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필자가 쓴 지젝론으로는 권택영 교수의 <잉여쾌락의 시대>(문예출판사, 2003) 이후 두번째 책이 얼마전에 나왔다. 독일에서 문학과 철학을 전공한 김현강 박사의 <슬라보예 지젝>(이룸, 2009)이 그것인데, '누구나 철학' 시리즈로는 상당히 오랜만이다. 책에 대한 서평기사가 좀 뒤늦게 올라왔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이미 몇 권의 소개서가 나와 있어서 국내 필자(아니 독일에 체류중이니'국외 필자'라고 해야 할까?)의 저작이라는 점 외에 어떤 장점이 있을까 싶지만, 번역서가 아니어서 좀더 편하게(혹은 정확하게) 전달될 수는 있을 듯싶다.   

한겨레(09. 01. 31) 지젝 “해체된 저항주체를 되살려라”

이룸출판사의 ‘누구나 철학총서’의 하나로 나온 김현강(독일 본대학 철학박사)씨의 <슬라보예 지젝>은 철학자 지젝에 관한 단출하지만 밀도 있는 안내서다. ‘레볼루션스’ 시리즈의 <로베스피에르> <트로츠키> <마오쩌둥> 서문의 배경을 이루는 지젝의 철학적 바탕과 정치적 지향이 일목요연하게 서술돼 있다.

이 책의 설명을 따르면, 지젝의 대결 상대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이다. 지젝은 이들의 철학이 주체를 해체함으로써 저항의 거점도 동시에 해체했다고 비판한다. 근대적 주체 이념이 인간을 해방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억압과 구속에 빠뜨렸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계열 해체주의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지젝이 보기에 이들은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함께 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철학이 주체성을 해체한다면 이와 더불어 주체마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 지젝의 문제의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젝이 해체주의자들의 작업을 모두 일소에 부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해체 작업이 이루어낸 성과는 성과대로 보존하면서 저항과 혁명의 주체를 되살리는 방안을 찾는 것이 지젝의 목표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지젝이 주체를 되살리는 작업에 동원하는 주요 사상으로 꼽히는 것이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 독일 관념론의 종합인 헤겔 철학, 카를 마르크스의 이론이다. 이 책은 이 사상들을 차례로 답사함으로써 지젝 이론의 핵심으로 다가간다. 지은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지젝이 재구축하고자 하는 주체의 특성이다. 지젝은 근대 철학이 상정했던 자기완결적이고 충만한 주체는 없다는 해체주의적 관점을 수용한다. 주체는 균열과 틈새와 단절을 내장한, 내적 불화를 겪는 주체일 수밖에 없다. 그런 주체가 말하자면, 지젝 저작의 제목이기도 한 ‘까다로운 주체’다. 이 주체는 그런 불완전성 속에서도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는 주체의 기능을 수행한다. 이런 입론에 기대어 지젝은 세계 질서에 변화를 가져올 행동의 주체를 불러들인다.

더 나아가 지젝은 이 주체를 통해 정치를 다시 사유하고 있다. 오늘날 정치의 문제는 진정한 정치적 행위가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고 지젝은 말한다. 그 이유를 지젝은 “경제의 탈정치화”에서 찾는다. 자본과 시장의 문제를 정치와는 무관한 중립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야말로 문제라는 이야기다. 이 지점에서 지젝은 경제적 차원의 갈등, 다시 말해 계급갈등을 정치의 문제로 복권시키고 이 계급갈등을 다른 갈등보다 우위에 놓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든 사회적 갈등이 동등한 권리를 지닌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거쳐 그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만난다. 요약하자면, 주체를 복원하고 그 주체를 통해 계급갈등이라는 근본모순을 해결하는 정치를 실천하는 길을 찾는 것이 지젝의 관심사인 것이다.(고명섭 기자)  

09. 01. 30.  

P.S. 저자가 독일에서 공부하고 있는 탓이겠지만 부록의 참고문헌이나 후주에서의 인용문헌에는 좀 아쉬운 부분이 있다. 먼저, 참고문헌에는 원서와 국역본이 병기돼 있는데, 실수인지 고의인지 일부 번역본이 누락됐다(사실 출간된 번역본이야 알라딘에서 '지젝'을 한번이라도 검색해보면 다 알 수 있다). 그래서 알렌카 주판치치의 <실재의 윤리>(도서출판b, 2004)가 <실재의 윤리학>으로, 미란 보조비치의 <암흑지점: 초기 근대철학에서의 응시와 신체>(도서출판b, 2004)가 <완전히 까만 점: 현대 초기 철학에서의 응시와 신체>로 표기됐고,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 2008)는 <누가 전체주의를 말했는가?>로 표기됐다.  

 

비록 원제와는 다른 제목이 붙여지긴 했지만 <죽은 신을 위하여: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길, 2007)는 <인형과 난장이: 기독교의 변태적 핵심>으로만 표기됐고, <지젝이 만난 레닌: 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교양인, 2008)는 <혁명이 문전에 와 있다: 1917년 이후의 레닌 작품선>이라고 표기됐다. 정확하게 말하면 '1917년 이후'가 아니라 '1917년'의 레닌 문선이다. 그리고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는 <The Fright of Real Tears: Krzysztof Kieslowski between Theory and Post-Theory>를 옮긴 것인데, 부록에는 지젝 편저의 <The Fright of Real Tears: The Uses and Misuses of Lacaan in Film Theory>(2000)와 <The Fright of Real Tears, Kieslowski and the Future>(2001)라는 엉뚱한 책 이름이 두 권이나 들어가 있다. 저자나 편집자의 착오가 아닌가 싶다.  

후주에서는 헤겔과 칸트, 니체, 비트겐슈타인의 인용 쪽수를 독어 원전을 근거로 표시해주고 있는데, 국역본을 이용하거나 국역본의 쪽수도 병기해주는 것이 '입문서'의 에티켓 아닐까(게다가 저작명도 독어만을 써주고 있다). 이것도 원칙이 있는 건 아니어서 프로이트는 영역본과 독어본을 왔다갔다하고, 라캉의 경우엔 <에크리>는 불어본을 <세미나>는 영어본을 참조해야 한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는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만 독역본을 참고해야 하고, 울리히 벡은 독어본으로 읽어야 한다. 아무래도 독자에 대한 고려나 감이 좀 부족하달 수밖에 없다.    

 

참고로, 현재 국내에 소개돼 있는 지젝 입문서로는 토니 마이어스, 사라 케이, 이안 파커 세 사람의 책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초심자가 읽을 수 있는 건 마이어스 정도가 아닐까 싶고(사라 케이의 책은 번역도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 그것도 지젝의 책을 한두 권은 읽은 뒤에야 흥미를 갖고 따라갈 수 있지 않나 싶다. 그 마이어스의 책에는 친절한 문헌 소개가 붙어 있는데, <믿음의 대하여>에 대해서는 "지젝의 다른 저작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도 쉽게 읽을 수 있는(그래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다"라고 소개한다. 정확하게 말하는 그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이고, 예전에 지적한 대로 국역본은 최악의 번역이어서 거의 읽을 수가 없다. 이런 것이 한국(어)의 핸디캡이다.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책을, 읽다가 집어던져야 하는 나라에서 그래도 공부를 해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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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EAV 2009-01-30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리즈는 되게 오랜만에 출간이 되었네요.

로쟈 2009-01-31 00:32   좋아요 0 | URL
네, 끊어진 걸로 알고 있었어요...

비로그인 2009-01-30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니 마이어스의 지젝... Slavoj Zizek (Routledge Critical Thinkers) Routledge; 1 edition (December 3, 2003) 이것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로쟈님에 의해 관심이 발동해서 지금 이 책을 주문했습니다. ^^

로쟈 2009-01-31 00:32   좋아요 0 | URL
혹시 오역본으로 아신 건가요?...

비로그인 2009-01-31 00:56   좋아요 0 | URL
아뇨, 제가 지젝에 대해 잘 몰라서요. 좀 알아보려고요. 그런데 써놓으신 것을 보니 마이어스의 책이 적당하겠다 싶었습니다. 그렇습니까?

로쟈 2009-01-31 01:02   좋아요 0 | URL
제가 처음으로 읽은 건 <향락의 전이> 같은 책입니다. 사실 입문서들보다는 지젝 자신의 책이 더 재미있습니다. 사라 케이의 책은 고급 입문서이고, 이안 파커의 책은 '비판적 입문서'입니다. 마이어스의 책은 평이한 입문서이고요...

비로그인 2009-01-31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토니 마이어스의 지젝 국역본이 그렇게 엉터리이던가요? 이 지구 반대편에서까지 그 분노가 느껴지는 것을 보면요...^^;

로쟈 2009-01-31 00:32   좋아요 0 | URL
<믿음에 대하여>가 엉터리 번역이란 말씀인데요.^^;

비로그인 2009-01-31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마이어스가 'Slavoj Zizek'이라는 책에서 지젝의 On Belief (Thinking in Action)가 "지젝의 다른 저작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도 쉽게 읽을 수 있는(그래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다"라고 한 거군요. 그리고 이 책 <믿음에 대하여 On Belief>의 국역본이 엉터리라는 거구요. 하하하...^^ 제가 잘못 읽었군요. 이 두 책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어느 것이 좋을까요? 물론 저자를 알려면 저자의 작품을 직접 읽어야겠지만... 그래도 다른 읽을 책이 산적해 있으니 '알짜'를 골라야겠네요...

비로그인 2009-01-31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락의 전이>를 언급하신 댓글을 읽고 다시 씁니다. 그럼 지젝 자신의 책 중 가장 재미있고 relevant 한 책을 한 권 권하신다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영어 단어를 써서 미안합니다. 이 단어는 참 '곤란'한 단어라서...)

로쟈 2009-01-31 01:15   좋아요 0 | URL
그건 관심사에 따라 다를 듯싶은데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혁명에 대해서, 정치에 대해서 등. <향락의 전이>에는 여성에 대한 내용들이 나오죠.^^

비로그인 2009-01-31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데올로기 혹은 신학에 관한 거라면 어떨까요? 제가 근래 몇 년 동안 신학과 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책을 읽었거든요... 하지만 먼저 지젝이라는 인물의 사상에 대해 개괄해서 알고 싶은데... 그러자면 마이어스라는 사람의 책이 그 역할을 할까요?

로쟈 2009-01-31 10:22   좋아요 0 | URL
신학 관련으론 <죽은 신을 위하여>가 좋을 듯싶은데요. 원제는 <꼭두각시와 난쟁이>입니다.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에 나오는...

열매 2009-01-31 0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 관한 내용은 아닌데요, 혹 책을 살펴보려 이미지를 클릭할 때 화면이 책으로 넘어가는 방식이 아닌, 따로 창을 열어 보여주는 방식은 선택가능한 것이 아닌가요?
소개해주시는 기사를 읽으며 책을 자주 클릭해보는데, 화면이 바뀌니 여러 면으로 불편합니다. 개선할 방법이 없는지요? 저는 서재를 통 안다루어봐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유엔미블루 2009-01-31 07:34   좋아요 0 | URL
저는 따로 창이 나옵니다...인터넷옵션-->도구-->고급 에서 기본값 복원을 한번 해보시지요..

BusterKeaton 2009-01-31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에 대한 입문으로는 어떤 책이 좋을지, 추천 좀 해주실 수 있나요?

로쟈 2009-01-31 10:20   좋아요 0 | URL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 어려우시면 <하우투리드 라캉> 같은 책이 좋지 않을까 싶네요. <지젝이 만난 레닌>도 좋겠습니다...

푸른바다 2009-01-31 11:59   좋아요 0 | URL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번역본은 이미 희귀본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새책은 절판이고 헌책방에서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네요^^

나의왼발 2009-01-31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삐딱하게 보기 한글판은 번역이 괜찮은가요?

로쟈 2009-01-31 10:18   좋아요 0 | URL
오래전에 읽은지라... 제일 처음 나온 번역서라서 전문용어들이 요즘과는 좀 다릅니다. 전반부는 괜찮고 민주주의를 다룬 후반부는 오역이 좀 있었던 듯싶네요...

옥점 2009-01-31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락의 전이>는 개역판도 오역으로 말이 많던데요..게다가 책값도 올렸고.
읽을 수 있는건가요?

로쟈 2009-01-31 12:09   좋아요 0 | URL
차라리 원서가 읽기 쉽습니다.^^;
 

주디스 버틀러의 출세작 <젠더 트러블>(문학동네, 2008)의 출간 소식을 '마이리스트'로 갈무리한 바 있는데, 책의 요지를 짚어주는 기사가 있어서 옮겨놓는다. 몇 가지 줄거리만 챙겨두어도 인문 이론서를 읽는 데 도움이 된다.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은 책의 부제이다...

한겨레(08. 12. 20) 주디스 버틀러 “여성은 없다”

<젠더 트러블>은 페미니즘 담론 안팎에 일대 논란을 불러일으킨 저작이다. 1990년 출간한 이 책으로 지은이 주디스 버틀러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페미니즘 세계의 스타로 떠올랐고, 페미니즘 논쟁의 중심에 섰다. 논란이 거셌던 것은 남성 대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도 아래 여성 해방의 정치를 주도하던 페미니즘 운동의 주류를 이 책이 정면으로 치받았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여성이라는 단일한 주체를 해체하고자 했다. 또 여성이 설령 계급·인종 같은 분할선에 따라 복수로 존재하더라도 최종적으로는 여성이라는 범주 아래 하나의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여성 정체성 담론도 해체돼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 버틀러가 보기에 여성이라는 젠더는 결코 동일한 범주로 묶일 수 없는 이질성의 집합이었다. 그러므로 책의 제목 ‘젠더 트러블’은 ‘젠더’ 내부에 이미 항상 ‘트러블’이 있다는 선언적 진단이며, 젠더에 트러블을 일으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알려진 대로 버틀러는 ‘퀴어(동성애자) 이론’의 창시자라는 호칭도 얻었는데, 이 책의 재판(1999년) 서문에서 이례적으로 자신의 사적인 삶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자라면서 젠더 규범의 어떤 폭력성을 인식하게 된” 그는 16살 때 “격렬한 커밍아웃”을 했다. 사람들이 그를 여성이라고 지칭하고 그렇게 행동하도록 요구했는데, 그런 요구 때문에 고통받다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마침내 밝혔다는 이야기다. 이 책은 이렇게 동성애자로서 자신이 겪었던 삶을 이론화하고자 한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페미니즘 운동 안에서조차 이질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 그 자신의 처지가 그를 급진적·근본적 사고로 이끌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버틀러가 시도하는 것은 여성 정체성 문제를 래디컬하게 파헤침으로써 정체성 담론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버틀러가 이론적 수혈을 받은 곳은 프랑스 철학계인데, 이 책에서도 사르트르·푸코·보부아르·크리스테바·이리가레의 이론에 대한 인용과 성찰을 만날 수 있다. 그 자신의 말로 표현하면 ‘프랑스 철학의 미국적 구성물’이 이 책인 셈이다. 이때 버틀러는 푸코를 통해 만난 니체의 계보학을 분석과 비판의 방법론으로 삼아 프랑스 페미니즘 담론을 해체적으로 읽어냄으로써 그 자신의 이론을 재구성한다.

버틀러의 가장 충격적인 주장은 섹스(생물학적 성)가 문화적·제도적 힘 속에서 구성된 것이라는 명제다. 이 명제를 입증해 가는 과정에서 그가 먼저 인용하는 것이 보부아르의 유명한 주장,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주장이다. 보부아르의 명제에는 여성이 생물학적 성(섹스)과는 별개로 젠더(사회·문화적 성)를 차후에 구성한다는 암시가 깔려 있다. 젠더와 섹스가 분리되는 것인데, 이 분리를 논리적 극한까지 밀어붙여 보면, “섹스/젠더 구분은 섹스로 결정된 몸과 문화로 구성된 젠더간의 극단적 단절을 시사한다.” 젠더가 섹스와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이론화되면, “젠더 자체는 자유롭게 떠도는 인공물”이 된다. 그럴 경우,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의 특징을 지녔더라도 젠더상으로는 여성인 존재가 나올 수가 있게 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그 결과 남자와 남성적인 것은 남자의 몸을 의미하는 만큼이나 쉽게 여자의 몸을 의미할 수 있고, 여자와 여성적인 것은 여자의 몸을 의미하는 만큼이나 쉽게 남자의 몸을 의미할 수도 있다.”

젠더가 이렇게 생물학적 성과는 무관하게 문화적으로 구성된다면, 여성 정체성의 본질적 근거는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버틀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생물학적 성(섹스) 자체가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주장을 편다. 생물학적 성이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자연’이 아니라 일종의 문화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여성/남성의 이분법으로 포괄할 수 없는 여러 부류의 이질적 존재들이 있으며, 이들이 문화적 강제 속에서 하나의 생물학적 성으로 고정될 뿐이라는 것이 그 근거다. “따라서 섹스가 자연에 관계되듯 젠더가 문화에 관계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젠더(사회·문화적 성)의 원인 또는 기원은 섹스(생물학적 성)이며 섹스의 결과가 젠더라는 통념이 여기서 심각한 도전을 받는다. 역으로 섹스는 젠더라는 문화적 강제 속에서 구성되는 것, 다시 말해 젠더의 결과이자 효과라는 것이 버틀러의 주장인 것이다. 그리하여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보부아르의 명제가 비유가 아닌 직설의 지위를 얻게 된다.

버틀러의 주장은 여성성의 본질적 바탕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따라서 여성이라는 범주의 보편성에 입각해 여성성·모성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정체성 정치’는 토대를 잃어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즘 정치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 점을 버틀러는 “정체성의 해체는 정치성의 해체가 아니다”라고 간명하게 이야기한다. 여성이라는 보편적 정체성을 해체하더라도, 해방을 위한 일시적·잠정적 연대는 가능하다는 이야기다.(고명섭 기자)

08. 12. 19.

P.S. <젠더 트러블>의 출간으로 잠시 유예해 두었던 독서도 가능하게 되었다.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의 5장은 '정치적 열정적 (탈)애착들, 혹은 프로이트 독자로서의 주디스 버틀러'를 다루고 있다. 얼마전 방한했던 자크 랑시에르에 대해서는 4장에서 읽어볼 수 있다. 주말에 먼지를 좀 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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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ournelle 2008-12-20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리학적 삼인방에서 버틀러는 영미 전통에 해당하는 영역에 속하지요?

로쟈 2008-12-20 10:44   좋아요 0 | URL
영-불-독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프랑스 철학의 미국적 구성물'이라고 자평하는 걸 보면 영미 전통이라고만 할 수는 없겠는데요. 버틀러는 헤겔 철학에도 정통합니다...

헛헛헛헛 2009-01-15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좋은 글 감사하게 잘 읽고 있습니다. ^^

버틀러의 논의들 중 특히 '생물학적 성(섹스) 자체가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주장'에 여전히 동의하기가 힘든데... 이에 대해 어떤 근거들을 들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참고로, [젠더 트러블]과 관계된 논쟁들은 어디서 찾아볼 수가 있을까요???
 

랑시에르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길, 2008)와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코나투스, 2008)에 대한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내일자 대학신문에 게재되는 것이며 어제 오전에 시간에 쫓겨가며 작성한 것이다. 지면기사로서 적은 분량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충분한 분량도 아니어서 몇 가지 스케치 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것이 어떤 '윤곽'이라도 조금 드러내준다면 다행이고.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궁리, 2008)의 출간을 막판까지 기다렸지만 책은 내주에나 나오는 듯싶다...

대학신문(08. 12. 01) 새로운 사유에 동참하라 - 랑시에르와 아감벤의 신간들

최근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와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책이 연이어 출간되고 있다. 두 철학자는 작년 하반기 『대학신문』의 연재 ‘21세기의 사유들’에서도 다뤄진 바 있다. 랑시에르는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 등과 더불어 21세기 벽두 프랑스 철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알튀세르의 후예 중 한 사람’이고 아감벤은 ‘정치학, 미학, 언어학, 문헌학 등 여러 주제에 대해 정치한 분석을 내놓고 있는, 2000년대 가장 많이 논의되는 사상가 중 한 명’이다. 두 사람은 21세기에 접어들어 세계적인 철학자로 주목받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덧붙여 한국어로는 올해 초부터 본격적으로, 그리고 집중적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나란히 묶일 수 있다.

이미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감성의 분할』,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등이 우리말로 번역된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을 비롯해 여러 권의 책이 더 소개될 예정이고(그는 이번 주에 서울대를 비롯한 국내 대학에서 방한 강연을 갖는다), 주저인 『호모 사케르』(1995)로 처음 이름을 알린 아감벤은 최근 출간된 『남겨진 시간』에 이어서 ‘호모 사케르’ 연작과 『목적 없는 수단』, 『언어와 죽음』 등의 한국어본을 더 얻을 예정이다. 멍석이 깔린 만큼 이제 필요한 것은 두 사람의 사유를 제대로 읽고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겠다. 두 철학자의 신간을 중심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을 몇 가지 짚어본다.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정치에 대한 새로운 테제
알튀세르 사단의 일원으로 경력을 시작했지만 『알튀세르의 교훈』(1974)을 기점으로 스승과 작별한 랑시에르는 1970년대에 19세기 노동자의 문서고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사유의 영토를 개척한다. 그는 사회적 분배가 어떻게 이뤄지고 ‘몫이 없는 자들의 몫’은 어떻게 배제되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며 ‘정치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도출해낸다.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1990/1998)는 그의 사유를 집약해 정리해준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은 통치와 평등이라는 두 이질적인 과정의 충돌이다. 통치의 과정이란 사람들을 공동체로 조직하고 그 자리와 기능을 위계적으로 분배하는 것으로서 ‘치안(police)’을 가리킨다. 평등의 과정이란 ‘몫이 없는 자들’의 평등에 대한 요구와 그 실천을 말하며 ‘해방’이라고 이름 붙여진다. 해방을 위한 소송을 랑시에르는 ‘정치(politics)’라고 부른다. 정치적인 것이란 정치와 치안이 만나는 현장이다.

치안과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정치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아르케(arche, 근본)’를 갖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아르케’의 논리, 즉 정치는 어떤 일을 시작하고 지배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자, 곧 앞장서는 자를 요구한다는 논리와 단절한다. 때문에 아나키적이며, 실상은 ‘데모스의 통치(democracy)’로서 민주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지칭하는 바이기도 하다.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에서 랑시에르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민주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제비뽑기, 즉 통치할 자격의 부재다”. 즉, “민주주의는 시작 없는 시작이며 지배할 자격이 없는 자의 지배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와 비하는 플라톤이 그랬듯이 ‘데모스의 통치’를 ‘자격을 갖지 않은 자들의 통치’로 규정하는 데서 비롯한다. 이때 기원적 의미로서의 ‘데모스(demos)’는 공동체의 이름이기 이전에 공동체의 한 부분인 빈민들의 이름이다. 하지만 이 ‘빈민들’이 경제적으로 낙후된 주민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르케의 힘을 행사할 자격이 없는 자들’, ‘셈해질 자격이 없는 자들’, 즉 ‘몫이 없는 자들’을 가리킨다(비정규직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를 떠올려 볼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그렇게 ‘내쫓긴 자들’의 이름이며 정치란 그 프롤레타리아의 자기 몫에 대한 요구이고 주장이다. 정치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만드는 것이며, 몫을 갖지 않은 자들을 다시 셈하는 것이다(그리하여 감각적인 것을 다시 나누고 분배하는 것이다). 때문에 정치의 본질은 불일치이며 불화다. 치안과 정치가 충돌하는 경계로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는 바로 그러한 불일치와 불화가 그려내는 자국이고 흔적이다.



『남겨진 시간』, 바울의 편지에 대한 새로운 주석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와 비교될 만한 아감벤의 책은 곧 소개될 『목적 없는 수단』이다. ‘정치에 관한 노트’가 그 부제이기 때문이다. 『남겨진 시간』과 조응할 만한 랑시에르의 책은 지적 해방에 관한 다섯 차례의 강의를 묶은 『무지한 스승』일 듯싶다. 『남겨진 시간』 또한 사도 바울이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에 관한 여섯 차례의 강의록이기 때문이다.  



『호모 사케르』에서 주권의 역설적 논리를 분석하고 수용소야말로 근대성의 노모스(nomos, 규범)이면서 근대 정치의 패러다임이라고 주장했던 아감벤은 『남겨진 시간』에서 바울의 편지에 대한 치밀하고도 유려한 문헌학적 주석을 통해 그의 메시아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면밀히 조명한다. 그가 분석대상으로 삼은 것은 고대 그리스어 성경의 로마서 1장 1절을 구성하는 10개의 단어다. 아감벤은 “그리스도 예수의 종, 나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특별한 사명을 띤 사람입니다”란 뜻으로 풀이되는 이 구절의 원문 “PAULOS DOULOS CHRISTOU IESOU KLETOS APOSTOLOS APHORISMENOS EIS EUAGGELION THEOU”를 구성하는 각 단어에 주석을 붙인다. 로마서야말로 바울의 사상과 복음에 대한 증언적 요약이며, “글의 첫머리 한개 한개의 언어가 편지의 텍스트 전체를 총괄하는 형식으로 스스로 축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머리말에 대한 이해는 텍스트 전체에 대한 이해를 의미한다. 

아감벤은 ‘CHRISTOU’가 뜻하는 ‘그리스도’가 단지 ‘기름 부어진 자’를 뜻하는 헤브라이어 ‘마시아(=메시아)’를 그대로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란 ‘구세주 예수’ 또는 ‘예수라는 구세주’를 가리킬 뿐이라는 점에 주의하도록 한다. 그리고 ‘소명 받음’을 뜻하는 ‘KLETOS’의 파생어 ‘클레시스(klesis)’는 루터에 의해 독일어 ‘베루프(Beruf)’로 번역되면서 ‘직업’이라는 근대적 의미까지 획득하게 됐다고 언급한다. ‘클레시스’는 바울이 쓴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고린도전서)’의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 하십시오”라는 문장에서 나온다.

바울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마치 -가 없는 것처럼’, ‘마치 -이 아닌 것처럼’ 살 것을 형제들에게 요구한다. 일체의 소명에 대한 기각이 아감벤이 읽어내는 바울의 메시아적 소명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어 ‘클레시스’가 라틴어 ‘클라시스(classis)’로 잘못 유추됐고, 다시 마르크스는 ‘신분’을 가리키는 ‘슈탄트(Stand)’와 대립되는 단어로 ‘클라스(Klasse)’를 처음 도입했다는 점. 그것이 ‘계급 없는 사회’라는 마르크스의 개념이 메시아적 시간 개념의 세속화라는 벤야민의 지적을 가능하게 한다

새로운 사유는 또다른 새로운 사유에 대한, 새로운 동참에 대한 요청이다. 비록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영어에서의 번역이라는 장벽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지만(너무 자주 등장하는 복수접미사와 잘못된 음역이 가독성을 떨어뜨린다), 랑시에르의 ‘테제’와 아감벤의 ‘강의’는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08. 11. 30.

P.S. 서두에서 인용한 대학신문의 연재는 각각 '자크 랑시에르와 평등의 정치철학'(http://blog.aladin.co.kr/mramor/1722976)과 '아감벤과 호모 사케르의 시대'(http://blog.aladin.co.kr/mramor/1577009)라고 옮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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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시사IN에서 흥미롭게 읽은 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57). 금융위기가 촉박한 현 시국에 대해서 세계 각국의 지식인들이 내놓고 있는 의견들을 '정리'해주고 있는 기사다. 표제가 지젝의 말이어서 '로쟈의 지젝'으로 분류해놓는다.

시사IN(08. 10. 27) 세계 석학의 외침 “이제 행동보다 말을 할 때다”

누구는 ‘금융의 대량살상무기’ 파생금융상품이 문제라고 했다. 뉴욕 타임스·워싱턴 포스트 등 미국의 유수 언론은 파생상품 규제에 반대했던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연준) 의장을 원흉으로 지목했다.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 아서 레빗 전 증권거래위원회 위원장의 이름도 나왔다.

부시 행정부의 구제금융안을 놓고는 우파 일각에서 ‘사회주의적’이라거나 ‘큰 정부로의 회귀’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심지어는 그동안의 정부 개입이 이같은 사태를 초래했다며 이참에 시장에 대한 정부 규제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를 놓고 미국 내에서는 물론이고 세계 각국의 지식인들이 갖가지 분석을 내놓았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왔던 좌파 지식인도 예외는 아니다

이들은 부동산 거품이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 아니라 그동안 금융자유화와 규제 완화라는 이름 아래 진행돼온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현 경제위기의 근본 원인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월스트리트에 세금을 쏟아부을 것이 아니라 노동자와 소상공인의 일상 공간인 메인스트리트를 구제하라고 주장한다.



노엄 촘스키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명예교수는 위기의 직접 원인이 부동산 거품의 붕괴에 있는 것은 맞지만 그 뿌리는 지난 30년 동안 진행된 ‘금융자유화의 승리’에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금융자유화 조처로 막대한 이익을 본 금융기관이 이제는 국가 개입을 요구하고 있다며 월가의 이중적인 태도를 비판했다.



촘스키는 최근의 경제위기를 신자유주의나 자본주의의 종말과 연결 짓는 조셉 스티글리츠 컬럼비아 대학 교수나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서는 “자본주의가 시작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날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지금의 자본주의는 그냥 자본주의가 아니라 ‘국가 자본주의’이며, 미국의 경제 역시 국가에 크게 의존한다. 따라서 시장 근본주의가 추동한 금융자유화는 한 시대를 마감하겠지만 국가 자본주의 자체는 전혀 위협받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미국 제국 몰락의 징후인가
반면 하워드 진 미국 보스턴 대학 명예교수는 현재의 경제위기에 대해 “미국 제국의 몰락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주요 중간역”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지난 10월2일 영국의 일간 가디언 웹사이트에 올린 글을 통해 2001년 9·11사태가 미국 제국 몰락의 첫 번째 징후라면 “무능과 탐욕이라는 두 가지 특징으로 유명한 거대 금융기관들에 납세자들이 낸 세금 7000억 달러를 쏟아붓기로 (공화·민주) 양대 정당이 서둘러 합의한 것”이 또 다른 징후라고 지적했다.



세계체제론을 주장해온 이매뉴얼 월러스틴 예일 대학 석좌교수는 지금의 경제위기가 단순한 경기침체(recession)가 아니라 전세계적 불황(depression)의 시작이라고 단언한다. 장기적인 수준에서 자본주의의 위기를 논해온 월러스틴은 10월15일 미국 빙햄턴 대학 페르낭브로델센터 홈페이지에 올린 논평을 통해 파생상품이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석유 투기세력을 위기의 주범으로 지목하는 것은 ‘책임 떠넘기기’이며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월러스틴은 현재의 불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여러 저서에서 펴온 논리대로 장기적 수준의 헤게모니 주기와 중기적 수준의 콘트라티예프(경기 사이클) 파동에 주목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먼저 장기적인 헤게모니 주기를 보면 미국은 1873년 영국에 대항하는 국가로 떠오른 뒤 1945년 헤게모니를 완전히 구축했고, 1970년대 이후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월러스틴은, 미국의 헤게모니는 부시 대통령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추락의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으며 미국이 여전히 강대국이지만 수십 년 안에 힘이 약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새 질서는 좋은 것일 수도, 나쁜 것일 수도
콘드라티예프 파동은 이와 좀 다른데 세계경제는 1945년 이후 기록적인 호황 국면을 이어가 1967~1973년 최정점을 찍은 후 하향세로 돌아섰다. 하지만 이 하향세는 그전과 달리 오래 지속되어왔다. 미국 재무부와 연방준비이사회, 국제통화기금(IMF), 유럽과 일본의 협력자들이 주기적으로 시장에 개입했기 때문이라는 게 월러스틴의 설명이다.

1987년 주가 폭락, 1989년 저축대부조합 파산,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1998년 롱텀캐피탈매니지먼트 사태, 2001~2002년 엔론 사태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은 세계경제를 지탱하기 위해 시장에 개입했고 그 덕분(?)에 콘트라티예프 하강 국면이 길어졌을 뿐이다. 월러스틴은 하지만 이같은 개입에는 본질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결국 지금 그 한계에 도달했다고 지적한다.

월러스틴의 전망은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다. “현재의 체제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것을 대체할 새 질서는 무수한 개별 투쟁의 결과일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질서인지를 예측할 수는 없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는 아닐 것이지만 양극화되고 위계적인 더 나쁜 것일 수도 있고, 비교적 민주적이고 평등한 더 좋은 것일 수 있다. 새로운 체제를 선택하는 것이 지금 시기 지구적 차원에 벌어지는 주요 정치투쟁이다.”

미국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먼슬리 리뷰> 편집장인 존 벨라미 포스터는 더 급진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포스터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역사상 극심한 위기 중 하나에 직면했다. 대공황 이후 자본주의 세계에서 이렇게 나쁜 적이 없었다”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 위기는 “금융시장에 돈을 쏟아붓거나 금리를 낮춘다고 해결될 수 있는 유동성 위기가 아니며 ‘미국식’ ‘자유시장’ 금융자본주의 모델의 총체적인 몰락의 징조이다”라고 평가한다.

부자들 도와주는 게 사회주의?

그는 또 미국과 유럽의 은행 국유화를 사회주의나 급진주의로 혼돈해서는 안 되며 그것은 단지 “전면적인 부채 디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취한 임시 조처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포스터는 지금의 경제위기에 따른 고통이 온전히 노동자 계급의 몫일 수밖에 없으며 좌파는 “고장난 체제를 수리하려 들 게 아니라 경제 피라미드의 맨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비판도 흥미롭다. 지젝은 <런던서평> 웹사이트에 기고한 글을 통해 부시 미국 대통령이 2001년 9·11 직후와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미국민에게 한 연설에서 공통점을 끄집어낸다. 부시 대통령이 두 연설에서 모두 미국적 삶의 방식에 대한 위협, 그리고 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신속하고도 단호한 행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지젝은 또한 부시 대통령이 미국적 가치―9·11 당시에는 개인의 자유 보장, 지금은 시장 자본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바로 그 가치들을 부분적으로 보류할 것을 미국 국민에게 요구했다고 지적했다.

구제금융안을 놓고 벌어진 ‘사회주의’ 논란에 대해 지젝은 “금융구제안이 정말로 ‘사회주의적’인 조처라면 아주 기발한 것”인데 “왜냐하면 가난한 이들이 아니라 부자들을, 돈을 빌리는 쪽이 아니라 빌려주는 쪽을 도와주는 것이 목적인 ‘사회주의적’ 조처이기 때문”이라며 코웃음을 쳤다. 그는 “자본주의를 수호하는 데 복무한다면 ‘사회주의’도 괜찮다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덧붙였다.

지젝은 국가의 개입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현재 금융위기마저도 사실은 국가 개입의 산물이라고 지적했다. 2001년 닷컴 버블 붕괴에 대한 대책으로 금리를 내려 부동산으로 자금을 끌어들인 결과 현재의 금융위기가 왔다는 것이다. 그가 든 아프리카 말리의 예는 자유시장의 실체를 잘 보여준다. 말리에서는 면화 재배와 축산업이 가장 규모가 컸는데 서구 열강이 자신들은 지키지 않는 규칙을 강요하는 바람에 두 산업 모두 위기에 처해 있다. 미국 정부는 자국 면화재배 농가를 보호하는 데 말리의 1년 국가예산보다 많은 돈을 지출하고, 유럽연합은 또 1년에 소 한 마리당 500유로의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젝이 여기서 강조하고자 한 것은 시장은 전혀 중립적이지 않으며 항상 정치적 결정에 의해 규제받는다는 것이다. 그는 “진짜 딜레마는 ‘국가 개입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국가 개입이냐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그가 보기에 이것이야말로 진짜 정치, 즉 우리 삶을 지배하는 조건을 규정하는 투쟁이다. 지젝은 금융구제안을 놓고 벌이는 토론은 우리의 사회적·경제적 삶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며 “이제 행동을 할 게 아니라 말을 해야 한다”라고 했다.

하워드 진도 ‘자유시장’이라는 환상을 깨뜨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한 번도 자유시장을 가져본 적이 없고 정부의 개입은 항상 있어왔다는 것이다. 그는 “7000억 달러를 부실 금융기관에 지원할 것이 아니라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직접 주는 것이 대안이다”라며 주택 소유자가 모기지론을 갚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연방 고용 프로그램을 만들어 일자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올해 86세인 노장 역사학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독립선언문이 약속한 것, 바로 만인의 생명·자유·행복 추구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정부의 책임이라는 것을 선동하고 조직하라. 그런 과감한 접근만이 미국을, 제국이 아닌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미국을 지킬 수 있다.”(윤재설 자유기고가)

08. 10. 30.

P.S. <런던서평>에 기고한 지젝의 글은 아래와 같다(http://www.lrb.co.uk/v00/n03/zize01_.html).

Don’t Just Do Something, Talk

Slavoj Žižek

One of the most striking things about the reaction to the current financial meltdown is that, as one of the participants put it: ‘No one really knows what to do.’ The reason is that expectations are part of the game: how the market reacts to a particular intervention depends not only on how much bankers and traders trust the interventions, but even more on how much they think others will trust them. Keynes compared the stock market to a competition in which the participants have to pick several pretty girls from a hundred photographs: ‘It is not a case of choosing those which, to the best of one’s judgment, are really the prettiest, nor even those which average opinion genuinely thinks the prettiest. We have reached the third degree where we devote our intelligence to anticipating what average opinion expects the average opinion to be.‘ We are forced to make choices without having the knowledge that would enable us to make them; or, as John Gray has put it: ‘We are forced to live as if we were free.’

Joseph Stiglitz recently wrote that, although there is a growing consensus among economists that any bailout based on Henry Paulson’s plan won’t work, ‘it is impossible for politicians to do nothing in such a crisis. So we may have to pray that an agreement crafted with the toxic mix of special interests, misguided economics and right-wing ideologies that produced the crisis can somehow produce a rescue plan that works – or whose failure doesn’t do too much damage.’ He’s right: since markets are effectively based on beliefs (even beliefs about other people’s beliefs), how the markets react to the bailout depends not only on its real consequences, but on the belief of the markets in the plan’s efficiency. The bailout may work even if it is economically wrong.

There is a close similarity between the speeches George W. Bush has given since the crisis began and his addresses to the American people after 9/11. Both times, he evoked the threat to the American way of life and the necessity of fast and decisive action to cope with the danger. Both times, he called for the partial suspension of American values (guarantees of individual freedom, market capitalism) in order to save the same values.

Faced with a disaster over which we have no real influence, people will often say, stupidly, ‘Don’t just talk, do something!’ Perhaps, lately, we have been doing too much. Maybe it is time to step back, think and say the right thing. True, we often talk about doing something instead of actually doing it – but sometimes we do things in order to avoid talking and thinking about them. Like quickly throwing $700 billion at a problem instead of reflecting on how it came about.

On 23 September, the Republican senator Jim Bunning called the US Treasury’s plan for the biggest financial bailout since the Great Depression ‘un-American’: Someone must take those losses. We can either let the people who made bad decisions bear the consequences of their actions, or we can spread that pain to others. And that is exactly what the Secretary proposes to do: take Wall Street’s pain and spread it to the taxpayers . . . This massive bailout is not the solution, it is financial socialism, and it is un-American.

Bunning was the first publicly to give the reasoning behind the GOP revolt against the bailout plan, which climaxed in its rejection on 29 September. The resistance was formulated in terms of ‘class warfare’, Wall Street against Main Street: why should we help those responsible (‘Wall Street’) and let ordinary borrowers (on ‘Main Street’) pay the price for it? Is this not a clear case of what economists call ‘moral hazard’? This is the risk that someone will behave immorally because insurance, the law or some other agency protects them against any loss that his behaviour might cause: if I am insured against fire, for example, I might take fewer fire precautions (or even burn down my premises if they are losing me money). The same goes for big banks, which are protected against big losses yet able to retain their profits.

That the criticism of the bailout plan came from conservative Republicans as well as the left should make us think. What left and right share in this case is their contempt for big speculators and corporate managers who profit from risky decisions but are protected from failures by ‘golden parachutes’. In this respect, the Enron scandal of January 2002 can be interpreted as an ironic commentary on the notion of a risk society. Thousands of employees who lost their jobs and savings were certainly exposed to risk, and had little choice in the matter. However, the top managers, who knew about the risk and also had the opportunity to intervene in the situation, minimised their exposure by cashing in their stocks and options before the bankruptcy. So while it is true that we live in a society that demands risky choices, it is one in which the powerful do the choosing, while others do the risking.

If the bailout plan really is a ‘socialist’ measure, it is a very peculiar one: a ‘socialist’ measure whose aim is to help not the poor but the rich, not those who borrow but those who lend. ‘Socialism’ is OK, it seems, when it serves to save capitalism. But what if ‘moral hazard’ is inscribed in the fundamental structure of capitalism? The problem is that there is no way to separate the welfare of Main Street from that of Wall Street. Their relationship is non-transitive: what is good for Wall Street isn’t necessarily good for Main Street, but Main Street can’t thrive if Wall Street isn’t doing well – and this asymmetry gives an a priori advantage to Wall Street.

The standard ‘trickle-down’ argument against redistribution (through progressive taxation etc) is that instead of making the poor richer, it makes the rich poorer. However, this apparently anti-interventionist attitude actually contains an argument for the current state intervention: although we all want the poor to get better, it is counter-productive to help them directly, since they are not the dynamic and productive element; the only intervention needed is to help the rich get richer, and then the profits will automatically spread down to the poor. Throw enough money at Wall Street, and it will eventually trickle down to Main Street. If you want people to have money to build, don’t give it to them directly, help those who are lending it to them. This is the only way to create genuine prosperity – otherwise, the state is merely distributing money to the needy at the expense of those who create wealth.

It is all too easy to dismiss this line of reasoning as a hypocritical defence of the rich. The problem is that as long as we are stuck with capitalism, there is a truth in it: the collapse of Wall Street really will hit ordinary workers. That is why the Democrats who supported the bailout were not being inconsistent with their leftist leanings. They would fairly be called inconsistent only if we accept the premise of Republican populists that capitalism and the free market economy are a popular, working-class affair, while state interventions are an upper-class strategy to exploit hard-working ordinary people.

There is nothing new in strong state interventions into the banking system and the economy in general. The meltdown itself is the result of such an intervention: when, in 2001, the dotcom bubble burst, it was decided to make it easier to get credit in order to redirect growth into housing. Indeed, political decisions are responsible for the texture of international economic relations in general. A couple of years ago, a CNN report on Mali described the reality of the international ‘free market’. The two pillars of the Mali economy are cotton in the south and cattle in the north, and both are in trouble because of the way that Western powers violate the same rules that they impose so brutally on Third World nations. Mali produces cotton of the highest quality, but the US government spends more money to support its cotton farmers than the entire state budget of Mali, so it is small wonder that Mali can’t compete. In the north, the European Union is the culprit: the EU subsidises every single cow to the tune of five hundred euros a year. The Mali minister for the economy said: we don’t need your help or advice or lectures on the beneficial effects of abolishing excessive state regulations; just, please, stick to your own rules about the free market and our troubles will be over. Where are the Republican defenders of the free market here? Nowhere, because the collapse of Mali is the consequence of what it means for the US to put ‘our country first’.

What all this indicates is that the market is never neutral: its operations are always regulated by political decisions. The real dilemma is not ‘state intervention or not?’ but ‘what kind of state intervention?’ And this is true politics: the struggle to define the conditions that govern our lives. The debate about the bailout deals with decisions about the fundamental features of our social and economic life, even mobilising the ghost of class struggle. As with many truly political issues, this one is non-partisan. There is no ‘objective’ expert position that should simply be applied: one has to take a political decision.

On 24 September, John McCain suspended his campaign and went to Washington, proclaiming that it was time to put aside party differences. Was this gesture really a sign of his readiness to end partisan politics in order to deal with the real problems that concern us all? Definitely not: it was a ‘Mr McCain goes to Washington’ moment. Politics is precisely the struggle to define the ‘neutral’ terrain, which is why McCain’s proposal to reach across party lines was pure political posturing, a partisan politics in the guise of non-partisanship, a desperate attempt to impose his position as universal-apolitical. What is even worse than ‘partisan politics’ is a partisan politics that tries to mask itself as non-partisan: by imposing itself as the voice of the Whole, such a politics reduces its opponents by making them agents of particular interests.

This is why Obama was right to reject McCain’s call to postpone the first presidential debate and to point out that the meltdown makes a political debate about how the two candidates would handle the crisis all the more urgent. In the 1992 election, Clinton won with the motto ‘It’s the economy, stupid!’ The Democrats need to get a new message across: ‘It’s the POLITICAL economy, stupid!’ The US doesn’t need less politics, it needs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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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르르 2008-10-30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도 뭔가 이런 말들을 내놓는 학자들을 보고 싶어지네요.
(오마이,한겨레,프레시안등등에 글을 쓰시는 많은 학자분들이 많지만)

지젝님의 사진은 적목감소가 필요해보입니다. ^^.

로쟈 2008-10-30 23:46   좋아요 0 | URL
사진이 그렇게 찍혔네요...^^;

드팀전 2008-10-30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기사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좀 더 긴 기획으로 썻으면 좋았을텐데 라는 생각을 했더랫지요.^^ 제가 진보적인 모인사와 이야기하다 '현재 한국의 경제 위기가 단순히 이명박-강만수 라인때문만은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했다가 '그딴 의식 가지고는...'이라는 눈흘김을 받았더랬습니다. ^^ 그래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명박-강만수를 잡아족치면 바야흐로 시작되는 대공황(?)이 우리를 멀리 피해간다.' 뭐 그렇게 가자구요. '자본'을 너무 우습게 아는 것 같아요. 이명박-강만수보다 더 얕잡아보는 태도라니. 요즘 이슈가 되는 진보적인 분을 만나고 나온 푸념입니다.^^

로쟈 2008-10-30 23:51   좋아요 0 | URL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니 그것도 가능성이 없진 않겠죠...^^;

람혼 2008-10-31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글에서 몇몇 부분이 정말 가슴에 와닿는군요(올려주신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첫째, 7번째 단락의 "What left and right share in this case is their contempt for big speculators and corporate managers who profit from risky decisions but are protected from failures by 'golden parachutes'.": 근본적으로 금융자본의 어떤 '범죄'에서 초래된 위기를 경제주체들 개개의 '일반적' 위기(원죄?)로 '환원'하여 '고통'의 분담을 요구하는('달러를 모읍시다!') 정치권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아니면 허망한 '747공약' 같은 것의 그늘 아래 묻어두고 모르쇠로 일관하던 '이명박 개인재산 헌납'의 공약을 확실히 지키던가요...ㅎㅎ). 얼마 전 제주도에서 열렸던 해외 한상(韓商)들의 모임에서 고국을 돕고자(?) '자발적으로' 달러 계좌 만들기 운동이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씁쓸하고 절망적인 기분까지 들었습니다. 또한 '낙하산'이라는 말도 현재 국내 상황과 맞물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새겨들어야 할 말로 보입니다. 둘째, 11번째 단락의 "There is nothing new in strong state interventions into the banking system and the economy in general. The meltdown itself is the result of such an intervention:[...]": '규제완화'와 '민영화'라는 미명 아래 경제에 대한 가장 강력한 개입을 행하고 있는 현 정부(아, 너무도 '작은' 정부가 아닐 수 없습니다)의 구성원들은 '돈'은 좀 알지 몰라도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해서는 실로 무지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국내에서 가장 '비즈니스-프렌들리'하다고 할 한 신문에서 얼마 전 '케인즈주의'의 부활과 전망을 운운하는 것을 보고는 사실 할 말을 잃었는데요, 자본주의에 대해 가장 잘 알 것 같은 언론인이 '자본'은 물론이고 '국가'조차도 너무 안이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해서 또 한 번 절망감을 맛보았습니다). '경제' 대통령이 '경제' 자체로 곤란을 당한 상황에서, 거기에 덧붙여 언론 장악과 공안 정국의 형성을 통해 도달한 결과는, 아마도 말 그대로 이 정부 자체가 눈 녹듯이 '녹아 내리는(melt down)' 일이 아닐까 하는데요, 이에 관해서는 나름 내심 '기대감'까지 갖고 있습니다...

드팀전 2008-10-31 08:10   좋아요 0 | URL
^^ 미국이 공적자금을 금융살리기에 쏟아 붓기로 결정했을 때 나왔던 말도 그와 같은 것 아닐까 싶습니다. 몇 몇 뛰어난 천재들(금융전문가)이-파생금융상품의 진화는 천재적이라고 하더군요- 저질러 놓은 짓을 국민의 세금을 충당한다는 비난이 일었지요. 제 개인적으로는 미국 경제와 대미의존도가 압도적인 한국경제의 전망에 상당부분 비관적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분간 뭘로 막아도 힘들지도 모른다는...우석훈이 몇 년안에 남미 경제처럼 갈 수도 있다라는 예견이 비록 과장은 있더라고 완전SF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차리리 람혼님 말처럼 '녹아내리고' 새로운 모델을 기획하는 것이 살 길처럼 보입니다. 그 시간동안 -일본이 장기불황에서 벗아나는데 10년이 넘겨걸리지 않았습니까-서민들은 '죽지마 부활할거야'라는 근성으로 살아남아야 하는게 이 시대의 실존적인 비극같습니다. 이명박이 최근에 뻘짓하는 부동산 부양책등은 밀물이 이미 들어오는 상황에서 모래성 무너진다고 같은 자리에 모래를 더 붓고 있는 짓처럼 보입니다. 부으면 부을 수록 더 떠밀려갈텐데...현 대통령을 비롯해서 현 경제팀이 평생 배운것이 그것뿐이니 말려도 말을 안들을 듯 합니다. 결국 오늘의 메시지는 "죽지말고 살아서 만납시다" 가 아니런지..^^ 영화배우 람혼님.

로쟈 2008-11-01 08:43   좋아요 0 | URL
흠, 우리가 곧 녹아내리게 되는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10-31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시장경제주의자들의 모순은 규제완화를 위해 정부가 개입해야한다는 겁니다.그래서 정부가 개입했는데 경제는 여전히 안 좋아지면 정부가 규제를 했기 때문에 그렇다...완전히 민간주도형으로 기업에 맡겼으면 형편이 좋아졌을 것이다...뭐 이런 식이죠.그리고 대안이라고 내놓으면 역시 프리드먼과 케인즈 방식을 왔다 갔다 할 뿐인 것 같습니다.

로쟈 2008-11-01 08:46   좋아요 0 | URL
문제는 항상 '어떤 종류의 개입이었느냐'였다는 지젝의 지적을 좀더 음미해봐야겠습니다. 공산주의가 승리할 거란 지젝의 비밀(예언)이 농담이 아닌 것처럼 여겨집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1-01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개입이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규제도 개입이고 지원도 개입이니까요.

우야 2008-11-20 0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t’s the POLITICAL economy, stupid!’ 라니 조금 재미있네요. 정확하게 숀 호머가 지젝의 맑시즘을 비판했던 글의 제목 그대로군요...

로쟈 2008-11-20 09:26   좋아요 0 | URL
지젝의 입장에 대해서는 http://blog.aladdin.co.kr/mramor/2295099도 참조하시길...
 

중앙대 대학원신문에서 해외학술동향에 관한 기사를 옮겨놓는다. '이탈리아와 삶정치'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데, 국내에 이미 소개된 아감벤과 네그리와는 다른 방향의 철학적 사유를 이끌고 있는 로베르토 에스포지토의 철학이 소개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삶정치'라는 번역어에는 유보적이지만 'biopolitics'가 갖는 다양한 함축을 어떻게 옮길 수 있을지는 더 생각해봐야 할 듯싶다(국내에서는 '삶정치' 외에 '생명정치' '생체정치' 등의 역어들이 쓰이고 있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8. 10. 03) 에스포지토, 아감벤과 네그리를 넘어서

<호모 사케르>로 유명한 조르조 아감벤은 삶정치를 권력이 아무런 매개 없이 순수한 생물학적 삶과 대면하게 되는 정치라고 엄격하게 규정한 바 있다. 이와 달리 <제국>의 안토니오 네그리는 늘 넘쳐나기 때문에 결국 전복적일 수밖에 없는 삶의 힘과 삶정치를 적극적으로 동일시한다. 비록 이탈리아 밖까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비오스: 삶정치와 철학>(2004)이라는 저서를 통해 기존의 삶정치 관련 논쟁에 핵심적이고 도전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로베르토 에스포지토는 또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탈리아 나폴리대학 정치철학 교수로 재직 중인 에스포지토는 삶정치라는 개념이 최근 학계 전반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지만 여전히 적절하게 범주화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개념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게(혹은 상반되게)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가령 네그리가 ‘장밋빛’처럼 묘사하고 있는 삶정치는 아감벤이 ‘부정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삶정치와 극도로 대비된다.

면역화 패러다임으로 새롭게 본 삶정치
에스포지토는 이런 불일치를 설명하려면 미셸 푸코가 삶정치라는 개념을 처음 정식화했을 때부터 존재했던 개념상의 불확실성을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푸코는 근대주권과 동시대 삶정치의 관련성 같은 핵심 쟁점에 명확하게 답하지 않았다. 푸코가 말한 근대주권과 삶정치라는 두 체제는 오직 죽음을 배경으로 해서만 각각의 의미를 획득할 뿐이기 때문에 양자가 서로를 배제하는지 안 하는지의 여부가 불확실하다. 한편으로 푸코는 삶정치의 지평 내에서 억압적인 주권 패러다임이 회귀하는 것처럼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렬한 생명의 힘이 해방됨으로써 그 자체를 넘쳐흐르고 결국 그 자체에 맞서게 되면 주권적 질서가 궁극적으로 소멸된다”(에스포지토, “삶정치, 면역성, 공동체성”, <삶정치: 한 개념의 이야기와 현재성>, 2005, 159쪽)고 정반대의 가설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이런 난점은 푸코가 삶정치를 분석하면서 드러낸 더 심각한 문제의 부산물일 뿐인데, 푸코는 정치와 삶의 연관성을 외재적인 방식으로만 생각한다. 비록 정치와 삶이 서로에게 갖는 함의를 적절히 주제화하긴 했지만, 여전히 푸코의 작업에서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궤도 내에서 근접해 있는 양극(삶과 정치) 자체의 윤곽이나 특성이 규정되어 있지 않다”(“삶정치, 면역성, 공동체성”, 160쪽)는 것이다.

에스포지토의 독창성은 ‘면역화 패러다임’을 통해 이처럼 모호하게 정의된 정치와 삶의 유기적 연계성을 탐구한다는 데 있다. 그는 임신-출산의 생물학적 과정을 예로 들어 면역화 패러다임을 설명한다. 산모의 면역체계는 자기 몸속에 존재하는 태아의 상이한 면역체계에 내성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태아를 유산의 위험에서 막아주기도 한다. 이 경우에 면역은 이질적인 것을 가로막는 방어벽이나 무기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질적인 것과 상호소통할 때 사용하는 ‘여과장치’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산모가 자신의 몸과 태아에게 실천하는 생명의 보호는 태아의 생명에 대한 순수한 긍정과 완벽히 일치하는 것으로서, 산모의 면역은 신생아에게 삶을 선물(munus)의 ‘형태’로 증여하는 것이자 나(산모)와 타자(태아)의 ‘집단적 현존’임과 동시에 ‘사회적 흐름’인 공동체성을 가능케 해주는 원인이다.

이런 면역화 패러다임에 입각해 삶(비오스)와 정치(노모스)의 관계를 보면, “양자는 한쪽이 다른 쪽의 세력권에 종속되는 외재적 형태로 덧붙여지거나 병치되기보다는 어떤 단일하고 확고한 전체의 두 가지 구성요소, 서로와의 관계맺음을 근거로 해서만 의미를 갖게 되는 두 가지 구성요소로 나타난다.” 요컨대 한 사회의 면역체계는 삶과 권력을 연결시켜주는 관계일 뿐만 아니라 삶이 지니고 있는 보존능력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특정한 시기’에 삶과 정치라는 두 구성물이 조우해 생겨나는 결과물로 이해된 기존의 삶정치 개념에서 전제되는 것과는 달리, “삶은 결코 권력관계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이와 동시에 권력 역시 결코 삶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는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가능성, 혹은 도구일 뿐이다”(<비오스: 삶정치와 철학>, 41~2쪽).

물론 에스포지토는 자가면역성 질병의 예처럼 면역화의 과잉이 삶을 괴멸시킬 위험도 경고한다.  그가 보기에 오늘날의 국제정치는 ‘면역강박’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이 그 전형인데, 면역강박이란 면역화가 한계를 넘어설 만큼 팽창된 탓에 그 자체가 삶을 위협하게 되는 상태이다. 이처럼 “삶에 ‘부과되는’ 정치”, 즉 삶을 자신에게서 분리된 종속적 대상으로 간주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면역화 패러다임의 근거 자체를 폐제하는 삶권력에 맞서서, 철학자들은 “삶에 ‘대한’ 정치” 혹은 “삶‘의’ 정치”, 즉 ‘긍정적 삶정치’를 정식화할 필요가 있다고 에스포지토는 주장한다.

긍정적 삶정치의 사유가 철학자들의 과제이다
또 한편으로 에스포지토는 출산이 ‘최악의 타나토폴리틱스’가 저지른 범죄를 정당화해주는 부정적인 삶정치의 범주로 악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공식적인 유전적 규약을 활용해 독일을 갱생시키려고 했던 나치의 출산장려운동이 30만 명을 강제로 불임시킨 법률의 공표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그는 (르완다 내전에서 인종적 강간으로 이어진 ‘강제적 출산’ 같은 최악의 경우에서조차) 출산은 결국 “삶의 힘이 여전히 죽음의 힘보다 우세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가장 전형적이고 고지식하고 심지어 반동적이기까지 한 기독교계의 낙태반대 주장을 놀랍도록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는 그가 왜 나치즘을, 무엇보다도 출산을 두려워한 죽음의 정치로 간주하는지를 잘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생명의 선(先)억압”(태어나지도 않은 생명을 미리 억압하는 것)이 나치의 가장 견고한 면역장치가 됐던 이유는 통제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출산 자체가 나치의 인종 개념이 전제하는 ‘기원’의 “원초적 이중성”을 폭로함으로써 특정한 정체성(순수한 아리아족)에 근거한 나치 정치를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제3제국에 거주한 사람들의 정치적 역할을 결정했던 것은 출생이 아니라 출생의 가치를 미리 결정해놓은 정치적-인종적 도식에서 그들이 차지했던 위치였다.(로렌조 키에사 / 영국 켄트대학 유럽문화·언어학부 교수)

로렌조 키에사(Lorenzo Chiesa)는 유럽 현대철학 전문가로서 올해 영국 켄트대학에서 개최된 국제심포지엄 ‘오늘날의 이탈리아 사상: 삶정치, 니힐리즘, 제국’을 기획·조직했다. 주요 저서로 <주체성과 타자성: 철학으로 읽는 라캉>(MIT Press, 2007) 등이 있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8. 10. 03) 이탈리아와 삶정치

현재 주요 삶정치 관련 논쟁의 진원지는 이탈리아이다. 이탈리아는 네그리, 아감벤, 에스포지토뿐만 아니라 지난 8년 동안에만 22권의 삶정치 연구서와 수백 편의 논문들을 선보였다. 이에 본지는 몇몇 주요 연구자들과의 서면인터뷰를 통해 이탈리아에서 삶정치 개념이 각광받고 있는 이유를 살펴봤다.

마이클 하트(듀크대학), 티모시 머피(오클라호마대학), 티모시 켐벨(코넬대학) 등은 1968년을 전후로 급격하게 변화를 거듭해온 이탈리아의 정치상황을 가장 큰 원인으로 꼽았다. 이탈리아 사상가들은 프랑스 현대철학을 활용해 이 급변의 시기를 돌파할 수 있는 급진적 정치프로젝트를 고안하려 애써왔는데, 최근의 삶정치 연구는 이런 노력의 또 다른 변형이라는 것이다.

한편 아감벤과 에스포지토는 유럽(북반부)과 지중해(남반부)의 문화가 혼합된 이탈리아의 ‘특수성’을 그 원인으로 제시했다. 이 특수성은 토마소 캄파넬라에서 안토니오 그람시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 학자들이 역사(정치)와 자연(삶/생명), 즉 인간의 삶과 세계의 삶이 맺고 있는 관계를 해명하는 데 천착하도록 강제했는데, 자신들의 연구는 이런 전통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잇고 있다는 것이다.

한때 급진적 사유는 독일의 철학, 영국의 경제학, 프랑스의 정치학을 원천으로 삼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프랑스의 철학, 미국의 경제학, 이탈리아의 정치학이 급진적 사유의 젖줄이 되고 있다. 이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우리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이재원 편집위원)

08.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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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mer 2008-10-19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기사를 읽고 다음날 그의 책 두 권을 대강 훑어 봤는데요,(communitas, immunitas) 그의 방법론이 아감벤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고는 '이탈리와 효과'라고 명명해지는 게 어쩌면, 르네상스-스콜라적 방법론의 귀환인 건 아닐까 싶더군요. biopolitics이든 ausnahmezustand든 과잉기표를 정초시키고,그것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해 내려는 시도라는 측면에서 말이죠. 한편으론 삶정치가 유럽에서 규범화의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검토되는 것을 보고 놀랐는데, 그 차이를 푸코의 저작에 내재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니 귀가 솔깃해지네요.

로쟈 2008-10-20 18:52   좋아요 0 | URL
저도 부정적인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사를 읽으니 양면성이 있다는군요...

나디스 2008-10-19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코의 두 강의로부터 연유하는 biopolitics(저는 생정치라는 역어를 선호하는데...)의 흐름이 다소 도덕적 색체가 가미된 이탈리아식 '삶정치'의 흐름으로 뻗어나가는 듯 합니다. 똑같이 푸코를 경유하면서도 '정치학'보다는 '정치철학'에 방점을 찍는 듯한 이러한 흐름과 영국의 'Economy and Society'지를 중심으로 정치학, 경찰학, 행정학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방식과의 차이가 흥미롭습니다(소위 '통치성 학파'라 불리기도 한다죠.) 권력의 테크놀로지적 측면을 중시하는 푸코의 문제의식이 후자와 더욱 가깝다는 점에서, 국내에선 주로 전자가 소개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운 지점이구요. 한국의 지식인들이 행정학보다 정치철학을 선호하긴 하는 듯...ㅎㅎ

로쟈 2008-10-20 18:54   좋아요 0 | URL
'삶정치'는 어색한 조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애초에 '벌거벗은 생명'(생체)이 갖는 뉘앙스를 못 살려주는 듯해요...

chasm 2008-10-20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요즘 번역하는 책때문에 biopolitics의 번역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저도 위에 얀웬리님처럼 "생(生)정치"라는 번역을 더 선호하는데(일본에서 사용되는 일반적인 번역어이기도 하죠), 한자 生이라는 개념에 삶과 생명이라는 두가지 의미가 모두 포괄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biopolitics를 "삶정치"라고 번역하는 것은 아무래도 베르그송 식의 생기론적 사유에 맞닿아 있는 자율주의 진영의 해석이 너무 강하게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니콜라스 로즈나 통치성 학파의 입장(이분들은 최근 유전공학의 문제를 푸코의 틀로 해석하려고 시도하고 있죠)에 좀 더 가까운 "생명정치"라는 번역어도 그닥 정확하지 않은 것은, 푸코가 자신의 강의에서, biopolitics의 일차적인 대상은 출생, 사망, 질병관리같은 생명현상이지만 그 궁극적 대상은 단순한 being을 넘어선 인간의 well-being(bien-etre)전반, 즉 세속적 구원의 문제를 포함한 삶 전체의 관리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지요.

고대 그리스에 박학했던 푸코가 zoe와 bios의 구분을 몰랐었을리는 없고, 그렇다면 푸코가 biopolitics이란 개념으로 지적하려 했던 건, 이 두 개념의 구분을 무화시키는 근대적 권력 형태, 즉 일차적으로 생명의 관리를 대상으로 하면서 폴리스적 삶의 영역까지 관리하는 두 영역의 연결 문턱에서 작용하는 권력의 형태였을텐데, 기본적으로 이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한자권의 사유에서, 둘 모두를 적절히 포괄하는 번역어는 아쉽게나마 "생"정도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생각에 기반해 번역하는 책에서 biopolitics를 모두 생정치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블로그에 드나드시는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네요.

로쟈 2008-10-20 21:43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론 '생체정치'를 선호했는데, 중립적인 뉘앙스도 갖는다는 점에서 '생명정치'도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아시다시피 <호모 사케르>의 역자가 '생명정치'라고 옮기죠). '생정치'도 '생철학'과 같은 조어론의 연장선상에서 고려할 수 있을 거 같고요. '삶정치'는 아무래도 어색합니다(조정환씨는 '삶문학'이란 표현도 쓰죠). 김지하식 어법의 '살림의 정치'라면 차라리 낫겠습니다('죽임의 정치'에 대응하는). 어차피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면...

나디스 2008-10-21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생정치'와 유사한 의미론적 좌표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생명정치'에 한 표를 던집니다. 생정치보다 좀 더 쉽게 뜻이 와닿는다는 점에서도 장점이 있는 것 같네요. 다만 '생체정치'는 위엣분이 언급하신 것처럼 '신체(육체)'를 연상시킨다는 바로 그 이유로 부적절하다고 봅니다. 푸코가 생명정치 또는 생명권력을 개념화하면서 개인의 신체에 대해 작동하는 근대의 규율권력('감시와 처벌'의 분석대상인...)과 살아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 종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작동하는 통제권력을 구분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생정치의 대상은 생명 고유의 과정인 출생과 사망, 출산, 질병 등을 아우르는 전체로서의 집합, 즉 '인구'입니다. 인체에 대한 해부-정치학과 인구에 대한 생명-정치학의 두 계열이 있는 셈이죠. 따라서 푸코는 생정치의 권력행사 방식을 드러내는 주요한 담론으로 서구에서 18세기 후반에 발전한 인구통계학을 듭니다. 절대주의 권력이 개인의 신체를 죽이거나 살리는('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했다면, 생명권력은 출생율을 높이고 사망율을 낮추며 질병을 예방하는 등 전체 살아있는 인구의 삶의 질과 상태를 보호하고 유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죠.('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물론 그 두 가지 권력행사 방식은 서로 중첩되는 것인데, 예를 들어 '성'의 경우 어린아이의 자위를 금지하는 규율권력과 출산율을 조절하는 통제권력이 교차하며 작동합니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사람들을 살게 만드는 이 권력이 왜 현실적으로는 '생명'(개인의 신체와 인구를 모두 포함하여)을 죽이는가 라는 문제의식에서 근대 '인종주의'의 발전을 얘기하는 것이구요...

로쟈 2008-10-21 08:48   좋아요 0 | URL
'생명'이 우리말에서는 전적으로 긍정적인 뉘앙스만을 갖기 때문에 푸코적인 의미의 'biopower'나 'biopolitics'는 '생체권력' '생체정치'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처음 소개될 때는 '생체통제권력'이라고도 했죠). 다만 네그리 등이 거기에 긍정적인 색깔을 입히고 있기 때문에 다르게 번역해줘야 하는데, 같은 단어를 다르게 옮기자니 혼동의 여지도 있고 해서 '생명권력' '생명정치'란 중립적인(?) 용어를 떠올리게 되는 거구요. '삶정치'는 좀 어색한 조어입니다(푸코에게는 잘 맞지 않는)...

lefebvre 2008-10-21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기획한 기사에 관심들이 많으시군요. 즐겁습니다. ^^ 에스포지토 전에 푸코 관련 기사를 수록했는데, 그 보조기사에서 biopolitics를 어떻게 번역할까에 대해 몇 자 적은 게 있습니다. 제가 이번 기획기사에서 (네그리의 뉘앙스가 많이 나는) 삶정치라는 역어를 고육지책으로 선택한 이유를 쓴 글입니다. 참고들 하시라고 덧붙여놉니다. "Biopolitics라는 개념은 그동안 국내에서 ‘생명정치’, ‘생체정치’, ‘삶정치’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어왔다. 그리스어 비오스(bios)에서 파생된 ‘bio-’를 ‘생명’으로 옮겼을 때에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 더 나아가 생태계까지 지칭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일례로 그리스에 위치한 환경보호단체 중 하나(Biopolitics International Organization)는 단체이름에 ‘Biopolitics’를 넣고 있다. 또한 ‘bio-’를 ‘생체’로 옮겼을 때에는 생물학이나 유전학과의 관련이 강조된다. 미국의 유명한 푸코 연구자이자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 인류학과 교수인 폴 레비노우와 런던정경대학의 사회학과 교수 니콜라스 로즈가 이런 관점에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아감벤이 <호모사케르>에서 그리스어 비오스와 조에(zoe)를 구분한 뒤로는 ‘bio-’를 ‘생명’이나 ‘생체’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어렵게 됐다. 아감벤에 따르면 조에는 모든 생명체들에 공통된 ‘단순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지칭하며, 비오스는 이런 저런 개체나 집단의 특유한 ‘삶의 형식이나 방식’을 가리킨다. 그리고 아감벤은 바로 이 조에가 비오스와 구분되어 정치에서 ‘배제되는 방식으로 포함되는’ 상황을 문제삼는다. 이런 까닭에 ‘살아 있다’는 동사의 명사형인 ‘삶’을 ‘bio-’의 역어로 선택하는 게 현재로서는 더 포괄적인 듯이다."

lefebvre 2008-10-21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컨대 제 생각으로 중요한 것은 (1) 푸코가 원래 어떤 의미로 biopolitics를 썼느냐는 '이제' 부차적인 문제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biopolitics 논의는 푸코에게 많은 빚을 진 건 사실이지만, 더이상 푸코의 그것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게 분기되어 가고 있거든요. 바로 이게 제 기획의 포인트이기도 했고요. 아마 '기원' 개념을 싫어하는 푸코도 살아 있었다면 이런 데에는 별 신경을 안 썼을 것 같네요 ^^ 그렇다면 제 생각에 남는 문제는 (2) "삶정치'라는 조어가 다양하게 분기되고 있는 biopolitics 논의 일체를 (느슨하게나마) 포괄할 수 있는 조어냐, 라는 문제가 남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에 대한 제 생각은 '고육지책'입니다. 뭐랄까, 현재로서는 '삶정치'보다 포괄적인 표현을 찾지 못했다고나 할까요? 아마 연구자분들의 토론으로 이 문제가 해결될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좀 걸리겠죠? 늘 그렇듯이......

로쟈 2008-10-21 23:00   좋아요 0 | URL
아감벤의 의미를 따르더라도 'bios'는 '삶'이라고 옮기기 어려운 게 아닐까요? 단순히 살아있다는 사실, 그게 '삶'이니까요. 'bare life' 혹은 'mere life'를 뜻하는. '조에(생명)-삶(비오스)'이라는 구도는 그래서 저로선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그때의 '비오스'는 그냥 '삶'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삶'을 가리키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저는 푸코의 개념으로 처음 접하다 보니, 아무래도 '굴러온 돌'이 낯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