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 - 베트남과 친구되기
김현아 지음 / 책갈피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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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

베트남전 당시 북베트남의 장교였던 휴인 응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한국이 자의적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은 미국과 다르게 식민지 경험이 있다. 식민지의 고통을 겪었던 민족이라면 다른 민족을 침략하지 않는다. 한번 식민지 경험을 한 민족은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고자 하는 생각이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 한국 정부는 미국의 압력하에 있었다. 미국이 한국을 베트남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죄악이다. 한국은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분단의 경험이 있다.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한 한국 민족은 다른 민족의 고통을 알고 있는 민족이다. 그러므로 타민족을 침략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이 죄가 있다면 자주를 지키지 못한 것이다. 미국의 요구에 거부할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 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이 미국의 요구에 의해서만은 아니다.
-102쪽

여러 가지 위기에 직면해 있던 제3공화국 정부는 당시에 처해 있었던 대내적인 정치 경제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오히려 적극적으로 파병했다고 볼 수 있다. 즉 한국의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압력에 따른 불가피한 파병이라기보다는 당시의 대내외적인 위기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박정희 정부가 적극적으로 선택한 정책 결정으로서 제3공화국의 정치적 돌파구였다고 할 수 있다.

베트남전에 대한 일반적인 한국인들의 태도는 열광은 아니라 하더라도 공모자 혹은 방관자의 위치에 있었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지식인들은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비판의 담론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정치권 역시 마찬가지였다.
-105쪽

과거에 독립운동가였고, 야당의 정치지도자이기도 했던 박순천은 비행기 위해서 이 풍요와 다산성의 대지를 내려다보고 너무도 황홀한 나머지 베트남 땅에 입을 맞추며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남의 나라에 군대를 보내고, 민족의 위력을 발휘한 이 감격, 이 비옥하고 광활한 땅이 우리의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라고 <동아일보>에 기고한 적이 있다. 남의 나라에 조국의 들판을 빼앗긴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그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그 당시 우리 나라 정치인의 인식의 척도를 보여주는 한 예라 할 수 있다.
시인 모윤숙은 ‘또 다른 전선에서 국군을 본다’라는 시를 써 베트남 파병은 "자유를 잉태하러" 가는 길이니 "죽음도 마다 않고" "잘 싸워라"며 "가도가도 깊어지는 밀림 수렁"으로 젊은이들을 몰아넣는다.
-106쪽

미국 내에서도 반전 운동이 본격적으로 발전해 1968년 존슨 대통령의 대선 출마를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온 세계가 베트남전을 반대하고 반전 시위를 하고 있었을 때도 한국에서 반전의 목소리는 찾기 어려웠다. 대한 뉴스에서는 ‘귀신잡는 해병대’의 신화를 만들어내고, 여전히 부산항에서는 여학생들이 눈물의 손수건을 흔들었고, 파병 군인들의 용맹성은 과장되어 미디어를 장식했다.
베트남전의 성격 규명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지식인 사회에서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진보적 잡지였던 <사상계>에서조차 베트남전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찾아보기 힘들다. 언론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들은 베트남전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는 단 한줄도 내지 않았다. 마치 미국 정부의 대변인처럼 언론은 철저하게 미국의 입장을 대변했다.
-109쪽

위문편지 쓰기 운동과 위문품 보내기 운동에 동참한 일반 시민들이 파병된 군사들이 보내오는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카메라에 매료되었을지언정 불과 몇 년 전 우리가 겪었던 전쟁을 똑같이 겪고 있는 아시아 민중들의 고통에 대해 생각지 못했던 것은 정보의 차단 속에서 전쟁의 실상을 제대로 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언론과 지식인의 책임회피는 대부분의 국민을 전쟁의 공모자로 만들었다.
미국의 정신분석가 월터 C 랑거는 "독일의 광기를 만든 사람은 히틀러임과 동시에 독일의 광기가 히틀러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박정희가 연인원 32만의 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인들의 방조와 묵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제 역할을 못 한 언론과 지식인의 침묵은 정권을 위해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박정희와의 암묵적 공조에 다름 아니었다. (그것은 "베트남 전쟁으로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 발전하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그 문제에 대해서 말해선 안 된다"라는 논리와 박정희 기념관을 건립하는 것과의 또 하나의 공조체제로 이 사회에 나타나고 있다.)
-110쪽

베트남 전쟁은 위기에 처했던 박정희 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베트남 전쟁으로 정권의 초석을 다진 박정희는 장기집권의 길로 들어서고 암울한 폭압정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폭압정치의 실현에는 대다수 국민들의 일조가 있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3선 개헌과 유신헌법을 통한 폭압정치의 물적 토대는 바로 베트남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전 세계적으로 자유와 이성의 새로운 장을 열게 한 베트남 전쟁이 한국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을 촉발시켰다.

한국은 베트남 전쟁을 통해 10억 달러를 벌어들였고, 한진 등은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10억이라는 숫자는 우리가 벌어들인 것만 계산할 뿐, 우리가 치러야 했던 대가나, 파병을 하지 않았더라도 우리가 거둘 수 있었던 경제적 성과를 의미하는 기회비용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게다가 미국의 용병이었다는 역사적 오명은 영원할 것이고, 이러한 명분이 쿠데타를 정당화시키고, 인권탄압을 자행하고도 국가의 이름으로 이것을 정당화하는 역사를 만들기 시작했다고도 할 수 있다. 역사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베트남전에서 벌어들인 10억 달러는 박정희의 독재를 공고화하고 군사 문화를 이 땅에 뿌리 깊이 심는 데 기여한다. 장기집권, 의문사, 고문, 전두환의 집권과 광주학살 등이 베트남전으로 배태되었다고 한다면 그 10억 달러는 이후의 한국현대사가 두고두고 갚아야 할 부채가 된 셈이다.
-110쪽

지금까지 베트남 전쟁 자체의 도덕성과 그 전쟁에서 한국군의 행위가 도덕적이었는가에 상관 없이 베트남 전쟁이 한국에서 ‘반공성전’이 되었던 것은 그 전쟁에 파병했던 권력이 만들어낸 신화였다. 전쟁의 부도덕하고 추악한 이면, 국가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는 살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금기였고, 특정 권력 집단의 기억만이 공식적인 기억으로 정착되고 기록되었다. 전쟁을 기획하고 일으키고 그 전쟁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긴 집단은 전쟁에 대한 기억마저 독점하려 하는 것이다. 교육과 문화와 매스컴을 통해 만들어진 의식은 다시 왜곡된 기억을 재생산한다.
-111쪽

6장. 새로운 만남

여람 마을에서 동네 사람들이 의견을 모아 한국인에게 부탁한 것은 위령비다. 이건 비단 여람마을만의 요구가 아니었다. 위령비가 없는 민간인 학살지에서 가장 소망하는 것이 위령비다. 베트남 사람들이 조상을 섬기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 못지 않았다. 그들은 집집마다 제단을 차려놓고 매일 향과 꽃과 차를 바쳤다. 제단은 집안의 가장 중앙에 차려져 있고, 살아남은 이들은 아침 저녁 따스한 차를 바치며 그들을 기억했다. 죽은 사람은 잊혀지지 않고 그들과 함께 있었다. 이곳은 응접실 공간이기도 해서 대부분의 인터뷰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140쪽

위령비가 있는 마을과 없는 마을의 느낌은 좀 달랐다. 위령비는 개인의 죽음이 사회화, 역사화 되는 기점이다. 즉 하나의 사건이 기억에서 역사로 넘어가는 작업이기도 하다.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이나 밀라이 박물관은 이를 잘 드러낸다.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의 취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밝혀 전쟁 범죄와 그 비극을 널리 알리고, 이 지구상에 다시는 그와 같은 전쟁으로 인한 인권 침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정부가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 만들어진 인권 박물관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삶의 흔적을 남겨 그 뜻을 기리고 추모함과 더불어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함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곳은 젊은 세대에게 박제화된 역사가 아니라 오늘 우리와 함께 하는 역사,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는 교훈을 주는 현장이라 할 수 있다. 이 역사관은 소수의 힘으로 시작해 국가권력에 맞서는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41쪽

"한국인인 내가 밉지 않으세요?"
"당시의 한국 군인들은 증오하지. 그러나 당신들은 그때 겨우 태어난 사람들인걸. 그런데도 이렇게 우리를 찾아와주니 고마워."
세 번째 답사를 다니며 나는 베트남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가 정책적 고나점과 승리의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어렴풋한 짐작을 해보았다. ‘과거를 닫고 미래를 보자’라는 현 베트남의 정책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의 증오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게 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아량 또한 이런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동기라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다 설명되지는 않는다. 여기엔 사회주의적 도덕성과 베트남인들의 기질 또한 포함될 것이다.
-148쪽

푸옌성의 당서기장 응웬 탄 꾸앙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베트남에는 응웬 짜이라는 영웅이 있다. 명나라 군사가 쳐들어왔을 때 대파한 장군이었다. 전쟁에 지고 달아나는 명나라 군사들에게 그는 식량을 내주고 배를 내주었다. 이것은 베트남의 중요한 역사적 전통의 상징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승리를 해왔고 이후에는 화해를 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화해를 하려는 노력들을 해왔다. 화해를 원하는 것은 평화를 위한 노력이다. 이것은 불가피한 결정이다. 우리의 전통이고 역사다. 누군가 우리의 자유, 독립, 행복을 침해할 때 우리는 언제나 일어서 싸운다. 우리는 자유를 얻었고 독립을 쟁취했다. 이제 우리가 원하는 건 행복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기 때문에 과거를 닫고 미래를 보자는 것이다."
-150쪽

‘과거를 닫고 미래를 보자’라는 말은 진실을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과거를 덮어두자라는 말이 아니다. 중요한 건 한국과 베트남이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자는 거다. 한국과 베트남 사람 모두가 자유를 원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다. 또한 자신들의 독립을 지키고자 했다. 똑같이 그렇게 원했는데 어느 한쪽이 다른 한 나라에 가서 사람들을 죽였다면 분명 어느 한쪽의 잘못이 있다는 얘기다. 한 가지 분명한 건 한국 군대가 다른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싸운 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 정부의 참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진실을 찾지 않고는 용서가 가능하지 않다. 베트남 정부의 정책은 명확하다. 전 세계 모든 이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한다. 과거를 닫는 노력은 양국이 같이 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과거를 닫을 것인가.

-151쪽

푸옌성의 당서기장 응웬 탕 꾸앙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역사를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또한 재산이다. 역사를 떠나 현재의 삶이 존재할 수 없다. 지금 현재의 삶이 미래를 결정하듯이 과거를 떠나 존재하는 삶이란 건 없다. ...... 나는 한국 정부의 침묵을 이해할 수 있다. 한국 민족 전체가 과거의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다. 그 잘못은 군대를 파병한 당시 한국 정부에 있다.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한국에서 좋은 사람들이 많아지고, NGO들의 호라동이 이어지고, 베트남전에 대한 인식이 확대될 때 이것은 가능한 일이다. 미국도 노근리의 잘못을 인정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한국 정부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성급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세대가 원한과 증오와 복수심을 가졌다면 이것을 극복하는 책임도 우리 세대에게 있다. 여러분들의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들의 이런 노력이 증오와 분노를 지워가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155쪽

시인 이니는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 미국인들이 베트남전을 형상화한 글은 아주 흥미롭다. 미국인들이 베트남전에 그렇게 천착하는 것은 결국 그 전쟁을 해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건 한국군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전쟁에 대한 피해의식은 침략을 당했던 베트남 사람들보다 침략을 했던 미군이나 그것을 도왔던 한국인들에게 더 강하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 베트남 사람에게는 우리 스스로를 지키는 전쟁이었다. 전쟁의 목적이 명확했다. 당연히 싸워야 된다고 생각했다. 똑같은 전쟁이 발생한다면 나는 또 사울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다를 것이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 한국군인이 야만적이고 참혹한 짓을 저질렀다면 분명 그는 이 행동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 전쟁을 해석할 수 없었다는 말이 된다. 내가 했던 행위를 설명할 수 없는 불확실함이 전점 더 나를 미궁으로 몰고 갈 것이다. 수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도대체 내가 무엇 때문에 사람을 죽인 것인지, 내가 왜 그곳에 갔는지를 해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전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비한다면 베트남 사람들은 자신의 전쟁을 해석할 수 있다. 나는 과거의 잘못을 후회하고 어떤 형태로든지 전쟁의 상처를 메우려고 하는 여러분들의 노력에 감동한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인간의 가치다. 과거를 직시하고 비판하는 노력은 우리 세대에 있어서는 극히 드문 일이다. 사람들은 점점 탈정치화되고 과거에 대해 정직한 시선을 주지 않는다."
-157쪽

하노이에서 만난 소설가 바오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족해방에 대한 신념으로 전쟁을 치루었고,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절망감은 없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와 싸우면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시간이 상처를 덮도록 도와주었다. 잊어버릴 수 없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몽고와 중국과 프랑스와 미국과 그 오랜 전쟁을 치루며 망각이라는 강이 없었다면 우리는 죽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베트남 전쟁은 한국 전쟁과는 의미가 너무 다른 전쟁이었다. 베트남전은 명확하게 미국의 침략에 대한 독립 전쟁이었다. 베트남은 오랜 세월 전쟁을 겪으며 평화를 지향하는 민족이 되었다. 코소보 내전에 우리가 이렇게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다.
-158쪽

해방 전쟁은 필요했고 많은 피를 흘렸지만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북베트남 성인 남자 17명 중 1명 꼴이 남베트남 땅에서 죽어갔고 공습과 폭격으로 북쪽이 입은 손해는 GNP 17억불이었던 당시에 4억 불이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상처 뿐인 승리’였다. 그러나 이들의 역사를 보면 이러한 희생은 역사 속에서 계속 살아남아 새로운 기운으로 작용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스타일대로 일을 추진해왔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가 앞으로의 역사의 지평을 열 듯 앞으로의 역사가 과거 역사의 진실을 또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7천 명이 죽었고 4만 명이 투옥된 3.1 운동을 실패했다고 말할 수 없듯이 그리고 그 운동의 기억이 독립을 향한 두어 세대의 역사를 너끈히 지탱했듯이 인간의 역사는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수행해온 민족해방운동 과정이 민주적이고 현실적이며 민중적이었다면 그만큼 그 작업은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 해방 전쟁의 경험이 앞으로의 역사에 중요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긴 전쟁에서 살아남은 기쁨과 모두가 같은 선에서 출발하여 보다 나은 삶을 만들어 가려는 새로운 기운이 베트남을 이끌어 갈 것이다.
-159쪽

7장. 살아남은 자의 슬픔

"어머니는 신음하다, 울고, 비명을 지르고, 내 이름을 불렀지요. 런, 런, 아아, 런 어디 있니......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 밤은 왜 그렇게 길고, 어머니는 왜 그토록 오래, 질기게도 내 이름을 불렀는지. 그러나 나는 어머니를 위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어."
다음 날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신음과 울부짖음은 그대로 내 살에 박혀 내가 되었습니다. 피부를 쓸어내면 거기 어머니의 비명이 묻어나고, 귀를 파면 한웅큼 어머니의 신음이 따라나오지요."
그의 몸을 만져본다. 부드러운 다리 속에 파편이 만져진다. 섬뜩한 이물감이다. 살 속에 파고든 금속덩어리는 녹슬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차갑게 그의 살을 파고든다. 나이가 들며 총탄은 더욱 시리게 그의 몸을 떠다닌다.
-165쪽

많은 베트남 사람들은 전쟁도 힘이 들었지만 전쟁 후가 더 힘들었다고 말한다. 전 국토가 초토화되고, 숲은 망가지고, 우물은 다시 파야 하고, 수많은 지뢰를 제거해야 하고, 게다가 이런 일을 할 장정들은 다 죽어없어지고.
-169쪽

"왜 미국은 베트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탄타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답을 했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공동의 경험과 개인의 경험이라는 면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전쟁은 모두의 문제였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공동으로 치유할 수 있었죠. 전쟁으로 인한 슬픔과 비탄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공동으로 나누어야 할 과제였지요. 그러나 미국의 참전 군인들에게 전쟁은 개인의 문제였습니다. 전쟁의 경험은 철저하게 개인의 경험으로 치부되었고, 전쟁에서 받은 상처는 함께 감싸야 할 공동의 고통이 아니라 그 전쟁에 참여한 개인이 혼자 풀어야 하는 무거운 짐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봅니다."
-175쪽

"베트남에는 수천 년 저항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 전통은 집단 공동의식을 발전시키지요. 그리고 항미 전쟁 당시는 베트남에서 사회주의적 이상이 실현되고 정착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사회주의의 집단, 집체 시스템이 개인에게 작용해 개인화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사회주의는 집단, 공동의식을 고양시키고 발전시키는 제도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베트남의 어느 가족도 상실이 없는 가족이 없었습니다. 나 혼자 특별히 불행하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고통과 아픔은 모든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나만 특별하게 불행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고통에 대해 사람들은 덜 무겁게 느끼는 법이지요. 그러나 미국의 경우, 대부분의 미국 가정이 상실의 경험을 한 건 아닙니다. 참전 군인들은 그 개인들이 불행한 사람들일 뿐이었고, 그들은 아웃사이더가 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176쪽

미국에서 베트남전에 참전을 했다는 것은 자랑거리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한국에선 여전히 월남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러 갔던 귀신 잡는 해병대에 경의를 표했고, 아무도 베트남에 가서 무슨 일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참전군인은 한 집안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했고, 경제발전의 주역이기도 했다. 월남전의 성격에 대해 말하는 이도 없었고, 민간인 학살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는 더더욱 없었다. 그와 함께 참전 군인들이 겪어야 했던 혼돈과 갈등 또한 묻혀졌다.
-177쪽

한국 전쟁이 분단과 상실과 이산, 기형적 사회구도를 낳았다면 베트남전은 무엇을 낳았는가.
"중요한 건 우리는 통일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휴전과 통일은 전후의 사회를 재건하는 데 현격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휴전은 끊임없는 군비경쟁을 낳았고, 국가보안법을 낳았고, 최장기 양심수를 낳았고, 색깔론을 낳았다. 군사문화가 사회를 지배했고,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억압했으며,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도 보장되지 않았다. 사이렌이 울리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전쟁의 긴장은 많은 사람들을 주눅들게 했으며, 군대에서는 폭력이 난무해도 문제제기를 할 수 없는 기형적인 사회의 원죄는 휴전선에 있었다.
"그러나 통일을 이루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다 풀린 것은 아니었죠. 베트남 전쟁은 처음부터 미국과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베트남전의 베트남화로 전략을 바꾼 이후 이 전쟁은 동족끼리의 전쟁이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의 주적은 미국이었지만 우리에게도 이 전쟁은 커다란 문제를 야기한 전쟁이었지요."
-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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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 - 베트남과 친구되기
김현아 지음 / 책갈피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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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한 개인의 삶에만 파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민족이나 국가의 도덕적 성숙을 측정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이기도 하다. 무슨 말인가. 미국이 만일 최첨단 미사일이나 그린베레의 힘 대신 기억의 힘을 믿었다면 이번 테러에 대해 결코 전쟁이라는 보복 수단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이 믿는 기억의 힘이란, 오직 존 웨인식 ‘합리적 보복’의 전통에 대한 것뿐이다. 합리적 보복이라니! 그들은 존 웨인의 분노 이전에 거기 무엇이 존재했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복수의 총을 뽑아들기 전 그곳에 이미 대지를 붉게 물들이는 저녁노을이라든지 창공의 푸른 별, 땅의 체온, 반짝이는 물, 빛나는 솔잎, 해변의 모래톱이 존재했으며, 그 자연과 더불어 산 조상들에 대한 추억과 경험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원주민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결코 기억하지 못한다. 이번 전쟁 역시 그런 기억에 대한 전통과 능력이 부재한 미국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11쪽

베트남 전쟁에 대한 기억이라고 할 때 우리는 흔히 참전군인들의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춥고 배고프던 시절, 이역만리 월남땅에서 벌어진 전쟁은 마치 동화속 낯선 세상 이야기처럼 들려왔다. 그것은 전쟁의 실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어서, 그림책에서나 보던 남십자성과 야자수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거기에 돈이 더해졌다. 거기에 다시 ‘자유의 십자군’이라는 명분이 보태졌다. 아주 적은 수의, 전후의 폐허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당대의 정신적 황폐함 속에서 허덕이던 아주 적은 수의 지식인들은 전쟁의 극한 상황에서 자신의 실존을 시험해 보겠다는 무지막지한 기도를 숨긴 채 미군 수송선 바렛드호에 자청해서 몸을 싣기도 했다. 그렇게 전쟁은 다가왔고, 세월은 흘러 이제 전쟁에 대한 기억만이 남았다.

-12쪽

그런데 이제 그 전쟁을 기억하는 이들보다 기억하지 못하는, 아니 아예 자신들의 생의 지평에서 그런 전쟁의 존재조차 모르는 이들이 더 많은 시대가 되었다. 그들에게 ‘베트남전에 대한 기억’은 불쾌하다. 처음 한 번은 "아니, 그런 게 있었어요?"하고 호기심으로 귀를 빌려줄 것이고, 두 번째는 "아, 그 이야기?"하며 심드렁해 할 것이지만, 세 번째부터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낼 것이다. 전쟁 그 자체가 불쾌하다기보다, 자신들이 간섭할 기회조차 없던 전쟁에 대해 기억 운운하는 것부터가 불쾌할 것이다.
저자는 이제 우리 모두 기억하자고 말한다.
물론 그는 안다. 기억은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아니, 기억은 많은 경우 오히려 불쾌하다는 것까지도.
-13쪽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 아픔과 상처가 왜 쉽게 치유되지 않는 것일까. 그건 바로 기억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은 간단하다. 전쟁은 상대방이 있다. 우리의 아픔이 있으면 그들의 아픔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간단한 진실의 정체인 것이다. 그것을 배제하고 난 이후의 모든 사유는 결코 올바른 출구를 보장받지 못한다.

타자를 고려의 대상에 넣지 않으면 주체도 온전히 해석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고 말하는 것-이것이 바로 우리가 ‘근대’로 나아가는 지름길이자 유일한 길이 아닐까.
(소설가 김남일)
-21쪽

1장. 상상의 영토, 베트남

내 마음의 지도에 그려지지 않은 나라 베트남.
그러나 때로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일을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과 한 번도 꿈꾸어 보지 않은 그 일이, 사실은 내 오랜 열망의 결과라는 걸 가끔은 인정하게 된다. 우연처럼 다가오지만 그 우연을 만들기 위해 하늘 속으로 돌탑을 쌓아올렸던 건 바로 나였음을.
-28쪽

1998년, 아프리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봄이었다. 그전 한해 동안 나는 절멸의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인류가 이 지구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인류의 절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산한 달이 제 빛을 못 내고 여위어가는 도시, 매연과 소음, 배반과 불신, 죽어나가는 물고기, 파괴되는 숲, 더럽혀진 강, 희망 없는 일상, 썩어가는 정신...... 키를 넘는 욕망들이 눈을 희번득이는 자본의 도시에서 나는 때때로 숨을 쉴 수 없었고 자주 구역질을 했다. 우리에게, 이 오만하고 방자한 종에게 과연 미래는 있을까? 문명이라는 이름의 파괴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감당할 수 없는 이 속력의 끝은 어디인가?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아귀같은 탐욕만이 기승을 떠는 이 별에 한 가닥 희망이 있다면 인류의 절멸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했다.
-29쪽

아프리카는 겸허와 다양성이 미래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미래로 가는 길은 하나 뿐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 뿐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31쪽

이주노동자 문제나 장애인 문제를 풀어가는 일을 ‘나와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답사의 형식을 빌려오기로 했다. 장애인들이 가진 꿈 가운데는 늘 ‘여행’이 있었다.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를 보는 것은 그들이 일생에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일이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주노동자들 역시 한국을 여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돈을 벌러 왔기 때문에 가능한 한 돈이 드는 일은 하지 않으려 했다. 게다가 불법체류자가 대부분이었다. 없는 듯이, 존재를 최대한 감추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존재가 그 존재를 감추기 위해 존재한다는 건 얼마나 모순인가. 한국의 문화 역사 전통을 말하기에 그들의 환경은 너무나 열악했다.

-33쪽

위안부 할머니들과도 꽃놀이, 단풍놀이를 가기로 했다.
할머니들에게 기억을 꺼내는 것은 고통이다. 그런 밤이면 할머니들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할머니들의 증언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배우지만 할머니들에겐 그 일이 고통이 된다. ‘나와 우리’는 그냥 할머니들과 일년에 두 번 꽃놀이, 단풍놀이를 가기로 했다. 짙어가는 단풍을 보며 이승에서의 한 나절 잠시 즐거우시라고, 그렇게 할머니들을 모시기로 했다.
-34쪽

피스보트는 1982년 ‘일본 교과서 왜곡 문제’를 계기로 만들어진 일본의 시민단체다.
-35쪽

신차오-안녕하세요
신로이-미안합니다
까믄-고맙습니다(感恩)
공식적으로 베트남 전쟁이 시작된 것은 1965년이지만, 사실 인도차이나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 베트남이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한 이후부터 미국과의 전쟁은 막이 올랐다고 할 수 있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아시아의 한 작은 국가가 식민모국 프랑스를 스스로의 힘으로 물리친 군사적 대승리였으며, 베트남 민중의 저력을 보여준 기념비적인 전투였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은 제네바 협정의 테이블에 앉아야 했고, 그 결과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단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제네바 협정 이후 미국은 남베트남에 친미반공정권인 고 딘 디엠 정권을 세우고 대리통치를 시작한다. 고 딘 디엠은 남북 총선거 실시를 통한 통일정부라는 제네바 협정의 규정 이행을 거부한다. 약속대로 남북 총선거가 시행될 경우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의 승리가 확실시되었기 때문이다.
-38쪽

호치민이 통일베트남의 대통령이 된다면, 베트남의 공산화가 이루어지고 그렇게 되면 인도차이나 전체가 공산화된다는 것이 바로 미국이 베트남에 친미반공정권을 세우고 지원한 논리였다. 이른바 도미노 논리다.
‘도미노 논리’란 1947년 트루먼 독트린에 담긴 내용 중 핵심적 요소의 하나로,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전 세계적 차원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자유세계의 대응’이라는 논리로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이론에 근거하면 제3세계의 어떤 지역도 중요하지 않은 곳이 없게 된다. 이 도미노 이론은 미국의 전후 세계지배에 대한 환상과 상호작용하면서, 인도차이나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현실화시켜나갔다.
2차대전의 잿더미 속에서 산업을 부흥시키고 초강대국이 된 미국은 제3세계의 모든 지역을 미국의 잠재적 개입대상으로 여기게 된다. 세계를 통제하려는 미국의 야망이 시작되는 것이다. 결국 총선거는 무산되고 고 딘 디엠 정권의 독재와 부패로 남베트남 민중들의 불만은 높아져간다. 1955년에서 1963년 기간에 미국은 남베트남 군사 예산의 85%를 원조했으며, 민간부문과 군사부문을 합한 전체 사이공 정부 예산의 2/3를 제공한다.
-39쪽

독재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조직망만 더 넓혀나가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고 딘 디엠 정권은 붕괴되고, 연이은 수 차례의 군사 쿠데타를 거치면서 미국은 직접 개입방식을 선택하게 된다. 그 신호탄이 1964년 8월에 일어났던 통킹만 사건이다.
통킹만 사건은 전쟁을 시작하기 위한 사전포석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5년 3월 2일 북폭을 함으로써 미국은 본격적인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다.
베트남 전쟁은 단순한 공산주의와 반공산주의의 대결이 아니라 무력,힘,군사력,과학, 기술 등 물질만능주의와 민족해방,사회혁명,자주와 독립, 정신주의, 동양적인 토지소유와 관련된 농민들의 의식과의 대결 등 20세기 총체적 모순과 갈등이 뒤엉켜 있는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40쪽

미국은 "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되돌려 놓겠다"는 공언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2차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국이 전체적으로 사용했던 6백만 톤보다 1.5배나 많은 약 9백만 톤의 폭탄을 그 좁은 땅에 퍼부어 베트남 전 국토의 초토화에 전력을 쏟아부었다.(미국은 새로 발명된 온갖 신형무기를 그곳에서 사용하였다. 핵무기를 제외하고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쏟아부었다. 미국은 하노이를 굴복시키기 위하여 1,500억불의 전쟁비용을 소모했다. 이것은 1968년 한국의 정부 예산이 10억불 미만인 것을 생각하면 당시 우리 정부 예산의 150년분에 해당하는 금액이 된다.)
1965년에 시작된 베트남 전쟁은 1968년에 정치적 전환점을 맞는다. 1968년 1월 31일의 구정대공세는 대부분의 농촌과 도시를 잠시나마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장악하는 결과를 낳는다. 미국은 이에 경악한다. 당시 미국의 공식 분석으로 남부 베트남의 공산게릴라는 29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구정대공세는 그들의 수가 50만에서 60만 정도로 추산할만한 숫자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구정대공세는 공산게릴라가 남베트남의 농민 대중들과 맺고 있는 연대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미국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 것인지에 대해 미국민들의 의심이 본격화하는 시점이었다. 미국 내에서의 반전 시위가 본격화되었고, 유럽에서는 학생과 노동자들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1968년 5월 혁명이 그것이다.
-41쪽

미국은 오직 전쟁의 승리에만 집착했을 뿐, 한번도 베트남 사람들의 생명, 인간의 존엄성 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거나 고려한 적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베트남의 전 국토를 초토화시키고, 베트남인들의 참혹한 시체 위에 그들이 세우고자 한 자유와 정의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이러한 전쟁에 한국군이 파견된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부도덕한 전쟁, 인류의 양심에 칼을 긋는 전쟁이었다고 말하는 베트남 전쟁에 한국의 젊은이들이 파병된 것이다.
-42쪽

1965년 미국은 ‘베트남전의 국제화’를 통해 대베트남 군사 개입의 대외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25개국에 참전을 요청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대만 필리핀 타일랜드 영국 한국 등 단지 7개국만이 베트남전에 참전을 하게 된다 .그나마 한국을 제외한 나머지 6개국은 대부분 포병대와 공경대 등 실제 전투와는 관련이 없는 부대를 파견했다. 특히 영국은 거듭되는 미국의 요청에 사이공 탄선넛 공항에 6명의 의장대를 파견하는 것으로 간신히 미국의 체면을 살려주는 데 그쳤을 뿐이다. 6명의 의장대 파견이 보여주는 상징성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흔히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은 한국전 당시 미국의 신세를 톡톡히 진 한국이 도저히 미국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결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미국의 신세를 가장 많이 진 나라를 꼽는다면 당연코 영국이라 할 수 있다. 미국과 영국은 조상이 같은 형제국이며, 1차세계 대전은 물론 2차세계대전에서도 나치독일에 의해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단말마적인 순간에 영국을 구출해준 것도 미국이며, 전쟁으로 인한 총체적 파탄으로 삼류국가로 전락한 영국을 마샬플랜에 의해 다시 일류국가로 발돋움하도록 도와준 나라도 미국이었다. 이런 영국조차 6명의 의장대를 보내는 것으로 그친 명분 없는 전쟁이 바로 베트남 전쟁이었다. 그러나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등을 돌린 이 전쟁에 한국은 32만의 병력을 파병한다.
-43쪽

한국군은 모두 1,170회의 대대급 이상 대규모 작전과 55만 6천회의 소규모 부대 단위작전을 수행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9년여간 청룡, 백마, 맹호부대 등 총 31만 2,853명의 따이한이 머나먼 열대의 땅 베트남을 다녀갔다. 그 중 4,687명은 하나뿐인 자신의 생명을 이 열대의 땅에 부려놓고 원혼으로 돌아갔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은 전투 이외에도 길을 닦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생필품을 지원하고 태권도를 보급하는 등 대민지원 사업에도 공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군 활동의 전부는 아닌 듯하다.
"한국 군인들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이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이며 그 진실은 무엇일까.
-45쪽

한국과 베트남. 20세기의 중반까지 두 나라의 역사는 아주 비슷하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관계로 끊임없는 침략을 받았으나 끝까지 주권국가로 남았다는 것. 근대에 들어서며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였을 때 그들은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았다는 것, 2차대전의 종결과 함께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남북으로 분단되었던 것처럼 베트남 역시 프랑스와의 독립전쟁 이후에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 없이 남북으로 분단되었다는 것. 그리고 두 나라 모두 북에는 소위 ‘사회주의’ 정권이, 남에는 자본주의 정권이 들어섰다는 것, 그리고 그 남과 북이 또 한번 전쟁을 치룬 것. 어쩌면 이리도 비슷한 운명인지.
그러나 20세기 중반이 지나면서 두 나라는 극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인다. 한반도가 그 전쟁의 결과 남북으로 분단되어 휴전의 상태로 긴장을 유지하는 반면, 베트남은 그 전쟁에서 통일국가를 세우게 된다.
-46쪽

2장. 다른 기억

우리가 흔히 베트콩이라 부르는 사람들의 정식 명칭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대원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이들을 유격대원이라 부르기도 하고 해방전선대원이라 부르기도 했다.
-56쪽

당시 붕따우 마을의 주민수는 50~60명 정도였다. 그 중에 45명이 그날 한국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들 대부분이 여자와 어린이, 노인들이었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증오비는 당시 죽은 45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 사건으로 쩐 반 호아는 유격대원이 된다.

-58쪽

민간인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합리적인 이성이 모두 사라졌을 때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한다는 건 심장을 꺼내 보여 주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나를 규정하는 건 내가 아니라 그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그들이 원하는 누군가가 되라고 협박하고 고문했다. 내가 누구인지 머리를 쪼개 보여줄 수도 없었고, 가슴을 열어 보여줄 수도 없었다.
나는 누구인가. 그러면 너는 누구인가.
나를 나라고 해도 믿지 못하는 너는 누구인가.
인간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했다.
-63쪽

전쟁 중의 일은 전쟁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지 않았다. 전쟁은 그들의 현재의 삶을 규정하고 다음 세대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쟁 중의 기억만을 되살리고 발췌하는 것만으로는 전쟁이 인간에게 미치는 총체적인 영향을 이해하기에 한계가 있었다. 전후로 이어지는 삶의 이야기를 통해야만 전쟁과 전쟁의 기억이 한 인간의 삶과 영혼, 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67쪽

한 여자가 자신의 삶을 언어화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리라.
탕 티 카 내 가난한 자매에게, 지옥같은 삶을 견뎌내고 버티어낸, 봄향기같은 딸을 낳고 그 딸에게는 자신과 같은 삶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살고 있는 내 가난한 자매에게 나는 주고 싶다. 내 마음의 가장 아름다운 사랑, 연대.
-79쪽

3장. 전선 없는 전쟁, 반공주의, 이미지의 공포

해방공간과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 아니 ‘죽여야 한다’는 의식이 우리 몸에 내재되어 있었고, 베트남전 역시 이 연장선에서 진행되었다. 빨갱이라는 근거불명의 막연한 의심만으로도 사람들은 죽어갔고, 이미 월북했거나 피신해버린 사람들 대신에 그 가족이나 친지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것처럼 베트남에서도 역시 베트콩으로 의심되거나 그 마을에 베트콩이 있을 거라는 의심 하에 온 마을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경우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공이데올로기로 온 몸을 무장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현대사의 체험과 기억은 우리의 의식에 기형적인 반공주의를 각인했고, 반공의 이름으로라면 아이도 여자도 죽일 수 있었던 문화와 논리가 우리 속에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94쪽

우리는 흔히 학살이란 말의 무게 때문에 학살을 아주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모든 병사들이 각종 선진적인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현대전에서 학살은 별로 특별하지 않은 상황에서 아주 우발적으로, 쉽게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학살에는 분명히 정치적 목적이 들어있음도 또한 명심해야 한다.(한홍구,<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과 민간인 학살>)

한 발의 총성으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전쟁은 치밀하게 기획되고 준비되어 진행된다. 계급적, 정치적, 경제적 손익계산과 분석을 마친 후 이 전쟁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되는 집단이 발포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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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바이올린 - 베트남, 아무도 묻지 않았던 그들의 속내 이야기
정나원 지음 / 새물결 / 2005년 1월
품절


1945년에 북부를 휩쓸었던 대기근 이후로 베트남에서는 늘 '먹는 일'이 가장 큰 문제였다. 게다가 수십 년을 이어진 전쟁의 여파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폐해로 인해 반세기 동안 기아선상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이머이 이후 이베 베트남은 미국, 태국에 이어 세계 제3위의 쌀 수출국으로 발돋움해 있다. -41쪽

우리 세대는 거의가 젊은 시절을 전쟁터에서 보냈어요. 전쟁 때, 사람은 아주 단순해져요. 그 단순함 때문에 한순간에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겁니다. 우리 세대는 그렇게 자랐어요.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니깐 무서운 게 너무 많아지더군요.
제일 공포스러웠던 건 역시 가난이었지요. 우리가 전선에 있을 때 ,심지어 전쟁이 막 끝나고도 '위'에서는 그러더군요. 조국이 통일만 되면 순식간에 나라가 일어설 거라고, 우리는 지상 낙원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고.
그때 우리가 쇠고기를 한 달에 300g씩 먹도록 돼 있었거든요. 한 주일이나 두 주일에 한 번씩 배급을 타 왔나봐요. 집에 와서 100g도 안 되는 고기를 장기판의 말처럼 아주 잘게 썰어요. 그런 다음 생선젓갈에 버무려 양념이 다 스며들면 프라이팬에 볶아요. 그걸 다시 병 속에 넣어두고는 매일 두 조각씩 꺼내 먹는 겁니다. 다음번에 배급을 탈 때까지 단백질도 '계획적으로' 섭취해야 됐지요. 단백질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욕망과 꿈도 계획적으로 조절을 해야 했어요. -131쪽

'쯔엉선'이란 '기다란 산'이라는 뜻이다. 북베트남에서 남베트남으로 1,000km가 넘게 뻗어 있는 이 산맥을 따라 1번 국도가 함께 내려간다. 호찌밍 정부는 이를 이용해 1959년부터 쯔엉선 산속에 병력과 물자를 수송할 수 있는 군사작전 통로를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것이 '호찌밍 트레일'이다.

1965년에서 1968년 사이에만 약 7만여 명의 여성들이 호찌밍 트레일을 건설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입대했다. 미국전생 시기만이 아니라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에도 군수품 보급부대에 동원되었던 약 2만 6천 명의 자원부대 가운데 절반이 여성이었다고 한다.

통일 이후 하노이 정부는 '반동계급'으로 분류된 남베트남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일명 재교육촌이라고 불리운 수용소를 세웠는데 약 40여 개소에 2백만가량이 수용되었다고 한다.-136쪽

원래 우리네 풍습으로는 누가 죽으면 처음에 봉분을 씌운 자리에 한 3년 뒀다가 꼭 이장을 해야 돼요. 3년쯤 지나면 살이 다 썩고 뼈만 남질 않소. 우리는 그 뼈에 죽은 사람의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요. 그래서 뼈만 추려가지고 다시 새로 묻어줘야 돼. 그래야 죽은 사람의 영혼이 푹 쉴 수 있는 거라고.
호찌밍은, 그때가 1969년이었으니까 전쟁 통에 죽었질 않소. 유언에서는 화장을 해달라고 했어요. 통일이 되면 자신의 유해를 베트남의 북부와 중부 그리고 남부에 뿌려달라고 했지. 베트남 시골에 가면 어느 마을에나 사당이 있질 않소. 그이도 그런 조그만 사당이나 하나 지어달라고 그랬어. 주변에 나무나 몇 그루 심어서 사람들이 찾아올 때마다 거기 앉아 좀 쉬었다 가기도 하고, 애들은 나무 그늘 밑에서 놀다가 가고 그랬으면 좋겠다고.-142쪽

호찌밍은 우리한테 그런 존재였어요. 누구한테나 허물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중국의 '마오 주석'이나 북한의 '김일성 수령'하고는 좀 다르다는 얘기지. 그래서 미국 사람들이 우리가 그이를 보고 '엉클 호'라고 불렀다고 그러는데, 그것도 뭘 모르고 하는 얘기야. 미국 애들이야 외숙이고 백부고 다 엉클이니까.
그게 삼촌은 삼촌인데 예사 삼촌은 아니고, 우리말로 '박호(Bac Ho)'는 큰아버지라는 뜻이에요. 거, 집안에서도 아버지한테 직접 못할 얘기는 큰아버지나 삼촌한테 가서 하고는 하잖소. 어리광도 부리고 하소연도 하고. 그러니까 집안에 대사가 나면 나서서 처리도 하고, 집안에 분란이 나면 식구들을 다독거려서 집안이 화목하도록 이끌어 가는 역할이란 말이지. 나는 박호가 그런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요.-142-143쪽

우리 옛말에 이런 얘기가 있어요.
"문을 열면 바람도 들어오지만 먼지도 들어온다."
도이머이 이후에 물질적인 여건이 나아지고 있다는 건 나도 인정해요. 내가 독립운동에 뛰어들 때만 해도, 내가 이 나이가 뙜을 때는 베트남이 엄청나게 발전된 사회주의 국가가 돼 있을 줄 알았지. 이 프렌치 빌라를 다 차지하고 살고 있을 줄 알았다고. 그런데 아니야. 아직도 아니지.
그래도 우리는 나라 이름 아직 안 바꿨어요. 소련은 문패 갈았지만, 우린 아직도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이라고.-153쪽

베트남에서는 어느 집에 들어서든 그 집 조상을 모시는 제단과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되어 있다. 늘 드나드는 출입문 바로 맞은편에 두기 때문이다. 농부들은 들에 나갈 때도 조상 앞에 고하고,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제일 먼저 조상에게 고한다. 아무리 삶이 궁핍할지언정 매일 아침 물 한 그릇과 들꽃 한 송이 올리는 일을 잊지 않는다.
하노이 구시가의 들머리에 들어서면 자그마한 사당과 마주하게 된다. 사당은 늘 열려 있어 향내음이 그윽하고 그곳엔 늘 누군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 하노이에서 나고 자란 이들 가운데 30년 동안 이어진 전쟁에서 세상을 달리한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이다.
-271쪽

사당을 돌아 나오면 제단 물품이며 장례식용 물품들이 거리를 따라 이어진다. 구정이 다가오면 이 거리는 제단을 손질하고 향로를 새로 바꾸는 사람들로 그 어느 때보다 활기를 띠게 된다. 향로나 꽃병은 베트남인들에게 가장 신성한 일상 용품이며, 집안에 두어 개의 제단을 모시는 풍습은 지난 반세기 동안 베트남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종교적인' 전통이다. 고통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아온 베트남인들에게 제단은 망자들의 혼을 달래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산 자들이 거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 모태와 같은 곳이다.-271쪽

1975년부터 배급제가 폐지되는 1989년까지 약 1백만 명이 베트남을 떠났다고 한다. 현재 베트남의 해외 동포는 3백만 명에 이르며 70여 개국에 흩어져 살고 있다.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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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4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04 1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행히도 당신을 만나 참으로 행복합니다
예반 지음 / 징검다리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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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안녕이라고 말해야 하는 그 순간에

당신이 미소를 지으며

잘자요 라는 인사를 하였다면

당신은 오래지 않아

돌아올 것입니다.-?쪽

Have you ever smiled
And sead goodnight
When you were really
Saying goodbye-??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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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너는 죽었다
김용택 지음, 박건웅 그림 / 실천문학사 / 2003년 4월
절판


우리나라 꽃

산에 가면
산꽃들이 환하게 피어 있고요
들에 가면
들꽃들이 예쁘게 피어 있어요
어두운 밤하늘엔
별들이 도란도란 빛나고요
우리나라엔
우리들이 반짝반짝 빛나요

산에는 산꽃
들에는 들꽃
밤하늘엔 별꽃
우리나라엔
우리들이 꽃이에요-14쪽

큰물 지나간 강가

지렁이가 죽으면
개미가 치워줍니다

하늘에 먼지가 끼면
비가 땅으로 가져옵니다

두더쥐가 죽으면 썩고
썩은 것들은 흙이 가져가고
흙은 풀과 나무를 키웁니다

큰물 지나간
저 강가에 비닐과 농약병은
누가 가져갑니까-34쪽

비 오는 날

하루 종일 비가 서 있고
하루 종일 나무가 서 있고
하루 종일 산이 서 있고
하루 종일 옥수수가 서 있고

하루 종일 우리 아빠 누워서 자네-42쪽

우리 아빠 시골 갔다 오시면

우리 아빠 시골 갔다 오시면
시골이 다 따라와요

이건 뒤안에 상추
이건 담장에 호박잎
이건 앞마당에 토란 잎
이건 위꼍에 애호박
이건 강 건너 밭에 풋고추
이건 장광에 된장
이건 부엌에 고춧가루

우리 아빠 시골 갔다 오시면
시골이 다 따라와요
맨 나중에는 잘 가라고 손짓하시는
우리 시골 할머니 모습이 따라와요
할머니 보고 싶어요-44쪽

강 건너 콩밭

오늘도
학교 갔다 와서
아기 업고 강 건너 밭에
아기 젖 주러 갑니다

밭에 가면
어머니는 콩밭이 훤하게
지심을 매다가
내가
엄마!하고 부르면
아이고 내 새끼
아이고 내 새끼
배가 을매나 고팠을까 하며
수건 벗어 먼지 털고
밭가로 나와
아기 젖을 줍니다

아기는 두 손으로
엄마 젖을 움켜쥐고
젖을 빨며
까만 눈으로 엄마 눈을 바라봅니다
아기 눈엔 엄마가
엄마 눈엔 아기가 들어 있습니다

젖을 다 먹이고
아기 업고 돌아오면
아기는 내 머리를 잡아당기고
길가에 풀잎을 뜯기도 합니다
나는 풀꽃을 꺾어
아기 손에 쥐여줍니다

집에 와서
아기를 내려놓고
강 건너 콩밭을 보면
콩들이 엄마 뒤를 따라
올망졸망 자라고
내가 집에 다 갔나 못 갔나
고개 들고
우리 집 보며
또 자랍니다-60쪽

방학

학교는 뭘 할까

운동장은 뭘 할까

교실은 뭘 할까

내 책상 내 의자는 지금 뭘 할까
미끄럼틀 철봉은 서서 뭘 할까

선생님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내 짝은 숙제 다 했을까

학교는 지금 뭘 할까-107쪽

할머니 집에 가는 길 - 봄

할머니 집 가는 길에
산벚꽃이 하얗게 피어 있어요

할머니 집 가는 길에
진달래꽃 붉게 붉게 피어 있어요

할머니 집 가는 길에
동네마다 집집마다
살구꽃이 하얗게 피어 있어요

할머니 집 고샅길에
민들레꽃 피어 있고요
할머니 집 들어서면
오냐온냐 내 새끼 많이 컸구나
내가 내가 어여쁜 꽃이 됩니다-111쪽

할머니 집에 가는 길 - 여름

할머니 집에 가는 길
매미가 웁니다

할머니 집에 가는 길
염소가 웁니다

할머니 집에 가는 길
꾀꼴새가 노랗게 울며 납니다

할머니 집에 들어서며
할머니 할머니 찾아 부르면
아이고 내 새끼 더 많이 컸구나
보고 싶은 내 새끼
할머니가 웁니다-112쪽

할머니 집에 가는 길 - 가을

할머니 집에 가는 길
들국화가 피어 있는 길

할머니 집에 가는 길
산마다 단풍물이 곱게 물든 길

할머니 집에 가는 길
벼들이 노랗게 익어가는 길

할머니 집에 가는 길
알밤들이 툭툭 떨어지는 길

할머니 집에 가는 길
마을마다 지붕에
빨갛게 고추가 널려 있는 길

할머니 집에 가는 길
할머니들이 허리 굽혀
콩을 거두는 길-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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