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962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백낙청 선생의 <2013년체제 만들기>(창비, 2013)을 읽고 요지를 간추린 것이다. 2013년체제의 핵심이 분단체제 극복이란 점에서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창비, 1994)와 <흔들리는 분단체제>(창비, 1998),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창비, 2009)를 잇는 책이면서 현 정세에 대한 긴급한 제언이기도 하다(표지의 이미지로는 '기원'에 가깝다).

 

 

 

주간경향(12. 02. 14) 시민 참여와 남북연합 건설 ‘포용정책 2.0’

 

총선과 대선 일정을 앞두고 있는 올해는 모두의 예상대로 한국 사회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전망이다. MB정권 4년을 보낸 국민의 선택이 과연 무엇일지 기대와 바람이 클 수밖에 없다. 문학평론가이자 시민사회 원로로서 백낙청 선생은 <2013년체제 만들기>에서 그 기대의 최대치를 ‘2013년체제’란 말에 담았다. 낡은 체제를 청산하고 한반도에서 새로운 체제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바람의 표현이다. 지난 19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성취한 한국 사회의 전환을 ‘87년체제’라고 부른 것에 견주면 ‘2012년체제’란 말이 더 타당할 듯싶은데, 어째서 ‘2013년체제’인가? 거기엔 한국 현대사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이 반영돼 있다.

 

저자의 지론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분단체제론’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다. 남과 북의 기득권세력은 현재의 분단상황을 이용해 이득을 챙기고 대다수 남쪽의 국민과 북쪽의 인민은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사회구조가 ‘분단체제’다. 분단체제론의 지향점은 당연히 분단체제의 극복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87년체제의 성취는 미흡하다. 군사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진전시켰지만 남한사회에 한정된 변화였다. 물론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고 2000년에는 6·15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면서 남북관계가 부분적으로 개선됐다. 하지만 87년체제는 한반도의 온전한 평화체제 구축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분단체제, 곧 ‘53년체제’를 근본적으로 허물지는 못한 것이다. 그렇듯 53년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후천성 분단인식 결핍증후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민주화나 민주주의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고, 이명박 정부의 역주행 또한 말기 국면에 도달한 87년체제의 문제점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결과라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따라서 과제는 53년체제의 혁파이고 분단체제의 획기적인 개선이다.

 

분단체제 극복이 새로운 체제 성립의 관건이기에 2012년 총선과 대선 결과가 곧바로 새로운 체제의 수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총선에서의 승리와 대선에서의 정권교체가 남한사회 민주세력의 당면한 과제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2013년체제 설계에 다양한 항목들이 포함될 수 있지만 핵심은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이다. 저자가 2013년체제의 최우선적 과제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일이라고 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대북정책에서의 변화다. 백낙청은 6·15 공동선언을 ‘포용정책 1.0’이라고 할 때, 이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포용정책 2.0’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2.0버전의 핵심은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시민 참여의 획기적인 강화와 남북연합 건설이다. 남북연합의 경우 이미 2000년에 남북 정상이 중간과정의 국가연합 형태를 거쳐서 통일로 간다는 점에 합의했다. 현실적으론 EU보다 낮은 단계의 느슨한 연합제를 구상할 수밖에 없지만 일단 연합제가 이루어지면 통일은 역전 불가능한 과정으로 접어들 수 있으리라는 것이 저자의 기대다. 그리고 그러한 점진적 통일과정에 들어서게 되면 일반시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민간기업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시민사회가 남북화해와 교류에 직접 나서서 남북의 평화적이고 시민참여적인 재통합에 걸맞은 준비를 해나갈 수 있게 되며, 이를 위해서 시민참여형 통일과정을 수용하는 국정운영체제가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제안이다.

 

2013년체제론의 개요가 그러하다면, 왜 ‘2012년체제’는 성립하기 어려운지 알 수 있다. 당장 이명박 정부 임기 안에는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천안함사건 이후 2010년 5월 24일 이명박 대통령은 남북교류를 전면중단한다고 선포했고, 이 조치는 아직 철회되지 않았다. 북이 정말로 천안함을 공격했다면 5·24조치는 나름대로 정당성을 갖는다. 하지만 충분한 근거 없이, 혹은 근거를 조작해가면서 그런 조치를 취했다면 국민적 심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저자는 천안함사건의 진실규명이 2013년체제의 핵심에 자리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3년체제 만들기’는 ‘우리 시대의 진실’을 규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12. 02. 09.

 

 

 

P.S. 어제 컴퓨터를 교체한 이후 처음 올리는 페이퍼이다. 모니터를 두 대를 놓고 쓰게 돼 뭔가 편리하긴 한데, 그래도 적응해야 할 구석이 많다! <2013년체제 만들기>와 함께 읽은 건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의 <2013년 이후>(백산서당, 2012)이다. 앞부분을 읽었는데, 386세대의 자기비판과 '성찰적 열정' 혹은 '열정적 성찰'(분명 '차분한 성찰'은 아니다)의 최대치를 보여주지 않나 싶다. 미적지근한 관망적 성찰이나 두루뭉술한 이론에 염증을 느끼는 독자라면 일독해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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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의 알림기사를 옮긴다(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130125058). KT&G 상상마당 아카데미와 <프레시안>이 함께하는 인문학 도서 저자와의 만남 '어쿠스틱 인문학'에 초청돼 내주 목요일(2월 9일) 저녁 자음과모음 신사옥에서 행사를 갖는다. 이번주부터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 지젝 강의도 시작한 터라 2월 일정이 내내 지젝으로 채워지는 느낌이다. 여하튼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프레시안 알림(12. 01. 31) '어쿠스틱 인문학', 로쟈 지젝과 만난다!

 

'지금 서양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그리고 지젝을 읽기 위한 충실한 안내자 '로쟈'(이현우 한림대학교 연구교수)와의 만남. KT&G 상상마당 아카데미와 <프레시안>이 함께하는 인문학 도서 저자와의 만남 '어쿠스틱 인문학'은 다섯 번째 책으로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펴냄)을 선정했다. 저자 '로쟈' 이현우 교수는 오는 2월 9일 자음과모음 신사옥(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396-33번지)에서 독자와의 만남을 가질 계획이다. 이번 행사의 사회는 지난 네 번의 '어쿠스틱 인문학'을 진행해 온 도서평론가 이권우 씨가 맡는다.

 

 

이현우 교수는 그 동안 인터넷 블로그 '저공 비행'을 통해 문학, 예술,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갖고 글을 써온 학자이자 비평가다. 그의 블로그 필명인 '로쟈'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블로그를 비롯하여 여러 매체에 지젝 철학에 관련된 글을 꾸준히 써왔는데,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은 그 작업을 엮어 만든 첫 결과물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9·11테러와 이후 달라진 세계 질서에 대한 통찰과 비전을 담은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김희진·이현우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를 중심으로 지젝 철학 전반을 가로지른다.

 

 

미국의 심장부를 상징하는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공격을 받은 2001년 9월 11일, 우리는 믿기지 않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일까?"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젝의 설명은 어떨까?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는 바로 9·11 이후 시대에 대한 분석이고 성찰이며,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은 그 문제와 직면하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저자는 책의 서문에서 "이대로는 곤란하다!"는 절박함에 더하여 "제대로 생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라면 지젝을 읽는 것이 좋다고 권한다.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건넨 '빨간 약'을 받아들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혹은 그 빨간 약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이번 '어쿠스틱 인문학'에서 지젝이 던지는 질문의 단초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참가 신청은 2월 8일 수요일까지 KT&G 상상마당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다. 접수 완료 후 담당자에게 이메일(triumph7427@ssmadang.co.kr)을 보내 '로쟈에게 궁금한 점, 듣고 싶은 이야기, 책을 읽으며 궁금했던 점'을 보내면 선착순 10명에게 본서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을 증정한다. (책 수령은 상상마당 아카데미 현장에서만 가능하다.) 또한 9일 참가자 전원에게는 음료와 다과가 제공될 예정이다.

Information

어쿠스틱 인문학 5회,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로쟈(이현우)와의 만남
일시: 2012년 2월 9일(목) 19:30 ~ 21:30 / 참가비: 10,000원
장소: 출판사 자음과모음 신사옥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396-33)(*합정역 부근)
참가신청: 상상마당 홈페이지

12. 02.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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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플라톤의 <향연> 가운데 한 대목을 읽고 있다. <향연>에 대해서는 강의를 진행중이어서 여러 종의 번역본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내가 갖고 있는 것만 해도 7-8종이다. 활달한 대화체의 느낌은 주지 않지만 표준적인 건 정암학당 전집판의 <향연>(이제이북스, 2010)이다.

 

 

 

한겨레(12. 01. 21) 고대 그리스 ‘최고의 사랑’은…동성애라네

 

‘사랑에 관한 철학’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책, 바로 플라톤의 <향연>이다. 플라톤의 작품 가운데 <국가>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책이라고도 하지만, <국가>의 분량을 고려하면 믿기진 않는다. 번역종수로는 <소크라테스의 변론> 다음으로 많은 것이 <향연>이다. 이래저래 플라톤의 독자라면 두번째로 많이 손에 들 법한 책이다.

<향연>은 아가톤의 집에서 열린 향연 자리에서 일곱명의 연사가 사랑의 신 에로스를 각각 찬양하는 내용으로 돼 있다. 이야기의 정점은 소크라테스의 연설이지만 다른 이야기들도 흥미롭다. 가장 먼저 말문을 연 파이드로스만 봐도 그렇다. 다른 신들과 달리 에로스에 대해선 변변한 찬가조차 없다는 게 평소 그의 불만이었다. 이야기의 주제를 사랑으로 하자는 제안은 그의 발상에서 비롯됐기에 그는 향연에서 ‘이야기의 아버지’라고 호명된다.

파이드로스에 따르면 에로스는 카오스(틈)와 가이아(땅)에 이어서 생겨난 가장 오래된 신으로서 “우리에게 있는 최대로 좋은 것들의 원인”이다. ‘최대로 좋은 것’이란 무엇인가. 물론 ‘사랑’인데,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건 특별한 유형의 사랑이었다. “사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고결한 연인을 갖는 것, 그리고 그 연인의 사랑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지 의문이었다네”(박희영 옮김, 문학과지성사)라고 옮길 때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어린 사람에게는, 그것도 아주 어렸을 적부터, 자기를 사랑해주는 쓸 만한 사람을 갖는 것보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쓸 만한 소년 애인을 갖는 것보다 더 크게 좋은 어떤 것이 있을지 나로서는 말할 수 없거든”(강철웅 옮김, 이제이북스)이라고 하면 좀 명확해진다.

파이드로스가 말하는 ‘연인’이나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남자를 가리키며, 그에게 ‘사랑받는 사람’ 역시 남자다. 다만 사랑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보다 나이가 좀 어리기에 ‘소년 애인’이라고 옮겼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사랑하는 사람’은 중년 남자이고, ‘사랑받는 사람’은 미소년이다. 인생에서 최대로 좋은 것이란, 두 남자가 각각 그런 상대를 갖는 것이다. 국가나 군대가 이렇듯 사랑하는 자와 소년 애인으로 구성된다면 아무리 적은 수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을 이길 수 있다는 게 파이드로스의 장담이다. 실제로 테베에서는 남성 커플 150쌍으로 이루어져 혁혁한 공을 세운 ‘신성 부대’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랑의 이상적인 사례가 뜻밖에도 아킬레우스다. 비극시인 아이스퀼로스는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를 사랑하고 있다고, 곧 파트로클로스의 ‘연인’이라고 말하지만 엉뚱한 소리라는 게 파이드로스의 주장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따르면 아킬레우스는 아직 턱에 수염도 나지 않은 젊은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자’(에라스테스)가 될 수 없다. 아킬레우스는 ‘사랑받는 자’이다. 영화 <트로이>에서는 아킬레우스(브래드 핏)가 친구인 파트로클로스보다 연장자로 나오지만 실상은 거꾸로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에로스적 관계에서는 두 가지 ‘소중히 여김’이 있다.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를 소중히 여기는 것과 사랑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를 소중히 여기는 것. 그리스의 신들이 더 높이 평가하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아킬레우스가 자기를 사랑하는 자 파트로클로스의 복수에 나선 것은 그래서 높이 칭송된다고 파이드로스는 말한다. 제법 흥미로운가? 그렇다면 <향연>의 나머지 이야기들에도 귀 기울여볼 수 있겠다. 그리스의 속담을 약간 비틀면, 훌륭한 사람은 초대장이 없이도 향연에 참석할 수 있다.

 

12. 01. 21.

 

P.S. 고대 그리스에선 동성애가 사랑의 모델이었다는 사실은 상식에 속하기에 사실 칼럼의 초점은 다른 곳에 있다.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관계를 정확하게 옮기는 게 중요하다는 점. 이제이북스판에서는 "한데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한 아이스퀼로스는 엉뚱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네"라고 옮겼는데, 원문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해도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를 사랑하고 있다"가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의 에라스테스(사랑하는 자)라는 말이다"라고 각주에 설명돼 있지 않다면 모호하게 읽혔을 것이다. 두 사람은 소위 말해 에로스적 관계이지만 대등하진 않다. 고대 그리스에선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가 엄격하게 구분돼 있었기 때문이다. 수염이 안 난 아킬레우스는 사랑받는 자이기 때문에 '파트로클로스를 사랑하고 있다'고 한 아이스퀼로스는 잘못 말한 것이라는 게  파이드로스의 주장이다.

 

 

 

손에 잡히는 대로 더 살펴보면, 안티쿠스판에서도 그냥 "아이스퀼로스는 아킬레우스가 (...) 파트로클로스를 사랑했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하네"라고만 옮기고 있는데, '사랑했다'는 말의 의미를 설명해주지 않는다면 독자로선 둘의 관계가 헷갈릴 수 있다. 지만지판에서는 "그런데 아이스킬로스가 아킬레우스를 파트로클로스의 연인으로 묘사한 것은 엉뚱한 이야기입니다"라고 옮겼는데, 그래서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연인이 아니다'라고 정리하게 되면 우리말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문예출판사판에서 "그런데 아이스킬로스가 아킬레우스를 파트로클로스의 애인이라고 말한 것은 아주 잘못입니다"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다. 아주 잘못은 아니더라도, 잘못된 번역이라는 생각이다.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니 말이다. 다른 번역본으로 읽을 때도 유의해서 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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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에 실은 '문화와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어제 안팎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마땅한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해 최악으로 보낸 지각원고다. 자기 글을 블로그에 게시하는 건에 대해서는 오늘 오전에 알라딘측에서 회신이 왔다.

저작권법을 조사해보니, 본인이 직접 작성하여 기고한 신문 기사의 경우, 별도의 신문사 허락을 받지 않고도, 자신의 블로그에 전문을 올려도 괜찮다고 합니다.(원고료를 받는다고 해서, 그 저작권이 신문사로 가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저희가 잘 모르고, 로쟈님이 직접 기고하신 글을 브라인드 처리하고 메일을 드린 것 같습니다.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이 경우는 내가 갖고 있던 상식이 법과 상충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여하튼 그래서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들에 대해서는 이 서재에 계속 공개해놓는다.

 

 

 

경향신문(12. 01. 20)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는 나라

 

새해를 맞아 조선사에 관한 책들을 읽고 있다.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을 다시 보자고 제안하는 계승범 교수의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를 읽은 것이 계기다. 알다시피 1392년에 개국한 조선은 200년 뒤인 1592년 최대의 국난을 맞이한다. 임진왜란이다. 일본의 갑작스러운 침입으로 시작된 전쟁이지만 아무런 대응태세도 갖추지 못한 조선의 문제는 무엇이었던가. 국사시간에 미처 배우지 못한, 혹시나 배웠더라도 지금은 다 잊은 조선의 군역제에 대해서 다시 배운다.

조선 초인 15세기만 하더라도 군역은 의무인 동시에 권리였다고 한다. 군역에 종사하는 장정들에게 국가에서 일정한 반대급부를 지급했기 때문이다. 일부 토지도 지급하고 보인(保人)도 붙여서 군역에 따른 경비를 지원했다. 이 때문에 군역의 의무를 지는 군호(軍戶)는 대개 양반이거나 경제력이 있는 상민들이었고, 경제력이 따르지 않는 상민은 보인으로만 편성됐다. 즉 아무나 군역에 종사할 수 있었던 게 아니라 자격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16세기에 접어들면서 군역은 권리는 줄고 의무만 느는 쪽으로 변질됐다. 의무만 있다 보니 자연스레 군역 기피 현상이 나타났다. 그래서 16세기 중반에는 15만 군호가 대부분 하층민으로만 채워졌다. 양반이나 상층 상민은 다 빠져나간 것이다. 그렇듯 군역이 문란해지니 국력이 취약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임진왜란 전 16세기 말에 이르면 군역 대상자의 총수가 4만7820명이고, 그중 정예병은 7920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정도의 관군밖에 없었으니 약 20만명에 이르는 일본군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부산에 상륙한 지 18일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평양까지 치고 올라왔던 사실은 우리가 잘 아는 바다.

놀라운 것은 초유의 국난을 경험한 뒤에도 양반의 군역은 부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시금 양반도 군복무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선비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물론 무엇이 문제인지는 다들 알고 있었다. 사족(士族)도 군역을 지고 노비는 농민으로 전환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지배층 선비들은 자기들의 특권(군역면제)과 재산(노비)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순신의 활약으로 비록 7년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하지만 조선의 국방은 개선된 게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조선이 왜란과 호란을 거친 이후에 200년이 넘게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청제국의 질서 속에 편입됐기 때문이라는 평가다. 후일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이후에 조선의 주권이 일본에 넘어가기까지는 불과 십수년이 걸렸을 뿐이다.

이러한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계승범 교수는 “선비가 건설한 조선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전혀 없는 나라였다”고 꼬집는다. 더불어 오늘날에도 한국 사회의 소위 ‘지도층’ 자제들의 병역면제 비율이 전체 평균보다 다섯 배나 높다는 통계에 대한 언급도 잊지 않는다. 실상 출범 초부터 유난히 병역면제자가 많았던 이명박 정부가 임기 마지막 해에 접어들면서 각종 비리 게이트에 연루되고 있다.

그중 외교통상부와 총리실 직원들이 카메룬의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권을 등에 업은 씨앤케이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해 막대한 시세차익을 얻었다는 ‘다이아 게이트’는 현 정부는 물론 대한민국 엘리트들의 참담한 도덕 수준을 다시금 직시하도록 해준다. ‘우리가 아는 정부는 없다’고 해야 할까.

권력을 가진 자들이 특권만을 고집하고 사익에만 열을 올리는 세태는 과연 언제쯤 사라질 수 있을까.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00년도 더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는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임진년 한 해 동안 고민해볼 일이다.

 

12. 01. 20.

 

 

 

P.S. 계승범의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는 조선사 전체를 다시 보는 신랄한 문제의식과 함께 유익한 시사점을 던져주는 책이다('어쨌든'이란 말이 너무 자주 등장하는 게 옥에 티다). 그래서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푸른역사, 2009)와 <정지된 시간>(서강대출판부, 2011)도 읽어볼 생각을 하게 됐다.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와 같이 읽은 책은 김연수의 <조선 지식인의 위선>(앨피, 2011)이다. 사림의 등장 이후 조선 후기사에 대한 서술로 명쾌하다. 학계의 '주류적인' 시각이 궁금해서 읽고 있는 책은 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의 <조선시대 당쟁사1,2>(아름다운날, 2007)이다. 이이화, 강만길, 이덕일의 책들도 좋은 참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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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60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내주에 연휴가 껴서 합본호로 나왔다. 다룬 책은 김용진의 <그들은 아는, 우리만 모르는>(개마고원, 2012). '위키리크스가 발가벗긴 대한민국의 알몸'이란 부제가 내용을 말해주며 이미 마이리스트로 만들어놓은 바 있다. 결코 행복한 독서경험은 아니었지만, '의무감'으로 읽은 책이다. 우리가 더 많이 알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저들 또한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주간경향(12. 01. 31) 위키리크스가 벗긴 대한민국의 알몸

 

“역사가에게는 꿈이고 외교관에게는 악몽이다.” 위키리크스의 폭로에 대한 영국 역사학자의 평이다. 2010년 4월 5일 미군 아파치 헬기가 아프간 민간인을 살상한 장면이 담긴 비디오를 공개함으로써 시작된 위키리크스의 충격적인 폭로는 그해 가을 미국 국무부가 해외공관과 주고받은 비밀문서 공개를 통해 절정에 도달했다. 이 외교문서 전문 25만1287건이 2011년 9월 1일까지 모두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졌다. 특정기간에 생산된 미국 외교전문에 한정된 것이라도 거의 완벽한 정보 민주화를 이뤘다는 평가다. 위키리크스가 제공한 이 ‘정보 대홍수’가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는 어떤 정보를 건질 수 있을까.


막상 공개는 됐지만 너무도 방대한 분량인지라 어떤 정보가 얼마만큼 공개돼 있는지 파악하는 데만도 전문가적 손길이 필요한데, KBS의 탐사보도팀장을 역임한 김용진 기자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들은 아는, 우리만 모르는>(개마고원, 2012)은 미국 외교전문에 나타난 대한민국의 실상과 치부를 고스란히 까발려주는 그 탐사 보고서다. 먼저 현황이다. 위키리크스 공개문서 가운데 ‘KOREA’라는 단어가 한번이라도 들어간 문서는 모두 1만4165건이고, 주한 미대사관의 전문은 주로 2006년부터 2011년 사이에 작성된 1980건이다. 미 국무부의 부처간 정보공유 네트워크에 올라온 문서였는지라 이 1980건에 1급비밀은 들어 있지 않지만 2급비밀 123건, 3급비밀 971건이 포함돼 있다.   


이미 일부내용은 국내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촛불시위 당시 대통령의 형 이상득 의원이 미국대사관측에 도움을 청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은 뼛속까지 친미, 친일”이라고 말한 대목이다. 미국 쪽의 시각은 어땠을까? 2008년 2월 당시 버시바우 대사가 방한을 앞둔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본능적으로 미국에 이끌리는 대통령과 행정부”란 표현이 등장한다. 다른 문서에서도 “청와대에 있는 친미 대통령”이란 문구처럼 ‘친미적인’이란 수식어가 여러 차례 나오며, 심지어는 “매우 친미적인 대통령”이라고도 지칭된다. 저자의 검색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전 세계 미국 대사관에서 작성한 수십만 건의 외교전문에서 “매우 친미적인 대통령”이라고 표현된 유일한 이가 이명박이다. 외교수사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최고의 대우를 받은 셈인데, 물론 이런 호의적인 평가가 근거 없이 나온 것은 아니다. 2008년 때는 쇠고기 시장을 개방했고, 2011년 오바마 대통령의 환대를 받고 와서는 한미FTA를 날치기로 강행 처리했다. 미국으로선 “매우 친미적인 대통령”에 대한 ‘융숭한’ 대접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한국의 대통령과 정부 관료들의 친미적 태도가 혹 우리의 국익을 고려한 의도적인 전략의 산물은 아닐까. 국민으로선 나라의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그렇게 믿고 싶지만, 한미동맹의 파트너인 미국의 시각과 판단은 냉정하다. MB에 대한 지지가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고 보면서 2009년 11월 스티븐스 대사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이런 전문을 보냈다. “이 대통령은 본능적으로 미국과 관련된 거의 모든 이슈에 대해서 미국을 지지하려고 하지만, 동시에 미국의 요구를 단순히 따르지는 않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려 한다.” 좀 특이한가? 미국대사관의 판단도 그런 듯하다. 2008년 SMA(한미방위비분담협정)에 앞서 미국 국방장관에게 보낸 정세보고서에서는 “우리는 미국의 이익에 너무 부응하는 것처럼 비쳐지는 것을 정치적으로 겁내는 친미 정권을 상대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 정부가 미국 입장에 우호적이긴 하지만 겉으로는 그렇게 내비치길 원하지 않으므로 그런 사정을 잘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의 협상 대표들이 협상장에서는 미국의 압력에 대해서 맞서는 듯한 포즈를 취하지만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쇼를 위한 것”이란 점을 미국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한미FTA 재협상 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을 때에도 한국 정부의 공식입장은 ‘재협상 불가’였지만 그 이면에서는 지나치게 양보했다는 인상만 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게 한국 정부의 주문이었다. 이런 것이 위키리크스가 발가벗긴 ‘대한민국의 알몸’이라면 악몽은 외교관들만의 것이 아니다.

12. 01. 18.

 

 

 

P.S. 위키리크스 관련서로 더 참고하기 위해 <투명성의 시대>(샘터사, 2011)와 <위키리크스, 비밀의 종말>(북폴리오, 2011)을 더 구입했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는 프랑스의 사르코지를 지칭하는 <부자들의 대통령>(프리뷰, 2012)이 '매우 친미적인 대통령'을 이해하는 데 요긴한 책이 아닌가 싶다.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2007년 프랑스와 한국에 부자들의 대통령이 탄생했다. 사르코지와 이명박. 두 사람은 후보시절 자국의 국민들에게 부자가 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이 부자가 되기 위해 거쳐 간 길로 국민들을 인도해 줄지 모른다는 기대감. 그들의 삶의 맥락이 지니는 유난스런 박진감은 사람들로 하여금 도박을 걸게 했다. 그러나 그들이 한 약속 속에 주어가 분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부자였던 극소수의 사람들이 더 큰 부자가 되었지만 나머지 사람들의 상황은 심각하게 악화되어 간 것이다.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프랑스와 이런 쪽으로라도 어깨를 나란히 하다니 자부심을 가질 만한가?! 다시 똑같이 대선을 치르게 되는 올해 두 나라 국민의 선택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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