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미스 사이공 O.S.T. [오리지널 런던 캐스트 레코딩][2CD]
에바 노블자다 (Eva Noblezada) 외 노래 / 유니버설(Universal)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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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사이공 넘버를 처음 들은 것은 윤도현의 러브레터였다. 당시 킴 역을 맡은 배우 김보경과 김아선이 출연을 했는데, 독특한 음색의 김보경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세계 4대 뮤지컬이라는 별명에 궁금하기도 했는데 공연을 보게 되지는 않았다. 어쩐지, 미화됐을 것 같다는 짐작이 들어서 말이다.

 

미스 사이공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홍광호 때문이었다. 영국 무대에 캐스팅 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오, 홍광호라면 웨스트엔드 무대에서도 먹힐지 몰라! 이런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처음부터 주역을 맡을리 없고, 외국어로 노래를 부르고 연기를 해야 하니 국내에서만큼의 반향을 불러오기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저절로 기대가 되었다. 이 음반이 나왔을 때도 현장은 가보지 못했지만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을 거라며 좋아했다. 그래놓고 일년 더 지나서 구입했지만..^^

 

대강의 내용은 알지만 넘버는 아는 게 몇 개 없어서 영어로 부르는 노랫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몰입도가 떨어진다. 그래도 홍광호 목소리가 들리면 다른 작업 중이었지만 고개를 번쩍 들고 아, 이 노래다!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첫번째 시디 하나가 다 돌아갈 동안 못 알아차려...ㆀ

그래서 해당 넘버를 꼭 집어서 다시 들어봤다. 여전히 홍광호 목소리인 줄 모르겠....ㆀ

비중이 워낙 작아서 그 짧은 시간 동안 홍광호의 매력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 공연장에서는 좀 더 얼굴을 내밀었겠지만 음반으로 만나는 건 무리가 있었다. 흠, 아쉽네.

 

근래에 뮤지컬 시디를 많이 샀는데, 내가 공연을 봤거나 영화라도 봤다면(맘마미아) 넘버들이 귀에 들어오는데, 공연을 보지 못한 건(그날들) 좀처럼 귀가 기울여지지 않았다. 이 작품도 그런 편이다.

 

작품을 무대에서 보고도 이런 느낌일지는 나중에야 확인이 되겠다. 여전히 궁금하긴 하니까.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예전에 불의 검에서 아라 역을 맡았던 이소정이 방송 인터뷰에서 미스 사이공 킴 역을 맡아서 브로드웨이 섰다고 했는데 맞나 모르겠다. 하와이까지 가서 오디션 봤다고 말한 것 같다. 까무잡잡한 피부도 그렇고 강인한 느낌의 음색이 킴 역에 잘 어울릴 거란 생각은 든다. 그나저나 이소정 씨는 요새 뭐하시나??

 

참, 불의검에서 정말 강렬한 느낌을 안겨준 진복자 배우는 그 후 한번도 만나보질 못했다. 뭐하십니까, 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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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두근거리는 중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예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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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낭만적인 제목이다. 일본의 어느 정리의 달인은 해당 물건을 보고 설레지 않으면 과감히 이별하라고 하던데, 여전히 내 마음을 왈랑거리게 하는 그 무엇에 대한 이야기일 거라고, 멋대로 짐작했었다. 예상은 바로 깨졌고 마스다 미리에 대한 실망지수만 누적되는 중이다. 끙!


문득 정신을 차렸다.

이걸 사서 어쩌려고?

머리에 반짝거리는 머리핀을 꽂아서, 그래서 뭐하게?

...

그러나 나는 이제 곧 중년이랄까, 이미 중년의 범주에 한 발을 들이밀고 있다. 머리에 무슨 장식을 하든 남성들의 연애대상에서 멀어져 가는 몸. 설레는 사랑의 예감을 가슴에 담고, 귀여운 머리핀을 고르는 처녀 마음을 내려놓을 시기가 된 것이다. 앞으로는 그저 내 즐거움을 위해 머리핀을 골라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반짝반짝 빛나는 머리핀을 사는 게 뭐가 즐겁다는 거야?

하는 삐딱한 마음이 들었다. -42쪽


이 부분을 쓸 때 마스다 미리는 서른 아홉이었다. 아무리 유치한 걸 해도 이쁜 나이는 분명 아닐 것이다. 근데 이건 얼마든지 상대적이다. 이제 열한살이 된 다현양도 큼지막한 핀을 꽂으면 이제 어릴 때처럼 안 예쁘다. 이제 좀 더 차분한 디자인이 어울릴 때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서른 아홉의 작가도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다른 디자인이 얼마든지 있을 터인데, 이 양반이 실망하는 포인트는 나이보다 '남자'에 있는 것 같다. 내 즐거움을 위해 머리핀을 고르는 게 뭐 어때서! 이상은, 이틀 전 나를 위한 머리핀을 하나 고르고 내 기억보다 600원이 더 나온 것 같은데 카드 영수증을 안 받아온 게 실수였다고 방금 생각한 사람의 입장이다.


조금씩 몸에 걸치는 것들의 선택 범위가 좁아져 간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민소매 옷도 지금 입으면 어깨에 기합이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뭐랄까, 탐욕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아마 민소매와의 이별도 그리 멀지 않은 날이 아닐까. 무릎이 보이는 스커트와도 슬슬 결별할 때일지 모른다. -44쪽


어깨 뽕도 아니고 민소매 옷이 기합이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고라?? 게다가 '탐욕'까지? 이봐요 마작가님! 너무 오버하십니다.


 올해는 남자들한테 좋아하는 연예인이 누구냐는 질문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 이제 내년이면 마흔, 점점 더 그런 질문을 받지 않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여자끼리 모여도

“요즘 연예인 누구 좋아해?”

이런 화제를 올리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별로 내 친구가 지금 어떤 연예인을 좋아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어졌다. 어느 샌가 끝났다. -49쪽


일본에선 남자들이 저런 화제를 많이 올리는 건가? 남학생들의 경우 어느 연령대가 되면 더이상 연예인 얘기 하지 않는 때가 있다. 관심사가 쉽게, 빨리 변한다. 저건 일본의 특징인지 마스다 미리 작가의 개인 스타일인지 모르겠다. 욘사마 열풍이 한참 불 때 중년 여인들의 애정이 얼마나 크게 넘쳤던가. 한류 열풍을 생각해도 나이 좀 먹어도 좋아하는 연예인 얘기 할 것 같은데 말이다. 설령 관심가는 연예인 없으면 얘기 안 하면 되지 걱정도 참 많다.


이제 반짇고리를 챙겨서 다녀봐야 소용이 없다. 그런 것은 어차피 어린 아가씨들이 이성의 마음을 끌기 위한 소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심술궂게 생각하는 것은 ‘동경’만 하다 말았던 청춘의 결과물이다. -52쪽


반짇고리가 실용성이 아니라 이성의 마음을 끌기 위한 도구였다고라? 1969년생인데 1949년생 같은 느낌!


이십 대가 돼서야 남자 친구 자전거에 함께 타보긴 했지만, 그건 이미 때늦은 ‘청춘’이다. 꺅꺅 즐거워하며 남자 친구의 자전거를 같이 탄들, 남들이 보기엔 ‘순수함’을 어필하여 남자를 유혹하려는 여자 그 자체.... 어차피 이십 대, 삼십 대의 순수함에는 누런 얼룩이 묻어 있다. -58쪽


이십 대가 때늦은 청춘입니까? 이십 대, 삼십 대는 순수할 수 없습니까? 이 정도면 병 아닙니까??


나는 수제 초콜릿을 만들어 주지 못한 채 어른이 돼버렸다. 그래서 수제 초콜릿을 선물한 청춘이 있는 동 세대 사람들에게 언제까지고 패배감을 느낀다. 설령 그 사람이 지금의 나보다 늙어 보이거나 나보다 더 아줌마 같다고 해도... -66쪽


좋아하는 사람에게 수제 초콜릿을 만들어주는 로망은 이해할 수 있다. 근데 그거 못해본 사람은 해본 사람에게 패배감까지 느껴야 하는가. 참, 딱하다.


어른이 되어 수영장으로 데이트를 하러 간 적은 있지만, 자동차로 시작해서 자동차로 끝나는 데이트에서는 상큼한 청춘의 바람이 불지 않았다. -97쪽


수영복과 샤워용품, 갈아입을 옷과, 혹은 간식까지, 나올 때는 젖어서 무거워진 가방까지! 그 모든 걸 차 없이 진행하자니 그냥 다른 데 가서 데이트하는 게 낫지 않을까? 보통은 수영복 몸매나 수영복 디자인을 더 고민할 것 같은데...


지금의 나는 맛있어 보이는 사과구이를 전부 그에게 바치는 인생은 싫다.

맛있어 보이는 것이 있으면 둘이 반씩 나누어 먹는 게 좋다. 때에 따라서는 혼자 몰래 먹을 수도 있다.

그를 놔두고 여자들끼리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는 것도 즐겁다. 갈 때마다,

“다녀와도 돼?”하고 물어야 하는 인생이라면 정말 싫다.

젊을 때는 요리로 남자에게 인기를 얻으려고 시도한 적도 있다. 그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루어지지 않길 잘했구나 생각한다. -109쪽


진심임? 앞에서 내내 징징댔던 맥락과 통하지 않는다. 


연습 중에 빈혈로 쓰러지려면 역시 눈부시게 활약하는 아이가 아니고서야.... -116쪽


어릴 때야 빈혈로 픽 쓰러지는 아이에게서 낭만을 찾을 수 있겠지만, 아직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니 혀를 차게 된다. 더구나 눈부시게 활약하는 아이가 쓰러져야 그림이 된다고까지. 하아.... 답 없네요.



내 생각에는 스스로 청춘을 쫓아내는 것 같다.



요건 공감이 간다. 정말 참석하기 싫고 축의금도 아까운 그런 결혼식 말고, 축하해주고 싶은 친한 지인의 결혼식에 한껏 멋내고 참석할 때의 설렘 같은 것. 확실히 2014년을 끝으로 친구들 결혼 소식은 못 듣고 있다. 이제 돌잔치나 둘째 돌잔치 같은 연락만 온다. ㅠ.ㅠ


근데 일본에서는 신랑 신부에게 인사하러 손님이 가나 보다. 우린 식사하고 있으면 신랑 신부가 테이블 돌면서 인사를 하는데 말이다. 



생각해 보지 못한 부분인데, 정말 그럴 수 있겠단 생각이 살짝 들었음 ㅎㅎㅎ



저런 걸 '공주님 안기'라고 하는구나. 웬만큼 가볍지 않으면 남자 허리 나가지 않을까? '미남이시네요'란 드라마에서 장근석이 쓰러진 박신혜를 저렇게 안고 차에 태우는 장면이 있었는데 정말 안습이었다. 지금처럼 젖살 빠지기 전 신혜 양은 여전히 예뼜지만 공주님 안기는 다소 무리. 비쩍 마른 장근석이 막 휘청였던 기억이 난다. 천둥의 신 토르같은 근육남이 아닌 이상 웬만해선 힘든 설정이지 싶다. 


 

 어려보이는 것도 탈인감? 괜찮다는 것도 싫으면 뭐라고 해?? 

 

마스다 미리는 '주말엔 숲으로'가 최고였다. 그밖의 여러 작품을 읽었는데 다 고만고만하다. 특히나 이 작품의 경우 이런 걸 책으로 내는 건 종이 낭비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나도 소심한 편이라 생각하고 남의 시선 당연히 신경 쓰일 때 많지만 이 작가님은 중증인 듯. 읽으면서 갑갑해서 혼났다. 


내 멋대로 제목에 감정이입하자면 여전히 나를 두근거리게 하고 설레게 하는 것들은 참 많다. 너무 많아서 다 쓸 수가 없네. 

집에 아직 비닐도 안 뜯은 마스다 미리 작품이 많은데 미간이 절로 찌그러지고 있다. 부디 '주말엔 숲으로' 때의 애정으로 다시 회복될 작품들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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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6-01-19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일전에 이야기 했지만 주말엔 숲으로 만 좋았음요.
그다음은 참....킁!!

마노아 2016-01-20 21:33   좋아요 0 | URL
이분에게 페미니즘 책 한권 소개해 주고 싶더라구요. ㅎㅎㅎ

치니 2016-01-19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허, 이 작가님 큰일 날 분이네요. 거 참. (참고로 저는 마스다 미리 작품 한 권도 안 읽었는데, 이 글 읽으니까 앞으로도 걍 읽지 말까 싶어지네요. -_ㅠ)

마노아 2016-01-20 21:33   좋아요 0 | URL
홀딱 깨지요? 근데 또 `주말엔 숲으로`는 드물에 아주 좋았답니다. 딱 하나 보신다면 이것만 보셔요^^ㅎㅎㅎ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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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책상을 마주하고 앉은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서 가장 젊은 선생님이다. 1학기 때 학부모 상담 시간에 아버지가 한분 오셨는데, 언뜻 언뜻 듣기에도 이분이 자꾸 말이 짧아지는 거다. 눙치고 들어가는 말투를 쓰는 많은 분들이 그렇게 말이 짧아지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자식 담임 선생님께 그러는 건 좀 아니다 싶어서 신경이 쓰였다. 이분은 2학기 상담 때도 또 오셨는데 이번에도 역시나 말이 자꾸 짧아지곤 했다. 상대가 거의 자식 뻘에 가까울 만큼 젊디 젊긴 했지만, 그것보다는 상대가 '여자'라는 게 이분의 말이 짧아지게 한 동력이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했다. 마주보고 앉은 상대가 젊디 젊은 '남자' 선생이었다면 그렇게 수시로 말을 잘라먹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런 사례는 정말 비일비재하다. 아마 남자로 살고 있다면 잘 못 알아차렸을 수 있겠지만, 그런 취급을 늘 당하곤 하는 여자로 살다 보니 자주 목격하고 또 당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다. 이 정도야 뭐... '귀여운' 수준이다. 이 책에서 통계로 말해주는 그 숱한 강력범죄와 비교한다면 말이다.


미국이라는 '제국'이 전 세계에 드리우는 그림자를 생각하면 참으로 무섭다가도, 그럼에도 자국 국민들에게 하는 걸 보면 그래도 제 식구들은 감싸는구나... 싶다가도, 그런 미국조차도 여자와 남자는 이렇게 다른 대접을 받는구나 싶어서 적이 놀랐다.


중동 국가에서 여성의 증언은 법적 효력이 없다. 따라서 여성은 남성 강간자의 주장을 반박할 다른 남성 증인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 자신이 당한 강간을 스스로 증언할 수 없다. 당연히 그런 증인은 드물다. -17쪽


그러니까 이런 중동 국가와 비교가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미국에서는 매일 약 세명의 여자가 배우자나 옛 배우자에게 살해당한다. 미국에서 임신부의 주요한 사망 원인 가운데 하나도 바로 그것이다. 강간, 데이트 강간, 부부 강간, 가정폭력, 직장 내 성희롱을 법적 범죄로 규정하려고 애써온 페미니즘의 투쟁에서 핵심 과제는 우선 여성을 신뢰할 만하고 경청할 만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었다. -19쪽


이 나라에서는 9초마다 한번씩 여자가 구타당한다. 확실히 짚어두는데, 9분이 아니라 9초다. 배우자의 폭행은 미국 여성의 부상원인 중 첫 번째다. 질병통제센터에 따르면, 매년 발생하는 그런 부상자 200만명 가운데 50만명 이상은 의료 처치를 받아야 하고 145,000명 가량은 입원해야 한다. 사후에 치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여성이 얼마나 되는지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겠다. 미국 임신부의 사망원인 중 수위에 꼽히는 것 또한 배우자 폭행이다. -49쪽 


이런 숫자는 경악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미국에서조차도!!


물론, 반대 사례도 있다. 전 IMF 총재 스트로스 깐 사건의 사례 말이다. 한국에서 사회적으로 이렇게 압도적인 권력과 명성을 가진 남성을 상대로 훨씬 가난하고 힘없는 여자가 고발을 한다면.... 언론에 나오기나 할까 모르겠다. 


아무튼, 여성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거나 혹은 남성보다 못한 존재로 보는 그런 시각은 인류 역사 내내 있어 왔고, 21세기에도 사실 만연해 있다.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투쟁해 오고 목숨 바쳐 싸워온 덕분에 겨우 이정도 왔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 같다. 그렇게 피흘려서 온 게 여기까지라는 것.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남자들은 볼멘 소리로 난 그렇지 않은데... 라며 불쾌해 한다. 싸잡아 욕먹는 불쾌감을 당연히 이해한다. 일면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한번씩 생각해 줬으면 싶다. 어디서나 언제나 위험과 공포에 노출되는 불안함과 비교해서 어느 쪽이 더 슬픈 일인지. 가수 김범수가 어릴 적에 골목길을 걸을 때 앞에 여자가 있으면 일부러 발소리를 더 크게 내는 장난을 쳤다 라디오에서 얘기한 기사를 보았다. 그렇게 큰 소리를 내면 앞에 가던 여자가 도망치듯 뛰어갔다고. 철없던 어린 시절의 장난임이 분명하겠지만, 그걸 방송에서 이야기할 정도면 아직도 골목길에서 불안감에 심장 펄떡이며 뛰어야 했던 여자의 공포 따위는 모르는 사람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무심함이 돌멩이 하나로 개구리를 죽이는 것이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고 납득하지 못하지만 여자들이 늘 노출되어 있는 세상의 돌멩이를 말이다. 


시사인 434호에 신윤영 씨가 쓴 글이 인상 깊었다. 늦은 밤 자신의 뒤에서 걸어오던 남자가 갑자기 자기의 어깨를 덥석 잡았던 것이다. 여자는 공포에 질려 뭉크의 '절규' 같은 표정으로 보았고, 남자는 "동네에서 몇 번 봤는데 혹시 시간 있으시면..."


하아, 센스 없는 건 둘째 치고 이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다고 일갈하고 싶다. 필자는 이렇게 썼다.


너무 화가 나서 무서운 것도 잠시 잊었다. 으슥한 밤길에서 이따위 묻고 거친 방법으로 모르는 여자에게 말을 걸다니, 당신은 당신과 다른 처지의 사람들이 어떤 공포와 불안감을 참으며 사는지 전혀 모르지? 그런 건 관심도 없지? 왜 허락도 없이 남의 몸에 다짜고짜 손부터 대냐고! 


하지만 필자는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무슨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쩌라고. 나름의 임기응변으로 그 자리를 피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어서 말한다.


여자들은 철이 들기 전부터 '낯선 남자'에 대한 공포를 집요하게 교육받는다. 밤늦게 다니면 위험하다, 노출이 심한 옷을 입으면 성범죄의 표적이 된다, 남자는 성욕을 제어할 수 없다 등등. 뼛속까지 스민 교육의 결과로 뒤에서 걸어오는 낯서 남자를 불안하게 돌아본다든가 계단에서 가방으로 스커트를 가리기라도 하면 '왜 가만히 있는 남자들을 치한 취급을 하느냐'며 볼멘소리를 듣는다. 몸을 드러낸 옷을 입으면 '헤픈 여자' 취급을 받고 몸을 꽁꽁 싸매면 '수녀원에서 나왔느냐'며 비웃음을 받는다. (...) 사실 성범죄의 원인은 여자의 옷차림도, 여자의 '평소 행실'도 아니다. 원인은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 단 하나다. 그렇다면 여자아이들에게 두려움을 주입하며 마치 통제 안 되는 짐승("남자는 다 늑대야")인 양 남자 전체를 매도하는 것보다는 남자아이들에게 '허락 없이 남의 몸에 손을 대면 안 된다' '상대가 싫다고 하면 정말 싫은 거다'라고 가르치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분명 대부분의 남자는 선량한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남자의 99%가 좋은 사람이라 한들, 그렇지 않은 나머지 1%의 파괴력이 너무 크다. 결국 그 1% 때문에 나머지 99%까지 경계하게 된다. 혹시 늦은 밤 눈에 띄게 불안해하며 종종걸음으로 당신 앞을 걸어가는 여자를 보게 되더라도 너무 기분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만약 그녀가 당신을 겁내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당신이 인상이 나쁘다거나 뭘 어떻게 해서가 아니라 그냥 당신이 남자여서 그런 거니까. 그날 밤 이후 나는 해가 지면 무조건 택시를 탄다. 


비슷한 이야기가 이 책에도 나온다. 


내가 지금보다 젊었을 때, 드넓은 캠퍼스에서 여학생들이 강간을 당하자 대학 측은 모든 여학생에게 해가 지면 밖에 나가지 말라고, 아니면 아예 나돌아 다니지 말라고 일렀다. 건물 안에 있어라. (감금은 호시탐탐 여성을 감싸려고 대기하고 있다.) 그러자 웬 장난꾸러기들이 다른 처방법을 주장하는 포스터를 내붙였다. 해가 진 뒤에는 캠퍼스에서 남자를 몽땅 몰아내자는 처방이었다. 그것은 똑같이 논리적인 해법이었지만, 남자들은 겨우 한 남자의 폭력 때문에 모든 남자더러 사라지라는, 이동과 참여의 자유를 포기하라는 말을 들은 데 대해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111쪽


겨우 한 남자의, 그러니까 1%의 나쁜 새끼 때문에 대부분의 여자들이 겪으며 감수해 오며 살아왔던 그 숱한 시간들을 한번쯤 생각해 봤으면, 충격이나 억울하다는 표정 대신에!


기사를 쓴 피터 베이커가 우리에게 환기해준바, 제노비스가 강간당하고 살해되는 광경을 자기 집 창문으로 목격한 이웃들 중 일부는 낯선 남자가 저지른 야만적인 폭행을 남편이 ‘자기’ 여자에게 권리를 행사하는 장면으로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남자가 아내나 연인에게 가하는 폭력은 대체로 사적인 일로 치부되었던 것, 그것이 분명 중요한 문제였다. -188쪽


이 부분을 보면서 또 다시 소환된 기억이 있다. 1989년이다. 이모가 강도를 만나 돌아가셨고, 형사들은 이모부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새벽에 화를 당했는데, 비명을 지르는 여자 목소리가 이웃들이 듣기에 '부부싸움'하는 것처럼 들렸다는 증언이 나온 것이다. 이모의 시신은 연쇄살인범의 짓답게 참혹했다. 그 지경이었는데도 누군가는 그걸 남편이 ‘자기’ 여자에게 권리를 행사하는 장면으로 오해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이 책은 읽는 내내 무한공감에 빠져들기 때문에 무한좌절에 빠지기도 쉽다. 그렇지만 한숨부터 쉴 필요는 없다. 꽤 슬픈 이야기지만, 이 기막힌 이야기를 저자 리베카 솔닛은 제법 유쾌하게 풀어나가고 있으니까. 원래 투쟁에는 유머가 필요한 법. 심각하기만 하면 이 길고 지루한 싸움을 버텨낼 수 없다. 


여기 그 길이 있다. 천 마일은 될지도 모르는 기나긴 길이다. 이 길을 가는 여성은 채 1마일도 걷지 못했다. 그녀가 얼마나 더 가야 할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되돌아오진 않으리란 것은 안다. 그리고 그녀는 혼자 걷지 않는다. 수많은 남자, 여자 들, 그보다 더 흥미로운 다양한 젠더의 사람들이 함께할지 모른다. 여기 판도라가 손에 들었던 상자와 지니가 풀려난 호리병이 있다. 지금 그것들은 감옥과 관처럼 보인다. 이 전쟁에서 사람들은 죽을지언정, 생각들은 지워지지 않는다. [2014] -227쪽


'페미니스트' 혹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쓰기 불편했다.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이 단어에 씌어진 이미지가 말하는 사람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역자가 지적했듯이 그러나 젠더를 빼고서 젠더를 말할 수는 없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선언은 무엇보다도 페미니즘에 씌워진 부정적 의미를 걷어내고 현재에 필요하며 바람직한 방향으로 그 용어를 되찾겠다(reclaim)는 뜻이다. 용어가 문제적 현상을 호명함으로써 변화를 돕는 도구라고 할 때, 날이 너무 무뎌서 아무것도 벨 수 없는 도구는 쓸모가 없다. 휴머니즘이나 평등주의라는 대체 후보 용어의 경우가 그렇다. 젠더의 문제를 다룰 때 젠더를 빼고 말할 순 없다.  -232쪽


이 책을 읽으면서, 저 키링을 달면서 한 번 더 곱씹고 한 번 더 되새기며 페미니즘을 상기했다.  

설치고, 떠들고, 말할 것이다. 더 크게, 더 힘차게!



GO WILD, SPEAK LOUD, THINK H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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뽈쥐의 독서일기 2016-01-15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하면서 읽다가 이모님의 사연은 너무나 마음이 아프네요. 게다가 부부싸움으로 오해받은 이모부의 일이나... 정말 부부나 연인관계는 그럴 수 있다고 치부하는 거 넘 화나요. 그것 때문에 죽는 사람이 얼만데...
남초 회사에서는 재가 담당잔데 사장없어요? 라고 묻는 인간들이나 여자만 있는 여초 회사에 가도 담당자보다 외부 남자들 얘기를 더 신뢰하는 사장한테서 유리천장을 경험하고 멘붕에 빠질 지경입닏다

마노아 2016-01-16 17:23   좋아요 0 | URL
고문이 여전히 실행되던 시절인지라 당시에 이모부가 열흘 간 잠을 안 재우는 고문을 당했는데, 더 있다가는 너무 힘들어서 자기 짓이라고 거짓 자백을 할 지경이었대요. 다행히 열흘 째에 진범이 잡혔지만요. 참 소설 속에서나 낭놀 법하 일이죠.ㅜ.ㅜ
남초 회사건 여초 회사건 어디나 여자들의 위치가 참 갑갑하지요. 이놈의 유리천장! 그래도 꾹꾹 버텨냅시다. 꼭이요.(>_<)
 
더 뮤지컬 The Musical 2015.10
클립서비스 편집부 엮음 / 클립서비스(월간지)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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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달 더 뮤지컬을 어제야 다 읽었다. 11.12.1월까지가 밀려 있음은 물론이다. 쿨럭!

그러니까 이 잡지를 10월 초에 받아서 몇 페이지를 읽고는 그 다음을 3개월 뒤에야 읽었던 것이다.

이제 이러지 말자. ㅡ.ㅜ


커버는 내가 참 좋아하는 작품 '프랑켄슈타인'이다. 유준상-한지상 캐스팅과 유준상-박은태 캐스팅을 보았다.

유준상은 레베카가 참 좋았는데 빅터는 다소 아쉽다. 



신인 배우 최우혁이 앙리 역으로 참여했다. 생애 첫 오디션에서 주연을 꿰찼단다. 그것도 앙상블로 오디션을 봤는데 무려 '앙리 뒤프레'를! 비록 예매를 하진 않았지만 기대주로서 관심 갖고 지켜봐야겠다.


(손이... 손이... 너무 고와!!!)


내년 6월 세종문화회관에서 모차르트 공연 예정이란다. 연출자가 일본인이다. 오!


뮤지컬 배우가 출연하는 오페라 '리타'가 궁금했었는데, 공연 당시 일정이 맞지 않아서 보지는 못했다.

오페라는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뮤지컬 배우가 부르면 좀 다를 것 같아 궁금했는데 살짝 아쉽다. 

심지어 연출도 뮤지컬 배우 양준모가 했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올해 뉴욕에서 '오셀로' 연극을 한단다. 그가 맡은 역할은 오셀로를 파멸로 이끄는 희대의 악역 이아고. 잘 어울릴 것 같다.


'명동로망스'는 2015년을 살고 있는 9급 공무원 장선호가 1956년 명동의 로망스 다방으로 건너가 당대의 예쑬가들과 만나게 되는 타임슬립 뮤지컬이란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예술가로 전혜린, 이중섭, 박인환 등이 나온다고.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떠오르는 설정이다. 무척 재밌게 본 영화라서 이 뮤지컬도 궁금증이 인다.


함부르크의 엘브필하모니아 홀 내부 사진을 보고 흠칫 놀랐다. 객석이 예술이다. 세상에!



광주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공연장이 생겼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건물을 포함한 주변까지 다 더하면 국립중앙박물관이나 예술의 전당보다 크다고 한다. 우왕!


매달 사서 보고 있는 잡지인데 방금 기사 내용이 전부 인터넷에 올려져 있음을 알아버렸다. 살짝 배신감이 들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뮤지컬에 관심 가져주면 좋은 거지 뭐~ 

나는 모니터로 읽는 걸 안 좋아하니까 앞으로도 계속 잡지는 사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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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8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16-01-08 22:10   좋아요 0 | URL
네네 책이 바로 도착해서 저도 기뻐요. 아무쪼록 즐독하셔용~ 불금 즐겁게 지내시구용(≥∀≤)/
 
고함쟁이 엄마 비룡소의 그림동화 148
유타 바우어 글.그림, 이현정 옮김 / 비룡소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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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펭귄이 아기 펭귄에게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아기 펭귄이 흩어져 날아가고 말았다. 멘붕이 와버린 머리는 우주까지 날아가 버렸고, 몸은 바다에 떨어졌다. 두 날개는 밀림에서 길을 잃었고, 부리는 산꼭대기에, 꼬리는 거리 한 가운데로 사라져 버렸다. 그 자리에 남은 건 두발 밖에 없었지만, 그 발은 곧 달리기 시작했다. 흩어져버린 몸을 찾고 싶었지만 너무 멀리 가버린 아기 펭귄의 몸들. 지친 몸이 사하라 사막까지 도착했을 때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바로 엄마 펭귄! 엄마 펭귄이 아기 펭귄의 몸을 찾아 일일이 꿰매고 있었던 것이다. 다 꿰매고 난 뒤 엄마 펭귄은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마 꼭 품어 안아 주었을 것이다.

 

처음엔 뭐 이렇게 잔인해!하고 보다가 곰곰 되씹어 보니 엄마의 고함이, 부모의 신경질이, 보호자의 분노가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이 이 정도의 충격을 주겠구나 생각하니 크게 공감이 갔다. 아마 우리도 그랬을 테지만, 아이들은 대체로 자기가 뭘 잘못해서 야단맞는지 잘 모른다. 어른들은 자신의 '상식'과 '기준'으로 아이를 다그치지만 아이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상태로 일단 주눅이 들고 일단 눈치부터 살핀다. 그래서 아이를 납득시켜주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부모는, 보호자는, 어른들은 그걸 건너뛸 때가 많다. 그래서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도리어 미안해질 때도 많이 있는 것이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이 책을 다시 들여다보면 책이 더 크게 공감이 갈 것 같다. 울 엄마는 고함쟁이야!에 동감할 아이도 많을 것 같고. 짧지만 굵은, 메시지도 분명한 책이다.

 

'엄마가 들려주는 아우슈비츠 이야기'에서 이 책을 추천한 걸로 기억한다. 역시 눈높이가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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