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책&(408호)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이달의 주제는 지난 5월에 개막된 여수세계박람회를 빌미로 삼아서 '세계박람회'로 정했다. 관련서가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몇 권은 된다.

 

 

 

책&(12년 7월호) 세계박람회

 

‘살아있는 바다, 숨 쉬는 연안’이란 주제를 내건 여수세계박람회가 5월 12일에 문을 열어 8월 12일까지 관람객을 맞이한다. 월드컵, 올림픽과 함께 세계 3대 행사로도 불리는 국제적 이벤트이니만큼 세계박람회에 사람들의 눈과 귀가 쏠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세계박람회와 관련한 책들에는 어떤 것이 있나. 풍족하진 않지만 세계박람회의 이모저모에 대한 식견을 넓혀주는 책들이 몇 권 나와 있다. 주로 박람회 실무자와 연구자를 겨냥한 책들이지만 박람회에 관심을 가진 일반인도 얼마든지 손에 들 수 있다. 혹은 박람회 구경 가는 길에 같이 챙겨도 좋을 듯싶다.


기본 가이드가 될 만한 책은 히라노 시게오미의 <국제박람회 역사와 일본의 경험>(커뮤니케이션북스, 2011)이다. 우리가 해방 이전에는 ‘만국박람회’, 그 이후에는 주로 ‘세계박람회’라고 부르는 것을 일본에서는 ‘국제박람회’라 칭한다. 40여 년간 박람회 프로듀서로서 일한 저자의 책답게 1부에서는 국제박람회의 기원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박람회에 이르기까지 박람회의 거의 모든 것을 압축적으로 소개하고 2부에서는 일본의 박람회 경험을 자세히 살핀다. 우리에게 요긴한 건 저자가 간추린 국제박람회의 역사인데, 최초의 근대적인 박람회는 1756년 ‘영국산업박람회’이다. 처음 의도는 새로운 기술과 제품을 대중에게 공개하고 그것을 사회에 보급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산업혁명의 시발지인 영국에서 산업박람회가 개최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에 뒤질세라 1798년에는 프랑스도 ‘산업박람회’를 개최했다.


하지만 권력자의 의지에 따라 개최될 수 있었던 국가박람회와는 달리 국제박람회는 좀더 까다로운 요구조건이 충족되어야 했다. 박람회가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국가 간의 자유무역체제가 전제돼야 했던 것이다. 19세기 중반 세계무역의 1/4을 점하던 영국은 자유무역으로의 길을 열고,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1851년 세계 최초의 런던국제박람회를 연다. 5개월간 무려 600만 명이 넘는 입장객을 동원해 대성공을 거둔 이 박람회는 뒤이은 국제박람회의 성공모델이 되면서 국제박람회 붐을 가져온다. 영국의 라이벌 프랑스도 1855년 국제박람회를 파리에서 개최하지만 성공적인 박람회는 1867년에 개최된 제2회 파리만국박람회였다. 4만 2천 점의 물품이 출품됐고 1500만명 이상의 관람객을 불러모아 제1회 런던박람회의 성과를 뛰어넘었다.


이런 성공사례가 과도한 규모 경쟁을 불러온 것은 당연한데, 최악은 1904년 세인트루이스국제박람회였다. 최대 규모를 자랑한 ‘농업관’을 보는 데만 14-15킬로미터를 걸어야 했다는 이 박람회에서는 체력 부담으로 쓰러지는 입장객이 속출했다고 한다. 무분별하게 난립하는 국제박람회를 규제하기 위한 국제박람회 조약이 1928년에 제정됐고, 1933년 시카고국제박람회부터는 박람회의 공식주제가 선정된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박람회는 내용적으로나 구조적으로 훨씬 다양해진다. 저자는 1993년 대전세계박람회에 대해서는 ‘개발도상국의 저력을 보여준’ 박람회로 평가한다.


대전세계박람회에 이어서 여수세계박람회도 세계박람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터이지만, 이들 박람회의 전사(前史)가 궁금하다면 이각규의 <한국의 근대박람회>(커뮤니케이션북스, 2010)를 참고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최초의 외국 박람회 관람은 1881년 일본에 파견된 신사유람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도쿄의 제2회 내국권업박람회를 둘러보고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1882년 미국과의 수교 이후 파견된 조선 보빙사 사절단은 1883년 보스턴박람회를 시찰한다. 조선전시실을 마련하여 최초로 참가한 것은 1893년 시카고세계박람회부터인데, 동아시아 삼국 가운데서 가장 늦은 것이라 한다. 책은 1940년 조선대박람회까지 주요 박람회의 개요와 전시 물품 목록, 각종 사진자료까지 꼼꼼하게 제시하고 있어서 우리의 근대 박람회에 대한 백과사전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종합적인 자료집으로선 여수세계박람회에 맞춰 출간된 주강현의 <세계박람회 1851-2012>(블루&노트, 2012)도 요긴하다. ‘세계박람회의 모든 것’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책으로 특히 풍부한 사진자료가 강점이다. 저자는 1851년에 시작된 세계박람회 160여년의 역사를 많은 사진자료와 함께 일곱 엑스폴로지(Expology)로 풀었다. 역사속의 박람회 또한 단일한 모습이 아닌 복수의 모습, ‘박람회들’로 존재한다는 관점이다. 단순히 개별박람회에 대한 소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박람회가 세계체제의 자본적 운동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전제하에 ‘박람회의 세계체제적 연구’를 시도한다. 박람회 역사에 대한 일람에 덧붙여 이론적 조망까지 검토해보려는 것이다. 박람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의 시발점으로서도 의미를 갖는다. 그밖에 이민식의 <세계박람회란 무엇인가?>(한국학술정보, 2010와 <세계박람회 100장면>(이담북스, 2012)도 세계박람회의 간추린 역사를 일람하게 해주는 책들이다.    

 

12. 0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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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에서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지지난달인가 페이퍼에서 한번 다룬 적이 있는데,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민음사)의 번역 한 대목을 문제 삼았다. 1998년에 나온 1쇄와 2010년에 나온 신장판 8쇄를 나는 갖고 있는데, 번역은 아무런 교정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다.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많아서 개역판이 나오면 좋겠다. 니체 관련서로 고명섭의 <니체 극장>(김영사, 2012)은 근래에 나온 가장 강렬한(그리고 무거운) 책인데, 들뢰즈의 니체 해석, 특히 영원회귀에 대한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기도 하다(이만한 규모의 국내서는 백승영의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책세상, 2005)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일독해보시길.  

 

 

 

한겨레(12. 07. 14) 신은 하나라고? 니체가 배꼽 잡네

 

“만일 신들이 존재한다면, 내가 신이 되지 않고서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말이다. 상식대로 ‘신의 죽음’은 니체의 이 대표작에서 ‘초인의 탄생’을 가능케 하는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신들은 어떻게 죽은 것인가. <차라투스트라>를 읽은 독자라면 기억할 만한 대목이다. 그들은 웃다가 죽었다.

오래전 어느 날 분노의 수염을 한 어떤 신이 가장 무신론적인 말을 내뱉었다. “오직 하나의 신이 있을 뿐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다른 모든 신들이 깔깔거리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외쳤다. “신들이 존재하지만, 하나의 신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바로 신성함이 아닌가?”(펭귄클래식) “신들은 존재하지만 유일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신다운 일이 아니겠는가?”(한길사) “신들은 존재하지만 유일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신성함이 아닌가?”(민음사)

손에 잡히는 대로 몇 가지 번역을 나열한 것은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에서는 이 대목이 좀 다르게 번역됐기 때문이다. “신들이 존재하건, 단 하나의 유일신도 존재하지 않건, 소위 그것이 신(성) 아닌가?” <차라투스트라>의 내용과 비교하면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번역이다. 니체가 말하는 신성은 복수로서의 신들은 존재하지만 단수로서의 신, 곧 유일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복수주의(pluralism)가 들뢰즈가 강조하는 니체 철학의 본질이다. 더 나아가 그는 복수주의가 철학의 고유한 사유방식이자 발명품이라고 말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니체는 ‘위대한 사건들’을 믿은 게 아니라 사건의 복수적 의미를 믿었다. 모든 사건과 현상, 말과 사유는 다수의 의미를 갖는다. 때로는 이렇고 때로는 저렇다. ‘그때그때 달라요’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 헤겔은 복수주의를 순진한 의식과 동일시하면서 비웃었다. 마치 요랬다조랬다 하는 아이들의 미숙한 행태와 닮았다고 보는 쪽이다. 헤겔식으로 말하면 진리는 하나인 것이지 여럿이 될 수 없다. 그러한 헤겔주의에 맞서 들뢰즈는 사건이나 현상이 이렇게도 보이고 저렇게도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철학의 가장 위대한 성취이자 성숙함의 표지라고 말한다.

이렇게 보거나 저렇게 본다는 것은 무게를 재고 가치를 평가한다는 뜻이다. 다르게 말하면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은 다른 무엇보다도 해석의 기술이 된다. 이 해석은 해석하는 자의 존재양태와 분리되지 않는다. 세상엔 고귀한 자가 있고 비천한 자가 있다. 인생은 바라보는 자에 따라서 희극도 되고 비극도 된다. 그것을 관통하는 단일한 보편성이란 없다. 칸트적 보편성을 니체는 ‘거리의 파토스’로 대체한다. 고귀한 자와 비천한 자의 거리는 제거될 수 없다는 관점이다.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 서두에서 그 핵심을 이렇게 정리한다. “니체의 가장 일반적인 기획은 철학에 의미와 가치의 개념을 도입하는 데 있다.” 그러한 가치의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칸트의 비판철학은 참된 비판을 수행하지 못했다. 니체 스스로 철학사를 니체 이전과 이후로 구분한 이유다.

 

12. 0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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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어제와 그제 연거푸 지방 고등학교 강연이 있었는데('책을 읽을 자유'가 주제였다), 여전히 독서량이나 독서에 대한 관심이 저조한 듯싶어서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번 더 적었다.

 

 

 

경향신문(12. 07. 13) 넌 왜 공부 안 하고 책을 보니?

 

지방 고등학교에 두 차례 특강을 다녀왔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덕분에 처음 가본 지역의 풍광도 즐기고 신선한 공기도 맛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강연은 어려웠다. 입시에 시달리는 고등학생들을 상대로 독서의 중요성과 즐거움에 대해, ‘책을 읽을 자유’에 대해 강의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곤혹스러운 일인지. 지난 봄에도 한 번 체험했지만 사정은 많이 나아지지 않았다. 먼젓번보다는 적은 수의 학생들이 참석했기에 집중도는 좋아졌지만 여전히 절반 이상의 학생들에겐 재미없는 ‘정신교육’ 정도로 여겨지는 듯했다. 하긴 ‘책을 읽어라’는 지당한 권고만큼 따분한 소리도 없을 테니까.

한 반에서 서너 명씩의 신청자만 참여한 학교에서도 학생들의 독서량을 물으니 대다수가 한 달에 한두 권 정도라고 답했다. 다섯 권 이상이라고 답한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학생들만 탓할 수도 없다. 잘 알려진 대로 우리의 독서량은 한 달에 한 권꼴로 OECD 가입국가 가운데 최저 수준이기 때문이다. ‘공부가 우선이고 독서는 나중’이라는 게 한국사회의 암묵적인 합의다. 한국의 문화코드라고 말해도 억지는 아니다.

한국인이라면 “너는 왜 공부 안 하고 책을 보니?”라는 말을, 이 이상한 말을 다 이해한다. 공부와 독서가 상호배제적이라는 전제를 공유하지 않는다면 전달이 불가능한 말이다. ‘독서가 곧 공부’인 문화에서라면 이 말은 “너는 왜 공부 안 하고 공부하니?”라는 뜻으로 번역될 것이니 얼마나 부조리한가. 이러한 부조리가 문제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공부와 독서가 분리된 문화를 둘이 일치하는 문화로 바꾸는 것이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 있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책을 읽고 소화할 수 있는 능력, 즉 독서력이 곧 ‘대학수학능력’이라는 인식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기본 독서력을 갖춘 학생에게라면 대학의 문호는 활짝 열려 있어야 마땅하다. 대학에서의 공부는 문제풀이가 아니라 독서이기 때문이다. 올해 대학에 입학해 첫 학기를 보낸 한 여학생의 사례를 참고해볼 만하다. 고등학교 때부터 독서와 토론을 즐기고 논술에도 자신감을 갖고 있던 학생이었지만 내신 성적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요즘처럼 너무 쉽게 출제되는 학교시험에서는 한두 문제만 틀려도 내신이 추락하기 마련인데, 더군다나 이 학생은 암기과목에는 소질이 없었다. 그런 공부는 재미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공부는 달랐다. 강의별로 여러 권의 책을 읽고 조사하고 리포트를 쓰고 발표하고 토론하는 일이 아주 즐거웠다고 했다. 당연히 첫 학기 성적도 학과에서 두 번째로 좋았다. 요컨대 대학에서의 공부는 곧 독서였다.

흔히 한국사회에서 고등학교 교육은 대학교육을 위한 전 단계 정도로만 간주된다. 그런 인식에 반대하여 입시교육 비판도 나오고 고교 교육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나로선 그 정상화가 입시교육과 대립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작 우리 교육의 문제점은 제대로 된 입시교육을 하지 않는다는 데 있는 것 아닌가. 대학에서의 공부를 위한 수학능력을 갖추는 데 소홀하다면 그것이 과연 제대로 된 입시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많은 학생들이 독서를 멀리하는 대신에 공부에 매진하여 대학에 입학은 한다. 하지만 독서력이 부족해서 대학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허덕인다. 게다가 비싼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알바’까지 하게 되니 독서는 대학에 와서도 먼 나라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평균독서량이 올라가기를 기대하는 건 무망한 일이다. 이제라도 독서가 곧 공부인 교육을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겐 다른 공기가 필요하다.


12. 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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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84호)의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마이클 샌델의 <민주주의의 불만>(동녘, 2012)를 다루려다가 막판에 도나 디켄슨의 <인체 쇼핑>(소담출판사, 2012)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더 흥미로운 책이었다. 비록 급하게 쓰느라 리뷰에서는 흥미로운 부분을 많이 놓쳤지만. 아무튼 덕분에 애니 체니의 <시체를 부위별로 팝니다>(알마, 2007)도 구입했다. 시장사회와 인체 쇼핑의 문제는 나중에 따로 다뤄볼 만한 주제다.

 

 

 

주간경향(12. 07. 17) 인체를 사고 파는 시장사회

 

‘인체 쇼핑’이란 제목에서 미래의 불길한 전망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오산이다. 영국의 의료윤리학자 도나 디켄슨이 고발하는 ‘살과 피로 돌아가는 경제’는 미래가 아닌 현재,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현실의 이야기다. 고발이 전부는 아니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그러한 현실이 불가피하지 않으며 불가피한 것이 돼서도 안 된다는 데 맞춰져 있다. “인체 쇼핑은 저항할 수 있고, 세계 여러 곳에서 이미 저항 중이며, 앞으로 더 많은 곳에서 계속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 주장이다.

 

저자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전해지는 것은 인체 쇼핑의 진행 속도와 규모가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빨라지고 또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시장사회화’의 많은 염려스런 사례를 접한 독자에게도 ‘인체 쇼핑 시장’의 현실은 놀라움을 안겨준다.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출생 이전부터 사망 후 시신 처리에 이르기까지 생의 전 시기에 걸쳐 인체조직이 일반 소비재처럼 팔리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다는데!

 

점점 영리추구의 대상이 돼가고 있는 인체조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난자다. 불임여성의 체외수정을 위한 난자를 구하려는 광고가 미국의 대학신문에는 정기적으로 실린다는데, 건강한 젊은 여성의 난자 가격은 평균 4만5000 달러, 최고 5만 달러까지다. 미국에서 2002년 한 해 동안 난자 기증자에게 지불된 돈이 3,700만 달러가 넘는다고 하고, 불임클리닉이 벌어들인 수입도 10억 달러를 초과한 것으로 추정된다. 금 대신 인체조직과 유전물질을 채굴하는 제2의 골드러시가 일어나고 있다고 저자가 꼬집을 정도다. 게다가 ‘비싼 난자’만 거래되는 것도 아니다. 체외수정이 아닌 체세포 핵이식 연구에서는 가난한 여성이나 유색인종 여성의 ‘값싼 난자’가 쓰인다. 난자에 대한 이런 수요를 부추기는 것은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과학자들 사이에 “큰돈이 걸린 국제적 경쟁”이다.

 

난자만큼이나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건 시신이다. 저자도 참고하고 있는 애니 체니의 <시체를 부위별로 팝니다>에는 아예 가격표까지 나와 있다. 가령 머리는 550-900달러, 몸통은 1,200-3,000달러, 해부용 시체 한 구는 4,000-5,000달러인 식이다. 시신의 공급자는 시체 안치소와 의과대학, 인체조직은행, 장례식장, 그리고 화장터 등인데, 시체 부위를 판매한 혐의로 기소된 한 장례지도사는 시체 매매 규제 가능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규제하려면 아주 힘들 겁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선 어림없죠. 수입이 꽤 쏠쏠한 돈벌이거든요.” 난자를 얻기 위한 인신매매, 중국의 사형수 장기 매매도 물론 이 ‘쏠쏠한 돈벌이’ 때문에 빚어지고 있는 현실의 일부다. 

 

 

 
이러한 현실에 저항할 수 있는 방도가 있는가? 흥미롭게도 저자가 저항의 모범적인 사례로 드는 건 황우석 교수 사태 때 한국의 여성운동가들이 보여준 활동이다. 황 교수에 대한 열광적인 숭배 분위기 속에서 한국여성민우회와 여러 시민단체가 구성한 생명공학감시연대는 그가 실험에 쓰인 난자를 어디서 구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난자를 제공한 여성들과 관련한 불미스런 사실들도 폭로했다. 결국 실험에 쓰인 난자가 200개가 채 안 된다는 황 교수의 발표와 달리 실제로는 119명의 여성에게서 2,200여 개가 넘는 난자를 채취해 사용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와 함께 저자는 유전자 특허 취득 현상을 과거 농지로 사용되던 공유지의 사유화(인클로저) 현상과 비교해서 볼 것을 제안한다. 더불어 우리의 인체가 점점 여성화되는 현상, 곧 대상화되는 현상에 주목할 것을 주문한다. 그것은 우리 몸에 대한 생각을 다시 가다듬게 만든다. “우리의 몸이 사물에 속한다면, 이때의 사물은 다른 사물들보다 좀더 엄격하고 심오한 뜻을 담고 있다.” 메를로퐁티의 말이다.

12. 0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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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간 지젝의 강연에 참석하느라 진을 빼고(역시나 그에게 많이 배웠다) 좀 멍한 상태에서 오전시간을 보내다 7월 일정을 확인해봤다. 아트앤스터디에서 매주 수요일 저녁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강의를 진행한다는 건 지난번에 공지했고, 또다른 강의로 '로쟈와 함께하는 한여름의 공포문학'(가제)의 주제의 강의를 양천도서관에서 진행한다(강의는 오후 2-4시). 주제를 제안 받고서 네 편의 작품을 골랐다. 공포감이 전달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선 다시 읽어보고픈 작품이어서 흥미로운 시간이 될 것 같다. 관심을 가지실 분들을 위해 일정을 소개한다. 작품의 발표연도를 같이 병기했다.

 

1. 7월 24일(화)_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1818)

 

 

2. 7월 27일(금)_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1847)

 

 

3. 7월 31일(화)_ 브램 스토커, <드라큘라>(1897)

 

 

4. 8월 3일(금)_ 헨리 제임스, <나사의 회전>(1898)

 

 

12. 0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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