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954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검찰 문제가 계속 불거져나와서 <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오월의봄, 2011)를 다룰 수밖에 없었다. 참여정부의 미완의 개혁이 다음 정부에서는 완수되기를 기대해본다. 대한민국 검찰 문제와 관련해서는 황창화의 <피고인 한명숙과 대한민국 검찰>(위즈덤하우스, 2011), 그리고 문준영의 <법원과 검찰의 탄생>(역사비평사, 2010)을 더 참고할 수 있겠다...

   

주간경향(11. 12. 13) 미완의 검찰개혁, 답은 민주주의다

스폰서 검사, 그랜저 검사에 이어서 벤츠 검사까지 등장했다. 대한민국 검찰을 둘러싼 스캔들이 비뚤어진 관행과 일부 검사들의 부적절한 처신에서 비롯된 일이라면 문제는 사소하다. 아마도 내부의 시각이 그런 듯싶다. 김준규 전 검찰총장이 비난여론에 맞서 “검찰만큼 깨끗한 데를 어디서 찾겠습니까?”라고 대꾸한 것이 방증이다. 하지만 외부에서 보는 시각은 좀 다르다. 수많은 비리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2001년부터 2010년 8월까지 해임된 검사가 단 1명, 면직된 검사가 3명에 불과한 현실은 그 자체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해준다. 검찰 스스로가 자기개혁에 나설 리 없으니 비판과 개혁은 바깥의 몫이다. 검찰을 생각하는 일도 국민의 몫이다. 최소한 우리가 민주공화국에 산다면 말이다.  

<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오월의봄)는 검찰개혁 문제를 다룬 자세한 현황 보고서이자 가이드북이다. ‘무소불위의 권력 검찰의 본질을 비판’하고 더 나아가 개혁의 청사진을 그린다. 참여정부에서 사법개혁과 검찰개혁에 관여했던 두 저자가 대한민국 검찰의 문제점이 무엇이고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를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면밀하게 기술하고 있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저자들이 먼저 짚는 것은 검찰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이미 오래된 현상’이다. 체제유지를 위한 합법적인 물리력의 핵심으로서 검찰은 그간에 체제와 권력 유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지대한 공로일까? 문제는 이러한 검찰의 기원이 일제하의 사법시스템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데 있다. 당시 식민지 통치의 핵심이 검찰이어서 식민지사법은 ‘검찰사법’이라 불렸다. “철저한 국가우선주의와 전체주의, 검찰의 강력한 권한, 경찰의 인권탄압, 법원과 검찰의 일체화, 관료제에 의해 지배받는 적은 수의 강압적인 판사와 검사, 피의자‧피고인의 무권리 상태, 극소수의 변호사와 미미한 변호활동, 남발하는 고문과 가혹행위 등”이 일제하 형사절차의 특징이었다. 이러한 식민사법을 청산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 대한민국의 형사사법이다.  

물론 인적 청산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많이 알려진 대로 해방이후 사법부의 수장은 대부분 식민지 시절 판검사를 지낸 친일파가 차지했다. 비근한 예로 일제하에서 검사를 했던 이호라는 인물은 해방이후에도 출세 가도를 달려서 법무부 장관과 주일대사를 역임하고 1980년 신군부 쿠데타 이후에는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장까지 지냈다. 일제에 부역하던 인물들이 해방이후에도 독재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1958년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을 전격 체포하여 기소한 것은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정치검찰’이 형사절차를 동원한 대표적 사례다.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또한 경찰과 검찰, 법원이 정치권력과 야합하여 얼마나 야비하게 사건을 왜곡‧조작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사례다. 준사법기관 내지는 인권옹호기관이라는 검찰의 자임은 그렇듯 한국적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국민을 위한 검찰이 아니라 권력을 위한 검찰이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참여정부는 역사상 처음으로 검찰개혁을 시도했다. 저자들은 1기와 2기에 걸쳐 이루어진 검찰개혁의 과정과 성과, 그리고 한계를 자세히 살피는데,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확실히 보장하고 대검 공안부를 축소함과 동시에 위상을 낮춘 것 등이 성과로 지목된다. 그럼에도 참여정부의 검찰개혁은 실패했거나 최소한 미흡했다.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중립을 넘어서 검찰개혁의 핵심과제인 민주적 통제 장치를 마련하지 못한 데 있다. 곧 검찰의 권력을 분산하고 견제와 감시 시스템을 마련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구체적으론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 설치, 검경수사권 조정, 법무부의 문민화, 과거사 정리 등이 달성하지 못한 과제들이다. 따라서 검찰개혁은 성공과 실패가 혼재하고 있다. 실패한 개혁이라기보다는 미완의 개혁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무릇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하며 모든 개혁은 ‘계속 개혁’이라는 소회는 그래서 나온다. 물론 계속 개혁은 민주정부만이 추진하고 완결지을 수 있는 과제이다. 검찰개혁을 위해서라도 민주주의가 더 진전되고 강화돼야 한다는 게 저자들과 함께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결론이다

11. 1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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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매경이코노미(1634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어떤 걸 써야 하나 고심하다가 고른 게 기 도이처의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21세기북스, 2011)였다. 주로 색깔어휘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만 서평에서는 자세히 적지 못했다. 스티븐 핑커의 <언어본능>(동녘사이언스, 2008), 벤자민 리 워프의 <언어, 사고, 그리고 실재>(나남출판, 2010) 등과 같이 읽으면 유익할 듯싶다.

  

매경이코노미(11. 12. 07) 언어는 본능인가 문화적 산물인가 

여러 나라 말을 할 줄 알았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이렇게 고백했다. “스페인어는 신에게, 이탈리아어는 여자에게, 프랑스어는 남자에게, 독일어는 말에게 이야기할 때 사용한다.”

이렇듯 각 나라 언어에는 차이가 있으며 그 차이에 걸맞게 사용분야가 다를 수 있다는 게 일반적인 통념이다. 이런 통념을 연장하면 ‘독일어는 매우 질서정연하기 때문에 가장 정교한 철학을 표현’하는 데 적합하다. 심지어 독일 사람들이 질서를 잘 지키는 것도 독일어 덕분이다.

과연 언어는 민족성을 반영하며 언어가 다르면 사람들 생각도 달라지는 것일까. 대답은 일단 ‘그렇지 않다’다. 보편문법을 제창한 저명한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 이래로 언어학의 지배적 관점은 언어가 본능이라는 것. 스티븐 핑커의 ‘언어본능’은 이런 관점을 집약하고 있는 책이다. 언어의 토대는 우리 유전자에 코딩돼 있기 때문에 모든 인류의 언어는 똑같다는 것이 촘스키와 핑커의 관점이다. 이들은 모국어가 우리의 사고에 설사 영향을 미치더라도 아주 사소하다고 본다.

‘언어로 보는 문화’란 부제를 달고 있는 기 도이처의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가 눈에 띄는 것은 그런 배경에서다. 저자는 촘스키와 핑커가 대표하는 20세기 언어학의 지배적 관점을 뒤집고 다시금 언어와 문화가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언어상대주의를 주장한다.

유사한 주장이 이미 20세기 중반에 미국 언어학자 에드워드 사피어와 벤자민 워프에 의해 제시된 적 있었다. ‘언어 상대성 원리’ 혹은 ‘사피어-워프 가설’로 불리는 이 견해에 따르면 모국어는 우리의 일상적인 생각과 인식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사피어와 워프는 자신들의 주장을 너무 극단적으로 밀어붙였고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도 박약해 학계에서는 배척됐다. 그런 만큼 도이처가 또다시 언어상대주의를 들고나온 것은 자신의 말대로 “마치 폭탄을 들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일처럼 보인다.”

물론 저자가 무작정 ‘오래된 이론’을 들고나온 것은 아니다. 그는 훨씬 탄탄한 증거들을 바탕으로 우리 마음이 생각보다 훨씬 깊은 수준에서 문화적인 관습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가 타고난 본성이라고 여기는 많은 특성들이 실제로는 문화적 특성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한다. 언어는 우리가 세계를 보고 인식하는 거울이고 렌즈라는 것이다.

단순한 사례로 우리 몸에서 손, 손가락, 발, 발가락 같은 기관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살펴볼 수 있다. 팔과 손은 마치 아시아와 유럽처럼 연결돼 있는데 팔과 손은 과연 하나인가, 둘인가? 문화에 따라 다르다는 게 정답이다. 히브리어에서는 팔과 손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야드’란 말로 부른다. 심지어 하와이어에서는 팔과 손, 그리고 손가락까지를 모두 한 단어로 지칭한다. 그런 히브리어 화자의 말을 영어나 한국어 화자가 이해하려면 당연히 혼란스러울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머리와 머리카락을 보통 ‘머리’라고 통칭하는 한국어 화자가 ‘머리를 자른다’고 말할 때 대경실색할 외국인도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다.

하와이어 팔·손·손가락 모두 한 단어
언어가 자연에 근거하는지 문화의 소산인지를 놓고 벌어지는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장은 색깔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게 묘사된 걸 두고 고대인들이 색맹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됐지만 색깔 어휘의 차이는 생물학적 진화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문화적 진화를 반영한 것일 뿐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화의 승리가 최종적인 것은 아니다. 언어가 생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탐구는 이제 막 첫걸음을 뗀 정도라는 게 저자의 정직한 고백. ‘단수와 복수를 언제나 구분하는 영어와 달리 이를 구분하지 않는 한국어가 사람들의 생각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도 그가 던지는 질문 가운데 하나다.  

11.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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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에 실리는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한나 아렌트의 <정치의 약속>(푸른숲, 2008)이 손 닿는 곳에 있어서 정치와 정치철학의 문제를 글감으로 삼았다. 지난 월요일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의 정치철학 강의에서 다룬 주제이기도 하다. 

  

한겨레(11. 11. 26) 아렌트의 마지막 선언 ‘정치철학 닥치고 정치’

정치란 무엇인가? 이런 고전적인 물음을 자주, 반복적으로 던지게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우리가 인생의 전환점이나 위기에 처하여 던지게 되는 것처럼 정치란 무엇인가란 질문도 마찬가지다. 정치의 위기, 정치에 대한 환멸은 정치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낳는다.

한나 아렌트의 유고집 가운데 하나인 <정치의 약속>에 실린 글 ‘정치로의 초대’에서 저자가 우선적으로 던지는 질문 역시 정치란 무엇인가이다. 그러고는 이렇게 답한다. “정치는 인간의 복수성에 기초한다. 신은 단수의 인간(man)을 창조하였지만, 복수의 인간(men)은 인간적이며 지상에서 만들어진 산물이고, 인간 본성의 산물이다.” 아렌트 고유의 정치사상을 집약하고 있는 문구인데, 그가 보기에 정치란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들의 문제’이다. 단수의 인간은 비정치적이며 “정치란 인간들 사이에서, 즉 단수의 인간 외부에서 생겨난다.” 한국어는 단수와 복수를 잘 구분하지 않으므로 ‘인간들’이란 말이 생경할 수도 있다. 그게 어쩌면 우리가 정치와 자주 불화관계에 놓이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인간’과 달리 ‘인간들’은 주로 비하적인 의미로 쓰일 때가 많지 않은가.

그런 불화는 철학과 신학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아렌트가 보기에 철학과 신학은 모두 단수의 인간만을 다루기 때문에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타당한 답변을 제출하지 못한다. ‘정치철학’이란 말은 그래서 모순적이다. 서로 다른 인간들의 공존과 연합을 다루는 것이 정치인 데 반해서 철학은 단수의 인간을 숙고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서양 정치철학의 원조인 플라톤은 그래서 어중이떠중이들이 설치는 민주주의 대신에 철인통치를 주창하고 옹호했다. 다수의 대중이 한갓 ‘의견들’을 좇는 데 반해서 소수의 철학자는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올바름이 무엇이고 좋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자가 국가를 통치하는 게 마땅하다고 플라톤은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철학은 정치와 대립한다.

정치에 대한 관점에서 플라톤과는 정반대 편에 서는 아렌트는 ‘정치철학의 종언’을 선언한다. 정치의 토대인 인간의 복수성을 고려하지 않기에 정치철학은 정치를 사유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갖는 반정치적 편견에 대한 비판은 그런 생각에서 비롯한다. 아렌트는 플라톤을 포함한 위대한 사상가들이 정치에서만큼은 깊이 있는 통찰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꼬집는다. 정치가 닻을 내리고 있는 깊이까지 내려가지 못한 탓이다. 필요한 것은 정치철학이 아니라 정치에 대한 사유, 곧 정치적 사유다.

김어준의 어법을 빌리자면 아렌트의 주장은 한마디로 ‘정치철학 닥치고 정치’다. 그렇게 닥쳐야 할 것 중에는 가족도 포함된다. 신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창조했듯이 인간은 자신을 닮은 인간을 창조해내려고 애쓴다. 그러한 가족의 원리를 정치체에도 도입하려고 할 때 문제는 불거진다. 정치체가 가족에 기초하거나 가족 이미지로 이해된다면 필연적으로 복수의 인간은 배제된다. 정치에서 가족주의는 복수의 인간이 갖는 근원적 차이들을 지우고 정치 세계 고유의 복수성을 파괴한다.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것만큼 반정치적인 구호는 따로 없다.

흥미로운 건 가족에 대한 태도에서만큼은 플라톤이 아렌트보다도 더 급진적이라는 점이다. 그는 훌륭한 통치자들에겐 사유의 주택도, 토지도, 소유물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내 것’ 일체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사익에 눈이 어두워 자기 욕심만 챙기려는 정치는 정치도 아니고 정치철학도 아니다. 유사 정치고 꼼수 정치다. 

11.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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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6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4 1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오전에 '올해의 책'을 몇 권 추천한 걸 빌미로 삼아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푸른숲, 2011)가 던지는 메시지에 대해 한번 더 적었다. 이미 책을 읽은 독자들에겐 새로울 게 없는 내용이지만, 그래도 일간지 칼럼인지라 책을 접해보지 못한 독자가 더 많을 거라는 점을 염두에 두었다.  

    

경향신문(11. 11. 25) [문화와 세상] ‘나꼼수’의 소통을 배우자

출판계는 보통 전년 12월부터 올 11월까지 출간된 책을 대상으로 ‘올해의 책’을 선정한다. 개인적으론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를 올해의 책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한국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가카헌정방송’ ‘나는 꼼수다’를 빼놓고 2011년을 생각할 수 없다면, 출판쪽도 마찬가지다. <닥치고 정치>를 제쳐놓고 올해의 책을 고르는 건 허전한 일이 될 것이다.

한국의 정치와 사회를 분석하고 진단하는 허다한 책들이 나와 있지만 사실 <닥치고 정치>만큼 대놓고 ‘핵심’을 찔러준 책은 드물었다. “과거 군사정권은 조직폭력단이었어. 힘으로 눌렀지. 그런데 이명박은 금융사기단이야. 돈으로 누른다”고 누가 그토록 간명하게 일러주었단 말인가.

<닥치고 정치>는 국가를 수익모델로 삼아 성실하게 불법을 자행해왔고 자행하고 있는 걸로 ‘추정’되는 권력을 주요 표적으로 삼고 있지만, 진보정치에 대한 속 깊은 비판과 제안도 포함하고 있다. “진보는 자기가 가진 게 당연해선 안 되는 거”라는 전제하에 김어준이 진보정치권에 던지는 충고의 핵심은 ‘느낌’과 ‘마음’의 중요성이다.

그의 육성은 이렇다. “자기들이 똑똑하고 정당한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 정치에서 중요한 건 사람들 마음을 얻는 건데, 마음은 대단히 제한된 자원이라고.” 이 ‘제한된 자원’을 움직이는 게 대중정치인 만큼 중요한 것은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 정서적 직관이다. 논리적으로 맞는다고 해서 정치적 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가지 사례로 김어준은 월드컵 축구에 대한 열광을 든다. 2002년 월드컵에서 보여준 국민적 응원 열기를 비판하면서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은 위험한 민족주의와 파시즘적 징후까지 읽어냈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평소 축구에 관심이 없던 여성들까지 열광했던 건 화면에 등장한 축구선수들이 너무 섹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문제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욕망이었다. 유럽에서 젊은 여자들이 축구선수를 좋아하는 게 돈 많고 몸 좋고 섹시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월드컵 열기가 이후에 K리그로 이어지지 못한 이유도 자명해진다. 월드컵 대표팀이 국민들에게 기쁨을 준 만큼 국민들도 이제는 K리그 경기장을 찾아서 지속적으로 응원해주는 게 ‘도리’라는 식의 ‘죄의식 마케팅’은 문제의 본질을 잘못 짚었다. 김어준은 오히려 경기장에 중계 카메라 대수를 늘리는 것이 해결책이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죄의식 마케팅이나 윤리적 프로파간다(propaganda)가 더이상 진보정치의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아무리 올바른 이념을 설파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의 보수성을 탈피하지 않으면 메시지의 진보성은 휘발되고 만다. 그만큼 메시지의 전달형식은 내용 이상으로 중요하다.  

미디어학자들의 주장대로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라면 진보정치의 과제는 메시지를 더 급진화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전달수단을 급진화하는 데 있다. ‘나는 꼼수다’가 사용하는 팟캐스트 방식의 소통은 그러한 급진화의 유력한 사례라 할 만하다.

김어준은 정치를 한마디로 ‘연애’라고 정의한다. 사람의 마음을 사는 일이기에 그렇다. 여기서도 핵심은 마음이 제한된 자원이라는 데 있다. 혹 진보정당의 답보는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간과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진보정당이 구사하는 언어는 이미 자기들이 설득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만 알아먹는 언어”라는 게 문제라고 김어준은 꼬집는다. 신자유주의와 FTA의 문제점을 어떻게 시장통 아줌마도 알아들을 수 있게 전달할 것인가.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 진보정치는 날치기로 통과된 한·미FTA의 무효화 투쟁만큼이나 중요한 과제와 마주하고 있다. 

11. 11. 24.  

P.S. 참고로, 오전에 급하게 꼽아본 올해의 책은 <닥치고 정치> 외에 공자를 재발견하게 해준 리링의 <논어, 세 번 찢다>(글항아리, 2011), 올해 나온 가장 중요한 '사전'으로 최성일의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11) 등이다. 물론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2011)도 내게는 '올해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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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11-11-25 0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의합니다. 나꼼수의 미덕은 진보담론을 대중화시킨데 있을 뿐만아니라 대중들의 급진적 잠재성을 추동해내었다는데 있죠. 이때문에 파시즘이나 포퓰리즘이 아닌가라는 혐의를 받기도 하지만 지젝이 이야기했듯이 이처럼 대중의 집단적 욕망에 영합/부합하는 정치야 말로 '살아있는 정치'인 거죠. 이에 대한 진중권이나 이택광같은 중립성이나 논리를 내세우는 자유주의자 혹은 강단좌파들의 포지션은 대중을 한수아래로 보는 전형적인 엘리트주의적 자유주의/좌파에 불과하죠. 설령 그들의 논리가 김어준보다 수준높을 순 있어도 대중들의 마음이라는 "제한된 자원"을 사는데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포지션.


김어준은 이러한 기존 진보파들의 문제점을 정확히 짚음은 물론 그와 동시에 해결책까지 제시해주었다고 봐야합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도 진보파내부에는 김어준에 대한 긍정적 평가못지 않게 부정적 평가의 기류도 만만치 않은것 같아 보입니다. 물론 김어준의 문제점들도 짚어볼순 있겠지만(가령 황박케이스같은 경우)적어도 나꼼수에 있어서 만큼은 보고 배울점이 더 많아보이는 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로쟈 2011-11-27 09:56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십니다.^^ 소위 진보적 지식인 가운데는 동의하지 않는 분도 많더군요.^^;

낭만인생 2011-11-25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홉스는 가진자의 손을 들어 주었죠. 지식인은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까요? 오직 국민의 뜻을 따라야죠....

로쟈 2011-11-27 09:56   좋아요 0 | URL
지식인(인텔리겐치아)이란 말의 정의 자체는 못 가진 자의 편입니다.^^

jeandemian 2011-11-26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자유주의와 FTA의 문제점을 어떻게 시장통 아줌마도 알아들을 수 있게 전달할 것인가.. “진보는 자기가 가진 게 당연해선 안 되는 거”..인상적인 구절들입니다. 자기가 가진게 당연해선 안되는거..정말 멋지고 양심적인 말 같습니다만..

로쟈 2011-11-27 09:57   좋아요 0 | URL
'자기가 가진 게 당연해선 안 되는 거'는 마이클 샌델도 하는 얘기입니다.^^

테레사 2011-11-28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백번 공감합니다. 저는 솔직히 우리 동시대인들이 김어준 같은 사람을 가진 것 자체가 운이 아직은 우리 편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언어만으로는 아무리 그게 진실된다 하여도 대중을 추동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이번주 주간경향(952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한국서양사학회 편, <몸으로 역사를 읽다>(푸른역사, 2011)를 거리고 삼았다. 이달엔 건강검진도 받았던 터라 '몸'이란 주제에 더 눈길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주간경향(11. 11. 29) 훈육과 정치도구로서의 몸

몸이란 주제는 얼마 전부터 인문학에서 각광받는 주제이다. 서양사 쪽도 예외가 아니어서 ‘몸과 생명정치로 본 서양사’란 부제를 달고 있는 <몸으로 역사를 읽다>(푸른역사)는 한국서양사학회에서 개최한 ‘서양에서 몸과 생명의 정치’란 학술대회 발표문을 단행본으로 재편집한 책이다. 시기적으론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 성과 낙태, 동성애, 성과학, 수용소와 사형제 등 몸과 관련한 다양한 주제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연구 성과 10편을 묶었다. 학술논문집의 모양새이긴 하지만, 몸과 생명, 그리고 권력이 서로 엮어지는 서양사의 여러 문제적 장면들을 흥미진진하게 따라가볼 수 있다.   

‘몸의 역사’에서 바로 미셸 푸코란 이름이 떠올린다면 인문학의 동향과 지형에 눈이 밝은 독자다. 서양에서 몸이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 정치, 경제, 문화적 맥락에서 훈육과 생명정치의 초점이 되어왔다는 사실을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시리즈 등을 통해 가장 강렬하게 제시한 철학자가 푸코이기 때문이다. ‘몸으로 역사를 읽다’란 기획이 ‘미셸 푸코와 몸의 역사’란 논문으로 시작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문제는 푸코의 기획의 미완으로 머문 데 있다. 일련의 작업을 통해 푸코는 몸을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장 속에서 다시 바라보도록 했지만 자신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이론화하거나 체계화하지는 않았다. 그가 펼쳐놓은 새로운 이론적 공간에서 푸코식 몸의 담론을 변형하고 해체하고 더 발전시키는 일은 ‘푸코 이후의 푸코’들에게 남겨진 몫이 됐다. 두어 사례를 들어본다.  

‘중세 말 육체와 성에 대한 교회의 이념과 규율 메커니즘’이란 논문은 중세 기독교의 성윤리가 가져온 변화를 푸코적 시각에서 재구성한다. 서양에서 육체를 죄와 연관시키는 것은 기독교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현상인데, 이러한 엄격한 성윤리를 체계화하여 성철학의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 성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는 인간의 원죄를 음욕의 결과인 성기의 죄, 곧 성기의 반란 탓으로 돌리고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움직이는 성기의 원칙을 ‘리비도’라고 불렀다. 푸코는 이 ‘성기 반란설’과 ‘리비도론’이 서양의 고전고대와 기독교 시대를 가르는 핵심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 사회에서 성윤리의 주요 문제는 타인과의 관계, 즉 ‘삽입 모델’로부터 자신과의 관계가 문제되는 ‘발기 모델’로 바뀌었다. 이것은 성적 주체성의 핵심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과의 관계’로 전환됐다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거의 무시됐던 수음이 성생활의 주요 문제로 등장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미망인 형수와의 결혼을 의무화한 유대사회에서 오난의 죄는 정액을 형수가 아닌 바닥에 사정하여 형의 대를 단절케 한 죄였지만 기독교에서는 수음이 그러한 죄로 간주됐다. 그래서 자신의 성을 말하는 것은 자기에 대한 지식이자 ‘주체의 자기 이해 형태’가 됐다. 중세 기독교 세계의 고해성사에서 고백의 주체는 ‘자기와의 관계’와 씨름하면서 자신의 성적 욕망을 인지하고 관리해야 하는 임무를 떠맡았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의 테크놀로지’는 이승뿐 아니라 저승으로까지 연장됐다. 몸이 사회적‧문화적 배경조건에 따라 어떻게 달리 규정돼왔는지 보여주는 한 사례다.   

‘나치 집단수용소와 생명정치’란 논문은 생명정치란 푸코의 개념과 문제의식을 더 확장하여 정치사상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만든 조르조 아감벤의 논의를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저작과 함께 검토한다. <호모 사케르> 시리즈로 명성을 얻고 있는 이탈리아의 철학자 아감벤은 “오늘날 서양의 생명정치적 패러다임은 국가공동체가 아니라 수용소”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수용소는 영토와 질서(국가), 출생(민족)이란 세 요소로 규정되는 근대 민족국가 체제가 자신이 처한 항구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요구하게 된 장치이다. 아감벤은 나치의 집단수용소를 그런 장치의 전범으로 제시한다. 나치의 생명권력은 수감자들에게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언어적 소통능력을 박탈하고 그들을 단순한 생존상태, 곧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들어냈다. 이러한 수용소는 보스니아의 오마르스카 강간수용소에서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몸으로 읽는 역사’는 지금 현재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걸 <몸으로 역사를 읽다>는 말해준다.  

11.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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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 2011-11-23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유용하게 쓰일 것 같아 스크랩해 갑니다. 감사드려요~

로쟈 2011-11-23 22:27   좋아요 0 | URL
^^

2011-11-23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3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1-11-24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코의 성의 역사는 오래전에 나온것 같은데 저 위의 책은 재간인가 보네요^^

로쟈 2011-11-24 22:12   좋아요 0 | URL
네, 표지만 바뀐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