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992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도올의 <사랑하지 말자>(통나무, 2012)를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미 많은 리뷰와 인터뷰가 나온 터라 뒷북성이 됐다(책의 자세한 내용은 프레시안에 실린 저자 인터뷰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20826153431 를 더 참고하시길 '나꼼수'의 최근 호외도 도올과의 인터뷰를 다루고 있다). 그래도 물론 현 시점에서 매우 요긴한 책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주간경향(12. 09. 11) 청춘을 향한 도올의 부르짖음

 

고전 번역가이자 학술운동가인 도올 김용옥의 <사랑하지 말자>에는 ‘도올 고함(苦喊)’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크게 부르짖는 소리’가 아니라 ‘고통스럽게 부르짖는 소리’라고 할까. ‘서막’에서 그가 내비친 고통의 바탕은 4대강을 파(破)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모든 갯벌을 파하고, 모든 산을 파하고, 모든 논밭을 파하고, 모든 촌락을 파하고, 모든 인민의 삶의 터전을 파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서씨동물농장’에 대한 절망과 탄식이다. 젊은 학동과의 문답 형식으로 구성된 책에서 저자는 그럼에도 자포자기 대신에 희망을 말한다. 희망의 근거는 이 세계를 변혁시킬 힘을 아직 ‘우리’가 갖고 있다는 긍정적 믿음이다. 반항과 거역과 항거의 주체로서 ‘우리’를 가리키는 말이 ‘청춘’이다. 편집자들이 뒤바꾼 순서라고는 하지만 책이 ‘청춘’이란 장으로 시작하는 것은 그래서 온당하다.

 

<중용>의 말을 빌려서 도올은 청춘을 “중(中)에서 화(和)로 가는 끊임없는 발(發)의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조화는 끊임없이 새로운 조화로 대체되는데, 그러한 ‘조화의 조화’를 만들어내는 계기가 끊임없는 불화(不和)이다. 이 불화를 가리키는 말이 곧 청춘이다. 청춘의 불화가 없으면 모든 문명은 활력을 상실하며 청춘의 모험이 없는 문명(文明)은 문명이 아니라 문암(文暗)이다. 문명의 부패다. 현 정권 하의 한국이 바로 그런 경우이며, 청춘의 실종이 낳은 결과다. 하지만 애초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지난 20세기 한국사는 청춘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3·1운동에서 광주학생운동을 거쳐 4·19혁명과 군사독재정권 타도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이어진 ‘학생문화의 정의로운 투쟁’은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이 ‘정의감의 찬란한 역사’가 이명박 정권 하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청춘의 모험’을 억압하는 세력이 득세하면서 한국의 청춘들이 쪼그라들었기 때문이다. 도올은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고려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방문했을 때 시위를 벌인 학생들에 대해 학교측이 징계를 내린 사건을 “대한민국 청춘이 금권에 순응하는 항복을 선언한”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본다. 그때부터 대한민국의 청춘은 무조건 쫄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도올은 청춘들이 그러한 무기력에서 벗어나 자존감을 되찾고 다시금 사회적 불의에 대한 투쟁에 나설 것을 독려한다. “조선의 역사를 뒤흔들 수 있는 유일한 주체세력”이 바로 우리의 청춘들이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은 그 청춘들이 억눌린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체제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현재로선 그 체제 상부 권좌의 성격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책은 ‘역사’와 ‘조국’에 이어 ‘대선’이란 장을 배치했다. 도올이 보기에 2012년 대선의 승자는 이미 박근혜로 결정돼 있다. 그가 ‘오늘의 승자’다. 문제는 그 승리가 이미 도를 지나쳤다는 것이다. 지난 총선에서 여권의 승리가 오히려 박근혜의 대선행보에 독이 될 것이라는 게 도올의 판단이다. 결과적으론 이명박 정권에 대한 심판이 대선으로 미뤄지게 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동적으로 야권에 승산이 있는 건 아니다. “우리 민족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할 수 있는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안철수나 야당 후보나 ‘무아(無我)’의 실천이 필요하다는 게 도올의 주문이다. 대의를 위해서 뭉칠 때만이 승리의 가능성은 현실이 될 수 있다.

 

“젊은 사람들에게 쉽게 읽혀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집필했다는 저자는 ‘청춘’에서 ‘대선’까지의 네 장은 필독해주기를 당부한다. 거기에 보태자면 뒷부분의 ‘종교’와 ‘사랑’ ‘음식’에 관한 장도 일독의 가치가 있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기독교와 더불어 한국인의 심령을 갉아먹기 시작한” ‘사랑’이란 말에 대한 비판은 대선주자들에 대한 평이나 대선 전망보다도 더 흥미롭고 유익하다.

 

12. 09.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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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온 택배 중의 하나는 좀 무거운 남성잡지다. <지큐(GQ)>(139호). 표지를 보니 GQ는 'Gentlemen's Quarterly'의 약자다. 내겐 낯선 잡지인데(남성지고 여성지고 구입해본 적이 없으므로) 지난달에 '입문서'에 대해 청탁받고 쓴 짧은 글이 이번 9월호에 실린 것. 입문서라는 ‘구태의연한 소재’에 대한 ‘날카로운 답’을 주문받았었다. 여러 권을 거명해도 됐지만 짧은 분량이라 그냥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 대해 몇 마디 소개하는 데 그쳤다. 잡지의 270쪽에 실려 있다. 글의 속도감을 살린 편집자의 손길이 인상적이다.

 

 

 

GQ(12년 9월호) 입문서

 

제목에 ‘입문’이란 단어가 붙어 있는 책들이 있다. 입문서다. 혹은 ‘개설’이나 ‘개론’이란 말이 붙을 수도 있다. 그것도 입문서다. 입문서는 그 자체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있기에 군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닥치고 입문’이라고 웅변하고 있기에. 군림하고 있기에.

 

 

 

그런 당당한 입문서들 옆으로 ‘-하는 법’이란 제목이 붙은 책들도 있다. 이 또한 입문서일 확률이 높다. 최소한 입문서 흉내를 내거나 입문서 행세를 하는 책들이다. 그런 부류 가운데 ‘서평가’라는 자리에서 고른다면, 단연 눈에 띄는 책이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여름언덕, 2008)이다.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여름언덕, 2012)도 펴낸 저자이니 이 방면으론 뭔가 아는 저자다.

 

그는 단순히 ‘읽은 척 매뉴얼’을 제시하려는 게 아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자못 진지한 문제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두 가지다. 첫째는 독서와 비독서 간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 책을 ‘읽은 책’과 ‘안 읽은 책’으로 구분하는 건 단순한 이분법이다. 물론 불가능한 구분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읽은 책이더라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책이 얼마나 많은가. 심지어 책을 읽어나가는 과정은 이미 읽은 부분을 잊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기억은 언제나 선별적이고 독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니 읽은 책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얼마간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셈이 된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다는 얘기다.

 

그리고 둘째로 책이 너무 많다는 점. 한권의 책을 읽느라 다른 열권의 책을 읽지 못하는 게 오늘의 독서 현실이다. 이 경우에도 독서의 이면은 비독서다. 우리가 어떤 책을 읽기로 선택하는 건 동시에 어떤 책들을 배제하는 것이다. 피에르 바야르는 비독서가, 역설적으로 대단히 적극적인 독서 전략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책을 전혀 읽지 않는 무독서와 다르게 비독서는 모든 책에 관심을 기울이기 위해서 독서를 자제한다. 가령 350만권의 장서를 알기 위해서 제목과 목차만을 읽는 한 소설 속 도서관 사서는 비독서의 실천가라고 할 수 있다.

 

독서와 비독서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형국이라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독서 입문서로도 활용 가능하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 독자라도 기하급수적으로 쏟아지는 책들을 다 읽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독서의 조건은 비독서다. 그런 사실을 자각하도록 해주는 책이니 독서 입문서로도 단연 권할 만하다.

 

12. 0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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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강의 공지다. 대구현대백화점 문화센터에서 9월과 10월 매주 목요일 저녁(19:30-21:10)에 '세계문학 다시 읽기'와 '마이클 샌델 읽기' 두 종의 강의를 번갈아 진행한다(문의는 053-245-4560).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일정은 아래와 같다.

 

 

 

세계문학 다시 읽기

 

1. 9월 6일_ 괴테의 <파우스트>

 

 

2. 9월 20일_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3. 10월 4일_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4. 10월 18일_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마이클 샌델 읽기

 

1. 9월 13일_ 정의란 무엇인가

 

 

2. 9월 27일_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3. 10월 11일_ 민주주의의 불만

 

 

 

4. 10월 25일_ 공공철학과 공화주의

 

12. 0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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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곧바로 개강을 앞두게 됐다(실상은 오늘 저녁부터 강의가 있지만). 내달에 예정돼 있는 한겨레교육문화센터의 강의일정을 소개한다. 9월 18일부터 화요일 저녁에 4회에 걸쳐서 세계문학 고전을 다시 읽을 예정이다. 주제는 '근대 개인주의 신화'로 잡았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http://www.hanter21.co.kr/jsp/huser2/educulture/educulture_view.jsp?category=academyGate8&tolclass=&searchword=&subj=F91243&gryear=2012&subjseq=0001&p_selmenu=01).

 

1. 9월 18일(화)_ 셰익스피어의 <햄릿>

 

 

2. 9월 25일(화)_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3. 10월 9일(화)_  괴테의 <파우스트>

 

 

4. 10월 16일(화)_  티르소 데 몰리나의 <돈후안> 외

 

 

12. 08. 24.

 

 

P.S. 강의의 주제는 이언 와트의 <근대 개인주의 신화>(문학동네, 2004)에서 가져온 것이다. 다만 와트가 다룬 <로빈슨 크루소> 대신에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넣었다. 파우스트 신화와 관련해서는 괴테의 <파우스트> 외에 크리스토퍼 말로의 <파우스투스박사>(문학과지성사, 2002)와 투르게네프의 중편 <파우스트>(작가정신, 2012)를 곁들일 수 있다. 그리고 돈후안 신화와 관련해서는 몰리에르의 <동쥐앙>과 푸슈킨의 <석상손님>(<푸슈킨 선집>에 수록), 그리고 페터 한트케의 <돈후안>(베가북스, 2005)와 존 버거의 <지(G)>(열화당, 2008)까지도 더 다룰 수 있다. 여전히 다시 쓰이고 있는 신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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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90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지난주에 이런저런 관련서를 뒤적이게 한 백승종의 <정감록 미스터리>(푸른역사, 2012)에 대해 적었다. 저자의 <정감록>를 마무리하는 책이어서 좀더 체계적인 독서를 원한다면 <한국의 예언문화사>(푸른역사, 2006)부터 읽거나 김탁의 해설서 <정감록>(살림, 2005)와 같이 읽는 것도 좋겠다(책이 절판돼 나는 지난주에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예언문화사에 대한 논문집으로 저자의 문제의식의 기원을 엿볼 수 있다. 책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많이 포함돼 있지만 다른 리뷰들과의 중복을 피하다 보니 좀 맨숭맨숭해졌다...  

 

 

 

주간경향(12. 08. 28) 성리학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는 존재했나

 

조선시대 가장 대표적인 금서이면서 동시에 비공식 베스트셀러였던 책은? 그렇다, <정감록>이다. 하지만 우리의 상식은 그 정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조선왕조의 몰락을 예언한 책이라고 하지만 <정감록>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으며, 누가 쓴 것이고, ‘정도령’이나 계룡산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 등등 우리가 상식선에서 답할 수 없는 물음이 수두룩하다. 이런 것이 <정감록>을 둘러싼 미스터리다.

 
한국의 예언문화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해온 백승종의 <정감록 미스터리>는 제목 그대로 이 미스터리들에 대해 “미제사건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영화 속의 이름난 형사”처럼 파고들어간 책이다. 놀랍게도 그는 이 ‘미제사건’에 20년 이상 몰두해 왔다! 더불어 놀라운 것은 이 책이 그간의 예언서 연구를 일단락짓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 그 후일담으로 내놓은 것이 <정감록 미스터리>라면 ‘정감록’은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는 듯도 하다. 하지만 성과가 없는 건 아니다. 우리가 무얼 알게 됐고 무얼 아직 모르는지 아는 것도 앎이고, 앎의 진전이니까.

 

 

 

애초에 발단은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성리학)를 상대로 한 ‘대항 이데올로기’가 과연 존재했던가에 대한 관심이었다. 조선후기 사회사를 전공한 저자는 지배문화와 맞선 다른 문화, 새로운 문화는 없었는지 탐색해보고자 했다. 그런 과정에서 발견한 주제가 조선의 예언문화였고 <정감록>이었다. 문자로 기록된 한국 예언서의 역사는 1350여년을 헤아린다지만, 한국 역사에서 예언문화의 전성기는 18∼20세기였고 <정감록>은 예언문화의 핵심이자 ‘태풍의 눈’과도 같은 책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은 영조 15년이다. 1739년께 황해도, 함경도 및 평안도 지방에서 ‘정감의 참위한 글’로서 <정감록>이 유행하고 있다는 보고에 영조는 그런 ‘나쁜 기운’은 ‘좋은 기운’을 북돋우면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라고 훈시한다. 하지만 성리학이란 ‘좋은 기운’은 양난을 겪은 조선후기 민중들에게 더 이상 미치지 못했다. <정감록>의 주된 내용에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진인(眞人)의 출현에 대한 예언과 함께 난을 피하게 해줄 명당 혹은 길지로서 십승지(十勝地)가 포함돼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조선후기 사회사적 맥락에서 <정감록>의 등장을 이해하는 저자는 이 시기에 지식의 생산과 소비가 더 이상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평민층에서도 독서인이 나오고 그들이 직접 저술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사회문화적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종이의 생산량이 늘어나 책이 흔해진 것도 <정감록>의 필사본 유행을 거들었다. 18세기의 <정감록> 초기본이 한글본이었다는 사실은 그런 점에서 중요한데, 현재 남아있지 않아서 한문본과 한글본 <정감록>이 어떤 관계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앞으로 규명해야 할 과제이자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다.

 

<정감록>에 대한 독보적인 연구를 통해서 저자는 조선후기 평민 지식인들이 생산·보급한 <정감록>이 동학과 증산교, 원불교 등 대표적인 신종교들의 산파가 됐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신종교가 기성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대체하기 전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이 우리 현대사의 불행인데,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초반 보천교라는 신종교의 신도 수가 600만명을 헤아렸다고 하니까 그 교세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알 수 있다. “때가 되면 진인이 나와서 계룡산에 도읍한다”는 <정감록> 신앙이 그토록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민중의 갈망이 그만큼 컸다는 증거다. “<정감록>은 난세를 만난 민중의 나침반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아직도 <정감록>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가.

 

12. 08. 22.

 

 

P.S. <정감록 미스터리>를 읽으며 궁금했던 것 중의 하나는 당시 지배층 양반들이 읽은 <주역>과의 관계다. 미래를 내다보기 위한 용도라는 점에서는 <정감록>이나 <주역>이나 비슷하니까. 둘 사이의 접점은 무엇이고, 어떻게 읽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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