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객 20 - 국민주 탄생
허영만 지음 / 김영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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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 원조는 페르시아야. 페르시아를 점령한 칭기즈칸 군대가 증류법을 배워 중국과 고려에 전파했지.
최근까지 개성에서는 소주를 '아락주'라고 했다는데 증류식 소주를 아라비아어로 '아락'이라고 한다니까 증거가 될 만하지?
일리 있어요. 그 당시 페르시아는 증류로 향수를 만들 정도의 기술이 있었으니까요.
일제 때 우리 증류식 소주를 막지 않았으면 우리도 좋은 술을 많이 가지고 있을 텐데...
그 생각만 하면 분통이 터져.
곡물을 사용해서 술 빚는 걸 막으니까 청주가 없어졌지.
밑술인 청주가 없으니까 당연히 증류식 소주도 사라졌지.-156쪽

세상에... 처음 알았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루에 소주를 1천만 병씩 마신단 말이야?
병 값이 원가에 영향이 많겠죠?
모두 새 병을 생산해서 쓴다면 그렇겠죠.
하지만 다행히 6병 출고시키면 5병이 회수될 정도로 재활용이 잘 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국민주 하면 소주라고들 하는데 서민들이 즐겨 마셨스무니까?
아닙니다.
다른 술이 여름에는 자주 상하니까 술을 증류시켜 소주를 만들어 양반들이 마셨습니다.
서민들은 꿈도 못 꿨죠.
가격이 싼 희석식 소주가 나오면서 국민 대다수가 부담 없이 이용하게 된 거죠.
-181쪽

몇 년 전에는 소주병을 따서 맨 윗부분을 '고수레'하면서 버렸지요.
미신 때문에요?
그게 아니고 윗부분의 메탄올 때문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공정이 좋지 않아서 메탄올이 섞여 있을 수 있었답니다. 소주 반 잔 정도 버리는 것이 소주 매출에 상당한 영향을 줬다는 얘기도 있어요.
그렇겠지. 요즘 식당에서 숟가락, 젓가락을 놓을 때 냅킨을 한 장 까는 경향이 있는데 그 한 장의 냅킨이 많은 매출을 올린대잖아.
냅킨을 까는 것보다 젓가락 받침을 사용하는 것이 위생에도 좋고 쓰레기도 줄이니까 더 나은데 왜 안 하는지 원...-189쪽

잔을 돌려가면서 술을 마시는 것을 수작이라고 해요.(갚을 수, 술 작)
술 마시는 사람끼리 서로 술잔을 권하고 받은 잔을 비운 다음 반드시 술잔을 돌려주고 술을 따라주는 걸 수작이라고 하는데 고려 인종 때 수작을 하도록 규정했고 조선조 성종 때 일반화됐어요.
잔을 주고받아 돌려마시는 흔적이 있는 곳이 경주에 남아 있는 포석정입니다. 물길을 구불구불 흐르게 만들어서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돌아가면서 마셨던 거예요.
또 조선조에는 '승정원에게 문서를 왕께 올리는 날에는 왕이 신하에게 술과 음식을 내렸다. 이때 술은 큰 술잔에 담아 돌려가며 마셨다'라고 되어 있어요.
이런 수작 문화는 왕실의 호사스런 생활로 간주되기 쉽지만 왕과 신하들 사이의 결속을 뜻하는 정신적 행위였고 그 이면에는 공동체 의식을 다지는 깊은 의미가 있지요.
왕과 신하들뿐 아니라 요즘도 가끔 큰 대폿잔에 술을 부어 돌려가면서 마시는 것도 같은 의미이기는 하지만 급하게 마셔야 하고 많이 마시게 되는 단점이 커요.
-190쪽

우리말에 까불거나 음모를 꾸미는 걸 수작 떤다고 얘기하는데 같은 뜻이야?
응, 한문이 같아.
조선시대 선비 이덕무는 저서 '사소절'에서 '남에게 술을 굳이 권하지 말 것이며 어른이 나에게 권할 때 아무리 사양해도 안 되거든 입술만 적시는 것이 좋다'라고 기록했죠.
수작의 전통에 따르면 술좌석에서 잔이 한 바퀴 도는 것을 1순배라고 하고 7순배 이상은 돌리지 않는다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석 잔은 훈훈하고 다섯 잔은 기분 좋고 일곱 잔은 흡족하고 아홉 잔은 지나치다. -191쪽

1973년 일입니다.
정부는 소주 시장의 과다 경쟁과 품질 저하를 막는다고 한 도에 소주 업체를 하나만 허락했어요.
1976년엔 지방 산업을 보호한다고 자도주 구입제도를 만들어 주류 도매상들이 전체 소비 구입량의 50% 이상을 그 지역의 소주 업체에서 구매하도록 했고요.
그 이후 소주는 지역마다 다른 술로 자리 잡았어요. 사람들은 자기 고장의 술을 더욱 애용했고 소주 산업은 강한 지방색을 갖게 됐죠.
하지만 이 제도는 1996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로 폐지됐고 전국적인 소주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대표적인 지방 소주 회사로는 부산의 '대선', 경남의 '무학', 대구와 경북의 '금복주', 광주와 전남의 '보해', 전북의 '보배', 대전과 충남의 '선양', 충북의 '충북 소주', 제주의 '한라산', 1993년에 두산에 합병된 강원도의 '경월'이 있었지요.
1996년 그 법이 폐지되기 전까지는 서울에서 마시는 소주를 부산에서 마실 수 없었죠.-193쪽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 5대 파사왕은 태자와 함께 사냥을 나갔었다. 그때 왕의 일행을 위해서 이찬 허루는 산해진미가 갖추어진 술상을 차려냈다. 흥겹게 취한 태자는 여기서 장래의 왕비를 만났고, 춤추는 아가씨들과 어울려 흐뭇해진 노왕은 한 마디했다. "이곳의 지명이 대포라고 했던가? 이렇게 성찬과 좋은 술을 차려내어 잔치를 베풀어준 공에게는 마땅히 '주다(酒多)'라는 벼슬을 주어 진급을 시킴이 마땅하리라." 그로부터 '술을 많이 낸다' 또는 '많은 술을 준다'는 말은 값진 선물을 베푼다는 뜻이 되었고, 나중에는 벼슬인 각간(혹은 술간)의 동의어가 되었다. 그후 '대포'라는 지명은 술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되었고, '대포 한잔하세'라는 말은 우리 민족의 풍습이 되었다. -205쪽

조광윤은 송나라의 개국 황제이다. 그는 공제 때 송주귀덕군 절도사로 있으면서 960년 진교에서 반란을 일으켜 황제에 올랐다. 나라가 안정되면 창업 시기 장수들에 대한 뒤처리가 항상 고민되는 법. 조광윤은 거의 매일 무장들을 궁에 불러들여 주연을 베풀었다. 그러고는 석수신, 왕심기 등 장령들에게 고관후록의 조건으로 병권을 내놓도록 압력을 가했다. 결국 이들은 병을 핑계로 군대의 요직을 내놓았다.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배주석병권'이라 하니, 곧 술잔으로 병권을 내놓게 한 것이다. 조광윤은 또 전쟁의 살벌한 분위기를 일소하고 온 나라에 태평성대의 기상을 펴 보이기 위해 민간의 유력자들에게도 酒食을 크게(大) 베풀어(鋪) 마음껏 놀게 하였으니, 이것이 송 태조의 '대포'고사다.-205쪽

세종 때의 청백리이자 명재상인 유관이 '대포의 고사'를 내용으로 상소를 올리자, 세종이 이를 받아들여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을 명절로 삼아 대소 관료들에게 경치 좋은 곳을 골라 술을 마시고 놀며 즐기게 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대포'가 술을 뜻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205쪽

술 광고는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세게 할 수 없다. 죽탄수로 술을 만든다는 것은 술병에 붙은 라벨 옆쪽에 써져 있으나 그걸 보는 소비자는 없다. 와인 라벨은 열심히 읽으면서...
소주를 한문으로 쓰면 어떻게 써야 할까?
당연히 燒酒(사를 소, 술 주)일 게다. 하지만 아니다. 燒酎(사를 소, 전국술 주)다. 소주병에 붙은 라벨 옆을 보면 확인 가능하다.-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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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의 역사
브라이언 이니스 지음, 김윤성 옮김 / 들녘 / 2004년 8월
품절


티베리우스를 계승한 칼리굴라는 식사하면서 죄수들이 고문당하는 것을 즐겨 구경했다. 어떤 죄에 대해 그는 중국의 ‘능지’(천 번 칼로 도려내어 죽이기)와 비슷한 고문을 시행하도록 명령했는데, 칼날로 조금씩 반복해 찔러서 희생자들이 스스로가 죽어가는 것을 느끼도록 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는 칼리굴라가 사람을 두 토막을 내서 죽였으며, 모욕적인 풍자를 썼던 작가를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불태웠다고 기록했다.

-25쪽

원형경기장의 관리 담당자들은 죄수들이 형 집행 전에 자살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해야만 했으나 이를 막지 못하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예를 들어 집정관이었던 심마쿠스가 자신의 아들을 위해 검투사 시합을 열었을 때, 죄수들이 경기장에 나가기 전에 서로의 목을 졸라 자살을 도왔던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31쪽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일반적으로 이탈리아의 제노아에서 태어난 걸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스페인어만을 말했으며 스스로를 크리스토발 콜론이라고 불렀다. 스페인 사람들은 콜럼버스가 스페인 사람이라고 주장하지만, 몇몇 역사가들은 그가 사실은 개종한 유대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102쪽

개종자들의 두 번째 세대가 지나 16세기 중반에 이르게 되자 종교 재판소는 더 이상 유대교를 근절하는 것에 관여하지 않았고, 관심을 ‘이단적’ 출판물에 대한 검열과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 ‘올바른 종교적 신조’를 강화하는 것으로 돌렸다. 예수회의 창설자 로욜라조차도 두 번이나 이단으로 소환당해 심문을 받았을 정도였다.

-103쪽

종교재판에는 신분 고하의 차별이 없었다. 예컨대, 희생자들 중에는 필리프 2세의 장자였으며 왕위를 계승하게 되어 있었던 돈 카를로스도 있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카를로스는 종교재판소의 관행들을 싫어했으며 사적인 자리에서 그런 점을 비난했다고 한다. 결국 몇몇 시샘하는 자들이 이를 보고했고, 카를로스는 체포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구하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이단으로 판결받았고,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높은 지위 덕택에 그는 형 집행 방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다. 그는 정맥을 끊는 방식을 택했으며, 과다출혈로 인해 1568년에 23세의 나이로 죽었다.

-119쪽

성실청이라는 방의 이름은 방의 천장에 별들이 그려져 있었던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어떤 방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이었다. 본래 왕의 회의실이었던 이곳에서는 일반 법정에서 취급하지 않는 탄원 같은 사건들을 다루곤 했다. 그러나 1509년 헨리 8세가 집권한 후 당시 장관이었던 토머스 울시가 성실청 법원을 자신만의 재판정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울시의 비서이자 계승자였던 토머스 크롬웰은 광범위하게 분산되었던 권력을 이 법정으로 통합했다. 두 원로 판사와 추밀원 임원들로 구성된 성실청은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이곳은 차츰 임의로 판결을 내리기 시작했고, 고문의 주된 선동자가 되어갔다. 이러한 학정은 찰스 1세 때인 1640년에 고문을 폐지하라는 항의의 물결이 거세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132쪽

마녀가 자신의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유죄판결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 널리 인정되었기 때문에 고문은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자발적인 자백은 불충분하다고 여겨졌으며, 오직 고통과 고문을 통해 얻어진 자백만이 진정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여겨졌다. 한 작가가 지적했듯이, 마녀로 판정된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자들이었고, 그들은 고문당해 온갖 종류의 사악한 행위들을 자백하지만 않았다면 마녀라고 의심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직자들은 이런 논리 자체가 오류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자백을 얻어낼 때까지 고문은 다양한 형태로 지속되었다.

-160쪽

환자도 고문당해야 하는가? 답은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 우선 죄수를 가두어둔다는 것이었다. 가장 빨리 회복시키는 방법은 끓는 물을 겨드랑이에 붓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다른 방법은 끓는 물을 겨드랑이에 붓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다른 방법은 불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죄수는 땀을 홍수같이 흘리게 되는데 이 땀은 신체의 모든 땀구멍에서 질병을 없앨 것이며, 따라서 죄수는 진실을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임신 중인 여인에게는 고문과 형의 집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예 기간은 아기를 출산한 후 한 달까지였다.

-165쪽

영국에서 마녀 박해는 대륙보다 늦게 시작되었고,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6세기까지도 마법에 대한 형벌은 비교적 가벼워서, 겨우 형틀에 한두 시간 손발을 끼워두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정도였다. 1542년, 헨리 8세의 통치가 끝나갈 무렵 마법에 대한 특별한 법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5년 후,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이 법령은 폐기되었다. 1558년,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른 후에 마법의 위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여왕은 온갖 종류의 음모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 특히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의 음모와 갖가지 종류의 요술이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고 여겼다.

-171쪽

매튜 홉킨스가 자백을 쥐어짜내기 위해 가장 즐겨썼던 방법은 마녀들을 ‘수영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고문의 정당화를 위한 근거를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후에 영국의 제임스 1세가 되었다)가 쓴 <악마론(1597)>이라는 책에서 찾았다.

마녀들의 극악무도한 불경함이 나타나는 초자연적 표지로서 물은 마녀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마녀들이 성스러운 물을 흔들어 떨어내고, 세례의 은총을 멋대로 거절하는 것은 신께서 정해놓으신 것이다.

마녀를 수영시킬 때는 우선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왼쪽 엄지발가락에 묶고 물속에 집어넣었다. 만일 그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 유죄로 판정되었고, 가라앉으면 무고함은 증명되었지만 대개는 익사하고 말았다.
-174쪽

칼을 쓰면 손이 입에 닿지 않기 때문에, 만약 친척이나 친구의 도움이 없다면 희생자는 음식과 물을 못 먹어 굶어 죽게 된다.(중국)

-221쪽

중국에서 쓰였던 형벌 중 가장 유명하고도 무서운 것은 능지, 즉 ‘칼로 천 번 도려내어 죽이기’였다. 이 긴 시간을 요하는 형벌에 드리운 사디즘에는 때로 운 또는 우연이라는 요소가 섞이기도 했다. 집행자는 종이가 덮인 바구니에 각각의 신체 부위가 표시된 칼들을 담아 가지고 와서는 임의로 칼 하나를 고른 뒤, 손잡이에 써 있는 신체 부위를 도려냈다. 형을 집행당하는 죄수의 가족들은 집행자에게 뇌물을 주어 ‘심장’이라고 쓴 칼을 꺼내도록 해서 되도록 신속하게 희생자의 시련이 끝날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222쪽

연합국 전쟁포로들은 극동 지역에서 가장 잔혹한 고통을 겪었다. 일본 군인들은 항복을 가장 수치스러운 일로 여겼던 만큼 자신들이 붙잡은 포로들을 학대하는 것도 매우 당연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강제노동에 동원되었고, 가장 영양가 없는 음식을 배급받았으며, 자주 몽둥이와 채찍으로 맞았다. 만약 이에 항의하면 총검에 찔려 죽음을 당해야 했다.

-248쪽

1849년 12월 22일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폭동죄로 잡혀온 20명의 죄수들과 모스크바에 있는 세메노프스키 연병장으로 걸어가게 되었다. 사형 선고문은 말을 더듬기로 유명한 장군이 고통스러우리만치 천천히 읽어내려 갔다. 사격대에 발포 명령이 막 떨어지려는 순간 보좌관이 니콜라스 황제의 밀봉된 편지를 가지고 달려왔다. 장군은 편지를 펴서 내용을 발표했다. 사형 선고는 시베리아 유형으로 감형되었다. 이런 극적인 감형이 순전히 황제가 꾸민 일이었다는 것은 나중에야 밝혀졌다. 근래에도 많은 경우에 희생자들은 총소리를 듣고 자신이 죽었다고 여겼다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점차 인식하곤 한다. 이러한 충격은 평생 동안 계속되는 인지능력의 손상을 가져오기에 충분할 것이다.
-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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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09-23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러 나서 한 번 다 날려주시고....ㅜ.ㅜ

카스피 2009-09-23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럽에서는 고문의 역사가 마녀 사냥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하느것 같더군요^^
종교재판이란 미명하에 많은 사람들을 고문으로 죽였다고 하네요.

마노아 2009-09-23 21:37   좋아요 0 | URL
정말 사람 여럿 잡았더라구요. 그리고 유럽뿐 아니라 전 대륙에 걸쳐서 너무도 오래오래 고문이 자행되어 온 거예요. 특히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의 고문 풍습은 엄청 놀랬어요...;;;;;
 
파리의 치마 밑 - 행복한 책꽂이 02
주명철 / 소나무 / 1998년 11월
합본절판


위에서 소개한 사례에서 우리는 난봉꾼들이 얼마나 처녀를 좋아 했는지 알 수 있는 동시에 사람에 따라서는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기 때문에, 얼굴이 예쁜 아가씨는 마음만 먹으면 갑자기 호화로운 생활을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데렐라 이야기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웬만한 여자가 신을 수 없는 "작은 신"은 처녀를 암시하는 것으로서 정복욕이 강한 남성이 즐겨 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해당되는 말로 봐야 옳다.

-67쪽

18세기의 사회는 온통 ‘훔쳐보기’의 대상이었다. 경찰은 거물급 인사들의 사생활을 추적하고 엿본 뒤 보고서를 만들어 치안총감과 왕실에 전달했다. 어디 그 뿐인가? 도서 감찰관도 수많은 끄나풀을 풀어 작가들을 감시했다. 치안총감 사르틴느가 했다는 말-길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셋 중 하나는 자기 부하라는 말-은 그 사회에서 ‘훔쳐보기’가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음란 서적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훔쳐보기’를 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훔쳐보기’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가르친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과적으로 반문화의 철학이었다. 또한 독자 가운데 이같은 철학을 배우지 못하는 사람도 일차적으로 피임의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 반문화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반역사적인 것으로서, 말하자면 자연의 철학이요 유물론이다. 신분을 중시하는 전통 사회의 가치관을 부정하는 철학이 ‘쾌락주의’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182쪽

오늘날 민주화된 사회에 태어나 성인이 된 사람일면 누구나 참정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18세기에 살았던 사람 가운데 자기가 정치와 직접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당시 사람은 점점 같은 분위기와 사상을 공유할 수 있었다. 모래알처럼 흩어진 개인에게 정치적인 집단정신 자세를 갖게 만들어준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문인이었다. 이들은 고대 그리스 이래 정확한 지식보다 못한 것으로 천대받던 ‘의견’에 새로운 뜻을 담아 ‘여론’을 만드는 데 이바지 했다. 음란 서적에서 성직 세계의 위선을 고발하고, 왕이나 왕비의 성 생활을 고발하여 왕실의 정통성을 뒤흔드는 한편, 사랑에는 신분의 귀천이 따로 없다는 내용을 전달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마땅하다. 이러한 뜻에서 음란서적을 그 시대의 방식대로 ‘철학 책’이라고 부르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185쪽

우리가 다루는 18세기의 경찰 보고서에는 첩을 둔 남자는 거의 어김없이 다이아몬드를 선물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모두 알다시피, 금강석은 경도 10의 보석이기 때문에 금강석끼리 마찰을 해야만 가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17세기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당시까지 인도에서만 금강석이 산출되었지만 18세기 초 브라질의 금강석이 발굴되었기 때문에 유럽의 부자들은 금강석에 대한 취미를 더욱 충족시킬 수 있었다.

-187쪽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지 2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구체제’가 무조건 거부해야 할 대상만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프랑스 혁명을 ‘구체제의 산물’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데 합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앙시엥 레짐’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것을 혁명기의 실세가 무조건 거부하기 위해 모순 투성이로만 강조했던 체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으며, 존재할 모든 체제처럼 조화와 모순, 역동성과 타성을 함께 지닌 체제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체제에도 모순과 타성은 있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혁명이 일어난다고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앙시엥 레짐’을 살펴보아야 한다.

-194쪽

특히 전통 사회에서 아주 천천히 일어나는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변화와 때로는 급격히 일어나는 경제 위기나 정치 위기가 서로 작용하는 방식, 또는 그같은 위기를 맞이한 사람들이 거기에 대처하는 방식에 따라서 혁명이 되거나, 개혁이 되거나,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반드시 일어나게 마련이었다고 생각하는 편보다 역사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

-195쪽

기본적으로 농업 국가였던 프랑스의 ‘앙시엥 레짐’은 경제적으로 많은 특권과 제약을 인정하는 제도였다. 국내 곳곳에 관세 장벽이 설치되어 있었고 수많은 직업인 단체와 조합이 특권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상품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시장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1774년 튀르고는 중농주의의 이론을 적용해서 곡물의 자유로운 거래를 실시하고 조합을 폐지했다. 그런데 이같은 노력이 성공하려면 기후 조건도 맞아야 했다. 1775년의 작황이 나빴기 때문에 곡물값이 폭등했고 서민은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을 진압했지만 튀르고의 조치를 원상으로 돌려야 했다. 그리고 프랑스 경제는 아메리카 독립전쟁을 도와주면서 더욱 나빠졌다. 혁명가들은 재정 파탄에 이른 왕국을 떠맡았다. 그들은 자신이 자유 시장 경제를 도입한다고 생각했다.

-196쪽

‘앙시엥 레짐’은 또한 가톨릭교의 지배를 받던 문화이기도 했다. 가톨릭교는 부부 관계까지 규정했다. 예를 들어, 아이가 태어나는 시기는 부부간의 은밀한 행위가 어떻게 부활절이나 공현절같은 축일과 관계 있는지 보여준다. ......볼테르같은 문인은 가톨릭교를 ‘광신’이라고 비난하고, ‘포르노그래피’ 작가는 성직자의 위선을 노골적으로 공격하는 한편 유물론적 견해를 퍼뜨려 신부, 수녀, 왕, 왕비, 대신, 평민은 모두 같은 물질로 되어 있기 때문에 평등하다는 사상을 은근히 퍼뜨렸다. 이같은 사상은 문맹자가 줄고, ‘수기 신문’, ‘추문’, 일간지 같은 읽을거리가 늘어났기 때문에 더욱 쉽게 널리 퍼질 수 있었다.

-197쪽

재정 파탄에 직면한 왕은 전국 신분 회의 소집에 동의했다. 1614년 이후 한 번도 소집되지 않던 전국 신분회에 관한 자료를 갖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제출하라는 정부의 명령은 곧 언론의 자유를 뜻했다. 또한 전국 신분 회의 선거법이 1789년 1월에 나온 뒤 사람들은 자유로이 모임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언론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라는 두 가지 통로를 통해서 혁명의 과정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고 가속화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197쪽

우리는 18세기 프랑스의 문화에서 새로운 관계가 태어나고 확산되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살롱’에서 핏줄을 중시하는 궁중의 문화와 재능을 중시하는 ‘문학공화국’의 문화가 만나 새로운 관계를 이루었듯이, ‘치마 밑의 세계에서는 ’재투성이‘가 하루 아침에 때를 벗고 귀족과 만나는 ’사랑의 공화국‘이 생기고 있었다. 이 책에서 다루지 않은 도박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도박장에서 귀족과 평민은 신분이라는 구조를 뛰어넘어 평등한 관계로 만났다. 이처럼 사회적 현실 속에서 ’구제도의 모순‘이라고 생각하던 타성도 존재했지만 역동성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과거의 방식대로 기득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바뀌지 않을 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사실만이 만고불변의 진리임을 깨닫게 된다.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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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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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랑은 오해다. 그를 사랑한다는 오해, 그는 이렇게 다르다는 오해, 그녀는 이런 여자란 오해, 그에겐 내가 전부란 오해, 그의 모든 걸 이해한다는 오해, 그녀가 더없이 아름답다는 오해, 그는 결코 변하지 않을 거란 오해, 그에게 내가 필요할 거란 오해, 그가 지금 외로울 거란 오해, 그런 그녀를 영원히 사랑할 거라는 오해...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사랑을 이룬 이들은 어쨌든 서로를 좋은 쪽으로 이해한 사람들이라고, 스무 살의 나는 생각했었다. 결국 내게 주어진 행운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서로의 이해가, 오해였음을 깨닫지 않아도 좋았다는 것... 해서 고스란히 서로가 이해한 서로를 영원히 간직할 수 있었다는 것... 아무런 내색 없이, 마음 놓고 그녀가 울 수 있도록 나는 스스로의 마음을 그녀의 눈물 밑에 펼쳐 주었다. 따뜻한 벽난로를 등지고서도, 해서 내 마음은 한 장의 손수건처럼 자꾸만 젖어들었다. 젖고, 젖었으며... 내가 젖을수록 조금씩

말라가는 그녀의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15쪽

가능하다면 말이야... 언젠가 함께 저곳에 가보자구. 가능성이 전혀 없는 얘기를 잘도, 진지하게 그녀에게 건넸었다. 융프라우를요? 다보탑으로부터 그런 얘길 건네들은 석가탑처럼, 그녀는 표정 없이 커피 잔의 손잡이를 매만지기만 했다. 분명 우리보다는 탑들이 알프스에 오를 확률이 높을 정도로 우리는 가난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누구도 그것을 농담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스무 살이었고, 이끼가 낀 탑보다는 확실히 푸른 인생의 가능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20쪽

선빵을 맞아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떠오르는 달과 별이 주먹이 주는 선물임을... 그리고 어떤, 방어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특히 눈을 맞으면 그랬다. 말하자면 눈을 통해, 아버지를 처음 본 순간의 어머니도 그런 상태였을 거라 나는 짐작해 보았다. 알겠니? 아버지는 얘기했다. 절대 단련할 수 없는 급소가 몇 군데 있어. 그중 하나가 눈이야! 그중 하나가

눈이라고, 음악이 끝날 무렵 나는 다시 중얼거렸다. 이것은 너무나 불공평한 시합이다 첫눈에 누군가의 노예가 되고, 첫인상으로 대부분의 시합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외모에 관한 한, 그리고 누구도 자신을 방어하거나 지킬 수 없다. 선빵을 날리는 인간은 태어날 때 정해져 있고, 그 외의 인간에겐 기회가 없다. 어떤 비겁한 싸움보다도 이것은 불공평하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71쪽

결국 이 세상은 눈가림이야. 눈만 가려주면... 또 눈만 만족시켜 주면 지옥 끝까지라도 달려갈 바보들이지. 세상을 망치는 게 독재자들인 줄 알아? 아냐, 바로 저 넘쳐나는 바보들이야. 독재를 하건 누굴 죽였건... 여당이 돼야 이곳이 삽니다, 제가 나서야 집값이 오릅니다 하면 찍어주는 바보들 때문이지. 세상은 잘 살겠다고, 더 잘 살겠다고 하는 놈들 때문에 망하는 거야.
-155쪽

인간은 대부분 자기(自己)와, 자신(自身)일 뿐이니까. 그래서 이익과 건강이 최고인 거야. 하지만 좀처럼 자아(自我)는 가지려 들지 않아. 그렇게 견고한 자기, 자신을 가지고서도 늘 남과 비교를 하는 이유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끝없이 가지려 드는 거야. 끝없이 오래 살려 하고... 그래서 끝끝내 행복할 수 없는 거지.
-156쪽

찢어지게 가난한 인간의 방에 엠파이어스테이트나 록펠러의 사진이 붙어 있다면 다들 피식하기 마련이야. 하지만 비키니니 금발이니 미녀의 사진이 붙어 있다면 다들 그러려니 하지 않겠어? 즉 외모는 돈보다 더 절대적이야. 인간에게, 또 인간이 만든 이 보잘것없는 세상에서 말이야. 아름다움과 추함의 차이는 그만큼 커, 왠지 알아? 아름다움이 그만큼 대단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그만큼 보잘것없기 때문이야. 보잘것없는 인간이므로 보이는 것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거야. 보잘것없는 인간일수록 보이기 위해, 보여지기 위해 세상을 사는 거라구.
-219쪽

인간은 아름다운 얼굴을 사랑합니다. 신께선 모두를 사랑하신다 하지만, 그 말을 전하는 인간은 결코 모두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분명 그런 사람도 세상 어딘 가엔 존재하고 있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제가 아는 인간이란 그런 존재들입니다.
-276쪽

웃지 마, 웃으면 더 이상해. 면전에서 그런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런 말을 듣고 나면 누구라도 웃을 수 없을 거라 저는 생각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웃을 수 있겠어요?
-279쪽

말하자면 저는, 세상 모든 여자들과 달리 자신의 어두운 면만을 내보이며 돌고 있는 ‘달’입니다. 스스로를 돌려 밝은 면을 내보이고 싶어도... 돌지 마, 돌면 더 이상해...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달인 것입니다. 감춰진 스스로의 뒷면에 어떤 교양과 노력을 쌓아둔다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달인 것입니다. 우주의 어둠에 묻힌 채 누구도 와주거나 발견하지 못할... 붙잡아주는 인력이 없는 데도 그저 갈 곳이 없어 궤도를 돌고 있던 달이었습니다. 그곳은 춥고, 어두웠습니다.
-283쪽

그렇습니다. 그 전까지... 저는 한 번도 뜨거운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습니다. 눈물은 더없이 차가운 것이었고, 그때의 제 마음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알 수 있었습니다. 냉대를 받은 인간의 마음은 차가운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을... 관심과... 사랑을 받은 인간의 마음만이 더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말하자면 당신은 한 여자의 체온을 바꿔주었고, 한 여자를 둘러싼 세상의 기후를 바꾸어주었습니다.
-285쪽

미녀를 바라보는 세상의 남자들은

마치 킹콩과 같은 존재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시키지 않아도 엠파이어스테이트를 오르고, 가질 수 없어도 자신의 전부를 바친다. 자신의 동공에 새겨진 한 사람의 미녀를 찾아 쿵쾅대며 온 도시를 뛰어다닌다. 어떤 악의도 없지만 그 발길에 무수한, 평범한 여자들이 상처를 입거나 밟혀 죽는다. 실제의 삶도 다를 바 없다. 빌딩을 오르고 떨어져 죽는다 한들, 미녀가 어깨를 기대는 남자는 따로 정해져 있다. 그것이 인간이 만든 세상이다. 전기와, 전파와, 원자력을 사용한다는... 게다가 민주주의라는... 인간의 세상인 것이다.
-306쪽

마침 <중산층>이란 단어가 한창 사회의 이슈가 되던 무렵이었고... 이 정도는 몰아야... 이 정도는 벌어야... 결국 이 정도는 살아야-사는 구나, 소리를 듣는 세상이었다. 평균을 올리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을 부추기는 것은 누구이며, 그로 인해 힘들어지는 것은 누구인가... 또 그로 인해... 이익을 보는 것은 누구인가, 나는 생각했었다. 자본주의의 바퀴는 부끄러움이고, 자본주의의 동력은 부러움이었다. 닮으려 애를 쓰고 갖추려 기를 쓰는 여자애들을 보며 게다가 이것은 자가발전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부끄러움과 부러움이 있는 한

인간은 결코

자본주의의 굴레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307쪽

누군가의 외모를 폄하하는 순간, 그 자신도 더 힘든 세상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예쁜가? 그렇게 예뻐질 자신이... 있는 걸까? 누군가의 학력을 무시하는 순간, 무시한 자의 자녀에게도 더 높은 학력을 요구하는 세상이 주어진다. 아, 그렇겠지... 당신을 닮아, 당신의 아들딸도 공부가 즐겁겠지 나는 생각했었다. 사는 게 별건가 하는 순간 삶은 사라지는 것이고, 다들 이렇게 살잖아 하는 순간 모두가 그렇게 살아야 할 세상이 펼쳐진다. 노예란 누구인가? 무언가에 붙들려 평생을 일하고 일해야 하는 인간이다.
-310쪽

미녀가 싫다기보다는

미녀에게 주어지는 세상의 관대함에 나는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뭐랄까, 그것은 부자에게 주어지는 세상의 관대함과도 일맥상통한 것이란 기분이 들어서였다. 관대함을 베푸는 것은 누구인가, 또 그로 인해 가혹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누구인가... 나는 생각했었다. 나 역시 무작정 그들에게 관대했던 인간이었고, 그로 인해 가혹한 삶의 조건을 갖추어야 할 인간이었다.
-315쪽

부탁이야... 같이 가지 않겠어? 라고 요한이 물었다.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은 채, 그녀는 텅 빈 시선으로 창밖을 응시할 뿐이었다. 식탁 위의 잔은 모두 비었고, 평소보다 더딘 걸음으로 창밖의 어둠속을 밤이 서성이고 있었다.
-398쪽

부와 아름다움에 강력한 힘을 부여해 준 것은 바로 그렇지 못한 절대 다수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끝없이 욕망하고 부러워해왔습니다. 이유는 그것이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래도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그런 세상을 살고 있으며, 누가 뭐래도 그것은 불편의 진리입니다. 불변의 진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시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물론 그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만으론 <시시해>. 그것만으로도 좋았다니 그야말로 시시한 걸. 이 시시한 세계를 시시하게 볼 수 있는 네오 아담과 네오 이브를 저는 만들고 싶었습니다. 두려울 것은 없습니다. 가능성의 열쇠도 실은 우리가 쥐고 있습니다. 왜?

바로 우리가 절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416쪽

우리는 진화의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능은 자기 자신, 즉 자기의 힘을 믿는 것이라 고리끼는 말했습니다. 굳이 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그런 재능을, 힘을 지닌 존재라 저는 믿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개인처럼, 이제 인류도 스스로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할 때입니다. 이 진화의 계단을 밟고 올라서며 저는 아름다움에 대해, 눈에만 보이는 이 아름다움의 시시함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인간의 얼굴에 대해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손에 들려진 유일한 열쇠는 <사랑>입니다. 어떤 독재자보다도, 권력을 쥔 그 누구보다도... 어떤 이데올로기보다도 강한 것은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417쪽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는
당신 <자신>의 얼굴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4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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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09-08-03 0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해 주셔서 목록에 추가했어요. ㅋㅋㅋ
글들이 마음에 들어요. ^^

마노아 2009-08-03 11:22   좋아요 0 | URL
헤헷, 추천 목록이 빠방해지니까 왠지 배가 부른 거 있죠.^^

꿈꾸는섬 2009-08-03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박민규...얼른 읽고 싶어요. 저도 장바구니에 담아요.

마노아 2009-08-03 11:22   좋아요 0 | URL
이 작가 너무 좋아요. 꺄우~!
 
촛불세대를 위한 반자본주의 교실
에세키엘 아다모프스키 지음, 일러스트레이터연합 그림, 정이나 옮김 / 삼천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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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에 나타난 여러 사회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는 가장 억압적인 사회 체제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나머지 모든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복종하도록 만들고 무엇이든 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힘으로 억압받는 자들을 굴복시키는가 하면, 심지어 ‘교육’을 통해 권력에 순종하는 것이 옳으며 인간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15쪽

자본주의는 계급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억압적인 사회이다. 이 말은 특정한 지배계급(즉 자본가)이 사회적인 지위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또는 그렇게 생각하는) 능력이나 특권을 이용해 사람들을 지배한다는 뜻이다.

-16쪽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계급이 한눈에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구분 또한 영원한 것이 아니고 계급 간의 경계도 유동적이어서 생활 속에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비록 중요한 경제 자원을 지배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크게 나뉘지만, 계급은 부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나기 때문에 가장 부유한 사람에서부터 가장 가난한 사람들까지 모두 개인으로 존재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오직 몇 사람만 지배계급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지만, 사람들은 늘 자신이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오를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19쪽

계급사회인 자본주의는 늘 긴장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단순히 경제적 착취만 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원래 갖고 있는 일하는 능력을 잃게 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마비시킨다. 나아가 스스로 어떻게 살지를 결정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도 멀어지게 만든다. 사람들은 저항을 통해 억압과 착취로부터 벗어나 자율적인 능력을 발휘하고 결정권을 되찾고자 한다. 계급투쟁이란 바로 이러한 억압과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의지 사이에서 나타나는 지속적인 싸움이다. 계급투쟁은 대규모 저항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소극적으로 일을 더디게 하는 행위도 계급투쟁의 모습이다. 또 계급투쟁은 개인적이고 무의식적인 행동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다든가, 단순한 월급쟁이를 벗어나기 위해 새로 공부를 시작하는 것 또한 계급투쟁의 모습이다.

-23쪽

사적(私的) 소유라는 게 새로운 건 아니다. 먼 옛날부터 토지나 생산 도구 같은 몇몇 재산에 대해 배타적인 권리가 있어 왔다. 그러나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이런 종류의 권리, 즉 사적 소유권이 모든 것에 적용되었다. 수천 헥타르에 이르는 토지는 물론 호수까지도 개인이 소유하게 되었고, 심지어 항만이나 기업, 노래, 아이디어, 유전자 그리고 은행의 수십억 원이 넘는 돈까지도 사유재산이 되어 버렸다. 또한 아직은 개인 소유로 되어 있지 않은 것들도 몇몇 개인들에게는 아무런 비용 없이 사유화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는 형편이다. 예를 들면, 한 회사가 모든 사람이 마시는 ‘공기’를 오염 시킨다든가, 온갖 광고 선전물로 우리가 눈 뜨고 볼 수 있는 공간을 도배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자본주의란 모든 것을 사유화하는 기계 같은 것이다.

-25쪽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우리가 사는 모든 공간이 거대한 시장으로 바뀌는 경향이 있고, 이제 거의 모든 것이 판매 가능성 있는 상품이 되어 간다. 생선이나 그릇과 같은 물건뿐 아니라 건강과 교육, 정보, 안전까지도 상품이 되고 말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개인이 소유한 것에 다른 사람들이 다가가려면 뭐든 돈 주고 사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사람의 시간마저 상품화된 지 오래다.

-26쪽

자본주의란 일종의 관습이나 법, 정치 경제 제도의 총체로서, 몇몇 사람들이 자원을 독점함으로써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을 보장하고 정당화하는 하나의 문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 지배계급은 독점한 자원을 이용해 자신들의 부를 축적해 나갔다. 지배계급은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자기 것으로 삼아 상품을 생산하여 시장에 내다 판다. 이렇게 해서 점점 더 많은 부를 축적함에 따라 권력을 유지하고 확대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27쪽

자본주의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제도와 사회 형태를 만들어 내고 보급시켰다. 그 첫 발명품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국경과 국민(민족)국가다. 단일한 정치권력이 미치는 범위가 국경에 의해 확실히 구분된 지리적 공간과 완벽하게 일치해야 한다는 개념은 자본주의의 발명품이다. 예전에는 이런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31쪽

자본주의는 자본가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통합된 내부 시장을 제공하기 위해 국민국가를 창출해 냈다. 이런 틀은 사람들을 좀 더 효율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고 식민지 팽창의 기회를 넓히는 역할도 했다.

-32쪽

자본주의는 또 공적인 공간이나 자연의 산물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사적인 공간이나 ‘가공 상품’으로 채우고 있다. 그 결과 과거에는 누구든지 씨앗을 받아 길러 먹을 수 있던 천연 종자가 유전자 변형을 통해 사라져 가고 있다. 이제 농민들은 아까운 돈을 주고 종자를 사야만 씨를 부릴 수밖에 없는 처지다. 들과 산에 있던 농장이 아니라 건물을 지어 ‘달걀 공장’이나 ‘채소 공장’에서 나오는 식품을 먹게 되었다. 점점 사람들의 정신과 개인 생활도 축소되고 더 낮은 보수를 받고도 훨씬 강도 높은 일을 하는 데 익숙해져 가고 있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시간이 오직 이윤 창출에만 사용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하지 않은가. 노동조건이 나빠짐에 따라 개인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기고 있다. 우리는 유행과 경제적 지위라는 환상에 목을 맨 채 직업은 물론 소비나 생활 방식조차도 선택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심지어는 천진난만한 유아기 때부터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결정지으려고까지 애쓰고 있다.

-37쪽

실제로 우리는 가짜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19세기에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투쟁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이 원한 것은 ‘민중의 정부’였다. 그런데 당시 자유주의 엘리트들은 민주주의라는 사상에 반발했고 자유주의는 줄곧 민주주의의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이어진 투쟁 끝에 엘리트들은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투표권을 줄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라는 말을 마치 자신들 것인 양 떠들지만, 그 참뜻을 통째로 왜곡시켰다. 민주주의는 더 이상 ‘민중의 정부’를 뜻하는 말이 아닌, 단지 정부에서 자리를 차지할 사람을 뽑는 선거제도 정도로 전락해 버렸다.

-47쪽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자본주의는 늘 자기중심적이고 차별적인 가치관을 전파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 그래서 교육, 문학, 광고나 대중매체를 통해 일상적으로 그러한 가치관을 퍼뜨리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가치관은 노골적 방식이라기보다는 늘상 무의식적이고 자발적인 형태로 전파된다. 이런 일은 자본가들이 지배하고 있는 문화적 수단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본주의 문화는 우리 모두에게 내면화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자녀의 장래에 대한 지나친 기대나 소비 행위, 또는 일상에서 쓰는 언어 등을 통해 우리 스스로가 그런 문화를 계승하고 전달하는 셈이다.

-55쪽

사회주의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운동으로 생각하지만, 역사를 통해 살펴보면 사회주의 운동에는 다양한 사회 계급이 참여하고 있다. 모든 억압의 폐지를 주장한 사회주의는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 특히 노동자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것이기는 했다. 하지만 학생, 예술가, 지식인, 농민, 여성주의자, 자영업자, 심지어 상인이나 제조업자들에게까지도 사회주의 사상은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최근에는 억압받는 소수 인종이나 민족, 토착 원주민이나 생태주의자 등 어떤 식으로든 자본주의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 모두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

-71쪽

19세기 중반이 되면 사회주의 운동 안에서도 몇 가지 조류가 윤곽을 드러내게 된다. 그 가운데 아나키즘은 경제적인 착취뿐 아니라 모든 형태의 억압에 관심을 기울여, 특히 중앙집권적인 국가 권력에 강력히 대항한다는 특징이 있다. 아나키스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국가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나 그 밖의 사회주의자들을 ‘권위적’이라고 비판했다.

-72쪽

아나키즘과 달리 마르크스주의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아주 주요한 수단으로 국가 권력을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국가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서 공산주의자들은 어느 정도 중앙집권적인 정당을 조직해야만 한다. 필요한 변화를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기간을 거쳐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해서 계급이 소멸되고 생산 수단을 공동으로 소유함으로써 억압이 사라지면 국가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듯 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불평등과 함께 국가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74쪽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이해하고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구상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마르크스주의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걸쳐 사회주의를 이루려는 전 세계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가 하나의 교리로 전락하는 순간, 다양한 정치적 전략이나 서로 다른 여러 상황과 역사적 변화에 맞게 적용하는 문제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75쪽

레닌주의의 여러 형태는 역사적으로 대립이 있었지만 서로 공통점이 많았다. 정권을 잡기 위해 중앙집권적인 전위 정당이나 군사 조직이 필요하다는 점에 모두가 동의한다. 또한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일당 체제, 계획경제 체제라는 미래 사회의 구상도 일치한다.

-86쪽

식민지로 지배받던 나라들이 민족자결을 내걸고 제국주의(독점자보주의)에 맞서 투쟁했는데, 흔히 사회주의 운동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민족해방투쟁은 서로 대립된다고 말해 온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절묘하게 결합시켜 냈다.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한 당의 역할, 경제 국유화, 평등주의 같은 요소는 민족해방 운동가들에게 상당한 설득력을 얻었다. 그러나 계급투쟁과 같은 과제는 노동자와 농민들의 지지를 얻는 데는 필요했지만, ‘민족 부르주아지’라 불리는 사회 계층의 지지를 얻어 내기 힘들었기 때문에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소비에트연방에서 이루어 낸 급속한 산업화는 제3세계의 여러 운동 세력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본보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회주의를 권력의 집중과 경제 발전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이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민중의 해방은 그 다음 문제로 미뤄진 채.

-87쪽

공산주의 모델은 다른 나라에서도 실행되었지만 대부분 평등이나 해방과는 거리가 먼 모양새를 띠었다. 1980년대 소비에트연방이 심각한 경제 위기에 빠지자 관료들은 자기 이익에 눈이 멀어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부르주아들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소비에트 정부도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결국 1991년 소비에트는 해체되고 말았다. 좌절한 공산주의의 역사는 반자본주의자들에게 심각한 정치적 패배는 물론이고 도덕적으로도 큰 후퇴를 안겨 주었다.

-89쪽

저마다 차이는 있지만 전통적으로 과거 좌파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권력을 장악하면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치권력 잡아서 사회를 해방시키는 도구로 국가를 이용한다는 전략이다. 오늘날 국민국가는 사회생활의 규범을 따르게 하는 권한 정도만 갖고 있다. 국가는 말하자면 정치권력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또 그런 권한이라면 강대국 정부, 거대 기업이나 금융 회사, 복합 미디어 그룹들이 오히려 국민국가보다 더 강력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국가의 권력을 잡는다는 것은 단지 정치권력의 한 부분만을 장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96쪽

"권력이란 ‘바깥에서’ 우리를 억압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내면화되고 체질화된 것이다. 권력은 우리의 사회생활을 지배하고 사람들을 ‘내면에서’ 통제한다. 어쩌면 이것을 ‘살아 있는 권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권력은 사회 생활은 물론이고 개인의 삶에까지도 영향을 주어 새로운 규율을 만들어 낸다. 이런 권력은 단지 삶을 조절할 뿐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권력을 재창조하려고 한다." -미셸 푸코

-97쪽

‘권력을 잡는 것’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그 일이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그런 방법이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권력은 가까이 오는 모든 것을 변질시키는 법이어서 그것에 대항하는 사람들까지 무력화시켜 버리고 만다. 국가 기구를 장악하려고 하는 사회운동이 때때로 권력관계를 재생산하거나 강화시키기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선거에서 이기거나 국가를 ‘장악’하기 위해서 과거의 반자본주의자들은 당이나 해방군 같은 조직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조직은 사람들을 분리하고 단죄하고 종속시키는 기관이 되어 버렸다.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나면 어김없이 과거 권력자보다 더 심하게 억압하거나 더 세련된 억압 형태를 만들어 냈다.

-99쪽

혁명을 언젠가 일어날 하나의 사건이나 기다려야 하는 그 무엇으로 봐서는 안 된다. 혁명은 날마다 일어나고 있고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혁명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권력에 저항하고 자율적인 틈새들을 새로 만들어 낼 때마다 일어나는 것이다. 자주 관리, 탈상품화, 그리고 평등한 공간을 만들어 낼 때마다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 본다. 혁명이란 투쟁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만들어 내는 것이고, 그러한 투쟁을 통해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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