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목동으로 외출했다가 돌아와보니 계간지 하나가 배송돼 있다. 계간 <쿨투라> 가을호다. 날은 아직 무덥지만, 이번주부터, 아니 지난 주말부터 본격적으로 계간지 가을호들이 나오는 듯하다. 긴 글은 아니지만 나도 몇 편 실은 것이 있어서 수확을 거둬들이는 기분이 된다. 여름나절에 내가 무얼 했던 것인지 약간은 '변명'해주지 않을까 싶다. <쿨투라>에 실은 건 서평이며 <시차적 관점>(마티, 2009)에 대한 것이다(제목은 편집부에서 붙인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만 세 편의 서평을 쓴 셈이 되는데, 그래도 아직 세 편 정도의 거리는 더 남아 있다. 아직 안 '뜯어먹은' 곳은 언제 해치워야 할까?..  

 

쿨투라(09년 가을호) 충돌의 교착상태, 무엇이 필요한가? 

슬라보예 지젝이 자신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은 <시차적 관점>(마티 펴냄)은 ‘시차’라는 개념을 키워드로 삼아서 자신이 천착해온 사유와 문제를 종합하고 재구성한 책이다. 가히 ‘슬라보예 지젝의 모든 것’이라고도 부름직하다. 이 두툼한 저작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그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재구축하고 세계를 보는 시각 자체의 변경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한 철학자가 할 수 있는 최대치에 육박하는 것이지 않을까.       

‘시차(parallax)’란 무엇인가? “관찰하는 위치에 따라 새로운 시선이 제시되고, 이 때문에 초래되는 대상의 명백한 전치”를 가리킨다. 이 개념을 지젝은 두 층위에 어떠한 공통 언어나 공유된 기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변증법적으로 매개․지양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율배반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시차적 간극이 변증법의 전복적인 핵심을 간파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는 이러한 시차적 간극을 적절히 이론화하는 것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을 재건하기 위해 필수적인 첫 단계라고 생각한다. 어째서 그러한 재건이 필요한가? 그것은 오늘날 변증법적 유물론이 퇴각 국면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국면에서 오히려 레닌의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지젝은 말한다. 군대가 퇴각할 때는 진격할 때보다 백 배 더 많은 규율이 요구된다는 것이 레닌의 전략적 통찰이었다.   

지젝의 전략은 자신의 헤겔-라캉주의적 입장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그 등식을 “정신은 뼈다”와 같은 헤겔식 무한판단의 일종으로 제시한다. 헤겔의 무한판단에 따르면 가장 높은 차원의 것(정신)과 가장 낮은 차원의 것(뼈)은 사변적으로 동일한데, 이러한 동일성은 법과 그 외설적 이면(보충) 사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지젝이 어떤 주장을 전개하는가를 한 가지 사례를 통해 예시하면 이렇다.   

지난 2004년에 미군 병사들이 이라크 포로들을 고문하고 굴욕을 주는 사진이 공개되어 큰 파문이 일자 조지 부시는 그런 행동이 민주주의와 자유, 인간의 존엄성 같이 미국이 대표하고자 하는 가치와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사건이 폭로되기 이전부터 미국 당국과 미군 수뇌부는 이라크 군사감옥에서의 학대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조직적으로 묵인했다. 사건이 미디어를 통해서 불거지자 비로소 ‘문제’를 시인했을 뿐이다. 이 사건은 미군 사령부의 해명대로 단지 병사들이 전쟁 포로의 대우에 관한 제네바협약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일까? 지젝이 보기엔 그렇지 않다.  

사담 후세인 정권하에서도 자국의 죄수들에 대한 고문은 자행됐었다. 하지만 그때의 초점이 직접적으로 가해진 잔인한 고통이었던 반면에 미군 병사들이 의도한 건 포로들에게 심리적 굴욕을 주는 일이었다. 때문에 벌거벗은 포로들의 굴욕적인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카메라로 녹화한 것은 이 고문 과정에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즉, 그들의 고문은 일종의 예술적 ‘퍼포먼스’였다. 지젝은 이 ‘퍼포먼스’가 미국 대중문화의 외설적 이면, 곧 폐쇄적인 공동체에 입단할 때 겪어야 하는 ‘신고식’을 연상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부시 자신도 예일대학 시절 ‘해골과 뼈’라는 배타적인 비밀단체의 회원이었다는 걸 덧붙이면서. 결국 이러한 미국적 신고식이 이라크 포로들에게 적용된 것이다. 따라서 아부 그라이브의 고문은 병사들이 개인적 차원에서 저지른 위법 행위가 아니며, 직접적으로 명령받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불문율의 ‘코드 레드’에 의해서 적법한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것이다.  

요컨대 아부 그라이브는 단순히 제3세계 사람들에 대한 미국의 거만한 태도가 표출된 사례가 아니다. 오히려 굴욕적인 고문을 통해서 이라크 포로들은 미국 문화 속으로 들어가는 신고식을 치른 것인바, 그 고문이야말로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개인의 존엄 같은 가치의 외설의(*외설적) 이면이다. 단, 그 신고식은 지극히 냉소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의 일원이 되고 싶니? 좋아, 우리 생활방식의 중핵을 한번 맛 봐.” 

미국적 가치의 외설적 이면은 관타나모에 수용된 포로들의 운명에 대한 논쟁에서도 확인된다. 한 TV토론 참석자는 이들이 ‘폭탄이 놓친 사람들’이라고 규정했다. 원래는 합법적인 군사작전의 일환으로 수행된 미군의 폭격 목표였으나 운이 좋아 생존하게 된 이들이므로 전쟁 포로가 돼 굴욕을 당할지라도 운명을 탓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이에 따르면 포로들은 문자 그대로 ‘살아 있는 죽은 자’이다. 법적으론 이미 죽은 자이면서 생물학적으로만 아직 살아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법에 의해 보호받지 않는다. 인권과 생명에 대한 이러한 태도와 대비되는 사례는 2005년에 미국의 국가적 관심사가 되었던 테리 시아보이다. 15년간 식물인간 상태로 살아온 시아보의 남편은 그녀의 평화로운 죽음을 위해 의료장치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녀의 부모는 이에 반대했다. 사건은 대법원까지 가는 법정공방으로 이어졌고 미국내 찬반여론을 들끓게 했다.   

이러한 두 사례에서 지젝은 다시 한 번 가장 높은 것과 가장 낮은 것의 사변적 동일성을 주장하는 헤겔의 무한판단을 떠올린다. 즉 한편에는 ‘폭탄이 놓친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식물인간이 있다. 둘 다 ‘벌거벗은 생명’이지만 한쪽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모두 박탈당하고 다른 한쪽은 전체 국가기구에 의해 보호받는다. 이것이 인권의 현주소이자, 무엇이 미국의 생활방식을 지탱해주는가를 말해주는 ‘미국적 가치’의 중핵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아랍 문명과 미국 문명 사이의 충돌은 야만과 인간 존중 사이의 충돌이 아니라 잔인한 고문과 매체적 스펙터클로서의 고문 사이의 충돌이다. 곧, 모든 문명의 충돌은 그 이면적 야만성의 충돌이기도 하다.  

<시차적 관점>은 이러한 충돌의 교착상태를 돌파하기 위한 지젝의 전방위적이면서 도전적인 통찰로 가득 채워져 있다. 무엇이 필요한가? 물론 혁명이고 혁명적 폭력이다. 이때 지젝이 말하는 진정한 폭력은 사회적 배치의 기본좌표를 변경하는 것이다. 그의 ‘시차적 관점’은 그러한 좌표변경의 전제 조건이다. 우리는 그를 읽으며 동시대 철학적 사변의 최대치를 읽는다.  

09. 08. 17.  

P.S. 헤겔의 '정신은 뼈다'에 대한 지젝의 설명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5)의 347-350쪽을 더 참조할 수 있다. "각 항이 서로 양립불가능하고 공통된 척도가 없는 명제"라는 점에서 헤겔은 이를 '사변적인 명제'라고 부른다. 지젝의 부연에 따르면, 이것은 "두 개의 절대적으로 양립불가능한 항들의 등식, 주체와 고정된 대상의 완전한 관성 사이의 순수하고 부정적인 운동"(this equation of two absolutely incompatible terms, pure negative movemment of the subject and the total inertia of a rigid object)이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직접 들고 있는 사례는 이런 것이다. 

"결국 정신이 스스로의 내면으로부터 추동시키는 깊이와 그 자신이 실제로 말하는 것에 대한 의식의 무지고귀한 것과 비천한 것이 한데 어울러져 있는 것처럼 함께 존재한다. 자연은 이를 생명체 안에서 순진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가장 높은 수준으로 완성된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생식기관과 방뇨기관의 결합을 통해서다. 무한으로서의 무한판단은 스스로를 이해하는 삶의 완성이라 할 것이며 표상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무한판단은 방뇨처럼 작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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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신은 뼈다!'
    from Droit de cité (씨테에 대한 권리) 2009-08-18 08:11 
    '정신은 뼈다'(Spirit is a bone)라는 헤겔의 말에 대한 ({시차적 관점} 등에 제시된) 지젝의 해석은 아무 근거 없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헤겔에게서 가장 높은 차원의 것과 가장 낮은 차원의 것의 일종의 단락(shortcircuit)으로서 '무한판단'(infinite judgment)으로 제시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정신과 뼈라는) 일종의 대립물의 일치를 보여준다는 것인데, 이러한 해석은 헤겔의 텍스트(정신현상학)에서 
 
 
펠릭스 2009-08-18 0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닫힌 공간끼리 충돌(한쪽은 박탈당하고 다른 한쪽은 보호받는다)은 추돌이 아니다. 모두가 독립된 공간에 밀폐되어 있다. 그 공들(독립된 공간)을 하나의 큰 공간에 넣고 이리보고 저리보며 생각한다.
 
헤겔-라캉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

며칠전부터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을 다시 손에 들고 주로 후반부를 읽었다. 필요 때문이기도 하고 관심 때문이기도 한데, 사실 두께가 두께인 만큼 단숨에 일독하긴 어려운 책이어서 이렇듯 기회가 닿을 때마다 읽어두는 것. 단, 원서와 같이 읽기 때문에 진도가 빨리 나가진 않는다. 그럼에도 지젝의 독자라면 '지젝의 모든 것'이라고 할 만한 이 책을 여러 번 숙독해봄 직하다(일독도 어렵다면서?!). 그러기 위해선 약간의 교정도 필요하다. 더없이 요긴한 번역본이긴 하나 으레 그렇듯이 분량이 분량인 만큼 실수와 착오도 드물지 않다. 물론 대부분은 사소한 것이나 간혹 문제가 되는 오역도 있다. 그런 걸 고쳐가면서 읽으면 된다(조금 난해할 듯싶지만 어떤 경우에도 이 책의 가치는 폄하될 수 없다. 사실 지젝보다 난해한 책들도 부지기수다).    

가령, "여기서 우리가 제안해야 하는 것은 헤겔적인 '무한판단'으로서 타자성에 대한 적나라한('비승화된') 미움만을 전시하는 폭력적 직접성이 '쓸모없는' 그리고 '과잉적' 분출의 사변적 정체성을 사회에 대한 보편적 반성 과정과 함께 주장해야 한다. 아마도 이 우연일치에 관한 궁극적인 실례는 정신분석적 해석의 운명일 것이다."(590쪽)는 '제안'을 보자.  

일단 이 책에서 '정체성'이란 단어가 나오면 한번쯤 주의해야 한다. 이 'identity'란 단어가 '정체성'이란 뜻보다는 보통 '동일성'이란 뜻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speculative identity'라고 하면 거의 무조건 '사변적 동일성'이다('사변적 정체성'이란 말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동일성'이라고 하면, 보통 '무엇과 무엇의 동일성'이란 구문으로 쓴다. 이 문장도 마찬가지다. 원문은 이렇다.   

"What we should propose here is the Hegelian 'infinite judgment' assertimg the speculative identity of these 'useless' and 'excessive' outbursts of violent immediacy, which display nothing but a pure and naked ('unsublimated') hatred of the Otherness, with the global reflexivization of society; perhaps the ultimate example of this coincidence is the fate of psychoanalytic interpretation."(300쪽) 

핵심구문은 'the speculative identity of A with B'(A와 B의 사변적 동일성)이다. 다만 A에 해당하는 것이 관계사절까지 거느리고 있어서 다소 길 따름. 국역본은 이를 간과해서 "사변적 정체성을 사회에 대한 보편적 반성 과정과 함께 주장해야" 한다는 식으로 엉뚱하게 옮겼다. 'global reflexivization of society'도 '사회에 대한 보편적 반성 과정'이 아니라 '사회의 지구적 재귀화' 정도다('재귀화'는 울리히 벡 등의 성찰적/재귀적 근대론자들이 쓰는 용어다).    

유사한 사례를 더 들자면, "지속되는 '테러와의 전쟁' 속에 있는 대립쌍들의 이러한 '사변적인 정체성'은 우리로 하여금 일련의 중요한 정치이론적 결과들을 도출하도록 강요하는데..."(734쪽)에서도 "대립쌍들의 이러한 '사변적인 정체성'(This 'speculative identity of opposites)"은 마찬가지로 "대립쌍들의 이러한 사변적 동일성"이란 뜻이다. 여하튼 사단은 '동일성' '정체성' 등을 모두 카바하는 'identity'의 오지랖이 우리말보다 넓다는 데 있다('진리'와 '진실'을 다 카바하는 'truth'처럼).

한두 가지만 더 짚어본다. "여기서 첫번째 교훈은 지배 이데올로기('근본주의 대 자유주의')가 부과하는 선택이 실제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항상 세번째 가능성을 찾아야만 한다. 두번째 교훈은 근대성 또는 반성적인 '위험사회' 이론의 주제 중 하나가 오늘날 우리 모두가 너무나 많은 선택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682쪽)  

이 대목은 번역만 가지고는 오역을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원문과 대조하면 너무도 단순한 착오가 포함돼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The first lesson here here is that choice imposed by ruling ideology ('fundamentalism versus liberalism') is not a real one: we always have to look for a tertium datur. One of the topoi of the theories of second modernity or reflexive 'risk society' is that today, we are all exposed to too many choices."(348쪽) 'second modernity'(이차적 근대)가 '두번째 교훈'으로 잘못 옮겨진 것. '반성적인'이라고 옮겨진 'reflexive'도 보통은 '성찰적' 혹은 '재귀적'이라고 옮겨지는 듯하다.   

그리고 고대 중국의 이데올로기적 좌표에 관한 얘기. "고대 중국의 이데올로기적 좌표는 - 모택동에 의해 복권된 기괴한 세번째, '법가'의 입장, 평등주의적인 혁명적 공포의 지지자와 함께 - (전통적인 관습, 권위 그리고 교육에 의존하는) 유교와 (자발적인 자기-계몽을 추구하는) 도교 사이의 대립에 의해 지배되었다(우리가 느끼기에 오늘날의 이데올로기적 지도는 신보수주의 근본주의적 민중주의와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 사이의 대립으로 결정된다). 유교와 도교는 서로에게 기생하며 둘 모두 체계에 대한 모든 대안적 선택들을 가로막는다."(683쪽)  

이 부분도 번역만 가지고는 오역을 식별하기 어렵다. 원문은 이렇다. "The ideological constellation in ancient China was dominated by the opposition between Confucianism (reliance on traditionaal customs, authority, and education) and Taoism (spontaneous self-enlightenment) - with the uncanny third position of 'legalists' rehabilitated by Mao Zedong, partisans of egalitarian revolutionary terror. In our perception, today's  ideological constellation is determined by the opposition between necconserverative fundamentalist populism and liberal multiculturalism - both parasitizing on each other, both precluding any alternative to the system as such."(349쪽) 

특이한 경우인데, 역자는 하이픈의 범위를 착각하여 두번째 문장을 엉뚱하게도 "(우리가 느끼기에 오늘날의 이데올로기적 지도는 신보수주의 근본주의적 민중주의와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 사이의 대립으로 결정된다)"고 괄호안에 넣어버렸다. 그래서 'both'가 가리키는 것이 '근본주의적 민중주의와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유교와 도교'가 돼버렸다. '둘다'라고 했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을 텐데, '유교와 도교는'이라고 해놓았으니 명백히 오역이다.  

첫 문장은 고대 중국의 이데올로기적 배치는 유교와 도가였고, 법가가 '제3의 입장이었는바, 이 법가는 마오쩌둥과 혁명적 테러를 주도한 평등주의 빨치산(파르티잔)들에 의해 복원되었다는 게 요지. '지지자'이라고 옮긴 '파르티잔'은 짐작에 문화혁명시 '홍위병'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싶다.       

오래 붙들고 있을 시간이 없어서, 사소한 거지만 지젝의 번역서들에서 종종 반복되는 오역을 지적하고 마무리한다. '오역'이라고 하면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개인적으론 '오역이라고 할 만한' 사항이다. 바로 'arguably'를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이라고 옮기는 것.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슈만의 피아노 대작인 '유모레스크'는 그의 노래들로부터 목소리가 점차 사라지는 배경 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715쪽)에서 첫 부분은, "'Humoresque,' arguably Schuman's piano masterpiece"를 옮긴 것이다. 'arguably'는 '논쟁할 수 있는'이란 뜻도 되지만, 보통은 '주장할 수 있는' 쪽이다. 여기서는 "'유모레스크'가 슈만의 피아노 걸작이냐 아니냐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이런 식이 아니라 "슈만의 피아노 걸작이라고 할 만한 '유모레스크'는", 이런 식으로 나가야 한다. 책에 종종 등장하는 'arguably'는 모두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이란 식으로 옮겨졌는데, 이야말로 'arguable'하며 나로선 불편하다(다른 책들에서도 마찬가지다). 

   

덧붙여 말하자면, 문두 부사로 쓰이는 'incidentally'를 '우연히도'라고 옮기는 것도 나를 불편하게 한다. '말이 난 김에 말하자면' '덧붙여 말하자면'이 문맥에 적합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가령 아부 그라이브의 이라크 포로 학대가 미국식 하위문화를 연상시킨다고 지적하는 이런 대목.  

"군부대에서든 고등학교 교정에서든, 신고식이 과도하게 진행되어 병사들 또는 학생들이 인내할 만한 것으로 간주되는 수준 이상으로 다치게 되거나 굴욕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거나 (동료들 앞에서 맥주병을 항문에 삽입하는 것과 같은) 품격을 떨어뜨리는 행동을 수행하게 되거나 바늘로 꿰어지는 것 같은 추문이 발생할 때 우리는 미국 신문에서 정기적인 간격으로 유사한 사진들을 보지 않는가(그리고 우연히도 부시 자신이 '해골과 뼈'라는 예일 대학의 가장 배타적인 비밀단체의 성원이었으므로, 입회하기 위하여 그가 어떤 의식을 감행해야 했는가를 알면 흥미로울 듯하다)?"(720쪽)  

여기서 'incidentally'를 '우연히도'라고 옮기는 건 뜬금없다. 이 경우에도 '말이 난 김에 말하자면' 혹은 '덧붙여 말하자면'이라고 해야 한다. 사소해 보이지만 자주 등장하여 독서를 불편하게 하기에 맘먹고 털어놓는다... 

09. 08.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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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04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급 서적일 수록 비평이 필요하군요.
비전문가인 일반 독자의 경우 바른 것과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구별 능력이
부족합니다. 대충 넘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책에 대한 맹신으로)

원문-> 번역(한글,한자) -> 독자의 이해의 경우,
(심심하면 한자사전을 자주 본다는 김훈님의 말이 생각남)
한 독자가 원문에 대한 직독을 한다 하더라도, 그 또한 번역에 해당됨.

외국서적에 대한 번역이 매우 중요함을 새삼 느낍니다. 특히 고급 텍스트를
번역하시는 분들께 심심한 감사드립니다.

저 또한 로쟈님 덕분에 '비평과 번역'의 중요성을 느낍니다.
어쩜 '곁다리'라는 말은 인문학의 대중적인 친근미를 더 할 수 있는
적당한 표현이라 생각합니다.(비전공자 입장에서)

제 맘속에 인문학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이 도사리고 있는 듯합니다.
철학,문학,미술 등의 용어에 대한 공부 부족으로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경우도 있구요.(사변적 동일성,,,등) 영어 단어는 알지만
문장으로 엮어지면 몰라버리는 경우와 같겠지만요

로쟈 님이 뒷 따르며 흘려버린 것을 운좋게 줍는다는 의미에 동감입니다.
한 책을 놓고, 독자의 의견과 취향이 다르다는 것을 매번 느낍니다.
비평이나 오류에 대한 수정은 독자에게 좋은 정보라 생각합니다.

조선 말, 일제, 6.25 등, 역사의 질곡을 거치면서 우리가 놓쳐버린 것이
많은 것같습니다. 어차피 인간 사회가 파란만장 하지만요.
분야별 더 좋은 번역서들이 많이 출판되도록 민.관으로부터 지원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로쟈 2009-08-04 13:29   좋아요 0 | URL
네, 지원도 필요하고, 더 중요하게는 독자층이 늘어나야겠습니다...

펠릭스 2009-08-05 07:23   좋아요 0 | URL
어제 저녁에 '로쟈의 인문학 서재'의 '서재5(내 울부짖은들 누가 들어주랴)'를 읽고서야 '~들어주랴'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번역비평은 원한의 지평을 넘어서야 한다.'외 몇 문장이 마음에 닿았습니다. 특히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 읽기(~서재,391~405쪽)를 읽을 때는, 음~ 해체된 백제의 미륵사지서탑(국보11호)을 재건할때 느낄 만한 떨림과 호기심을 갖게 했습니다.(수사반장처럼)

저는 '책세상'의 '릴케 전집'를 가지고 있는데, 꺼내 '비가'를 찾아 읽으려 했지만,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제목이 다른지?)

자연과학에서 원문 번역과 인문학에서 번역이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제(자연) 분야에 번역서들을 가끔 볼 때마다 쉽지 않겠다는 생각하곤 했는데. 풍부한 언어적 상상력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또한, 번역서 책값이 대체적으로 비싸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해가
되더군요.(제2의 창작)

로쟈 2009-08-05 21:40   좋아요 0 | URL
책세상판도 <두이노의 비가 외>라고 돼 있을 듯한데요...

푸른바다 2009-08-04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이 말하는 '신보수파의 근본주의적 민중주의'가 무엇인지 번역으론 와 닫지 않는군요^^ 이 경우는 우리나라에서의 어법을 볼 때 '민중주의' 보다는 포퓰리즘이 더 적절한 번역인 것 같습니다. '근본주의'라 함은 조지 부시의 기독교 근본주의를 말하는 것인가요? 암튼 네오콘과 미국 민주당간의 대립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제 이해가 맞는 지 모르겠네요. MB 정권도 어찌보면 근본주의적 포퓰리즘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나라 민주당은 사실 미국 민주당보다도 리버럴하지 않지만...

저도 시차적 관심은 보유하고 있지만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로쟈 님과 더불어 조금씩 읽어가야 겠군요^^

로쟈 2009-08-04 22:50   좋아요 0 | URL
두어 장을 꼼꼼하게 읽으면 나머지 장들도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근본주의에 대한 지젝의 입장은 '상식'과는 좀 다릅니다.'민중주의'란 번역어는 번역본을 그냥 따른 것이구요...

seerblest 2009-08-04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rguably는 로쟈님 지적대로 오역이 맞습니다. 보통은 문장 전체를 수식하면서 "틀림없이"란 뜻으로 쓰이는 부사로,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이 아니라 (오히려) "논쟁의 여지(필요) 없이"가 더 정확한 본래의 뜻이죠. 따라서, "슈만의 걸작으로 뽑기에 손색없는 유모레스크" (혹은, 누구라도 슈만의 걸작이라고 손꼽을(주장할) 유모레스크)가 정확한 번역이겠죠. 부사로서의 arguably는 누구라도 기꺼이 그렇게 주장하듯이의 어감을 뜻하니까요.

로쟈 2009-08-04 22:49   좋아요 0 | URL
잘 정리해주셨네요. 짐작엔 형용사 arguable에 너무 의지한 탓이 아닌가 싶어요...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지난주에 배송된 책들을 나르기 위해 '폭우'에도 불구하고 오전에 학교에 갔었다. 가방에 잔뜩 포개넣어 들고 온 책들 가운데 하나는 마누엘 데란다의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그린비, 2009). 이미 입소문이 돌던 저자이고 책인데, '과학철학 이론으로 분석한 들뢰즈의 생성존재론!'이란 카피가 책의 성격을 잘 요약해줄 듯싶다(원서는 오래전에 구해두었지만 또 필요할 때라고 찾으니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젠장). 당장은 들춰보기 어렵지만 내달에는 시간을 내봐야겠다. 참고로, 데란다의 책은 '리좀총서'의 '시즌2' 첫권이다('시즌2'의 리스트를 보니 아홉 권 가운데 데란다의 책만 세 권이 들어가 있다. 가히 비중을 알 만하다). 작년 가을 한 대학원신문에 공역자 중 한 사람인 이정우 원장의 소개글이 실린 바 있어서 스크랩해놓도록 한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8. 09. 03) 마누엘 데란다, ‘들뢰즈 이후’의 철학자  

‘들뢰즈 이후’ 철학의 향방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인 데란다(Manuel de Landa, 1952~)는 실험영화 제작자, 컴퓨터 프로그래머, 건축가 등 다채로운 이력을 지닌 독특한 인물로서, 군사(軍事)계통의 기관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영화, 컴퓨터, 건축 등을 단지 스쳐지나가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가 이 계통들에서 이룬 성과는 모두 수준 높고 영향력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한 인터뷰에서 당신이 정말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데란다는 철학자라고 답하고 있다. 

데란다 철학의 출발점은 질 들뢰즈이다. 그러나 다양한 경력이 암시하듯이 데란다는 제도적 의미에서 철학수업을 철저히 받은 인물은 아니다. 그의 저작에는 깊이 있는 철학사적 논의가 그다지 나오지 않는다. 반면 일반적인 철학자들의 저작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독자적인 지식과 분석이 등장한다. 다시 말해 데란다의 주석은 일반적인 인문적 주석가들의 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그의 주석은 다른 주석서로는 해결되지 않는 많은 문제들의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데란다가 행하고 있는 작업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영미철학과 프랑스철학의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마누엘’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데란다가 스페인계 멕시코인이라는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는 들뢰즈의 철학을 영미적 맥락에서 새롭게 전유함으로써 단순한 주석가가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담론형태를 창조해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데란다는 들뢰즈에 관해 상당수의 논문을 썼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풍부한 그의 논문은 들뢰즈 연구자라면 꼭 읽어봐야 할 글들이다. 특히 <강렬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2002)은 자신의 들뢰즈 관련 논문들을 전반적으로 정리해 들뢰즈의 존재론을 일관되게 해명하고 있는 주요 저작이다.  

이밖에도 데란다는 <비선형 역사 100년>(1997)이라는 흥미로운 저작을 펴냈다. 서기 1000년에서 2000년에 이르는 1천 년간의 역사를 독특한 방식으로 해명하고 있는 이 저작은 들뢰즈/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을 잇는 속편이라 할 수도 있을 듯하다. 또 <인공지능 시대의 전쟁>(1991)에는 컴퓨터, 군사, 건축 등에 대한 그의 지식이 잘 나타나 있으며 폴 비릴리오의 저작과 함께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작년에는 <새로운 사회철학: 배치이론과 사회적 복잡성>이라는 흥미진진한 저작을 펴내 들뢰즈/가타리의 사회철학을 계승하고 있다.(이정우/ 연구공간 ‘소운서원’ 원장)   

※ 데란다의 글 전체는 www.cddc.vt.edu/host/delanda에 게시되어 있다. 

09. 0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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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09-07-15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 경력이 상당히 마음에 드는 군요 ~ ^^

로쟈 2009-07-15 22:54   좋아요 0 | URL
철학자 대신에 작가를 해도 성공할 경력이에요.^^

펠릭스 2009-07-15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란다(Manuel de Landa, 1952~)는 실험영화 제작자, 컴퓨터 프로그래머, 건축가 등 다채로운 이력을 지닌 독특한 인물로서, 군사(軍事)계통의 기관에서 일하기도 했다.", 운전이나 컴퓨터프로그랭은 예술적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더 잘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경계가 없는 응용력과 상상력이 부럽습니다.

로쟈 2009-07-15 22:55   좋아요 0 | URL
운전도 그런가요?^^

펠릭스 2009-07-16 05:08   좋아요 0 | URL
춤,글,운전의 경우 마음의 흐름과 손발 동작이 일치되면 잘 풀리던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다는 말은 아니고요.

로쟈 2009-07-16 08:49   좋아요 0 | URL
예술적 감각의 운전이라면 레이서 수준인데요.^^
 

내일자 한겨레에서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연재를 옮겨놓는다. <호모 사케르>로 소개된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을 다루고 있어서다. 필자는 <호모 사케르>(새물결, 2008)의 역자인 박진우 교수다. 아감벤의 이 연작은 국내에서도 완간될 예정인 것으로 안다.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⑬ 조르조 아감벤 Giorgio Agamben

1942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로마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지만, 이후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베유의 정치사상을 주제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8년 간행된 발터 베냐민의 이탈리아어판 전집 편집자를 지낸 뒤 베로나대학과 유럽·미국의 주요 대학에서 미학과 철학을 강의했다. 현재 베네치아건축대의 철학 교수로 있다. 대표작인 <호모 사케르>(Homo Sacer)는 이후 <아우슈비츠에서 남은 것>(1998), <예외 상태>(2002), <군림과 영광>(2007)을 거치면서 지금도 여전히 진행중이다.   

 

한겨레(09. 07. 11) '벌거벗은 생명’의 영속화에 던지는 경고 

현존하는 이탈리아의 대표적 철학자인 조르조 아감벤의 사유 세계 전모를 논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아감벤의 저술 활동, 특히 그의 주저는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0권이 훨씬 넘는 저술들이 이미 세상이 나와 있으며, 한국 독자들도 지난 2년 사이에 두 권의 번역서를 접한 상황에서 그의 사유를 한층 상세히 재검토하는 것은 분명히 필요하다. <호모 사케르>라는 책, 그리고 이 책에 이르는 과정과 이후의 전개과정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동시대의 모든 사유와 고민들을 앞선 세기와는 단절된 형태로 근본적으로 되물어야 한다는 아감벤의 문제의식에 비춰 본다면, 또한 이를 통해 20세기가 결코 풀지 못한 과제들(여기에는 정치적 좌우의 대립, 계급과 인종의 대립, 법과 민주주의, 전체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과 같은 핵심적인 정치적 범주들이 포함된다)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사유를 모색하는 과제와 직접 마주친다면, <호모 사케르>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중요한 화두가 아닐 수 없다.  

아감벤은 원래 로마대학 출신의 법학도였다. 학창시절부터 이미 파졸리니, 모라비아 등이 주도한 지식인 서클에 적극 참여하면서 문학과 미학, 철학 분야로 사유 지평을 확대해 나갔다. 1970년대에 그는 자신에게 결정적인 흔적을 남긴 세 명의 사상가와 본격적으로 마주쳤다. 아비 바르부르크와 발터 베냐민, 마르틴 하이데거는 초기 아감벤의 문학적·미학적 사유뿐 아니라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정치철학적 사유의 핵심적 원천으로 기능하고 있다.  

1978년에 이탈리아어로 간행된 <발터 베냐민 전집>의 편집자로서 그의 이름이 유럽 지성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이래, 그가 직접 수집한 청년기 베냐민의 미발굴 서한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이루어진 베냐민 사상 전체에 대한 급진적인 해석(그에 따르면 베냐민 사상의 진면목은 단순히 마르크스주의적 해석과 유대 신비주의적 해석의 자장 속에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를 둘러싼 기성 학계와의 갈등은 그의 명성을 유럽의 좁은 문학 연구자 서클의 범위를 넘어서게 만들었다. 이후 데리다·들뢰즈·낭시·바디우 등 프랑스 지식계의 지도자들과 본격적으로 교류하면서 당시 프랑스 철학의 새로운 흐름을 자양분 삼아 자신의 사유를 한층 정교하게 다듬어 나갔다. <아동기와 역사>에서 <산문의 이념>을 거쳐 <언어의 죽음>에 이르는 저술들은 이런 지적 여정과 편력을 반영한 중간 결과물이자, 동시에 다음 단계의 정치적 성찰을 탄생시킨 모태와도 같은 작품들이다.  

1995년에 처음 간행된 <호모 사케르>는 같은 이름으로 간행된 연작의 첫째 권에 해당하면서, 그의 사유의 전모를 밝히는 데서 반드시 거쳐야 할 대표작이다. 사회주의권 붕괴가 결코 ‘역사의 종언’일 수 없음을 증명했던 유고 내전의 쓰라린 경험은 그에게 정치를 본격적인 사유 대상으로 삼아야 할 필요성을 다시금 제기하였다. <호모 사케르>라는 이 낯선 제목은 원래 고대 로마법 전통 속에서 범죄자로 판정받은 자를 뜻하는데, 성스러운 자이자 저주받은 자여서 그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그를 죽이더라도 처벌 받지 않는 모순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저자는 이 용어를 통해 서양 정치철학의 근원적 패러다임을 재정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근대 이래의 정치이론이 오랫동안 주권자와 신민의 관계, 그리고 주권자와 법의 관계를 통해 정치의 본질을 규정해 왔던 것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호모 사케르라는 모순적인 존재를 통해 그는 정치를 궁극적으로 주권 권력과 ‘생명으로서의 삶’이 맺고 있는 ‘생명정치’의 관계로 재정의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니까 주권 권력에 의해 배제됨으로써 주권 속에 포함되는 이 모순적 존재, 즉 ‘벌거벗은 생명’의 존재는 법·주권·시민·인권처럼 오랫동안 서양 정치철학의 핵심 범주로 간주되었던 용어들을 의문에 부치게 만든다. 이 용어들은 결코 당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생명정치의 맥락에서 그 의미가 재구성되어야 할 사유의 재료들인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처음 간행될 당시에는 아감벤의 필생의 사유가 응축된 ‘주저’로서 기획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저자가 새롭게 시도한 정치철학적 사유의 단초들을 처음으로 대중 앞에 제기하는 사유 실험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무솔리니와 이탈리아 파시즘의 역사적 경험과 기억, 나아가 아우슈비츠와 유대인 학살을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이 사회적 이슈로 변모할 때, <호모 사케르>가 제시했던 새로운 사유 모델은 한 차례 대중들의 충분한 시선을 끌 수 있었다. 복잡한 정치적·사회적 의미망 속에서 의미가 점차 모호해져 가던 기억·증언·재현 같은 주요 개념들에 대해 우리를 다시금 철학적 사유로 이끌어갔던 <아우슈비츠가 남긴 것 : 호모 사케르 3>이 대중적 성공을 거두면서, 그의 이름과 <호모 사케르>라는 저자의 패러다임은 새롭게 주목받은 것이다. 아울러 9·11 테러와 이어진 ‘테러와의 전쟁’은 <호모 사케르>가 언급했던 “예외 상태의 영속화”가 눈앞의 현실임을 역설함으로써, 그의 명성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가 볼 때 예외 상태란 법의 공백이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 시대 법질서의 핵심이기도 하다. 법보다 ‘법’의 ‘힘’이 우선하며, 그것은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라는 20세기 정치사의 양대 열쇳말이자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사유의 근본 단위를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호모 사케르>의 또다른 변용이자, 새로운 영역에서의 이론적 시도다. 2007년에 발표된 <군림과 영광>이라는 또 하나의 <호모 사케르> 연작은 ‘영광’의 스펙터클, 그것이 가리고 있는 경제 우선의 통치 메커니즘의 계보학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다. 경제가 정치를 압도하는 근대 생명정치의 특성을 너무나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한국 사회가 새롭게 발표되는 그의 저술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이제는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제 우리 앞에는 마지막 질문이 놓여 있다. 과연 이처럼 주권 권력으로부터 배제됨으로써 공동체에 포함되어 있는 ‘호모 사케르’들의 사회, 혹은 ‘영속적인 예외 상태’ 속에서의 삶, 그리고 ‘군림과 영광’의 스펙터클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과연 어떤 변화의 가능성이 주어져 있는가. 과연 <호모 사케르> 속에서 지금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아니, <호모 사케르>가 전개한 수많은 논의들을 거치고 난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변화와 그 주체라는 오랜 패러다임을 오늘의 스펙터클 사회 속에서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호모 사케르> 연작이 진행되면서, 그가 가장 시달렸던 과제는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해답은 모호한 상황에서, 다행히도 저자는 우리에게 최종 답안을 전해 줄 것이라 약속한다. 그것이 바로 <호모 사케르> 연작이 도달할 최후의 종착점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가 여전히 ‘완성’을 향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 거대한 연구 프로젝트의 종결을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는 셈이다.(박진우/연세대 연구교수) 

09. 0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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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슴츠레 2009-07-11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슈비츠가 남긴 것>의 "대중적 성공"이라고 하면 몇 부일까요? 이번 주 강연 때 로쟈 님 책이 5000부 팔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편으로는 '그래도 괜찮군'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도 로쟈인데'하는 아쉬움이 동시에 들었더랬습니다. 학계에서는 최신 정치 이론들의 보고로 주목되고 있는 이탈리아에서 대중적 성공이라고 하면 몇 부 정도 될지 궁금하군요.

로쟈 2009-07-12 11:28   좋아요 0 | URL
글쎄요, 이탈리아 사정은 저도 잘 모르겠지만 <말과 사물>처럼 팔려나갔을 수도 있지요. 수만 부씩. 한데, 이론서의 경우엔 번역시장이 또 있기 때문에 '올인'할 수도 있겠죠. 아감벤은 아주 적극적으로 저작권을 관리한다고 합니다...

2009-07-11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12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12 1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12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게슴츠레 2009-07-13 13:25   좋아요 0 | URL
흐흐 옙, 오히려 저한테는 좀 잘 된(?) 거 같군요. 다음에 뵐 날을 기다리겠습니다.ㅎㅎ
 

저녁에 목동 교보에 들렀다가 발견한 책은 지젝과 라클라우, 버틀러 세 사람이 공저한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도서출판b, 2009)이다. 원저 자체는 2000년에 나온 것이니까 좀 됐고, 번역에 대한 소문도 진작에 돌았으므로 좀 뒤늦게 출간된 감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여하튼 반갑다. 여름방학 필독 리스트에 한권을 더 추가해놓는다. 아직 리뷰들이 뜨지 않아 출판사의 소개글에서 일부 옮겨놓는다.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이하, <우연성>)은 서로 다른 이론적 배경과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이들 세 명의 저자들이 오늘날의 정치적 지형에서 좌파 정치에 필요한 사유의 방향이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전개한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논쟁을 담고 있다. 책은 각 저자들이 상대방에게 던지고 싶었던 질문들을 기초로 진행되며, 상대를 비판하고 상대의 비판에 대응하는 저자별 3편의 글, 총 9편의 글을 담고 있다. 



이 책이 갖고 있는 주요한 의의 중 하나는 사회주의 몰락 이후 좌파적 사유의 주요 방향으로 설정된 우연성과 특수성을 보편성의 견지에서 새롭게 사유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사고되었던 필연성/보편성 대 우연성/특수성의 이분법으로 회귀하는 게 아니며, 오히려 우연성과 특수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속에서 어떻게 보편성이 창출될 수 있는지를 각자의 이론적 렌즈를 통해 고찰하는 것이다.   

책의 제목이 담고 있는 우연성과 보편성은 대립인 아닌 새로운 관계 속에서 모색되어야 할 개념들이며, 라클라우와 무페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세공되었으며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새로운 분기점을 이루어낸 헤게모니 개념은 본질주의적 사유와의 대립 속에서가 아니라 우연성과 특수성이 강조되는 오늘날의 지형 속에서 재평가되고 있다. 특수성과 차이, 우연성과 역사성을 강조하는 이론과 실천의 일면적 흐름 속에서 보편성의 자리를 확보하려는 시도, 보편성의 견지에서 그것이 특수성/우연성과 맺는 관계를 새롭게 사유하려는 시도는 <우연성> 내에서 진행된 대화와 논쟁의 구체적 세부에 상관없이 이 책이 갖는 고유한 ‘현재적’ 의의를 직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09. 06. 30.  

P.S. 지젝과 버틀러의 책은 계속 소개되고 있지만, 라클라우의 책은 무페와의 공저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조만간 재번역본이 나오는 것으로 안다)을 제외하면 소개된 책이 거의 없는 듯싶다. 타이틀로 보자면 <해방(들)>이나 <인민주의 이성에 대하여> 같은 책도 번역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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