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998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미국의 심리학자 로버트 스턴버그의 <입시가 바뀌면 인재가 보인다>(시그마북스, 2012)를 서평감으로 골랐는데, 교육전문가가 아닌 심리학자가 제안하는 입시개혁은 어떤 것인가 궁금해서 선택했다. 사랑의 심리학에 관한 책 저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성공지능이론'의 주창자이기도 하고 국내에 이미 관련서들이 소개돼 있다. 대선 후보들이 입시제도와 관련하여 어떤 개혁안들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참고할 만한 견해라고 생각된다.

 

주간경향(12. 10. 30) '대안입시’란 무엇인가

 

입시철에 나올 만한 흔한 제목을 달고 있지만 <입시가 바뀌면 인재가 보인다>는 국내 교육전문가가 아닌 미국 심리학자의 책이다. 저자 로버트 스턴버그는 지능과 인지 발달이 전공분야이며 ‘성공지능이론’을 제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성공한 학자이자 교육행정의 경험을 가진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입시’란 무엇이고, 우리에겐 어떤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을까.
 

스턴버그는 대학입시와 관련한 자신의 경험담을 먼저 들려준다. 예일대에 지원했으나 대기자 명단에 올랐던 경험이다. 다행히도 그는 입학하게 되고 최우등 학생으로 졸업까지 한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으니 애초에 될성부른 학생이었을 텐데, 왜 떨어질 뻔한 것일까. 졸업 후에 대학 입학처 조교를 하면서 확인해보니 자신의 입시 면접 보고서에 ‘돌출형’이라고 기록됐더란다. 돌출형 학생을 원하는 대학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재능을 알아본 입학사정관이 손을 써서 그는 겨우 합격한 것이었다. 면접시험이 숨은 인재를 제대로 가려내지 못했다고나 할까.
 
대학에 들어와서도 어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다. 심리학을 전공하기 위해 심리학입문을 들었는데,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강의와 교재 내용을 잘 기억하는 게 관건인 수업이었다. 처음 제출한 소논문에서 10점 만점에 3점을 받았고, 암기력이 좋지 않은 스턴버그는 결국 이 수업에서 C학점을 받았다. 심리학입문 지식도 제대로 암기하지 못한 학생이었지만 스턴버그는 나중에 예일대학 교수가 되고 미국심리학회 회장도 역임한다. ‘학업에 중요한 기술’을 기준으로 학생을 대학에 입학시키고 또 성적을 평가하지만 직업에서의 성공은 그와는 다른 자질과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걸 알게 해주는 사례다.

 

 

 
명문대학을 졸업한 ‘인재’이지만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범죄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졸업생이지만 미국 역사상 최대 기업 회계부정을 저지른 ‘엔론 스캔들’의 주역 제프리 스킬링, 예일대 출신이지만 미흡한 첩보를 근거로 이라크를 침공한 조지 부시 등이 대표적이다. 대단히 똑똑한 사람들이 자신의 지위와 국가를 위태롭게 한 사례는 적잖게 찾아볼 수 있다(어디 미국만의 사례이겠는가!). 스턴버그는 이런 사례들이 모두 현행 대학입시 문제점의 한 단면이라고 본다. 사회·경제적 중상류층에게 유리한 현재의 교육제도는 기억력과 분석력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다른 능력들의 의의를 간과한다.

 

 

 
물론 시험만으로 세상을 뒤집을 수는 없다는 사실도 저자는 인정한다. 하지만 제도적 개선방안을 찾는 일이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스턴버그가 제안한 것은 성공지능이론에 기반한 새로운 입시제도이다. 분석지능 외에 그가 강조하는 것은 창조지능과 실용지능, 지혜다. 지혜란 “지능과 지식을 활용하여 공동선을 꾸준히 추구하는 기술”이다. 지혜는 단순히 이익을 극대화하는 능력이 아니라 여러 이익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조정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이런 능력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스턴버그의 제안이 갖는 강점은 그것이 이론적 공상에만 그치지 않고 성공적인 적용사례를 통해서 뒷받침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터프츠대학교의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새로운 평가방식을 도입하여 흑인 등 소수계의 숨은 인재들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터프츠대학의 입시에서는 이런 문제들이 출제된다. “어떤 것이 당신을 독창적으로 사고하게 만드는가? 공동선에 기여하고 사회를 바꾸려면, 당신의 독창성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고등학교 교과과정은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지적 자유를 제한한다. 당신의 대학생활을 마음속에 그려보면서, 당신이 품은 열정 가운데 좌절된 것을 기술해보라.” 시험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인재는 발견해줄지 모른다.

 

12.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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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이다. 푸른역사 아카데미에서 월요강좌를 진행해오고 있는데, 11월과 12월에는 정치철학을 주제로 두 권의 책을 읽기로 했다. 애덤 스위프트의 <정치의 생각>(개마고원, 2011)과 마이클 샌델의 <민주주의의 불만>(동녘, 2012)이다. <정치의 생각>은 마이클 샌델이 추천한 정치철학 입문서이다. 자세한 강의일정에 대해서는 http://cafe.daum.net/purunacademy/8Bko/65 참조하시기 바란다.

 

 

 

<강의일정>
11월 5일 ~ 12월 26일 (8주) 매주 월요일 저녁 8시 ~ 10시 (12월 26일만 수요일)

1. 11월 05일 ~ 11월 26일 (4주) 애덤 스위프트, <정치의 생각> (개마고원)
2. 12월 03일 ~ 12월 26일 (4주) 마이클 센델, <민주주의의 불만> (동녁)
 

곧 대선이 있습니다. 선택을 눈앞에 둔 11월과 12월은 어느 때보다 더 “정치”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이야기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로쟈와 함께 읽는 인문학>에서는 정치철학에 대한 두 권의 책을 함께 읽습니다.
첫 번째 책은 애덤 스위프트의 <정치의 생각>입니다. 이 책은 정의, 자유 공동체 등 정치철학의 다섯 가지 개념들의 함의와 다양한 관점들에 대한 차이점을 밝혀주는 정치철학 입문서입니다.
두 번째 책은 마이클 센델의 <민주주의의 불만>입니다. 우리가 현대 민주주의에 대해 느끼고 있는 불만들이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그 불만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쾌하게 제시한 책입니다.
정치란 본디 혼란스러운 것이어서 유권자들은 이 혼란에 그저 휩쓸려 다닐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한국 사회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런 일련의 사례들은 민주주의 정신에 과연 부합할까요? 라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는 이번 강의에 많은 참석 부탁드립니다.

12.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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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의 마지막 권 <희망의 배신>(부키, 2012)이 출간됐다. 서두에 붙인 추천사를 옮겨놓는다. '배신 3부작'의 한권으로 읽어도 좋고, 중산층 문제를 다룬 책으로 읽어도 좋겠다. '우리의 침묵을 깨우는 각성제'란 제목은 편집부에서 붙여준 것이다.

 

 

 

우리의 침묵을 깨우는 각성제

 

‘워킹푸어 생존기’ <노동의 배신>에 뒤이어 ‘화이트칼라 구직기’ <희망의 배신>이 이번에 번역됨으로써 <긍정의 배신>을 통해 우리에게 처음 이름을 알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3부작’이 완결되었다.

 

 

원제와는 다르지만 ‘배신’이란 단어만큼 그의 책들이 전해주는 임팩트를 실감나게 전달해주는 말도 드물다. 이 세 권의 책과 함께 ‘1%를 위한 세상’을 비판하는 <오! 당신들의 나라>까지 포함하면 저널리스트 겸 원숙한 사회비평가로서 저자가 2000년대에 펴낸 대표작 대부분이 우리에게 소개되는 셈이다.

 

긍정적 사고가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지 여실히 보여준 <긍정의 배신>이 우리에게 던진 충격은 무엇이었나? 저자는 자칭 ‘긍정적인’ 사람들이라는 미국인들의 자화상을 신랄하게 묘사하고 미국식 낙관주의의 허상을 폭로했지만, 놀랍게도 그것은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류의 자기계발서가 마치 복음서처럼 읽힌 연대가 우리의 2000년대 첫 10년이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속화되던 시기에 우리는 온갖 성공신화의 중독자였다(결국엔 MB정권까지 탄생시킨!). 모든 문제의 원천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되뇌면서 “새로운 치즈를 마음속으로 그리면 치즈가 더 가까워진다.”거나 “과거의 사고방식은 새로운 치즈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는다.” 등의 주문을 아침마다 주워섬겼다. 하지만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그러한 주문이 얼마나 허황한 것이었던가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추락하는 삶에는 날개가 없다는 사실도.  

 

<노동의 배신>과 <희망의 배신>은 <긍정의 배신>의 전사(前史)이자 ‘에피소드’이다. <노동의 배신>은 저자가 50대 후반의 나이에 저임금 노동의 실상을 몸소 겪고 쓴 일종의 ‘체험 삶의 현장’으로서 저임금 노동의 열악한 현실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임금은 너무 낮고 집세는 너무 높기에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숙식도 해결하기 벅찬 것이 오늘날 노동의 현실이다. 물론 그것은 미국만의 현실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노동의 배신>에 뒤이은 <희망의 배신>은 중산층 화이트칼라의 현실을 다룬다. 저임금 노동과는 달리 이 경우는 노동이 아니라 구직 자체가 문제다. 저자는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 위장하여 기업체 임원급으로 취업하려고 수개월간 유료 코칭도 받고 네트워킹 행사에도 참여하고 이미지 카운슬링도 받는다. 이 과정에서 구직자는 철저하게 자신을 시장에 내다팔 수 있는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기술과 노동을 파는 블루칼라 노동자와는 달리 화이트칼라는 ‘자기 자신’까지 팔아야 한다. “CEO가 바보일 수도 있습니다. 기업 행위가 불법의 경계선에 있을 수도 있어요. 그렇다 해도 당신은 일체의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몸 바쳐 일해야 합니다.”라는 한 카운슬러의 충고는 화이트칼라의 노동현실을 잘 요약해준다. 일자리의 안정성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도 희생되고 있는 것이 그 현실이다. 

 

저자는 온갖 노력에도 실패를 거듭하는데 바로 이 실패의 과정이 또한 우리 시대 중산층 화이트칼라가 처한 냉정한 현실이다. 미국에서는 1990년대 중반부터 기업 고위 경영자가 다른 사람의 일자리를 없앤 대가로 높은 연봉을 받는 추세가 뚜렷해졌다. 이것이 구조조정의 실상이다. 대량의 정리해고와 아웃소싱을 단행한 CEO가 그렇지 않은 CEO보다 더 많은 보수를 챙기는 것이 오늘날 기업의 현실인 것이다. 저널리스트 이전에 생물학 전공자답게 저자는 그러한 현실을 ‘포식자의 세상’이라고 표현한다. 다른 사람의 일자리를 없애야 경영자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에서 소위 ‘좋은 일자리’를 구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러한 현실의 필연적 귀결이 저자가 ‘중산층 대참사’라고 부른 중산층의 몰락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미국의 현실이라고만 치부하기엔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청년실업과 중장년층의 정리해고와 재취업난은 우리에게도 일상이 되었으니까. 어떤 해결책이 가능한가? 저자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뭉쳐 자신들의 존엄성과 가치를 주장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희망의 배신>은 그런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준다. 우리가 적어도 생쥐보다는 더 나은 존재라는 각성 말이다. 

 

12. 10. 21.

 

 

 

P.S. '중산층 대참사'와 관련해서는 에런라이크의 책 외에도 톰 하트만의 <중산층은 응답하라>(부키, 2012), 그리고 조준현의 <중산층이라는 착각>(위즈덤하우스, 2012)을 더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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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주말판에서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이번에 고른 건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민음사, 2000)이다. 복잡다단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어서 이모저모를 다 살펴볼 순 없고 작품에 나타난 혁명과 고독의 관계에 대해서만 조금 적었다.  

 

 

 

한겨레(12. 10. 13) 혁명이 사라진 자리엔 깊은 고독만이

 

중국 작가 모옌이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됐다. 중국의 민중세계를 가장 잘 재현한다는 평판의 모옌은 민간 구전과 역사를 결합시키는 기법을 즐겨 쓰기에 ‘중국의 마르케스’로도 불린다. 딱 30년 전인 198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그의 대표작 <백년의 고독>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스페인어권에서 <돈키호테>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는 초대형 베스트셀러이기도 해서 국내에는 노벨상 수상 이전에 <백년 동안의 고독>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다.

 



마르케스의 노벨상 수상연설문 제목이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이었고, 한 평론가는 <백년의 고독>을 두고 “남미 대륙의 고독을 벗어나기 위한 지루한 여정”이라고도 말했다. 어떤 고독인가? 작품에서만 보자면 근친상간적 욕망의 고독이다. 부엔디아 가문 6대의 성쇠를 다룬 이야기의 발단은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슬라 이구아란의 결혼이다. 문제는 두 사람이 사촌간이었다는 데 있다. 자신들을 조롱한 친구를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죽인 일이 계기가 돼 그들은 낯선 곳으로 이주하여 마콘도라는 마을을 세운다.

두 사람은 부엔디아 가계의 자손들을 퍼뜨리지만 아내 우르슬라는 항상 근친혼으로 인한 불행한 결과를 염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친혼적 성향은 그 자손들에게도 이어진다. 집안의 남자들에게 ‘호세 아르카디오’와 ‘아우렐리아노’란 이름만 반복적으로 붙여지는 것은 그 징후적 표지다. 100살 넘도록 장수한 우르슬라가 죽고 나서 6대손 아우렐리아노는 이모 아마란타 우르술라와 사랑에 빠지고 결국 그들은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를 낳는다. 그 아이가 개미떼의 밥이 되는 것을 보고서야 아우렐리아노가 오래전 집시 멜키아데스가 남긴 양피지 문서에 쓰인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를 해독해내는 것이 소설의 결말이다.

단순하게 보자면 부엔디아 가문의 종말기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처럼 예언을 피하려다 결국은 붙들리고 마는 운명비극으로도 읽힌다. ‘잘못될 수 있는 일은 결국 잘못되게 마련’이라는 머피의 법칙의 한 사례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다른 가능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문의 안주인 우르슬라와 함께 소설에서 주인공 역할을 하는 아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보여준 가능성이다. 작가가 콜롬비아 보수정권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던 자유파 지도자 우리베 장군을 모델로 하여 그려낸 부엔디아 대령은 가장 고독한 성격의 인물이지만 동시에 모두 실패로 돌아가긴 했어도 서른두번의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애초에 그는 마콘도에 부임한 정부 행정관의 사위가 되지만, 장인이 선거 투표용지를 바꿔치기하는 부정을 저지르는 걸 보고는 보수파는 사기꾼들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고서 내전에 가담한다. 반란군의 전설적 지도자로서 그가 일으킨 서른두차례의 반란만큼 의미를 갖는 것은 그가 전국 각지에서 열일곱명의 여자에게서 얻는 열일곱명의 아들이다. 이들은 모두 아우렐리아노란 이름으로 불린다. 근친혼적 성향의 수축적 가계에서 벗어나 확산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아들들은 아버지를 기념하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마콘도에 모였다가 새로운 반란을 두려워한 정부 쪽 요원들에 의해 모두 암살당하고 만다. 세상을 바꾸는 혁명의 가능성이 닫힐 때 남는 건 고독으로의 유폐뿐이다.

 

12.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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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책&(411호)에서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이달의 주제는 '착각'으로 착각에 관한 책들이 여럿 눈에 띄길래 골랐다. 착각에 관한 통념 혹은 착각을 교정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이다.

 

 

 

책&(12년 10월호) 착각

 

“어떤 사실을 실제와 다르게 지각하거나 생각하는 현상”을 착각이라고 정의한다. 착각은 오류이므로 피하는 것이 좋을까? 우리가 곧잘 주고받는 “착각하지 마!”란 충고는 착각에 대한 고정관념을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듯싶다. 하지만 착각에 대한 이런 통념이야말로 착각에 대한 전형적인 착각이라면? 착각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무엇인가. ‘착각’을 주제로 한 책들을 몇 권 골라본다.


가장 먼저 꼽고 싶은 책은 독일의 뇌과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프리트헬름 슈바르츠의 <착각의 과학>(북스넛, 2011)이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착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간명한 정의를 내려주고 있어서다. “착각은 뇌의 일상적인 활동”이라는 것. “우리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뇌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활동이 바로 착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에 따르면 ‘뇌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나는 현재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원하지만 뇌는 기억과 체험을 통해 알고 있는 것만 원한다. 이런 차이를 신경과학에서는 의식과 무의식의 차이라고도 설명한다. 착각의 가장 주된 원인은 바로 의식과 무의식 간의 불일치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생각과 결정은 어떻게 내려지는가. 무의식의 힘을 보여주는 많은 사례 가운데 하나를 보자. 두 그룹의 대학생들에게 어휘력 실험이라며 두 가지 단어군을 제시했다. 한쪽엔 활력, 스포츠, 근육 등 젊음과 관련된 단어를 보여주고, 다른 쪽엔 늙음, 질병, 황혼 등의 단어를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그 단어들을 이용해 짧은 글을 짓게 하고 돌아가게 했는데, 정작 실험의 초점은 돌아가는 그들의 모습이었다. 젊음과 관련된 단어를 제시받은 참가자들은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올라간 반면에, 늙음과 관련된 단어를 받았던 학생들은 아주 느릿느릿 계단을 올라갔다. 자신의 처지와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은 그 단어들을 자신과 동일시한 것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뇌는 그렇게 우리를 움직인다. 때문에 인간은 이기적 계산속에 따라 움직이는 ‘호모 이코노미쿠스’라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반응하는 ‘호모 레시프로칸스’에 가깝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착각은 우리를 이성의 독재로부터 해방시킨다고까지 말하면 과장일까.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심리학 블로그 운영자인 데이비드 맥레이니의 <착각의 심리학>(추수밭, 2012)은 초점이 조금 다르다. 원제가<당신은 그다지 똑똑하지 않아(You are not so smart)>인 것에서 알 수 있지만 저자는 우리가 똑똑하다는 착각을 교정하고자 한다. 물론 착각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우리의 사고를 구성하는 ‘인지적 편견’과 ‘발견적 학습’, 그리고 ‘논리적 오류’가 끊임없는 착각의 동력이다. 가령 당신은 “나의 행복은 오직 이 순간을 만족하는 데 달려있다”고 생각하는가? 착각이다. 우리의 자아는 ‘현재의 자아’ 곧 실시간으로 인생을 ‘경험하는 자아’ 외에 ‘기억하는 자아’로도 구성된다. 우리는 감각상의 기억이 지속되는 3초 정도의 순간만을 사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의미를 길어 올리면서 산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행복해야 할뿐더러, 나중에 되돌아볼 기억을 만들어내야만 행복할 수 있다.

 


<착각의 심리학>은 그런 다양한 오해와 진실을 흥미롭게 펼쳐놓는데, 또 다른 사례는 마술사들의 눈속임이다. 마술 쇼는 ‘무주의 맹시’와 ‘변화 맹시’에 근거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주의를 집중할 때 그 배경에는 무주의하게 되는 현상을 마술사들이 이용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진 인지능력의 한계를 이용한 이러한 눈속임이 마술 쇼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가 쓴 <보이지 않는 고릴라>(김영사, 2011)는 바로 그런 착각을 파헤친 책이다. 저자들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착각을 주의력 착각, 기억력 착각, 자신감 착각, 지식 착각, 원인 착각, 잠재력 착각 등 여섯 가지로 구분하여 분석한다. 


더불어 세 명의 신경과학자가 쓴 <왜 뇌는 착각에 빠질까>(21세기북스, 2012)는 ‘마술의 신경과학을 다룬 최초의 책’으로 마술의 눈속임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의 착각과 착시를 본격적으로 해부한다. 저자들이 폭로하는 착각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는 착각인데, 서로 상충하는 두 가지 생각, 행동, 사실, 믿음 등이 갈등할 때 우리는 뇌는 그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이들 가운데 하나를 부각시키는 방법을 쓴다고 한다. 그런 인지부조화가 우리로 하여금 자유롭게 선택했다고 믿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늘 착각 속에서 산다면 처방은 무엇인가. <가끔은 제정신>(쌤앤파커스, 2012)의 저자 허태균 교수는 간명하게 답한다. 착각해야 행복하다면 그냥 이대로 살아도 좋다고. 다만 가끔씩 “혹시 내가 틀린 것 아냐? 착각하는 거 아냐?”라는 의심을 가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착각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조금은 더 현실감을 갖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정말 그걸로 충분한 것일까?

 

12.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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