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지난달 <햄릿>에 이어서 이달에 읽은 건 <돈키호테>다. 고전이 으레 그렇지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작품이다.

 

 

 

한겨레(12. 04. 14) 눈에 콩깍지 씐 돈키호테, 우리 안에 산다

 

방랑기사 돈키호테의 대단한 모험담을 그린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의 명성은 세계문학사에서 셰익스피어와 어깨를 나란히 하지만 정작 그의 생애에 대해선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아버지가 당시엔 이발사보다 나을 게 별로 없던 외과의사인데다가 청각장애인이어서 집안은 평생 가난을 면치 못했고 세르반테스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을 걸로 추정된다.

청년시절 세르반테스는 스페인의 연합함대가 오스만 제국을 물리친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고 ‘바른손의 명예를 앙양하기 위해’ 왼손의 자유를 잃었다. 불운은 그걸로 그치지 않아 귀국길에 오르다 터키 해적에게 납치돼 5년간 북아프리카에서 포로생활을 한다.

노예와 같은 생활 속에서도 이 불굴의 상이용사는 여러 차례 탈출을 꾀하고 반란을 주동하여 해적들까지도 경탄하게 만들었다. 결국 어렵게 몸값을 지급하고 마드리드로 돌아오지만 조국은 그를 대우해주지 않았다. 허다한 ‘군인 출신 실업자’ 가운데 한 명일 뿐이었고, 세르반테스는 창작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작가의 길도 순탄치는 않아서 그는 예순이 다 돼서야 <돈키호테>로 이름을 얻는다.

돈키호테는 누구인가? 우리에겐 물불 안 가리고 돌진하는 ‘괴짜’를 가리키는 별명이 됐지만 그는 일단 독서광이다. 행동가형 인물에겐 어울리지 않은 전력처럼 보이지만 여하튼 그는 사색가형의 대명사 햄릿보다도 더 많은 책을 읽었을지 모른다.

그는 경작지를 다 팔아치워가며 자신의 서가를 기사소설들로 채우고 밤낮으로 읽었다. 그 결과 마침내는 정신이상이 되고 말았다! 자신이 직접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자신의 명예를 세우기 위해” 방랑기사의 길에 나서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가 사라진 전설의 기사들을 모델로 하여 다시 복원하고자 한 기사도란 무엇인가. “처녀들의 순결을 지키고, 과부들을 보호하고, 불쌍한 사람들이나 고아들을 구제하는 일”이다. 그는 ‘네 것, 내 것’이란 구별이 없이 모두가 행복했던 ‘황금시대’를 다시 꿈꾼다. 그는 시대착오적인 미치광이인가?

방랑기사로 나선 돈키호테는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여 돌진하고 시골 이발사의 세숫대야를 전설적인 맘브리노의 투구로 오인한다. ‘불쌍한 몰골의 기사’ 주인의 착각이 너무 심한 듯하여 하인 산초조차도 핀잔을 던지자 돈키호테는 이렇게 나무란다. “자네에게 세숫대야로 보이는 그것이 나에게는 맘브리노 투구로 보이는 것이고, 또 딴 사람에게는 다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

물론 돈키호테는 맘브리노 투구를 마법사가 술법을 부려 다른 사람에게는 세숫대야로 보이게 만들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시각차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돈키호테의 광기는 특이하다.

그는 자신이 늙은 시골귀족이라는 걸 알지만 동시에 ‘라만차의 돈키호테’라고도 생각한다. 부스럼투성이에다 말라비틀어진 말도 ‘로시난테’가 되고, 이웃마을의 농사꾼 처녀는 그가 사랑하는 귀부인 ‘둘시네아’가 된다. 어느 쪽이 진실인가. 눈에 콩깍지가 씐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객관적 진실’이 얼마나 텅 빈 것이고 말라비틀어진 것인지 알 것이다.

진실은 풍차와 거인 사이에, 맘브리노 투구와 세숫대야 사이에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돈키호테의 광기는 유난스럽지 않다. 세르반테스의 파란만장 편력을 닮은 돈키호테의 모험담은 숭고한 이상을 위해 돌진하는 모든 이들의 모험담이기도 하다.

12. 04. 13.

 

 

 

P.S. 세르반테스에 관한 전기가 국내에 소개돼 있지 않은 건 유감스러운데, 하는 수없이 최근에 영어본이라도 구입했다. 도널드 맥크로리의 <평범하지 않은 인간: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생애와 시대>다. 작품 읽기는 나보코프의 <돈키호테 강의>를 참고하고 있는데, 이 또한 번역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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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교보문고의 소식지 '사람과 책'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약간 수정됐다). '정치를 읽다'란 특집 테마의 한 꼭지를 청탁 받고 쓴 것이다. 정치에 관한 책, 혹은 정치교양서에 대한 가이드로 고전 5권과 신간 5권을 골라 소개해달라는 것이 내가 받은 주문이었다.

 

 

 

사람과 책(12년 4월호) '장롱 주권'을 꺼내주는 정치교양서

 

왜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갖고 또 정치 관련 서적을 읽어야 하는가? <닥치고 정치>(푸른숲)의 저자라면 간명하게 대답할 듯싶다. 우리 생활의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서라고. 그 스트레스의 근원이 정치라고 지목되기 때문이다. 정치 무관심은 그 스트레스에 대한 방치이자 투항이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알아서 대우해주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무시당한다. 주권자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행사하지 않으면 ‘장롱 주권’이 된다. 맘에 안 드는 정치에 대해 ‘닥쳐라! 정치’라고 말하기 위해서라도 ‘닥치고 정치’는 필수적이다. 게다가 총선과 대선을 치르는 해라면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닥치고 정치’라고 해서 우리가 맨몸으로 달려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름 생각이 필요하다. 이 ‘정치 생각’의 불쏘시개가 돼주는 책이 정치 교양서들이다. 어떤 책들이 있는가. 먼저 ‘정치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책들이 있다. 정치철학서라고 분류되는 책들이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플라톤의 <국가>(서광사)에 가 닿는다. 당연한 얘기지만 정치철학 이전에, ‘정치란 무엇인가’란 물음 이전에 정치, 곧 정치적 행위가 존재했다. 플라톤 시대에 그 정치는 민주정이란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플라톤은 그것을 ‘어중이떠중이들의 정치’ 정도로 간주했다.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에게 독배를 안긴 정치가 아테네 민주정이었으니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불만은 이해할 만하다. 중요한 것은 정치철학의 ‘기원’이 바로 정치에 대한 불만에 토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철학’이라고 붙여 쓰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정치냐 철학이냐’에 가깝다. 플라톤은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닌 전문가들의 정치, 궁극적으로는 철인(哲人)의 통치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올바름’이 무엇인지 아는 자가 바로 철인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국가>에서부터 내려오는 서양 정치사상의 고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도서출판 숲)을 거쳐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까치)에 이른다. 고전 정치철학이 정치를 ‘올바름’의 문제와 항상 결부시켜서 사고했다면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행위가 종교적 규범이나 윤리적 가치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현실주의’에서 근대 정치사상은 시작된다. 우리가 ‘정치’하면 ‘올바름’보다 ‘권력’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 건 그만큼 오늘날의 정치현실이 마키아벨리즘과 가깝기 때문일까.

 

 

 

그렇듯 ‘현재적인’ <군주론>에다 사회계약론적 통치관과 국가관을 대표하는 로크의 <통치론>(까치)과 홉스의 <리바이어던>(나남)까지 더 얹으면 얼추 서양 정치사상의 고전 목록은 채워진다. ‘너무도 유명하지만 아무도 안 읽는 책’이란 고전에 대한 정의에 잘 부합하는 책들이다. 아무도 안 읽는 책을 혼자만 읽으려고 하면 멋쩍을 테니 가이드를 동반하는 것도 좋겠다. 강유원의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라티오)와 애덤 스위프트의 <정치의 생각>(개마고원) 등이 그런 역할에 충실한 책들이다.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돌베개)도 국가를 보는 다양한 관점이란 시각에서 정치사상을 일람하는 데 요긴한 도움을 준다.

 

 


통상 플라톤의 <국가>에서부터 정치철학에 대한 독서를 시작하는 게 상례이지만 <인간의 조건>(한길사)의 저자 아렌트를 경유하지 않는다면 그 의미가 반감될지도 모른다. 아렌트는 정치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대해 플라톤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의 약속>(푸른숲)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치는 인간의 복수성에 기초한다. 신은 단수의 인간(man)을 창조하였지만, 복수의 인간(men)은 인간적이며 지상에서 만들어진 산물이고, 인간 본성의 산물이다.”

 

그가 보기에 정치란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들의 문제’이다. 하지만 철학이나 신학은 모두 단수의 인간만을 다루기 때문에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해 제대로 숙고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렌트의 문제의식이다. 정치철학 역시 마찬가지다. 아렌트는 플라톤을 포함한 위대한 사상가들이 정치에서만큼은 깊이 있는 통찰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꼬집는다. 정치가 닻을 내리고 있는 깊이까지 내려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정치적 사유, 정치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서 너무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큰 잘못은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닥친 문제들에 집중하며, 지금 쏟아지는 책들에 주목하는 것도 방책이라면 방책이니까. 당장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두 권의 <점령하라>, 곧 월스트리트 시위를 다룬 슬라보예 지젝 외, <점령하라>(알에이치코리아)와 '시위자'의 <점령하라>(북돋음)는 자본과 1%를 위한 정부와 체제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항의의 육성을 담고 있다. 그 목소리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우리가 남이가?’는 이럴 때 쓰는 말이다.

 

폴 피어슨과 제이콥 해커의 <부자들은 왜 우리를 힘들게 하는가?>(21세기북스)는 ‘승자독식의 정치학’이 부제다. 저자들은 지난 30년간 미국식 민주정치가 어떻게 가진 자들의 이익만을 대변해왔는지 폭로한다. 거대 금융자본과 정치인들의 밀월관계는 감세와 규제완화를 통해 최상위 0.01%의 부유층만을 대변해왔다는 것이 그들의 지적이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결국 ‘부자계급을 위한 충직한 하수인’에 불과하다고 폭로한 팽송 부부의 <부자들의 대통령>(프리뷰) 또한 비슷한 성격의 책이다.

 

 


정치 선진국을 자임하는 미국이나 프랑스의 실상이 그러하다면 우리라고 고개만 숙이고 있을 필요는 없겠다. 모자란 건 모자란 것이고, 중요한 것은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나가는 것일 테니까. 물론 그러기 위해선 현실에 대한 직시가 필요하다. 위키리크스가 발가벗긴 대한민국의 ‘알몸’을 폭로한 김용진의 <그들은 아는, 우리만 모르는>(개마고원)과 대한민국 대통령과 재벌들의 비리들을 들춰낸 안치용의 <시크릿 오브 코리아>(타커스)는 무엇이 ‘현실’인지 알려준다. ‘나꼼수’ 주진우 기자의 ‘정통시사활극’ <주기자>(푸른숲)까지 이러한 폭로들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고 현실의 좌표를 재조정하게 해줄 것이다. 이 좌표 자체를 변경할 수 있을까. ‘비정규직 주권자’처럼 선거철에만 잠시 주권자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정규직 주권자’로서 우리가 상시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책임을 다해나갈 때 변화는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책이 그러한 걸음에 힘을 불어넣어줄 수 있다면 무얼 더 바라겠는가.

 

12. 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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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일정 때문에 어제 오후 홍대앞 PC방에서 쓴 글이다. 아침에는 주진우의 <주기자>(푸른숲, 2012)를 읽다가 가방엔 <가장 뛰어난 중년의 뇌>(해나무, 2011)를 넣어 갔었는데, 칼럼은 '책 읽는 뇌' 이야기에서 멈췄다. '중년의 뇌'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기회를 마련해볼 참이다.

 

 

 

경향신문(12. 04. 06) [문화와 세상]독서력을 갖춘 사회

 

책을 몇권 내면서 가끔 강연회에서 독자들을 만난다. ‘책에 대한 책’으로 분류되는 책들이다 보니 화제는 주로 독서다. 무슨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가 청중의 주된 관심사다. 그런 물음에 답하다 보니 애용하게 된 레퍼토리 중 하나는 ‘책 읽는 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서목록을 만드는 것보다 먼저 할 일이 독서력을 갖추는 것이란 점은 자명하다.

 

무엇이 책 읽는 뇌인가. 기본전제는 인간은 책을 읽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자의 발명이 불과 5000년 전의 일이고 책이란 물건이 등장한 건 그보다 나중이니 독서능력이란 게 우리 뇌에 특별한 능력으로 자리 잡을 순 없었다. 그럼에도 문자를 해독하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건 우리 뇌의 다른 기능들이 부수적인 역량을 발휘한 결과다. 그런 기능 간 협조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난독증인데, 책 읽는 뇌가 우리의 본질적 능력이 아니라 ‘부업’의 결과라면 난독증이 큰 흠은 아니다. 진정 놀라운 것은 오히려 문자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다. 부모라면 자녀들이 한글을 깨칠 때 느꼈던 경이감을 기억할 것이다. 물론 우리 자신도 그런 경이감을 부모에게 안겼을 것이니 알고 보면 다들 ‘천재’였다. 비록 일반화되긴 했지만 문자를 읽어낸다는 것, 소위 ‘문해력’은 자연스러운 능력이 아니라 천재적인 능력이다.

문제는 문해력이 곧 ‘독서력’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책을 읽는 능력은 글자를 읽거나 글을 읽는 능력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능력이다. 그리고 이 독서력은 자연스레 체득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다. 대단한 노력은 아니다. 일주일에 한두 권씩 2년 정도의 단기간에 꾸준히 읽으면 된다. 그렇게 ‘10000페이지 독서’나 ‘150권 독서’를 통해서 독서력이 길러진다. 어지간한 책을 읽고 소화할 수 있는 힘이 독서력이다. 만약 어지간한 책을 읽어내는 게 힘겹다면 독서력이 아직 부족한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책 읽는 ‘근육’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글을 읽는 단계에서 책을 읽는 단계로 넘어가려면 좀 더 단련된 뇌 근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단련된 뇌 근육은 독서의 지평뿐 아니라 세계의 질감 또한 변화시킨다. 이 변화는 개인적 차원에 한정되지 않는다. 문맹을 벗어난 사회가 문해력을 갖춘 사회라면 진정한 문명사회는 독서력을 갖춘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일제시기 한국인의 70%가 문맹이었다고 한다. 오늘날 문맹률에 있어서만큼 세계 최저 수준이니 우리의 초급 문해력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다시 강조하자면 문해력과 독서력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문해력은 초등교육의 과제일 수는 있을지언정 고등교육의 목표일 수는 없다. 독서력은 초등학교 교과서가 아니라 대학교재를 읽을 수 있는 진전된 문해력이다. 세계 최저수준의 문맹률에도 불구하고 한국 대학생들의 문해력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문제는 독서량이고 독서력이다. 한 달에 한권 정도를 읽는 평균 독서량을 갖고서 우리 사회가 ‘독서력을 갖춘 사회’라고 말할 수는 없다.

흔히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고 한다. 그 수준을 말해주는 척도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독서력이다. 민간인 불법사찰이나 일삼는, 그러면서도 무엇이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는 수준 낮은 정부를 우리가 갖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미흡한 독서력과 무관하지 않다면 독서는 정치적 차원에서도 진지한 숙고의 대상이 될 만하다. 국민 다수가 정치와 역사와 철학에 대한 기본교양을 갖추고 말들의 홍수 속에서 무엇이 거짓말이고 꼼수인지 판별해낼 수 있다면 그런 국민을 상대해야 하는 정부의 수준도 한층 높아질 것이다. 아무리 거짓말이라 해도 최소한 좀 더 성의 있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까.

 

12. 04.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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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70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홍기빈의 <살림/살이 경제학을 위하여>(지식의날개, 2012)가 서평거리다. '위하여'른 뗀 본격적인 <살림/살이 경제학>을 고대해 본다.

 

 

 

주간경향(12. 04. 10) 돈벌이 아닌 삶을 위한 경제학

 

“이 책은 지금까지 약 300년간 존재해 온 경제학을 근본적으로 대체할 새로운 경제학을 찾고자 하는, 나의 보잘 것 없지만 오래된 고민의 한 결과물이다.” <살림/살이 경제학을 위하여>의 서두이면서 저자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의 문제의식을 집약하고 있는 문장이다. 그렇다고 책이 ‘오래된 고민’의 첫 보고서는 아니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책세상, 2001)을 통해서 그는 ‘경제학의 근본적 재구성’에 대한 필요성을 주장하고 기존의 경제학이 ‘가지 않은 길’의 그림을 제시했었다. <살림/살이 경제학을 위하여>는 저자의 고민이 그간에 얼마나 더 깊어졌는가를 보여주는 중간 보고서라고 할 수 있을까.


소위 주류경제학이라고 불리면서 ‘약 300년간 존재해온 경제학’을 저자는 ‘돈벌이 경제학’이라고 부른다. ‘경제학’이란 말을 독점하고는 있지만 결코 유일무이한 경제학이 아니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를 갖고 있을 따름이다. 돈벌이 경제학에서 보는 경제란 무엇인가. “인간이 살아가면서 부닥치게 되는 여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알뜰하게 선택하는 행위”를 뜻한다. 너무도 친숙한 정의인가. 반면에 저자가 정의하는' 살림/살이 경제'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정신적·물질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유형·무형의 수단을 조달하는 행위”를 말한다. 어떤 차이인가. 어쩌면 별로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우리에게 돈벌이와 살림/살이가 서로 중첩돼 있어서다. 그것이 바로 저자가 문제적이라고 보는 대목이다. 이러한 중첩은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화’가 전면화되면서 빚어진 특수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리스어 어원을 따지자면 영어 단어 ‘이코노미(economy)’는 가정을 뜻하는 ‘오이코스’와 질서나 법률을 뜻하는 ‘노모스’가 합쳐진 말이다. 말하자면 ‘집안 살림’이 경제인 것이니 오늘날의 학문분류에 따르면 ‘가정관리학’이 바로 경제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정의 살림/살이를 위한 경제행위로서 ‘오이코노미아’와 재물을 획득하기 위한 기술인 ‘크레마티스티케’를 명확하게 구별했다. 이 둘은 목적과 수단의 관계다. 곧 재물 획득 기술은 살림/살이라는 목적의 수단일 뿐이며 그것이 역전돼서는 안 된다. 이것이 유럽은 물론 이슬람에서 16세기까지 지배했던 관점이다


살림/살이라는 목적과 재물 획득이라는 수단의 관계가 역전되는 것은 대략 16세기부터이다. ‘좋은 삶’ 대신에 화폐와 연관된 ‘돈벌이’가 부의 표준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서양 문명 및 인류의 경제 사상사에서 진정으로 중대한 단절이 벌어졌다고 한다면 이는 고대 및 중세 경제 사상의 살림/살이 경제학 패러다임과 고전파 경제학 이후에 생겨난 돈벌이 경제학 패러다임 사이에서의 단절”이라고 주장한다. 애덤 스미스 이래의 현대 경제학은 돈벌이 경제학의 체제를 무한히 확장하여 오직 돈벌이와 관련된 현상만을 ‘경제적인 것’으로 보이게끔 만들었다. 돈벌이 경제학이 가져온 폐색(閉塞)이자 맹목이다.

 

 


하지만 돈벌이 경제학이 살림/살이 경제학을 완전히 제거한 것은 아니다. 저자는 돈벌이 경제학의 지배를 거스르는 살림/살이 경제학의 면면한 흐름 또한 짚어낸다. 초기 사회주의자들에서 베블런, 폴라니 등으로 이어지는 계보다. 저자는 베블런의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나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같은 저작을 직접 번역·소개함으로써 이러한 흐름을 가시화한 바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살림/살이 경제학을 위하여>는 우리가 또 한 번의 ‘거대한 전환’, 이번에는 돈벌이 경제학에서 살림/살이 경제학으로의 전환을 필요로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무엇이 살림/살이 경제학인가? 핵심은 ‘인간 존재의 전면적 발전’이다. 잠재적 능력을 개발하지 못한다면 부란 고작 좀 비싸게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뜻할 따름이다. 인생의 목적은 돈벌이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이웃의 삶을 더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란 주장에 반대할 수 있을까. 우리는 돈벌이에만 내몰리기엔 좀 ‘비싼’ 존재다.


12. 04.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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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7일(화)부터 5주간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로쟈의 인문학 여행: 정치철학 편' 강의를 진행한다(http://www.hanter21.co.kr/jsp/huser2/educulture/educulture_view.jsp?category=academyGate8&tolclass=0002&searchword=&subj=F91170&gryear=2012&subjseq=0001&p_selmenu=01). 지난해 말에 했던 강의를 다시 개설한 것이며 커리에는 일부 변동이 있다. 한겨레에서는 대략 분기에 한번씩 강의를 하게 되는 듯하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아래 커리의 책들은 '참고도서'이다.   

 

 

 

1. 4월 17일_ 정치의 몰락 이후의 정치
-강양구, 박성민, <정치의 몰락>(민음사, 2012)
-백낙청, <2013년체제 만들기>(창비, 2012)

 

 

 

2. 4월 24일_ 닥치고 정치와 99% 정치

-김어준, <닥치고 정치>(푸른숲, 2011)
-이택광, <99% 정치>(마티, 2012)

 

 

 

3. 5월 1일_ 어떤 민주주의인가
-최태욱 외,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폴리테이아, 2011)
-소준섭, <직접 민주주의를 허하라>(서해문집, 2011)

 

 

 

4. 5월 8일_ 국가란 무엇인가

-플라톤, <국가>(서광사,1997)
-미셀 팽송 외, <부자들의 대통령>(프리뷰, 2012)

 

 

 

5. 5월 15일_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
-마이클 샌델, <정의의 한계>(멜론, 2012)

 

12. 0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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