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996호)의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마우리치오 라자라토의 <부채인간>(메디치, 2012)을 읽고 쓴 것인데, 라자라토는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탈리아 철학자로 국내엔 <비물질노동과 다중>(갈무리, 2005), <이딸리아 자율주의 정치철학>(갈무리, 1997) 등의 공저를 통해서 알려졌으며 <부채인간>은 처음 소개되는 단독저작이다. 시론적인 성격의 소책자라서 다소 아쉬운데(<피로사회>와 함께 올해의 주목할 만한 소책자다), 문제의식을 좀더 확장시킨 책이 나오면 좋겠다... 

 

 

 

주간경향(12. 10. 16) 우리는 모두 부채인간이다

 

경제기사를 읽다가 가끔씩 고개를 갸웃거릴 때가 있다. 부채 혹은 채무와 관련한 기사다. 이미 가계부채가 1000조원을 넘어섰다는 추측이 나오는 가운데(우리 시대를 가리키는 이름 중 하나가 ‘가계부채 1000조 시대’다!) 최근 발표에 따르면 공기업 부채를 합산한 한국의 국가부채 또한 1006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우리의 가계와 국가 모두 엄청난 부채에 시달리고 있는 채무자다. 두 가지가 궁금하다. 과연 이런 상황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인지와 이 많은 부채의 채권자는 누구인지다.

 

 
그런 궁금증을 품고 있었기에 <부채인간>(메디치, 2012)에 바로 손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제목 자체에 끌렸고 ‘인간의 억압 조건에 관한 철학 에세이’란 소개가 기대를 갖게 했다. 저자의 기본 발상은 현재의 경제를 ‘금융경제’나 ‘금융 자본주의’란 말 대신에 ‘부채경제’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부채경제를 구성하는 사회적 관계는 더 이상 자본가와 노동자 혹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아니라 채권자와 채무자이다. 이때 자본은 ‘거대한 채권자’, ‘포괄적 채권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금융과 생산을 더 이상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에 이르러 ‘금융’이란 말은 채권자-채무자 관계의 부상을 특별히 부각시켜주는 표현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경제는 채권자-채무자 관계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다양한 기술을 통해서 구현해 왔다. 그 결과 ‘채무자’의 형상으로서 ‘부채인간’이 공공영역을 대표하는 주체의 형상이 됐다. “우리는 모두 부채인간이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전세계적 현상으로서 공공부채의 급증은 1970년대 중반 이후 복지 관련 지출의 금융구조 개선과 맞물린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비롯한다. 흥미로운 것은 공공부채를 마련할 때 중앙은행을 통해 현금을 확보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이 시기에 유럽의 모든 정부에서 채택되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자금은 ‘금융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법이 생기기 이전에는 국가가 무이자로 중앙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었지만 시장에서 자금을 융통할 경우에는 막대한 이자를 물어야 한다. 1974년에 이 법을 도입한 프랑스의 경우 이후에 공공부채 총액이 16조410억 유로, 이자총액만 약 12조 유로에 이르렀다. 2007년에 500억 유로를 넘어선 이자비용은 프랑스의 국가 예산 가운데 교육예산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매년 소득세 전체와 맞먹는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에도 1979년의 석유파동 이후에 경기가 침체되고 금리가 치솟으면서 막대한 공공적자가 발생했다. 2008년 6월 기준으로 미국의 부채총액이 510조 달러를 넘어섰다고 하니 한마디로 부채경제다. 하지만 이러한 부채는 경제성장의 장애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동력이다. 게다가 부채경제는 사회적 연대와 권리 주장 같은 집단행동을 무력화하기에 대단히 정치적이기도 하다. 요컨대 ‘산업과 채무자 중심의 포디즘 메커니즘’으로부터 ‘금융과 채권자 중심의 금융 메커니즘 시대’로의 이행이 부채경제의 전면적인 성립 배경이다.

 

 

 

저자는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통해서 부채인간의 계보학적 형성과정 또한 탐구한다. 니체는 사람들 사이의 가장 오래되고 원천적인 사회적 관계가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관계라고 파악했다. 그에 따르면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사람, 곧 자신을 보증하고 부채를 갚을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 공동체의 주된 임무다. 현대 자본주의야말로 니체의 이러한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발견해낸 것처럼 보인다고 저자는 말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에 등장하는 채권추심원 이강도야말로 인격화한 자본주의의 형상 아닌가.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재앙으로 몰아넣는 권력장치”가 바로 신자유주의의 ‘협박경제’이고 부채경제다.

 

12. 10. 10.

 

 

P.S. '부채'는 '증여'와 함께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인데, 이와 관련해서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부채, 그 첫 5,000년>(부글북스, 2011)와 애디슨 위긴 등의 <세계사를 바꿀 달러의 위기(원제는 '부채의 제국')>(돈키호테, 2006) 등을 더 읽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라자리토의 <부채인간>은 <부채인간의 형성>이란 제목으로 영역돼 있는데, 번역본이 잘 안 읽히는 대목들에서 도움을 받았다.

 

가령 "정치적으로, 부채경제는 금융이나 금융화된 경제 혹은 금융 자본주의라 불리는 것이 더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48쪽)는 대목은 거꾸로 옮긴 오역이다(영역으로는 "Politically, the debt economy seems to be a more appropriate term than finance or financialized economy, not to mention financial capitalism). 이 대목의 절 제목 자체가 '왜 금융경제가 아닌 부채경제에 대해 말하는가'인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저자의 핵심 주장은 '금융경제'란 말 대신에 '부채경제'라고 부르는 것이 실상에 더 부합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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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사람과 책'(100호)의 '로쟈, 고전과 만나다' 꼭지를 옮겨놓는다(미처 퇴고하지 못했던 부분은 교정했다). 지난달 말에 마감을 넘겨 촉박하게 쓴 기억이 있다. 플라톤의 <국가>에 대해서 몇마디 적었는데, 짧은 분량에 개괄적인 내용을 담으면서도 상식적인 중언부언은 피하고자 했지만 뜻대로만 되지는 않았다. 몇 가지 꼬투리는 다음 기회를 위해서 남겨놓았다. 시간이 없어서 2차문헌은 따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강의 때는 김영균의 <국가>(살림, 2008)과 숀 세이어즈의 <플라톤 국가 해설>(서광사, 2008)을 주로 참고했다.

 

 

사람과 책(12년 10월호) 올바름에 관한 철학

 

대선을 두어 달 앞둔 정치의 계절인 만큼 정치철학의 고전도 만나보는 게 좋을 듯싶어 이달에는 플라톤의 <국가>(서광사)를 읽어보기로 한다. 초면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낯익은 체하기도 뭐하다. 데면데면한 고전이라고 할까. 고전은 으레 ‘다시 읽어야 하는 책’이지만, 동시에 ‘다시 읽어도 다 못 읽는 책’이다. 읽다가 중간에 덮는다는 뜻이 아니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나서도 여전히 읽을거리가 남는다는 얘기다. 때문에 전체를 일독한 다음에는 주요한 대목들에 대한 재독과 정독이 필요하다. 고전 독서는 품이 많이 드는 독서다.


<국가>는 세 시기로 나눈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중기에 속하는 작품이다. 초기 대화편들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행적을 재구성하고 있기에 ‘소크라테스적 대화편’이라고도 부른다. 어떤 개념이 문제를 정의하고 논박하는 내용이 많으며 주로 짧은 문답법 위주로 돼 있다. 당시 소피스트들의 대중연설 방식 대신에 소크라테스가 선호한 것은 단답식 문답법이었다. 자신은 무지한 자로 자처하면서 연속적인 질문을 통해 상대방이 무지를 자인하게끔 하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제자들은 그러한 수법에 경탄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의 논적들은 그런 방식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전체 10권으로 이루어진 <국가>에서 제1권은 그러한 문답법으로 구성돼 있으며 나머지 제2권부터 제10권까지는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의 질문에 길게 답하는 형식이다. 이런 구성방식의 차이 때문에 1권과 나머지 대목이 쓰인 시기가 다르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전체적으론 젊은 소피스트 트라시마코스와의 논쟁 위주로 돼 있는 1권의 요지를 뒤이은 2-10권이 자세하게 보충하면서 한 번 더 반복하는 식이다. 대화적 형식을 갖추고는 있지만 소크라테스의 일장연설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며, 그런 점에서 초기 대화편과는 달리 플라톤의 관점과 색깔이 많이 투영돼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소크라테스라는 대역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목소리를 본격적으로 내기 시작하는 게 플라톤의 중기와 후기 대화편들이다. 즉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곧 플라톤 자신이기도 하다. 


<국가>라는 명칭을 갖고는 있지만 주로 다루는 주제가 ‘올바름(정의)’의 문제이기에 <국가>에는 ‘올바름에 관하여’란 부제가 붙여지기도 했다. 애초에 발단은 트라시마코스가 올바름이란 더 강한 자의 편익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소크라테스를 자극한 데 있었다. 그의 주장을 소크라테스는 올바르지 못함이 올바름보다 더 이득이 되며, 올바르지 못한 사람의 삶이 올바른 사람의 삶보다 더 낫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인다. 그와는 반대로 올바른 사람이 행복하며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불행하다는 게 소크라테스의 주장이다. 하지만 올바름이 올바르지 못함보다 더 나은 것이라는 주장은 곧바로 쉽게 수긍하기 어렵기에 소크라테스는 이를 입증하고 설득하기 위해 굉장히 긴 설명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다. <국가>가 여느 대화편들의 몇 배에 해당하는 분량을 갖게 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올바름이 올바르지 못함보다 더 낫다는 주장을 펼치기 전에 필요한 것은 올바름에 대한 정의다. 무엇이 올바름인가를 먼저 물어야 하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취한 절차다. 올바름에는 개인의 올바름과 국가의 올바름, 두 가지가 있을 터인데, 한결 규모가 큰 올바름을 이해한다면 작은 형태의 올바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곧 국가의 올바름을 알게 되면 개인의 올바름은 자연스레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국가의 올바름과 개인의 올바름 사이의 유사성을 전제로 하는데,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결코 자명한 전제가 아니다(가령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가 말해주듯이 개인과 사회의 도덕성이 불일치하는 경우도 우리는 얼마든지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일단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따라가자면, 그는 국가를 구성하는 세 계층이 각자의 역할과 직분에 충실할 때 국가가 올바른 상태에 놓인다고 말한다. 생산자와 전사, 그리고 통치자가 그 세 계층이며, 절제와 용기와 지혜가 그들이 가져야 할 각각의 미덕이다. 이러한 미덕을 갖추고 각자가 자신에게 맞는 일을 하는 것이 훌륭한 나라의 조건이고 특징이다. 국가의 올바름이 그렇게 가능하다면 개인의 경우는 어떤가.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혼 또한 국가와 마찬가지로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고 주장한다. 욕구와 격정, 그리고 이성이 그 세 부분이며 이는 국가를 구성하는 세 계층에 대응한다. 올바른 국가의 경우처럼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각 부분이 제대로 일을 하게 되면 올바른 사람이 된다. 반대로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란 혼을 구성하는 각 부분들이 서로 참견하거나 간섭하면서 내분을 불러일으킨 상태다. 결국 올바름은 훌륭한 상태로서 혼의 건강을 뜻하며 올바르지 못함은 나쁜 상태로서 혼의 질병을 가리킨다. 

 


올바름이란 주제에 한정하여 <국가>의 주장을 간추리면 그렇다. 하지만 대개의 고전이 그렇듯이 <국가>에도 흥미를 끄는 곁가지 이야기들이 포함돼 있다. 국가와 개인에서 올바름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한 소크라테스가 올바른 정체(政體)와 대비되는 잘못된 정체들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할 때 제자들은 수호자 계층(전사와 통치자)의 처자 공유 문제, 출산과 양육 문제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좀 망설이다가 자신의 견해를 세 가지 파도에 견주며 밝힌다. ‘파도’란 비유는 파격적인 주장에 대한 암시다


첫 번째 파도는 여성도 수호자로 임명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소크라테스는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양육되고 교육을 받아 동등한 정치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당시 아테네 민주정에서 여성과 노예에게는 참정권이 부여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남녀 평등적 사고는 충분히 파격적이다. 소크라테스가 드는 비유로 치면 이것은 레슬링 도장에서 여자가 남자들과 똑같이 옷을 벗고 운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연적 이치에 따라서 여성에게도 남성과 동일한 자격이 부여돼야 한다고 믿는다. 어떤 이치인가? 전사 계층이 가져야 할 성향의 모델이 되는 감시견의 경우 암컷과 수컷은 그 역할에서 차이가 없다. 즉 양떼를 보살피는 일을 암컷도 할 수 있다면 여성도 전사로서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이 자연적 이치다.


두 번째는 더 큰 파도다. 소크라테스는 수호자 계층의 경우 모든 처자식을 공유하고 개인적인 동거는 금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조치의 목적은 무질서한 성적 관계를 갖지 못하게끔 하기 위해서다. 성에 대한 전체주의적 통제를 연상시키는데, 기본 발상은 우생학적인 고려에 근거를 둔다. 가령 사냥개의 경우에 좋은 혈통끼리 짝짓게 하여 최선의 새끼들을 얻으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최상의 통치자들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함부로 짝을 짓게 하면 안된다. 따라서 최선의 남자들이 최선의 여자들과 가능한 한 자주 성적 관계를 갖게 하고, 변변찮은 남자들은 변변찮은 여자들과 더 드물게 성적 관계를 갖도록 해야 한다. 남녀가 정해진 축제 기간에 추첨을 통해서 만나게 돼 있지만, 그러한 우생학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추첨방식이 필요하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렇게 가장 사적인 가족마저도 공유의 대상이 된다면 모든 시민이 국가를 위해 더 굳건하게 단결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문제는 이 두 가지 파도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세 번째 파도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철학자가 국가를 통치해야 하다는 이른바 ‘철인통치론’이다. 통치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 지혜인 만큼 ‘지혜를 사랑하는 자’로서 철학자가 통치에 적합할 것이라는 점은 당연해보이지만, 철인통치론이 남녀평등론이나 처자공유론보다도 더 파격적인 주장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주장에 대해 사람들이 웃통을 벗어던지고 달려들 것이라는 응답은 당시 아테네에서 철학자가 가졌던 부정적 평판을 짐작하게 한다. <국가>에 대한 흔한 상식은 철학자가 통치하는 이상국가론을 펼친 책이라는 것이지만, 정작 플라톤 자신이 그러한 ‘올바른 국가’의 실현가능성에 대해서 과연 얼마나 확신한 것인지는 수수께끼로 남는다. 이번에도 <국가>를 다 못 읽는 이유다.


12. 10.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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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미 2019-10-09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로쟈이십니다. 철저히 독자를 매료시키심...

birdy30 2019-10-14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국가를 읽고있는데, 만약 플라톤의 국가가 실현가능하다해도 이번 생에선 그 국가의 국민은 되고싶지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3천년 뒤에 새로운 혼으로 다시 태어날땐 맘이 바뀔지도 모르겠으나ㅋ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어제 낮에 급하게 보내놓고 지방에 강의를 다녀 오니 이 시간이다. 데스크에서 붙인 제목이 '미래는 이미 여기 와 있다'이다. 안철수 후보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언급한 SF작가 윌리엄 깁슨의 말로 유명한데, 나는 나대로 그 말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지난주 시사IN에도 윌리엄 깁슨에 관한 기사가 실렸는데, 한국어로 번역된 작품이 단 두 개라고 했다. 하지만 <뉴로맨서>(황금가지, 2005)와 <아이도루>(사이언스북스, 2001)에 이어서 최근에 <카운트제로>(황금가지, 2012)가 번역돼 나왔다. 나는 <뉴로맨서>(열음사, 1996)를 갖고 있지만, 어디에 보관돼 있는지 알 수 없기에 아무래도 황금가지판으로 다시 구해야 할 듯싶다. 아무튼 현재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윌리엄 깁슨의 책은 그렇게 세 권이다.

 

 

 

경향신문(12. 10. 05) ‘미래는 이미 여기 와 있다’

 

무엇이 사람을 움직이는가? 자본주의적 인간관에 충실하자면 물론 ‘돈’이라고 해야겠다. 조금 고상하게 말하면 ‘인센티브’가 우리를 움직인다. 어떤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는 자극이 인센티브다. 인간을 경제적 동물, 곧 ‘호모 이코노미쿠스’로 정의하는 인센티브 만능론자들은 아예 인센티브를 통해서 인간을 얼마든지 주조할 수 있다고까지 믿는다.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 영감을 받은 과거 행동주의 심리학자들도 적절한 보상과 강화를 통해서 인간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가령 책을 잘 읽지 않는 학생들에게도 현금으로 보상하면 자연스레 독서로 유인할 수 있다는 식이다. 심부름을 하거나 착한 일을 할 때마다 아이에게 용돈을 주는 것도 이와 비슷한 사례다. 우등생과 선행 학생은 인센티브를 통해서 그렇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일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의 저자 마이클 샌델은 그런 식의 금전적 보상이 독서나 선행 같은 ‘재화’의 가치를 변질시킨다고 말한다. 독서나 선행의 가치가 ‘돈’으로 환원될 것이고, 그럴 경우 자발적인 독서나 선행이 갖는 의미와 만족감 또한 훼손될 수밖에 없다. ‘행위와 인센티브’라는 보상체계가 우리를 어떤 행위의 주체가 아닌 단순한 수행자의 위치로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실상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정의 자체가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기적 본성을 갖고 있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주체적인 존재이고자 한다.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옹호가 철학자들만의 레퍼토리인 것은 아니다.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가 <드라이브>란 책에서 소개한 연구에 따르면, 인센티브가 오히려 생산성을 저하시키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지루한 반복적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사람들을 독려할 때는 인센티브가 꽤 유용하지만 지적 도전을 수반하는 업무에는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자신의 성취가 금전적 가치로 환원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해야 할까. 현대 수학의 최대 난제 가운데 하나였던 ‘푸앵카레 추측’을 푼 공로로 2006년 국제수학자연맹이 필즈 메달을 수여하기로 결정했지만 이를 거부한 러시아 수학자 페렐만의 사례도 떠올릴 수 있다. 그는 이후에 미국의 한 수학연구소에 의해 100만달러의 상금이 걸린 ‘밀레니엄 상’ 수상자로도 선정됐지만 그 역시 거부했다. “나의 증명이 확실한 것으로 판명됐으면 그만이며 더 이상 다른 인정은 필요 없다”는 것이 그의 고집스러운 생각이었다.

 

예외적인 성취와 예상 밖의 수상 거부로 화제를 모으긴 했으나 페렐만의 경우가 이해 불가능한 사례인 것은 아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없다”는 식의 자본주의적 사고와 경쟁을 통한 이익의 극대화라는 자본주의의 모토가 통하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것만 인정하면 된다. “인간의 욕망에는 끝이 없다”는 말은 자본주의적 주술이다.

 

지난 6월 말 방한했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기본적인 생존을 위한 필요를 어느 정도 충족시키게 되면 사람들은 공산주의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금전적 보상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그가 말하는 공산주의적 방식이다. 물론 어느 정도가 ‘생존을 위한 필요’인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판단이 다를지 모른다. 고정적인 직장을 갖고 있지 않은 페렐만은 도심 외곽의 방 2칸짜리 낡은 아파트가 재산의 전부였다. 그 이상은 사치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나는 아무 때나 온수로 샤워할 수 있는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때의 꿈이었지만 그런 아파트에 산 지 십 수년째다. “미래는 이미 여기 와 있다. 아직 퍼지지 않았을 뿐”이라는 말의 실감이다. 각자의 꿈이 이루어진 곳에서 그 꿈을 널리 공유하고 확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주체적 삶이 아닐까.

 

12. 10.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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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부터 프레시안의 제안에 따라 '3인 1책 전격수다'에 참여하게 됐다. 도서평론가 이권우 교수와 전직 영화잡지 기자이자 <범죄소설>(강, 2012)의 저자 김용언 씨가 수다의 나머지 멤버이다. 첫번째로 다룬 책은 도널드 서순의 <유럽 문화사>(뿌리와이파리, 2012)인데, 워낙 방대한 분량의 책이라 관심을 가진 분야만 발췌독할 수 있었다. 책 수다의 일부를 옮겨놓는다. 전문은 프레시안의 기사(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928124912§ion=04)를 참고하시길.

 

 

 

 

 

프레시안(12. 09. 28) 싸이, 모차르트가 될 수 있을까? "문제는 돈이야!"

 

이권우 : 이번 좌담을 준비하면서 <유럽 문화사> 다섯 권을 읽기 위해 시간을 한참 두었는데, 한 달이 지나도 한 권밖에 못 읽게 되더라고요. 목적 의식을 갖고 읽어도 이 책을 읽기가 쉽지만은 않구나, 그렇다면 일반 독자들이 이 책을 읽을 땐 어떨까 싶었어요. 우리부터가 먼저 이 책의 독서법에 대해 얘기를 시작해보죠.

 

이현우 : 문화 사전 같다는 인상이 가장 큽니다. 사전을 누가 처음부터 마지막 쪽까지 다 읽겠어요. (웃음) 필요한 영역별로 그때그때 참조할 수 있는 사전으로 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권우 : <유럽 문화사>의 장점이자 단점이, 연도별로 나누고 그 안에서 또 주제별로 나누어 기술됐다는 거죠. 주제별로 크게 분류되어있다면 그 흐름을 따라 죽 읽으면서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두 가지 기능이 복합되어 있거든요. 게다가 다섯 권짜리 책이니 양도 만만치 않고요.

 

김용언 : 사전에 가깝지만, 일차적인 느낌은 서술 자체가 무척 평이하고 재미있게 쓰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200년의 문화사를 다룬다는 게 독자에게 많은 지식을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잘 모르는 사람이 무턱대고 책을 펼쳤더라도 그렇게까지 진입 장벽을 높진 않을 것 같아요. 문화의 각 분야 중 개인적 흥밋거리부터 천천히 읽어나가는 데 큰 무리는 없을 것 같고요. 그래서 도널드 서순이 집필할 때 주된 독자층을 어떤 사람으로 상정하고 썼을지 좀 궁금했습니다. 책의 많은 부분이 출판에 관련된 부분을 다루면서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독자층의 변화를 일별하는데, 정작 본인은 자신의 책이 어떤 독자들에게 읽혀지기를 기대했을까요? 우리 같은 사람일까요? (웃음)

 

이현우 : 서순이 서문에도 썼지만 좁은 의미에서의 문화에 집중했죠. 출판, 음악, 영화 등이요. 그나마 미술을 뺐기 때문에 분량이 줄어들었는데, 그 많은 분야에 세부적인 디테일과 정보를 꼼꼼하게 제공하잖아요. 그게 재미있는 면인 동시에 읽기 힘든 면이기도 하죠. 무엇보다 문화사 서술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 흥미로웠어요. 중간 계급을 위한 문화의 생산과 소비가 19세기부터 시작됐는데 사실 정말 짧은 시간밖에 안 걸렸구나, 이게 우리의 전사(前事)구나 하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죠. 무척 유익한 독서 경험이었어요.

 

이권우 : 저자가 책 제목을 <유럽 문화사>로 지은 것도 유의미합니다. 예전 같으면 그냥 '세계 문화사'라고 썼을 수도 있어요. 근대의 창출점이 유럽이었기 때문에, 사실 '근대 세계 문화사'라고 해도 크게 저항을 받진 않았을 텐데요. 굳이 자신의 지역적 특색을 정확하게 드러냈다는 건 어쨌든 20세기 후반 서구 지식 사회의 자기반성이 담겨있다고도 볼 수 있겠죠. 유럽이라는 지역의 지난 200년을 탈식민주의적인 시선으로 보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 같아요.

 

이현우 : 동아시아 쪽에서 독서 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건 20세기가 넘어서부터죠. 유럽 쪽은 한 세기나 먼저 시작되었다는 시차가 존재합니다. 한국의 독서 시장에 관련해서는 천정환 교수가 쓴 <근대의 책 읽기>(푸른역사 펴냄)가 비슷한 콘셉트의 책입니다.

 

이권우 : <유럽 문화사>의 기본 테마가 서문에 잘 나옵니다. 정신사적 측면보다 사회사적 측면을 강하게 드러내지요. 15쪽에 보면 이런 말이 나와요. "지난 200년에 걸쳐 문화 소비가 엄청나게 증가한 셈이다. 바로 그 역사가 이 책의 주제를 이룬다." 이걸 놓치고 <유럽 문화사>를 읽으면 안 됩니다. 근대 문화가 결국 대량 소비 생산 체계를 구축한 근대 사회 체제와 일치하는 점이 있다는 걸 염두에 두면서 읽어야 하지요.

 

이현우 : 문화는 생산되고 소비되는 상품이라는 점을 계속 강조해요. 그런데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려면 시장이 있어야 하죠. 출판의 경우 책을 쓰는 저자가 있고 책을 만드는 출판업자가 있고 독자라는 삼박자가 갖춰져야 합니다. 그런 시장이 처음 형성되는 게 19세기부터인데, 그나마 규모까지 갖춰지는 건 19세기 중반부터지요. 그런 지점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서, 제목은 다소 평범하게 들릴 수 있는 <유럽 문화사>지만 개성을 갖고 있는 문화사라고 생각합니다.

 

김용언 : 한국 독자 같은 경우 사실 '유럽의 문화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들의 역사를 왜 내가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요. 이 책은 문화 생산의 최종 목표를 균질화와 확산이라고 정리하잖아요. 전 세계가 거의 균질한 문화를 흡수하게 된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고요. 그런 점에서 이 책의 내용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걸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건 하나도 없어요. 빅토르 위고의 소설부터 모차르트의 오페라까지, 우리는 그들의 역사와 생산물을 이미 내 것처럼 잘 알고 있어요. 서순이 의도했을 독자층에 동아시아 지역의 독자까지 포함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21세기의 아시아인이 읽었을 때 전부 이해가 가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결국 문화사의 진화와 확산의 최종 단계에 우리가 이미 포함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권우 : <유럽 문화사>를 읽다보면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일단 '사회사'를 강조하고 있잖아요. 하우저는 죄르지 루카치의 제자답게 계급성이나 사회의 역동성을 문화에 반영시켜 서술했죠. 도널드 서순의 경우 산업적 토대가 더 강조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근대 유럽 문화의 태동과 확산에 있어 부르주아의 역할이 컸다는 것도 강조하고요. 좀 더 정밀한 독서를 통한 비교가 필요하겠지만, 다른 측면이 분명 있어요.

 

이현우 : 독서 시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뿐 아니라 그 주변의 좀 더 넓은 계층들이 필요해집니다. 프티 부르주아부터 글을 읽을 줄 아는 노동자 계층까지, 문자 해득력을 갖춘 새로운 독서 대중이 필요하죠. 게다가 고등 교육도 필요해요. 고등 교육을 통해 배출된 어떤 독자층, 정확하게 부르주아와 딱 일치하지는 않지만 문화의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계층이 형성되고 그들에 의해서 문화가 주도됩니다. 그들을 위한 문화인 동시에 그들이 향유하고 소비하는 문화가 어떻게 발전하고 정점에 올라갔는지의 과정은 정말 흥미로워요. 예를 들어 러시아만 해도 19세기 중반 문맹률이 95퍼센트 이상인데, 독자층이 얼마 안 됐거든요. 그런데 문학 산업은 19세기 후반에 정점을 찍게 되죠. 거기에 견주면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문화 시장, 출판 시장이 굉장히 큰데, 뭔가 배울게 있지 않은가 싶어요.

 

(...)

 

12. 0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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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우의 <철학콘서트>(웅진지식하우스) 3권 세트 부록에 실릴 글을 옮겨놓는다. 철학은 배워서 어디에 쓰는지, 혹은 철학 공부의 의의란 무엇인지 써달라는 게 편집자의 주문이었지만, 그런 건 각자가 '고안'할 문제라는 생각에, 나대로 철학과의 만남 이야기를 적었다.  

 

 

 

당신에게 철학은 무엇이었나? <철학콘서트> 세 권을 마주하니 내게서 철학은 무엇이었던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언제였던가. 처음 철학적 물음에 붙들린 때가. 조금 진지한 관심의 시작이라면 실존주의 작가들을 즐겨 읽던 고등학교 시절부터가 아닌가 싶다. 가령 사르트르 같은 경우. 나만의 취향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때는 사르트르야말로 작가이자 철학자의 대명사였으니까. 

 

 

 

게다가 윌 듀런트의 <철학 이야기>를 읽은 것이 철학에 대한 관심을 배가시킨 것으로 기억된다. 고3 어느 때인가 서점에 가서 철학 코너를 둘러보다가 고른 것으로 내겐 철학 공부의 ‘이유식’과도 같은 책이다. 나중엔 구색을 맞추기 위해 주채(周采)의 <중국철학 이야기>란 책도 읽은 기억이 난다. 그렇게 철학책에 대한 독서는 ‘이야기’에서 시작됐다(이 책을 펼쳐든 독자라면 대부분 ‘콘서트’에서 시작하겠지만). 그리고 그 이야기의 자연스런 귀결이, 혹은 ‘다시 시작해보자’는 반복적인 귀결이 대학 첫 학기 ‘철학개론’ 신청이었다.


그렇게 신청한 철학개론 수강 이야기를 계속해보면 좋겠지만, 반전이 있다. 나는 철학개론을 듣지 않았다! 수강신청을 취소했기 때문이다. 책까지 구매했지만, 어쩐 일인지 수강에 자신이 없어졌다. 아마도 최소한 플라톤부터 시작하는 철학개론을 상상했던 나에게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읽을 거라던 노(老) 교수의 말이 부담이 되었던 듯싶다.


비록 철학개론과의 조우는 불발로 그쳤지만, 이야기는 그걸로 끝나지 않는다. 3학년이 되자 철학개론은 건너뛰고 ‘현대사회의 철학적 이해’ 같은 과목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교양 수준의 사회철학 강의였는데, 당시엔 에리히 프롬이나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를 읽는 게 정석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미완의 기획으로 끝났다. 첫 번째 리포트를 과제로 제출하고는 군대에 가게 됐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학부 시절에 단 한 과목의 철학 강의도 듣지 않았다. 대학원 과정에 들어가서야 철학과 대학원의 개설 강좌를 몇 개 수강하거나 청강한 것이 정식으로 쌓은 ‘이력’의 전부다.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철학 공부와는 대체로 무관해 보이는 나의 공부 이력은 어떻게 제 갈 길을 찾았을까? 강의실 바깥에 광대무변했던 ‘철학 학교’와 ‘철학 교사’ 덕분이었다. 그것은  바로 책이다. <철학 이야기> 이후에 내가 주로 읽은 책은 서양철학 쪽으로는 박이문 교수, 동양철학 쪽으로는 도올 김용옥 교수의 책이었다. 다작의 저자들이기도 한 이들의 책을 거의 대부분 읽었다.


어떤 책들을 줄기차게 읽어나갈 수만 있다면 사실 저자는 상관없다. 그리고 어디에서 시작하더라도 무방하다. 나 같은 경우도 아무도 내게 무엇을 읽으라고 지도하거나 권유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책은 자연스레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독서의 길을 안내하는 법이다. 철학책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단지 첫 번째 책을 손에 들게끔 할 만한 물음을 갖고 있는가가 관건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흔히 ‘~란 무엇인가’란 물음의 형식을 발명해냈다고 말한다. 그 물음의 형식에 붙들릴 때 우리는 오갈 데 없이 철학의 길, 철학적 사유의 오솔길에 들어선다. 정의란 무엇인가, 청춘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등이 모두 그런 물음에 속한다. 전공으로서 철학 공부는 물론 별개의 문제다. 오직 소수만이 철학에 대한 성향을 타고난다는 게 플라톤 이래의 정설이다. 그러니 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철학자들의 문제, 그들만의 고민으로 제쳐놓기로 하자. 하지만 특별한 철학적 성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철학적 문제들도 존재한다. “선생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같은 황광우의 물음이 그렇다.

 

‘철학콘서트’의 저자는 자신이 ‘철학의 초심자’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란 물음은 그로 하여금 ‘위대한 사상가들’의 ‘위대한 생각들’에 대한 탐구의 오랜 여정으로 이끌었다. 그가 얻은 결론은 무엇인가? “철학이 죽음 앞에 선 우리의 고뇌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그 풀기 힘든 난제에 대한 색다른 사유를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그의 결론은 이제 독자에게 또 다른 질문거리다. “과연 그러한가?”란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우리는 ‘콘서트’가 끝난 자리에서 다시금 새로운 철학 여정을 기획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에게도 물음이 있는가? 그 물음이 당신을 인도할 것이다. 그 물음에 따라서 우리들 각자의 철학적 사유, 각자의 철학 콘서트를 시작해보기로 하자. 

 

12. 0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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