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구판절판


장경사로서는 사실 이들의 행보를 불안해하던 참이었다. 신고가 접수되었다는 통보를 하고도 경찰측에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말미를 주었을 때 회유를 하든 합의를 하든 하다못해 깡패라도 동원해서 협박을 한 후 어디론가 쫓아 없애버리든 사안을 마무리했어야 했다. 그러나 역시 오래된 권력은 나태해진다. 그건 어쩔 수가 없는지 그들은 그저 어제처럼 오늘도 아무 일 없을 거라는 생각에 아무 대비도 하지 않은 듯했다. 그토록 힌트를 주었건만 이제 그로서도 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오랜 경험을 가진 그로서는 늘 하는 생각이었지만 나쁜 놈들이 아니라 어리석은 놈들이 수갑을 찬다. 맹수는 다리를 다친 사슴 한 마리를 잡을 때도 결코 방심하지 않는 법이다.

-149쪽

두 형제는 겁먹은 얼굴로 장경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장경사는 그러나 조만간 다시 이런 처지가 역전되리라는 것을 계산하고 있었다. 세상은 동화처럼 그렇게 녹록지 않은 것이다. 지금은 그들이 어린아이처럼 그의 바짓단을 붙들고 있지만 이 계절이 끝나면 지나온 긴 날들처럼 앞으로 많은 날들을 그들은 그 앞에서 지폐를 흔들며 거만하게 굴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번 기회에 자신이 그들의 은인이라는 것을 각인시켜야 했다.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인간들보다 우월할 기회는 거의 없다. 아니 동등할 기회조차 거의 없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153쪽

진실이 가지는 유일한 단점은 그것이 몹시 게으르다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자신만이 진실이라는 교만 때문에 날것 그대로의 몸뚱이를 내놓고 어떤 치장도 설득도 하려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진실은 가끔 생뚱맞고 대개 비논리적이며 자주 불편하다. 진실 아닌 것들이 부단히 노력하며 모순된 점을 가리고 분을 바르며 부지런을 떠는 동안 진실은 그저 누워서 감이 입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 도처에서 진실이라는 것이 외면당하는 데도 실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면 있는 것이다.

-165쪽

"민주화되고 나면 더 이상 이런 일 안할 줄 알았어요. 화가 난다기보다는 뭐랄까요? 견고한 저 성벽이 정권이 바뀐다고 변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결국 예수가 다시 온대도 또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겠구나 싶기도 하구요. 저런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또다시 예수를 죽이겠죠."

-189쪽

가진 자가 가진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에너지는, 가지지 못한 자가 그것을 빼앗고 싶어하는 에너지의 두 배라고 한다. 가진 자는 가진 것의 쾌락과 가지지 못한 것의 공포를 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거짓말의 합창은 그러니까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어서 맑은 하늘에 천둥과 번개를 부를 정도의 힘을 충분히 가진 것이었다.

-246쪽

"이 세상은 늘 투명하고 맑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에게 안개는 장벽이겠지만, 원래 세상이 안개 꼈다고 생각하면 다른 날들이 횡재인 거죠. 그리고 가만히 보면 안개 안 낀 날이 더 많잖아요?"

-253쪽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대해 너무 이상한 믿음을 가진 거 아니에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유명한 이유는 그게 천지창조 이래 한번 일어난 일이라서 그런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254쪽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정직도 정의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쩌면 그들은 더 많은 재물은 가끔 포기할 수 있어요.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거예요. 한번만 눈감아 주면 다들 행복한데, 한두 명만 양보하면-그들은 이걸 양보라고 부르죠-세상이 다 조용한데, 그런데 당신은 지금 그들을 흔들고 있어요.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변화를 하자고 덤빈단 말이지요."

-255쪽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

-257쪽

"분명히 말하는데 나, 우리 아버지 때문에 불쌍하고 불행한 적 없었어. 가난으로 말하자면, 타락한 세상에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도 해고당하고 사업 망하고 빚보증 서서 망해. 아니면 처음부터 쭉 가난하기도 하고. 아버지가 정권에 아부하면서 목회를 하셨대도 우리가 가난하지 않았을 거라는 보장은 없어. 아버지를 일찍 여의는 것으로 말하자면 동서고금 너무나 많은 아이들의 운명이야. 아버지들이 고문으로도 죽지만 병으로도 죽고 사고로도 죽고 자살도 하니까. 우리 아버지의 삶과 죽음은 인류의 반 이상이 겪는 그 어쩔 수 없는 가난과 편모라는 핸디캡 속에서 오히려 내가 왜 귀하고 자랑스러운 사람인지, 그 이유가 되어주셨어. 아버지 때문에 나는 그냥 남루하고 그냥 불쌍한 편모슬하가 아니었다구. 내가 불쌍하고 불행한 적이 있다면 그건, 나도 가끔은 뻔히 아니라는 걸 알면서 그것과 타협하고 싶어질 때야."
-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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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객 19 - 국수 완전 정복
허영만 지음 / 김영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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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의 다른 이름 강냉이.
강냉이란 중국의 양자강 이남, 즉 강남에서 건너왔다는 뜻이야.

'강낭콩'이라던지 '강남 갔던 제비'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도 같은 지역을 가리키는 거야.

옥수수라는 이름은 '수수'에다 '玉'자가 붙어 구슬처럼 윤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거지.

왜 풋강냉이로 올채이국수를 만들았는지 아나?
강원도는 머글게 음써서 강내이도 다 여물 때까지 기다릴 수 음썼거덩.
그래서 풋옥수수를 따다가 알이 차지도 않아 떼낼 수 음쓰니까 칼로 죽죽 끌거서 올채이국수를 맹글어 먹었어.

요긴 순저이 산이래요. 농사 지을 땅이 음써요. 그르니 쌀이 음찌.
옌날에눈 쌀 세 말 먹고 시집 가믄 부잣집 딸이란 말이 이썼써요. 그르케 낟알이 귀하니 우터해요. 이런기라도 먹고 살아야제.-148쪽

막국수는 6.25 전쟁으로 피난 오게 된 이북 사람들이 고향의 냉면 맛이 그리워서 대신 해먹던 거래.
뚝뚝 끊기는 메밀국수를 젓가락과 숟가락으로 마구 먹는 걸 옆에서 보고 '국수를 막 먹네' 하다가 막구수가 뙜다니까.

그건 내가 아는 것과 다른데?

막국수는 화전민과 관련이 있어.
강원도에는 메밀을 많이 재배했는데 메밀은 나쁜 땅에서도 잘 자라 화전을 3,4년하고 밭이 척박해지면 메밀 씨를 뿌렷고 풍부한 메밀로 국수를 해먹었어.
화전민들이 끼니를 때우기 위해 '마구' 뽑은 거친 국수였다 이 말이야.

또 <<춘천 백년사>>에 자세한 내용이 나와.
19세기 말 을미사변을 계기로 춘천 지역에 의병들이 일어났는데 일본군을 피해 가족과 함께 깊은 산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고 조나 메밀, 콩으로 연명했대.
-164쪽

1910년 경술국치 뒤에도 화전을 떠나지 않고 살던 그들이 메밀을 읍내로 들고 나오면서 춘천에 막국수가 자리 잡았대.
과거 춘천 지방 농촌에서는 특별한 손님이 오면 맷돌에 메밀을 갈아 메밀쌀을 만든 다음 디딜방아에 찧어 가루를 낸 걸 국수를 뽑아 대접했는데 6.25 직후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국수를 만들어 팔던 것이 막국수 대중화의 시초라는 거야.

그래서 화전민이 많았던 춘천이 막국수의 원조라고?
아니야. 딱히 원조라는 것이 없고 그런 얘기도 있다는 거지. -165쪽

'우리의 고향은 중국이고 우리의 국적은 대만이며 우리가 사는 곳은 한국이다'라는 말에는 화교들의 고단한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자 한국 화교들의 국적은 대만으로 바뀌었다. 여기에 대한민국 정부 역시 곧바로 중국과 수교를 단절하여 고향 방문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 되었다. 대만으로 이주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지만 다수의 화교들은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이 땅에 남았다. 하지만 화교 자본 활동의 억제를 위해 각종 규제가 생기면서 그들의 활동 반경은 중국음식점으로 한정되었다.
뒤를 이어 태어난 세대들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취직은 고사하고 혈기왕성한 젊은 나이에 비좁고 답답한 주방에 갇혀 장을 튀기고 면을 뽑는 자신의 한심한 모습에 세상을 원망했지만 묘책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남겨진 삶의 수단은 오직 자장면뿐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중국집 주방은 대를 잇는 전통이 생겼다. -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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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7-24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마노아님. 제목에 막국사-->막국수요 ㅋㅋ

마노아 2009-07-24 13:10   좋아요 0 | URL
어머! 여기도 틀렸군요.^^ㅎㅎㅎ

후애(厚愛) 2009-07-24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부터 시작해서 음식에도 사연이 많군요.
갑자기 막국수가 먹고 싶어지네요. ㅎㅎㅎ
주말에 메뉴는 막국수에요^^ ㅋㅋㅋ

마노아 2009-07-25 00:17   좋아요 0 | URL
오늘 저녁은 보쌈과 막국수 먹었어요. 식객의 영향이 컸어요.6^^
후애님이 막국수도 기대되어요~
 
대한민국 화장품의 비밀 - 많이 바를수록 노화를 부르는
구희연.이은주 지음 / 거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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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품 회사들이 식약청에 하는 말과 소비자에게 하는 말은 전혀 다르다. 식약청에 화장품을 등록할 때는 줄기세포 또는 그 배양액이 아주 미미해 의약품 같은 효과를 낼 수 없으며, 그에 따라 부작용이 일어날 확률도 매우 적음을 강조한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소비자에게 광고를 할 때는 그 제품 하나면 주름이 쫙 펴질 듯한 각종 문구로 유혹한다. 만일 성격 까칠한 소비자가 "왜 광고에서 본 만큼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느냐?"고 따진다면 "고객님, 저희 제품은 의약품이 아니거든요"라고 답변하면 그만이다.
-29쪽

눈에 쓰는 색조 화장품은 볼 등 다른 곳에 사용해도 괜찮지만, 다른 부위에 쓰는 색조 화장품을 눈에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또 어른들이 하는 마스크팩이 좋은 것 같아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1,000원짜리 팩 대신 과일을 얇게 잘라 붙여주는 쪽이 훨씬 효과가 좋다.
그 나이 때는 피지 분비가 왕성하기 때문에 블랙헤드가 고민일 수 있다. 그렇다고 손으로 짜거나 코팩을 애용해선 안 된다. 주방에 있는 흑설탕을 미지근한 물에 녹여 주 1회 정도만 코에 문질러주는 정도로 충분하다. 화장을 시작하기 전에는 항시 손을 청결히 하고, 외출 후 집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손을 씻은 후 화장을 지워야 한다.
-43쪽

여러분의 엄마는 어떤 화장품을 쓰고 계시는가? 나와 가장 피부가 비슷한 사람은 나에게 절반의 유전 정보를 물려준 엄마이다. 게다가 엄마는 나보다 더 다양하고 오랜 화장품 임상 결과(?)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가.
-54쪽

화장품을 구입하러 갔을 때 진열대에 올라온 제품은 피하라. 화장품은 직사광선과 열에 의해 쉽게 변질되는데, 우리나라 화장품 매장의 경우 고객들에게 화려하게 보이기 위해 조명 아래 화장품을 진열해 놓는다. 판매원이 바쁘거나 1개밖에 안 남았다거나, 할인을 해주겠다며 진열품을 권하거든 절대 구매하지 말라. 반드시 종이 케이스에 보관돼 있던 제품으로 사야 한다. 인터넷으로 화장품을 구매했는데 용기나 케이스에 미묘하게 빛바랜 자국이 있다면 사용하지 말고 반품하라.
-59쪽

단지형 제품을 일일이 스파츌라로 덜어 쓸 자신이 없다면 아예 내용물이 손에 닿을 수 없게 만든 에어리스 용기 또는 튜브형을 선택하는 것도 방법이다.
일반 냉장고에 보관하면 오히려 내용물이 얼 수 있으므로 좋지 않다. 화장대는 직사광선을 피할 수 있는 곳에 배치하는 게 좋다.
색조 화장품의 경우는 본품을 쌌던 케이스에만 제조일자가 쓰여 있는 경우가 많다. 반드시 유성펜으로 용기에 제조일자와 개봉 일자를 적어두자.
-60쪽

간혹 마스카라가 굳었다고 스킨이나 로션 등을 넣어 좀 더 오래 사용하려고 하는 소비자가 있는데 이는 정말 눈에 위험하다. 눈과 관련된 제품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
기초 화장품의 경우 내용물이 분리되고 좋지 않은 냄새가 날 정도로 부패된 것은 당연히 버려야겠지만, 상했는지 아닌지 모를 정도라면 그래도 활용할 방법이 있다. 기초 제품에는 대부분 보습제가 기본적으로 들어가 있으므로 발뒤꿈치, 팔꿈치에 가볍게 마사지하고 랩을 씌워 팩으로 활용할 수 있으며, 여름에 샌들을 신느라 거칠어진 발을 위해 발마사지를 해줄 수 있다. 3~10분 정도 마사지한 후 미지근한 물로 씻어내면 발이 한결 부드러워질 것이다. 그러나 손은 발에 비해 외부 노출이 많아 예민할 수 있으니 가능하면 발에만 이용하기 바란다.
-60쪽

화장품 한 병에 들어간 원료 가격은 몇 백 원에서 몇 천 원 정도 수준이지만, 정작 생각 외로 비싼 것은 화장품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한 용기 값이다. 그러므로 비닐 또는 플라스틱 공병에 담긴 1~2ml짜리 샘플이 50~200원 사이인 것은 당연하다.
마지막으로 샘플이 더 좋다는 믿음으로 굳이 샘플을 사서 본품에 합치거나 따로 담아 쓰는 소비자도 있는데, 정말 위험천만한 일이다. 용기가 깨끗하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샘플을 담는 도중에 2차 감염 및 오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66쪽

필자들은 과감히 기초 화장품을 네 가지로 분류할 것을 주장한다.
첫째는 클린징이다. 진한 화장을 했을 때만 수성, 유성 한 가지씩 두 번 세안하고 평소에는 수성 세안만 해도 된다.
둘째는 화장수다. 스킨, 토너, 아스트린젠트, 프레셔너, 클래리파잉로션처럼 순수한 맑은 액체로 된 것은 모두 같은 종류로 본다. 화장수를 두 번째에 끼워주는 이유는, 클렌징을 아무리 꼼꼼히 해도 이물질이 피부에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장수는 반드시 화장솜에 묻혀 이물질을 닦아내는 용도로 사용한다(절대 수분을 공급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72쪽

셋째는 크림이다. 로션, 에센스, 세럼, 크림을 모두 한 분류에 넣는다. 에센스, 세럼, 크림 역시 모두 점도의 차이지, 내용물과 기능은 비슷하다. 건조한 피부라면 크림 타입을, 지성 피부라면 에센스를 택하면 된다.
넷째는 흔히 선크림이라 일컫는 자외선 차단제이다. UVA, UVB 모두 차단할 수 있는 제품을 선택한다. 일상생활용으로는 SPF15정도, 강한 햇빛에 나서거나 장시간 외부 활동을 할 때는 SPF30 정도로 두 가지를 상황에 따라 이용하면 된다.
-73쪽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공을 ‘실제로’ 줄여주는 화장품은 지금까지도 없었거니와 앞으로도 나올 수가 없다. 모공은 피부에서 분비되는 피지들이 나오는 구멍이다. 흔히들 땀구멍과 모공을 혼동하는데, 땀구멍은 땀샘이 있어 땀이 배출되는 구멍이고 모공은 털이 자라는 입구를 말한다. 모공은 크기가 매우 작아 평소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우리 얼굴엔 2만 개나 넘는 모공이 있다. 모공에는 피지선이 분포하는데, 피지선은 천연 보습제인 피지를 분비하고 노폐물을 내보내서 우리의 피부를 젊고 건강하게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피지 분비는 나이, 계절, 스트레스, 임신, 생리 주기 등에 의해 변화하기도 한다. 특히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피부가 급격히 지성으로 바뀌는 사례를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드레날린이 과다 분비되고 이로 인해 남성 호르몬인 안드로겐이 과잉 분비되는 까닭이다. 충격적이겠지만, 모공의 크기나 숫자는 선천적, 유전적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 또한 모공에는 열렸다 닫혔다 하는 근육이 없으므로, 한번 늘어난 모공 크기를 영구적으로 줄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88쪽

코팩을 해본 사람이라면 모공에서 빠져나온 피지들을 보며 희열을 느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코팩은 모공을 틀어막고 있는 각전(모공 속에 쌓인 오래된 각질과 피지가 섞인 덩어리. 못처럼 피부에 콕 박혀 있다)을 제거하는 원리이다.
각전 때문에 모공 출입구가 막히면 피지가 점점 쌓이면서 모공이 커진다. 그리고 한번 각전이 생기면 묵은 각질이 정상적인 경우보다 4배나 더 빨리 생긴다.
완벽한 코팩, 완벽한 사후 관리가 되는 코팩 세트는 적어도 필자가 아는 바로는 아직 없다.
-92쪽

눈가가 수용할 수 있는 화장품의 양은 얼굴 다른 부위들의 50% 미만이기에, 유 수분량도 훨씬 적게 공급해야 한다. 피부가 흡수할 수 있는 양 이상의 화장품을 바르면, 잉여량은 표퓌 위에 그대로 머물며 피부 모공을 막고 피부 호흡을 방해한다. 그뿐인가? 탄력 있고 탱탱하게 올라붙어야 할 피부가 잉여 화장품의 무게로 처지게 되어 있다.
-96쪽

다크서클 또한 피부의 문제라기보다는 내인성인 경우가 많다. 다크서클 완화 크림을 아무리 발라봐야 혈액순환 및 신장 기능의 개선 없이는 효과를 볼 수가 없다.
-97쪽

만일 여러분이 35세 이전이라면 아이크림은 안 써도 된다. 아니, 쓰지 마라. 과잉 공급은 노화만 앞당길 뿐이다. 하지만 이미 갖고 있는 것이 있고 버리기가 아깝다면 가끔 건조하다는 자각증상이 있을 때만 얇게 바르는 정도로 충분하다. 35세가 넘은 분도 마찬가지다.
-98쪽

눈 주변에 화장품을 바를 때는 그야말로 아기처럼 다뤄야 한다. 바르는 방법도 손끝으로 문지르는 게 아니라 가볍게 톡톡 쳐서 흡수시킨다. 그리고 대부분 눈가 바로 밑-만져봤을 때 푹 꺼지는 부분-에 바르는데, 눈 바로 밑 피부는 무언가를 흡수할 수 있는 부위가 아니다. 정확히 말해 아이 홀 eye hole 이 만져지는 눈가의 뼈 주변에 발라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99쪽

SPF8은 자외선 차단율 87.5%, SPF15는 약 93%가 차단되는 반면 SPF30은 약 97% 차단 효과가 있다. SPF가 두 배 차이라도 실제 차단 정도의 차이는 몇 % 정도에 불과하니 굳이 제일 높은 차단지수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 차단지수가 너무 높은 제품은 피부에 자극감을 높이는 등 득보다 실이 많다는 점을 기억하자. 더구나 자외선 차단제는 지수보다는 바르는 양과 주기(횟수)에 더 영향을 많이 받는다.
-102쪽

보통 다른 화장품은 너무 많이 발라 문제가 되는데 자외선 차단제는 너무 적게 발라 문제가 된다. 선크림을 많이 바른 뒤 메이크업을 하게 되면 화장이 뭉치거나 허옇게 떠 보이는 것 때문에 의식적으로 적게 쓰기 때문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소비자들이 권장량의 10% 밖에 바르지 않는다고도 했다. 보통 자외선 차단제의 용량이 30g 이므로 10번 만에 한 통을 다 써야만 기대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자외선 차단제 한 통을 쓰려면 빨라야 6개월에서 1년 걸리는 우리에게는 너무 부담스러운 양이다.
또 자외선 차단제는 차단 지수와 상관없이 1~2시간마다 덧발라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설사 권고대로 자외선 차단제를 꾸준히 바른다 해도 몇 년이나 그 효과가 지속될지 또한 미지수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내성’이 있어 어떤 성분의 효과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104쪽

이쯤 되면 자외선 차단제가 태양빛에서 우리를 구해줄 유일한 신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알았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자외선 차단제를 발랐으니 괜찮다고 볕 앞에 당당했다면, 이제부터는 선글라스, 선캡, 모자, 양산 등의 보조 수단도 적극 활용해 보자. 선캡의 경우 자외선을 97%까지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106쪽

우리가 유의해야 할 색소는 유기안료, 즉 타르색소다. 타르색소는 출신성분부터가 참 부담스럽다. 석탄의 콜타르에서 추출한 벤젠이나 톨루엔, 나프탈렌으로부터 합성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110쪽

입술에 바르는 립스틱이나 립글로스는 상당량을 ‘먹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음식을 먹을 때 몸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무의식중에 입술을 핥는 동작으로 먹는 양도 만만찮다. 그렇다면 립스틱이나 립글로스를 ‘먹어도 괜찮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식품 첨가물로 허락되지 않은 79종의 색소를 쓰는 대부분의 화장품 회사는 ‘립스틱은 먹는 것이 아니라 바르는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 이 문제에 대한 더 이상의 언급을 회피한다.
-111쪽

색조 제품은 기본적으로 피부에 침투되지 않게 만들어지지만, 기초 화장품을 사용한 뒤 어떤 방어막도 없이 색조 제품을 피부에 바르는 것은 위험하다. 스킨케어 제품에는 유효 성분들을 진피층까지 깊이 전달하는 트랜스포터 기능을 가진 성분들이 들어 있는데, 이를 방어막으로 차단하지 않으면 그 성분이 색조 화장품과 만나 색소까지 덤으로 가져가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색조 화장을 하기 전에는 반드시 방어막 기능이 있는 베이스류 또는 자외선 차단제를 발라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114쪽

수돗물로 15분간 샤워를 했을 때 몸속에 들어오는 염소의 양은 수돗물 1L를 마셨을 때의 600배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115쪽

따뜻한 물에 푼 거품 속에 짧게는 10분, 길게는 30~40분 동안 몸을 담그면 피부의 모공이 열리고 계면활성제와 같은 여러 유해 성분들을 아주 잘 흡수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이는 향기로운 빨래 세제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여러분은 화장품이 변질된 것은 본 적이 있어도 샴푸나 린스, 바디클렌저가 상한 것은 거의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디 용품은 습기도 많고 미생물과 박테리아가 번식하기 쉬운 욕실에 있어야 하는 특성상 많은 양의 방부제와 보존제를 함유하기 때문이다.
-116쪽

피부 세포는 보통 28일을 주기로 죽고 새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새로 태어난 피부 세포는 둥글둥글하고 포동포동하며 수분을 풍부하게 머금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피부 외층으로 이동하고 약간 평평해졌다가 결국 각질로 변해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간다. 이는 살아 숨 쉬는 기간인 피부의 정상적인 재생 사이클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거나 건조한 환경, 자외선, 스트레스 등 주변 환경이 좋지 않으면 피부의 재생 속도가 서서히 느려진다. 자연히 탈락돼야 할 피부 각질들도 처리되지 않은 채 쌓이게 된다. 이럴 때 여러분은 흔히 집에서 필링 제품으로 각질 제거를 할 것이다.
-118쪽

향 알레르기가 있다면 무향 제품이 아닌 ‘무향료 제품’을 사용해야 하며 무향료 제품은 시중에서 찾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무향 제품이 피부친화적 제품이라는 것 역시 잘못된 해석에서 나온 말이다. 화장품은 피부를 위한 것이지 내 눈과 코를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고른 화장품이 ‘아름다운 피부를 위한 화장품’인지, ‘아름다운 화장품’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137쪽

색조 화장품이 아닌 이상 향료와 색소는 필요악도 아니고 아예 ‘필요가 없는’ 성분이다. 기초 화장품 제품의 전성분 표시에서 향료, 청색O호, 적색 O호 등의 색소가 표기돼 있다면 아예 구매 품목에서 빼라. 합성계면활성제와 파라벤 함유 여부도 반드시 체크한 후 구매하라. 소비자의 각성이 식품 회사들을 바꾸었듯, 역시 소비자의 요구만이 화장품 회사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142쪽

식약청은 전성분 표시가 허위 없이 진실하게 기재되었는지 지속적인 관리 감독을 하는 것은 물론, 위반 사항에 대해서는 강력한 처벌 조치를 취하는 등 세부 지침을 하루빨리 세워야 한다. 뷰티 산업 육성이라는 미명하에 은근슬쩍 규제 완화만을 할 것이 아니라, 정작 중요한 것에 대한 규제는 더욱 강화해야 진정한 뷰티 산업 육성이 가능하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162쪽

트러블이 일어나면 ‘명현현상’ 또는 ‘호전현상’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주로 그 제품을 파는 사람들의 말일 것이다). 그 내용인즉, 그동안 쌓여 있던 피부 독소가 빠져나가느라 일어나는 현상이며, 15일에서 30일 정도 지나면 아주 건강한 피부가 될 거라고 호언장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혀 의학적인 근거가 없는 말이며 좋아지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 피부의 독소를 제거한다고? 그렇다면 그건 화장품이 아니라 의약품이어야 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트러블이 일어나면 무조건 사용을 중단해야 한다. 한국 소비자원에 접수된 천연 화장품 관련 민원은 ‘천연’에 대한 정의가 불충분한 데 따른 과대 허위 광고 탓이 많지만, 천연 성분에 대한 부작용, 알레르기 반응도 많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180쪽

미국 FDA가 화장품 배합을 금지시킨 성분과 EU에서 정한 금지 성분은 공통점도 있지만 다른 부분들도 많다. 예를 들어 자외선 차단 성분인 Camphor의 경우 유럽에서는 배합이 허용되지만 미국에서는 금지돼 있다. 왜일까? 각 나라 학자들의 견해가 달라서일까? 이 역시 ‘무역 장벽’을 서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전 세계 화장품 시장을 나눠먹고 있는 미국과 유럽은 서로의 화장품 시장을 개방해놓은 상태다. 개방은 했지만 남의 나라 물건이 내 나라에 와서 잘 팔리면 배 아프니 하나라도 덜 팔리게 할 방법을 강구한다. 따라서 미국은 유럽에서 잘 팔리는 제품의 성분 중 하나를 금지 성분으로 정하는 아주 우아한(?) 방법으로 자국 내 시장 진입을 막고 있다. 같은 방법으로 유럽 역시 미국을 견제하고 있다.
-187쪽

필자들은 ‘오랫동안 사용된 성분들이 진부해 보여도 안전하다’고 판단한다. 담배가 독성이 있는 식물인 것처럼 식물성 성분이라고 무조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독성, 알레르기 유발, 피부염 유발, 피부 건조 혹은 너무 기름지게 만드는 등 치명적인 성분을 포함한 천연 재료들도 있다. 그뿐인가? 장기간 사용 시 피부를 민감하게 만들기도 하고 광독성(햇빛을 받으면 독성 물질로 변하는 현상)이 있는 물질도 있다. 천연 재료의 효능만 듣고 부작용을 간과해서는 안 되며, 아무리 천연 재료라도 자신의 피부에 맞는 것을 골라 쓰는 지혜가 필요하다.
-190쪽

영양 크림을 너무 많이 사용하면 피부는 피지를 만들어내지 않아도 되는 줄 알고 피지 생성을 게을리 한다. 그러면 시간이 흐를수록 피부는 점점 더 건조해지고, 당기니까 더 많은 양의 영양 크림을 바르고, 다시 더 건조해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시작된다. 과다하게 바르는 통에 흡수되지 못한 여분의 성분들은 피 부에 노폐물로 쌓이고, 그 노폐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활성산소가 방출돼 결국 피부의 노화를 부추긴다.
-205쪽

특히 요주의 성분인 파라벤. 가장 싸고 쉽게 만들 수 있는 방부제인 이 파라벤은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여전히 애용되고 있다. 심지어 천연 화장품이라고 이름난 브랜드의 제품에서도 2~3종의 파라벤이 첨가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화장품 회사는 "파라벤이요? 몸에 역치점 이상의 독성이 쌓이려면 300살 이상은 살아야 문제가 나타날 겁니다"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화장품 각각에 들어 있는 양만 계산해서 이런 주장을 하는 모양인데 300년이라는 계산 근거도 불분명하거니와, 우리가 어떤 화장품이든 ‘하나만’ 쓰지는 않는다는 점을 간과한 발언이다. 여러분 화장대의 화장품들, 바디 용품들의 전성분 표시를 확인해보라. 정말 끔찍한 계산이지만 만일 우리가 쓰는 제품들 중 18가지에 이 요주의 성분이 들어가 있다면, ‘문제’는 300년이 아니라 11년 정도면 발생하는 셈이다. 필자들이 화장품의 가짓수를 줄이라고 목 아프게 떠드는 데에는 불필요한 낭비 외에도 독성 성분에 대한 안전성 확보라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208쪽

로션을 발랐을 때는 괜찮은데 크림을 바르면 번들거리는 느낌이라면 로션을 바르면 되고, 로션을 바르면 당기는 기분인데 크림을 바르면 촉촉한 느낌이라면 로션 생략하고 크림만 바르면 된다. 만일 로션, 크림 둘 다 번들거리는 사람이라면 에센스나 세럼 타입을 선택하면 된다. 이걸로 충분하다. 순서대로 로션, 크림, 에센스 모두 발라봐야 피부 위에서 섞이기만 할 뿐이다.
-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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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9-07-20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호. 아까 리뷰 못지 않게 감사.

마노아 2009-07-21 00:14   좋아요 0 | URL
아하핫, 리뷰보다 요게 도움이 될 거예요.^^ㅎㅎㅎ
 
순례자의 책
김이경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09년 6월
구판절판


저승에서 내가 제일 오래 머문 사람은 아니었다. 나보다 수천 년 전에 이곳에 온 소크라테스라는 그리스 철학자는 끊임없이 지껄이기만 할 뿐 책은 쓰지 못했다. 그는 책이란 믿을 수 없는 물건이며, 자신의 삶을 그 속에 담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주희라는 중국 학자는 더 난감한 상태였다. 그는 스승인 공자의 책을 3,333번이나 거듭 읽으며 한 자 한 자 토를 다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었다. 하긴 학자들 중에는 그런 이들이 꽤 많았다. 남들이 쓴 책을 읽고 토달고 비평하느라 자기 글은 손도 못 대는 치들, 소설가들 역시 저승의 대표적인 터줏대감이었다. 카프카라는 젊은 작가는 내게 고백하기를, 끝이 다가오면 갑자기 엄습하는 불안과 회의 때문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고 했다. 소설가들 중에는 걸작을 쓰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번번이 실패하는 자들도 여럿 있었다. 그에 비하면 음악가나 미술가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하지만 피카소라는 늙은이는 자신만만하게 시작했다가 부러뜨린 붓만 100개가 넘었으니 일반론으로 할 얘기는 아니었다.

-20쪽

나보다 먼저 죽은 사람들의 책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막상 어머니가 쓴 책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나는 뜨거운 김에 쏘인 것처럼 놀랐다. 하지만 그때의 놀람은 책을 다 읽고난 뒤의 놀람에는 비할 바도 아니었다. 책 속의 어머니는 내가 아는 어머니와는 너무나 달라서 나는 몇 번이나 표지에 적힌 이름과 생몰연월일을 확인하곤 했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쓴 책에는 나에 관한 이야기도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다. 나도 아버지도 없는 어머니의 인생이란 건 상상해본 적도 없었건만! 당연히 나는 모욕감을 느꼈다. 하지만 모욕감보다 더한 건 부러움이었다.

-21쪽

이제 나는 아무 회오도 연민도 없이 내 삶을 돌이킬 수 있었다. 평범한, 지극히 평범한 삶. 그것이 내가 내게 지은 죄이며 내게 베푼 유일한 은혜임을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삶은 100년이든 1년이든, 파란만장하든 무미건조하든, 영웅적이든 비참하든, 모두 똑같은 두께의 책으로 묶인다는 것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어나서 살고 죽는 것, 그것이 시작이고 끝이었다. 모든 은유를 무색케 하는.

-23쪽

깊은 혼몽에서 그를 깨운 건 눈부신 황금빛이었다. 에스파냐 정복자의 사나운 손길을 피한 단 한 권의 책. 황금으로 쓰고 황금으로 장식하고 황금으로 장정한 마야의 황금 책이 머리맡에 놓인 순간 모리스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책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애무의 대상이며,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만지는 것임을.
붉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모리스는 현기증을 느꼈다. 젖은 이끼 냄새와 마른 흙내, 선창가를 맴도는 비린내와 어린 창부의 사타구니 냄새, 바람처럼 흩어지는 로즈마리 향내가 그를 아득하게 만들었다. 체취만이 아니었다. 늙은이의 살갗처럼 서걱거리는 파피루스 책은 그를 슬프게 했고, 농염한 여인처럼 부드러운 양피지 책은 그를 달뜨게 했으며, 잉크를 흠씬 빨아들인 중국 종이책은 그를 젖게 했다. 책은 육체임을 모리스는 비로소 깨달았다.
-110쪽

문화예술에 대한 남다른 열정 때문에 나는 온갖 종류의 수집상들과 골동품상, 서적상들을 만났다. 그들은 내게, 칼을 파는 사람이 살인자가 아니듯 예술을 파는 사람 또한 예술가가 아니라는 걸 일깨워주었다.

-178쪽

네 명의 피고 모두 나라를 다스리거나 권세를 가진 지배층이었습니다. 일자무식의 거렁뱅이가 아니었죠. 많든 적든 책을 읽었고, 학식 있는 자들을 주위에 거느리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책을 읽은 적도 없고 아는 것도 없다면 책이 문제가 될지 안 될지 알 수도 없었을 겁니다. 피고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책을 읽었고 책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죠. 그래서 책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만약 이들이 책을 몰랐다면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제 생각엔, 좀 어이없는 발상이긴 한데, 책이 문제의 근원같아요. 이상한 얘기죠. 물론, 책의 적은 책이라고 주장하고 싶진 않습니다.
-251쪽

하지만 오늘 재판을 지켜보면서, 책 혹은 지식이 미워하는 건 무지가 아니라 또 다른 지식이란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아까 고발인은 카라지치가 인간을 야만의 시대로 되돌려 놓았다고 비판했죠. 그런데 책이 없는 세상은 정말 야만일까요? 책을 읽는 문명인들은 책 같은 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야만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역사가 증명하듯이, 진짜 끔찍한 야만을 저지른 자들은 문명인들이었죠. 애초에 문명이란 게 살아 있는 나무를 잘라서 죽은 책을 만드는 것이고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요.
누가 최악의 적으로 선정될지는 몰라도, 분명한 건 그자 역시 한 명의 독자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책을 위해 헌신한 열혈독자였죠. 그러니까 비극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 거 같아요. 책을 읽는다는 것, 제 생각엔 아무래도 그게 문제인 듯 싶습니다.
-252쪽

길은 산을 낳고, 산은 골짜기를 이루었으며, 골짜기는 그늘을 드리웠고, 그늘은 강을 품어, 강은 들을 키웠다. 그렇게 끝도 없이 길이 이어졌다.
-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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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 - 심리학자가 만난 조선의 문제적 인물들
김태형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4월
품절


왕조국가에서 왕이 바뀌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정통성이 없는 왕위교체는 사회에 매우 나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중 가장 나쁜 것은 지배층의 인위적인 교체다.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으로 충신의 시대가 저물고 간신이 날뛰는 부정의한 시대가 열렸다.
-278쪽

한명회는 부정축재의 달인이어서 사치가 대단했다고 하며, 정인지 등을 비롯한 훈구파들은 부업으로 고리대금업을 하기도 했다. 성종 시기에 대간들이 원로대신인 정인지가 고리대금업을 했다고 비판한 일이 있다. 그러자 정인지는 "모든 사람이 다 한 짓이니 창피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의 지배층이 어떤 족속들이었는지 잘 말해준다.

-280쪽

연산군 시기 관리들의 부패상은 극에 달해 1500년(연산군6)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있다. 새로 관리가 되면 구 관리에게 열 번 이상 잔치를 베풀어야 하므로 가난한 자는 재주가 있어도 절망하여 관리가 될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신입식도 인격적 모독을 주고 퇴폐풍조를 조장하는 것으로 일관되었다. 선배들은 신입관리를 차례로 구타하고 ‘물고기 잡는 놀이’를 한다면서 그를 연못에 빠뜨려 물을 푸게 했다. 그리고 손으로 부엌바닥을 문지르라고 하고는 손이 더러워지면 그것을 씻은 물을 마시게 해 토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선배들이 시도 때도 없이 신입자의 집으로 몰려가면 그는 술자리를 마련하고 선배들에게 여자를 한 사람씩 안겨주는데 이를 안침이라고 했다. 이런 자리에서는 공공연하게 뇌물이 오고 갔다. 이런 풍조는 위아래가 없어 심지어는 아전의 노복들조차 신입을 괴롭혀 여러 가지 귀한 음식을 바치게 했다. 이런 식으로 신입들에게 연회를 베풀게 하되 기생과 풍악이 없으면 책망하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280쪽

어떤 이들은 연산군 시대가 ‘태평성세’였다고 주장한다. 당시에 농업, 상업이 발달하고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비교적 물자가 풍부했고 국가재정도 여유가 있었으므로 연산군 시기는 왕이 낭만을 즐겨도 되는 배부른 시기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물자가 풍부했기에 사치가 가능했다는 논리를 전개하며, 태평성세의 근거로 사회에 만연한 사치풍조를 들고 있다. 실제로 성종과 연산군 시기에는 집을 궁궐처럼 짓거나 혼례 등을 지나치게 사치스럽게 치른다며 이를 엄금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상소가 잇따랐다. 그래서 1498년(연산군4) 5월에는 음식, 결혼, 활과 화살, 복식 등을 사치하는 풍속이 너무 심하여 이를 규제하는 법을 만들어 금지하기도 했다.

-281쪽

일부 사람들은 ‘사농공상의 엄격한 신분사회’인 조선사회에서 "상인과 노비조차 큰 집을 짓고 살았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고 감탄하면서 이를 연산군 시기가 태평성세였다는 증거로 간주한다. 그러나 당시 상인과 노비들이 큰 집을 짓고 살 수 있었던 것은 권력층의 타락과 부패 때문이지 모든 노비들이 잘 살 수 있을 정도로 물자가 남아돌았기 때문이 아니다. 상인들은 권력층과 결탁해 그들의 비호를 받았고 사대부보다 더 큰 집을 짓고 산 노비들은 권력층의 노비들이었다. 일반 백성이나 노비들까지 넉넉한 생활을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282쪽

백성들이 가난해지고 사회기강이 문란해지면 예외 없이 도적이 들끓게 된다. 연산군 시기에는 도적이 출몰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도적들은 패당을 이루어 궁궐 근처, 각 도시와 현읍들에까지 나타나 군사나 순찰에 대항했다. 이는 ‘태평성세’라는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뚜렷이 보여준다. 태평성세란 오로지 연산군과 지배층에게만 해당될 뿐 백성들은 여전히 굶주렸고 도덕적 권위가 없는 왕과 지배층을 비웃었다.

-283쪽

1467년(세조13)의 ‘이시애의 난’과 결부되어 벌어진 사건. 당시 이시애는 난을 일으키면서 ‘한명회’와 ‘신숙주’가 자신을 후원한다는 거짓 소문을 흘려보냈다. 쿠데타를 위해 한명회가 필요하기는 했으나 그를 좋아하지도 신뢰하지도 않던 세조는 두 사람을 당장 체포하라고 형조에 명령했다. 그러나 형조는 막강한 권력기반을 다져놓은 한명회를 감히 건드릴 수 없었기에 왕명을 이행하지 않았다. 왕보다 한명회를 더 무서워한 것이다. 그러자 세조는 한명회가 진짜로 반란이라도 일으키는 게 아닌가 싶어 왕실 인원들을 모아 자기 신변을 보호하게 하면서 자신의 호위병들을 보내 형조판서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러나 세조는 위세 등등한 한명회를 처벌하지는 못했다. 이렇게 왕권을 정상적으로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되자, 세조는 반란이 일어난 함길도로 왕이 아니라 한명회와 신숙주의 명의로 된 호소문을 보냈고, 국고(병조)의 돈이 아니라 내수소의 왕실재산으로 반란을 진압하는 비용을 댈 수밖에 없었다.
-283쪽

이시애의 난을 한명회가 지원했다는 설은 거짓말이었고 세조와 한명회가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그 결과가 어떨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기에, 두 사람은 대타협을 한다. 두 사람은 세조의 손자인 성종과 한명회의 딸(공혜왕후)을 결혼시켰다. 한명회와 공범이 되어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한명회 때문에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으며, 정치를 하면서 계속 그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이시애의 난이 진압된 후에 한명회와 신숙주는 원상(院相)이 되어 정권을 틀어쥐었고, 왕의 자리에 앉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세조는 불과 14년 동안 왕위에 있다가 1468년(세조 14)에 사망했다. 결과적으로 세조는 그다지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왕이 되어 마음고생만 실컷 하다가 나라를 한명회 같은 간신배들에게 넘겨줘버린 꼴이 되었다.

-284쪽

실력이나 양심 따위가 없더라도 오로지 잔꾀만 있으면 왕을 능가하는 자리에 오를 수 있으며, 나아가 천벌을 받지도 않고 장수하면서 마음껏 부귀영화를 누리다 죽을 수 있다는 산 증인이 됨으로써 한명회는 이후에 영혼이 병든 한국인들이 우상처럼 숭배하는 대상이 되었다.

-285쪽

정희왕후는 섭정을 맡자마자 세조가 적극적으로 관철한 군적호패법을 폐지하고 토지세를 인정세로 고쳤다. 이는 모두 극소수 지배층에게는 유리하고 절대다수의 백성들에게는 불리한 정책이었다. 이기적인 지배층의 탐욕에 전혀 제동을 걸지 않는 이런 반민중적 정책은 이후 시기에도 계속되어 세금을 내는 인구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 결과 중종 시기에 이르면 수많은 공신들이 대부분의 토지와 노비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세금을 내지 않아 국가수입에 심대한 타격을 주어 국가재정은 적자로 돌아서게 된다. 그리고 지배층을 대신해 전 인구의 1/4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난한 일반인들만 막대한 세금의 의무를 떠안게 되었다.

-286쪽

성종은 유복자로 태어나 할머니인 정희왕후, 사망한 예종의 부인인 안순왕후 그리고 어머니인 소혜왕후를 모시며 자라났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세 여인은 모두 과부여서 어린 성종은 과부 트리오의 양육을 받게 되었다. 정희왕후는 권력을 오래 유지하려고 의도적으로 성종을 여색에 빠지게 했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그녀는 성종이 빨리 후사를 보아야 하므로 3년을 기다릴 수 없다며 예종의 상을 13일 만에 끝내게 했다. 또한 성종이 즉위한 w 4년이 되어도 후사가 없자 윤기견의 딸(폐비 윤씨)과 윤호의 딸(정현왕후)을 숙의로 봉하여 입궁시켰다. 성종은 할머니의 열렬한 후원으로 계속 후궁을 늘려나가 그가 서른여덟 살의 나이로 죽을 때에는 처3명과 첩 8명을 합해 부인이 모두 11명, 아들 19명과 딸 11명을 합해 모두 30명이나 되는 자식을 두게 되었다. 성종은 이렇게 정희왕후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열네 살 때부터 시작해 온 청춘을 여색을 밝히는 데 허비했다.

-287쪽

쿠데타는 성공했지만 의경세자가 일찍 죽어버리는 바람에 소혜왕후는 젊은 나이에 졸지에 과부가 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그녀는 화를 많이 내는 상당히 신경질적인 여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의 원인으로 억압된 성욕을 첫 손에 꼽았다. 이 주장을 전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지만,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평생을 수절해야만 하는 여인의 억압된 성욕과 분노감정은 어떤 식으로든 표출되어야 했을 것이다. 또한 왕궁의 남자들은 후궁을 거느리며 성욕을 마음껏 해소하는데 남편이 죽은 여자들은 반드시 열녀가 되어야만 했으니 남자들 그리고 그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해서도 화가 났을지 모른다. 만일 그녀가 정치나 사회활동이라도 할 수 있어서 개인적, 본능적 욕망을 사회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사회에서는 그것 또한 불가능했다. 이래저래 소혜왕후는 가슴속에 분노감정을 꾹꾹 쌓아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88쪽

소혜왕후가 아이들을 엄격하게 훈육한 것은 조선의 여성들이 읽어야 하는 교양서인 <내훈>을 지은 유학(성리학)의 신봉자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비록 그녀가 표면적으로는 유학을 신봉하는 듯했으나 내심으로는 불교에 심취해 있었으니 아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못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유학의 신봉자라고 해서 반드시 아이를 엄격하게 키우는 것도 아니다. 이런 점에서 그녀가 남들이 보기에 지나칠 정도로 자식과 아랫사람들을 엄하게 대한 것은 자기를 거스르는 것을 일절 용납하지 않는 자기중심성이나 분노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289쪽

어쨌든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폭빈’ 어머니는 아들을 마마보이로 만들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의 자율성을 용납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독재를 하는 대가 센 어머니의 아들은 어머니 앞에서 항상 차렷자세를 유지하는 습관이 든다. 한마디로 어머니한테 찍소리도 못하는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나약한 아들은 자신이 힘세고 무서운 어머니를 사랑하고 존경하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한다는 허위의식을 갖게 된다. 이는 인질범에게 잡힌 사람들이 무력감을 견디다 못해 인질범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는 ‘스톡홀름 신드롬’과 동일한 심리적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290쪽

독재자 어머니 때문에 마마보이가 된 아들은 의식적으로는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어머니에게 화가 나 있다. 그러나 생애 초기에 강고하게 형성된 ‘힘센 어머니-나약한 아들’의 관계는 바꾸기가 엄청나게 어렵다. 그래서 아들은 어머니에게 직접적으로 화를 내지 못하고 은폐된 방식으로 화를 내며,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성들에게 심하게 화를 내기도 한다. 마마보이 성종은 유약한 성품을 가졌으므로 감히 어머니에게는 어쩌지 못하고 다른 여성들에게 화를 냈을 것이다. 또한 그가 이 여성, 저 여성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식으로 여성편력이 유독 심한 것도 그의 건강하지 못한 어머니 관계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291쪽

성종은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아들이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소혜왕후를 대비의 반열에 올려 세우고 그녀의 족친들을 관직에 대거 발탁했으며, 어머니를 위안하기 위해 자주 잔치를 베풀었다. 성종은 어머니한테 화난 감정을 타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투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궁인들을 다루기를 무척 심하게 하여 조금만 잘못을 해도 때리고 형을 가하고 내쫓고 하여, 궁인들이 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낮에는 쉴 틈도 없어 그의 수발을 들기에 무척 고난을 받았다"고 한다.

-291쪽

아버지 없이 자라나서인지 성종은 여성들에게 그랬듯이 남성들도 일관성 있게 대하지 않는 편이었다. 특히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에 대한 성종의 감정은 극에서 극으로 오르내렸으니 그 폐해가 연산군에게 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른이 된 후에 연산군이 남성들과 건강한 관계를 전혀 형성하지 못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성종-연산군’ 관계는 무척 나빴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마마보이로 자라나 과부 트리오를 전혀 극복하지 못한 성종이 연산군에게 물려준 가장 나쁜 유산은 바로 어머니인 폐비 윤씨 일이었다.

-292쪽

실제로 폐출 이야기가 터져 나오기 불과 보름 전인 1477년(성종8) 2월까지만 하더라도 궁 안에는 윤씨의 덕성을 칭송하는 소리가 자자했다. 그렇다면 윤씨가 궁 안에는 소리 소문도 내지 않으면서 대비들과 성종 앞에서만 각종 비행을 저지른 것일까?
1라운드. 1477년(성종8) 3월, 대비들의 지시를 받은 성종은 왕비가 후궁들을 죽이려고 독약을 소지하는 등의 ‘투기죄’를 범했으니 폐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처음 듣는 소리였고,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투기죄 따위로 왕비를 폐할 수는 없으므로 신하들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러자 성종은 정희왕후에게 물어보겠다며 할머니에게 갔다 와서는 폐비 건을 철회했다.
-294쪽

2라운드. 대비들과 성종은 왕비를 노골적으로 핍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폐비 윤씨의 생일날에 왕비에 대한 백관들의 하례를 정지시켰다. 그러자 분개한 윤씨도 왕비가 대비들에게 인사하는 행사를 예조의 일개 관원에게 대신 시켜버렸다. 왕비가 대비들에게 강경하게 맞서자 힘을 받은 성종은 왕비 편을 들면서 그녀와 가깝게 지낸다. 그 결과 연산군의 동생도 임신하게 되었다.
-295쪽

3라운드. 한동안 왕비 쪽으로 기울어 있던 성종은 압력을 이기지 못해 다시 대비들 편으로 돌아서 아내를 핍박한다. 그는 왕비 윤씨가 후궁을 때렸다고 주장하고 ‘인형을 만들어 저주한 사건’이 발생하자 왕비를 범인으로 의심한다. 이 시기에 왕비가 "주상(성종)이 나를 때리니 내 두 아들과 함께 집에 가서 살겠다"고 본가에 편지를 썼다가 성종에게 발각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성종은 대비들과 왕비 사이를 오락가락했으나 결국 대비들에게 되돌아간다.
1479년(성종10) 6월 1일 왕비의 생일날에 대비들은 왕비의 축하연을 생략하고 옷감만 올리게 했다. 그러자 저녁에 왕비는 성종이 있던 후궁의 방으로 돌입함으로써 남편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296쪽

4라운드. 다음날 아침 성종은 신하들을 불러 왕비가 반성을 하기는커녕 어제 자신에게 욕을 했으니 폐비하겠다고 주장했다. 이에 신하들은 왕비의 죄명이 명확하지 않으며,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종사에 관계되지 않으므로 폐비할 수 없다고 강하게 맞섰다. 또한 왕비의 죄는 대비들과 성종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고 항의했다. 승지들은 "왕대비에게 물어보자"며 성종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이는 ‘너는 마마보이지!’하는 비난. 정곡을 찔린 성종은 이미 대비들의 허락을 받았다고 큰소리. 결국 대비들과 성종은 1479년(성종10) 6월 13일, 왕비를 친정으로 쫓아내고 왕비가 칠거지악의 죄를 지었으니 6월 2일자로 왕비를 폐서인한다는 r y서를 반포하고 종묘에 고해버렸다.
-297쪽

비록 소혜왕후가 자기중심성이 강하고 신경질적인 여인이라고 해도 사상적, 도덕적으로 건전했다면 며느리한테 그렇게까지 잔인한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소혜왕후는 공정성이나 도덕성에 하자가 있는 여인이었다. 예를 들면 그녀는 인수대비전의 종이 부역의무를 거부하고 그 종을 도와준답시고 하급관리인 서리가 수령에게 행패를 부려 비판받게 되었는데도 연산군을 압박해 오히려 그 수령을 처벌받게 했다. 아랫사람의 잘못을 엄격하게 다스리기로 소문난 폭빈 소혜왕후는 국법을 어긴 수하들에게 벌을 주기는커녕 감싼 반면 정당하게 법을 집행한 수령을 오히려 국문하도록 요구했다. 이런 사례는 그녀가 공정성과 도덕성이 없는 이기주의자, 가족주의자임을 증명해준다. 하긴 공정성과 도덕성이 있는 어머니는 절대로 아들을 마마보이로 만들지 않으니, 이는 성종을 통해서도 충분히 유추 가능하다. 자기중심적인 독점욕에다 화가 잔뜩 나 있는 소혜왕후에게서 공정성과 도덕성까지 기대할 수 없다면, 그녀의 병든 심리적 에너지가 아들을 빼앗아간 며느리를 향하는 것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298쪽

과부 트리오의 셋째 멤버인 안순왕후 또한 병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며느리 잡기에 재미를 붙였는지 폐비 윤씨를 궁에서 몰아내고 두 달 후에 외며느리 제안대군의 부인 김씨를 쫓아냈다. 병치레를 자주하는 그녀가 몸이 약해서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아들을 박씨와 강제로 결혼시켰다. 그러나 제안대군은 박씨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쫓겨난 전 부인 김씨를 찾아서 데려오려고 했다. 이 일로 제안대군과 박씨는 불화를 겪게 되었다. 자신의 만행으로 아들이 불행해졌는데도 안순왕후는 반성하지는 않고, 폐비 윤씨를 죽이고 넉 달 후에 제안대군을 이혼시키고 다른 여자와 다시 강제로 결혼시키려고 했다. 조정의 신하들이 비난하며 반말하자 정희왕후가 나서서 "시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으면 당연히 이혼시켜야 한다"며 안순왕후를 편들었다. 대비들은 똘똘 뭉쳐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제안대군의 두 번째 부인 박씨를 내쫓아 그녀를 죽게 만들었다. 여기까지는 폐비 윤씨가 죽는 과정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한 가지 차이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안순왕후의 아들 제안대군이 성종과는 달랐다는 것이다. 제안대군도 처음에는 어머니를 이기지 못해 죄 없는 아내가 쫓겨나는 것을 방관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는 두 번째 부인 박씨마저 쫓겨나자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어머니에게 맞서며 첫 번째 부인 김씨를 다시 데려오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공개적으로 어머니를 비판할 수 없는 제안대군은 병에 걸림으로써 어머니를 수동적으로 공격. 2년 후 재결합.
-299쪽

대비들과 성종의 병적인 심리를 고려해볼 때, 폐비 윤씨가 집중 공격을 당한 것은 역설적으로 그녀가 심리적으로 건강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폐비 윤씨는 왕비가 되기 전에는 마을 사람들한테 효녀 소리를 들으며 좋은 평을 받았고, 입궁한 후에도 폐비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널리 칭찬받았다. 이로 미루어볼 때 그녀는 상당히 건강한 인격을 소유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설령 그녀에게 다소 문제가 있었더라도 불법행위를 저지른 수하를 감싸고돈 ‘폭빈’ 소혜왕후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폐비 윤씨는 토지송사로 자신에게 청탁을 넣으려고 한 오빠들을 혼낼 줄 아는 여인이지 않은가. 일설에는 폐비 윤씨가 마마보이 성종에게 세 대비의 치마폭에서 벗어나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폐비 윤씨가 죽게 된 진짜 이유는 바로 대비들에게 맞서라고 성종에게 충고한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대비들은 성종을 쥐고 흔들면서 점점 그를 병들게 하고 그가 자기 뜻대로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없게 방해했다.

-300쪽

폐비 윤씨가 베를 짜서 어머니를 봉양했을 정도로 생활력이 강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그녀는 그리 연약한 여성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비들이 자신을 핍박하자 세 대비에 대한 인사를 신하에게 대신하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반격을 가한 일을 보더라도 그녀는 그리 만만하게 볼 유약한 여성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도무지 넘어설 수 없는 난제는 남편인 성종이 마마보이라는 사실이었다.

-301쪽

신하들이 처벌을 감수하면서까지 폐비 윤씨를 도우려 하는 데다 온 세상이 그녀를 동정하자 대비들과 성종은 혼란에 빠졌다. 왜냐하면 폐비 윤씨에 대한 넘쳐나는 동정여론은 자신들에게 커다란 정치적 부담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 대한 질투심을 크게 자극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극도로 증오하는 대상을 온 세상이 동정하면 그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자신들이 가진 증오심이 올바른지 재검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증오의 대상을 죽여 없애는 것이다. 대비들과 성종은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못했기에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여론이 확산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게 되었다.

-303쪽

마마보이와 결혼한 죄로 한때 왕비였던 윤씨는 사약을 마시고 억울하게 죽었다. 그녀의 형제들인 윤구, 윤후, 윤우는 각각 백 대씩 매를 맞았고 윤구와 어머니 신씨는 장흥부로, 윤후는 제주도로, 윤우는 거제도로 뿔뿔이 흩어져 귀양을 갔다. 성종은 폐비 윤씨의 장례조차 제대로 치러주지 않았다.

-304쪽

윤씨에게 사약을 내린 날, 정신이 반쯤 나간 성종은 재상들을 빈청에 불러 모아 음식을 대접하면서 폐비 윤씨를 사사한 자신의 조치를 자랑했다. 죄의식 때문인지 나중에 성종은 대신에게 밀봉한 편지를 내려 윤씨의 제사를 약식으로나마 치르게 해주었고, 그 후에는 왕후의 예에 따라 제사절목을 정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병든 인격자 성종은 아들인 연산군에게 "비록 백 년이 지나도 아버지의 명령으로 고치지 말고 이를 지켜라" 하는 유언을 남김으로써 자신의 죄를 숨기려는 추한 모습을 드러냈다.
대비들과 성종은 폐비 윤씨가 한을 품고 억울하게 죽게 만듦으로써 그녀의 아들인 연산군의 인생을 무참하게 짓밟아버렸다. 후일에 연산군이 일으킨 피바람은 누적되고 누적되어온 조상의 업보가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였다.
-305쪽

대비들과 성종은 폐비 윤씨를 죽이는 데만 혈안이 되어 어린 난이에 어머니를 잃고 성장하는 연산군의 슬픔과 고통 따위는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폐비 윤씨를 극도로 증오했기에 그녀의 아들인 연산군에 대한 감정도 그리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궁에서 쫓겨나고 10일 후에 영아인 연산군의 어린 동생이 죽었는데, 이에 대해 타살 의혹이 제기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물론 생사람을 잡은 대비들과 성종이 죄의식 때문에 연산군을 동정했을 가능성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의 인격 수준이나 심리적 건강성을 고려해보면, 적어도 상당한 기간 동안은 노골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연산군을 미워하고 경계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연산군은 생애 초기를 ‘자칫 잘못하면 어머니처럼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보내게 되었다.

-307쪽

연산군이 세상에 태어나고 몇 달 후부터 ‘윤씨 제거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따라서 폐비 윤씨의 심리상태는 상당히 불안정했을 것이고 이는 갓 태어난 연산군에게도 나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 결과 연산군은 태어나서부터 계속 병에 시달렸다. 분명히 갓 태어난 연산군도 어머니가 위태위태한 상황에 처했음을 느낀 것이리라. 대비들과 성종은 윤씨를 폐비시키는 작전을 개시하는 시점부터 그것이 성공해 정현왕후가 왕비의 자리에 오르는 때까지 약 2년간 연산군을 이조판서인 강희맹의 집으로 보내 키우게 했다. 겨우 돌밖에 안 된 연산군은 왕궁의 음모에 희생당해 어머니와 강제로 분리된 채 낯선 집에서 자란 것이다. 당연히 강희맹의 집에 있을 때에도 연산군은 심하게 병치레를 했다.
사람에게 생애 초기의 3년은 너무나 중요한 시기다. 왜냐하면 아이는 이 시기에 어머니에 대한 애착을 형성함으로써 원초적 신뢰감을 획득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에 실패하면 아이는 후에 어른이 되어서도 세상과 타인에 대한 신뢰감을 갖기 힘들며 자신감 또한 심하게 손상될 위험이 크다. 그런데 연산군은 태어나서 1년간은 극단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것이라 추정되는 어머니와 있었고, 그나마 나머지 2년은 피붙이도 아닌 강희맹의 집에서 지내다 궁으로 들어왔다.
-308쪽

후에 연산군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죽임을 당하자 영응대군(세종의 8남)의 집으로 가서 잠깐 동안 살았다. 양육자의 빈번한 교체는 아이로 하여금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아이다’, ‘이 세상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신념과 세상에 대한 지독한 불신감을 갖게 만든다. 또한 양육자가 교체될 때마다 아이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므로 정서상태가 몹시 불안정해지고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생애 초기에 양육자가 자주 바뀐 아이들은 경계선 인격장애자가 될 위험성이 커진다.
여러 정황과 심리상태로 미루어볼 때, 대비들과 성종은 폐비 윤씨를 격렬하게 공격하던 시기, 곧 연산군이 일곱 살 되던 해까지는 그를 세자로 삼지 않으려고 한 것 같다. 폐비 윤씨를 그렇게도 증오하는 그들이 그녀의 아들인 연산군을 곱게 볼 가능성은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연산군은 자신의 어린 동생처럼 조용히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세자가 될 수 있었을까?
-309쪽

첫째, 연산군까지 처치할 경우에는 명나라를 설득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명나라는 그나마 폐비에는 관대한 편이었으나 폐왕이나 폐세자에 대해서는 상당히 까다롭게 굴었다. 왜냐하면 그것을 함부로 허용하는 것은 중국의 왕실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억울하게 죽은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여론이 비등했기 때문이다. 이는 대비들과 성종에게 큰 정치적 부담이 되었다. 윤씨를 죽이고 1년 후인 1483년(성종14)에 온양온천에 요양을 간 정희왕후가 그곳에서 죽자 천벌을 받았다는 소문이 돈 것만 보더라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대비들과 성종은 동요하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연산군을 세자로 책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셋째, 연산군의 성격 때문이다. 연산군은 ‘어린아이’(ENFP)라는 성격을 갖고 태어났다. ‘어린아이’는 상황변화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신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데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 연예인 중에 ‘어린아이’가 많은 것도 바로 이러한 성격특성 때문이다. 연산군은 금기하는 어머니 문제는 마음속 깊이 묻어둔 채 전혀 내색하지 않고, 대비들과 성종 앞에서는 재롱을 피우며 천진난만한 귀여운 아이답게 행동했을 것이다. ‘어린아이’는 타인의 생각이나 기분을 기가 막히게 읽어내어 상대방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310쪽

성종은 감정기복이 심한 외향감정형(EF)으로 추정되는데, 연산군도 아버지와 같은 외향감정형이니 두 사람이 대비들에게 주는 느낌은 비슷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를 빼닮은 연산군을 보며 대비들은 마마보이 성종이 그랬듯이 잘만 조련하면 능히 연산군도 자신들에게 충성을 다하는 마마보이 2세로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아무튼 상대방을 즐겁게 해주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어린아이’의 성격특성은 대비들의 경계심을 허물어뜨림으로써 연산군의 생존확률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311쪽

대비들, 성종, 조정의 상당수 신하들이 겉으로는 연산군을 허물없이 대했을지 몰라도, 무의식적으로는 경계와 의심을 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이런 식으로 무의식 속에 은폐되어 있는 암묵적인 경계심이나 살기를 느낄 수 있다. 어린 연산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궁 안에 낮게 깔려 흐르는 묘한 공기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자라났다. 원인을 뚜렷이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는 연산군의 육체적 질병으로 나타났다. 혈기왕성해애 할 시기부터 줄곧 병을 달고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정했는지 잘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다. 가혹하고 불우한 유년기는 원초적 신뢰감을 획득하는 데 이미 실패한 연산군으로 하여금 타인과 세상을 더더욱 신뢰할 수 없게 만들었다. 연산군의 인생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불신’으로 낙착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312쪽

온 세상을 두려워하던 연산군은 즉위 초부터 궁내에서 일어나는 일을 외부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를 많이 취했고 비밀이 새나갔다고 생각되면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내시들이 궁내의 일을 외부에 알렸다고 벌을 자주 주었으며, 왕궁의 담장을 높이고 담장가의 민가들을 철거하는 조치를 빈번하게 취했다. 연산군이 자신의 사생활을 철저히 비밀에 붙이려고 한 것은 건전하지 못한 행실을 감추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가 세상을 불신하고 의심하는 심리적 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산군은 신하들도 불신했고 끊임없이 의심했다. 연산군 시기에 있었던 신하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과 탄압은 ‘불신과 의심’으로 일관한 그의 병적인 심리가 낳은 필연적인 결과라 할 수 있다.

-313쪽

사자우리 속에서 자라난 유약한 아이인 연산군이 생존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발적 순종’을 통해 사자들에게 의존하는 길뿐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두려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연산군은 대비들에게 의존하고 절대적으로 복종했다. 특히 자신이 여덟 살 되던 해에 정희왕후가 사망해 할머니인 폭빈 소혜왕후가 왕궁의 최고 실력자가 되었기에 그는 그 누구보다도 할머니에게 철저히 의존하게 되었다. 그 결과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을 능가하는 마마보이로 성장했다. 대비들의 잘못된 행동을 일방적으로 두둔하던 연산군은 신하들에게서 뭇매를 맞게 되었다. 대비들의 잘못된 행동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숭유억불을 국시로 삼았는데도 계속 불교를 숭상하려고 했다. 둘째, 연산군한테 지나치게 많은 재물을 바치게 했다. 그녀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연산군은 국고에 손을 대기도 한다. 셋째, 부정부패를 저지르거나 범죄자들을 비호해주었다. 1498년(연산군4) 6월에 장안의 대부호인 최미동의 범죄를 비호한 사건을 예로 들 수 있다. 넷째, 부당하게 인사청탁을 함으로써 정치에 개입했다. 대비들은 자신의 친인척을 관리로 임명하거나 승진시키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315쪽

연산군은 대비전을 위한다면서 거의 날마다 연회를 베풀었고 여기에 답하기 위해 대비들도 연산군에게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그는 대비들을 위해 경회루 연못에 배들을 띄워 서로 연결하고는 그 위에 산을 상징하는 조형물과 서총대라는 누각을 설치했다. 소혜왕후는 자기가 "죽은 후 3일 이내에 왕에게 고기를 들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귀염둥이 손자를 총애했다. 연산군의 법적인 어머니 정현왕후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가문의 창고를 든든히 지켜주는 연산군을 싫어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병적인 부모-자식 관계에서는 올바른 사랑이 싹틀 수 없다. 대비들과 연산군 사이의 사랑은 가족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의를 저버려도 상관없다는 범죄집단 내에서의 저열한 가짜사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317쪽

연산군도 대비들의 잘못을 알고는 있었던 듯하다.
불신감이 심하고 자신감이 부족한 연산군은 즉위 초에 대비들만이 아니라 성종 시기부터 권력을 틀어쥐고 있던 훈구파 권신들에게도 크게 의존했다. 낯설고 신뢰할 수 없는 신진관리들보다는 그들에게 의존해야 안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종 시기의 정부를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변화를 최소화했다. 즉위 초 연산군은 밖에서는 성종 시기의 훈구파 실권자들에게 의존했고 안에서는 대비들 특히 소혜왕후(인수대비)에게 의존했다.
-318쪽

연산군은 으뜸가는 병인 ‘세상에 대한 불신’ 외에도 여러 가지 심리적 병을 앓았다.
첫째, 연산군은 애정결핍과 자신감 부족에 시달렸다. 자신감이 부족한 탓에 연산군은 열등감을 갖게 되었고 그것은 강한 자기과시욕으로 나타났다. 연산군의 열등감은 타인과의 비교에 의한 열등감이 아니라 밑도 끝도 모르는 막연한 불안감에 기초한 열등감이라는 것이 그 특징이다.
둘째, 극단적인 방어적 태도를 갖게 되었다. 경연을 기피하고 신하들과의 접촉을 피한 것, 왕궁의 담장을 높이고 담장가의 민가들을 철거시킨 것, 환관들에게 궁중의 일을 외부에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문구가 새겨진 나무패를 차고 다니게 한 것, 1504년(연산군10) 4월에 5개항의 ‘국사전파금지절목’을 만들어 신하들에게 국사를 누설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 왕이 된 후 신하들을 후원에 초대하지 않은 것 등을 그 증상의 표출로 이해할 수 있다.
-319쪽

또한 연산군이 자신에게 덤비거나 무례하게 구는 데 아주 민감했던 것도 그의 방어적 태도와 관련이 있다. 재위 말년에 연산군은 환관인 김처선을 궁중에서 죽이고는 그의 양자 이공신도 죽였다. 그러고는 김처선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 집을 파내며 그의 본관인 전의를 혁파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김처선의 친족은 7촌까지 벌을 주고 그 부모의 무덤을 파헤치고 석물을 치우라고 했다. 도대체 김처선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큰 벌을 받았을까? 그의 죄는 술에 취해 왕이 처용무에 너무 빠져 있다고 지적한 것이었다. 어쩌면 사소하다고도 볼 수 있는 불경죄로 말미암아 그는 멸족의 형을 받은 것이다. 자신감과 자부심이 강했던 정조가 자신에 대한 비판에 대단히 너그러웠던 점과 대비해보면 불경죄에 지나치게 민감했던 연산군의 과잉행동은 참으로 두드러진다.

-320쪽

셋째, 연산군은 감정통제 능력이 없었고 분노감정이 극심했다. 생에 초기의 건강하지 못한 양육환경으로 연산군의 정서상태는 좋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연산군은 감정기복이 무척 심했으며, 감정을 조절 통제하는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그의 분노감정은 어머니의 원통한 죽음을 알게 됨으로써 극대화되었다.

-321쪽

연산군은 어머니가 좋지 않은 일로 죽었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아록 있었지만, 왕이 될 때까지 그 구체적인 내막은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즉위년 3월에 알게 됨. 이일 직후 음식을 전혀 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 시점에서 연산군은 커다란 고민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다. 억울하게 죽은 어머니의 한을 풀어주려면 자신이 의존하고 집착하고 있는 대비들과 맞서야 했고, 생존과 안전을 위해 계속 대비들에게 복종하려면 어머니가 너무 불쌍해서 창자가 끊어질 듯이 아팠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고 어머니가 살려면 연산군은 대비들에게 맞서는 길을 택해야 했다. 정조가 혜경궁 홍씨에게 맞서면서 기어이 외할아버지의 동생인 홍인한을 처벌한 것처럼. 그러나 생의 초기부터 불치의 병에 걸림으로써 잔뜩 겁에 질린 인간으로 제조된 연산군은 도저히 대비들에게 맞설 수가 없었다. 이로부터 연산군의 내면에는 대비들과 아버지르 fqlfht하여 어머니의 원수들에 대한 분노, 그들에게 비위를 맞추며 살아가는 비굴한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가 활화산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활화산은 10여 년 후에 극단적인 광기와 잔인성으로 무시무시하게 폭발하게 된다.
-322쪽

일련의 과정을 검토해보면 폐비 윤씨를 추모하고 그녀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연산군의 욕구는 집요하게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즉위 초기에 힘이 미약하고 나이가 어렸을 때는 강한 반대에 직면하면 뒤로 물러섰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연산군은 점차 강경하게 밀고 나갔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어머니를 왕후로 추증하려는 연산군의 목표는 실현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연산군으로서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폭빈 소혜왕후가 두 눈 뜨고 어엿이 생존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산군은 소혜왕후가 사망한 뒤에야 겨우 어머니를 왕후로 추증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한을 풀어주고 싶은 연산군의 소망이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몬 대비들과 신하들에 의해 좌절될 때마다, 건강하지 못한 그의 마음은 더 비틀렸을 것이고 복수심도 더 끓어올랐을 것이다.
-326쪽

연산군을 실패한 왕으로 만든 데는 그의 성격도 한몫을 했다. 그는 내면세계보다는 외부세계에 관심이 많은 외향형(E)이었다. 연산군의 외향적 특성은 사냥을 무척이나 즐긴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경연에는 참석하지 않으면서도 사냥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게다가 연산군은 사냥을 위해 비번인 군사들을 차출하기도 해 신하들에게서 끊임없이 지적을 받았다. 또한 연산군은 사냥에 쓰는 매와 개, 말을 아주 좋아해서 그 동물들을 궁중에서 직접 키웠다. 그래서 신하들이 조회를 할 때면 그 주변을 사냥개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기도 했다. 일제가 왕궁을 동물원으로 만들기 전에 이미 연산군이 그 시범을 보인 셈이다. 상당히 심한 외향형이어서 그랬는지 연산군은 내향형(I)들이 선호하는 독서에는 영 취미가 없었다. 연산군은 감정이나 언어표현이 풍부하고 감정기복이 심한 외향감정형(EF)이었다. 그는 잔치판이 벌어지면 스스로 북을 치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연산군은 또한 예술적인 직관감정형(NF)이어서 130여 편에 달하는 시를 지었고 명필의 반열에 들 정도로 글씨를 잘 썼으며, ‘처용무’에도 뛰어났다. 또한 그는 그림, 공예, 음악 등에도 관심이 많았고 조예도 깊었다.
-327쪽

외부자극에 민감한 외향형의 특성과 충동적인 인식형의 특성이 결합된 외향인식형(EP)은 충동구매에 취약해 경제능력이 있을 경우 사치에 빠지기 쉽다. 외향인식형인 연산군은 취미생활을 위해 막대한 돈을 지출했다. 예를 들면 궁에 상주하는 화원이나 공예인들을 먹여 살리고 매, 개, 말 등을 사육하는 데 많은 돈을 썼다. 사냥이나 잔치에 들어가는 비용 또한 엄청났다.

-329쪽

‘어린아이’는 여러 사람들을 두루두루 사귀며 대중적 관심을 받는 것을 좋아한다. 그 대신 진지하고 깊은 사람관계에는 상당히 취약한 편이다. 연산군은 ‘어린아이’인 데다 불신감의 화신이니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했을 것이고 그것은 스스로를 더 고독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연산군은 인격자라 하더라도 자신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이는 싫어하고, 모리배라 하더라도 자신에게 살갑게 구는 이는 총애했다. 한마디로 그는 왕의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들을 좋아한 것이다. 장녹수는 "성품이 영리하여 사람의 뜻에 잘 맞추었다"는 평을 받았고, 원주 기생 월하매는 "음율을 알고 농담을 잘하여 왕의 뜻에 맞았다"는 평을 들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재치가 있어 연산군의 의중에 맞출 줄 알았다는 것이니 그가 어떤 사람을 각별하게 대했는지 알 수 있다.
‘어린아이’의 최대 약점은 ‘강한 주관성’과 ‘반성능력 부재’다.
-331쪽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어린아이’는 천방지축이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이들은 관례나 전통 등 자신을 속박하는 것은 마구 무시하며, 엄격한 규칙도 가벼운 마음으로 위반해버린다. 법을 제정해 사치를 규제하자거나 음주를 금지하자는 신하들의 주장에 대해 연산군이 항상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반대한 것은 그런 법이 기득권층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법이나 규칙 등을 아주 싫어하는 ‘어린아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332쪽

친인척과 측근들을 편파적으로 옹호하고 신하들의 비판에 부적절하게 대응하는 왕을 보며 신하들 또한 크게 실망하고 불신감을 쌓아갔을 것이다. 대비들 앞에서 재롱을 떠는 능력은 출중했으나 대인관계를 풀어나가는 능력이 없는 연산군은 신하들과 정상적으로 소통할 수 없었다. 건강한 소통을 방해하는 연산군의 문제점을 몇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 변명과 자기 합리화.
둘째, 배 째라 전술,
셋째, 신하들 모욕하기.
-335쪽

유자광은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세조의 쿠데타를 비난하는 것으로 해석해 연산군에게 보고했다. 사실 김종직의 시는 당시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그 누 구도 이를 세조의 쿠데타와 연결해 해석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유자광은 이를 교묘하고 능란하게 해석해 연산군에게 보고함으로써 그를 극도로 흥분시켰다. 연산군이 조금만 더 현명하고 정치적 안목이 있었다면 자기 감정을 적절히 통제함으로써 이 사건을 다르게 처리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심리적으로 병든 연산군은 그럴 수가 없었다. 세상을 불신한다는 것은 곧 세상을 두려워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세상에 대한 불신감이 극심한 연산군은 왕조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왕에게 도전하는 듯한 행위를 접하면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그것을 당장이라도 자신을 죽일 것 같은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 결과 극도로 민감해진 연산군은 적개심에 사로잡혀 지나친 과잉방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연산군은 어머니의 원수인 대비들과 성종, 상당수의 훈구파 권신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들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비겁한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를 마음속에 억압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약하디약한 자아를 가진 연산군은 대비들과 훈구파 권신들을 싸고돈 자기 잘못은 조금도 돌아보지 못했기에 평소 자신에게 쓴소리를 많이 해대는 사림파 신하들에게 불공정한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
-338쪽

대비들과 훈구파 권신들은 연산군의 병을 치료해주기는커녕 그것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함으로써 병세를 크게 악화시켰다. 사림파가 강력한 탄압을 받아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된 후에는 서서히 대비들과 훈구파 권신들이 한정된 먹이를 독차지하기 위해 갈등을 빚게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은 연산군을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연산군은 오만방자해진 훈구파 권신들의 행동을 위협으로 받아들였고 그들에 대해 적개심을 키워나갔다. 만일 대비들과 훈구파 권신들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연산군은 주저하지 않고 대비들을 선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를 이은 마마보이인 연산군은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대비들에게 한 마디도 항의하지 못하는 나약하고 비겁한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왕의 자리가 위태롭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연산군의 심리는 필연적으로 대비들에게 더 의존하고 더 집착하는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342쪽

이런 흐름 속에서 연산군은 1501년(연산군7)부터는 대비들의 친인척에게 관직을 주기 시작했고 이로 말미암아 훈구파 권력실세들과 충돌하게 된다.
연산군을 폭주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사건 발생. 1504년(연산군 10) 초에 연산군의 하늘이었던 폭빈 소혜왕후(인수대비)가 중병으로 앓다가 4월에 사망한 것이다. 이 사건은 연산군의 심리에 두 가지 영향을 미쳤다. 첫째, 마마보이 연산군이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할머니 소혜왕후의 사망은 그의 불안감을 도저히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시켰다. 무의식적으로 자기 주변이 온통 위험한 적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인식한 불신감의 화신 연산군이 그나마 안심하고 살 수 있으려면 비록 병적인 관계이기는 하지만 소혜왕후에 대한 심리적 의존이 반드시 필요했다.
-343쪽

둘째, 소혜왕후의 사망은 연산군의 마음속에 억압되어 있던 어머니의 원수들에 대한 복수심이 터져 나오게 했다 .연산군이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을 알고도 그것을 밖으로 끄집어내지 못한 것은 소혜왕후 때문이었다. 그가 어머니를 되찾으려면 소혜왕후와 싸워야 했는데, 그녀에게 전적으로 의존한 연산군으로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연산군의 무의식 속에서는 대비들과 성종에 대한 증오심이 활활 타올랐으나 의식적으로는 그것을 회피했기에, 그것은 소혜왕후가 생존해 있는 한 절대로 풀지 못하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이글거리는 한이 되었다. 이 한을 해소하지 못하면 자신이 화병에 걸려 죽을 것이고, 그것을 밖으로 분출하면 잔혹한 대량학살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할머니의 죽음은 후자의 길을 열어주었다. 소혜왕후의 병환과 사망 그리고 갑자사화의 발발이 겹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연산군의 심리적 역동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필연일 수밖에 없다.

-344쪽

갑자사화는 소혜왕후가 숨지기 약 여섯 달 전인 1503년(연산군9) 9월의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궁에서 열린 잔치에서 권력실세이자 예조판서인 이세좌가 술에 취해 연산군의 옷에 술을 흘리는 일이 벌어졌다. 연산군은 이세좌가 고의로 그랬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를 좌천시키겠다고 우겨댔다. 신하들이 이세좌를 탄핵하지 않자 연산군은 극도로 예민해졌다. 이세좌 파면. 전라도 무안현 귀양 보냈다가 다시 함경도 온성으로 옮겼다. 또한 이세좌를 탄핵하지 않은 대간들을 국문하게 했다. 이세좌는 이극돈, 이극균 등과 같은 집안 출신으로 그의 가문은 연산군 시대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실세였다. 아마 연산군은 훈구파 권신들과 갈등을 빚으면서부터 이러한 막강한 권세가들에게서 가장 큰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따라서 겁에 질려 있던 연산군은 신하들이 이세좌를 탄핵하지 않자 그의 세력이 예상보다 크다고 생각해 매우 두려워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 결과 감정적 혼란상태에 빠진 연산군은 이성을 잃고 지나친 처벌을 남발한 것이다.
마음이 다소 진정되었는지 연산군은 넉 달 후에 이세좌를 풀어주었다. (오래 가지 않는다.)
-345쪽

할머니가 사망했고 훈구파도 적이 되었으므로 연산군은 새롭게 의존할 대상을 찾아야 했다. 그 대상은 대비들 일족과 월산대군의 부인인 박씨나 그의 동생인 박원종 같은 피붙이들이었다. 연산군은 이들을 편파적으로 감싸면서 관작을 마구 내려주었다. 반면에 극소수 편애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불공정한 처벌을 남발했다.

-349쪽

어떤 이들은 연산군의 폭정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라고 강변하기도 한다. 물론 왕조국가에서 왕이 왕권을 강화하려고 시도했다고 해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왕이 무엇을 위해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느냐는 점이다. 만일 개혁을 위해, 백성의 이익을 위해 기득권세력과 싸우려는 목적에서 왕권을 강화했다면 칭찬받아야 하지만 수구반동을 위해, 극소수 지배층을 위해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다면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백성을 위한 정치란 단지 몇 마디 말로 되는 게 아니고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구상과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개혁정책을 추진해야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산군의 통치에서는 이러한 일관된 국정목표나 개혁정책을 찾아볼 수 없다. 단 하나 특이한 점은 민생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연산군이 국방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고 매우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세상에 대한 불신감’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이런 특이한 현상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불안과 공포 속에서 한 생을 보낸 연산군은 자신을 위협하는 적의 존재에 극도로 민감한 사람이므로 다른 건 몰라도 국방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351쪽

연산군은 세상을 신뢰할 수 없었으므로 신하들은 물론 백성들을 신뢰할 수 없었고 나아가 그들을 사랑할 수도 없었다. 태생적 한계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성악설에 경도될 수밖에 없는 연산군이 애민사상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연산군은 지속적으로 왕궁 주변의 민가들을 철거했고 1501년(연산군7)에는 국방력을 강화하겠다며 남쪽 지방의 백성들을 북부인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일로 자살자가 생기고 도망자가 급증해 이들을 잡느라 전국이 소란해졌고 민심이 들썩거렸다. 또한 그는 서울 주변에 성을 쌓는다거나 신도로 개설, 사냥터 확보 등을 명분으로 백성들을 내쫓고는 ‘금표’를 세워나갔다. 왕의 영역인 금표지역은 당시에 경기도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넓게 확산되었다.
-352쪽

왕의 여흥을 위해서는 백성들이 고통을 감내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연산군의 태도는 마치 1970~80년대 정통성이 없는 군사독재정권이 청와대 뒷산을 통제하고 도시를 정화한다며 빈곤층의 집을 철거하던 정책을 연상시킨다. 또한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원화성 건설공사에 참여하는 백성들에게 임금을 지불하고 백성들과 끊임없이 만나 그들의 고충을 들으려 한 정조와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왕의 권위는 스스로 모범을 보임으로써 신하들과 백성들의 자발적인 존경심을 획득할 때 확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권력을 과시하고 법을 앞세우고 금표를 세우는 식으로는 백성들의 반발심만 키우게 되므로 오히려 권위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연산군은 개인적으로나 정책적으로나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므로 가시적이고 강압적인 권위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고 이는 왕실과 백성들의 사이를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다.
-356쪽

정의로운 역사가 이어지면 아름다운 세상이 열리고, 불의한 역사가 이어지면 지옥 같은 세상이 도래한다. 지옥 같은 세상은 심리적으로 병든 부모와 환경을 양산함으로써 아이들의 미래를 끔찍하게 파괴한다. 연산군 같은 인물의 배후에는 반드시 왜곡된 역사와 병든 부모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한국사회는 어떠한가? 그리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일제강점기에 겪은 배반의 역사를 청산했는가. 군부독재의 폭압통치로 얼룩진 불의와 부정부패의 역사는 정화되었는가. 돈의 가치가 인간의 존엄성을 농락하는 신자유주의의 독소는 빠지고 있는가. 1% 특권층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정치, 올바른 개혁을 하루빨리 이루어내지 못한다면 한국사회에서는 무수히 많은 연산군이 태어나고 자라날 것이다.
-3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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