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에 출간소식을 전했지만(http://blog.aladin.co.kr/mramor/2349160) 랑시에르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길, 2008) 리뷰기사를 한번 더 옮겨놓는다. 마침 책의 영역본을 한참 찾다가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충분히 예상했던 기사이다). 책은 끝내 찾지 못했고 낮에 인터넷에 떠 있는 걸로 보았던(전문이 올라와 있었다) 것도 다시 찾지 못했다(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게다가 러시아어본도(보통 인터넷에 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의 경우는 일부만이,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만이 올라와 있다).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다. 국역본을 좀더 꼼꼼하게 읽기 위해서 찾은 것인데, 여하튼 낭패다(국역본만으로는 모호하거나 해독되지 않는 대목이 적지 않다). 주말 북리뷰들이 올라오는 걸 보고 나대로의 서평을 쓸 것인지 판단해봐야겠다... 

한겨레(08. 10. 18) 정치가 종말을 고했다고요?

‘불화’ 개념으로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68·사진)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가 양창렬(파리1대학 박사과정)씨의 번역으로 나왔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감성의 분할>에 이은 랑시에르 저서의 세 번째 번역본이다.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원본은 두 번에 걸쳐 출간됐는데, 초판본과 재판본의 차이가 크다. 1986~1988년 사이에 쓴 논문 세 편을 묶은 초판본(1990)은 1980년대 이전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적 사유가 압축돼 있다. 랑시에르는 1990년대에 쓴 논문 네 편을 덧붙여 1998년에 증보판을 다시 펴냈다. 특히 이 증보판에는 그의 대표작인 <불화>(1996)에서 전개한 사유가 ‘정치에 대한 10가지 테제’라는 이름으로 요약돼 실렸다. 이로써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는 랑시에르의 첫 번째 정치철학 저서로 태어나 그의 사유를 가장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저작이 됐다. 한국어판은 1998년의 증보판을 옮긴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은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정치적 정황 속에서 태어난 것들이다. 마르크스주의의 혁명론이 패퇴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했다고 선언되던 때였다. 이 시기에 유행한 정치철학적 담론으로 랑시에르는 크게 두 가지를 거론한다. ‘정치의 종언’과 ‘정치의 회귀(귀환)’가 그것들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테제로 대표되는 ‘정치의 종언’은 계급투쟁으로서의 정치가 종말을 고했다고 선언했다. 다른 한편에선 ‘진정한 정치로 회귀할 때가 됐다’라는 레오 스트라우스의 정치철학적 선언이 떠돌았다. 경제적 이익을 둘러싼 갈등·조정으로서의 근대 정치를 뛰어넘어 고대 그리스의 ‘순수 정치’로 회귀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랑시에르는 언뜻 대립되는 이 두 담론이 실은 해방의 정치를 제거하는 똑같은 기능을 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이 두 담론 사이에서 제3의 길을 모색하면서 ‘정치’를 다시 사유하려고 한다. 그 사유가 응집된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이며, 이 책은 그 개념을 설명하는 여정들의 묶음이라고 할 수 있다.

랑시에르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드러내기 위해 구사하는 전략이 ‘치안’과 ‘정치’의 구분이다. 여기서 치안과 정치는 직접적으로 대립한다. 랑시에르는 우리가 흔히 정치라고 이르는 것을 두고 치안(police)이라고 지칭한다. 치안이란 간단히 말하면, 국가를 경영하는 기술이다. 치안은 통치 과정이다. 인간들을 공동체(국가)로 결집시켜 동의를 조직하고, 그들 각자에게 자리와 기능을 분배해 위계를 유지시키는 것이 치안이다. 자유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정치가 전형적인 치안에 해당한다. 랑시에르는 이 치안에 정치를 맞세운다. 정치란 평등 과정이며 해방 행위다. 그것은 치안의 질서를 가로질러 그 위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분배의 질서를 해체하는 작업이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이란 바로 이 치안과 정치가 맞부딪치는 지점을 가리킨다. 치안과 정치가 부딪쳐 형성되는 선이 곧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 테두리, 경계인 셈이다.

랑시에르는 정치와 치안의 이 관계를 ‘도로’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냥 지나 가시오! 여기에 아무것도 볼 것 없어!” 치안은 통행 공간이 통행 공간일 뿐이라고 말한다. 정치는 이 통행 공간을 주체들(인민·노동자·시민)의 시위 공간으로 바꿈으로써 성립한다. 정치의 출현과 함께 치안 질서는 순간적으로 와해되고 새로운 공간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때 치안과 정치가 충돌하는 지점을 두고 그는 ‘정치적인 것’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정치와 치안의 관계는 랑시에르가 <감성의 분할>에서 상술한 ‘감각적인 것의 나눔’(감성의 분할)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정치든 치안이든 감각적인 것을 나누는 행위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치안은 ‘여기엔 아무것도 볼 것이 없어!’라고 말하는 데서 드러나듯이, 감각·지각하는 일에서 어떤 특정한 질서를 고집한다. 반면에 정치는 여기에 볼 것이 있고, 할 것이 있고, 명명할 것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감각·지각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킨다.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에서 성립하던 시기에 그 사회의 하층민이었던 데모스(인민)는 기존 지배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들리지 않는 존재였다. 인민의 말은 말이 아니라 소음이었다. 그들이 스스로 정치 주제가 됨으로써 보이고 들리고 말하는 존재로 바뀌었다. 정치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 소음으로만 들릴 뿐이었던 것을 말로써 듣게 만드는” 행위다. 그런 해방 과정으로서의 정치는 종말이 없다. 공동체는 체제를 지키기 위해 치안을 불러들이지 않을 수 없고, 그 치안의 질서는 어떤 식으로든 배제와 차별과 위계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치는 이 치안에 대한 항구적인 불화의 과정이다. 그 치안과 정치 사이에서 ‘정치적인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낸다고 랑시에르는 말한다.(고명섭 기자)

08. 10. 17.

고대 노예제도와 모던 이데올로기(대우학술총서번역 105)

P.S.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에서 성립하던 시기에 그 사회의 하층민이었던 데모스(인민)는 기존 지배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들리지 않는 존재였다. 인민의 말은 말이 아니라 소음이었다."라는 구절 때문에 상기하게 되는 책은 요즘 잔뜩 벼르고 있는 모시스 핀리(Moses Finley)의 <고대 노예제도와 모던 이데올로기>(민음사, 1998)이다. 핀리는 '모제스 핀레이'라고도 표기됐는데(덕분에 알라딘에서는 따로 검색된다), 이 책 외에도 <고대 세계의 정치>(동문선, 2003), <서양 고대경제>(민음사, 1993), 그리고 편저로 <그리스의 역사가들>(대원사, 1991), <고대 노예제>(탐구당, 1983) 등이 더 소개돼 있는 고대 그리스 경제사의 권위자이다.

나는 <고대 세계의 정치>에 반해서 나머지 책들에 대해서도 눈독을 들이게 됐다. 그리고 제일 먼저 고른 것이 <고대 노예제도와 모던 이데올로기>인 것('모던 이데올로기'는 뭔가? 본문에도 그냥 '근대 이데올로기'라고 돼 있건만).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경제적 토대로서의 노예제는, 그간에 모든 노예제 국가가 민주주의 국가는 아니었다는 이유로 너무 간과되지 않았나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요컨대, 노예제는 민주주의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다). 핀리를 읽으려는 것은 그런 생각을 좀 보강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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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08-10-18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활발한 서평을 쓰시네요^^ 너무 부러워요. 제가 오늘 헌책방에서 일을 하다가 페르디난트 퇴니스의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란 책 한국번역본을 발견했어요. 완전 황금을 깬거죠. 리영희 교수님이 '대화'라는 책에서 추천하신 도서로 알고 있어서 꼭 읽고 싶었거든요. 역시나 저의 뜬금없는 댓글이지만 제가 여유분을 더 사놔서 혹시나 이 책이 필요하시면 얘기해 주세요^^ 제가 무료로 보내드릴께요. 노이에자이트께도 똑같은 말 써 놨어요. 주변에 이런 책에 관심있는 사람이 없거든요^^ 부담 갖지 마시고 혹시나 필요하시면 얘기해주세요. 물론 로쟈님은 이 책이 있으실 것 같은 예감이 들지만요^^

로쟈 2008-10-18 00:32   좋아요 0 | URL
예전에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라고 삼성출판사의 세계사상전집에 들어있던 것 아닌가요? 황성모 교수의 번역으로 기억되는데요... 당장은 안 가고 있지만(아마도 박스에^^;) 덕분에 읽고픈 생각도 드네요. 고전은 나이 들어 읽게 되는 책들인가 봅니다(젊을 땐 고리타분하게만 보이더니)...

들사람 2009-01-16 22:36   좋아요 0 | URL
리영희 교수님 <대화>(p.523)읽다가 여기까지 와버렸습니다. 책 한 권 보내주실 수 있나요? 아직 여분이 남아있으면 좋겠네요. 연락은 이리로 부탁드립니다. sohngs@gmail.com

루쉰P 2008-10-18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아요 바로 그 책입니다. 1985년 판이에요^^ 제가 그걸 오늘 헌책방에서 발견을 했어요. 정확하게 기억을 하시네요. 역시나 대단하세요. 근데 제가 욕심이 나서 이 책을 무려 6권이나 구입을 했거든요. 그래서 사자님하고 노이에자이트님, 소조님하고 로쟈님께 혹시나 필요하신지 물어보고 있어요^^ ㅋㅋㅋ 저는 책을 발견한게 너무 좋아서 지금 이 사이트, 저 사이트 들어가서 계속 자랑하고 있어요.

노이에자이트 2008-10-18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도 퇴니스 이야기하시네요.하하하...정말 기쁘신가봐요.

루쉰P 2008-10-18 23:06   좋아요 0 | URL
^^ 이거 왠지 죄송스럽네요. 너무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말이죠. 근데 확실히 고수들만 계셔서 다들 이 책을 가지고 계시더라구요. 전 이제는 자랑은 그만하고 독서를 할 생각입니다. 오늘은 또 토요일이라서 밤을 세워가며 퇴니스를 읽어 볼 결심입니다. 흐흐흐 *-* 아 너무 흥분했나봐요. 뒷골이 댕기네요.
 

계간 <자음과 모음>(2008년 가을 창간호)에 실린 '레닌주의와 대중유토피아'의 일부를 옮겨놓는다. 지젝의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과 수잔 벅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경성대출판부, 2008)에 대한 리뷰를 의도한 글이며 '가상대담'의 형식을 빌렸다(가라타니 고진에 대한 언급도 일부 포함돼 있다). 아래는 글의 결론부이다.

 

  

 

 

로쟈: 한편으로 지젝 선생님은 정치적 ‘전체주의’에 대한 진부한 비판들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셨는데요. 조금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지젝: 대부분의 포스트모던 좌파들은 정치적 테러의 뿌리가 도구적 이성, 즉 과학기술적 착취의 ‘원리’가 사회로까지 확장돼서 사람들을 ‘새로운 인간’으로 변형시키기 위한 재료로 다룬다는 점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정반대입니다. 정치적 테러는 바로 물질적 생산 영역의 자율성이 부정되고 정치적 논리에 종속됐다는 걸 보여줍니다. 한데, 발리바르에서 랑시에르와 바디우를 거쳐 라클라우와 무페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인 것’에 관한 프랑스제 이론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경제영역을 ‘존재론적’ 위엄이 제거된 ‘존재의’ 영역으로 환원하는 것입니다. 거기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요.

 

정치와 경제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두 옆얼굴이냐 꽃병이냐’라는 시각적 패러독스와 유사합니다. 둘 다 볼 수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즉, 정치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면 경제는 고작 ‘재화의 공급’으로 축소되고, 경제에 초점을 맞추면 정치는 한갓 기술 관료주의의 영역으로 축소됩니다. 하지만 레닌의 위대한 점은 이 두 수준을 함께 사고할 수 있는 개념적 장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는 것의 ‘긴급성’을 의식했다는 점입니다. 불가능하지만 필요한 과제로 생각했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도 오늘날 우리는 다시금 레닌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 경제가 핵심이야. 전투는 거기서 결정될 거고, 우리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마법을 깨뜨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 개입은 경제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반세계화 운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명한 듯이 말하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태클을 걸어야 합니다. 즉, 자유민주주의가 자본주의적인 사적 소유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 우리는 진정으로 반자본주의적으로 될 수 있습니다.   

로쟈: 그러니까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거나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라는 식으로 일면만을 주장하는 것은 ‘덤 앤 더머’식이 되겠군요. 때문에 두 겹의 싸움이 필요하겠습니다. 반자본주의 운동이 필요하지만,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식, 곧 자유주의적 의회 민주주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면 반자본주의가 제 아무리 급진적이라 해도 충분하지 않다, 그런 말씀이시죠? 자유민주주의의 유산을 문제 삼지 않으면서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환상이라고 정리하겠습니다. 여기서 정치와 경제는 가라타니 고진의 문제틀로 보자면 주권국가와 자본주의의 관계와 비슷할 거 같네요. 가라타니는 국민국가(민족국가)의 제국주의적 팽창이 새롭게 국민국가를 만들어낸 최초의 예로 나폴레옹의 유럽정복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한나 아렌트의 지적을 따른 것인데요, 사실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러시아의 국민(민족)의식이 고취되면서 러시아란 국민국가가 새롭게 탄생하게 됐다는 사실도 떠올리게 됩니다.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가 다루고 있는 바이기도 하지요. 벅모스 선생님도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주목을 하셨죠?

벅모스: 네, 프랑스의 역사가 푸레의 말을 빌면, 프랑스인들은 대중을 국가로 통합해서 근대 민주주의국가를 만든 최초의 사람들입니다. 주권체로서의 ‘인민’에 의한 테러의 원형과 그리고 ‘민주주의’ 민족국가에 의한 군사적 침략의 원형, 이 두 가지가 프랑스 혁명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프랑스 혁명이 대중민주주의의 두 가지 모델인 민족국가(nation-state)와 혁명계급(revolutionary class)의 기원이라는 점이죠.

로쟈: 흥미로운 대목인데, 그 두 가지 모델을 선생님은 ‘정치적 상상계’ 개념을 갖고 비교하셨습니다.        



벅모스: ‘정치적 상상계’는 발레리 포도로가의 개념입니다. 지형학적 개념으로 정치적 행위자들이 위치해 있는 구체적이고 시각적인 장(場)을 가리킵니다. 세 가지 아이콘이 이 장에는 들어오게 되는데, 공동의 적, 정치집단, 그리고 주권기관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대중주권의 두 모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이 정치적 상상계가 다르게 그려져요. 사회주의는 ‘상호 적대적인, 투쟁하는 계급들’이라는 정치적 상상계에 기초하며, 자본주의는 ‘상호 배제적이면서, 잠재적으로 적대적인 민족국가들’이라는 정치적 상상계에 기초합니다.

근대의 이 두 가지 정치적 비전 사이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어떤 차원이 시각적 경관을 결정짓느냐입니다. 시각적 경관이란 적의 본질과 위치, 그리고 전쟁이 벌어지는 영토를 결정하는 것을 말해요. 민족국가들에서 그 차원은 공간이고, 계급투쟁(계급전쟁)에서 그 차원은 시간입니다. 공간은 민족국가들의 정치적 상상계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가지는데, 국가가 된다는 것은 영토를 소유한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반면에 계급투쟁에서 영토는 일시적입니다. 계급 혁명은 시대를 앞질러 간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이 승리는 영토의 획득이 아니라 역사적 진보라는 용어로 기술되는 것이에요.

로쟈: 방금 말씀하신 두 가지 정치적 상상계의 구분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계급투쟁에서 공간은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단지 전술인 데 반해서, 민족국가에서 시간은 전술에 불과하며 공간이 모든 것이다.”라고 책에 쓰셨는데, 이러한 차이는 소위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을 구분해서 사고하는 데 아주 유용한 개념틀이 되어줄 것 같습니다. 더불어, 독도 영유권 문제를 놓고 외교적 마찰을 빚고 있는 한국과 일본, 두 민족국가의 행보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겠구요. 정반대되는 사례일 텐데, 1918년에 레닌은 우크라이나 전체를 독일에 양도하는 브레스트-리토브스크 강화조약에 기꺼이 서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인용하셨습니다. “나는 시대를 얻기 위해서 공간을 양여하고 싶다.”

벅모스: 네, 두 가지 태도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차이가 있는 것이죠. 이 양쪽의 정치적 상상계에서 민족과 계급 사이에는 변증법적 관계가 있습니다. 민족국가 모델에서는 계급적 차이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 정체성이 계급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인정됩니다. 부자나 노숙자나 모두 ‘미국’이고 ‘한국인’이고 하는 식이 되죠. 반면에 소련에서는 계급귀속이 민족성을 초월하는 것으로 간주됐고, 민족은 역사적으로 한시적인 정치적 형태로 이해되었습니다. 양쪽 모두 소수민족에 자율적 주권을 부여하지 않았는데, 민족국가의 경우엔 영토의 경계에 대한 위협을 진압하기 위해서였고, 계급투쟁의 경우에는 민족분리주의의 위협이 역사를 퇴보시킨다고 보았던 것이죠.

로쟈: 그러고 보면, 혁명은 무엇보다도 ‘시간’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느덧 저희 대담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마지막으로 한 말씀씩 해주시길 바랍니다.



지젝: 흔히 혁명에는 두 가지 모델, 두 가지 양립 불가능한 논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역사적 진화의 필연성에 따라 ‘적절한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적절한 때’라는 것은 따로 없으며 혁명적 기회가 나타나면 ‘정상적인’ 발전 과정을 우회해서라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에요. 우리의 과제는 레닌이 1914년에 대응하여 한 일을 1990년에 대응하여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레닌을 반복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반복이 뜻하는 것은 레닌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죠. 레닌을 반복하는 것은 레닌이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패한 것, 그가 잃어버린 기회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덧붙여, ‘레닌’은 무엇보다는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사고금지’의 상황을 중단시킬 강력한 자유를 의미합니다. ‘레닌’이란 기표는 우리가 다시금 사유하도록 허락받았다는 것, 바로 그것을 뜻합니다.



벅모스: 제 결론 또한 유물론적이고 마르크스주의적인 것입니다. 역사의 선구자를 자처했던 공산당은 서구의 산업발달에 지속적으로 뒤처진 경제시스템 내에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왔습니다. 그리고 민족국가 시스템은 민족국가의 통제를 끊임없이 벗어나려는 전지국적 자본주의 경제 내에서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만약 냉전시대가 끝났다면 그것은 어느 한쪽이 이겨서라기보다는 각각의 정치 담론의 정당성이 각자의 물질적 발전에 의해 근본적인 도전을 받았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요? 국경으로 구획된 공간의 제약과 단선적인 시간의 독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꿈은, 레닌의 말을 빌자면, “현실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급진적(as radical as reality itself)”이어야 할 것입니다...

08. 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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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차적 관점이 요구하는 것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13 23:50 
    이번주 한겨레21의 출판면 기사를 옮겨놓는다.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에 대한 간략한 리뷰이다. 아스트라 테일러의 <지젝!>에 대한 페이퍼와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을 다룬 '레닌주의와 대중유토피아'를 같이 참고할 수 있다.    한겨레21(09. 04, 20) 정치 경제, 두 겹의 싸움이 필요하다 아스트라 테일러의 다큐멘터리 영화 <지젝!>(2005)에서
 
 
드팀전 2008-09-11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를 썼던 수잔 벅모스지요? 그녀의 '정치적 상상계" 개념은 민족/계급 문제를 유형화하는 또 다른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주는 듯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8-09-11 22:57   좋아요 0 | URL
네, 그 벅모스입니다. 유익한 책인데, 번역은 유감스럽게도 부실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12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부분 계급문제,민족문제를 논하는 것을 보니 공간에 집착하는 한 민족주의에 계급문제는 매몰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로쟈 2008-09-13 08:53   좋아요 0 | URL
네, 그게 요점입니다.
 

지난 8월 9일자 가디언지에 소개된 지젝의 인터뷰(Q&A)를 옮겨놓는다(http://www.guardian.co.uk/lifeandstyle/2008/aug/09/slavoj.zizek). 인터뷰어는 로잔나 그린스트리트(Rosanna Greenstreet)이며, 우리말 번역은 다음카페 비평고원(http://cafe.daum.net/9876/39Cq/879)에서 가져왔다.  

Slavoj Žižek 

Slavoj Zizek, 59, was born in Ljubljana, Slovenia.

He is a professor at the European Graduate School, international director of the  Birkbeck Institute for Humanities in London and a senior researcher at the University of Ljubljana's institute of sociology. He has written more than 30 books on subjects as diverse as Hitchcock, Lenin and 9/11, and also presented the TV series The Pervert's Guide To Cinema.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어떤 행복한 순간을 기대했던 혹은 기억했던 몇 번 - 그것이 발생하고 있었던 때는 결코 아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 이후에 깨어나는 것 - 그래서 나는 곧바로 화장되기를 원한다.

가장 어릴 적의 기억은?
어머니가 벌거벗고 있던 기억. 역겨웠다.



가장 존경하는 생존 인물은, 그리고 이유는?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아이티의 두 번 파직된 대통령.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서조차 인민을 위해 무엇이 행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모델이다.

당신 자신에게서 당신이 가장 개탄하는 특성은?
타인들의 곤경에 대한 무관심.

타인들에게서 당신이 가장 개탄하는 특성은?
내가 필요로 하거나 원하지 않을 때 나에게 기꺼이 도움을 주겠다고 하는 그들의 얄팍한 심성.

가장 당혹스러웠던 순간은?
사랑을 나누기 전에 한 여자 앞에 벌거벗은 채 서 있었을 때.

자산을 별도로 하고, 당신이 구입했던 가장 값비싼 것은?
새로운 헤겔 선집 독일어판.

가장 소중한 소유물은?
앞의 답을 볼 것. 

당신을 침울하게 만드는 것은?
우둔한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것을 보는 일.

당신의 외모에서 가장 싫은 것은?
나를 나의 실제 모습으로 보이게 한다는 점.

가장 매력 없는 습관은?
말하는 동안 내 손의 우스꽝스럽게 과도한 틱.

가장무도회의 의상을 고른다면?
내 얼굴에 나 자신의 마스크를 써서, 사람들이 나를 나 자신이 아니라 나인 척하려는 누군가로 생각하게 하고 싶다. 



가장 죄책감이 드는 쾌락은?
<사운드 오브 뮤직> 같은 당혹스럽도록 애처로운 영화를 보는 것.

부모에게 빚진 것은?
아무것도 없기를. 나는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데 일 분도 소비하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가장 말하고 싶은 사람은, 그리고 이유는?
나의 아들들. 충분히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해서.

사랑의 느낌은?
거대한 불운, 기괴한 기생물, 일체의 소소한 쾌락들을 망쳐놓는 항구적인 비상상태.

일생의 사랑은 무엇 혹은 누구인가?
철학. 비밀이지만, 나는 현실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사색할 수 있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냄새는?
썩은 나무 같이, 부패된 자연.

그런 뜻이 아니면서 "널 사랑해"라고 말해본 적이 있는가?
언제나. 정말로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나는 단지 공격적이고도 고약한 언급들을 함으로써 그 사랑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가장 경멸하는 생존 인물은, 그리고 이유는?
고문을 돕는 의사들.

당신의 최악의 직업은?
가르치기. 나는 학생들을 증오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대개 우둔하고 따분하다.

가장 큰 실망은?
알랭 바디우가 20세기의 "모호한 재앙"이라고 부르는 것. 즉 공산주의의 파국적 실패.

당신의 과거를 편집할 수 있다면 무엇을 바꾸겠는가?
나의 탄생. 나는 소포클레스에게 동의한다. 즉 가장 큰 행운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농담에도 있듯이, 이에 성공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 어디로 가겠는가?
19세기 초 독일로, 헤겔의 대학 강의를 들으러.

어떻게 쉬는가?
바그너를 반복해서 들으면서.

얼마나 자주 섹스를 하는가?
섹스의 의미에 달려있다. 살아 있는 파트너와의 통상적 자위라면, 나는 전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죽음에 가장 가까이 갔던 때는?
가벼운 심장 발작이 있었던 때. 나는 나의 신체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에게 맹목적으로 봉사할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를 거부했다.

당신의 삶의 질을 향상해줄 단 하나가 있다면?
노인성 치매를 피하는 것.

당신의 최대 업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헤겔에 대한 좋은 해석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전개하는 챕터들.

삶이 당신에게 가르쳐준 가장 중요한 교훈은?
삶은 당신에게 가르쳐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어리석고 무의미한 것이라는 것.

우리에게 비밀을 하나 말해달라.
공산주의는 승리할 것이다.

아래는 인터뷰 원문이다.

When were you happiest?
A few times when I looked forward to a happy moment or remembered it - never when it was happening.

What is your greatest fear?
To awaken after death - that's why I want to be burned immediately.

What is your earliest memory?
My mother naked. Disgusting.

Which living person do you most admire, and why?
Jean-Bertrand Aristide, the twice-deposed president of Haiti. He is a model of what can be done for the people even in a desperate situation.

What is the trait you most deplore in yourself?
Indifference to the plights of others.

What is the trait you most deplore in others?
Their sleazy readiness to offer me help when I don't need or want it.

What was your most embarrassing moment?
Standing naked in front of a woman before making love.

Aside from a property, what's the most expensive thing you've bought?
The new German edition of the collected works of Hegel.

What is your most treasured possession?
See the previous answer.

What makes you depressed?
Seeing stupid people happy.

What do you most dislike about your appearance?
That it makes me appear the way I really am.

What is your most unappealing habit?
The ridiculously excessive tics of my hands while I talk.

What would be your fancy dress costume of choice?
A mask of myself on my face, so people would think I am not myself but someone pretending to be me.

What is your guiltiest pleasure?
Watching embarrassingly pathetic movies such as The Sound Of Music.

What do you owe your parents?
Nothing, I hope. I didn't spend a minute bemoaning their death.

To whom would you most like to say sorry, and why?
To my sons, for not being a good enough father.

What does love feel like?
Like a great misfortune, a monstrous parasite, a permanent state of emergency that ruins all small pleasures.

What or who is the love of your life?
Philosophy. I secretly think reality exists so we can speculate about it.

What is your favourite smell?
Nature in decay, like rotten trees.

Have you ever said 'I love you' and not meant it?
All the time. When I really love someone, I can only show it by making aggressive and bad-taste remarks.

Which living person do you most despise, and why?
Medical doctors who assist torturers.

What is the worst job you've done?
Teaching. I hate students, they are (as all people) mostly stupid and boring.

What has been your biggest disappointment?
What Alain Badiou calls the 'obscure disaster' of the 20th century: the catastrophic failure of communism.

If you could edit your past, what would you change?
My birth. I agree with Sophocles: the greatest luck is not to have been born - but, as the joke goes on, very few people succeed in it.

If you could go back in time, where would you go?
To Germany in the early 19th century, to follow a university course by Hegel.

How do you relax?
Listening again and again to Wagner.

How often do you have sex?
It depends what one means by sex. If it's the usual masturbation with a living partner, I try not to have it at all.

What is the closest you've come to death?
When I had a mild heart attack. I started to hate my body: it refused to do its duty to serve me blindly.

What single thing would improve the quality of your life?
To avoid senility.

What do you consider your greatest achievement?
The chapters where I develop what I think is a good interpretation of Hegel.

What is the most important lesson life has taught you?
That life is a stupid, meaningless thing that has nothing to teach you.

Tell us a secret.
Communism will win.

08. 0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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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답이라기는 애매하지만... &lt;가디언지에 실린 지젝 인터뷰 따라하기&gt;
    from La luna vino a la fragua, con su polisón de nardo 2008-08-29 00:02 
    수쟁님 댁에서 보고 나도 덩달아 따라하기~. 8월 9일자 가디언지에 나온 인터뷰에서 지젝이 받은 질문들이라고. http://www.guardian.co.uk/lifeandstyle/2008/aug/09/slavoj.zizek 아, 원 출처는 요기 http://blog.aladdin.co.kr/mramor/2250312 로쟈님의 알라딘 서재. 가져가도 좋을지 허락을 받는 게 먼저인데... 회원 덧글만 허용이라 그, 그냥 퍼오는 무례를... When w..
  2. franny의 생각
    from frannyglass' me2DAY 2009-01-28 19:32 
    오랜만에 을 다시 들춰봤더니 또 웃음이 슬금슬금. 귀엽잖여.
 
 
가을산 2008-08-19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문답이네요.
더불어서.... 로쟈님의 답도 궁금해요. ^^

로쟈 2008-08-19 22:53   좋아요 0 | URL
지젝만큼 솔직하게 답하긴 어렵울 듯싶은데요.^^;

뽀르르 2008-08-19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분은 누구신지요? 굉장히 비관적이시네요
ㅋㅋㅋ


로쟈 2008-08-19 22:53   좋아요 0 | URL
인터뷰 서두의 소개를 참조하시길...

마늘빵 2008-08-19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거 저도 퍼갈게요. ^^

로쟈 2008-08-20 11:58   좋아요 0 | URL
^^

람혼 2008-08-20 0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지젝에 의한, 지젝을 위한... 마치 그의 사상적 요점들을 또한 마치 그만의 저 예의 농담과 유머들처럼 풀어내고 있는 간결한 답변들이군요. 읽으면서 계속 쿡쿡 웃어댔더니 배가 좀 아픕니다.

로쟈 2008-08-20 11:57   좋아요 0 | URL
네, 진심을 농담처럼 얘기하는 게 주특기죠...

드팀전 2008-08-20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즐겁군요.정말로...

농담같이 진담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제가 좋아하는 거에요. 지젝이 아니더라도
제가 바보같은 배트맨보다 조커가 좋은 이유가 그것이기도 하네요.
why so serious? ha ha ha...

갑자기 저도 따라해보고 싶어지는데요...ㅋㅋㅋ

로쟈 2008-08-20 11:57   좋아요 0 | URL
벌써 많이들 따라하시더군요.^^

허리우스 2008-08-20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갑니다. 허허 공산주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비밀을 누구가 알고 있을까요. 이거 비밀인데 ^^

로쟈 2008-08-20 11:57   좋아요 0 | URL
네,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비밀입니다.^^;

nada 2008-08-20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한 질문도 진부하게 넘기지 않네요. 헛스윙이나 파울볼 없이 최소한 1루타, 2루타를 꾸준히 날려주시는 센스.^^ 본인은 센스고 나발이고, 그저 만사 귀찮다는 듯한 식이지만요. 마지막 항목이 홈런이네요.ㅋㅋ

로쟈 2008-08-20 11:56   좋아요 0 | URL
모처럼 저도 '홈런' 장면을 따왔군요.^^

뽀르르 2008-08-20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부끄런 리플을 달다니 땀이 다나네요.ㅋㅋㅋ
지젝이 로잔나 그린스트리트라는 분을 인터뷰한글인줄 알았습니다.
아는게 지젝 얼굴과 이름뿐이었던지라 이런 황당한 리플을 남겼네요
예전에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이걸로 지젝을 접해보려다 실패한 사람입니다.
무엇부터 읽을지 조사해보고 다시 시도해봐야겠다는 두리뭉실한 마음만 먹어봅니다.^^

로쟈 2008-08-20 22:03   좋아요 0 | URL
잘못 보신 거군요. 저도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낭만인생 2008-08-20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산주의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다만 부활할 뿐입니다.
그것이 정답입니다.

모든 세력의 종착역은 보수주의 폐쇄적 권력집단이며, 공산주의는 권력이란 존재의 태아기일 뿐입니다. 더 이상 북한도, 러시아도, 중국도 공산주의는 아니다.
권력집단일 뿐이다.
진정한 공산주의는 항상 유치원을 졸업하지 못한채 막을 내린다. 그리고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다.

로쟈 2008-08-20 22:04   좋아요 0 | URL
'부활' 정도라면 놀랄 만한 '비밀'은 아닌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0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리스티드 관련한 번역에서 what can be done은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의 영어 번역인데 수동태 번역으로 하니 좀 이상하군요.여하튼 아리스티드를 좋아한다니 저와 공통점입니다.18세기 말 아이티의 투쎙 류베르테르는 프랑스에 맞서 노예 해방 투쟁을 하다가 옥사했고 20세기 말엔 아리스티드가 미국에 맞서 해방신학의 정신으로 싸웠으니 아이티의 역사는 기구하기도 합니다.

로쟈 2008-08-20 23:16   좋아요 0 | URL
네, 영어 번역으론 본때가 좀 안 납니다.^^ 아리스티드에 관한 자료도 좀 소개돼 있나요? 아, <가난한 휴머니즘>이 소개돼 있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0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투셍 류베르테르의 투쟁을 전세계에 알린 책이 제임스<블랙 자코방>입니다.그리고 지젝의 답변 중에서 또 맘에 드는 것이 효도 이념에 물들지 않았다는 점!

로쟈 2008-08-21 10:02   좋아요 0 | URL
네, <블랙 자코뱅>(필맥, 2007)도 보관함에 넣었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08-08-21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인터뷰네요.. 기억해 놨다가 써먹어 볼까 싶기도 하네요 ^^

로쟈 2008-08-22 12:46   좋아요 0 | URL
이미 써먹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21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람진이 젊었을 땐 투셍 류베르테르를 존경했대요.그래 놓고 나이들어선 알렉산드르 1세와 친구가 되는 등 왕당파가 되다니...

로쟈 2008-08-22 12:45   좋아요 0 | URL
카람진은 귀족이었는데, 당연한 것 아닐까요? 당시에 다른 포지션은 가능하지도 않았는데요...

쥬베이 2008-08-22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자님 메인사진의 주인공인가요?
비슷하게 생겼네요ㅋㅋㅋ

로쟈 2008-08-22 12:46   좋아요 0 | URL
이제야 아시다니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2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어서 진보주의자였다가 나중에 보수파가 되는 인물은 흔하지만 까람진이 한때나마 유색인종을 존경했다는 것은 매우 드문 사례라서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그는 왕당파가 된 뒤에도 류베르테르를 계속 존경했을까요? 궁금해지는군요.

로쟈 2008-08-23 21:06   좋아요 0 | URL
카람진 얘기는 어디에 나오는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2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스니아 내전 때 지젝은 뭘 했나요? 요네하라 마리의 <대단한 책>에는 '세르비아라는 골리앗에 맞서는 슬로베니아'라는 이미지는 조작되었고 사실은 슬로베니아가 세르비아를 도발했다는 견해가 소개되어 있던데요.지젝 집안도 카톨릭인가요? 물론 지젝은 아니겠지만.

로쟈 2008-08-23 21:02   좋아요 0 | URL
유사한 질문은 받고 지젝이 답한 부분이 있는데, 어느 책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네요. 지젝의 집안사정은 저도 모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23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S.미르스끼<러시아 문학사>입니다.

로쟈 2008-08-23 23:22   좋아요 0 | URL
미르스키도 제가 학부때 읽은 것이니 기억이 안 날 만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24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얼마 전 읽었어요.
서점에 나가 보니 까람진 소설선이 나왔더군요.정막래란 분이 번역했더라구요.이름이 특이해서...예전에 딸 많이 나오면 지었던 이름 같기도 하구요.그래서 까람진에 대해 한 번 알아볼까 해서 도서관에서 미르스키 책 찾아 19세기 전반기만 살짝 훑어봤죠.

로쟈 2008-08-25 00:09   좋아요 0 | URL
카람진은 사실 굉징히 큰 인물이고, 작가로서보다는 역사가로서 더 높이 평가받아야 합니다. 푸슈킨도 좋아하고 존경했지요. 일종의 롤 모델이었다고 할까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6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람진이 역사 책 쓰다가 보수파가 되었다고 하더라구요.문장이 뛰어나서 그 러시아사가 꽤 잘 팔렸다고 하던데요.역시 대역사가는 대문장가! 푸슈킨은 진보적이라는 인상을 간직한 채 죽어서-게다가 결투라니! 얼마나 장렬한가요-어찌 보면 다행?이지요.

로쟈 2008-08-26 17:35   좋아요 0 | URL
푸슈킨은 생전에 이미 상당한 굴절을 겪었습니다. 20대 청년시절에나 제카브리스들의 우상이었고 봉기 이후엔 주변으로부터 의혹의 시선을 받았습니다. 황제와의 독대도 있었고, 모종의 타협이 이루어진 것이죠. 결과를 놓고 보자면 푸슈킨이 황제 니콜라이에게 배신당한 거지만. 푸슈킨은 '진보적'이라기보다는 '중용'과 '균형'을 지킨 작가라고 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27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흥미롭게도 한국일보의 '오늘의 책(7월 16일)'에서 <지젝이 만난 레닌>이 다루어졌기에 옮겨놓는다. 이유인즉 1918년 오늘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http://blog.aladin.co.kr/mramor/2187941)를 올려놓으면서도 날짜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었는데, 레닌이 1900년 스위스로 망명한 날과 겹친다고 하니까 이 또한 역사의 우연이라 할 만하다.    

한국일보(08. 07. 16) 지젝이 만난 레닌

7월 16일은 러시아혁명사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날이다. 1918년 오늘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였던 니콜라이 2세가 살해됐다. 그리고 1900년 오늘, 3년 동안 시베리아에 유형됐던 레닌이 스위스로 망명했다. 18년 사이 세계는 바뀌어버렸던 것이다.

1917년 2월혁명으로 퇴위한 니콜라이 2세는 당시 우랄산맥의 광산도시 에카테린부르크에 감금돼 있었다. 김학준의 <러시아혁명사>에 차르와 아내 알렉산드라, 아들 1명과 막내딸 아나스타샤 등 딸 4명의 살해 장면이 나온다.

“유로프스키는 10명의 무장한 사람들과 함께 나타났다. 그는… 이제 우리는 당신들을 사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선언했다. 니콜라이 2세가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나 ‘뭐라고’ 하면서 아내와 아들을 막아보려 했다. 그 순간 체카 대원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총을 쏘았다. 그는 즉시 죽었다… 그냥 기절해 쓰러졌던 아나스타샤가 의식을 회복하곤 소리를 질렀다. 다시 모든 체카 대원들의 난사가 뒤따랐다.” 광산 등에 흩어져 암매장됐던 차르 일가의 유골들이 확인된 건 80여년이 지난 1996년이 되어서다.

한 세기나 전, 러시아 마지막 황제의 죽음과 실패한 레닌의 혁명 이야기를 지금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현재 최고의 스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59)이 <지젝이 만난 레닌>(2002)에서 던지는 질문도 바로 그것이다. 그는 레닌이 1917년에 쓴 핵심적 문건들을 이 책의 전반부에 모아놓은 후, 책의 후반부에서 21세기의 현실을 레닌의 텍스트들에 대입해 해석한다. “레닌을 재현실화한다는 생각에 대한 공중의 첫번째 반응은 물론 빈정거리는 폭소다”라고 지젝은 책의 첫머리에 쓴다.

그러나 그는 다가올 자본주의의 위기 상황이 1917년 레닌 앞에 놓였던 상황의 되풀이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우리는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기까지 함께 버린 것은 아닌가?” 레닌의 텍스트, 펜이 곧 무기였던 그의 글에 들어있는 ‘유토피아의 불꽃’은 여전히 우리 시대의 문제로 되살려내야 한다는 이야기다.(하종오기자)

08. 07. 16.

P.S. 아예 레닌을 주제로 한 학술심포도 얼마전에 개최된 바 있다. 이 관련기사도 스크랩해 놓는다(더 자세한 것은 http://www.greenbee.co.kr/blog/29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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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08. 07. 10) 왜 지금 레닌을 소환하는가?

'촛불 시대에 다시 생각하는 레닌과 러시아혁명.’ 8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그린비 출판사가 주최한 학술심포지엄의 주제다. 왜 지금 갑자기 레닌인가?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는 발제문 ‘레닌의 정치학에서 외부성의 문제’에서 “지금 레닌을 불러낸다는 것은 뼈아픈 실패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거기서 혁명 혹은 혁명적 사유에 대해 다시 사유하는 것”이고 “그 실패를 통해 새로운 출구를 찾는 것”이다. 이 교수는 모든 혁명은 자신의 시대와 대결하고, 주어진 세계를 전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반시대적 사유’일 수밖에 없다며, 따라서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혁명 자체가 낡은 것으로 간주되는 지금이야말로 레닌과 혁명에 대해 사유하기에 좋은 시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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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오슬로대 교수는 ‘민주주의자로서의 레닌’에 주목했다. 박 교수는 그 이유로 자본주의가 새로운 주기적 위기를 맞고 있는 지금의 대의 민주주의 위기상황을 들면서, ‘촛불집회 정국’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줬다고 했다. 그는 촛불을 든 민초들의 ‘직접적 참여 민주주의’가 건강권과 주권 문제 등에서 국회를 대신해 정국을 일변시켰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촛불 민주주의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나 대운하 계획 등을 반대하고 저지할 수는 있지만 “신용을 잃어가는 대의 민주주의 기관(국회 등)들을 대신하는 ‘대안적 집권기관’”이나 “구체적인 민중적 주권행사 기관”으로 발전하진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가 내놓은 대안은 노동자 또는 주민 평의회, 곧 소비에트다. 물론 ‘대안적 권력 창출’을 이야기할 단계가 아니지만, 그는 “비정규직과 정규직, 대기업과 소기업 소속 등을 초월하는 ‘노동자 평의회’ 건설과 지역정치에의 활발한 참여는 한국 민주주의의 심화에 상당한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지금의 헌정질서 안에서 그것은 ‘시민단체’의 외형을 띠면서 권력화가 아니라 계급적 연대 수준에 머물겠지만, 그럼에도 “고용형태, 성별, 연령, 소속 기업 규모 등의 구분을 뛰어넘어 대자적인 계급으로서의 새로운 성숙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한다. 그는 그러면서 볼셰비키당의 권력독점과 혁명의 왜곡으로 귀결된 정당 정치인 레닌이 아니라 <국가와 혁명>을 쓸 당시의 레닌을 살려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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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제헌권력, 그 열림과 닫힘’이란 글을 발제한 조정환 다중네트워크센터 대표도 <국가와 혁명>에 주목했다. 조 대표는 한때 한국 사회를 풍미한 사상가 레닌이 급속히 잊혀진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한국에 도입된 레닌이 <두 가지 전술>, <무엇을 할 것인가>의 레닌, 말하자면 1905년 부르주아혁명 단계의 레닌이었지 <국가와 혁명>, <4월 테제>의 레닌, 곧 1917년 프롤레타리아 혁명 단계의 레닌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1987년 체제’와 함께 제헌의회파의 주장은 힘을 잃었으며, 신자유주의적 자유화와 함께 확장된 형식적 민주화는 비합법 전위정당 노선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가 레닌의 용도 폐기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국가와 혁명> 단계의 레닌이 답인가? 조 대표는 권력, 무장력, 폭력, 민주집중제, 소비에트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제헌권력 등 레닌의 개념들은 근대적 부르주아 사회체제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며, 낡은 의회조직이나 국가는 “삶 속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다중들 자신의 직접적 토론과 행동적 표현을 통한 직접적 제헌적 결정과정”으로 대체하고, 이를 제도화할 절대 민주기관을 창출해야 한다고 제안한다.(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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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7 1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7-17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17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심포지움에 나온 사람들의 주장은 초대교회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기독교인들과 비슷하군요.

로쟈 2008-07-18 13:52   좋아요 0 | URL
^^
 

이번주 한겨레21에 실린 '로쟈의 인문학서재'를 옮겨놓는다(http://h21.hani.co.kr/section-021162000/2008/06/021162000200806190715043.html).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의 한 대목에 대해 정리한 것인데, 다시 번역돼 나온 마르크스의 <자본>(길, 2008)에 대한 소회를 덧붙였다(물론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부추긴 건 최근의 촛불시위다). 내친 김에 새 번역 <자본>에 대한 소개 기사를 먼저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45#).  

시사인(08. 06. 17)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틀 여전히 유효”

지난 6월 초, 합쳐서 1100쪽이 넘는 두툼한 양장본 두 권을 받았다. <자본> 1-1과 1-2. 전체 세 권 중 제1권을 두 책으로 나누어 번역했는데, 2, 3권은 내년쯤 펴낼 예정이라는 게 도서출판 길 이승우 기획실장의 설명이다. <자본>(<자본론>)을 받아쥔 느낌은 독특했다. 21세기에 칼 마르크스의 ‘신간’이라니.

1867년 초판이 나온 이 책만큼 논란을 겪은 책도 드물다. 새 밀레니엄을 앞두고 영국 BBC는 지난 1000년간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을 발표했는데, 그 첫 번째가 <자본>이었다. 올해 초 교수신문이 국내 계간지와 학술지 편집위원에게 설문한 결과 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 또한 <자본>이었다. 물론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이 책의 수요는 급감했고, 19세기 자본주의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기에 21세기 현실에 적용하기에 맞지 않는 대목도 많다. 그럼에도 자본주의의 힘을 완벽하게 묘사한 상품의 시인 마르크스, 혹은 우리 일상 생활의 소외와 물화를 보여준 ‘문화 연구’의 마르크스가 여전히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 한 <자본>의 상징성은 크다. 더구나 ‘혁명의 시대’가 끝나서 ‘위험성’마저 줄어든 마당이니! 슬라보예 지젝의 시니컬한 표현을 빌리자면 “오늘날에는, 심지어 월 스트리트에도, 여전히 마르크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새로 나온 <자본>이 실은 온전한 신간은 아니다. 1987년 출판사 이론과실천에서 국내 최초로 <자본>을 완역했던 강신준 교수(54·동아대 경제학)가 21년 만에 이 책을 새롭게 다시 번역했다. 새 번역본은, 쉽게 읽히도록 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는 강 교수의 말처럼 문장이 깔끔하고 유려한 편이다. ‘상품’을 설명하는 앞부분은 여전히 난삽하고, 독일 관념철학의 개념어를 그대로 옮긴 듯한 단어가 가끔 툭툭 튀어나오지만, 중반 이후 등장하는 역사적 사례 등은 역사소설을 읽듯 생생하고 재미있다.

“당시는 시대적인 요청 때문에 서둘러 내느라 번역 오류가 많았고, 그나마 모두 절판됐다. 지금 서점에 있는 김수행 선생 번역본(비봉출판사판)은 영어판 중역본이라서 독일 관념철학을 토대로 한 변증법적 유물론 부분을 옮기는 데 한계가 있다고 봤다. 묵은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다시 번역을 마쳤다.”

강 교수가 한국 최초로 <자본> 번역자가 된 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숨어 있다. 1987년 그는 서울 서대문에 있는 농협 조사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근처에서 출판사 이론과실천을 운영하던 친구 김태경 사장이 퇴근길에 들르라고 해서 갔더니 원고 한 꾸러미를 주는 것이었다. “‘빵잽이’(민주화운동으로 복역하고 출소한 학생들) 여섯 명한테 <자본>을 나눠서 번역하게 했는데, 원고 상태나 봐달라”는 부탁과 함께. 당시 <자본>은 금서 중의 금서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원고를 집에 가져가서 읽었다. 거칠고 오역이 많다는 말과 함께 원고를 돌려준 며칠 뒤, 김 사장에게서 “문제가 많지만 나온다는 게 중요하다, 심각한 부분만 교열을 봐달라”는 연락이 다시 왔다. 그는 두 달 정도 원고를 교열해서 넘겨줬다. 그렇게 해서 ‘역자 김영민’이라는 가명으로 한국어판 <자본> 1권이 출간됐다.



김수행 번역본은 영어판을 옮긴 것

당시 <자본> 출간의 여파는 컸다. 책은 당연히 금서가 됐고, 수배령이 떨어진 김태경 사장은 한동안 도망다니다가 자수했다. 김 사장의 약혼자였던 강금실 판사(전 법무부 장관)가 법복을 벗고 변호를 맡을 채비까지 갖추었다. 하지만 검사가 이적성을 입증하지 못해 공소를 포기하는 바람에 재판은 열리지 않았다. <자본>은 그렇게 한국에서 해금됐다. 강 교수는 이듬해 박사논문을 끝낼 목적으로 휴직서를 낸 뒤 2, 3권까지 번역해서 이번에는 본명으로 출간했다. 17년째 동아대에서 마르크스 자본론을 강의하고 있는 그에게 마르크스 이론이 아직까지 현실에서 효용 가치가 있는지를 물었다.

“수강생이 계속 줄다가 최근 조금씩 느는 추세다. 신자유주의가 심화하면서 학생들의 위기감이 그렇게 반영되는 것 같다. 자본주의 체제가 계속되는 한 마르크스가 제시한 분석틀은 여전히 생명력이 있다고 본다.”

강 교수는 옛 동독의 디츠 출판사에서 1956년에 발간한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집(일명 ‘메프(MEW)’)에 들어 있는 <자본>을 번역했다. 메프는 옛 사회주의권에서 이론 수뇌부 구실을 했던 동독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가 편집을 맡아서 이른바 사회주의권의 ‘정본’ 취급을 받았던 저작집인데, <자본> 1권은 1890년 엥겔스가 편집한 4판이 실렸다.

<자본> 1권은 다양한 판형이 존재한다. 1867년 나온 초판과 현재의 책은 많이 다르다. 마르크스는 너무 난삽하고 어렵다는 조언을 듣고 1873년에 <자본> 1권의 2판을 거의 새롭게 고쳐 썼다. 3, 4판은 1883년 마르크스가 죽은 후, 마르크스의 친구이자 평생 동지였던 엥겔스가 주석을 덧붙여서 펴낸 책이다. <자본> 2, 3권은 마르크스가 초고만 써놓은 뒤 죽었기 때문에 엥겔스의 손을 거쳐 1885년과 1894년에 각각 출판됐다.

<자본>의 번역본은 1872년 러시아에서 처음 나왔다. 러시아판은 독어본 원본보다 훨씬 많이 팔렸는데, 사회주의를 겨냥해 복지 정책을 폈던 독일 비스마르크 치하에 비해 차르 체제의 러시아에서 사회 모순이 더 심했던 탓이 컸다. 프랑스어판도 1872년에 나왔다. 마르크스가 살면서 <자본>을 집필했던 영국에서는 마르크스 사후인 1886년에야 영어판이 출간됐다. 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자본론>(비봉출판사)은 1976년 펭귄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에는 제4인터내셔널 서기를 지낸 트로츠키주의 이론가 에르네스트 만델이 쓴 75쪽 분량의 서문이 붙어 있어서 흔히 ‘만델판’이라고도 불린다.(안철흥기자)

한겨레21(08. 06. 19) 2008년 6월, 레닌

지난봄 <교수신문>에서 학회지와 계간지 편집위원들을 상대로 ‘광복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지니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이 설문 결과는 개인적으로 좀 의아했다. <자본론>이 ‘한국 지식인 사회’에 끼친 영향이라면 몰라도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 얼른 생각해보아도 <자본론>의 번역본이 나온 것은, 완역본을 기준으로 채 20년도 되지 않는다. 때문에 내게 떠오른 두 가지 의문점. 그 이전 40년 동안에는 한국 사회에 그만한 영향을 끼친 책이 전혀 없었다는 것일까?(가령, <전태일 평전> 같은 경우는?) 더불어 <자본론>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드물다는 속설에 기대면, <자본론>의 영향력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나로선 뾰족한 대답을 갖고 있지 않은데, 다만 <자본론>의 출간 타이밍만큼은 절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국역본 <자본론>의 초판이 ‘운동권 빵잽이’들의 번역을 통해 나온 게 6월항쟁이 있던 1987년이고, 이번에 그 교정을 맡았던 강신준 교수가 독어판을 새로 번역한 <자본> 1권을 출간한 시점은 우연찮게도 촛불시위로 한국 민주주의의 새 역사를 쓰고 있는 2008년의 6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마르크스의 <자본론>보다도 지금, 우리에게 더 긴요한 책은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펴냄)이 아닌가 싶다. 책의 1부 ‘문앞에 다가온 혁명’은 1917년 3월부터 10월까지 러시아혁명 전야에 레닌이 쓴 글들을 모은 것이고, 2부 ‘레닌의 선택’은 그에 대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주석’이다. 주석의 초점은 여느 책들과 달리 ‘레닌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가 아니라 ‘레닌을 어떻게 반복할 것인가’에 맞춰져 있다.

레닌을 반복한다고? 지젝의 이러한 기획에 대한 반응은 그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시피 ‘빈정거리는 폭소’다. ‘자본주의의 힘을 완벽하게 묘사한 상품의 시인’ 마르크스는 오늘날 월스트리트에서도 좋아한다. 하지만 레닌은 뭔가? 마르크스주의를 실천에 옮기려는 노력의 ‘실패’이자 ‘현실사회주의’ 실험이라는 커다란 ‘재앙’의 상징적 인물 아닌가? 하지만 지젝이 다시 건져내고자 하는 레닌은 그러한 ‘낡은 교조적 확실성’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재앙에 가까운 상황에 내던져지는 근본적인 경험을 한 레닌이며 그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만들어야 했던 레닌이다.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과학적 무기’로서 <자본론>을 치켜세우곤 하지만, 레닌은 자신이 직면한 새로운 문제들에 대해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레닌이 처했던 재앙적 상황이란 1914년의 상황이다. 전 유럽이 군사적 갈등 상황 속에서 둘로 쪼개져 대립하고 있었고, 유럽의 모든 사회민주주의 정당들마저도 ‘애국주의 노선’을 채택해 레닌에게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렇지만 레닌은 그렇게 사회주의 운동 자체가 소멸한 것 같은 절망적인 시점에서 ‘혁명의 독특한 기회’를 포착한다. 알려진 대로 역사학자 홉스봄은 20세기를 자본주의의 평화적 팽창이 끝난 1914년에서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한 1990년까지로 규정했다. 지젝의 제안은 우리가 레닌이 1914년에 대응해 한 일을 1990년에 대응해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가능성은 없어. 민주적 합의에 충실해야 돼”라는 일종의 ‘사고 금지’에 대응해 다시금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 그것이 ‘레닌’이란 이름이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혁명에는 두 가지 모델, 두 가지 양립 불가능한 논리가 있다. 하나는 역사적 진화의 필연성에 따라 ‘적절한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적절한 때’라는 것은 따로 없으며 혁명적 기회가 나타나면 ‘정상적인’ 발전 과정을 우회해서라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레닌은 1917년 10월에 이렇게 주장했다. “2천만 명은 안 되더라도 1천만 명으로 이루어진 국가기구는 즉시 가동할 수 있다.” 지젝의 말을 빌리면, 이것이 ‘진정한 유토피아’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 우리가 고수해야 하는 것은 레닌주의의 이러한 유토피아적 광기다. 그것은 과연 지금 우리에게도 가능할까?

08. 06. 19.

P.S. “이 문제에 관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레닌이 새롭게 고안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 흔히 '마르크스-레닌주의'라고 불리는 그만의 마르크스주의이다. 사정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 아닐까?(이번엔 레닌도 말해주지 않은 문제들과 우리는 직면하고 있다!) 나는 당장에 <자본> 번역을 무료로(혹은 아주 저렴하게) 인터넷에 공개하는 것이 레닌주의식의 '유토피아적 광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영역본 <자본>은 마르크스/엥겔스의 다른 저작들과 함께 모두 인터넷에 공개돼 있다(http://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67-c1/). 가장 먼저 번역되고 독어본보다도 많이 팔렸다는 러시아어본도 마찬가지다(http://www.marxists.org/russkij/marx/1867/kapital.htm). 고가의 '양장본 고전'으로서의 <자본>과 촛불시위에도 들고 다닐 수 있는 저렴한 문고본 <자본>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그러한 '출판혁명'이 도래하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란 수식어는 한갓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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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6-20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본주의 붕괴가 필연적이라면 굳이 혁명가들이 나설 필요가 있느냐 하는 질문은 정말 어렵죠.그래서 맑시즘 정통의 대부였던 플레하노프나 카우츠키도 먹칠을 하고 맙니다만...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비코의 다음과 같은 촌철살인은 레닌이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할겁니다.
...상품과 달리 사상은 각 민족이 자기들 발전의 주어진 단계에서 필요한 것을 독립적으로 발견함으로써 퍼진다...물론 이 주장이 극단적으로 가면 일종의 특수주의가 되고 맙니다만.

로쟈 2008-06-20 12:53   좋아요 0 | URL
레닌에게서는 '민족' 대신에 '상황'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상황'의 경우엔 보편적 특수성이죠. 반복되니까요...

paul 2008-06-20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개인적으로 <자본>의 초판본을 볼 수는 없는 것인지...궁금하군요. 가라타니 고진의 경우도 자본의 초판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을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군요. 지나치게 난삽해서 수정을 거쳤다고 하는데, 오히려 수정이 가해지기 전의 거칠지만 원석의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사유의 흔적을 보고 싶은 것은 지나친 욕망일까요^^+

로쟈 2008-06-20 12:53   좋아요 0 | URL
가라타니 같은 비평가가 국내에선 나올 수 없는 이유도 그런 데 있지 않을까 싶네요...

solico 2008-06-20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가다 무뢰하게 말씀드립니다만, 강신준 교수가 90년대에 개역한 이론과실천판 자본 1권 3개 분책도 있습니다. 저는 흰색의 초판본이 아닌 개역판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과 '20년'만의 개역판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서점에 갈 시간이 없어서 비교는 못해봤습니다만, 강교수 자신도 언급하지 않고 아직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아서 궁굼해집니다. 90년도 이후에는 이걸로 나왔던 것 같은데요.
개역판이라지만 별로 개역한게 없고 표지만 이쁜색으로(2~3권과 같습니다) 맞추기 위해 그런건지(여기 서문에도 많은 부분을 개역했다고 나오기는 합니다), 아니면 새 번역에 포커스를 주기 위해서 그런건지 궁굼해지네요.

로쟈 2008-06-20 12:55   좋아요 0 | URL
저도 강신준 교수의 번역은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김수행본도 1권만 조금 뒤적거린 정도라서요. 짐작엔 90년대본은 오탈자나 손보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소경 2008-06-20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강신준 교수 판 <자본> 구입해서 선배랑 같이 읽어 볼 기회가 생겼는데, 선배가 헌책방에서 구입한 것은 김수행교수 판이더군요. ^^:;

로쟈 2008-06-20 12:55   좋아요 0 | URL
덕분에 비교독해가 가능하겠네요.^^

비로그인 2008-06-20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로쟈님의 P.S.에 담긴 의견에 동의합니다. 마샬 버먼이 자신의 글 모음집 <맑스주의의 향연>에서 언급한 <경제학-철학 수고>와의 만남의 희열 그리고 싸고 알차게 나온 보급판 <경*철 수고> 10권? 20권?을 주머니를 털어 구입하고는 주위 사람들에게 보급하며 전한 흥분이 생각나네요.
이번 <자본>은 정말 가격이 두껍군요.
그래도 강유원씨 번역으로 나온 <경*철 수고>는 판형이 좋고, 가격도 <자본>만큼의 두께는 안하지만.. 버먼의 경험이, 아직 이 곳 사회에서는 요원해 보입니다.

로쟈 2008-06-21 11:58   좋아요 0 | URL
네, 가격이 두껍습니다! 저도 손에 들었다 놓았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06-20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레닌의 혁명이 성급한 것이었다면서 엥겔스가 했다는 말-조급하게 성공한 혁명(충분히 산업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주의자가 집권하는 것)은 비극을 부른다-을 인용하더군요.이사야 벌린은 레닌이 혁명을 앞당기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러시아의 자본주의 발달단계를 과장했다는 주장까지 합니다.
원래는 당시의 혁명가들은 혁명가능성이 높은 나라로는 독일을 꼽았다는데...

로쟈 2008-06-21 12:01   좋아요 0 | URL
그게 혁명에 대한 양립불가능한 논리겠지요.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는 워낙에 설들이 많지요. 그 중 하나는 '러시아'이니까 가능했다는 것이고, 또 '러시아'라서 마르크스가 욕봤다는 얘기도 있고요...

노이에자이트 2008-06-21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역본 자본론이 인터넷에 공개되면 달성되는 우리나라의 유토피아적 광기의 모습을 대충 알려주실 수 있는지요?

로쟈 2008-06-21 23:55   좋아요 0 | URL
제가 '유토피아적 광기'라고 한 건 그 공개 행위 자체입니다. '자본의 논리'에 역행하는...

노이에자이트 2008-06-22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역본이나 노역본은 공개되는데 왜 우리는 안 될까요? 사실은 인터넷을 통한 공개도 자본의 논리에 역행하지 않으니까 허용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로쟈 2008-06-22 00:05   좋아요 0 | URL
'자본의 바깥은 없다'는 체념은 너무 염세적인 쪽으로 흘러갈 수 있지 않을까요? 압도적이지만 전부는 아니죠. 혹은 전부는 아닌 것으로 만들어야죠...

노이에자이트 2008-06-22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서 공개하라는 요구는 역자나 출판사에 너무 무리한 요구일까요?

로쟈 2008-06-22 11:14   좋아요 0 | URL
불가능한 가능성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