게는 정치=민주주의=평등의 공리인 셈이다.

또한 정치든 치안이든 감각적인 것의 나눔/배분을 둘러싸고 형성되기에 랑시에르에게는 정치=미학이다. 단 이때의 미학은 통상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미학이 아니라 그 어원에 충실한 미학이다. 즉, ‘감각적인 것’ 혹은 ‘감각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to aisthêton’에 충실한 미학(‘감각학’으로서의 미학) 말이다. 이렇듯 랑시에르에게 미학과 정치의 조우는 그 상동성(相同性)의 발견으로 가능해진다.

랑시에르의 저작으로서는 국내에 처음 소개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2005)는 정치=민주주의=평등의 공리, 그리고 감각학으로서의 미학=정치학이라는 자신의 두 가지 테제에 근거해 랑시에르가 당대의 프랑스 정치현실에 카운터펀치를 날리는 작품이다.

그 정치현실이란 길게는 실업자운동이 대규모로 일어난 1995년 이후부터, 짧게는 2001~05년 프랑스에서 벌어진 정치현실로서, 프랑스 내에서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프랑스 공화주의가 자랑스러워하는 “자유, 평등, 박애”를 자신들에게도 적용하라고 외치면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민주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지식인들이 “그런 건 민주주의가 아니야”, “민주주의는 원래 이런 거야”라고 말하며 민주주의의 요구(즉, 평등의 요구)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찬물을 끼얹고 있는 세태를 말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국역본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서 전혀 이런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건드리기에 따라 ‘엔(사타구니/aine)만큼 후끈 달아오를 ‘엔’(증오/haine)을 소재로 삼고 있는 이 책의 날카로움을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을 만큼 무디게 만든 번역 탓이다. 흔히 『국가』와 『정치가』로 옮겨지는 플라톤의 저서를 『공화주의』와 『정치』로 옮겨놔 독자들을 헷갈리게 만드는 것은 그냥 그렇다고 쳐도,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낳은 정세 자체에 대한 무지는 조금 참기 어렵다.

가령 랑시에르가 이 책의 목적을 소상히 밝히고 있는 서론의 첫 번째 문단부터 문제가 심각하다. “가상의 침략 이야기를 꾸며내서 프랑스를 조마조마하게 하는 젊은 여인, 학교에서 자신의 가면을 벗지 않으려는 청소년들 …… 초등학교는 평준화에 근거한 평범화 교육을 창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이렇게 옮겨져야 한다. “실제로 있지도 않았던 공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로 프랑스를 불안에 떨게 만드는 어느 여인, 학교에서 히잡을 벗지 않으려는 여학생들 …… 대안적 입시제도를 도입한 그랑제콜.”

『민주주의 대한 증오』의 옮긴이가 “가상의 침략 이야기”로 옮긴 사건은 지난 2001년 7월 11일, 어느 23세의 여성이 파리의 지하철에서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보이는 6명의 흑인들에게 유태계라는 이유만으로 자신과 자신의 13개월된 아기가 폭행당했다고 경찰에 신고해 프랑스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을 말한다(*영역본 주석에는 2004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소개됐다). 이로 인해 정치권에서는 국내 치안의 문제는 이주민들 때문이라는 극우적 주장들이 빗발쳐 나오곤 했는데, 며칠 뒤 CCTV에 당시 사건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경찰의 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이 여성의 진술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두고 논란이 발생한 바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옮긴이가 “자신의 가면을 벗지 않으려는 청소년들”이라고 옮긴 에피소드는 지난 2004년 3월 14일 프랑스 의회가 공립학교에서 모든 종교적 상징물의 착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압도적인 찬성 표결로 통과시켜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이슬람 여학생들의 히잡 착용 문제를 말한다. 히잡은 이슬람 여성들이 머리에 두르는 스카프이기 때문에 “가면”이라고 옮기면 안 된다. 가면이라고 부를 만한 다른 이슬람 상징물은 부르카(안면 가리개)이다. 또한 이슬람 남자들은 히잡을 착용하지 않기 때문에 두루뭉수리하게 “청소년들”이라고 옮기면 원래의 맥락을 전혀 파악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옮긴이가 “초등학교”로 옮긴 그랑제콜(Grandes Écoles)은 프랑스의 소수 엘리트 양성기관이다. 그랑제콜에 입학하려면 그랑제콜 준비과정에 입학해야 하는데, 이 준비과정에 들어가려면 바칼로레아(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성적이 상위 5% 이내에 들어야 한다. 그러고도 준비과정에서 2~3년을 더 준비해 과목별로 한 달간에 걸친 엄격한 경쟁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그런 그랑제콜의 하나인 파리고등정치학교가 지난 2001년 경제적으로 열악한 지역 출신의 학생들을 필기시험 없이 면접과 서류전형만으로 뽑는다는 새로운 입시계획안을 발표했고, 이는 극심한 찬반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랑시에르는 이처럼 얼핏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에 대해 수많은 지식인들이 내놓은 단 한 가지 답변, 즉 “이 모든 증상은 동일한 질병의 발로인데, 민주주의가 바로 그것이다”라는 답변을 내놓았다고 말하며 포문을 열기 시작한다. 그러나 역시 안타깝게도, 우리는 공공연히 민주주의를 증오하는 자들에게 랑시에르가 뿜어대는 그 십자포화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지면의 한계로 더 쓸 수 없으니 자세한 것은 알라디너 로쟈님의 페이퍼(“반목의 철학, 불화의 번역” http://blog.aladin.co.kr/mramor/1911702)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관심 있는 분들은 좀 귀찮더라도 영어본이나 불어본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이것마저 여의치 않은 분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의 요약본이라고 할 만한 랑시에르의 논문 「민주주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가?」를 읽으시면 되겠다. 이 논문은 『아듀 데리다』(맥밀란/2007)라는 데리다 사망 추모 강연회 논문모음집에 수록되어 있다(문제는 이 책이 비싸다는 것이다. 74.95달러. 정치의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지식의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것도 돈이다!).

더욱 더 안타까운 것은 이 하자 많은 국역본이 꽤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기현상’은 이 국역본의 완성도보다 랑시에르의 사유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그만큼 높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텐데, 마지막으로 책을 사놓고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몰라 자신을 책망할 몇몇 독자들을 위로하며, 그리고 한국어를 읽을 수 없는 랑시에르를 축하하며 한마디. “랑시에르 선생님, 욕보십니다.”(이재원_출판기획자) 

08. 02. 29.

P.S. 이미 관련기사들을 옮겨놓기도 했는데, 랑시에르는 아감벤과 함께 올 한해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가 될 것이다. 그럴 만한 것이 그의 책들이 한꺼번에 앞다투어 소개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물론 '문제적인' 철학자의 새로운 사유가 우리말로 번역/소개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리뷰의 제목대로 그의 '데뷔전' 성적은 별로 좋지 못하다(이 점은 <호모 사케르>가 깔끔하게 번역돼 나온 아감벤과 대조된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뿐만 아니라 <감성의 분할> 또한 기대에 훨씬 못 미친다. '분할'이란 제목부터 '분배'나 '배분'으로 옮겨지는 게 더 적절했을 것이다(영어로는 'distribution'). 이 책 또한 불어본이나 영어본과의 대조없이 읽어나가는 건 고난도의 독해력을 요구한다. 앞으로 나올 다른 책들의 사정은 좀 나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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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사랑 2008-02-29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하신 부분에 공감합니다. 그런데 참 희한한 현상인데 올해 자크 랑시에르 책이 쏟아져나올 듯 합니다. "정치의 가장자리에서" "불화" "무지의 스승" "역사의 이름들" "프롤레타리아의 밤들" "이미지의 미래"...
지젝 책이 거의 모두 우리에게 소개되었지만 랑시에르처럼 한 해에 이렇게 많이 쏟아져나오는 현상은 무엇일까요? 하여간...기대해봅니다.

로쟈 2008-02-29 22:50   좋아요 0 | URL
희한한 '한국적' 현상이겠죠. 우리에게 자극을 줄 만한 철학서들이 쏟아져나오는 건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최소한 '읽을 수 있는 책'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베토벤 2008-03-01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만일 이 책이 파리 몇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에 의해서 번역이 되었는데도 이 정도라면 개인적인 수준을 넘어서 뭔가 제도적으로
한국 출신의 학생들의 스칼라쉽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우려를 가질 뻔했기때문입니다. 다행히 증권가출신이면서 프리랜서로 활동셨더군요. 그래서인지 '그럴만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프리랜서 번역가 분들을 무시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 분 개인에 국한하자면 말이지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문선 책들중에는 박사급 번역자가 번역한 책들중에도 만만찮은 책들이 있었으니 다시 우울해지려고 합니다.

로쟈 2008-03-01 09:02   좋아요 0 | URL
'파리 몇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들의 이상한 번역서도 드물진 않은데요.^^; 일희일비할 일은 아니고, 좋은 역자들이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여건을 변화시키는 게 중요해보입니다...

람혼 2008-03-01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 <감성의 분할>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매우 반가운 마음에 들면서도 구입이 망설여졌던 것은, 일차적으로 바로 그 제목의 번역 때문이었습니다. 이 국역본이 출간되기 전에 랑시에르의 <문학의 정치>를 소개하면서 저도 잠시 언급했던 바이지만(http://blog.aladdin.co.kr/sinthome/1840783), 'partage'의 번역어가'분배'나 '배분'이 되어야 한다는ㅡ즉, 단순한 '분할'이 아닌 '할당'의 뉘앙스까지를 포함해야 한다는ㅡ말씀에 적극 동감합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역자가 단순히 '감성'이라고 옮긴 'le sensible'의 번역 역시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데요, 이는 '감각적인 것'이라고 '적확히' 번역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지적할 수 있겠지만, 가장 일차적으로는, '감각적인 것'을 단순히 '감성'으로 옮기는 '번역적 센스' 안에는 '미학'이라는 분과를 가장 '근대적인' 사유의 소산이자 '역사적' 구성물로 바라보려는 '초월적' 시각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곧 제목의 번역을 볼 때부터, 미학이 지닌 '감각학/감성학'으로서의 기원에 대한 적극적인 고려가 과연 번역에 반영되었을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었죠. 그나저나 로쟈님의 글이 '명예훼손'이라면 이재원 선생의 이 글도 그렇겠군요? 조금 바쁜 일들이 지나가고 시간이 좀 날 때, 저 역시 국역본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와 <감성의 분할>을 함께 묶어 글 하나 써서 저 '명예훼손'의 대열에 동참해볼까 합니다.^^

로쟈 2008-03-01 11:45   좋아요 0 | URL
'법정'에서 심심하진 않겠습니다.^^ '감각적인 것'이 보다 정확한 번역이라는 데는 저도 동감합니다. 문제는 우리말로 익숙하지 않은 용례라는 것이죠(본문에선 또 너무 자주 나오는 용어이고). 비슷한 예로 '정치적인 것'이란 용어가 최근 들어 조금씩 쓰이고 있지만 어차피 그 말 자체로는 의미가 소통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아직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다룬 바 있다. 그의 책들이 올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때문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1890626).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 2007)에 이어서 <감성의 분할>(도서출판b, 2008)이 연이어 출간됐고 앞으로도 몇 권의 책이 더 소개될 예정인 것으로 안다. 어떤 책들인가 궁금하신 분들은 한겨레의 리뷰를 길잡이 삼아 읽어보실 수 있겠다. 

한겨레(08. 02. 16) '반목의 철학’ 랑시에르의 ‘배제된 자를 위한 정치’

자크 랑시에르(사진)가 국내 지식계에 출몰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 철학자의 이론은 다른 여러 프랑스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까다롭고 불친절하다. 익숙한 관념에 매달리는 사고의 관성을 깨뜨려 새로운 생각의 지평을 여는 일은 친절한 방식으로는 될 수 없다고 믿는 듯하다. 흐릿한 안개 속에 겨우 윤곽만 보인 랑시에르의 철학적 사유를 좀더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책이 한 달 사이에 잇따라 번역됐다.

먼저 나온 2005년 저작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 펴냄)와 이번에 출간된 2000년 저작 〈감성의 분할-미학과 정치〉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랑시에르 저작들이다. 특히, 프랑스에서 랑시에르를 공부한 오윤성씨가 번역한 〈감성의 분할〉은 옮긴이의 소개문과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발문(‘랑시에르의 교훈’), 그리고 랑시에르 용어 해설을 부록으로 달아, 랑시에르를 이해하는 데 길잡이 구실을 해준다.

1940년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공부한 랑시에르는 전형적인 ‘68혁명 세대’ 좌파 이론가이자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주창자 루이 알튀세르 문하 출신의 철학자다. 65년 알튀세르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펴낸 〈‘자본’을 읽자〉에 공저자로 참여했던 랑시에르는 68혁명의 열기 속에서 알튀세르를 떠나 프랑스 마오쩌둥주의로 옮겨간다. 그를 유명인사로 만든 사건은 〈알튀세르의 교훈〉(1974) 출간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알튀세르가 자신의 지적 지배 위치를 지키고 지식 엘리트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만 관심을 쏟는다고 비난했다. 학문적 부친 살해라 할 이 책을 통해 그는 옛 스승 알튀세르와 떠들썩하게 결별했다. 이런 거침없는 도발 때문에 그는 ‘반목의 철학자’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의 철학적 사유의 여정은 대체로 ‘정치’와 ‘미학’ 두 단계로 나뉜다. 박사학위 논문인 〈프롤레타리아의 밤〉(1981)에서부터 그의 정치적 사유가 응집된 〈불화〉(1995)까지가 ‘정치’ 단계라면, 96년 이후 문학·영화·예술에 관한 저술들은 ‘미학’ 단계를 이룬다. 이 미학 시기에도 그는 정치철학적 저작들을 몇 권 펴냈는데,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가 그 가운데 하나다. 또 같은 시기에 출간한 〈감성의 분할〉은 부제가 보여주는 대로 미학과 정치를 동시에 주제로 삼은 저작이다.

랑시에르 철학의 독특한 영역은 민주주의와 평등이라는 낯익은 개념을 둘러싼 ‘정치’의 재해석에서 발견된다. 통상 자유주의 정치세계에서 정치는 이해가 상충하는 개인 또는 집단 사이에서 조정을 통해 합의를 끌어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보기에 이런 과정은 정치가 아니다. 이미 정치적 주체로 받아들여진 공동체 주체들 사이의 통치 행위일 뿐이다. 그의 용어로, 이런 정치 과정은 기존 사회질서 유지를 목표로 하는 ‘치안’에 해당한다. 진정한 정치 또는 본래의 정치는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에 있다.

이를테면, 프랑스 혁명기에 귀족과 교회의 지배에 대항했던 ‘제3계급’이 그런 주체화 과정을 보여주었으며,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은 정치의 본래 모습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귀족계급 또는 과두지배자들에 맞선 ‘데모스’(인민)의 등장이야말로 정치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주체화란 지배 질서 안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자신들의 존재와 목소리를 보이게 하고 들리게 하는 것, 정치적 대화와 권력의 행사에서 정당한 상대자(파트너)로 서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랑시에르가 말하는 ‘본래의 정치’다.

〈감성의 분할〉은 그런 정치의 문제를 ‘미학’(감성학)의 엑스레이를 투과해 보여주는 책이다. 여기서 ‘감성’이란 감각되고 감지되는 것, 다시 말해 우리의 오감을 통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그 감성이 분할된다는 것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들이 나뉘어 어떤 부분이 배제된다는 것, 그리하여 존재하기는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랑시에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를 들어 이 문제를 설명한다. “말하는 동물(곧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그러나 노예는 그가 언어를 이해할지라도 그 언어를 ‘소유’하고 있지는 않다.” 노예는 ‘말하는 동물’에서도 ‘정치적 동물’에서도 배제돼 보이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이 배제를 뚫고 일어서 자신이 언어를 되찾고 자신을 보이는 자리에 세우는 것이 말하자면 랑시에르적 정치다.

지젝은 랑시에르 철학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랑시에르의 사유는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현실적이다. 좌파가 방향감각을 상실한 우리 시대에, 그의 글쓰기는 ‘어떻게 우리는 저항하기를 계속해야 하는가’에 대한 소수의 견실한 개념화들 가운데 한 가지를 제안한다.”(고명섭 기자)

08. 02. 15.

P.S. 서두에 언급된 대로 랑시에르의 이론은 "다른 여러 프랑스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까다롭고 불친절하다". 무얼 번역한 것인지 의문스러운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말할 것도 없지만 <감성의 분할> 또한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해서 예전에 복사해놓은 영역본(<미학의 정치학>)을 지난주부터 찾았지만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다. 갑갑합을 달래려면 한번 더 복사하든지 해야 할 모양이다(그렇게 되면 세 번 복사하는 것이 된다. 분량은 100여 쪽에 불과하지만).

  

사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역시 나는 영어본을 두 번 복사해야 했다. 먼저 복사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아서였다. 당장 손에 들었을 때 읽고 정리해놓지 않으면 기억과 시야에서 멀어지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지금도 여기저기 뒤적여서야 겨우 영어본을 다시 찾았다. 몇 자 적기 위해서이다.

국역본의 경우 나는 지난달에 30-40쪽 정도 읽다가 덮어버렸다. 교정해가며 읽을 만한 수준도 안된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래서 적은 40자평이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지 간에 그 이상의 오역을 읽게 될 것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1830514)인데 이게 "번역자의 명예와 신망을 훼손하는 게시물"이란 역자의 항의에 따라 블라인드 처리됐다. 알라딘의 방침이 그러하다고 하니 따로 왈가왈부하진 않겠다. 대신에 나대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겠다. 번거로운 일이지만 내 판단의 몇 가지 근거를 나열하는 것이 그 '대응'이다.

'서론'에서 랑시에르는 2001년부터 2005년 사이에 프랑스 사회에서 벌어진 몇 가지 현상들을 나열한다(이 책의 불어본은 2005년에 나왔다). 그 중 하나가 "초등학교는 평준화에 근거한 평범화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14쪽)이고 영어본에 따르면 이것은 "a Grande Ecole creates an alternative entrance schemes"을 옮긴 것이다. 믿기지 않는 노릇이지만 역자는 'Grande Ecole'을 '초등학교'로 옮긴 것이고 이건 그가 '그랑제콜(그랑제꼴)'이 뭔지도 모른다는 게 된다(불어책을 번역한다는 역자가 어떻게 프랑스 학제의 기본 상식도 모를 수 있는가?). 

알다시피 '그랑제콜'은 '초등학교'이기는커녕 '대학 위의 대학'으로 프랑스의 소수정예 엘리트를 양성하는 기관이다. 그러니 어처구니 없는 오역이지만 나름대로 진실, 무의식적인 진실을 드러내주긴 한다. '그랑제콜' 수준의 책을 '초등학교' 수준으로 번역해놓고 있다는.

내 식으로 다시 옮기면 "한 그랑제콜은 대안적인 입학제도를 도입했다" 정도이다. 그렇게만 적어놓으면 프랑스 독자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먹겠지만 우리에겐 상황 설명이 좀 필요하다. 영어본 주석에 따르면, 2001년초에 정치분야 그랑제콜의 하나인 '씨앙스포(Sciences Po)'가 소외계층 학생들을 위한 새로운(대안적인) 입시안을 도입했다고 한다. '학력' 외에 다른 변수를 고려한 것이고(가령 서울대의 농어촌 특별전형 같은) 랑시에르에 따르면 이러한 '평등에의 요구'들을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결부시킨다("이게 다 민주주의 탓이야!"). 물론 이런 정황에 대해 역자가 이해하고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이어지는 번역이 이렇기 때문이다.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가 신선한 화두는 아니다. 단순한 존립근거에 기반한 민주주의만큼이나 이에 대한 증오 역시 오랜 세월 쌓여왔다. 그렇기에 이 용어는 생성과 동시에 용어 자체에 증오심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15쪽)

"Hatred of democracy is certainly nothing new. Indeed it is as old as democracy itself for a simple reason: the word itself is an expression of hatred."(2쪽)

'단순한 존립근거에 기반한 민주주의'? 영어본에 따르면 그저 '단순한 이유'란 뜻이다. 대체 어떤 번역으로 읽는 게 수월한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분명 새로울 게 없다. 실상 그 증오는 민주주의 자체 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 그러한데, 민주주의란 말 자체가 증오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건 그 부연설명인데, 아무리 '번역'이라고 해도 우리가 꼭 이런 식의 한국어 문장을 읽어야겠는가?

"최초에 이 용어는 고대 그리스에서 발명되었는데, 거기에는 극천박한 대중정부에 의해서 정당한 위계질서가 철저히 붕괴되는 것을 목도한 그리스인의 경멸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용어는 사람의 권능에 비례해서 호칭되고 출신가문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었던 사람들의 권한으로부터 탈피하는 것만이 진정한 권력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동의어로 남아 있다."

"It was, in Ancient Greece, originally used as an insult by those who saw in the unnameable government of multitude the ruin of any legitimate order. It remained synonymous with abomination for everyone who thought that power fell by rights to those whose birth had predestined them to it or whose capabilities called them to it."

영어본에 준해서 다시 옮기면 이렇다: "민주주의(데모크라시)란 말은 고대 그리스에서 원래 다수(데모스)의 정부라는 말도 안되는 정부에서 모든 합법적 질서의 붕괴를 목도한 자들이 일종의 욕으로 사용한 말이다. 권력이란 게 태어날 때부터 운명 지워진 자들이나 그에 걸맞은 역량을 갖춘 자들에게만 속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란 말은 혐오와 동의어로 남았다."

'익명적 다수'를 뜻하는 'multitude'는 요즘 '다중'(네그리)으로 옮기지만 'unnameable government of multitude'를 그냥 '다수의 정부라는 말도 안되는 정부'라고 풀어서 옮겼다. 민주주의의 비판자들에게 '다수의 지배'는 어불성설이라는 얘기이다(혹은 반대의 경우이긴 하지만, 현재의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해 의혹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도 그렇겠다. 민주주의라곤 하지만 실질적으론 과두제 아니냐는). 참고로, 민주주의의의 어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데모스demos는 '사람들(people)' 곧 '어중이떠중이'을 뜻하고 크라토스kratos는 '권력(force, power)을 뜻한다. 그걸 결합한 '데모크라시'란 고대 그리스에서 일종의 '욕'이었다는 것. "에잇, 민주주의 같으니라구!" 

"그런데도 이 용어는 인간 공동체 편재(遍在)의 유일한 합리적 근거로서 인정받는 신성한 율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지금까지도 존속하고 있다."(15쪽) "And it still is today for those who construe revelations of divine law as the sole legitimate foundation on which to organize human communities."

역시나 말도 안되는 번역문이다. 불어본 구문이 어떻게 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영어본은 생략문이다. "it still is today for those who-"라는 건 "it still is synonymous with abomination for those who-"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성한 율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민주주의란 말이 지금까지도 존속하고 있다고? 이런 엉터리 번역이 계속 존속하는 건 독자들이 "번역자의 명예와 신망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 개의치 않기 때문은 아닌가?(그래서 나는 역자들만의 책임이 아니라고 본다. 독자들에게도 방관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랑시에르의 명예와 신망을 위해서 다시 옮기면 "그리고 민주주의는, 신성한 법의 계시만이 인간 공동체 구성의 유일한 합법적 근거라고 간주하는 자들에겐 여전히 혐오와 동의어이다." 

책의 제목 자체는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혐오를 염두에 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내용을 번역본에서 간취하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몇 걸음도 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 이어서 민주주의 비판을 다루고 있는 대목.

"역사는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즉 민주체제에 관한 비판 형국을 경험해 왔다. 민주체제를 비판할 수 있는 권리는 존재했었지만 그 한도는 있게 마련이었다."(15-6쪽) "Alongside this hatred of democracy, history has born witness to the forms of its critique. Critique acknowledges something's existence, but in order to confine it within limits."

번역문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즉 민주체제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여 둘을 동일시했지만 '증오'와 '비판'은 구별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와 함께 역사가 보여주는 건 민주주의 비판의 형태들"이라고 돼 있기 때문이다. "이 비판은 무엇인가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단지 그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이 비판의 두 가지 형태(양상)만을 더 따라가본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이 체제의 두 가지 주요 양상을 혹평한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실세로 인정받고 있던 민주주의와 타협하길 원하던 귀족출신 의원들 및 학자들의 계략이 그 한 양상이다. 또 다른 양상은 미국 헌법제정에 관한 것인데, 이는 민주주의라는 실제로부터 짜낼 수 있는 최선의 개념 추출을 지향하는 제도적 메커니즘의 전형으로서, 추출된 개념의 균형과 그 효력 배합작업의 전형을 의미한다. 이렇게 추출된 개념 모두 두 가지 축을 보존하기 위해서 엄정한 심사를 거친 후에 미국 헌법의 토대를 이루었는데, 양대 축이란 최선정부(best government)와 소유자 위계질서의 수호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16쪽)

번역문에 따르면 이 두 가지 형태(양상)가 '귀족출신 의원들 및 학자들의 계략'과 '미국 헌법제정에 관한 것'으로 돼 있지만 마르크스로 대표되는 두번째 비판의 형태의 아직 언급되지도 않았다. 인용문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건 전체가 한 가지 '양상'인 것이다. 이런 번역에서 대체 무얼 읽으라는 것인가? 역자는 '최소한의 성의도 인정하지 않는' 40자서평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던 듯한데 내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성의'는 '엄정한 심사를 거친 후에' 이런 함량 미달의 번역서는 내지 않는 것이다. 인용문을 영어본으로라도 다시 읽어보면 이렇다.

"There have been two great historical forms of critique of democracy. There was the art of aristocratic legislators and experts who strove to make a compromise with democracy, viewed as a fact that could not be ignored. The drawing up of the United States constitution is the classic example of this work of composing forces and of balancing institutional mechanisms intended to get the most possible out of the fact of democracy, all the while strictly containing it in order to protect two goods taken as synonymous: the government of the best, and the preservation of the order of property."(2쪽)

문장이 조금 길어서 얼핏 난해해보이지만 국역본처럼 난감하지는 않다. 다시 옮기면 "민주주의 비판에는 역사적으로 두 가지 큰 줄기가 있어 왔다. 먼저 귀족주의적 입법자들과 전문가들의 술수가 있는데, 그들은 민주주의를 무시할 수 없는 현실로 보고 그와 타협하려고 애썼다. 미국 헌법의 제정은 민주주의라는 현실로부터 최대치를 얻어내고자 권력들을 조직하고 공공 기구들간의 균형을 맞추면서 한편으론 서로 동의어로 간주되는 '최선의 정부'와 '소유권 질서의 보존'이라는 두 가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민주주의를 엄격하게 한정한 고전적인 예이다."

'민주주의라는 현실'로 옮긴 'the fact of democracy'란 말은 '주어진 현실로서의 민주주의'란 뜻으로 나는 이해한다. 요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경우 민주주의의 최대치를 보장하는 듯하지만 한편으론 그것을 더 큰 가치(재산)의 보호를 위해 제약하고 있다는 것. 민주주의 비판은 이런 식으로 민주주의의 존재 자체, 즉 그것의 부인할 수 없는 현실성과 대세는 인정하지만, 그 인정은 동시에 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한 지적과 제약의 필요성으로 귀결된다. 해서 "민주주의는 이론적으로 좋은 제도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라는 구문이 민주주의 비판의 전형적인 틀이 되겠다(알다시피 유신 정권이 내세운 '토착적 민주주의'도 이와 동일한 구문과 논리를 갖고 있었다). 번역문에서 이러한 내용을 읽을 수 있는지 지극히 의심스럽다. 한 대목만 더 읽어본다.

"이같은 구도 속에서 행해진 민주체제에 관한 비판은 성공을 거두었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반민주주의 세력의 성공 자양분이 되어왔던 것이다. 젊은 마르크스는 공화주의 체제의 기본 원리인 소유권 지배구조를 파헤치는 작업에 거리낌이 없었다. 게다가 공화국 의원들 누구도 이 사실을 은폐할 수 없었다. 여하튼 마르크스는 지금도 소진되지 않고 있는 한 표준 이념을 확립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형식에 얽매인 민주주의의 법과 제도가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행사 매개체에 불과하며, 이런 영향력 하에서 법과 제도는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파악했었다."(16쪽)

"The success of that critique en acte naturally fuelled the success of its contrary. The young Marx had no troubles exposing the reign of property lying at the foundation of the republican constitution. The republican legislators had made no secret of it. But in so doing he was able to set a standard of thought whose resources have not yet been exhausted: the notion that laws and institutions of formal democracy are appearances under which, and instruments by which, the power of the bourgeois class is exercised."(2-3쪽)

민주주의에 대한 또 다른 비판자는 청년 마르크스이다. 미국식 민주주의 혹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성공은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의 민주주의 비판을 유효하게 만들었다는 것. 'critique en acte'는 'critique in action'의 뜻으로 보인다. '진행/작동중인 비판' 정도일까.

다시 옮기면, "이러한 실효적 비판의 성공은 자연스레 그 반대파의 성공을 가져왔다. 청년 마르크스는 공화주의 체제의 토대에 소유권의 지배가 놓여 있음을 손쉽게 폭로할 수 있었다. 공화주의 입법자들은 그러한 점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마르크스는 한 가지 표준적인 사상을 정립할 수 있었고 이 사상의 원천은 아직도 고갈되지 않았다. 그것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법과 제도는 단지 외양일 뿐이고, 그러한 외양 아래서 혹은 그러한 외양을 통해서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이 관철되고 있다는 사상이다."

마저 읽어본다.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가 더 이상 국가 및 법에 근거한 체제를 대표하지 못했을 때 겉치레에 대한 투쟁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한 방안이 되었지만, 감각적 경험법칙과 금전본위의 생활양식에 의해서 민주주의는 정형화되었다."(17쪽) "The struggle against appearances thus became the path leading to 'real' democracy, where liberty and equality would no longer be represented in the institutions of law and State but embodied in the very forms of concrete life and sensible experience."(3쪽)

비교해서 읽어보면 알겠지만 국역본의 번역은 한마디로 넌센스다. '감각적 경험법칙과 금전본위의 생활양식'? 여기서 제시되는 '진정한 민주주의' 상을 과연 독자가 읽어내는 게 가능한 것인지? 다시 옮기면, "외양만의 형식적 민주주의에 대한 투쟁은 그리하여 '진정한'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되었다. 진정한 민주주의에서라면 자유와 평등은 더이상 법제도나 국가에 의해서 대표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과 감각적 경험 자체를 통해서 구현될 것이다."    

여기까지가 영어본으로 치자면 서론의 두 문단이고, 분량으론 한 페이지 반 정도이다. 국역본은 시종 이런 식이니 어떻게 읽을 수 있겠는가?(오역학의 교재로서는 아주 유용하겠다.) 바로 이어지는 문단의 첫문장만 읽어본다. "이 책의 화두 민주주의에 대한 미숙한 증오는 민주체제의 어떤 모델에 대해서도 관대하게 기술하진 않을 것이다. 비록 각각의 증오들이 어색하게 결부되어 있을지라도." 대체 무슨 소리인가? 당신은 이해할 수 있는가? 역자는 이런 문장에 '자신의 명예와 신망'을 걸 수 있는가?

영어본의 문장으론 "The new hatred of democracy that is the subject of this book does not strictly fall under either these model, though it combines elements borrowed from both."이다. 다시 옮기면, "이 책의 주제인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는 엄격하게 말하면 이 두 가지 모델에 다 들어맞지 않는다. 비록 그 두 모델로부터 빌려온 요소들을 결합하고는 있지만 말이다." 정도이고.

번역에 대한 새로운 증오가 솟구치기 전에 그만 적어야겠다(이후에도 각종 난이도의 오역들이 속출한다). 이런 식의 번역이라면 어떤 독자라도 관대하게 평하기 어려울 것이다(*알라딘 관계자가 전한 역자의 말은 진의와 다르다고 하여 삭제함). 그냥 이 정도 번역이면 아직까지는 괜찮다는 것인가?..

08. 02. 15-16.

P.S. 이 페이퍼 또한 역자의 요구에 따라 책소개 페이지에서 '삭제'되었다. 입에 쓰면 뱉는다는 식인가 보다. 상식이 있다면 눈 가리고 아웅하기 이전에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을 전량 수거해서 폐기처분하고 개역판을 내야 한다는 게 나의 '몰상식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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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 / 02 / 29
    from Le mai 3 : The R Review 2008-02-29 21:20 
    방학동안 한 일이라곤 Monthly Review에서 몇몇 에세이를 들여다 본 것과,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영어로 조금씩 들떠본 것 밖에는 없다. 당장 오늘이 지나면 3월인데, 정말 손에 꼽을 만큼 한 일이 없다. 푸념은 이제 그만하고. 오늘 랑시에르의 책을 읽다가 도저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럴 것 같아서 영어판을 비싼 돈 주고(!) 사 두긴 했지만, 최소한 어느 정도는 말이 되게 번역했겠지 싶은 마음이 조금은 있었다..
 
 
xnekans 2008-02-16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책이 나왔다기에 서점에서 살펴보다가, 책의 어느 부분에서 Ulrich Beck을 얼리치 벡이라고 적어놓은 것을 보고 바로 던져두고 왔더랍니다. ㅎ 원래 저렇게 읽는 건가, 순간 자신없어지기도 했지만... ㅎ <감성의 분할>도 읽으면 읽을수록 미심쩍은 순간들이 종종 있더군요. 결국은 이러나저러나 영어본을 꺼낼 수밖에 없겠더군요. 후.

로쟈 2008-02-16 11:08   좋아요 0 | URL
색인에는 없어서 몰랐는데, '얼리치 벡'이라니 우습군요. '얼치기 번역'의 여러 징후들이라고 할 밖에요...

안용태 2008-08-20 0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책이 저렇게 오역 투성일 줄이야. 정말 관심이 많은책이라 사서봤었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가서 걍 내 무식을 탓하며 접었더랬죠.

근데 저런 오역이 문제였다니... 쩝... 할말이 없군요.

그랑제꼴을 초등학교로 옮긴부분 할말을 잃었습니다. 그랑제꼴이 어떤곳인지는 정말 먼나라 이웃나라만 열심히 봤더라도 다 아는 사실인데..

알라딘에서 저 책 소개엔 로쟈님 글이 안보이던데 블라인드 처리했을줄이야..

조금만 이글을 더 빨리봤더라면 국역본을 안사고 걍 영어본을 샀을텐데요..

로쟈 2008-08-20 07:53   좋아요 0 | URL
너무 늦게 보셨군요.^^; 참고로, 더 자세한 번역비평은 람혼님의 서재에 있습니다...

바르타쉐비치 2010-01-09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학동안 랑씨에르를 탐독할려고... "감성의 분할","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무지한 스승", 문학의 정치","미학 안의 불편함"을 모조리 샀답니다. '감성의 분할"을 20장도 채 읽지 못하고... "문학의 정치"를 펴 들었는데 그것도 마찬가지였어요. 그저 나의 무지 탓이려니 하다가... 아침에 로쟈님 검색창에 랑씨에르를 쳤더니... 이런 글들이 있네요.
물려 달라고 해야하나... 그래도 아직 못 펼쳐 본 책에 희망을 가져 봅니다.
 

시사인 21호에 실린 북리뷰를 옮겨온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77). 히친스의 책을 다루려다가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 2008)가 출간되었기에 급하게 방향을 틀어 일독하고 쓴 글이다. 편집부에서 군더더기들을 덜어낸 덕에 보다 깔끔한 모양새가 되었다. 처음 두 문단 정도가 요점이고(그러니까 '전체주의란 딱지'를 프레임화하는 데 이 글의 목적이 있다) 나머지는 분량을 채우기 위한 '레크리에이션'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어차피 책을 직접 손에 들 독자는 많지 않아 보이니까...

시사인(08. 01. 30) 자유주의에 이용되는 전체주의란 ‘딱지’

굿바이 레닌!’이라는 영화는 만들 수 있지만 ‘굿바이 히틀러!’라는 영화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스탈린의 생일날 강제수용소 죄수들은 스탈린에게 축하 전보를 보냈다. 하지만 유태인이 아우슈비츠에서 히틀러에게 그러한 전보를 보낼 수 있었을까? 연설을 마친 뒤 당원의 열광적인 박수와 나치식 경례를 히틀러는 흡족해하며 받아들였지만, 스탈린은 전당대회에서 다른 동지와 똑같이 박수를 쳤다. 그는 자신을 ‘지도자’가 아니라 한갓 역사의 ‘대행자’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흔히 ‘전체주의’로 통칭되는 나치즘과 스탈린주의의 이 ‘사소한’ 차이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 펴냄)에서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묻고, 또 답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의식이 개입되어 있다. 하나는 아직도 나치즘과 차별되는 체제와 이데올로기로서 스탈린주의에 대한 만족할 만한 이론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 다른 하나는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이래 통용되는 ‘전체주의’라는 관념이 엄밀한 이론적 개념이 아니라, 자유주의 헤게모니에 봉사하는 일종의 ‘구멍마개’라는 점. ‘빨갱이’라는 용어처럼 ‘전체주의’라는 딱지는 모든 사유를 금지시키고 비판의 가능성을 봉쇄해버린다. 그래서 지젝은 묻는다.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그러한 질문에 이끌려 우리가 초대받는 곳은 마치 숭고한 그리스 비극과 쾌속 질주하는 롤러코스터를 한데 모아놓은 듯한, 현란한 이론적 향연과 진지한 숙고의 장이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크메르 루주 치하의 캄보디아에서 대규모 숙청과 기아로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버리자 그들은 이번에는 인구를 늘리는 일에 혈안이 된다. 그래서 매달 3일씩 ‘짝짓기의 날’을 정해 결혼한 부부가 동침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고는 경비병이 순찰을 하면서 실제로 섹스를 하는지 안 하는지 감시했다. 하지만 하루 열네 시간씩 강제 노동에 시달리던 캄보디아 인들은 경비병을 속이기 위해 사랑을 나누는 척하며 가짜 신음소리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어째 좀 비인간적인가? 하지만 지젝은 이렇게 되묻는다.

 “그렇지만 타자의 응시 아래에 놓여 있는 그와 같은 장면들이 성행위의 일부라면 어떨까? 오직 그런 타자의 응시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떨까?”

현대인, 노출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
실제로 사생활과 성관계를 찍은 이런저런 동영상과 캠코더로 점령되다시피 한 것이 우리의 웹사이트이고 보면 이러한 물음은 과장된 것이 아니다. 지젝이 보기에 오늘날 우리의 불안은 오히려 타자의 응시에 노출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채워진다. 실제 삶을 연기하는 ‘리얼리티 쇼’가 시사하는 것처럼 어떤 허구 세계가 우리의 도피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가 궁극적인 도피처가 되는 전도된 상황까지 빚어지고 있다. 과연 우리는 ‘인간적 가치를 거부하는’ 전체주의보다 훨씬 나은 체제에 살고 있는가?

지젝은 한 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반(反)차우셰스쿠 쿠데타가 성공한 1991년에도 루마니아 비밀경찰은 여전히 건재를 과시하고 있었는데, 수도인 부쿠레슈티를 방문한 한 미국인 친구가 도착 일주일 만에 미국에 있는 애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나라는 가난하지만 사람들은 다정하고 쾌활한 데다 배우려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어”라고 칭찬을 늘어놓고 전화를 끊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 속 목소리는 자신을 비밀 경찰이라고 소개하고, 루마니아에 대해 좋게 말해준 것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안녕히 계세요’라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지젝은 이 책을 그 익명의 비밀경찰 요원에게 바치고 있다.

08. 02. 08.

P.S. 기사의 첫문단은 지젝의 글 '두 개의 전체주의'(http://blog.aladin.co.kr/mramor/885349)를 참고한 것이다. 기사에 들어간 사진은 지젝의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 출간을 계기로 이루어진 한 강연회 장면으로 보인다(2006년 이후라는 얘기이다). 그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주저 네 권의 하나인 이 책이 올해 출간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형편이 좋았다면 번역을 맡을 뻔하기도 했던 이 책이 개인적으론 올해 출간을 가장 고대하는 책들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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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8-02-09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시인(08. 01. 30) 이라.... 사법고시생들이 지젝도 공부하나 보내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로쟈 2008-02-09 09:37   좋아요 0 | URL
좋은 시력이십니다.^^
 

'지젝이 어쨌다구?'(http://blog.aladin.co.kr/mramor/1873059)에 이어지는 페이퍼이다. 가독성이 좋은 번역이지만 몇 가지 오역들이 교정되면 좋겠다는 의견을 말미에 피력했는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내용은 적어두어야겠다. 그 전에 고유명사 표기에 대해 조금만 더 덧붙이면 <에쿠우스>의 극작가 'Peter Schaffer'는 '피터 셰이퍼'(62쪽)이 아니라 '피터 셰퍼'이며 '하이데거적인 인지과학'을 주창하는 철학자 'Hubert Dreyfus'는 국내에 '허버트 드라이푸스'(306쪽)가 아니라 '허버트 드레퓌스'(혹은 '허버트 드레피스'로 소개되었다. 가장 유명한 푸코 연구서의 하나였던 <미셸 푸코: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나남, 1989)의 공저자 중 한 사람이었고 <인터넷상에서>(동문선, 2003)도 그의 책이다(<인터넷에 대하여>라고 해야 한다. '하버트 드레퓌스'는 또 뭔지?).

 

 

 

 

그리고 <제3의 과학>(대영사, 1996)의 편자로 유명한 'John Brockman'은 물론 '존 브로크먼'(324쪽)으로도 표기될 수 있지만 <위험한 생각들>(갤리온, 2007)을 비롯해서 최근에 나온 책들은 모두 '존 브록만'이라고 읽어주고 있다. 통일시켜주는 게 독자들의 혼동을 줄일 수 있다. 그리고 또 내 생각을 적자면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 'Le Mythe de Sisyphe'는 물론 그리스 신화의 '시시포스'를 다루고 있지만 통례에 따라 <시지프의 신화>라고 읽어주는 게 낫다(김화영 교수의 번역으론 <시지프 신화>). 그건 '카뮈'의 책이기 때문이다('시지프'가 아니라 '시시포스'라고 교정해주는 건 과잉친절이다).

 

 

 

 


몇 가지 오역들을 거론하기 전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최근의 출판물에서(TV 자막에서는 더 심하다) 여전히 빈발하고 있는 '-로서/-로써'의 혼동이 좀 교정되었으면 싶다(사실 '혼돈/혼동'도 혼동되기 쉬운데 그럼에도 시인들까지 혼동해서 쓰는 건 좀 어이없다. 얼마전 한 영화잡지의 칼럼을 읽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완전히 '혼돈'이다).

가령 얼마전 서평을 쓰기도 했던(http://blog.aladin.co.kr/mramor/1884175) <논어는 진보다>(포럼, 2008)에서도 서문에서부터 "공자가 제사를 중시한 것은 그 예禮로의 기능을 중시했기 때문이지 죽은 귀신의 은덕을 바라서가 아니었다."(18쪽)라는 오기가 나온다. 당연히 '예로서의 기능'이라고 표기되어야 하는 대목이다. 부주의에서 빚어진 오타일 수도 있지만(편집자에게서도 걸러지지 않았다는 건 의문이다) 이런 실수는 이 책을 진지하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보게 만든다(더구나 책은 <논어>의 자구 하나하나를 '제대로' '다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언어는 전달수단으로의 한계를 가지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효과적인 전달수단인 것도 사실이다."(220쪽)에 이르면 저자가 한문공부만큼 한글공부에도 신경을 써주었으면 싶은 것이고.

<지젝이 어쨌다구?>(새물결, 2008)에도 그런 오기가 한군데 나온다. "모더니즘이 동시대를 이야기하기 위해 해석적 준거틀로 신화를 이용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간극들에 무언가를 끼워넣음으로써 신화를 직접적으로 다시 쓴다."(54쪽) 얼핏 '준거틀로써'와 '끼워넣음으로써'가 호응하는 듯이 보이지만 '해석적 준거틀로서의 신화'는 'the myth as the interpretative frame of reference'(30쪽)를 옮긴 것이다.

그럼 자질구레한 디테일들은 가급적 넘어가고 번역에 대한 몇 가지 '이견'을 적도록 한다. 먼저 83쪽이다. 책의 1장인 '신화와 그것의 변쳔'에서 마지막 두 절(74-96쪽)은 내가 읽기에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에 대한 아주 요긴한 요약이다. 번역된 순서와는 달리 <죽은 신을 위하여>가 <전체주의가 어쨌다구?>보다 나중에 나온 책이므로 지젝이 먼저 제시한 자신의 생각을 이후에 상술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죽은 신을 위하여>가 읽기에 버거웠던 분들은 이 대목만 꼼꼼하게 읽어도 좋겠다.

다시 돌아가, 83쪽의 한 대목은 이렇다. "헤겔이 말했듯이,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은 인간으로 육화된 초월적 신이 아니라 자기 너머 피안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원문은 "As Hegel put it, what dies on he Cross is not the human incarnation of the transcendent God, but the God of Beyond himself."(50쪽)이다. 

여기서 '초월적 신'은 'transcendent God'을 옮긴 것이고 칸트철학의 번역어를 쓰자만 '초재적 신'으로 옮겨도 된다. 말 그대로 '저 너머에 존재하는 신'을 뜻한다. 그걸 다시 받은 말이 'the God of Beyond '이다. 역자는 'Beyond'를 'himself'에 걸리는 전치사로 보았지만 내가 보기엔 명사다(그래서 대문자로 씌어진 게 아닐까?). 그렇게 다시 읽으면, "헤겔이 말했듯이,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은 인간으로 육화된 초월적 신이 아니라 피안의 하나님 자신이다."

참고로, 이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더이상 저 너머의 피안에 거하지 않고 (종교적 공동체의) 성령으로 변해간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한편으로는 아버지 하나님이 성령으로 '번해가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공동체 그 자체가 새로운 영적 단계로 '변해가게' 하는 소멸하는 중개자/중간자이다." 여기서 '소멸하는 중개자'는 'vanishing mediater'를 옮긴 것이다(다른 번역본들에서는 '사라지는 매개자'로 옮겨졌다).

지젝의 기독교론은 기회가 되면 다른 자리에서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고 스핑크스에 대한 헤겔의 유명한 격언만을 여기에서는 챙겨두도록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남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이집트인들 자신에게도 수수께끼였다."(90쪽) "The Enigmas of the Egyptians were also enigmas for the Egyptians themselves."(56쪽) 

이 대목을 인용한 건 이 책이 아니라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잘못 옮겨졌기 때문이다(이 책의 몇몇 오역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겠다). 거기서는 똑같은 문장을 "이집트 사람들의 비밀은 이집트 사람들 자신을 위한 비밀이기도 하다."고 오역했다(224쪽의 각주). 지나는 김에 보태 적자면 지젝은 이어서 데리다의 '해체'가 갖는 문제점(아포리아)에 대해 지적한다.

"'해체'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타자의 해체적 정화는 우상화의 궁극적 형태이다. 타자를 해체하고 남는 것은 타자의 자리 - 메시아적 약속으로서의 타자성의 순수 형식 - 밖에 없다. 해체의 한계는 여기 있다. 즉 해체가 근원적이 될수록, 해체에 내재하는 해제 불가능의 조건 - '정의' 라는 메시아적 약속 - 에 의지해야 하는 정도도 커진다(데리다는 이것을 20년 전에 깨달았다). 메시아의 약속은 데리다의 믿음의 진정한 대상이며, 데리다의 궁극적인 윤리 원칙은 이러한 믿음이 환원 불가능하고 해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죽은 신을 위하여>, 224쪽)

이 대목은 데리다의 해체론에 대한 지젝의 비판을 집약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데리다 자신의 답변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대한 심포지움에서 발표된 '마르크스와 아들들(Marx & sons)'에서 읽을 수 있다. 이 글/책은 조만간 번역돼 나온다고 한다(http://blog.aladin.co.kr/balmas/1862975 참조). 곁다리로 지적하자면 인용문에서 "데리다는 이것을 20년 전에 깨달았다"는 오역이다. 원문은 "as Derrida himself has realized in the last two decades"(139쪽)에서 보듯이 현재완료형 문장이기 때문이다('20년 전'에 깨달은 것이 아니라 '20년 동안' 깨달아온 것이다).  

이어서 148쪽. "여기에는 권력에 반대하는 '민중들'에 대한 지식인들의 뿌리 깊은 불신이 도사리고 있다."는 문장은 오역은 아니지만 우리말로 중의적이다. 무엇에 대한 불신일까? 'people as opposed to Power'에 대한 불신이다. 권력에 대립한다고 하는 민중에 대한, 그러한 민중상에 대한 불신이다. 즉, 여기서 표명되는 건 민중은 궁극적으로 권력에 반대하지 않을 거라는 지식인들의 인식이다(지난 대선 결과에 대해서도 일부 '좌파 지식인들'이 그러한 실망/환멸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때문에 1989년의 시점에서 동독의 지식인들은 '자유선거'에 반대했다. "만약 자유선거가 실시된다면 다수의 민중들이 혐오스러운 자본주의적 소비주의를 선택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대개의 경우 지식인과 민주주의는 불편한 관계이다.)

그런 맥락에서 읽어야 하는 대목: "반체제 인사들보다는 '개혁적 성향을 지닌' 공산주의자들에게 더 많은 공감을 느끼고 있던 서구 사회의 몇몇 민주주의자들도 이와 동일한 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여기서 '서구 사회의 몇몇 민주주의자들'은 'Some Western Social Democrats'의 번역이다. '서구의 몇몇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오역이라고 해야겠다(혹은 '사민주의자들').   

'우울증과 행동'을 다루고 있는 4장의 끄트머리인 288쪽에서는 한번 잘못 읽은 오역이 몇 차례 반복되고 있다(사실 제목에서 'act'를 굳이 '행동'이라고 옮긴 것도 불만이다. 그간에 대부분의 번역서들에서 'action'과 구별하여 'act'를 '행위'라고 옮겨왔기 때문이다. 역자는 'action'에는 어떤 번역어를 할당하려는 것인지?). 내용은 좀 선정적인데, '강간'에 대한 환상을 다루고 있어서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수치심이 단순한 수동성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떠맡은 수동성이라고 강조해왔다. 만약 내가 강간을 당했다고해보자. 거기에는 아무것도 수치스러울 게 없다. 그러나 내가 강간당하는 것을 즐겼다면, 나는 수치심을 느껴 마땅하다."(287쪽)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부끄러움은 오직 그러한 수동적 처지가 사회적 현실 속에서 (자기는 부인하는 내밀한) 환상과 접촉할 때만 나타난다."

"가령 두 여자가 있다고 해보자. 한 사람은 자기주장이 강하고 활동적인, 이른바 해당된 여성이다. 다른 한 여자는 남자 친구가 자신을 거칠게 다루고, 심지어 강간하는 공상을 은밀하게 즐기고 있다. 만약 두 여자가 모두 강간을 당할 경우 두번째 여자가 첫번째 여자보다 훨씬 더 외상적인 충격을 받게 되는데, 이는 강간이 '그녀의 꿈의 소재들'을 '외적인' 사회 현실 속에서 실현하게 되리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287-8쪽, 강조는 지젝)

강조된 부분의 원문은 "for the very reason that it will realize in 'external' social reality the 'stuff of her dreams"이다. 문제는 이것을 부연설명하는 대목이다.  "왜 그런가? 환상의 핵심에는 주체의 존재가 있고, 그보다 표면 쪽에는 그혹은 그녀의 상상적인 그리고/혹은 상징적인 자기동일시가 있는데, 그 사이에 둘을 영원히 갈라놓는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288쪽) 원문은 "why? There is a gap which forever separates the fantamatic kernel of the subject's being from the more 'superficial' modes of his or her symbolic and/or imaginary identification"이다.

역자는 'the fantamatic kernel of the subject's being'을 '환상의 핵심에는 주체의 존재가 있고'라고 풀어서 옮겼는데, 이 '주체의 환상적 중핵', 곧 '주체를 떠받치는 핵심적 환상'이 가리키는 것은 '주체라는 존재'가 아니라 주체의 '내밀한 꿈' 혹은 '꿈의 소재들(stuff of dreams)'이다. 그리고 이러한 꿈(환상)과 상상적/상징적 동일시('외적인 사회 현실') 사이에는 영원한 간극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 때문에 "내가 환상의 핵심인 나의 존재를 (상징계 안으로 통합해 들인다는 뜻에서) 완전하게 떠맡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에서도 완전하게 떠맡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환상의 핵심으로서의) 나의 존재'가 아니라 '나의 존재의 핵심적 환상(fantasmatic kernel of my being)'이다. 미묘하지만 둘 사이엔 차이가 있고 번역문은 계속 이를 혼동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나의 존재에 너무 바짝 접근할 때, 나의 존재를 너무 가까이할 때, 주체에는 아파니시스(성적인 욕망의 사라짐)라는 사태가 벌어질 뿐이다."라는 식으로 계속 오역이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when I approach it too closely, when I get too near it, what occurs is the aphanisis of the subject"를 옮긴 것인데, 역자가 '나의 존재'로 받은 'it'이 가리키는 것은 '핵심적 환상'이다. 다시 옮기면, "내가 나의 핵심적 환상에 너무 바짝 접근할 때, 그 환상에 너무 가까이 다가갈 때, 벌어지는 일은 주체의 아파니시스이다." 바로 이어지는 문장에서 '나의 존재라는 환상의 핵심'은 '내 존재의 핵심적 환상'으로 교정되어야 한다. 그렇게 교정하여 정리하면 이렇다.

"내 존재의 핵심적 환상이 사회적 현실에서 강제적으로 실현되는 것이야말로 주체에게는 최악의 사태이며 가장 모욕적인 형태의 폭력이 될 것이다. 그 폭력은 나를 견딜 수 없는 수치심에 노출시킴으로써 나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토대 자체를 뒤엎어버리고 만다."

 

 

 


 

5장('문화연구는 정말 전체주의적인가?'로 넘어가서, 306쪽에 나오는 건 단순오역이다. "철학과 과학 사이를 건너뛰는 이러한 단락은 오늘날 하이데거적인 인지과학(허버트 드라이푸스)이나 인지과학적 불고(프란시스코 바렐라)에서부터 양자물리학과 동양사상의 결합(카프라의 물리학의 도), 심지어 해체론적 불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태들로 나타나고 있다." 이어서 대표적인 두 가지를 간단히 살펴보겠다고 하고서 '해체론적 진화론'과 '인지과학적 불교'를 도마에 올려놓는다. 그런데, '해체론적 진화론'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앞에서 'deconstructionist evolutionism'을 '해체론적 불교'로 오역하는 바람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309쪽의 인용문에 나오는 건 '멋진 오역'이다. '멋진 오역'이라고 한 건 우스개이고 사실 오역이 아니라 원서에 잘못이 있는 드문 경우다. 지젝이 데넷의 <해명된 의식>에서 인용한 대목: "'서사적 중력장의 중심으로서의 자기라는 생각'이 아직 내 독자적 사상으로 완성되어 책으로 출간되기도 전에 이미 어떤 소설이 그걸 풍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내 심경이 얼마나 복잡했겠는지 한번 상상해보라. 그 책은 데이비드 로지의 <멋진 세계(Nice World)>였는데 해체론자들 사이에서는 이 책이 열띤 토론을 불러일으키는 중인 모양이다."

문학이론가이자 소설가인 데이비드 로지의 <아주 작은 세상(Small World)>(영웅, 1991)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어서 <멋진 세계>란 책도 썼나 싶었지만 찾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로지가 쓴 소설은 'Small World'와 'Nice Work'였다. 그러니까 데넷이나 지젝이 'Nice Work'를 'Small World'와 혼동하여 'Nice World'로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겸사겸사 바람을 적자면 두 권 모두 번역/소개되면 좋겠다. 

그리고 또 데리다를 다루고 있는 312쪽에서 'differance(디페랑스)'를 그냥 '차이'라고 옮겼는데, 소리에서는 차이가 나지 않지만 'difference'와는 구별해주어야 하므로 '차연'이라고 옮겨주거나 '차이' 옆에 원어를 병기해주어야겠다. 그리고 'animal nature'을 '생물의 본성'이라고 옮기는 건 좀 특이한 감각이 아닌가 싶다(동물론은 데리다가 말년에 많은 관심을 쏟았던 주제이다). 340쪽에서도 '주체적 입장(subjective position)'은 문맥상 '주관적 입장'이라고 옮기는 게 더 적절해 보인다(더불어 지적하자면 역자는 'existence'를 모든 경우에 기계적으로 '실존'이라고 옮겼는데 보통 일감은 '존재'다. '실존'이란 번역어가 적합한 경우는 상대적으로 제한돼 있다. 'existence'의 번역은 내가 요즘 이론서 번역의 수준을 가늠하는 한 가지 지표이다). 그리고 343쪽에서 '부상하는 질서(emerging order)'는 '창발적 질서'라고 옮기는 게 일반적이다. 린 마굴리스와 프리고진 그리고 복잡성 과학에서 핵심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다.   

끝으로 흥미로운 내용 한가지. 현실과 허구(쇼)사이의 경계가 점점 지워져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결론에서 지젝의 한 가지 예로 들고 있는 것은 미국의 플로리다에 있는 마을 '셀러브레이션'이다. 디즈니에서 만든 '기획마을'인데 인구는 (2000년 기준으로) 2,700여명이다.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미국식의 아담한 전원풍 마을에서 실생활 레크리에이션을 즐긴다는 이 마을의 거주자들 또한 '자기 자신을 연기하고' 있거나 혹은 '자신들의 삶을 무대 위에서 살고 있다. 텔레비전은 우리의 실제 사회적 현실과 한참 동떨어진 어떤 허구적 세계를,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도피적 오락거리로 제공한다고 여겨져 왔다 - 하지만 '리얼리티 쇼'에서는 마치 현실 그 자체가 궁극적인 도피적 허구로 제공되고 레크리에이션(재-창조)되는 것만 같다... 어떤 면에서, 하나의 원이 그렇게 닫혀버린다."(384-5쪽)

인용문에서 '실생활 레크리에이션'은 'real-life re-creation'의 번역이다. 마치 아메리칸 드림을 구현한 듯한, 이 가장 '전체주의적'인 마을이 '당신이 영혼이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축복받은 마을'이라는 건 뭔가 지독한 아이러니가 아닐까? 이거 뭐라고 불러야 하나? 미국인들의 수수께끼?..

08. 02. 08.

P.S.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에 대해 시사IN에 쓴 리뷰는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7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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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우스 2008-02-10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주문해 놓고 있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듯싶습니다. 사시인에 쓰신 것도 잘 읽었구요. 물론 저는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사람은 아니고요. ^^ 퍼갑니다. 감사감사 그리고 늦었지만 새해 복 마니 받으시구요.

로쟈 2008-02-10 13:20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