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956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하세가와 에이스케의 <일하지 않는 개미>(서울문화사, 2011)에서 일부 내용을 정리하고 소감을 붙였다. 잡지는 강의차 대구에 내려가면서 KTX객차 안에서 읽었는데, 어느덧 '송년호'였다(주간경향이 꼽은 올해의 인물은 '안철수'이다). '일하지 않는 개미'로 한해를 보낼 순 없을까 잠시 공상해본다...

 

 

 

주간경향(11. 12. 27)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 사회는 여력이 없다

 

‘개미에게 배우는 지혜’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건 이솝의 우화 ‘개미와 베짱이’다. 부지런한 개미와 게으른 베짱이의 ‘말로’를 교훈적으로 전해주는 감동적인이면서도 ‘무서운’ 우화 말이다. “너네 그렇게 공부 안하고 놀기만 하면 나중에 거지 된다!”고 했던가. 조금 유식한 독자라면 한걸음 더 나아가 파레토의 법칙이란 걸 떠올릴지도 모른다. 부지런하다고 하는 일개미들을 자세히 관찰했더니 실상 80%는 놀더라는 데 착안하여 경제학자가 내놓은 것이 ‘20:80 법칙’이다. 은연중에 ‘20 대 80 사회’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개미에게 배우는 ‘두 번째’ 지혜라고 할까.

 

 

일본의 진화생물학자 하세가와 에이스케의 <일하지 않는 개미>는 파레토의 법칙에서도 한걸음 더 나아가 ‘세 번째’ 지혜를 알려주는 책이다. 물론 제목만으로는 별로 놀랍지 않다. “개미가 부지런하다고? 80%의 일개미는 논다!”라는 표지 문구도 게으른 독자들을 확실히 잡아끌 만한 독서의 유인으로는 약해 보인다. 핵심은 다른 데 있다. 저자 또한 개미의 종류와 무관하게 70% 일개미는 아무 일도 하지 않더라는 관찰결과를 보고한다. 일하지 않는 일개미는 먹이를 모으거나 유충을 보살피거나 여왕의 시중을 드는 것과 같이 군락을 위한 뭔가 생산적인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자기 몸을 핥거나 하릴없이 돌아다니는 식으로 노동과 전혀 무관한 활동만 한다.

 

좋다, 타고난 천성이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그런 게으름뱅이가 절대 다수인 집단이 좀 더 부지런한 집단과의 경쟁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만약 진화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거라면 일개미들의 게으름은 분명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는 거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저자는 개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일하지 않는다’는 뜻을 조금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미 군락의 일 가운데는 단기간이라도 멈추게 되면 군락의 생존이 위태로워지는 것이 있다. 특히 알을 보살피는 그런 일에 속하는데, 개미의 알은 몹시 약하기 때문에 일꾼 개미가 늘 곁에서 핥아주어야 한다. 침에 함유된 항균물질을 계속 발라주는 것이다. 땅속이나 썩은 나무 안에서 서식하기에 개미들에게 방균은 중차대한 문제다. 일꾼을 알에서 하루만 떼어놓아도 대부분의 알에 곰팡이가 슬어 죽어버린다고 할 정도다. 이런 조건에서라면 군락 내에 노동력이 제로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먹이를 찾는 일도 중요하지만 모든 개미 전체가 먹이 찾기에 동원될 수 없는 이유다.


게다가 갖가지 돌발적인 사태에도 대비해야 한다. 심술궂은 꼬마가 개미집에 흙을 끼얹는 것 같은 예기치 않은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여력’이라는 게 필요하다. 예비 노동력을 남겨놓지 않고 모두가 한꺼번에 일을 한다면 결국 다들 지쳐서 아무도 일을 할 수 없는 때가 올 수밖에 없다. 그것은 개미 군락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게 된다.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 시스템이야말로 파국적인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개미들의 사회에서 ‘일하지 않는 개미’는 잉여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것이 없으면 군락이 존속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하고 꼭 필요한 존재다. 다르게 말하면 ‘일하지 않는 개미’는 예비 노동력으로서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존재’다. 얼핏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일하지 않는 개체들을 갖고 있는 개미들의 시스템이 결국 오랜 진화의 압력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음미해볼 만하다. 모두가 부지런한 시스템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것은 80%가 게으른 시스템이었다.


<일하지 않는 개미>를 통해서 ‘멍청함’에 대해서도 재평가하게 된다. 개미들은 페로몬을 통해서 정보를 전달하는데, 그 흔적을 따라 앞서 간 개미를 정확하게 추적하는 ‘똘똘이’ 개미 말고도 항상 잘못 추적하는 ‘멍청이’ 개미들이 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똘똘한 개체만 있을 때보다 조금 멍청한 개체가 섞여 있을 때 조직이 더 잘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먹이를 찾을 때 멍청한 개미들은 길을 잘못 들어서 헤매다가 오히려 지름길을 발견하곤 해서다. ‘부지런한 개미’라는 환상은 벗어던지게 됐지만 아직 우리가 개미에게 배울 수 있는 지혜는 더 남은 듯싶다. 

 

11. 12. 20.

 

 

P.S. <일하지 않는 개미>의 추천사는 최재천 교수가 썼는데, 개미 관련서로 대표적인 책이 그의 <개미제국의 발견>(사이언스북스, 1999)이다. 최재천 교수의 지도교수이자 개미에 관한 세계적 권위자 에드워드 윌슨이 베르트 휠도브러와 같이 쓴 <개미 세계 여행>(범양사, 2007)과 함께. 윌슨의 <사회생물학> 개정판은 올해 고대하던 책 가운데 하나였는데, 해를 넘기는 듯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달 책&(401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세계 인구` 문제를 주제로 다뤘다. 2011년 세계인구가 70억을 톨파한 해로도 기억되기에 마지막 달력을 넘기며 이 `유례없는 시대`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봄직하다.

 

 

 

책&(11년 12월호) 지구는 늙어 가는가?

 

2011년도 ‘마지막 잎새’ 같은 달력 한 장만을 남겨놓고 있다. 2011년이 갖는 여러 가지 의의가 있겠지만 인구학자들에겐 단연 세계인구 70억을 돌파한 해로 기억됨직하다. 하지만 ‘70억’이 비단 인구학자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수치는 아닐 것이다. 200년 전인 1800년에서 지금까지 세계인구가 약 10억에서 70억으로 늘어났다고 하면 ‘세계인구’ 문제에도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의 발단과 성격, 그리고 전망에 대해 알아둔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이해도 한 뼘쯤 늘어날 것이다.


이탈리아의 인구학자 마시모 리비-바치의 <세계인구의 역사>(해남)는 ‘간략한 역사’다. 하지만 전문학자의 책답게 인구문제에 대한 이론적‧통계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가령 “오늘날의 인구는 어째서 60억 명이 된 것일까? 왜 1,000억이나 1억 명이 되지 않았는가?”라는 게 그가 묻는 질문 가운데 하나다. 이유는 인구증가 경로의 방향이 다양한 원동력과 장애물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생물학자들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두 가지 전략을 구분하는데, 곤충과 어류 및 작은 포유류는 불안정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다산(多産) 전략을 취한다. “생명은 복권과 같은 것이고 따라서 복권을 많이 사는 게 의미가 있다”는 게 이러한 전략의 모토다. 반면에 중간 크기 이상의 포유류나 몇몇 조류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서식한다. 생존경쟁을 향한 압력 때문에 새끼를 기르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 하고, 이런 투자는 새끼의 수가 적을 때 가능하다. 즉 생존가능성이 높을 경우에는 출산에 승부를 거는 것이 아니라 보호와 양육에 초점을 맞춘다. 인간이란 생물종의 기본전략도 마찬가지다. 원론적으로 인구의 잠재적 증가는 한 여성당 출산의 수, 그리고 출산시의 기대수명이라는 두 가지 변수에 의해 결정된다.


‘라루스 세계지식사전’ 시리즈의 하나로 나온 카트린 롤레의 <세계의 인구>(현실문화)는 좀더 쉽게 세계인구 문제의 전체적인 윤곽을 잡아준다. 저자에 따르면 인류가 지구에 출현한 이후로 인구가 갑자기 증가한 시기는 이전에도 몇 차례 있었다. 따라서 위생관념의 발달만으로는 급속한 인구증가를 해명할 수 없다. 또한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한 과도기가 지나면 한동안 안정기를 맞게 된다는 사실도 인구사는 말해준다. 하지만 그 안정기에 도달할 때까지 세계인구는 100억-110억에 이를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전망이다. ‘인구혁명’이란 말까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무엇이 인구 변천을 가져오는가. 인구의 이동은 아니다. 지구인이 다른 행성으로 이주해가지 않는 이상 세계인구의 변화는 출생률과 사망률에 달려 있다. 특히 중요한 요인은 사망률이다. 18세기 인구의 평균수명은 25세였고 오늘날은 67세이다. 18세기에는 25세 이전에 모두 죽었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당시에는 영아사망률이 높아서 인구의 절반 이상이 20세가 되기 전에 사망했다. 영유아 사망률이 본격적으로 감소한 것은 예방접종을 실시하면서부터인데, 200년 전에는 1세 이하의 여아 다섯 명 가운데 하나 꼴로 목숨을 잃었지만 지금은 1,000명에 3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듯 영아 생존율이 낮아지면서, 그리고 피임법이 발달하면서 선진국에서는 출산에 대한 인식도 변화하게 됐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가난한 후진국, 특히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이남에서 출생률이 높은 것은 에이즈의 확산으로 영아사망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우리는 체감하기 어렵지만 에이즈는 세계인구 전망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큰 변수 가운데 하나다.


20세기 들어서 세계인구 변화와 관련하여 가장 두드러진 추세는 도시화와 고령화이다. 현재 세계인구의 절반가량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2050년에는 10명 중 7명이 도시에 살게 될 전망이고, 인구증가율이 높은 지역 또한 모두 도시권이 될 것이다. 급속하게 진행중인 고령화는 도시화 이상으로 세계의 모습을 바꿔놓고 있는데 ‘고령화, 쇼크인가 축복인가’란 부제를 달고 있는 테드 피시먼의 <회색쇼크>(반비)는 이 문제에 대한 종합보고서이다. 세계 각지의 고령화 현장에 대한 르포와 인터뷰를 전하면서 고령화와 관련한 여러 가지 지식과 정보를 간추려준다. 그에 따르면 고령화는 도시화와 무관하지 않다. 현대화된 도시가 인간의 수명을 늘린 한 요인이기 때문이다. 농촌에서는 누릴 수 없는 서비스를 도시에서는 가난한 사람도 누릴 수 있다는 게 이유다.

 

장수의 요건에 관한 지적이 흥미로운데, 그것은 20세기 이후에 태어나는 것과 가능하다면 부유한 선진국에서 태어나는 것, 두 가지다. “이것에 필적할 만한 다른 요인은 전혀 없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20세기 중반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한 현대의학이 인간의 기대수명을 늘리는 데 공헌했고 선진국은 포괄적인 공중보건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서이다. 덧붙여 과거에 비해 훨씬 많은 의학정보를 접할 수 있게끔 했기 때문에 문자해독율의 상승은 가장 중요한 생명연장 요인 중 하나다. 경제발전 수준과 공중보건 인프라만큼 중요한 요인이 교육이기 때문에 낙후된 지역에 대한 교육지원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은 음미해볼 만하다.

 

11. 12. 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주 매경이코노미(1636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마르틴 부르크하르트의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의 철학>(알마, 2011)를 거리로 삼았는데, 가벼운 마음으로 손에 들었지만 의외의 재미를 안겨준 유익한 책이다. 원제는 '위대한 사상의 사소한 역사'이고, '위대한 생각들의 소사전' 정도로 규모에 맞는 제목이다. 독립적인 항목들이 연대기적으로 배열돼 있는데, 쓰다 보니 첫 항목인 'A. B. C. D.' 소개에 그치고 말았다. 그래도 어떤 용도의 책인지는 말해줄 듯싶다.

 

 

 

매경이코노미(11. 12. 21)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꼭 필요한 나만의 철학

 

철학은 어떤 쓸모가 있을까? 프랑스 인기 만화 ‘아스테릭스와 오벨릭스’의 주인공 오벨릭스는 철학이라면 코웃음을 치는 캐릭터다. 로마군과 싸우는 갈리아족의 덩치 큰 장사인 그의 관심사는 맛있는 것 아니면 로마군에게 던질 바위 따위다. 한데 어느 날 연극 무대에 서게 됐다.

 


관객이 놀랄 만한 메시지를 던져보라는 감독 주문에 오벨릭스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머리가 지끈거렸다. 생각나는 건 이 한마디뿐이었다. “로마, 이 허튼 개자식들아!” 이것이 말하자면 오벨릭스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고 그의 ‘철학’이다. 보통 사람들이 저마다 갖고 있는 ‘개똥철학’이다. 사실 평소라면 그걸로 충분하다. 하지만 요즘 같은 연말에 오벨릭스처럼 갑자기 조명을 받는 자리에 서게 돼 뭔가 의미 있는 말을 해야 한다면, 이마에서 진땀이 흐르고 입술이 바짝 마를 지경이라면 어떨까.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의 철학’의 저자 마르틴 부르크하르트는 철학이 바로 그럴 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책은 딱 그런 도움을 주기 위한 용도로 읽힌다. 가볍지만은 않은 성찰을 담고 있으면서도 재미있고 유쾌하다. ‘위대한 사상의 사소한 역사’라는 원제가 비밀을 암시해주는 듯싶은데, 저자는 일단 사상가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접어두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위대한 사상’들은 사정이 좀 다르다. 저작권자가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어도 우리 인생을 좌우하는 사상들의 목록을 떠올려볼 수 있다. 그것을 저자는 ‘위대한 사상’이라 부른다. 이 사상들의 ‘사소한 역사’가 비록 ‘쓸모 있는 물건’들과 경쟁이 되진 않겠지만 ‘정신’과 ‘생각’이란 것이 얼마나 괜찮은 것인지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은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 그의 기대다.

위대한 사상에 대한 저자의 독창적인 ‘연대기’는 알파벳에서 시작한다. 알파벳이란 말 자체가 첫 두 글자인 알파(α)와 베타(β)에 따라 지어진 점에서 알 수 있듯 알파벳이란 사상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알파벳만큼 인류에 큰 영향을 미친 것도 없다. 외계인이 인간에게 선물했다는 설도 있지만 저자가 밝혀주는 ‘사소한 역사’에 따르면, 알파벳의 A는 거꾸로 세워보면 알 수 있듯이 멍에를 쓰고 있는 황소를 그린 글자다. 그리고 B는 여성의 젖가슴을 모방한 글자다. C에 해당하는 감마(γ)는 남성과 여성의 결합, 곧 결혼(가미, Gamie)을 뜻한다. ‘기초’를 뜻하는 ABC는 곧 가정을 꾸미고픈 희망을 나타내는 말이 된다.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8세기경에 알파벳이 널리 퍼졌는데, 그리스인들에게 알파벳 배우기 운동은 평등을 지향하는 민주화 운동이었다. 24개의 알파벳으로 모든 것을 읽고 쓸 수 있게 됐기에 학식은 더 이상 부유층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었다. 더 나아가 알파벳은 그리스의 자연철학도 가능하게 했다. 몇 개의 철자가 모여 단어를 이루는 것처럼 자연도 더 근본이 되는 요소들로 이뤄져 있다고 보게 된 것이다.

알파벳 원리를 자연에도 적용한 것인데 이것이 말하자면 ‘알파벳의 사상’이다. 서양철학의 기원이 그리스 자연철학에서 비롯됐다면 알파벳은 그런 기원을 가능하게 한 ‘기원의 기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회적으로도 알파벳은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다. 법이 성문화되면서 독재자라도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없게 됐다. 비록 소크라테스 같은 경우는 철자를 맹신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그런 경고조차도 알파벳의 위력을 보여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말도 문장으로 기록되지 않았다면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철자로 고정된 기록으로서 철학은 영원이라는 환상마저 일깨워준다.

대략 이런 것이 알파벳의 ‘사소한 역사’다. ‘동전’과 ‘하느님 아버지’로 이어지는 저자의 성찰 목록이 30여가지의 주제를 탐색한 끝에 의도적으로 ‘DNA’를 마지막에 다루는 것은 ‘ABC(알파벳)’와 절묘한 상응을 이룬다. 저자는 DNA 또한 일종의 사상이며 ‘믿음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이 허튼 개자식들아!”에서 좀 벗어나고픈 독자들의 상상을 한껏 활성화해준다.

 

11. 12. 12.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12-12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2 2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 10월에 세명 저널리즘스쿨대학원에서 '교양이란 무엇인가'와 '서평이란 무엇인가'란 주제로 속강을 한 적이 있다. 이중 '교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강의내용이 먼저 기사화돼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http://www.danb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61).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에 실린 '교양이란 무엇인가'의 내용을 풀어주는 형식의 강의였다.

 

 

단비뉴스(11. 12. 10) 당신이 몰랐던 ‘교양’의 비밀

 

모든 질문이 누구에게나 중요한 건 아니다

“어우, 저 사람 교양 없어.” “나, 교양 있는 여자에요.” 우리는 누군가와 개인적인 친분을 맺을 때 ‘교양’의 유무를 중요한 잣대로 사용한다. ‘교양’은 한 사람의 지적 취향을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욕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익숙하게 사용하는 개념인 ‘교양’이란 과연 무엇일까? ‘로쟈’라는 인터넷 서평꾼으로 유명한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인문교양특강’에서 ‘교양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 자체에 의문을 던지며 강의를 시작했다.

 

“모든 질문이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건 아닙니다. 보통은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넘어가기 쉬운데, 질문 자체에 머물러서 숙고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교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언제, 어느 자리에서나 혹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질문은 아닙니다. 어떤 물음에는 그것이 던져지는 맥락이 있고, 장소성이 있기 때문이죠.”

 

‘교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명료한 답변을 구하려는 심리를 꼬집는 말이었다. 특히 인문학이 일종의 ‘교양’으로 자리잡고 있는 최근 한국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 교수는 불편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장소와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모든 질문에 보편성이 있다고 여기는 학자들의 버릇 혹은 관례를 지적하는 말이다.

 

“가령 칸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이를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질문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왜 여기에 관심 없어’라고 이야기하죠. 하지만 모두에게 절실한 물음은 아닙니다.”

    
그는 아예 ‘What is X?(무엇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형식 자체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했다. 희랍어적 기원을 갖고 있는 이러한 질문형식은 어느 문화권에서나 사용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플라톤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가 이러한 형식의 질문을 빈번하게 던지지만, 이는 어떤 개별 사안에 대한 판단을 ‘일반화’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여기에는 비약이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나’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중요한 질문이지만, ‘사람들’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물론 몇몇 철학자는 일반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겠지만.”

 

 

"책 안 읽고 살아도 문제없지만……"

강의는 ‘책의 속임수’를 들춰내는 쪽으로 이어졌다. 서평을 전문으로 하는 그가 “책 안 읽고 살아도 문제없다”는 말을 할 때는 의아하기도 했다. 정말 그럴까?

    
“책은 읽은 사람은 소수지만, 쓴 사람은 더 소수지요. 책에는 책 읽은 사람 사이에 전수되어온 고정된 편견 같은 게 있습니다. 의미 없는 삶, 성찰 없는 삶에 대해서는 격하하고, 직접적인 삶에 대해 거리를 두는 ‘theoria’ (‘이론’의 어원)를 더 높이 치는 것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너는 어떻게 생각 없이 인생을 사냐’ 같은 질문이 나오지만, 솔직히 안 될 건 없어요. 책 안 읽고 살아도 문제없습니다.”

 

이 말은 책을 읽고 교양을 쌓는 일이 누구에게나 중요한 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대학에 개설된 수많은 ‘교양과목’들은 다 무엇인가? 그는 이 문제를 교양과목 교수들의 이해관계, 그리고 시대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교양이란 게 정말 보편적이고 중요하다면 변화하지 않아야 하는데, 왜 달라질까요? 담당교수들의 이해관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세력판도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힘 있는 학과의 교양과목, 예를 들면 중국이 잘 나가면 중국 관련 교양과목이 늘어나는 거죠. 이런 면에서 ‘보편성’이란 허울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니체 책을 필수도서로 여기는 ‘교양주의’

그렇다면 한국에 ‘교양’이란 개념이 들어온 것은 언제일까? 저자는 그 시작을 일본의 '다이쇼오 교양주의'에서 찾는다. 다이쇼오 시대(1912~1926년)에 등장한 ‘교양주의'는, 일본 동경제국대학이나 제1고교 등 최고 엘리트 학생들이 공유했던 일련의 ‘서양 고전’ 리스트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이런 엘리트 중심적 뿌리가 한국에 전해져 지금까지도 우리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필수 도서로 여긴다. 하지만 이 책은 니체의 저작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책으로, 이는 ‘교양’이라기보다 ‘교양주의’가 만들어낸 거품이라 볼 수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동경제대 학생들은 엄청난 사회적 프리미엄과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 근거가 ‘우리는 이런 교양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양주의가 만들어낸 기능이지요.”

 

이것이 교양이 가진 두 가지 기능 중 국가 엘리트에 대한 차별적 보상을 정당화하는 기능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교양은 부르주아의 사회적 부와 지위를 정당화하는 기능도 갖는다. 이러한 기능은 경제불황에도 미술품 시장이 초호황을 누리는 경향에서 발견할 수 있다. 최근 등장한 ‘초고가 서가’ 또한 같은 맥락에 속한다.

 

“최고급 서가 컬렉션을 짜주는 전문 플래너가 있다고 합니다. 내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싸다는 게 중요합니다. 미술품의 최대 메리트이기도 하죠. 보통 사람들은 가질 수 없다는 것. 과거에는 교양이 그런 기능을 했습니다. 예술이나 문학에 대한 조예가 있으면 ‘저 사람 잘 살아’라고 생각했지요.”

 

 

 

‘교양전쟁’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지만 교양은 변화한다. 일본에서는 70년대에 지식과 교양이 대중화하는 일명 ‘대중사회’로 진입한 뒤 더 이상 교양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진학률이 높아지면서 교양이라는 게 의미가 없어졌다. 이러한 패러다임 변화는 교양이 대학에서 어떻게 교육되어 왔는가를 보면 이해하기 쉽다. ‘교양주의’ 등장 이후 거의 6,70년 간 지속된 형태다.

 

“<서양음악의 이해> 라는 과목을 들었다면 시험을 어떻게 봤죠? 음악 짧게 들려주고 누구의 무슨 곡인지 알아맞히는 식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교양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딱 제시간에, 1분 안에 제목과 작곡가를 알아 맞히는 게 교양이라면 자기 자신을 위한 교양이 아니라 상대방의 질문에 응답하기 위한 교양이지요.”

 

대학 내에서도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이 90년대에 일어났다. ‘문학연구’에서 ‘문화연구’로 전환한 것이다. 이를 서구에서는 ‘교양전쟁(culture war)’이라 불렀다. 이는 대학에서 무엇을 교양으로 가르칠 것인가, 그리고 서양문명사, 서양문학사를 강의할 때 어떤 작품을 가르칠 것인가의 문제였다. 정전(canon), 곧 문학의 필수 작품 리스트에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와 같은 사조들이 비판적으로 ‘도전’하면서, 기존 정전 리스트에 지속적으로 개편이 일어난다. ‘교양’에 대한 패권 다툼이 일어난 것이다.

 

 

 

‘곁다리 인문학’의 균형감각

“교양은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역동적인 장입니다. 권력 엘리트와 부르주아의 부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지요. 고전 텍스트를 읽더라도 이런 것을 인식하고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교수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인문교양 강의, 서평쓰기 활동 등을 '곁다리 인문학’이라 표현했다. 인문학 옆에 있으되 어깃장을 놓고 브레이크를 거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인문학 전도사지만 인문학을 욕하기도 하는 그는 교양에 대해서도 비슷한 균형감을 강조했다.

 

“교양을 알고 습득하는 것은 좋지만 역사적인 맥락에서 가져온 부정적 기능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게 중요합니다.”

 

11. 12. 11.


댓글(3) 먼댓글(0) 좋아요(6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12-11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1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꾸때리다 2011-12-13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왜 저렇게 잘생기신 걸까....
 

이번주 주간경향(954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검찰 문제가 계속 불거져나와서 <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오월의봄, 2011)를 다룰 수밖에 없었다. 참여정부의 미완의 개혁이 다음 정부에서는 완수되기를 기대해본다. 대한민국 검찰 문제와 관련해서는 황창화의 <피고인 한명숙과 대한민국 검찰>(위즈덤하우스, 2011), 그리고 문준영의 <법원과 검찰의 탄생>(역사비평사, 2010)을 더 참고할 수 있겠다...

   

주간경향(11. 12. 13) 미완의 검찰개혁, 답은 민주주의다

스폰서 검사, 그랜저 검사에 이어서 벤츠 검사까지 등장했다. 대한민국 검찰을 둘러싼 스캔들이 비뚤어진 관행과 일부 검사들의 부적절한 처신에서 비롯된 일이라면 문제는 사소하다. 아마도 내부의 시각이 그런 듯싶다. 김준규 전 검찰총장이 비난여론에 맞서 “검찰만큼 깨끗한 데를 어디서 찾겠습니까?”라고 대꾸한 것이 방증이다. 하지만 외부에서 보는 시각은 좀 다르다. 수많은 비리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2001년부터 2010년 8월까지 해임된 검사가 단 1명, 면직된 검사가 3명에 불과한 현실은 그 자체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해준다. 검찰 스스로가 자기개혁에 나설 리 없으니 비판과 개혁은 바깥의 몫이다. 검찰을 생각하는 일도 국민의 몫이다. 최소한 우리가 민주공화국에 산다면 말이다.  

<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오월의봄)는 검찰개혁 문제를 다룬 자세한 현황 보고서이자 가이드북이다. ‘무소불위의 권력 검찰의 본질을 비판’하고 더 나아가 개혁의 청사진을 그린다. 참여정부에서 사법개혁과 검찰개혁에 관여했던 두 저자가 대한민국 검찰의 문제점이 무엇이고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를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면밀하게 기술하고 있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저자들이 먼저 짚는 것은 검찰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이미 오래된 현상’이다. 체제유지를 위한 합법적인 물리력의 핵심으로서 검찰은 그간에 체제와 권력 유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지대한 공로일까? 문제는 이러한 검찰의 기원이 일제하의 사법시스템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데 있다. 당시 식민지 통치의 핵심이 검찰이어서 식민지사법은 ‘검찰사법’이라 불렸다. “철저한 국가우선주의와 전체주의, 검찰의 강력한 권한, 경찰의 인권탄압, 법원과 검찰의 일체화, 관료제에 의해 지배받는 적은 수의 강압적인 판사와 검사, 피의자‧피고인의 무권리 상태, 극소수의 변호사와 미미한 변호활동, 남발하는 고문과 가혹행위 등”이 일제하 형사절차의 특징이었다. 이러한 식민사법을 청산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 대한민국의 형사사법이다.  

물론 인적 청산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많이 알려진 대로 해방이후 사법부의 수장은 대부분 식민지 시절 판검사를 지낸 친일파가 차지했다. 비근한 예로 일제하에서 검사를 했던 이호라는 인물은 해방이후에도 출세 가도를 달려서 법무부 장관과 주일대사를 역임하고 1980년 신군부 쿠데타 이후에는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장까지 지냈다. 일제에 부역하던 인물들이 해방이후에도 독재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1958년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을 전격 체포하여 기소한 것은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정치검찰’이 형사절차를 동원한 대표적 사례다.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또한 경찰과 검찰, 법원이 정치권력과 야합하여 얼마나 야비하게 사건을 왜곡‧조작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사례다. 준사법기관 내지는 인권옹호기관이라는 검찰의 자임은 그렇듯 한국적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국민을 위한 검찰이 아니라 권력을 위한 검찰이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참여정부는 역사상 처음으로 검찰개혁을 시도했다. 저자들은 1기와 2기에 걸쳐 이루어진 검찰개혁의 과정과 성과, 그리고 한계를 자세히 살피는데,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확실히 보장하고 대검 공안부를 축소함과 동시에 위상을 낮춘 것 등이 성과로 지목된다. 그럼에도 참여정부의 검찰개혁은 실패했거나 최소한 미흡했다.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중립을 넘어서 검찰개혁의 핵심과제인 민주적 통제 장치를 마련하지 못한 데 있다. 곧 검찰의 권력을 분산하고 견제와 감시 시스템을 마련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구체적으론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 설치, 검경수사권 조정, 법무부의 문민화, 과거사 정리 등이 달성하지 못한 과제들이다. 따라서 검찰개혁은 성공과 실패가 혼재하고 있다. 실패한 개혁이라기보다는 미완의 개혁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무릇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하며 모든 개혁은 ‘계속 개혁’이라는 소회는 그래서 나온다. 물론 계속 개혁은 민주정부만이 추진하고 완결지을 수 있는 과제이다. 검찰개혁을 위해서라도 민주주의가 더 진전되고 강화돼야 한다는 게 저자들과 함께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결론이다

11. 12. 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