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궁정식 사랑, 혹은 물(物)로서의 여성'의 마지막 두 절을 옮겨놓는다. 영화 <크라잉 게임> 얘기가 공통적이고, 이 새 번역에서 '<크랑잉 게임>이 동쪽으로 가다'란 마지막 절에는 일부 번역이 누락돼 있기 때문에 그냥 같이 묶어놓는 게 좋을 듯하다. 지젝의 정치론/혁명론에 대한 이야기들을 적어놓기 위해서라도 '궁정식 사랑' 이야기는 빨리 마무리짓는 게 좋겠다. 내가 갖고 있는 초판본 <향락의 전이>의 200-213쪽, 그리고 영어본의 102-109쪽이 이 새 번역에 대응한다(본문 중의 강조는 나의 것이다).

 

 

 

 

궁정식 게임에서 <크라잉 게임>으로

닐 조던의 <크라잉 게임>이 거둔 예상치 못한 특별한 성공의 열쇠는 그것이 궁정식 사랑의 모티프에 가한 결정적인 변주에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개요를 상기해보자. 포로가 된 영국 흑인 병사를 감시하는 IRA의 단원인 퍼거스는 그 병사와 친해진다. 병사는 사살되기 전에 그에게 런던의 교외에 살고 있는 자기 여자 친구 딜을 찾아가 마지막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병사가 죽은 뒤 퍼거스는 IRA에서 탈퇴해  런던으로 이주하고, 병사의 연인이었던 아름다운 흑인 여성을 방문한다. 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졌으나 딜은 그에 대해 모호하고 아이러니한 독립적인 거리를 유지한다. 결국 그녀는 그의 접근을 허용하지만 그들이 침대로 가기 전 그녀는 잠깐 나가서 투명한 잠옷을 입고 돌아온다. 퍼거스는 그녀의 몸에 갈망하는 시선을 던지는 한편, 갑자기 그녀의 페니스를 지각한다. ‘그녀’는 복장도착자였던 것이다.

그는 구역질을 하면서 그녀를 잔인하게 밀쳐낸다. 딜은 떨면서 눈물에 젖어 자신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주인공은 그녀에 대한 강박관념에 빠져 있었기에 그들이 늘상 만난 술집이 복장도착증자들의 회합장소였다는 사실을 포함하여 증가가 되는 일련의 세세한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항상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실패한 성적 만남의 장면은 프로이트가 페티시즘의 원초적인 트라우마라고 언급한 장면의 정확한 역전으로 구조화된다. 성기 쪽으로 여성의 벗은 몸을 훑어 내려가는 아이의 시선은 무언가(페니스)를 보기를 기대했던 그곳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충격을 받는다. <크라잉 게임>의 경우, 충격은 시선이 아무것도 기대치 않았던 그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야기된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폭로 이후에 둘의 관계는 역전된다. 이제 딜은 그녀의 사랑이 불가능한 것임을 알면서도 퍼거스와 열정적인 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으로 밝혀진다. 그녀는 변덕스럽고 아이러니하며 군주스러운 여인에서, 절망적으로 사랑에 빠져 있는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운 소년과 같은 애처로운 인물로 변모한 것이다. 진정한 사랑, 즉 엄밀하게 라캉적인 의미에서 은유로서의 사랑이 솟아오르는 것은 오직 바로 이 지점이다. 우리는 사랑받는 자(eromenos)가 그녀의 손을 뻗어 ‘사랑을 되돌려 줌으로써’ 사랑하는 자(erastes)로 변모하는 숭고한 순간을 목격하는 것이다.

이 순간은 사랑의 ‘기적’을, ‘실재의 대답(answer of the Real)’의 순간을 보여준다. 이것으로써 우리는, 라캉이 주체 그 자체는 실재의 대답이라는 지위를 갖는다고 주장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을 포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말을 바꾸자면, 이러한 전도 이전까지는 사랑받는 자는 [아직까지는 주체가 아니며] 하나의 대상의 지위를 갖는다는 얘기다. 사랑받는 자는 ‘그 안에 있는 그 자신 이상의’ 것 때문에 사랑받는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모른다. 나는 그 질문, 즉 나는 타인에게 하나의 대상으로서 어떤 존재인 걸까? 그는 내 안에서 과연 어떤 (그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을 보는 것일까? 라는 질문에 결코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따라서 비대칭성에 직면한다. 주체와 대상 사이의 비대칭성이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각각의 사랑하는 이가 사랑받는 이에게서 보는 것과 사랑받는 이 각각이 알고 있는 그 자신의 모습 사이에서 발생하는, 보다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부조화에 의한 비대칭성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사랑받는 이의 위치(position)을 정의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교착상태를 발견한다. 타인은 내 안에서 무언가를 보고, 내게서 그것을 원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그에게 줄 수는 없다, 혹은 라캉이 지적한 것처럼, 사랑받는 이가 갖고 있는 것과 사랑하는 이가 결여하고 있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사랑받는 이가 이러한 교착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하는 이에게 손을 뻗어 ‘사랑을 되돌려주는’ 일 뿐인데, 말하자면, 은유적인 몸짓으로, 사랑받는 이로서의 그의 지위를 사랑하는 이의 지위로 교체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전은 주체화의 지점을 표시한다. 사랑의 부름에 대답하는 순간, 사랑의 대상이었던 것[사람]이 주체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바로 이런 역전에 의해서만 솟아오른다. 내가 단지 타인 속의 아갈마(agalma)에 의해 매혹당했을 때에는 나는 진정으로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타인을, 즉 사랑의 대상을, 연약하고 [무언가를] 상실한 것, 즉 ‘그것’을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경험할 때, 그 때 나는 진정 사랑에 빠진다. 나의 사랑은 이 상실을 견뎌내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역전의 핵심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각별히 주의해야만 한다. 비록 우리가 이제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라고 하는 처음의 이중성 대신에 두 명의 사랑하는 주체를 갖게 되었지만, 비대칭은 여전히 존속한다. 왜냐하면, 주체화되면서 그 자신의 결여를 고백했던 것은 바로 대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역전 속에는 무언가 매우 당황스럽고 정말 스캔들스러운 것이 존재하는데, 신비롭고 매혹적이며 잡히지 않는 사랑의 대상이 그 자신의 교착[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나는 갖고 있지 않다는 난관]을 폭로하고, 그로써 또 다른 주체의 지위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호러소설들에서 동일한 역전과 만난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 가장 숭고한 순간은 괴물이 주체화되는 순간, 즉 (무자비한 살인 기계로 묘사되어 온) 괴물-대상이 일인칭으로 그 자신의 불행한,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실존을 드러낼 때가 아닌가?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 근거한 영화들이 이러한 주체화의 몸짓을 회피해 온 것은 매우 징후적이다. 그리고 아마도, 궁정식 사랑에 있어서는, 귀부인이 하인에게 자비(Gnade)를 베풀 때, 오랫동안 고대되어온 최고의 충족 순간은 여인의 항복, 즉 성행위를 갖는 것에 그녀가 동의하는 순간도, 어떤 신비로운 입사식도 아니며, 여인 편에서 보내는 사랑의 사인(sign), 즉, 대상(Object)이 애원하는 이에게 그 자신의 손을 뻗어 대답했다는 그 ‘기적’인 것이다.  

그러면, <크라잉 게임>으로 돌아가 보자. 딜은 이제 퍼거스를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고, 퍼거스는 점점 더 자신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갖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성격에 감동받고 매료당해 그녀에 대한 혐오를 극복하고 그녀를 지속적으로 위로한다. 마침내 IRA가 그를 다시 테러행위에 연루시키고자 할 때, 심지어 그는 딜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그녀가 저지른 살인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녀가 다시 도발적으로 유혹적인 여성으로 옷을 차려입고 그를 방문한 감옥에서 벌어지는데, 면회실의 모든 남자들은 그녀의 외양에 자극받는다. 퍼거스가 사천 일 이상 - 수감일 총계 - 을 견뎌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꺼이 기다리겠다고 맹세하고 그를 정규적으로 면회한다…

여기서 외부적 장애물 - 어떠한 육체적 접촉도 막는 감옥의 유리 칸막이 - 은 궁정식 사랑에서 대상으로의 접근을 막는 장애물과 정확히 등가를 이룬다. 따라서 그것[유리 칸막이] 때문에, 이 사랑의 내재적인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즉 그는 철저한 이성애주의자고 그녀는 동성애적 의상도착자이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출간된 영화 각본의 서론에서 닐 조던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야기는 일종의 행복과 더불어 끝난다. 난 일종의 행복, 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 행복 안에는 감옥이라고 하는 분리(separation)와 그 외의 더 심원한 분리들이, 즉 인종적, 민족적, 성적 정체성의 분리들이 포함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저 연인들에게 있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구분(division)하는 것들이 그들을 웃을 수 있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우리의 구분에는 여전히 희망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웃을 수 있게 하는 구분 - 극복할 수 없는 장벽 - 이란 것은 궁정식 사랑의 가장 간명한 메커니즘이 아니겠는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사랑이다. 오로지 입장한 관객들의 응시를 매혹시키기 위해 고안된 가장(假裝)된 광경으로서만 실현될 수 있는 사랑, 실현에 대한 기대가 끝없이 연기(延期)되는 것으로서만 실현될 수 있는 사랑 말이다. 이 사랑이 계급, 종교, 인종의 장벽뿐만 아니라 성적 지향성과 성적 정체성의 장벽이라고 하는 궁극적인 장벽조차도 뛰어넘는 한, 이 사랑은 분명히 절대적인 사랑이다. 여기에 이 영화의 역설이 존재하며, 또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이성애적 사랑을 남성적 억압의 산물로서 거부하지 않고, 이러한 사랑이 오늘날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성격을 보유할 수 있게 되는 딱 들어맞는 환경을 표현해내고 있다는 점 말이다.    

<크라잉 게임>이 동쪽으로 가다

크라잉 게임에 대한 이런 독해는 곧장 라캉 이론에 대한 표준적인 비난 중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여성적 비일관성[모순], 그리고 기타 등등에 대한 그의 모든 이야기들에서, 라캉은 오직 남성적 담론 속에서 나타나거나 거울반사되는 여성에 대해서만, 그리고 여성들에게는 비친화적인 매체에서 그녀들이 왜곡되어 반영되는 모습에 대해서만 다룰 뿐, 여성 그 자체에 대해서는 결코 다루지 않는다는 비난 말이다. 일찍이 프로이트에게도 그랬듯, 라캉에게도 역시 여성 섹슈얼리티는 ‘어두운 대륙’으로 남는다[고 비난자들은 말한다]. 이 비난에 답할 때, 우리는 만약 반영성에 대한 헤겔의 근원적 역설이 어디에선가 유효하다면, 그것이 유효한 곳은 바로 여기라는 것을 단호하게 강조해야만 한다. 여성-그-자체로부터 거리를 두고 물러나서, 부재하는 원인(absent Cause)으로서의 여성이 어떻게 남성적 담론을 뒤트는가에 주목해야만 우리는 ‘여성적 본질’에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여성’이란 궁극적으로는 단지 남성적 담론을 뒤틀리게 하고 굴절되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명칭이 아닌가? '여성-그-자체‘라는 유령은 이러한 뒤틂의 능동적 원인이기 보다는, 차라리 그 뒤틂의 물화-물신화된 효과인 것이 아닌가? 이 모든 질문들은 그 부제를 ’<크라잉 게임>이 중국으로 가다‘라고 붙여볼 만한 영화 <마담 버터플라이M. Butterfly>에서 함축적으로 언급된다.[이하 <마담 버터플라이>에 대한  개괄적 설명이 이어지는 4개의 단락(영어본 pp.105-107) 생략]

영화의 고통스러운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이 그의 죄를 완전히 인정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감옥에서 주인공은 속물적이고 소란한 동료 죄수들 앞에서 연극을 상연한다. 그는 나비부인처럼 차려입고(일본 기모노를 입고 얼굴에는 짙게 화장을 하고) 푸치니의 오페라를 발췌하여 그의 이야기를 고쳐말한다. “화창한 날에 우리는 보리라”라는 절정에서 그는 면도칼로 자신의 목을 그어 죽어버린다. 이렇게 여장을 하고 공개적으로 자살하는 남자의 장면은 오래고도 훌륭한 역사가 있다. 히치콕의 <살인Murder>을 언급하는 것으로도 충분한데, 그 영화에서 살인자 핸들 페인이 여자 곡예사의 복장으로 그의 차례가 끝난 후 혼잡한 집에서 목을 매단다.

<살인>에서와 마찬가지로 <마담 버터플라이>에서도 이 행위는 엄밀히 윤리적인 성격을 지닌다. 두 경우 모두 주인공은 그의 사랑의 대상과의, 즉 그의 증환(존재하지 않는 여성, 즉 ‘버터플라이’라는 종합적 형성물)과의 정신병적 동일시를 상연한다. 다시 말해, 그는 대상 선택으로부터 대상과의 직접적인 동일시로 ‘퇴행’한다. 이러한 동일시의 해소되지 않는 곤궁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궁극적인 행위로의 이행(passage à l'acte)으로서의 자살이다. 주인공은 자살 행위를 통해 죄의식을, 그리고 대상이 그의 환상의 틀 바깥에서 그에게 주어졌을 때 그 대상에 대한 그의 거부를 보상한다.

물론 구식 반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예컨대, 궁극적으로, <마담 버터플라이>는 여성과의 진정한 관계가 아니라 여성에 대한 남성 판타지의 희비극적인 혼합물 덩어리를 제공하는 것 아닌가? 영화의 모든 행동들은 남성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플롯의 그로테스크하고도 믿을 수 없는 성격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이 의상도착자에 대한 동성애적 사랑의 사례라는 사실을 감추면서 동시에 드러내는 것 아닌가? 하는 식의 반론 말이다. 영화는 정말 솔직하지 않으며, 이러한 뻔한 사실을 인정하길 거부한다[즉, 이 영화는 이러저러한 구식 논리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해설'은 <마담 버터플라이>의 (그리고 <크라잉 게임>의) 진정한 수수께끼를 다루는 데 실패한다. 어떻게 해서 남자 주인공과 여장 남자인 그의 파트너 사이의 희망 없는 사랑이, [남성의] 여성과의 일반적인 관계보다 훨씬 더 ‘본래적으로(authentically)’ 이성애적 사랑의 관념을 [이들 영화에서처럼] 실현할 수 있는가? 라는 수수께끼 말이다. [물론, 이들의 사랑이 이성애적 사랑보다 더 이성애적인 이유는 그 안에 궁정식 사랑의 논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지젝의 답변일 것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궁정식 사랑의 모체가 이렇게 보존되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것[궁정식 사랑의 모체가 보존되고 있다는 것]은 동시대 페미니즘이 어떤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의 증거이다. 맞다, 그의 여인에게 봉사하는 남성의 궁정식 이미지는 남성 지배의 현실을 감추는 하나의 가상(semblance)이다. 맞다, 마조히스트의 연극은 남성의 사회적 지배에 의해 짐 지워진 죄의식을 보상하기 위해 고안된 하나의 사적인 연출[미장센]이다. 그리고 맞다, 여성을 숭고한 사랑의 대상으로 격상시키는 것은 그녀를 수동적 재료로, 혹은 남성적 자아-이상의 나르시즘적 투사를 위한 스크린으로 가치 저하시키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라캉 그 자신, 궁정식 사랑이 성행했던 바로 그 시기에, 남성적 권력 놀음 속에서 교환의 대상들로 존재한 여성의 실제 사회적 지위는 아마도 최하였으리라고 지적한 터다.

그러나 그의 여인을 섬기는 남성의 바로 이러한 외양은 여성에게 그들의 정체성의 환상-실체를 제공하며, 그것의 효과는 실제적인[현실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소위 ‘여성성’이라고 하는 것을 구성하는 모든 특질을 제공하며, 여성을 그녀의 여성적 향락(jouissance féminine) 속에서 존재하는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남성과의 (잠재적) 관련 속에서 그녀가 그녀 자신을 참조하는 방식으로서, 즉 그의 욕망의 대상으로서 정의한다는 것이다. 거의 공황에 가까운 (남성들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들의) 반작용들이 이 환상-구조로부터 일어나, 여성들에게서 그녀들의 바로 그 ‘여성성’을 박탈해버리기를 원하는 페미니즘으로 도약한다. ‘가부장적 지배’에 반대함으로써, 동시에 여성들은 그들 자신의 여성적 정체성의 환상-밑받침을 침식하는 것이다.

문제는, 일단 두 성 간의 관계가 대칭적이며 상호보완적이고 자발적인 협력 혹은 계약으로 간주되면, 궁정식 사랑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환상 모체(the fantasy matrix)는 권력 속에 남게 된다는 것이다. 왜? 성적 차이가 상징화를 거부하는 실재적인 것인 한, 성적 관계는 비대칭적인 비-관계로 남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비-관계 안에서 타자는, 즉 주체가 되기 이전의 우리의 파트너는 하나의 물(Thing), 즉 ‘비인간적인 파트너’이다. 그래서, 성적 관계는 순수한 두 주체 간의 대칭적 관계로 옮겨질 수 없다.

동등한 주체들 간의 계약이라는 부르주아적 원칙은 오로지 도착적-마조히즘적-계약의 형태로서만 섹슈얼리티에 적용될 수 있다. 그 계약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균형 잡힌 계약의 바로 그 형식이 지배관계를 구성하는 데 봉사한다. 소위 대안적인 성적 실천(‘사도 마조히즘적인’ 레즈비언 그리고 게이 커플) 속에서 주인-과-노예 관계가 마조히즘적 연극의 모든 요소들을 포함한 채로 심각하게 재등장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말을 바꾸면, 우리는 궁정식 사랑이라는 모체를 대체할 만한 어떤 새로운 ‘공식’도 발명해 낼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크라잉 게임>을 사생활로 도피하는 반정치적인 이야기로 독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를 정치적 파워게임의 잔인함에 환멸을 느껴 개인적 실현, 즉 진정한 실존적 충족의 유일한 영역으로서 성적 사랑을 발견하는 혁명가의 주제의 변종으로 읽는 것은 잘못이다. 이 영화는 정치적으로, 그 내적인 배경으로 작용하는 아일랜드적 대의에 충실하다. 역설은 주인공이 안전한 천국을 발견하기를 원했던 바로 그 사생활의 영역 속에서, 그는 훨씬 더 현기증 나는 혁명을 그의 가장 내밀한 개인적 태도 속에서 완수하도록 강요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크라잉 게임>은 ‘정치적 파워게임으로부터 면제된 진정성의 섬으로서 사생활’ 대 ‘정치적 활동의 여전히 또다른 영역인 섹슈얼리티’라는 통상적인 이데올로기적 딜레마를 피해간다. 그보다 영화는 공적인 정치적 활동과 사적인 성적 도착 사이의 적대적 복합성을(*'복합성'은 '공모성complicity'의 오역이다) , 즉 정치적 혁명의 궁극의 성취로서 성적 혁명을 요구한 사드에게서 작동하고 있는 그 적대를 볼 수 있게 한다. 간단히 말해, <크라잉 게임>의 부제는 “아일랜드인들이여, 당신이 공화주의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또다른 노력을 해라!”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06.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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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mer 2006-10-30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명령문을 곱씹어 보다가 이런 의미가 아닐까 하고 생각이 모아지네요. "공화주의자의 주체로 탄생하기 위해서는 주권의 역설- 인민에 기반을 두면서도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는-을 '주체와 대상'이라는 '가면 놀이'라는 역할극이 수시로 상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것도 연애라는 무대 위에서 말이죠..."

로쟈 2006-10-30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보니까 마지막 문단에는 오역이 포함돼 있습니다(번역을 제가 다 확인해보지는 않았습니다). 마지막 멘트를 저는 좀더 단순하게 생각하는데, 정치적 혁명이 다가 아니다. 성적 혁명이 더 필요하다(yet another effort), 라는 것이죠. "Irishmen, yet another effort, if you want to become republicans!"
 

지젝의 '궁정식 사랑, 혹은 물(物)로서의 여성' 세번째 파트이다(이 페이퍼를 처음 접하신 분들은 앞의 두 글을 먼저 읽어보시길). 내용은 궁정식 사랑의 다양한 사례들/변종들을 다루고 있기에, 더구나 우리에게 친숙한 영화들을 분석하고 있기에 읽기에 가장 편하고 흥미로운 절이기도 하다. 원래 절제목은 그냥 '예증(Exemplications)'이지만 내용을 고려하여 '궁정식 사랑의 변종들'이라고 바꿔달고서 몇 가지 이미지들을 보충해넣도록 한다. 알다시피 강조와 군말은 나의 것이다.

 

 

 

 

13세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궁정식 사랑의 이러한 매트릭스에서 나온 수많은 변종들과 조우한다. 예컨대 <위험한 관계>에서, 몽트레이유 후작부인과 발몽의 관계는 분명히 변덕스러운 귀부인과 그녀의 하인과의 관계다(*알다시피 드 라클로 원작의 <위험한 관계>는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고, 또 각색되었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스티븐 프리어즈의 <위험한 관계>, 밀로스 포먼의 <발몽>, 그리고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이 있다).


 

 

 

 

여기서 역설은 하인이 약속받은 자비의 제스처를 얻기 위해 그가 수행해야 하는 임무의 성격에 달려 있다. 그는 다른 여인들을 유혹해야 한다. 그의 호된 시련은 열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조차도 그의 희생자들에 대한 차가운 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요구한다. 승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의 희생자들을 버려야 하며, 그럼으로써 귀부인에 대한 그의 충성을 증명한다.

상황은 발몽이 그의 희생자들 중 한 명(투르벨 회장부인)과 사랑에 빠져 ‘의무를 방기’했을 때 복잡해진다. 후작부인은 정당하게도 그의 변명(그 유명한 “억제하기 힘들다.” 즉 그것은 나의 통제를 벗어나 그렇게 되어갈 수밖에 없다)을 발몽의 존엄성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서, (그 용어의 칸트적인 의미에서) ‘정념적’ 상태에 대한 불쌍한 의존으로 치부한다.

따라서 발몽의 ‘배신’에 대한 후작부인의 반응은 엄밀히 윤리적이다. 발몽의 변명은 도덕적으로 나약한 사람들이 의무를 수행하는 데 실패했을 때 하는 변명 - “어쩔 수 없었어. 그것이 내 본성이고, 난 그저 충분히 강하지 못하거든……- 과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발몽에 대한 그녀의 메시지는 ”너는 해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Du kannst, denn du sollst!)"라는 칸트의 모토를 상기시킨다. 그런 까닭에, 발몽 후작에게 가해진 처벌은 꽤 적절한 것이다. 투르벨 회장부인을 거절하면서 그는 정확히 똑같은 말에 의존해야 한다. 즉 그는 그녀를 향한 열정이 만료되었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일은 그렇게 되어갈 뿐이라는(…) 것을 그녀에게 설명하는 편지를 작성해야 한다.

 

 

 

 

궁정식 사랑의 매트릭스에서 나온 또다른 변종은 시라노 드 베르주락(Cyrano de Bergerac)과 록산(Roxane)의 이야기에서 출현한다(*우리에겐 제라르 드 파르디유 주연의 영화 <시라노>(1990)로 소개된 바 있다). 키라노는 그의 외설적인 자연적 기형(지나치게 긴 코)을 부끄러워해서 아름다운 록산에게 감히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와 그녀 사이에 잘 생긴 젊은 병사를 개입시키고, 그 병사에게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는 대리인의 역할을 부여한다. 록산은 변덕스러운 귀부인에게 어울리게도 그녀의 연인이 우아한 시적인 단어로 사랑을 표현하기를 요구한다. 불운하고 순진한 병사가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자 시라노는 급히 그를 도와 전쟁터에 있는 병사를 위해 열정적인 사랑의 편지를 쓴다.

대단원은 두 단계에서, 즉 비극적 단계와 멜로드라마적 단계에서 일어난다. 록산은 병사에게 그의 아름다운 육체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세련된 영혼을 더 사랑한다고, 그의 편지에 깊이 감동받은 까닭에 그의 몸이 상하고 못 생겨질지라도 그를 계속 사랑할 것이라고 말한다. 병사는 이 말에 전율한다. 그는 록산이 실제의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편지를 쓴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시라노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모욕을 참을 수 없어 자살하려는 듯 돌진해 죽는다. 록산은 수도원에 들어가 그곳에서 파리 사교계의 생활에 대한 정보를 주는 시라노의 정기적인 방문을 받는다.

이러한 방문이 이루어지는 동안 록산은 그에게 그녀의 죽은 연인의 마지막 편지를 큰 소리로 일어달라고 요청한다. 이제 멜로드라마적 계기가 작동한다. 록산은 갑자기 시러노가 편지를 읽지 않고 있고 암송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그가 편지의 진짜 작성자임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녀는 심한 동요 속에서 이 신체장애가 있는 건달 안에서 그의 진정한 사랑을 알아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시라노는 이러한 만남에서 치명적으로 상처받아왔기 때문이다……

데이빗 린치의 <광란의 사랑(Wild at Heart)>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괴로운 장면 중의 하나는 궁정식 사랑을 특징짓는 지연의 논리라는 매트릭스에 기대서만 이해할 수 있다. 외로운 모텔 방에서 윌럼 대포는 로라 던을 난폭하게 내리누른다. 그는 그녀의 내밀함의 공간을 침범하고 위협적으로 “날 씹해주세요, 라고 말해봐”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그녀를 만지고 꽉 껴안는다.

Wild at Heart

추하고 불쾌한 장면들이 지나간 다음 결국 지친 로라 던이 “날 씹해주세요” 하고 말했을 때, 대포는 갑자기 물러나 훌륭하고 친절한 웃음을 지으면서 기뻐하며 응답한다. “됐어! 나 오늘 시간 없어. 다른 때 즐겁게 하지…….” 그는 그가 실제로 원했던 것을 얻는다. 그것은 성 행위 자체가 아니라 단지 그 행위에 대한 그녀의 동의, 그녀의 상징적 굴욕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개입하는 것은 큰 타자, 즉 초(超)주체적인(trans-subjective) 상징적 질서의 개입이다. 대포는 침략적인 압력을 수단으로 하여 큰 타자의 장 속에서 그녀의 동의를 ‘기입’하고 ‘기록’하는 것을 얻어내기를 원하는 것이다.

동일한 모티프의 역전된 변종이 트뤼포의 <아메리카의 밤>에서의 한 짧은 사랑 장면에서 작동한다. 호텔에서 스튜디오로 운전해 가다가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 났을 때, 보조 촬영기사와 여자 스크립터는 호숫가에 그들만이 있음을 발견한다. 오랜 동안 그녀를 쫓아다녔던 보조 촬영기사는 기회를 얻어 그가 그녀를 얼마나 갈망해왔는가, 그리고 지금 그들만이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얼마나 많은 것을 의미하는가, 그러니 그녀가 짧은 성교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에 관해 감동적인 말들을 쏟아붓는다. 여자는 그저 “그러지 뭐”라고 말하고는 바지 단추를 풀기 시작한다……

물론 이러한 고상하지 못한 제스처는 그녀를 접근할 수 없는 귀부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유혹자를 당황하게 만든다. 그는 단지, “어떻게 하라고요? 자 이렇게?” 라고 하며 머뭇거릴 뿐이다. 이 장면이 <광란의 사랑>에서의 장면(그리고 궁정식 사랑의 매트릭스 안에서 그것을 작동시키는 것)과 공유하는 것은 예기치 않은 거절의 제스처다. 오랜 끈질긴 노력 끝에 얻어낸 여성의 “예!”라는 말에 대한 남성의 응답은 그 행위를 거절하는 것이다.


우리는 에릭 로메르의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에서 궁정식 사랑이라는 모체(matrix)의 보다 세련된 변형을 만나게 된다. 궁정식 사랑은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 주인공이 한 거짓말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논리를 제공한다. 영화의 중심 부분은 남자 주인공과 그의 여자친구 모드가 함께 보낸 밤을 묘사하는 데 할애된다. 그들은 몇 시간 오래 이야기하고 심지어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으나, 남자 주인공이 주저하였기 때문에 성행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전날 저녁에 교회 앞에서 만난 신비로운 금발 여자에게 사로잡혀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모드와 섹스할 수 있는] 그 기회를 붙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녀가 누군지조차 모르지만 이미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해버렸다(이를테면, 그 금발은 그의 귀부인Lady인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를 보여준다. 남자 주인공은 그 금발 여자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결혼한 상태인데, 우연히 해변에서 모드와 마주친다. 그의 부인이 그에게 이 모르는 여자는 누구냐고 물었을 때, 남자 주인공은 거짓말을 한다, 그에겐 손해가 될 것으로 보이는 거짓말을. 그는 그의 아내에게, 모드는 결혼 전 그가 마지막으로 사랑의 모험을 나눈 상대[즉, 마지막 섹스 파트너]라고 거짓말을 한다. 왜 이런 거짓말을? 왜냐하면 그가 사실을 말할 경우, 모드 역시 [그에겐] 귀부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그의 아내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 동안의 무의미한 성적 접촉이란 것이 불가능한 그런 귀부인 말이다. 그는 아내에게 간단히 거짓말을 함으로써, 즉 모드와 섹스를 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는 그의 아내에게 모드는 그의 여인이 아니었음을, 그저 한 때 지나쳐간 [즉, ‘짧은 시간 동안의 무의미한 성적 접촉’을 나눈] 친구일 뿐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 십 년 동안(*'recent decades'이므로 '최근 몇 십년 동안'이라고 해야 맞다)  궁정식 사랑의 최종적 판본은 물론 필름 느와르에서의 요부(femme fatale)의 형상 속에서 나타난다. 외상적인 여성-물(Woman-Thing)은 그녀의 탐욕스럽고 변덕스러운 요구들을 통해 하드보일드 주인공을 파멸로 이끈다. 여기서 핵심 역할은, 요부를 ‘합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제3의 존재(갱 집단의 보스 역할 같은)에 의해 수행된다. 그의 존재가 그녀를 접근 불가능하게 만들고, 그래서 남자 주인공과 그녀와의 관계는 위반의 관계로 낙인찍힌다. 그녀와 연루되면서 주인공은 그 자신의 보스이기도 한 아버지와 같은 인물을 배반하게 된다(*지젝이 거론하고 있는 영화 몇 편의 포스터들이다).

느와르의 세계에서의 요부와 궁정식 사랑의 여인을 이렇게 연결시키는 일이 놀라운 것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필름 느와르에서 요부는 기사가 충성을 서약한 그 고상하고도 군주스러운 여인과는 정반대가 아닌가 말이다. 하드보일드 주인공은 요부에게 느끼는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는가? 그는 그녀를,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그 자신을 혐오하지 않는가? 그는 요부에 대한 그의 사랑을 진정한 자기 자신에 대한 배반으로 경험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가 여인에 대한 이차적 이상화 말고, 여인이 갖는 원초적인 외상적 충격을 명심한다면, 관련성은 분명해진다. 여인처럼, 요부 역시 ‘비인간적인’ 파트너요, 그와는 어떤 관계도 불가능한 외상적 대상(Object)이며, 무의미하고 변덕스러운 명령을 부과하는 감정 없는(apathetic) 공동(空洞)이니까 말이다...  

06.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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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29 1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0-29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벤더스의 영화였던가요? 언젠가 빨리 돌려봐서 봤다고도, 안봤다고도 하기 뭐하네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봐야겠네요...
 

'궁정식 사랑의 마조히즘적인 연극'에 이어지는 글이다. ‘도착적인 새끼 악마’는 'Imp of the Perverse'의 번역이며, 국역본 <향락의 전이>에서 이 절은 '고상한 '성도착의 도깨비''란 제목을 달고 있다(내가 갖고 있는 건 초판이어서 개역판에는 변화가 있는지 모르겠다). 

 

 

 

 

좀더 면밀히 고찰하면, 귀부인-대상의 접근불가능성은 어떻게 개념화될 수 있을까? 피해야 할 원칙적인 실수 증의 하나는 이 접근불가능성을, 우리는 그 열매가 금지되는 한 그것을 탐낸다는 식의, 단순한 욕망과 금지의 변증법으로 환원하는 일이다. 혹은, 다음과 같은 프로이트의 고전적인 공식을 따라서 그렇게 환원하는 일이다.  

궁정식의 '도착적인 새끼 악마' 

"…성애적 욕구의 심리적 가치는 그것을 만족시키는 것이 쉬워지자마자 감소한다. 리비도를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장애물이 필요하다. 그리고 만족에 대한 자연적 저항이 충분하지 않았던 곳에서 항상 사람들은 사랑을 즐길 수 있기 위해 인습적인 장애물을 설치해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궁정식 사랑은 그저 가장 급진적인 전략의 하나로 나타날 뿐인데, 그것은 곧 대상을 획득불가능하게 만드는 관습적 장애물을 설치하여 대상의 가치를 드높이는 전략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라캉은 세미나 20 <앙코르>에서 외관상 유사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성적 관계의 부재를 대체하는 가장 세련된 그 방법은 그 길에 장애물을 설치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라고 가장하는 것이다.”(라캉, <앙코르>, 불어판, p.65)

따라서 요점은, 대상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부가적인 관습적 장애물을 우리가 설치한다는 것, 단지 그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대상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외부적 장애물은, 그 장애물이 없다면 대상에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식의 환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귀부인-물(Lady-Thing)의 장소는 원천적으로 텅 빈 곳이다. 그녀는 그 주위로 주체의 욕망이 구조화되는 일종의 블랙홀로 기능한다. 욕망의 공간은 상대성 이론의 공간처럼 구부러져 있다. 대상-귀부인에게로 가는 유일한 길은 간접적인, 우회적인, 구불구불한 길 뿐이다. 곧장 직진해서 가면 우리는 반드시 목표를 잃는다. 이것이 라캉이 궁정식 사랑과 관련하여 “심리적 경제에서 우회의 협상에 귀속시켜야 하는 그런 의미”를 환기시켰을 때 염두에 둔 것이다.  

정신에서의 우회는 쾌락원칙의 영역에서 조직되는 모든 것과 현실의 구조로서 그 자체를 드러내는 모든 것 사이의 교섭을 조절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액포(vacuole, 液胞)의 영역을 그 자체로 눈에 띄게 만들기 위해 조직되는 우회와 장애물이 또한 존재한다…… 궁정식 사랑과 관련된 테크닉들은 - 그리고 그것들은 무엇이 때로 사실fact이 되는가를, 이러한 에로티시즘에 대한 고무 속에서 성적 질서를 이야기하는 것을 당연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지각할 수 있게 한다 - 억제, 미결정, 방해된 사랑(amour interruptus)의 테크닉이다. 궁정식 사랑이 자비의 선물(le don de merci)이라고 신비롭게 언급된 것 이전에 설정하고 있는 단계는 -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 프로이트가  <세 개의 에세이(Three Essays)>에서 전희(前戱)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사용했던 용어로 표현된다.(라캉, 앞의 책, p.152)  

 

 

 



그런 이유로, 라캉은 왜상(歪像; anamorphosis)의 모티프를 강조한다. 즉 대상은 그것의 측면에서, 부분적이고 뒤틀린 방식으로, 그 자신의 그림자로서 보여질 때에만 지각될 수 있다. 그것을 직접적으로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단지 텅 빈 공동만을 보게 될 뿐이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시간적 왜상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대상은 끊임없는 연기[지연]를 통해서만, 그것을 확인[참조](reference)할 수 있는 지점이 부재하는 상태로서만(as its absent point of reference) 획득될 수 있다.

그러므로 대상은 말 그대로 창조된 어떤 것인데, 그 대상의 장소는 에워싸여져 있으며, 그 대상은 [주체의] 우회, 근접, 성공 일보직전(near-miss)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창조된다. 승화가 작동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라캉적 의미에서의 승화는 [프로이트 이래의 정신분석적 의미의 승화와는 달리] 대상이 물의 위엄으로 승격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승화는 일상적 현실의 부분인 어떤 대상이, 불가능한 물의 장소에서 발견될 때 발생한다. 인위적 방해물들이 기능하는 곳은 이 곳이다. 방해물들이 우리가 어떤 평범한 대상에 접근하는 것을 갑자기 막는다. 그 방해물들이 대상을 물의 지위를 대리하는 것으로 상승시킨다. 이것이 ‘불가능한 것’이 ‘금지된 것’으로 바뀌는 방식이다 : 이 변화는 물과 인위적인 방해물들 때문에 접근 불가능하게 된 어떤 실정적인 대상 사이의 단락(短絡; short circuit) 때문에 일어난다.

접근할 수 없는 대상으로서의 귀부인이라는 전통은 살아 있고, 예컨대 우리 세기의 초현실주의에서 더욱 그렇다. 그것은 루이스 브뉘엘의 <욕망의 모호한 대상>을 상기해보는 것만으로 충분한데, 거기서 한 여성은 일련의 불합리한 트릭을 통해 그녀의 늙은 애인과의 성적 재결합의 순간을 끊임없이 지연시킨다(예컨대 남자가 그녀를 결국 침대로 데려갔을 때, 그는 그녀의 잠옷 속에서 그녀를 완전히 벗기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수많은 버클이 달린 구식 코르셋을 발견한다). 영화의 매력은 근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한계와 사소한 경험적 장애물 사이의 바로 이 터무니없는 단락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여기서 우리는 궁정식 사랑과 승화의 논리를 그 가장 순수한 형태 속에서 발견한다. 어떤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상이나 행위는 일단 그것이 물(Thing)의 위치에 놓이게 되면 접근할 수 없거나 성취 불가능한 것이 된다. 물은 쉽게 닿을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체 세계는 어떻게든 대상에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는 측량할 수 없는 우연성을 반복적으로 생산하는 데 순응해왔다.  

브뉘엘은 이러한 역설적 논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단순한 욕망을 충족하는 것의 설명할 수 없는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며, 그의 모든 일련의 영화들은 이러한 모티프를 변주한다. <범죄에 대한 수필(The Criminal Life of Archibaldo de la Cruz)>에서 주인공은 간단한 살인을 하기를 원하지만 그의 모든 시도는 실패한다. <추방당한 천사(The Exterminating Angel)>에서는 파티를 마치고 난 일군의 부자들은 문턱을 넘어 그 집을 떠나지 못한다. 그리고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The Discreet Charm of the Bourgeoisie)>에서 두 커플은 함께 식사를 하기를 원하지만 예기치 않게 생기는 복잡한 일들이 항상 이 단순한 소망을 충족시키는 것을 방해한다...

 

 

 

이제 통상적인 욕망과 금지의 변증법과 관련하여 무엇이 차이를 결정하는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금지의 목적은 대상으로의 접근을 보다 어렵게 만듦으로써 대상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 자체를 물(物)의 수준으로, 그것을 중심으로 욕망이 조직되는 ‘블랙홀’의 수준으로 격상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라캉은 정당하게도 통상적인 승화의 공식을 뒤집는데, 그 공식이란 리비도를 어떤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상에서 이러한 욕구와 명백한 관련이 없는 대상으로 이동시키는 것과 관련된다. 예컨대 파괴적 문학비평은 승화된 공격성이 되고, 인간 육체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는 승화된 관음증이 되는 등등 그런 식이다. 반대로 라캉이 승화로써 의미하는 바는 리비도를 ‘쓸모없는’ 물의 공동에서, 물의 자리를 점유하는 순간 숭고한 속성을 획득하는 어떤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대상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궁정식 사랑에서 귀부인의 역설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곳은 결국 우회의 역설이다. 우리의 공식적 욕망은 우리가 그 귀부인과 자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우리가, 우리의 소망에 관대하게 굴복하는 귀부인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귀부인으로부터 진정으로 기대하는 것은 단지 또 다른 새로운 명령이고, 또 한 번의 연기(延期)일 뿐이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자신은 그 자신의 부정한 성적 욕망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유혹에 저항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한 난봉꾼의 우화를 소개한다. 그러나 그가 간통에 대한 대가로 교수형에 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는 그가 결국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갑자기 발견하게 될 것이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귀부인의 충실한 하인이라면, 선택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조화된다: 아마도 그는 귀부인에 대한 그 자신의 욕망을 즉각적으로 만족시키기보다는 교수형을 더 선호하리라. 그러므로 귀부인은 하나의 독특 단락(段落)으로서, 욕망의 대상 그 자체가 그 자신의 목표달성을 방해하는 힘과 일치하는 독특한 단락으로서 기능한다. 어떤 면에서, 대상은 그 자신의 퇴거이자 철회인 것이다.

우리가, 종종 언급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해되었던, 여성의 ‘남근적’ 가치, 즉 ‘여성=남근’이라는 라캉의 동일화를 인지해야만 하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 의지해서이다. 말하자면, 똑같은 역설이 거세의 기표로서의 남근적 기표를 특징짓는다는 말이다. ‘거세란, 향락이 거절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그 결과, 향락이 욕망의 법이라고 하는 뒤집혀진 사다리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라캉, <에크리 선집>, p.324)

이러한 ‘경제적 역설’은 얼마나 그럴 듯한 것인가, 욕망의 기계는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어떻게 해서 주체는 향락을, 그 무슨 고귀한 대의(Cause)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것[향락]에 접근할 수 있기 위해서, 거부하게 되어 있는 것인가? 혹은 - 동일한 역설에 대한 헤겔의 공식을 인용하자면 - 어떻게 우리는 동일성을 그것을 상실하는 것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가? 이 문제들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남근 즉 향락의 기표가 동시에 거세의 기표이어야만 한다는 것, 즉, 하나의 동일한 기표가 향락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그것의 상실을 의미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향락을 추구하게 만드는 바로 그 작인이 우리로 하여금 향락을 거부하게 만드는 일이 가능해진다.

다시 귀부인으로 돌아가 보자. 그러므로 우리는 귀부인을 서양의 형이상학적 열정의 의인화로 간주할 수 있으며, 특수한 실체 혹은 대상을 모든 존재의 근거로 격상시키는 형이상학적 오만의 과도하다 못해 거의 희화(戱畵)적인 사례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좀더 면밀히 고찰해본다면, 무엇이 이러한 형이상학적 혹은 더 단순하게 철학적 오만을 구성하는가? 아마도 놀라운 사례로 보일만한 것을 거론해보자.

맑스의 경우, 그가 생산을, 생산․분배․교환․소비라는 네 가지 요소의 총체성의 한 계기(moment)이면서 동시에 그 네 가지 요소를 망라하는 총체성이자 그 총체성에 특별한 색조를 부가하는 것이라고 지적할 때, 거기에선 특수하게 철학적인 차원이 작동한다. ‘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절대화’, 즉 총체성의 특수한 한 계기를 총체성의 근거로 상승시키는 것, 균형 잡힌 전체의 조화를 ‘방해하는’ 그와 같은 오만을 가리키는 것이다.

 

 

 

 

언어에 대한 두 가지 접근방식을 거론해보자. 오스틴(John L. Austin)의 작업과 뒤크로(Oswald Ducrot)의 작업 말이다. 그들의 작업을 ‘철학’으로 간주하는 것이 어떻게 해서 정당한가? 모든 동사를 수행문(performatives)과 사실(확인)문(constatives)으로 구분한 오스틴의 구분은 아직 엄밀한 의미에서의 철학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확인)문을 포함한 모든 명제는 이미 수행적이다, 라는 오스틴의 ‘불균형적이고’ ‘과도한’ 가정과 함께 철학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즉, 수행적인 것은 전체의 두 계기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전체이다, 라는 가정 말이다(*뒤크로의 책으론 토도로프와 공저한 <언어과학백과사전>이 유명하다. 나는 영역본을 갖고 있는데, 이대기호학연구소 번역으로 <기호학사전>(우석, 1990)으로 번역돼 나온 적이 있다. 그다지 신뢰할 만한 번역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레마스와 쿠르테 공저의 <기호학 용어사전>(민성사, 1988)만큼 가관은 아니었지만).

모든 서술어가, 그것의 정보전달적(informative) 가치를 넘어서서, 논쟁적(argumentative) 가치를 소유한다는 뒤크로의 논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단지 각각의 서술어에서 정보전달적 가치와 논쟁적 가치를 구분하려고 노력하는 한 우리는 실증 과학의 영역에 머문다. 어떤 정보전달이 어떤 논쟁적 태도에 ‘적합한가'에 대한 특별한 양태를 확인하려 할 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보전달적 내용을 포함하는 서술어는 단지 압축된 논쟁적 태도에 불과하므로, 우리가 그로부터 어떤 논쟁적 태도에 의해서도 더럽혀지지 않은, 그 서술어의 ’순수한‘ 정보전달적 내용을 추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과도한‘ 가정과 함께 철학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전부가 아닌(not-all)'의 역설에 직면한다 : ’서술어의 내용의 어떠한 측면도 어떤 논쟁적 태도에 의해 영향 받지 않은 채로 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 ‘서술어의 모든 내용은 논쟁적이다’라고 하는 언뜻 명백해 보이는 보편적 결론을 끌어낼 수 있게끔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도 분명히 규정될(pinned down) 수는 없지만 [분명히] 존속하는 잉여, 빠져나가는 그 잉여는 라캉적 의미의 실재이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숙고하는 또 다른 방식을 제공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존재론적 차이란] 총체성의 (특수한 형태이지만 근거로 격상된 그) 근거와, 이 근거를 빠져나가는, 그리고 그 자신은 그 근거 안에서 ‘근거지어질’ 수 없는 실재 사이에서 언제나 벌어지는 거리라는 방식으로 말이다. 말하자면, ‘비-형이상학적’이라는 것은 어떠한 오만도 제거된 ‘균형 잡힌’ 총체성이 아니며, 여하한 특수한 양상 혹은 실체도 근거로 격상되지 않는 그런 총체성(보다 더 하이데거적 용어로 말하자면 '존재자들의 전체(the Whole of entities)'도 아니다. 실체들[존재자들]의 영역은 그것의 아래에 놓여져 있는[가정되어 있는](sup-posited) 근거로부터 그것의 일관성을 얻으며, 그렇기 때문에 ‘비-형이상학’은 근거와 [그것을] 빠져나가는 실재―그것의 실정적인 내용(‘현실’)은 근거에 근거지어져 있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거의 영역을 빠져 나가고 근거를 침식하는 실재―사이의 차이에 대한 통찰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이제 다시 귀부인으로 돌아가 보자. 이것이 바로 귀부인이 형이상학적 근거의 또다른 이름인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근거 자체를 근거지어주는 자기 철회적인 실재(the self-retracting Real)의 다른 이름인 까닭이다. 그리고 모든 실체의 형이상학적 근거의 또 다른 이름이 ‘최고 선(supreme Good)’인 한, 물로서의 귀부인은 근본 악(redical Evil)의 구현체로서 지적될 수 있다. 에드가 앨런 포가 그의 단편에서 '도착적인 영혼(spirit of perverseness)'이라고 불렀던 그 악의 구현체 말이다.


 

 

 

 

-이러한 영혼에 대해서 철학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도착perversness이란 것이 인간 마음의 원초적 충동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이 나에게는 내 혼이 살아 있다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비열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수백 번 저질러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을 거스르면서, 단지 그것이 법이라는 이유만으로 법을 어기려는 집요한 기질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검은 고양이>)  

-...사실 그것은 동기 없는 움직임(a mobile without), 동기화되지 않은 동기(a motive not motiviert)다. 그 자극 때문에 우리는 납득할 수 있는 어떤 목적[대상] 없이 행위 한다. 혹은 이것을 반대로 뒤집어서 이해해 본다면, 우리는 [앞서 말한] 그러한 자극 때문에, 우리가 해서는 안된다는 그 이유로 [무언가를] 행한다는 식으로 전제를 수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론들 중에서 이보다 더 부조리한 논리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사실 이 보다 더 강력한 것도 없는 것이다… 어떤 행동이 잘못이며 실수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 종종 우리를 몰아가고 그것을 실행하라고 부추기는 어떤 정복할 수 없는 힘이 된다는 사실은 내가 숨쉬고 있다는 것만큼이나 내게는 확실한 것이다. 잘못 그 자체를 위해 잘못을 저지르려는 이러한 압도적인 기질은, 분석이 되거나 다른 내적 요소로 분해 되거나 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인, 그리고 원초적인 충동-요소란 말이다.(<도착적인 새끼 악마>)

 

동기화되지 않은 불필요한 행위(acte gratuit)로서의 범죄가 예술에 대해 갖는 친화성은 낭만주의 이론의 표준적인 주제이다.(낭만주의 예술가 집단은 죄인으로서의 예술가라는 관념을 구성한다) 포의 공식(동기 없는 움직임, 동기화되지 않은 동기)이 직접적으로 미적 경험에 대한 칸트의 결론(‘목적 없는 합목정성’, 등등)을 상기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이러한 명령 ― ‘너는 [너에게 그것이] 허락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해야 한다’, 즉 그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수행되는 어떤 행위의 순수하게 부정적인 근거 ― 은 오직 변별적인 상징적 질서 내에서만, 즉, 그러한 부정적 결정이 긍정적 목적지(그 목적지 내에서는 특질의 부재가 긍정적 특질로 기능하는 그런 목적지)를 갖는 상징적 질서 내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포의 ‘도착의[도착이라는] 새끼 악마’는 따라서 행위의 동기화가 행위가 그것의 경험적 대상과 맺는 외부적인 연결을 끊어버리고, 행위의 동기 그 자체를 오직 자기-참조의 내재적 원환에 근거 짓는 지점을 표시한다. 요컨대, 포의 ‘새끼 악마’는 엄밀하게 칸트적인 의미에서 자유의 지점에 상응하는 것이다. 

칸트와의 이와 같은 관련성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칸트에 따르면, 욕망하는 능력은 초월적 지위를 갖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정념적 대상과 동기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라캉은 욕망하는 능력의 선험적 지위를 논증해내려고 한다. 즉, 정념성과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우리 욕망의 어떤 동기부여(이러한 비-정념적인 욕망의 대상-원인은 대상 a이다)를 공식화할 수 있는 가능성 말이다. 포의 ‘도착의 새끼 악마’는 그러한 순수한 동기부여의 직접적인 사례를 제공한다:

내가 ‘오직 그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행위를 수행할 때, 나는 경험적-우연적 대상과 관계 맺지 않고, 보편적-상징적 영역 안에 머무른다. 말하자면, 나는 엄밀한 의미에서 비-정념적인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는 내기를 잘못 걸었다 : 정념적 동기부여의 윤리학이라는 영역을 일소해버림으로써, 그는 선을 가장하고 악을 행할 수 있는 바로 그 가능성을 근절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한 것은 보통의 병리적[정념적] 악보다 훨씬 더 기괴한(uncanny) 악의 새로운 영역을 열어젖힌 일이다.

06. 10. 23.

P.S. 참고로, <도착적인 새끼 악마(The Imp Of The Perverse)>(1845)의 원문을 옮겨놓는다. 국역본 단편전집에 포함돼 있는지는 확인해봐야겠다.

In the consideration of the faculties and impulses – of the prima mobilia of the human soul, the phrenologists have failed to make room for a propensity which, although obviously existing as a radical, primitive, irreducible sentiment, has been equally overlooked by all the moralists who have preceded them.  In the pure arrogance of the reason, we have all overlooked it.  We have suffered its existence to escape our senses solely through want of belief – of faith; – whether it be faith in Revelation, or faith in the Kabbala.  The idea of it has never occurred to us, simply because of its seeming supererogation.  We saw no need of the impulse – for the propensity.  We could not perceive its necessity.  We could not understand, that is to say, we could not have understood, had the notion of this primum mobile ever obtruded itself; – we could not have understood in what manner it might be made to further the objects of humanity, either temporal or eternal.  It cannot be denied that phrenology, and in great measure, all metaphysicianism, have been concocted à priori.  The intellectual or logical man, rather than the understanding or observant man, set himself to imagine designs – to dictate purposes to God.  Having thus fathomed to his satisfaction, the intentions of Jehovah, out of these intentions he built his innumerable systems of mind.  In the matter of phrenology, for example, we first determined, naturally enough, that it was the design of the Deity that man should eat.  We then assigned to man an organ of alimentiveness, and this organ is the scourge with which the Deity compels man, will-I nill-I, into eating.  Secondly, having settled it to be God's will that man should continue his species, we discovered an organ of amativeness, forthwith.  And so with combativeness, with ideality, with causality, with constructiveness, – so, in short, with every organ, whether representing a propensity, a moral sentiment, or a faculty of the pure intellect.  And in these arrangements of the principia of human action, the Spurzheimites, whether right or wrong, in part, or upon the whole, have but followed, in principle, the footsteps of their predecessors; deducing and establishing everything from the preconceived destiny of man, and upon the ground of the objects of this Creator.

It would have been wiser, it would have been safer to classify, (if classify we must,) upon the basis of what man usually or occasionally did, and was always occasionally doing, rather than upon the basis of what we took it for granted the Deity intended him to do.  If we cannot comprehend God in his visible works, how then in his inconceivable thoughts, that call the works into being?  If we cannot understand him in his objective creatures, how then in his substantive moods and phases of creation?

Induction, à posteriori, would have brought phrenology to admit, as an innate and primitive principle of human action, a paradoxical something, which we may call perverseness, for want of a more characteristic term.  In the sense I intend, it is, in fact, a mobile without motive, a motive not motivirt.  Through its promptings we act without comprehensible object; or, if this shall be understood as a contradiction in terms, we may so far modify the proposition as to say, that through its promptings we act, for the reason that we should not.  In theory, no reason can be more unreasonable; but, in fact, there is none more strong.  With certain minds, under certain conditions, it becomes absolutely irresistible.  I am not more certain that I breathe, than that the assurance of the wrong or error of any action is often the one unconquerable force which impels us, and alone impels us to its prosecution.  Nor will this overwhelming tendency to do wrong for the wrong's sake, admit of analysis, or resolution into ulterior elements.  It is a radical, a primitive impulse – elementary.  It will be said, I am aware, that when we persist in acts because we feel we should not persist in them, our conduct is but a modification of that which ordinarily springs from the combativeness of phrenology.  But a glance will show the fallacy of this idea.  The phrenological combativeness has for its essence, the necessity of self-defence.  It is our safeguard against injury.  Its principle regards our well-being; and thus the desire to be well, is excited simultaneously with its development.  It follows, that the desire to be well must be excited simultaneously with any principle which shall be merely a modification of combativeness, but in the case of that something which I term perverseness, the desire to be well is not only not aroused, but a strongly antagonistical sentiment exists.

An appeal to one's own heart is, after all, the best reply to the sophistry just noticed.  No one who trustingly consults and thoroughly questions his own soul, will be disposed to deny the entire radicalness of the propensity in question.  It is not more incomprehensible than distinctive.  There lives no man who at some period, has not been tormented, for example, by an earnest desire to tantalize a listener by circumlocution.  The speaker is aware that he displeases; he has every intention to please; he is usually curt, precise, and clear; the most laconic and luminous language is struggling for utterance upon his tongue; it is only with difficulty that he restrains himself from giving it flow; he dreads and deprecates the anger of him whom he addresses; yet, the thought strikes him, that by certain involutions and parentheses, this anger may be engendered.  That single thought is enough.  The impulse increases to a wish, the wish to a desire, the desire to an uncontrollable longing, and the longing (to the deep regret and mortification of the speaker, and in defiance of all consequences,) is indulged.

We have a task before us which must be speedily performed.  We know that it will be ruinous to make delay.  The most important crisis of our life calls, trumpet-tongued, for immediate energy and action.  We glow, we are consumed with eagerness to commence the work, with the anticipation of whose glorious result our whole souls are on fire.  It must, it shall be undertaken to-day, and yet we put it off until to-morrow; and why?  There is no answer, except that we feel perverse, using the word with no comprehension of the principle.  To-morrow arrives, and with it a more impatient anxiety to do our duty, but with this very increase of anxiety arrives, also, a nameless, a positively fearful, because unfathomable, craving for delay.  This craving gathers strength as the moments fly.  The last hour for action is at hand.  We tremble with the violence of the conflict within us, – of the definite with the indefinite – of the substance with the shadow.  But, if the contest has proceeded thus far, it is the shadow which prevails, – we struggle in vain.  The clock strikes, and is the knell of our welfare.  At the same time, it is the chanticleer-note to the ghost that has so long over-awed us.  It flies – it disappears – we are free.  The old energy returns.  We will labour now.  Alas, it is too late!

We stand upon the brink of a precipice.  We peer into the abyss – we grow sick and dizzy.  Our first impulse is to shrink from the danger.  Unaccountably we remain.  By slow degrees our sickness, and dizziness, and horror, become merged in a cloud of unnameable feeling.  By gradations, still more imperceptible, this cloud assumes shape, as did the vapor from the bottle out of which arose the genius in the Arabian Nights.  But out of this our cloud upon the precipice's edge, there grows into palpability, a shape, far more terrible than any genius, or any demon of a tale, and yet it is but a thought, although a fearful one, and one which chills the very marrow of our bones with the fierceness of the delight of its horror.  It is merely the idea of what would be our sensations during the sweeping precipitancy of a fall from such a height.  And this fall – this rushing annihilation – for the very reason that it involves that one most ghastly and loathsome of all the most ghastly and loathsome images of death and suffering which have ever presented themselves to our imagination – for this very cause do we now the most vividly desire it.  And because our reason violently deters us from the brink, therefore, do we the more impetuously approach it.  There is no passion in nature so demoniacally impatient, as that of him, who shuddering upon the edge of a precipice, thus meditates a plunge.  To indulge for a moment, in any attempt at thought, is to be inevitably lost; for reflection but urges us to forbear, and therefore it is, I say, that we cannot.  If there be no friendly arm to check us, or if we fail in a sudden effort to prostrate ourselves backward from the abyss, we plunge, and are destroyed.

Examine these and similar actions as we will, we shall find them resulting solely from the spirit of the Perverse.  We perpetrate them merely because we feel that we should not.  Beyond or behind this, there is no intelligible principle.  And we might, indeed, deem this perverseness a direct instigation of the Arch-Fiend, were it not occasionally known to operate in furtherance of good.

I have said thus much, that in some measure I may answer your question, that I may explain to you why I am here, that I may assign to you something that shall have at least the faint aspect of a cause for my wearing these fetters, and for my tenanting this cell of the condemned.  Had I not been thus prolix, you might either have misunderstood me altogether; or with the rabble, you might have fancied me mad.  As it is, you will easily perceive that I am one of the many uncounted victims of the Imp of the Perverse.

It is impossible that any deed could have been wrought with a more thorough deliberation.  For weeks, for months, I pondered upon the means of the murder.  I rejected a thousand schemes, because their accomplishment involved a chance of detection.  At length, in reading some French Memoirs, I found an account of a nearly fatal illness that occurred to Madame Pilau, through the agency of a candle accidentally poisoned.  The idea struck my fancy at once.  I knew my victim's habit of reading in bed.  I knew, too, that his apartment was narrow and ill ventilated.  But I need not vex you with impertinent details.  I need not describe the easy artifices by which I substituted, in his bed-room candlestand, a wax-light of my own making, for the one which I there found.  The next morning he was discovered dead in his bed, and the Coroner's verdict was, ‘Death by the visitation of God’.

Having inherited his estate, all went well with me for years.  The idea of detection never once entered my brain.  Of the remains of the fatal taper, I had myself carefully disposed.  I had left no shadow of a clue by which it would be possible to convict, or even to suspect me of the crime.  It is inconceivable how rich a sentiment of satisfaction arose in my bosom as I reflected upon my absolute security.  For a very long period of time, I was accustomed to revel in this sentiment.  It afforded me more real delight than all the mere worldly advantages accruing from my sin.  But there arrived at length an epoch, from which the pleasurable feeling grew, by scarcely perceptible gradations, into a haunting and harassing thought.  It harassed because it haunted.  I could scarcely get rid of it for an instant.  It is quite a common thing to be thus annoyed with the ringing in our ears, or rather in our memories, of the burthen of some ordinary song, or some unimpressive snatches from an opera.  Nor will we be the less tormented if the song in itself be good, or the opera air meritorious.  In this manner, at last, I would perpetually catch myself pondering upon my security, and repeating, in a low, undertone, the phrase, “I am safe.”

One day, whilst sauntering along the streets, I arrested myself in the act of murmuring, half aloud, these customary syllables.  In a fit of petulance, I remodelled them thus: – “I am safe – I am safe – yes – if I be not fool enough to make open confession!”

No sooner had I spoken these words, than I felt an icy chill creep to my heart.  I had had some experience in these fits of perversity, whose nature I have been at some trouble to explain, and I remembered well, that in no instance, I had successfully resisted their attacks.  And now my own casual self-suggestion, that I might possibly be fool enough to confess the murder of which I had been guilty, confronted me, as if the very ghost of him whom I had murdered – and beckoned me on to death.

At first, I made an effort to shake off this nightmare of the soul.  I walked vigorously – faster – still faster – at length I ran.  I felt a maddening desire to shriek aloud.  Every succeeding wave of thought overwhelmed me with new terror, for, alas! I well, too well understood that, to think, in my situation, was to be lost.  I still quickened my pace.  I bounded like a madman through the crowded thoroughfares.  At length, the populace took the alarm, and pursued me.  I felt then the consummation of my fate.  Could I have torn out my tongue, I would have done it, but a rough voice resounded in my ears – a rougher grasp seized me by the shoulder.  I turned – I gasped for breath.  For a moment, I experienced all the pangs of suffocation; I became blind, and deaf, and giddy; and then, some invisible fiend, I thought, struck me with his broad palm upon the back.  The longimprisoned secret burst forth from my soul.

They say that I spoke with a distinct enunciation, but with marked emphasis, and passionate hurry, as if in dread of interruption before concluding the brief, but pregnant sentences that consigned me to the hangman, and to hell.

Having related all that was necessary for the fullest judicial conviction, I fell prostrate in a swoon.

But why shall I say more?  To-day I wear these chains, and am here!  To-morrow I shall be fetterless!  –  but 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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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옮겨놓는 것은 지젝의 <향락의 전이> 제4장 '궁정식 사랑, 혹은 물(物)로서의 여성'(Courtly Love, or Woman as Thing)의 새 번역이다. 제목 자체를 '고상한 사랑, 또는 물로서의 여성'이라고 옮겨놓고 있는 '고상한' 국역본의 오류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지젝이 재미있는 통찰들이 사장되는 게 유감스러웠던 차에 또다른 번역문을 인터넷상에 발견하고 반가웠다.  

 

 

  

 

해서 몇달전에 스크랩해놓았었는데, 내용을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이미지 버전을 만들어 올려놓도록 한다. 역자들은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 2005)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분량상 일단은 '궁정식 사랑의 마조히즘적 연극'이란 절만을 옮겨놓는다. 다른 대목들은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옮겨놓을 예정이다(본문중의 이미지와 강조, 군말은 모두 나의 것이다). 

궁정식 사랑의 마조히즘적 연극

궁정식 사랑과 관련하여 우리가 피해야 할 첫 번째 함정은 귀부인(the Lady)을 숭고한 대상으로 간주하는 잘못된 관념이다. 대체로 우리는 여기서 영성화(spiritualization)의 과정, 즉 미숙하고 감각적인 갈망에서 고양된 영성적인 소망으로의 이행을 환기한다. 그리하여 귀부인은 우리를 더 높은 종교적 엑스터시의 영역으로 인도하는, 단테의 베아트리체라는 의미에서 일종의 영적인 가이드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생각과는 대조적으로, 라캉은 그러한 영성화와는 상반되는 일련의 특징들을 강조한다. 사실상, 궁정식 사랑에서의 귀부인은 구체적인 특성을 잃고 있으며 추상적인 이상으로서 언급된다. 그래서 ‘작가들은, 모든 시인들이 마치 같은 사람을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고 기록했다. 이런 시적 장(poetic field)에서 여성적 대상은 모든 실제적인 실체성을 결여하고 있다.’(라캉, <정신분석의 윤리>, p.149) 그러나 귀부인의 이러한 추상적 성격은 영혼의 정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차갑고 거리가 있는 비인간적인 파트너에 어울리는 추상작용을 지시한다. 즉 귀부인은 결코 따뜻하고 동정심 많으며 이해심 있는 동료가 아니다.

"예술에 고유한 승화의 형식을 수단으로 하여, 시적 창작은 내가 오직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파트너로서 기술할 수 있을 뿐인 대상을 정립하는 것에 있습니다. 귀부인은 그녀의 어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미덕, 즉 지혜, 신중함, 혹은 심지어는 능력으로 특징지어지지 않습니다. 그녀가 현명하다고 기술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녀가 비물질적인 지혜를 구현하고 있거나 그것들을 실행하는 것 이상으로 그것의 기능들을 표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반대로, 자신의 하인에게 할 수 있는 한 제멋대로 시험을 부과합니다."(라캉, <정신분석의 윤리>, p.150) 

그러므로 귀부인에 대한 기사의 관계는, 무의미하고 흉폭하며 불가능하고 자의적이며 변덕스러운 시련을 강요하는 봉건영주의 주권에 대한 농노와 가신의 관계다. 이러한 시련의 비영성적 본질을 정확히 강조하기 위해 라캉은 하인에게 자기 엉덩이를 문자 그대로 핥으라고 요구하는 귀부인에 관한 시를 인용한다. 시는 하인을 그 아래에 대기하게 만든(우리는 중세에 개인위생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 알고 있다) 악취에 대한, 그가 그의 임무를 완수할 때 귀부인이 그의 머리에 오줌을 싸리라는 절박한 위협에 관한 시인의 불평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귀부인은 어떠한 종류의 정화된 영성(靈性)으로부터도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녀는 우리의 욕구와 욕망과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전적으로 다른 근본적인 타자성이라는 의미에서, 비인간적인 파트너로 기능한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또한 일종의 자동기계, 즉 의미 없는 요구 사항들을 마구잡이로 말해오는 하나의 기계이다.

귀부인에게 섬뜩하고 괴물스러운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절대적이고 불가해한 타자성과 순수한 기계의 이러한 일치다. 귀부인은 우리의 ‘동료’가 아닌 큰 타자다. 다시 말해, 그녀는 어떠한 공감의 관계도 나누는 가능하지 않은 그 누구(someone)이다. 이러한 외상적인 타자성은 라캉이 프로이트의 용어 ‘das Ding’을 빌려 물(物; the Thing)이라고 지칭한 바 있는 바로 그것, 즉, ‘항상 그 자리로 돌아오는’, 상징화에 저항하는 견고한 중핵인, 실재(the Real)이다. 귀부인의 이상화, 즉 그녀를 영적인 천상적 이상으로 승격시키는 것은 따라서 엄격히 이차적인 현상으로서 인지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녀의 외상적 차원이 보이지 않도록 만드는 [남성의] 나르시시즘적 투사(projection)이다.

이러한 정확하고 한정된 의미에서, 라캉은 “궁정식 사랑의 이데올로기에서 명확히 찾아낼 수 있는 이상화하는 찬미의 요소는 확실히 논증되었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 특성상 나르시시즘적인 것입니다”라고 인정한다. 모든 실제적 실체성을 박탈당한 채로, 귀부인은 주체가 그의 나르시스적 이상을 투사하는 하나의 거울로서 기능한다. 달리 말해 - <예술가의 스튜디오에서>라는 소네트에서 가브리엘 로제티와 그의 귀부인 엘리자베스 시달의 관계를 말하는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말로 하자면 - ‘귀부인은 그녀 자신으로서[그녀가 그녀 자신일 때]가 아니라, 그의 꿈을 채움으로써[채울 때] 나타난다.’

그러나 라캉에게 있어 중요한 강조점은 다른 곳에 있다. “거울은 때때로 나르시즘의 기제를 함축하며, 특별히는 우리가 후에 조우하게 될 파괴 혹은 공격성의 차원을 함축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다른 역할을 수행합니다, 한계로서의 역할 말입니다. 그것은 넘어서지지 않는 한계입니다. 그것이 참여하는 유일한 체제는 대상에 대한 접근 불가능성이라는 체제일 뿐입니다.[그것은 오로지 대상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써 어떤 한계로서의 자기 역할을 수행합니다]”(라캉, 앞의 책, 151쪽)

따라서 궁정식 사랑에서 어떻게 귀부인이 실제의 여성들과 관계되는가에 대한, 그리고 어떻게 그녀가 살과 피를 가진 여성에 대한 굴욕을 포함하는 남성의 나르시시즘적 투사를 대표하게 되는가에 대한 진부한 문구를 포괄하기 이전에 우리는 다음의 질문에 답변해야 한다. 그러한 텅빈 표면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투사를 가능하게 하는 공간을 열어젖히는 그 차갑고 중립적인 스크린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즉 만약에 남성들이 그들의 나르시시즘적 이상을 거울에 투사하려고 한다면, 침묵하는 거울 표면은 이미 거기에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표면은 일종의 현실의 블랙홀로서, 그것의 너머(Beyond)에 접근할 수 없는 하나의 한계로서 기능한다.

 

궁정식 사랑의 또 다른 핵심적인 특징은 그것이 철저하게 예절과 에티켓의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모든 장벽들을 뛰어넘으며 사회적 규칙으로부터 면제되어 있는 그런 기본적 열정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우리는 엄밀한 허구적 공식을, 즉 한 남성이 그의 애인이 접근할 수 없는 귀부인임을 가장하는 ‘마치~처럼(as~if)'의 사회적 게임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궁정식 사랑과, 그 사랑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은 듯이 보이는 하나의 현상 사이의 연결고리를 확립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정확히 이러한 특징이다.

 

 

 

 

즉 지난 세기 중반에 자허 마조흐(Sacher-Masoch)의 문학작품과 삶의 실천에서 처음으로 명확하게 표현된 성도착의 특수한 형태로서 마조히즘이 바로 그것이다. 질 들뢰즈는 마조히즘에 대한 유명한 연구에서, 마조히즘이 사디즘의 단순한 대칭적 역전으로 파악될 수 없음을 논증한다. 사디즘과 그의 희생자는 결코 상보적인 ’사도-마조히스트‘ 커플을 형성하지 않는다. 들뢰즈가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비대칭성을 증명하기 위해 환기하는 그러한 특징들 중에서 핵심적인 것은 부정(negation)의 양태의 대립이다. 사디즘에서 우리는 직접적인 부정, 폭력적 파괴 및 고문과 조우하는 반면, 마조히즘에서의 부정은 부인의 형태, 즉, 가장의 형태, 현실을 중단시키는 ‘마치 ~처럼’의 형태를 취한다(*마조흐의 주저인 <모피를 입은 비너스> 들뢰즈의 <매저키즘(인간사랑, 1996) 외에도 <모피를 입은 비너스>(과학과사상, 1996)로 번역돼 있다).

이러한 첫 번째 대립에 밀접하게 의존하는 대립은 제도와 계약의 대립이다. 사디즘은 제도의 논리, 즉 희생자를 고문하고 희생자의 무기력한 저항 속에서 쾌락을 얻는 제도적 폭력의 논리를 따른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디즘은 그 그림자로서 필연적으로 ‘공적인’ 법을 배가시키고 동반하는 외설적인 초자아 이면 속에서 작동한다. 반대로 마조히즘은 희생자의 조처(measure)로 이루어진다. 주인과의 계약을 개시하고, 그녀[주인]에게 그녀가 적절하다고 간주하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를 능멸할 수 있도록 하는 권한을 부여하고, 주권자인 귀부인의 변덕에 따라 행위할 수밖에 없도록 그 자신을 속박하는 것은 희생자(마조히즘적 관계에서는 하인)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예속을 상연한다.

사디즘과 반대되는 마조히즘의 더 차별적인 특징은 그것이 내재적으로 연극적이라는 점이다. 폭력은 대부분 가장되고, 그것이 ‘실제적’일 때조차도 폭력은 장면의 구성요소로서, 연극적 상연의 일부분으로서 기능한다. 게다가 폭력은 결코 실행되지도 않고 결론을 맺지도 않는다. 그것은 항상 중단된 제스처의 끝없는 반복으로서 중지된 채로 남겨진다.

우리로 하여금 마조히즘적 태도의 근본적인 역설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정확히 이러한 부인(disavowal)의 논리다. 다시 말해, 전형적인 마조히즘적 장면은 어떻게 보이는가? 남성-하인은 냉정하고 사무적인 방식으로 여성-주인과 계약 사항들을 설정한다. 그것은 이런 것들이다. 그녀가 그에게 무엇을 하는가, 어떤 장면이 끊임없이 시연(試演)되어야 하는가, 그녀는 무슨 옷을 입는가, 그녀는 실제적이고 육체적인 고문의 명령에서 얼마나 더 나아가야 하는가(그녀는 그를 어떻게 모질게 채찍질하고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그를 사슬에 묶으며 어디에서 하이힐의 끝으로 그를 찍어 누르는가 등).

그들이 결국 고유한 마조히즘적 게임으로 넘어갈 때, 마조히스트는 끊임없이 일종의 반성적 거리를 유지한다. 그는 결코 실제로 그의 감정에 굴복하거나 그 자신을 게임에 완전히 내어주지 않는다. 게임의 중간에 그는 갑자기 적어도 ‘환영을 파괴함’이 없이 정확한 지시(그 지점을 더 세게 누르시오, 그 운동을 반복하시오...)를 내리는 무대 연출자의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일단 게임이 끝나면, 마조히스트는 다시 존경스러운 부르주아의 태도를 채택하고 평범하고 사무적으로 주권자 귀부인과 대화하기 시작한다. “당신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다음 주 같은 시간에 볼 수 있습니까?” 등등.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마조히스트의 가장 내밀한 열정의 완전한 자기-외부화(self-externalization)이다. 가장 내면적인 욕망이 계약의 대상이 되고 협상을 구성한다. 마조히즘적인 연극의 본성은 따라서 완전히 ‘비(非)심리학적’이다. 사회적 현실을 중단시키는 초현실적이고 열정적인 마조히즘적인 게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일상적 현실과 조화를 이룬다.

 

그런 이유로, 마조히즘이라는 현상은 라캉이 정신분석은 심리학이 아니라고 여러 번 주장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예증한다. 마조히즘은 우리로 하여금 ‘허구’의 질서로서의 상징적 질서라는 역설에 직면하게 한다. 마스크 밑에 감추어져 있는 것에서보다, 우리가 쓰고 있는 마스크에, 우리가 벌이고 있는 게임에, 우리가 복종하고 따르는 ‘허구’ 속에 더 많은 진리가 있다는 역설 말이다. 그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그 상연중인 게임 속에서, 마조히스트의 존재의 중핵은 외부화된다.

그리고 폭력의 실재(the Real)는 정확히 마조히스트가 히스테리화될 때 분출한다. 주체가 그 자신의 타자의 향락의 대상-도구의 역할을 거부할 때, 그가 타자의 시선 속에서 대상 a로 환원될 것이라는 예감으로 인해 공포에 떨 때 말이다. 이런 교착상태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그는 '행위로의 이동'에, 즉 타인을 겨냥한 부조리한 폭력에 호소한다. 제임스의 <죽음의 취향(Taste for Death)>의 말미쯤에 살인자는 범죄의 환경을 기술하는데, 그의 망설임을 해결하고 그를 행위(살인)로 이끄는 요소가 희생자(폴 베론 경)의 태도임을 보여준다.

 

 

 

 

-그는 죽기를 원했어. 신은 그를 부패시켰고, 그는 그것을 원했어! 그는 실제로 그것을 요구했지. 그는 날 멈추게 하려고 애쓰고 탄원하며 논쟁하고 싸움을 할 수도 있었어. 자비를 구걸할 수 있었지. “안 돼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제발!” 내가 그에게 원했던 것은 그것이 다였어. 오직 그 말 한 마디…… 그는 경멸감으로 날 쳐다보았지. 그때 그는 알았어. 물론 그는 알고 있었어. 그리고 내가 심지어 반쪽짜리 인간인 양 그가 내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난 그 짓을 하지 않았겠지.

 

 

 

 

-그는 심지어 놀란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지. 그가 공포에 질릴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는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야 할 의무가 있었어…… 그는 마치 “당신이로군. 당신이어야 한다는 건 참 이상하군.”이라고 말하듯이 날 쳐다볼 뿐이었지. 마치 이런 것처럼, 난 선택권이 없어. 도구일 뿐이야. 어리석은. 그러나 난 선택했어. 그리고 그 역시 그랬지. 제길, 그는 날 멈출 수도 있었어. 그는 왜 날 멈추지 않았지?

 

 

 

 

죽기 며칠 전, 폴 베론 경은 상징적 죽음과 유사한 ‘내적인 몰락’을 경험하였다. 그는 장관직을 사퇴하고 모든 ‘인간적 유대’를 절단함으로써, 어떤 상호주체적인 공감의 관계를 배제하는 성인이라는 ‘배설물적’ 위치, 즉 대상 a의 위치를 취하였다. 이런 위치는 살인자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살인자는 $, 즉 분열된 주체로서의 그의 희생자에게 접근했다. 다시 말해 그는 희생자를 죽이기를 원했으나 동시에 희생자로부터 두려움과 저항의 기호를, 살인자가 행위를 완수하지 못하게 막는 기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희생자는 살인자를 (분열된) 주체로 인정함으로써 살인자를 주체화시키게 될 어떠한 기호도 제공하지 않았다. 폴 경의 비저항과 무관심한 분노의 태도는 살인자를 큰 타자의 의지의 도구로 환원함으로써 그를 객체화하고, 그에게 어떠한 선택도 남기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 살인자가 행위하도록 강제한 것은 희생자를 죽이려고 하는 그의 욕망과 희생자의 죽음충동을 일치시키는 경험이었다.

 

이러한 일치는 히스테리컬한 남성 ‘사디스트’가 여성에 대한 자신의 구타를 정당화하는 방식을 환기시킨다. “그녀는 왜 내가 그 짓을 하게 만드는가? 그녀는 실제로 내가 자기에게 상처를 입히기를 원하고, 내가 그녀를 때려 그녀가 그것을 즐기게끔 나를 몰아간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때릴 것이며,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이 실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그녀에게 가르칠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조우하는 것은 희생자에 대한 야만적인 행위의 오(지각)된 효과가 사후적으로 그 행위를 정당화하게 만드는 일종의 고리(loop)이다. 다시 말해, 나는 그녀를 때리기 시작했는데, 내가 그녀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때 그 지점에서, 나는 실제로는 그녀의 노예임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그녀가 구타를 원하고 내가 그렇게 하기를 자극했기 때문에 - 나는 실제로 미쳐서 그녀를 때렸다...(*'궁정식의 도착적인 새끼 악마’로 이어질 것이다.)

06.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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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10-22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면서 사드 후작의 작품 <소돔 120일>이 떠오릅니다. 아직 다 읽지 않았지만.

로쟈 2006-10-23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미덕의 불운>이나 <규방철학>이 재미는 더 있을 거 같네요...

마태우스 2006-10-23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가 무릎꿇은 그림은 워터하우스 거 아닌가요??

로쟈 2006-10-23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정식 사랑의 '이미지'만 보여주려고 했지 출처는 상관이 없었는데요, 찾아보니까 Edmund Blair Leighton란 화가의 'The Accolade'(작위수여식)이란 그림이네요...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의 제2장 '유물론 다시 보기'에는 레닌과 포퍼에 관한 간략한 언급이 포함돼 있다. 레닌의 <유물론론과 경험비판론>에는 정작 변증법을 위한 자리가 빠져 있으며, 이때의 레닌은 반헤겔주의자로서 칼 포퍼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지적을 루치오 콜레티는 '레닌과 포퍼'에서 지적하고 있고, 콜레티가 인용하고 있는 포퍼의 사적인 편지를 지젝은 재인용하고 있는데, 1970년에 포퍼는 이렇게 말했다: "레닌의 경험비판론에 대한 책은, 내 견해로는 진짜로 뛰어납니다." 포퍼가 격찬하고 있는 레닌? 이건 어찌된 일인가? 내용의 자초지종을 따라가본다(국역본과 영역본을 가급적 같이 인용한다. 독어본에 따르는 국역본보다 확장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영역본이 이해에 더 용이하다). 

"레닌의 진실이란 궁극적으로 유물론의 진실이다. 그리고 실제로 현실의 뉴에이지 반계몽주의의 분위기에서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 주는 교훈을 다시 한번 주장하는 것은 매력적이다. 오늘날의 양자역학에 대한 대중적인 독해는 레닌의 시기와 마찬가지로 과학 자체가 마침내 유물론을 넘어섰다는 '통념'으로 이어져, 물질은 '사라진' 것처럼, 즉 에너지의 비물질적 파동에서 용해됐다는 것으로 여겨진다."(51쪽)

Lenin's truth is ultimately that of materialism, and in fact, in the present climate of the New Age obscurantism, it may appear attractive to reassert the lesson of Lenin's Materialism and Empiriocriticism: in today's popular reading of quantum physics, as in Lenin's times, the doxa is that science itself finally overcame materialism - matter is supposed to "disappear," to dissolve in the immaterial waves of energy fields.(178쪽)

먼저,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은 아침(1989)과 돌베개(1992)에서 두 종의 국역본이 출간된 바 있다. 물론 모두가 품절된 책들이다(러시아에서조차 레닌의 책들을 구하는 건 발품을 팔아야 하는 일일 것이다). 지젝은 그 '레닌'을 우선을 다시 읽어보자고 제안한다. "레닌의 진실이란 궁극적으로 유물론의 진실이다."라는 단언에서 '진실'은 '진리'의 뜻으로 새기는 게 낫겠다. 지젝에게서 truth'는 대부분의 경우 '진실'보다는 '진리'의 뜻을 더 강하게 갖는다(국역본 1장의 제목이 '진실을 위한 권리'로 옮겨진 것은 그래서 유감스럽다).  

"(루치오 콜레티가 장조했듯이) 레닌은 물질을 철학적 개념과 과학적 개념으로 구분함으로써 '자연(에서)의 변증법'이라는 개념을 사실상 없애버린다. 정신에 독립해 존재하는 실체로서 물질의 이 철학적 개념은 과학에 대한 철학의 개입을 배제한다. 그러나... 이 '그러나'는 <유몰론과 경험비판론>에 변증법을 위한 자리가 없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다."

"It is also true (as Lucio Colletti emphasized), that Lenin's distinction between the philosophical and the scientific notion of matter, according to which, since the philosophical notion of matter as reality existing independently of mind precludes any intervention of philosophy into sciences, the very notion of "dialectics in/of nature" is thoroughly undermined. However... the "however" concerns the fact that, in Materialism and Empiriocriticism, there is NO PLACE FOR DIALECTICS, FOR HEGEL."

같은 버전인 독어본/국역본과 러시아어본에는 빠져 있지만, 영역본에는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에 'FOR HEGEL'이 들어가 있다. 즉, 여기서의 변증법은 '헤겔' 혹은 '헤겔의 변증법'을 가리키며, 레닌의 물질 개념에는 그 변증법/헤겔이 끼여들 자리가 없다는 것. 왜? 그는 물질을 규정함에 있어서 철학과 과학을 구분했고, 이 경우 '자연변증법' 같은 철학적 개념이 과학적 개념으로서의 '물질'에는 대입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레닌의 기본테제인가? 지식을 현상적 혹은 실용적 도구주의로 환원해버리는 데 대한 거부(즉 과학적인 지식을 통해서 우리는 사물이 우리의 정신과 독립적을 존재하는 방식을 알게 된다는 주장 - 악명 높은 반영이론)는 우리가 가진 지식의 불확정적 성질에 대한 강조(지식은 항상 제한적이고 상대적이며, 오직 무한한 근사의 과정에서 외부의 실체를 '반영'한다)와 짝을 이룬다."(52쪽)

" What are Lenin's basic theses? The rejection to reduce knowledge to phenomenalist or pragmatic instrumentalism (i.e., the assertion that, in scientific knowledge, we get to know the way things exist independently of our minds - the infamous "theory of reflection"), coupled with the insistence of the precarious nature of our knowledge (which is always limited, relative, and "reflects" external reality only in the infinite process of approximation)."

소위 '악명 높은 반영이론'을 고집하는 한 레닌의 "지식을 현상적 혹은 실용적 도구주의로 환원해버리는 데 대한 거부"는 불가불 "우리가 가진 지식의 불확정적 성질에 대한 강조"와 궁합이 맞아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지젝의 발빠른 지적이 뒤따른다.

"그런데 이 말들을 뭔가 익숙한 말이 아닌가? 이는 바로 분석철학의 앵글로색슨적 전통에서 볼 때, 전형적인 반헤겔주의자인 카를 포퍼의 기본 입장이 아닌가. 콜레티는 짦은 글인 '레닌과 포퍼'에서, <디차이트>를 통해 최초로 공개되었던 1970년의 사적인 편지에서 포퍼가 실제로 다음과 같이 적었음을 상기시킨다. '레닌의 경험비판론에 대한 책은, 내 견해로는 진짜로 뛰어납니다.'"(강조는 나의 것)

"Does this not sound familiar? Is this, in the Anglo-Saxon tradition of analytical philosophy, not the basic position of Karl Popper, the archetypal anti-Hegelian? In his short article "Lenin and Popper," Colletti recalls how, in a private letter from 1970, first published in Die Zeit, Popper effectively wrote: "Lenin's book on empiriocriticism is, in my opinion, truly excellent.""

 

 

 

 

조지 소로스의 스승이기도 한 포퍼가 플라톤과 헤겔, 마르크스를 '열린사회의 적들'로 규정하고 공박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20세기를 대표할 만한 이 反헤겔주의자가 헤겔-마르크스주의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레닌의 주장에 어떻게 감복할 수 있을까? 그건 포퍼의 변덕보다는 레닌의 오류에 기인한다. 그 오류에 대해서 짚어보기 이전에 최근에 출간된 포퍼의 글모음집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부글북스, 2006)에 대한 리뷰를 따라가면서 포퍼주의적 입장이란 게 어떤 것인가를 정리해두도록 한다. 

참고로, 이번에 나온 책은 포퍼 입문서로서 몇년전에 출간된 <우리는 20세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생각의나무, 2000)와 짝지어 읽어볼 만하겠다(포퍼에겐 모든 일이 배우는 것이며 문제해결의 과정이다!). 그 이전까지 포퍼 입문서 역할을 했던 책은 브라이언 매기의 <칼 포퍼>(문학과지성사, 1982)였다.

 

 

 

 

동아일보(06. 10. 21) 진리는 열려 있다 -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

이 책은 ‘열린사회를 꿈꾼 비판적 합리주의자’ 칼 포퍼(1902∼1994)가 1980년대 중반부터 세상을 뜨기 전까지 썼던 수필과 강연 원고 모음집이다. 포퍼의 대표 저작인 ‘열린사회와 그 적들’ ‘추측과 논박’을 이미 읽은 독자보다는 그의 저작을 접해본 적이 없는 독자에게 권한다. 일종의 ‘포퍼 입문서’로 제격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에 가장 맞춤한 독서법은 평생에 걸쳐 과학과 역사 이론을 검토하고 검증하며 진리에 다가가려 매진한 원로 철학자가 들려주는 삶의 태도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글 모음집이라 다루는 폭이 넓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꼽자면 ‘비판적 합리주의’와 ‘낙관주의’다. 포퍼가 말하는 합리주의자란 “자신이 옳음을 증명하는 것보다 다른 이에게서 배우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진정한 합리주의자는 “상대를 설득하는 것을 원치 않으며 이야기하는 내내 자신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남의 마음을 사로잡기 바라는’ 지식인, ‘확실성 없이 살아갈 용기’가 없어 예언가를 기다리는 대중 모두 포퍼의 비판을 비켜가지 못한다. 시행착오와 오류의 수정은 생물의 진화에서도 거의 유일한 진보의 수단이었다.

포퍼는 “모든 생은 문제해결의 과정”이라고 단언한다. 동물의 생이 바로 그러하다(*그러니까 포퍼의 주장은 인간도 동물인 한에서 유효하다. 하지만, '병적인 동물'이라면 사정은 좀 달라지는 것 아닐까?) 동물의 눈이 물체와의 충돌을 피하도록 경고를 받기 위해 발달된 기관이듯, 우리의 감각기관은 특정한 생물학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형성된 도구에 불과하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도 ‘문제’가 관찰이나 감각 인식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어떤 도그마도 인정하지 말라고 거듭 말하는 포퍼의 경고 대상에는 ‘무제한의 자유에 대한 사랑’도 포함된다. 인류가 ‘공존’한다는 것에는 당연히 ‘모든 개인의 무제한적 자유가 불가능하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 포퍼는 ‘자유시장을 절대적 가치로 추구하는 이념적 원리’를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을 경우 자유가 제한되어야 한다는 원칙’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대기오염 같은 문제는 특별법 제정을 필요로 하며, 빈곤 문제의 해결을 시류에서 벗어난 문제로 돌리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책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낙관주의’다. 포퍼는 낙관론자를 자임하면서 자신의 낙관주의는 “미래가 아니라 오직 현재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구분 짓는다. 포퍼는 평생에 걸쳐 비판했던 마르크스와 자신의 차이를 낙관주의를 기준으로 설명한다(*'낙관주의와 그 적들'?). 마르크시즘은 역사의 발전을 믿는 반면 ‘탐욕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바라보는 냉소주의적 역사관’이다. 반면 포퍼는 진보의 법칙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역사적으로 체험한 정치적 세계 중에서는 최고라고 믿는 낙관주의자다.

좌우대립의 양극화 시대에 포퍼의 낙관론은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 많다. 그는 ‘낙관주의는 의무’라고까지 주장한다. 미래가 열려 있고 우리 자신의 행동으로 미래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퍼는 ‘이데올로기라는 색안경을 버리고 현재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좌우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 어느 한 정당이 나서서 이념 전쟁의 기계를 해체하고 공동의 인도주의적 노선을 채택하자고 제안하라’고도 조언한다.

포퍼가 ‘나는 어떻게 공부를 했는가’를 설명한 대목도 재미있다. ‘쓸모 있는 일’에 관심이 많아 가구제작자 자격증명서까지 획득한 그는 단 한 번도 철학자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학교 교사에서 전문 철학가로 ‘진화’했다. 그 비결을 포퍼는 “나의 것으로 간주한 ‘문제들’이 철학을 포함한 여러 분야의 공부를 할 수밖에 없도록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아마도 포퍼에게 세상은 '호기심천국'이었음에 틀림없다).

진정 사랑에 빠질 수 있고 자신의 인생을 기꺼이 바칠 멋진 ‘문제’ 하나를 찾아보기, 해법을 열심히 찾되 우리가 생각해내는 해법은 전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늘 잊지 말기,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므로 늘 겸손해야 하며 모를 때는 모른다고 인정할 줄 알기. 포퍼가 권하는 공부 방법론이다. 아니, 어쩌면 인생 방법론이다. 원제 ‘All Life is Problem Solving’(1994년).(김희경 기자)

다시 반복하자면, "마르크시즘은 역사의 발전을 믿는 반면 ‘탐욕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바라보는 냉소주의적 역사관’이다. 반면 포퍼는 진보의 법칙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역사적으로 체험한 정치적 세계 중에서는 최고라고 믿는 낙관주의자다." 그러한 낙관주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과학의 진보와 마찬가지로 현실정치 또한 끝임없는 문제해결의 과정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이 과정은 무한한 근사의 과정이기도 하다). 즉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답이 정답은 아니더라도 과거에 제시된 답들보다는 언제나 근사치에 가깝다. 이 어찌 만족하지 않을쏘냐? 그런데, 문제는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제시하고 있는 레닌의 입장이 이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

"이 <경험비판론>의 중요한 유물론적 핵심은 레닌이 헤겔을 재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1915년 <철학노트>에서도 견지된다. 왜일까? 레닌은 <노트>에서 아도르노가 그의 <부정변증법>에서 부딪혔던 것과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분투한다. 즉 직접성을 비판하고 주어진 객관성에 대한 주체적인 조정을 주장하는 헤겔의 유산을 아도르노가 '객체의 우월성'이라 부른 유물론의 최소 명제와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 이것이 바로 레닌이 인간의 사고는 객관적 실체를 거울모사한다는 '반영이론'을 고수한 이유이다."(52-3쪽)

"This hard materialist core of Empiriocriticism persists in the Philosophical Note-Books from 1915, in spite of Lenin's rediscovery of Hegel - why? In his Note-Books, Lenin is struggling with the same problem as Adorno in his "negative dialectics": how to combine Hegel's legacy of the critique of every immediacy, of the subjective mediation of all given objectivity, with the minimum of materialism that Adorno calls the "predominance of the objective"; this is why Lenin still clings to the "theory of reflection" according to which the human thought mirrors objective reality."

<노트>에서도 견지되는 <경험비판론>에서의 유물론은 실상 유물론에 미달하는 유물론, 곧 유사-유물론이고 암묵적 관념론이다. 그것은 그가 인간의 사과 객관적 현실(objective reality)을 거울처럼 반영한다는 '반영이론'을 고수하기에 벌어지는 일이다. 반영론자로서의 레닌은 헤겔의 재발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물론에 미달하게 되는 것. 레닌은 무어라고 말하는가? "여기에 실제로, 객관적으로, 세 가지 구성요소가 있다. 10자연 2)인간의 인식=인간의 뇌, 그리고 3)자연이 인간의 인식에 반영된 형태, 그리고 이 형태는 정확하게 개념, 법칙, 범주 등으로 구성된다..."(53쪽)

영역본은 이 대목을 영역본 레닌 선집에서 가져오고 있다: "Here there are actually, objectively, three members: (1)nature; (2)human cognition=the human brain; and (3)the form of reflection of nature in human recognition, and this form consists precisely of concepts, laws, categories, etc..."(179쪽) 참고로,  러시아어본에 따르면 이 대목은 레닌 전집 29권 164쪽에 나온다. 

인용한 대목을 근거로 지젝은 아도르노와 레닌이 '인식주체 - 반영 - 자연/대상'이라는 반영론의 구도를 답습하고 있다고 지적하는데, 각주3)에 밝혀진 대로 유스타체 쿠벨라키스와의 사적인 대화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그게 각주에서 "'Eustache Kouvelakis'(Paris)"가 뜻하는 바이다('유슈타슈 쿠벨라키'라고 읽어야 하나?). 찾아보니까 쿠벨라키스는 <철학과 혁명: 칸트에서 마르크스로>(2003)의 저자이다.  

"하지만 아도르노도레닌도 여기에서 잘못된 방식을 취한다. 유물론은 사고의 주체적 조정의 바깥에 있는 객관적인 실체라는 최소 명제를 고수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고가 스스로와 완전한 동일체를 얻는 것을 방해하는 외적 장애물의 절대적인 내재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주장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점을 양보하고 장애물로 외부화하는 순간 사이비 문제 살정, 즉 우리는 영원히 파악불가능한 '객관적 실체'에 점근(漸近)할 뿐 절대로 이를 그 문한한 복합체에서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고로 되돌아간다."(53-4쪽)

"However, both Adorno and Lenin take here the wrong path: the way to assert materialism is not by way of clinging to the minimum of objective reality OUTSIDE the thought's subjective mediation, but by insisting on the absolute INHERENCE of the external obstacle which prevents thought from attaining full identity with itself. The moment we concede on this point and externalize the obstacle, we regress to the pseudo-problematic of the thought asymptotically approaching the ever-elusive "objective reality," never being able to grasp it in it infinite complexity."

 

 

 

 

참고로, 국역본에는 표시돼 있지 않지만 영역본의 인용문에 붙은 각주에서 지젝은 아도르노의 '객체의 우월성'론에 대한 자세한 비판은 <믿음에 대하여> 2장을 참조하라고 적어놓았다. 이럴 때마다 믿을 수 없는 국역본 번역은 유감스럽다. 지젝이 이해못할 헛소리들을 늘어놓는 것도 아니잖는가?  

'사고의 주체적 조정(thought's subjective mediation)이라고 옮겨진 것은 '사고의 주관적 매개'라고 옮기는 게 일반적이지 않나 싶다. 이 '사고'의 바깥에 객관적 현실/실체가 존재한다고 하는 반영론적 전제를 고수하는 한 지젝이 보기에 '유물론은 없다!'. 인식의 장애물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장애물을 외부화하는 순간, '객관적 현실'을 그 무한한 복합성 속에서 포착하지 못하고 다만 점근해갈 뿐리는 사이비 문제틀, 혹은 포퍼주의적 문제틀로 후퇴하게 된다. 포퍼와 헤겔 사이의 레닌?

"레닌이 주장하는 '반영이론'의 문제점은 그 이론이 가진 암묵적 관념론에 있다. 물적인 실체가 의식 바깥에 독립적을 존재한다는 강박적인 주장은 징후적 전치로 읽혀야 한다. 왜냐하면 '의식 그 자체'가 암묵적으로 그것이 '반영하는' 실체으 외부에 있게 되는 중요한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질이 진정으로 존재하는 방식, 그 객관적 진실에 무한히 접근한다는 은유가 이러한 관념론을 폭로한다."(강조는 나의 것)

"The problem with Lenin's "theory of reflection" resides in its implicit idealism: its very compulsive insistence on the independent existence of the material reality outside consciousness is to be read as a symptomatic displacement, destined to conceal the key fact that the consciousness itself is implicitly posited as EXTERNAL to the reality it "reflects." The very metaphor of the infinite approaching to the way things really are, to the objective truth, betrays this idealism:"(179-80쪽)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사이비 관념론, '암묵적 관념론'에서 벗어난 '진짜' 유물론인가? 내용이 좀 길어져서 다른 자리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06. 10. 21-22.

P.S. 문제해결의 연속 혹은 진화라는 말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벼락도끼와 돌도끼에서 원자탄으로의 연속/진화이다. 과연 인류사의 분쟁과 불화를 제거하는 방법도 진화돼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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