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964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강양구, 박성민의 <정치의 몰락>(민음사, 2012)이 글감이다. 곧 다가올 선거철을 맞아 베테랑 정치 컨설턴트가 보는 '정치판'이 어떤 것인지 귀동냥을 해봐도 좋겠다. 개인적으론 백낙청 교수의 <2013년체제 만들기>(창비, 2012) 연장선상에서 읽은 책인데, 박성민의 '75퍼센트 민주주의'는 분류하자면 '2012년체제 만들기'에 해당한다.

 

 

 

주간경향(12. 02. 22) ‘75% 민주주의’로의 변화

 

프레시안의 강양구 기자가 묻고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이 답한 <정치의 몰락>은 비슷한 형식의 책 두 권을 먼저 생각나게 한다.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한 <진보집권플랜>(오마이북)과 지승호가 묻고 엮은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푸른숲)가 그것이다. 앞에 나온 두 권이 뚜렷하게 진보집권과 진보정치운동을 지향한다면 <정치의 몰락>은 좀 더 객관적으로 2012년 한국정치를 진단하고 전망한다. 한국정치,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정치의 몰락’이라는 제목과 ‘누가 정치를 죽였는가?’라고 묻는 서문은 사실 책의 핵심을 잘 짚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 저자가 나눈 대화의 얼개는 오히려 ‘보수시대의 종언과 새로운 권력의 탄생’이란 부제에서 더 잘 드러난다. 즉 ‘종언과 탄생’이 ‘한국의 대표 정치 컨설턴트’가 지금의 한국정치를 보는 프레임이다. 하지만 그 종언과 탄생 사이에는 약간의 간극이 있다. 한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시대가 바로 도래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조금 희망적으로 보자면 지금은 새로운 시대의 ‘전야’이다. 지난해 10월 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원순 후보가 당선된 것은 어쩌면 한국정치사의 ‘변곡점’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지난 60여년간 유지되어온 보수 우위의 시대가 끝나고 보수와 진보가 전략적으로 대치하는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는 신호탄”일 수 있다. 물론 부정적으로 보자면 ‘진정한 어둠’을 아직 남겨놓은 ‘시대의 마지막 밤’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갈래 길의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이 ‘우리’는 세대적 의의를 갖는 우리다.

 

박성민은 한국 현대사의 60년을 20년 단위의 시대적 흐름으로 분할하여 간추린다. 먼저 1950~1960년대는 ‘생존에 대한 회의’가 지배한 시대였다.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고 이산가족이 됐다. 살아남는 것만이 삶의 목표가 된 ‘실존의 시대’였기에 모두가 의지할 곳을 찾았고, 한국 교회는 유례없이 성장했다.

 

1970~1980년대는 ‘국가권력에 대한 회의’가 지배한 시대였다. 독재권력에 대한 항거가 결국엔 1987년 6월항쟁을 끌어낸 ‘민주의 시대’였다. 냉전의 종식과 함께 시작된 1990~2000년대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연대였고, ‘진보에 대한 회의’가 시대정신를 잠식한 ‘자유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 한국사회의 주도권은 ‘안보 보수’에서 ‘시장 보수’로 넘어갔고, 그 정점이 2007년 CEO 출신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이다. 그러나 2008년 전 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는 ‘시장에 대한 회의’를 촉발했다. ‘정의’가 사회적 화두로 등장했고, 정부까지 나서서 ‘공정사회’를 국정지표로 내세우게 됐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공화의 시대’라는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도달했다. 혼자만의 자유와 부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연대와 공동체의 안녕에도 관심을 갖게 된 시대다. 우리는 이 새로운 시대정신에 걸맞은 정치적 주체로 재탄생할 수 있을까.

 

새로운 주체의 탄생과 나란히 가야 하는 것은 정치제도의 변화다. 정치의 본질이란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고, 또 “촛불보다는 투표가 힘이 세고, 투표보다는 제도가 힘이 세다”고 믿는 저자는 갈등을 조정하는 가장 유력한 방식이 대화와 타협이라고 본다. 그런데 51%만을 확보하면 모든 것을 장악하는 다수결 방식은 한국사회에서 동의와 승복을 얻어내기 어렵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75% 민주주의’이다.

 

한국사회는 적어도 75%가 동의하는 일에는 승복하는 문화를 갖고 있기에 정치제도 또한 그런 방향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이다. 결선투표제를 도입하여 과반수의 지지를 받는 대통령이 탄생하게끔 하고 선거제를 현행 소선거구제에서 중대선구제로 바꾸는 것이 75% 민주주의의 실현방안이다. 또한 국회의원의 임기도 아예 2년으로 줄여서 선거를 더 자주 치르는 것이 한국정치를 더욱 역동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베테랑 정치 컨설턴트가 새로운 권력의 탄생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가역적(非可逆的) 시스템으로서 새로운 제도의 창출이다.

 

12. 0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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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이번에 다룬 건 <시경>이다. 번역서와 관련서를 관심을 갖고 모으고 있는데 분량이 분량인지라 천천히 읽을 작정이다. 관련서 가운데는 정약용의 <역주 시경강의>(사암, 2008)도 있다. 5권짜리인데, 두껍고 비싼 책이다. 결정적으론 2권만 품절된 상태다(그래서 보류중이다). 수집가에겐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책이니 아쉽다... 

 

 

 

한겨레(12. 02. 18) 시경이 고답적이란 건 편견이었네

 

올해의 독서목표 중 하나는 <시경>을 읽는 것이다. 중문학은 아닐지언정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적잖은 시집을 읽었지만 <시경>은 한번도 읽어볼 생각을 못했다. 돌이켜 보면 좀 기이한 노릇인데, 아마도 ‘경’(經)이란 말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삼경’으로 묶이는 <서경>과 <역경> 또한 손에 들지 않았던 걸 보아도 그렇다. ‘사서삼경’이란 말이 풍기는 고답적 엄숙주의나 권위주의를 대학 새내기 시절엔 좋아하지 않았다.

<시경>이 그렇게 뻣뻣한 책이 아니라 ‘노래모음집’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좀 뒤늦게 알았다. <시경>에 대한 인상이 조금 누그러졌지만 그래도 ‘중국시라면 <당시>만 하겠는가’란 생각으로 버텼다. 신영복의 <강의>에서도 ‘동양고전의 입문’이라 할 만큼 중요한 것이 <시경>이라고 소개됐지만 ‘고전이라면 <논어>에 비하겠는가’라고 이유를 댔다. 그러던 차에 뜻밖에도 <시경>에 대한 관심이 샘솟은 것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읽으면서다. 서양 최고(最古)의 서사시를 읽은 참에 세계 최고(最古)의 시도 읽어봐야겠다는 의욕을 갖게 돼서다. 중국 주나라 초기인 기원전 12세기 말부터 춘추시대 중엽인 기원 6세기까지 약 600년간의 노래를 300여편 모은 책이니 생각하면 경이로운 ‘문화유산’이다. 우리에겐 가장 오래된 서정시로 전하는 유리왕의 ‘황조가’가 기원전 17년에 지어진 것과 비교해보아도 그렇다.

그렇다고 오래된 시라는 의의만 갖는 건 아니다. 가령 <시경>의 첫 시 ‘관저’(關雎)에 나오는 ‘요조숙녀’란 말은 아직도 친숙하지 않은가. ‘관저’는 시의 첫 구절 ‘관관저구’(關關雎鳩)의 준말로 ‘저구’는 ‘징경이’ 혹은 ‘물수리’를 가리키고, ‘관관’은 그 암수가 서로를 부르는 소리, 곧 의성어이다. 실제로 물수리의 울음소리가 어떤지 모르기에 번역본마다 ‘구욱구욱’ ‘끼룩기룩’ ‘까옥가옥’ 등으로 옮겼다. 그렇게 서로 ‘짝을 찾는 물수리’에 자신의 처지를 견준 것이 이 시의 기본 발상법이다. 5연으로 이루어진 이 시에서 요조숙녀란 말은 네 번이나 등장하며, “요조숙녀(窈窕淑女) 군자호구(君子好逑)”가 첫 용례다. 여러 번역본에서 이 구절은 “아리따운 고운 아가씨는 군자의 좋은 배필일세”(김학주), “그윽하고 아리따운 요조숙녀는 일편단심 기다리는 이 몸의 배필”(이기동) “아리따운 아가씨는 사나이의 좋은 배필”(기세춘·신영복), “하늘하늘 그윽한 저 새악시 멋진 사내의 좋은 배필”(김용옥) 등으로 옮겨졌다. ‘군자’란 말이 쓰이긴 했지만 공자 이전에는 그냥 ‘사내’를 뜻했다고 한다. 군자를 주나라 문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식의 전통적인 해석은 후대 유학자들이 왜곡한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평가다. 원래는 그냥 배필을 찾는 사내의 애틋한 마음을 노래한 시였다는 것이다.

시의 갈래로 보자면 ‘관저’는 <시경>의 많은 시와 마찬가지로 서정시이자 연애시이다. 하지만 미혼의 남자가 여자를 연모하는 모습을 그린 시로는 이채로운데, 이런 사랑의 표현이 뒷시대에는 계승되지 않았다고 한다.

미혼남녀의 사랑을 읊은 시는 줄어든 반면에 부부의 정을 노래한 시는 계속 이어졌는데, 이 역시 유학이 관학으로 자리잡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장징의 <사랑의 중국문명사>에 따르면, ‘연애’라는 단어 자체가 송나라 때 처음 등장한다. 하지만 이때도 연애는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심과 배려를 뜻하는 말이었다. 현대 중국어에서 남녀간의 사랑을 뜻하는 ‘롄아이’(戀愛)는 일본에서 역수입된 단어라고 하니 ‘요조숙녀’에 대한 그리움은 가장 오래된 그리움이면서 현대적인 그리움이기도 하다.

 

12. 02. 17.

 

 

 

P.S. 김용옥의 '관저' 번역과 풀이는 <논어한글역주2>(통나무, 2008)에 나온다. 장징의 책은 <사랑의 중국문명사>(이학사, 2004) 외 <근대 중국과 연애의 발견>(소나무, 2007)이 더 번역돼 있다.

 

 

그밖에 고형렬 시인이 쓴 <아주 오래된 시와 사랑 이야기>(보림, 2005)는 청소년을 위한 시경 풀이이고, 유병례의 <톡톡 시경 본색>(문, 2011)은 대학생을 위한 책인 듯싶은데 평이한 수준이다. 한흥섭의 <공자, 불륜을 노래하다>(사문난적, 2011)도 '물수리' 편부터 시작해 <시경>에서 49편을 골라 풀이하고 있다. 제목은 자극적이지만 이 책 역시 내용은 평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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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낮에 몇가지 아이템을 두고 고심하다가 영화 <공룡시대> 이야기를 단서로 삼아서 자유주의적 문화주의에 대해 적었다. 아이가 내일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러간다는 말에 엊그제 한겨레문화센터의 지젝 강의에서 언급한 내용이 떠올라서다.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자음과모음, 2011)에 <공룡시대>의 이데올로기적 내용에 대한 비판이 들어 있다.  

 

 

 

경향신문(12. 02. 17) [문화와 세상]수상한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

 

종업식을 하고 봄방학에 들어간 초등학생 딸아이의 첫 일정이 3D 애니메이션 <점박이: 한반도의 공룡>을 보러가는 거라고 한다. 토종 애니메이션으로 흥행에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이 영화는 교육성과 오락성을 동시에 만족시킨 작품이라니 무얼 더 바라겠는가.

 



물론 어떤 교육성인지 따지고 들면 문제는 조금 복잡해질 수도 있다. 이젠 옛날 영화라고 해야겠지만 스필버그 감독이 기획한 <공룡시대>(1988) 같은 경우가 그렇다. 어미를 잃은 새끼 공룡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가는 여정을 담은 애니메이션이다. 한데 이 영화를 두고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패권주의적인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 이데올로기’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좀 거창한가? 패권주의적이란 말은 알다시피 지배적이란 뜻이니 제쳐놓으면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란 무엇인가? 우리 모두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는 주의다. 그게 뭐가 나쁘다는 말일까?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가 반대하는 것은 힘과 덩치로 세상을 지배하려는 태도다. <공룡시대>에서는 덩치 크고 못된 공룡들이 부르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들어 있다. “덩치가 크면 모두 밀어버릴 수 있지. 덩치가 크면 세상 살기가 편해.” 덩치가 크고 힘이 세기 때문에 규칙을 어겨도 되고, 작고 무력한 동물들을 맘대로 짓밟을 수도 있다는 게 큰 공룡들의 생각이다. 미국 사회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선 떠올리게 되는 건 유사 공룡사회로서 한국사회다. 갖은 권력 남용과 부정 의혹 등에도 불구하고 법망을 피해가는 권력자들과 자잘한 사업에까지 영역을 확장해가면서 덩치만 불려가는 재벌기업들의 행보는 우리가 아직 ‘선사시대의 땅’에 살고 있는 건 아닌가란 생각마저 들게 한다. <공룡시대>의 원제는 바로 ‘선사시대의 땅’(The land before time)이다.

 

 

물론 <공룡시대>의 메시지는 패권주의를 옹호하는 게 아니다. 큰 공룡들에게 시달리는 작은 공룡들은 큰 공룡들의 노래에 이렇게 답한다. “세상을 이루려면 모든 종류가 다 필요해. 키 작은 놈, 키 큰 놈, 덩치 큰 놈, 덩치 작은 놈.” 한마디로 관용적 포용주의다. 우리가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서, 그리고 좀 더 재미있는 삶을 위해서는 똑똑한 놈도 필요하고 멍청한 놈도 필요하고 하여간 모든 종류가 다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 소위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다. 서로 다르지만 그런 차이 속에서도 협력이 가능하다는 믿음이다.

문제는 이런 믿음이 사회적 적대관계를 배제하거나 은폐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다. 이 이데올로기는 ‘수직적 적대’를 ‘수평적 차이’로 대체한다. 수직적 적대란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이 있는 현실을 가리킨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있고 이 관계가 고착적일 때, 그것을 수직적 적대관계라고 부른다.

<공룡시대>에서 선량한 공룡들은 그런 적대를 수평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차이 정도로 순화시킨다. 하지만 과연 잡아먹는 공룡과 잡아먹히는 공룡 간의 차이가 점이 있는 공룡과 없는 공룡 간의 차이 정도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일까. 고문 경찰과 고문 피해자가 다양성을 예찬하며 서로 사이좋게 합창할 수 있는 것일까. 그래도 되는 것일까.

우리 ‘선량한’ 공룡들의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는 그런 점에서 미심쩍다. 패권주의에 맞서는 듯싶지만, 사회적 불평등을 다양성이란 이름으로 포용하고 계속 보존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포용적 태도에 앞서야 하는 것은 ‘못된 종류들’에 대한 불관용이다. 상생의 전제조건은 “좋은 게 좋은 거지”가 아니라 과오와 기만에 대한 냉정한 심판과 척결이다. ‘한반도의 공룡시대’가 어떤 결말을 맺을지 궁금하다.

12. 0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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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낮에 건네받은 책은 장동석의 <살아있는 도서관>(현암사, 2012)이다. '천천히 오래도록 책과 공부를 탐한 한국의 지성 23인, 그 앎과 삶의 여정'이 다소 긴 부제이고, 저자가 <기독교사상>에 연재한 인터뷰 코너 '이 사람의 서가 그리고 삶'을 단행본으로 다듬어서 펴낸 책이다. 기억엔 그 코너의 거의 마지막 인터뷰이가 나였다. 그래서 '23인'의 말석에 자리하게 됐는데, 저자는 인터뷰의 제목을 "신은 인간에게 책을 읽을 자유를 주셨다"로 잡았다.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에서 가져온 것으로 인터뷰도 그 책의 출간을 계기로 이루어졌었다. 기념삼아 책의 일부를 발췌해놓는다(인터뷰 내용을 저자가 재구성한 것이다).  

 

 

(...)

 

『형이상학 입문』이 던져준 숙제

이현우 교수는 스스로를 “문학전체주의자, 문학우월주의자, 문학극대주의자”라고 소개했다. 문학을 하는 사람은 세상사 돌아가는 모든 일을 다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능력이 닿는 한 모든 학문과 지식을 흡수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인문학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문학 역시 인간에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탐구해야 한다. 결국 문학은 다양한 영역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겸손한 문학주의’를 이현우 교수는 경계한다. 문학이 사회적 책임과는 무관한, 아울러 우리 생활과도 거리를 둔다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이는 “러시아 문학이 대체로 그런 편인데, 그래서인지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작품에서 자주 나타나는 영혼 구원에 대한 진지한 탐구에 마음이 간다”고 말했다. 그래서 “문학 전공자인데도 책은 다양하게 읽으시네요?”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어떤 때는 정색을 하고 “문학이 전부인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이현우 교수는 1994년 즈음에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입문』을 자극적으로 읽었다. 투박하게 이야기하면 “왜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있는가”라는 질문 하나로 한 권의 책을 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에도 놀랐지만, “인간이 그런 질문을 던지는 존재구나”라는 인식에 크게 고무되었다. 이것은 인간만이 묻는 고유한 질문으로, 인간은 특권적 물음을 갖는 존재다. “하지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없는 듯하다”며 이 교수는 미소 지었다. 단지 답을 찾지 못해 시름시름 앓거나, 질문 자체에 고양되는 삶을 살 뿐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존재의 물음이 언어와 관계있다는 사실에 이현우 교수는 놀랐다. 여기서 언어는 그리스 기원의 언어로 인도유럽어족만이 갖는 ‘존재동사삼인칭단수형’에 관한 질문인데 우리말은 가지고 있지 않은 특성이다. 그래서 우리 철학에서 존재의 질문, 존재의 사유는 언어의 구속성과 제약성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 교수는 “형이상학적 질문이 언어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면서도 “하이데거 철학에서 언어 구속성 문제에 국내에선 사유가 부족한 듯해 아쉽다”고 했다.

 

사실 존재의 문제와 언어와의 관계성에 천착하는 책은 국내에 드물다. 하이데거 전공자들도 “하이데거가 얼마나 대단한가”라는 이야기만 할 뿐이며, 보편적 하이데거만을 이야기한다. 하이데거 철학의 힘과 깊이는 인정하지만 언어 문제가 극복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물음과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유의 기반이 되는 중요한 물음임에도 간과되고 있는 현실이 이현우 교수로서는 아쉽다.

 

 

 

책이 인간보다 위대하다

러시아 문학 전공자로서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의 비중은 그이에게 남다르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지금도 기회 있는 대로 사람들에게 읽어볼 것을 권하는 목록 가운데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처녀작이면서 당시 최대 비평가였던 벨린스키로부터 극찬을 받아 작가의 이름을 널리 알린 계기가 된 작품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는 작품. 이현우 교수는 한 인터넷 서점의 추천도서 코너에 이 작품을 소개하면서 “세상 모든 고민을 다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설”이라고 소개했다. 이어지는 추천사가 재미나다. 

책을 가방에 넣는 순간, 당신은 그 고민들과 동행하는 것이 되고, 책을 펼쳐드는 순간 그 고민에 머리를 맞대는 것이 된다. 고민하지 않으려는 인간이라면 제일 먼저 내다버려야 할 책.

고민하는 인간, 다시 말하면 진정한 삶의 방향성을 묻는 사람이라면 한 번은 꼭 읽어야 할 책이 바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책을 읽을 자유』에서는 이 대목을 이렇게 확장시키고 있다. 음미할수록 고개가 주억거려지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책을 읽을 자유였다. 그리고 분명 책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나는 가끔 책이 인간보다 위대해 보인다. 

(...)

 

12. 02. 15.

 

 

 

P.S.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입문>(문예출판사, 1994)은 현재 절판된 상태다. 다른 장소에 보관해오던 책인데, 오늘 몇몇 책들을 챙기러 갔다가 눈에 띄기에 가져다 지금 책상 위에 놓았다. 감회가 없지 않다. 하이데거 전집 제40권에 해당하는 책으로 최근에 나온 책으론 <근본개념들>(길, 2012)과 성격이 비슷하다. 이 책은 전집 제51권을 옮긴 것이다. 흠, 갑자기 <존재와 시간>을 완독하고 싶어지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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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강의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어제오늘 주문한 책들이 와 있는데(사실 휴일을 빼곤 거의 매일 책들이 온다. 거의 매일 주문한다는 뜻이다!) 그중 하나는 기획회의(313호)다. '철학자 강신주' 특집에서 총론을 맡아 쓴 바 있다. 그걸 옮겨놓는다. 페이퍼 제목의 '적정인문학'이란 말은 '적정기술'에 빗대 만든 신조어다. 글의 제목과 소제목은 편집자가 붙인 것이다.

 

 

기획회의(12. 02. 05) 인문학은 '사랑'이다

 

‘강신주와 인문저자’가 이번 특집에서 내게 맡겨진 꼭지다. 인문서의 동향에 조금만 밝은 독자라면 지난해 국내 인문저자로서 강신주의 두드러진 활약을 놓치지 않을 수 없다. 관계자에게서 들으니 <철학이 필요한 시간>은 인문분야 신간으로서 최대 베스트셀러였다(물론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뿐인가.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의 후속작으로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도 출간했고, ‘제작백가의 귀환’ 시리즈의 첫 두 권 <철학의 시대>와 <관중과 공자>도 숨 가쁘게 펴냈다. 아니 숨이 가쁜 건 옆에서 지켜보는 독자의 몫이고, 그의 걸음은 더 빨라질 기세다. 유행하는 말로 ‘폭풍집필’ 모드에 접어든 것처럼 보인다.

 

 


‘강신주와 인문저자’란 제목은 바로 그런 상황을 시각으로 재현하고 있는 듯싶다. 강신주가 앞서가고 다른 인문저자들이 뒤따라가는 현재의 상황 말이다(강신주 VS 인문저자들). 바야흐로 강신주가 대세다. 그는 편집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인문저자이면서 ‘우리시대 대표 인문학자’이다. 그의 비결은 무엇이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우리? 인문저자와 인문독자, 인문편집자를 두루 묶어서 일단은 ‘우리’라고 해보자.   

 

 

 

그의 순정한 인문학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보니 강신주와의 첫 만남은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부터였다. 2004년에 나온 책이지만 나는 몇 년 뒤에 읽었다. 일단 노자를 ‘제국의 형이상학자’로 읽는 그의 시각이 흥미로웠다. 과문한 탓에 나도 노자하면, 장자와 묶어서 ‘무위자연의 철학자’ 정도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1학년 때 <장자>를 읽고서 크게 감흥을 얻었던 터라 장자를 전공한 저자에게서 모종의 친밀감을 느끼기도 했다. 통념과 다르게 그는 단호하게 ‘노자와 장자’ 아니라 ‘노자 VS 장자’라고 주장했는데, 상당히 파격적이고 신선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장자의 철학>도 구하고 ‘지식인 마을’ 시리즈의 <장자 & 노자>도 연이어 읽었다. 그의 <장자>는 <노자>와 마찬가지로 태학사의 ‘중국철학 해석과 비판’ 시리즈의 하나로 나온 것인데, 강신주는 그 시리즈의 공동 편집위원이었다. 그는 아직 학계 안에 있었다. 그래서 연세대학교 철학과에서 장자로 박사학위를 받은 ‘동양철학자’라는 게 나의 머릿속 그의 분류 항목이었다.

 

 


하지만 그는 동양철학 전공자라고만 한정하기에는 좀 특이했다. 서양철학, 특히 프랑스 현대철학자들에 대한 참조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도가철학회에서 엮은 <노자에서 데리다까지> 같은 책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놓고 장자와 들뢰즈를 왕복하는 동양철학자는 적어도 내 기억엔 없었다. 그래서 특이하다 싶었고, 동양철학이란 말이 은연중에 풍기는 ‘엄숙주의’와는 잘 맞지 않아 보였다. 그는 활달했고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 인상을 더 강하게 각인시켜준 책이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이었다. 그는 장자와 함께 모든 차이를 횡단하고자 했고 그것은 ‘즐거운 모험’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범속한 범주들의 칸막이는 더 이상 장애가 될 수 없었다. 대학 아카데미즘의 속박에서도 벗어났다. 그는 ‘동양철학자’가 아니라 그냥 ‘철학자’이고자 했다. 그냥 ‘인문학자’이고자 했다. 그리고 대학 강의실 바깥의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자 했다. 왜인가? 인문학은 ‘사랑’이라고 생각해서다

 

강신주는 <장자 읽기의 즐거움: 망각과 자유>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적었다. “장자는 우리에게 인문학의 정신이 인간에 대한 사랑에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인문학은 인간의 즐거운 삶을 긍정하고 옹호하려는 정신에서만 가능한 것이지요. 그렇기에 인문학의 위기란 결국 인간의 자유와 행복의 위기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이렇듯 인문학의 위기를 ‘인간의 자유와 행복의 위기’로 인식하는 태도는 그것을 인문학자들의 위기로 간주하는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그에겐 인문학자들의 생계보다도 ‘인간의 사랑과 연대’를 회복하는 일이 더 절박하고 중요한 문제로 간주된다. 물론 그런 대의를 입에 달고 다니는 인문학자들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강신주는 실제로 그걸 믿는다. 그리고 실천한다. “나는 장자의 정신을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습니다”란 바람은 거기에서 나온다. ‘순정한 인문학’이란 게 있다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인문학의 정신이 인간에 대한 사랑에 있다는 말은 특별하지 않을 수 있다. 더구나 인간이란 말이 추상적인 만큼 그런 주장 자체도 추상적인 구호에 그칠 수 있다. “여러분, 사랑해요!”란 말은 연예인들의 상투어가 아닌가. ‘인간에 대한 사랑’이란 말도 상투어의 혐의에서 아주 벗어나는 건 아니다. 순정한 인문학자라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더 구체적인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강신주가 발견한 것은 인간의 ‘상처받기 쉬움’이다. 대학 바깥의 대중강연 활동을 통해서 인문학자의 자리와 역할을 새롭게 찾아간 그는 무엇이 사람들을 인문학으로 이끄는지 성찰한다. 삶에 대한 고민과 상처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의 지킴이를 자임하고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통해서 인문학 카운슬러로 나선 것은 그런 이들에 대한 고려 때문일 것이다. 그는 감성적 소통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보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얘기가 무엇인지를 먼저 고려한다. 우리가 상대를 눈앞에 두고 대화를 나눌 때, 우선적으로 살펴야 하는 것이 상대방의 표정이고 마음상태인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가급적 상대방과 눈높이를 맞춰야 함은 물론이다. 그게 대화니까. 강신주에게 철학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말 건넴’이며 대화의 기술이다. 


<철학의 필요한 시간>에서 그는 처음 어떻게 말을 건넸던가. “지금까지 저는 수많은 유리병편지를 받았습니다. 발신자는 스피노자, 장자, 나가르주나, 원효 등과 같은 철학자였습니다. 매번 편지를 받아 펼쳐볼 때마다 저의 고독과 외로움은 경감되었을 뿐만 아니라 저는 인간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철학을 통해서, 많은 철학자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외로움을 견뎌왔다는 것이 그의 경험담이다. 그는 그렇게 전달받은 행운을 ‘유리병’에 담아 이젠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하고 싶어 한다. “가끔 저의 책들이 서점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보곤 합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저의 유리병편지를 꺼내 읽어볼까요?” 이런 것이 말하자면 그의 순정한 인문학이 갖는 감성코드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 강신주를 ‘소통의 인문학자’라고 불러도 좋겠다. 아니, 이건 뒷북이다.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가 그의 박사학위논문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그의 순정한 인문학적 태도나 감성코드는 어떤 전환이나 각성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된 기원을 갖고 있다. 아예, 장자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장자>에서 그가 가장 자주 인용하는 대목을 보자. “도(道)는 걸어 다녔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고, 사물은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그렇게 구분된 것이다.” 이 대목을 설명하기 위해 강신주는 등산 애호가답게 등산로를 예로 든다. 깊은 산중에 난 구불구불한 산길이 애초에 길이었을 리 만무하다. 그 길은 무수한 사람들이 걸어 다녔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렇듯 장자에게서 ‘도’는 ‘관계의 흔적’이자 ‘소통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어떤 관계 이전에, 소통 이전에 도라는 건 없다. 강신주가 관계를 만들면서 소통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그가 장자를 통해서 얻은 깨달음의 실천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요컨대 인문학적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한 사례가 강신주 인문학이다.  
 

 

 

고민을 덜어주고 상처를 치유해주는

장자에 관한 책들에 이어 <상처받지 않을 권리>에서부터 ‘제자백가의 귀환’ 시리즈로 이어지는 그의 빠르고 너른 행보에 대해서는 이번 특집에서 따로 다뤄질 것이기에 나로선 특별히 <철학, 삶을 만나다>에 주목하고 싶다. 2006년에 나왔으니 그의 초기작이면서 강신주란 이름을 조금씩 유포시킨 책이다. 나는 입소문만 듣고 있다가 몇 년 뒤에나 구입을 하고 이후에도 그냥 책장에 꽂아두기만 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철학과 삶의 ‘만남’을 주선한다는 책들, 빳빳한 철학을 좀 부드럽게 다림질해준다는 책들이 한때 유행하기도 해서 ‘그렇고 그런 책’ 가운데 하나로 치부했었다.


한데 다시 펴본 이 책에 강신주의 ‘오래된 미래’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놀랐다. 강의 시간에 학생들과의 소통과정에서 겪은 당혹스런 경험을 이야기한 다음에 그는 이런 교훈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제 이야기가 농담이 되느냐 진담이 되느냐는 저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결정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물론 장자의 “길은 걸어 다녔기 때문에 만들어진다(道行之而成)”를 다시 반복해서 진술한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만남’이란 화두이고, ‘타자와의 만남’이란 심급이다. 그런 관점을 조금 연장해서 말하자면, 인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인문학자들이 아무리 정의를 내려 봐야 그것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적어도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인문학이라면, 대중과의 만남 이전에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한번 찍힌 발자국일 따름이지 아직 길이 될 수 없다. 사건이 될 수 없다. 그것이 길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재 이런 논리를 가장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는, 아니 체득하고 있는 인문저자가 강신주이다. 이미 <철학, 삶을 만나다>에서부터 그는 두 가지 만남을 꿈꾸고 기획했다. 하나는 철학과 삶의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독자들(‘여러분’)과의 만남이다. 거기에 더 보태자면, 그의 철학 또한 만남들의 주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단 ‘동서양 철학이 모든 것’이란 부제 아래 동서양의 수많은 철학자들을 불러다 맞세운 <철학 VS 철학>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와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까지 그의 책 대부분이 만남의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이 만남들은 물론 주선자의 속 깊은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각각을 따로따로 대면했을 때 보지 못한 부분들을 드러내준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더 편안하게 합석하여 이들이 대화와 논쟁, 혹은 밀어에 귀 기울이게 해준다. 그래도 만남의 자리가 어색하다 싶으면, 주선자가 아예 노골적으로 나서기도 한다. “시인이나 철학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이 느끼고 생각한 것을 이야기한 겁니다. 이제 느낌이 오시나요?”(<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 “이제 느낌이 오시나요?” 같은 물음을 친근하면서도 자연스레 던질 수 있는 인문저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나로선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와 <철학카페에서 시읽기>의 저자 김용규 정도를 떠올릴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동서양 철학 전공자로서 인문학 대중화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저자들이다.

 

 


‘적정기술’이란 말이 있다. 원래는 에른스트 슈마허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1965)라는 책에서 ‘중간기술’이란 개념으로 처음 소개했다고 하는데, 첨단기술과 토속기술 사이를 가리킨다. 슈마허는 서구에서 필요한 기술과 달리 빈곤국의 자원에 필요에 적합하게 소규모이면서도 간단하고 돈이 적게 드는 기술을 중간기술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인간이 중심이 되는 경제적인 기술이란 뜻으로 확장됐다. 이 중간기술, 혹은 대안기술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더 널리 쓰이게 된 게 적정기술이다. “적정기술은 기술이 아닌 인간의 진보에 가치를 두는 과학기술을 총칭한다.”(김정태‧홍성욱, <적정기술이란 무엇인가>).


이 중간기술이나 적정기술이란 개념을 인문학에도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중간인문학 혹은 적정인문학. 그간에 ‘인문학 대중화’나 ‘대중인문학’이란 말이 ‘본격인문학’이나 ‘고급인문학’에 견주어 부당하게 폄하되거나 오해된 경우가 많았다. ‘대중 VS 엘리트’라는 대립적 구도의 산물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인문학, 우리의 고민을 덜어주고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인문학을 ‘중간인문학’ 혹은 ‘적정인문학’이라고 부르게 되면 좀더 상생적인 구도를 만들어볼 수 있을 듯싶다. 우리에겐 ‘첨단인문학’뿐만 아니라 ‘적정인문학’도 필요하다고 말이다. 강신주 인문학은 그 적정인문학의 유력한 사례다. 인문학을 위한 인문학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인문학으로서 적정인문학이 더 다양해지고 더 풍성해지길 기대한다.

 

12. 0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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