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이 살아온 동네 이야기 그림책으로 만나는 지리 이야기 1
김향금 지음, 김재홍 그림 / 열린어린이 / 2011년 4월
장바구니담기


외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손녀딸까지 3대에 걸친 아홉살 소녀들의 살던 동네 이야기를 엮었다.
해방되던 해에 아홉살 소녀였던 할머니의 고향은 전남 장흥군 장동면 북교리.
세 곳의 고향 마을이 나오지만 가장 아름다웠던 풍경을 보여준 것은 할머니 편이었다.
특히 첫 그림으로 나온 장면은 새벽 물빛을 잔뜩 머금은 투명한 느낌이 종이를 뚫고 질감으로 느껴질 것만 같았다.
김재홍 작가님의 그림 실력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유난히 곱고 고와서 감탄을 거듭했다.

이어 바쁜 농사철의 아침 풍경이 이어진다. 아직 새벽녘의 안개가 덜 걷힌 마을은 벌써부터 분주함으로 가득 차 있다.
낮이나 밤이나 대문을 반쯤 열어 두고 살던 마을의 정겨움이 한 폭의 그림 속에 가득 채워져 있다.

오 리나 떨어진 학교지만 책보 메고 씩씩하게, 신나게 걸어다녔을 할머니의 모습이 영화처럼 지나간다. 굵은 나뭇가지에 묶인 튼튼한 그네 줄도 멋지고, 등교 길 나무 위에 올라가 열매 따다가 이웃 아재께 혼나는 악동들 모습도 깜찍하기 그지 없다.
히라가나를 먼저 배웠던 할머니는 해방되면서 아에이오우를 열심히 외쳤다.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나물 캐는 와중에 각시풀 뜯어 인형놀이도 했던 할머니의 유년시절이 눈부시다.

쇠꼴 먹이다가 개울에 풍덩풍덩 몸을 던지고 놀던 개구진 소년들,
엄마 따라 장터 갔다가 한껏 졸라 먹게 된 팥죽 한 그릇을 이웃 마을 사내 아이랑 부딪혀 쏟고 만 이야기는 그림만 보아도 하하핫 웃음이 나온다.
짧은 단발머리 선머슴 같던 아홉살 할머니는 엉엉 울어댔고, 할머니의 엄마는 그런 아이를 달래느라 땀을 빼고, 그 모습 지켜보던 이웃 할머니는 인자하게 웃으신다.
그렇게 원수 같던 사내아이랑 가시버시 맺을 줄 그때는 어찌 알았을까.

스무 살 갓 넘어 이웃 광평리로 시집가 북동댁이라 불리던 할머니.
아이 둘 낳곤 서울로 훌쩍 떠났던 신랑이 서너 해 만에 돌아와 고향을 뜨자고 하셨다.
그렇게 시작된 서울살이, 얼마나 낯설고 낯설었을까.
그 낯선 동네에서 엄마가 자라셨다.
엄마가 살던 집은 청계천 영미 다리 건너 중앙시장 언저리,
다닥다닥 붙은 고만고만한 지붕들에는 가난하지만 따뜻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엄마는 한 반에 70명이 넘는 아이들이 콩나물 시루처럼 꽉 찬 교실에서 오전반 오후반 이부제 수업을 받았더랬다.
학교 갔다 오는 길엔 왜 그리 자주 똥이 마렵던지......
동네 아이들이 귀신 나온다고 벌벌 떨던 공중변소에서 덜컹거리는 문짝을 붙잡고 힘을 주던 아홉살 엄마.
그 아홉살 소녀에게 공중변소 밑은 세상에서 가장 깊고 깊은 곳이었다.

개량 한옥집엔 유리 문이 달렸고, 부엌 아궁이는 신식으로 바꿔 연탄을 땠다.
빨랫줄 가득 널려 있는 옷가지에는 엄마의 부지런함과 사랑이 햇볕을 만나고 있고, 학교 갔다 돌아온 아이의 재잘거림과 반가워 꼬리 흔드는 강아지의 수다스러움도 부딪쳤다.
좁은 골목 길에서 고무줄 하는 아이들은 힘든 것도 모르고 배고픈 것도 모르고 얼마나 열심히 뛰었던가. 엄마의 아홉살 적 모습보다 한참 후배인 나도 어릴 때 저렇게 고무줄 놀이하는 것 참 좋아했다.
한 고무줄도 재밌고 두 고무줄 세고무줄 모두 재밌었다. 그때 부르던 노래들은 신났고, 때로는 만화 영화 주제곡에 맞추어 새로운 고무줄 놀이 기법을 창조해내기도 했다.
지금도 어릴 적 해보았던 놀이 중 가장 해보고 싶은 게 바로 고무줄 놀이다.
이제는 그때의 팔짝팔짝 뛰던 체력을 감당해낼 수 없어서, 노래 한 곡을 다 뛰어낼지 자신이 없지만, 그렇게 신나게 놀던 추억이 내게 남아 있어 참으로 다행이라고 여긴다.

청계천을 덮는 공사가 진행되고 엄마네는 몇 차례나 동네를 옮긴 끝에 외할머니가 꿈꾸던 빨간 벽돌의 이층집을 지었더랬다.
그 집에서 시집을 간 엄마는 아빠와 결혼해서 신혼집으로 이사를 갔다.
새 살림을 차린 집은 아차산과 광나루 사이에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 동네.
거기서는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한 엘리베이터를 나눠 쓰는 옆집 사람과 멋쩍은 인사를 나누게 된다.
한폭의 그림 같던 외할머니의 집같은 멋도 없고, 옹기종기 모여있던 엄마네 한옥 마을 같은 맛도 없지만, 그래도 이곳도 사람 사는 곳,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자라는 곳이다.
3대가 함께 또 따로 기억하고 저장한 그들의 소중한 동네들,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마음이 촉촉해져 왔다. 내가 살았던, 내가 지내온 내 추억의 공간들은 어떠했나 앨범을 뒤적여 보았다.

어린 시절의 사진은 많지 않다. 특히 집을 찍은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 사진에 담아둘 만한 집이 아니기도 했지만, 사진을 찍어볼 여유라는 게 없었던 게 맞을 것이다.
이 사진은 삼촌이 한 밤중에 집에 카메라를 빌려와서 급히 찍고 돌아간 덕에 남은 사진이다.
엄마가 시집올 때는 장농은 못해도 미싱은 해가던 시절이었다며, 좋은 미싱을 장만해 갔는데 도둑이 핵심 부품을 훔쳐가서 써보지도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던 붉은 재봉틀이 보인다.
쌀통도 보이고, 촌스럽지만 능청스러운 TV도 보인다.
다리만 반짝 나온 것은 할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축대에 기대어 선 것은 초등 6년 때 소풍 다녀오면서 친구가 찍어준 모습이다. 역시 통통하구나.
그나마 동네 어귀가 보여서 고른 사진이다.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 옆의 골목인데 지금도 저 비슷한 모습은 남아 있다.

이 책이 좋은 것은 그들 3대가 살아온 동네 이야기를 엿보는 재미와 멋드러진 그림을 감상하는 감동이 있지만, 그보다도 나의 추억을 재생시키는 동기가 되어준다는 것이 더 고맙다. 당신만의 이야기, 당신의 소중한 추억도 꺼내보시라. 뭉클 몽글한 감동이 분명 뒤따라 올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후애(厚愛) 2011-06-10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이 너무 좋습니다!
어머님이 참 고우십니다.^^
그리고 마노아님은 너무 귀여우세요 ㅎㅎ

마노아 2011-06-10 15:10   좋아요 0 | URL
헤헷,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김재홍 작가님 작품 중 그림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아요.^^

2011-06-10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1 1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온양이 - 흥남부두의 마지막 배, 온양호 이야기
선안나 글, 김영만 그림 / 샘터사 / 2010년 4월
장바구니담기


전쟁 중 폭격으로 할머니를 잃고, 할어버지는 한 달 넘게 앓아누우셨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간 뒤였다. 마지막 남은 사람들마저도 기차를 까맣게 채우고 피난 길을 재촉하는 중이었다.
곧 함흥이 불바다가 될 거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무리였다.
할아버지는 만삭의 며느리에게 두 손자를 데리고 떠나라고 하셨다.
이미 아들도 전쟁 터에 나가 있는 터였다.
떠난 아내의 곁을 버리지 못한 할아버지는 집에 남으셨다.
그렇게 떠나지 못하고 보내기만 한 노인 분들이 많으셨을 것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산 목숨들은 또 살아남기 위해 고향을 등졌다.
가야 할 길, 닿아야 할 곳은 멀고도 험했지만 그 자리에 멈춰 있을 수 없게 만들었던 전쟁이었다.

함흥역에는 기차가 이미 끊겼고, 육로도 중공군이 점령해서 남으로 가려면 배를 타는 수밖에 없었다.
때는 한 겨울, 열심히 발을 재촉했지만 몸이 무거운 어머니와 어린 두 아들의 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춥다고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 동생을 명호가 업어 주었다.
명호도 충분히 어린 나이, 울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시련이 사람을 성장시킨다.
전쟁은 아이를 아이답게 남아있도록 만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이다운 따뜻함은 남아 있어서 배고파 허덕이는 꼬마 아이에게 제 밥을 넘겨주는 막내 명남이었다.
그 아이에게도 명호 명남이처럼 부모님이 계셨을 텐데, 피난 길에 부모님을 잃은 아이일지도 모른다.
혹은 폭격으로 생이별을 했을지도 모른다.
따스한 국밥 한 숟가락의 온정이 이 아이를 살릴 수 있다면 좋겠다.

흥남부두에 상륙함이 들어오면서 군인들의 철수가 시작되었다.
중공군의 공격을 막느라 유엔군은 함포를 쏘며 엄호를 했다.
서로가 서로를 지키며 최선을 다했을 테지만 그 안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야 했다.
폭격이 비처럼 쏟아지는 해질녘의 풍경은 멀찍이서 보면 아름답지만
조금만 가까이 들여다 보면 죽음의 재앙이 쏟아지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군인들이 철수하고 난 뒤 피란민들이 배에 올랐지만, 배에 오를 수 있는 사람들은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이었다.
국군 가족과 미군을 도운 사람들, 기독교인들이 그들이었다.
피란민들은 뼛속까지 얼리는 바닷물 속까지 걸어 들어가며 태워 달라고 애원했다.
서둘러 철수해야 했던 미군 사령부는 군인들과 물자만 철수시킬 계획이었으나 한국인 통역관은 피란민도 데려가야 한다고 설득했다.
미군 사령부에서도 피란민들의 절박함을 목격했을 것이다.
결국은 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수행하고 있던 전쟁이 아니었던가.
그들은 작전을 바꾸어 피란민을 수송하기로 했다.
군용 함선만으로는 부족하여 일반 배와 화물선까지 흥남으로 불렀다.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아호도 만 사천 명이나 되는 피란민을 남쪽으로 실어다 주었다.

철수 기간은 1950년 12월 15일부터 24일까지 열흘 간이었다.
곧 배가 끊길 거라는 말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죽기 살기로 배에 올랐지만,
그 와중에 바다에 떨어지는 사람도 있고, 닫히는 선수 문에 끼어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고, 부모 형제와 헤어져 울부짖는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아비규환의 순간이었다.

두 아이를 데리고 또 뱃속에 한 아이를 데리고 있던 어머니는 죽을 힘을 다해 배에 올랐다. 아이들을 지켜야만 했다.
갑판에 올라서 멀어지는 흥남부두를 바라볼 수 있었다.
요란한 폭발음이 이어졌고 부두 전체가 불길에 휩싸이는 것도 목격했다.
바로 직전까지 그들이 있던 곳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고향 땅이 멀어져 갔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길이 될 거라고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무사히 배에 오른 어머니는 밤새 진통을 한 끝에 갑판에서 아기를 낳았다.
주위에 있던 분들이 아기를 받아주고 탯줄도 끊어주었다.
다시는 이리 모진 추위 겪지 말고, 따뜻하고 환하게만 살라고,
명호네 할아버지처럼 수염이 하얀 할아버지가 아기에게 온양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기가 태어난 흥남부두의 마지막 배, '온양호'에서 따온 이름이기도 했다.
여동생과 처음 만나던 날, 가족은 오랜만에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전쟁 통에 마주한 새 생명, 소중한 가족... 그 어떤 가치로도 바꿀 수 없는 선물이었을 것이다.
한국의 지나친 가족주의는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고통으로 인해 더 심화되었을 것이다.
가족 외에 기댈 것이 없고, 가족이 지켜야 할 최상의 가치가 되어버렸을 테니......

저자는 마무리 말에서 어두운 기억일수록 묻어두기보다 자꾸 밝히고 이야기할 때 미래로 나아가는 길이 더 환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옳은 이야기다.
음지에만 남겨두면 더 습해지고 냄새가 나는 법.
볕아래 드러내어 잘 말리고 상처 위에 새 살이 돋아나게 해야 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함께 계신 사진 안에 온양이는 없다. 태어나기 전이었으니까.
그리고 온양이의 사진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시질 않다.
이별했기 때문이다. 따로 같이 놓여진 가족의 사진이 마음을 저민다.
그 안에 슬픔과 기쁨이, 절망과 희망이 함께 놓여 있다.
아직은 두 감정이 공존하는 때, 하지만 미래에는 기쁨과 희망이 앞서의 감정들을 극복해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런 날이 반드시 올 거라고 믿는다.
다시는 이리 모진 추위 겪지 말고, 따뜻하고 환하게만 살아야 할, 온양이의 이름처럼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하(紫霞) 2011-06-09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그림동화를 많이 보시나봐요?
계속 관련 글이 올라오네요...
저는 이승환이 새끼 손가락을 살포시 입에 물고 있는 이미지를 보고는
뭐랄까~손발이 오글거린다고 할까요??^^;그런 느~낌
자주 왔었는데 저 사진을 보면 황급히 다른 서재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댓글도 못 남겼네요~^^;

마노아 2011-06-10 00:25   좋아요 0 | URL
그림책은 워낙 많이 보는데, 근래에는 호국보훈의 달 덕분에 관련 그림책을 보게 되었어요.
조카가 새로 산 책들이어서 제가 빌려 읽은 거거든요.
프로필 사진은 노래 부르는 장면 중 한 컷이에요.
장난스럽게 노래 부를 때 부러 에로틱한 장면을 연출하거든요.
제 눈에는 사랑스러운데 베리베리님은 오글거리는군요.
제 컴퓨터 바탕화면도 저 사진인데... ㅎㅎㅎ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 - 권정생 선생님이 들려주는 6.25 전쟁 이야기 평화 발자국 1
권정생 지음, 이담 그림 / 보리 / 200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 살펴보니 '평화 발자국 시리즈'는 전 권을 소장하고 마지막 권 '재일 동포 리정애의 서울 체류기'만 아직 읽기 전이다. 의도한 바가 아닌데 어쩌다 보니 시리즈를 거의 섭렵한 셈이 되어 버렸다. 그 중에서 가장 궁금했던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는 생각보다 늦게 읽게 되었지만. 

전쟁을 경험했던 세대에게서 나오는 문학은 그 기억을 비켜갈 수가 없는 듯하다. 그것이 2차 세계대전이건, 한국전쟁이건, 베트남전쟁이건... 혹은 제주의 기억에서든 광주의 기억에서든, 그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고 떨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증언과, 그런 사람의 연필 끝에서 나오는 문장의 힘은 감히 무시할 수가 없다. 권정생 선생님도 그런 분 중의 하나이다.  

 

그림 분위기가 스산하다. 골짜기에 봄이 번지고 있는 고요한 달밤의 풍경이란 몹시 운치 있을 것 같은데, 글의 배경이 되어주는 전쟁 이야기를 꺼내려는 찰나여서 그런지 그림조차도 어둑스산하고 메말라 있다.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는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  

 

두 사람은 소쩍새 울음 소리를 들으며 고향 집 풍경을 떠올린다. 곰이의 고향은 함경도, 오푼돌이 아저씨의 고향은 평안도 대동강 근처라고 한다. 두 사람이 함께 떠올리는 고향 풍경은 아득해도 아름답건만, 두 사람의 마지막 기억 속 고향 땅은 추억처럼 마냥 따뜻하지만은 않다. 

 

곰이네 집은 고향 집을 지키겠다고 홀로 남으신 할머니만 남겨두고 피난을 떠났더랬다. 아버지 어머니는 피난길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셨을 지, 할머니는 여전히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실지 궁금하지만 곰이는 알 길이 없다. 곰이는 이미 30년 전 피난 길에서 죽은 목숨이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날의 참상은 아직도 곰이에겐 현재진행형이다. 비행기 소리가 들리고 하늘에선 폭격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달아나다가 서로 엉키어 넘어졌고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곰이의 육성으로 들려주는 그날의 기억은 먹먹하기만 하다.  


"아저씨, 전쟁을 피해 달아나려 했는데도 전쟁은 우리 뒤를 금방 따라온 거예요. 살려고 갔는데도 난 죽은 거예요." 

곰이는 인민군이었던 아저씨에게 누구와 싸웠냐고 물었다. 오푼돌이 아저씨는 국군과 싸웠다고 대답하셨다. 

"국군은 어떤 사람들이었어요?"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야."
"어느 나라를 지키는 사람인데요?"
"이름만 다르지 나하고 똑같은 사람이야."
"똑같다니요?"
"다 같은 단군 할아버지의 자손들이니까......" 

다만 한 쪽은 북쪽에서 살았고, 또 다른 한쪽은 남쪽에서 살았을 뿐 다른 게 없었는데도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죽도록 싸웠던 기억이 우리에게 있다. 외세에 의해서 분단된 독일도 서로 합하는 데에 오랜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는데, 서로 싸우고 헤어진 우리의 통일은 지나치게 아득해 보여서 아찔할 지경이다.  

오푼돌이 아저씨의 가슴에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다. 30년이 지났지만 멈출 수 없는 핏자국이다. 아저씨의 가슴에만 피가 흐르는 것은 아니다. 아저씨가 쏜 총에 맞은 그 누군가도 그렇게 피흘리며 긴 시간 편안한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 죽음의 덧없음에는 할 말을 잃게 된다. 

"인민을 위해 싸운 건데, 죽은 건 모두가 가엾은 인민들뿐이었어." 

 

곰이는 오푼돌이 아저씨의 손을 잡고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옛 이야기를 아저씨에게 들려주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해님달님의 이야기를.... 

그리고 그때 호랑이의 사나운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해님달님의 한국전쟁 버전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다. 두 마리의 호랑이가 할머니를 잡아 먹어버리고는 오누이가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는 오두막으로 들이닥친 것이다.  흡사 엄마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아이들을 꾀어내는 호랑이. 앞문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엄마라고 여기는 누나와, 뒷문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엄마라고 생각한 남동생. 두 오누이는 서로 의견을 합치지 못했고, 위기가 닥친 것도 모른 채 양쪽 문을 모두 열고 말았다. 그 결과 두 마리의 호랑이는 누나와 동생을 하나씩 물고는 반대쪽으로 달아나버린 것이다. 서로를 애타게 부르짖지만 누나 해순이와 동생 달순이는 따로따로 호랑이에게 물려 가버렸다.  

 

서로를 삼키려고 했던 두 마리 호랑이 앞에서 꼭 이들 오누이 같았던 우리네 역사가 서럽게 다가온다. 아무리 후회를 해도 시간을 되돌이킬 수는 없는 일. 더 애석한 것은 아직도 반성보다는 서로를 원망하며 손가락질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1980년대에 쓰인 것이다. 서슬 퍼렇던 전두환 정권 시절에 인민군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지어졌다는 사실에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랬던 책이 오래도록 살아 남아 그림책으로 다시 태어나기 직전에 권정생 선생님이 하늘로 돌아가셨다. 당신께서 계신 곳은 전쟁도 없고 미움도 없는 모두가 사랑하며 사는 평화로운 세상이기를... 그리고 이 세상도 그 세상 닮아가기를...... 

평화 발자국 시리즈의 첫 걸음이 되어준 이 책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  이런 책이, 이런 책을 읽는 사람들의 결기들이 모여서 분단을 뛰어넘고 평화의 땅을 일굴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1-06-08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은 다시 보고 또 봐도 볼때마다 울컥하지요.
이담 그림이 글내용을 돋보이는 역할도 톡톡히 하고요.

마노아 2011-06-08 10:44   좋아요 0 | URL
그림이 주는 힘도 꽤 커요. 글과 그림이 무척 잘 어울려서 더 울컥하게 해요.

수퍼남매맘 2011-06-12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무지 좋아합니다. 아이들에게 꼭 읽어 주려구요.
특히 남북분단을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인용하여 쓴 부분은 정말 기가 막혔어요.
요즘 제가 읽고 있는 책들이 다 모여 있네요. 그것도 정성 가득 담긴 리뷰와 함께 말이에요.
반갑습니다.

마노아 2011-06-12 22:04   좋아요 0 | URL
권정생 선생님은 평생을 아이들과 통일 문제에 헌신하셨던 분 같아요.
해님달님 이야기는 기막힌 비유였어요.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었죠.
수퍼남매맘님, 반갑습니다. 우리 권정생 선생님 리뷰 대회에서 같이 당선되었지요?
그것도 축하해요.^^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 - 분단된 나라의 슬픔, 비무장지대 이야기 평화그림책 2
이억배 글.그림 / 사계절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화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가장 좋은 소재로 전쟁을 내세우게 되는 것은 역설적인 일이다. 평화그림책 시리즈 첫 번째 책에서는 위안부 할머니가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한국전쟁을 소재로 삼았다. 비무장지대가 상징하는 분단과 전쟁의 아픔은 '봄'이라고 하는 긴 겨울을 지나서 도착하는 따뜻한 계절과 대비되어 더더욱 평화를 상징하게 된다.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 들판에는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점박이물범 가족도 발해만에서 백령도까지 헤엄쳐 온다.
백령도 앞바다에서는 남과 북이 맞서고 있지만 물범 가족은 자유롭게 오고 간다.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 군인들은 허물어진 진지를 다시 쌓고 녹슨 철조망을 수리한다.
그리고 북쪽에 고향을 두고 온 할아버지는 전망대에 올라가 북녘 하늘을 바라보신다.  

 

비무장지대에 여름이 오면 임진강 가에 새들이 날아와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아 정다운 가족을 이룬다.
수달 형제는 자맥질로 불볕더위를 식히고 고라니 남매는 왜개연잎으로 배를 불린다.
군인들은 줄지어 행군을 하고 고단한 훈련을 받고,
북쪽 고향을 그리워하는 할아버지는 오늘도 전망대에 올라가 북녘 땅을 멍하니 바라보신다.
비가 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먹구름이 가리워 보이지 않는 북쪽 땅을 아득히 바라보신다. 

 

비무장지대에 가을이 오면 북태평양에 살던 연어들이 수천 킬로미터를 헤엄쳐 자기가 태어난 강어귀에 도착한다.
고진동 계곡의 단풍은 곱게 물들고 아기 산양은 엄마 산양을 따라서 산비탈을 겅중겅중 뛰어오른다.
군인들은 탱크로 출동을 하고 전투기로 폭격 훈련을 받고,
할아버지는 또 다시 전망대에 올라가 텅 빈 북녘 하늘을 바라보신다.
할아버지의 눈에는 맑고 높은 청명한 하늘도 쓸쓸함 그 자체로 보이실 것이다.
닿을 수 없다는 아득함에 가슴 속이 텅 빈 것처럼 외로울 것이다. 

 

비무장지대에 겨울이 오면 산에도 들에도 남과 북을 가르는 철조망에도 하얀 눈꽃이 피어난다.
철원 평야 너른 들판에는 북쪽 나라에서 날아온 새들의 노랫소리가 가득 울려 퍼진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오늘도 전망대에 올라가 눈 덮인 북녘 땅을 멍하니 바라보신다.
새들처럼 자유롭게 날아가 고향 땅을 밟아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분명 바라고 또 바라실 것이다.
또 다시 한 해가 저물고 있고, 긴긴 겨울을 이겨낼 수 있을지 고민하실 할아버지...
그리하여 새 해에 내가 살아 고향 땅 밟아볼 수 있을지 걱정하실 할아버지...
막막하고 먹먹하여 아득히 하얀 눈밭 바라보며 얼마나 마음 가득 슬퍼하실지...... 

 

다시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 할아버지는 이젠 더 이상 전망대에 올라가고 싶지 않으시다.
할아버지는 굳게 닫힌 철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그곳으로 걸어 들어가 양지 바른 풀밭에 누워 파란 하늘을 바라보고 싶으시다.
그곳 고향 땅의 체취를 느끼고 싶으시다.
고향 땅을 가족에게 소개하고 싶고, 고향 땅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만나고 싶으시다.
갈 수 없는 땅이 아닌, 기꺼이 갈 수 있는 땅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다.
할아버지의 봄이 비무장지대의 봄과 만나 고향의 봄과 어우러질 수 있기를 소망하고 계시다.
그 소망은 할아버지만의 것이 아니다.   

이산가족의 규모는 천 만 명을 아우르고, 그 중에서 가족을 만나본 사람은 1만 명 수준이다.
이산가족 상봉 명단에 자신이 탈락한 것을 알고는 절망에 빠진 나머지 자살을 택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떠오른다.
책의 앞 표지에는 전 세계 유일한 분단 국가가 철조망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봄이 오고 난 뒤의 뒷 표지에는 그 철조망이 사라진 채 하나된 땅으로 그려져 있다.
간절한 바람이 곧 현실이 되기를, 그 현실을 더 빨리 당기기 위해서 모두가 함께 바라기를,
그 날을 만들기 위해서 같이 노력하기를 소망한다.

책은 염원하는 바를 설명하기 위해서 비무장지대를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혹은 감상적으로 묘사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냉철한 현실 인식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 책에 담겨 있는 간절한 기원을 지나치고 싶지 않다. 때문에 보통 때라면 포토리뷰를 썼을 것을 일반 리뷰로 옮긴다. 별점에 참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반도 곳곳에 진정한 봄이 오기를 소망하면서... 그것이 지구촌의 평화인 것도 잊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1-06-08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화시리즈 좋아요~~~ 진정한 봄은 언제나 맞이하게 될지...

마노아 2011-06-08 10:44   좋아요 0 | URL
새로 나온 평화시리즈도 눈독 들이고 있어요. 사계절이 시리즈 기획에 참 강해요.

양철나무꾼 2011-06-08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좀 그래요.
아무래도 위의 그림보단 이 그림이 좀 편안해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냉철한 현식인식이라는 말 새길게요~^^

마노아 2011-06-08 22:17   좋아요 0 | URL
위의 책은 너무 사실적이어서 마음이 더 불편해지지요.
이제 리뷰를 쓸 '온양이'의 그림은 두 그림의 중간 느낌 정도예요.
이 정도가 제게는 제일 괜찮은 것 같아요.

수퍼남매맘 2011-06-12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억배 님도 좋아하는 그림작가 중의 한 분이세요.
이담 님과는 그림풍이 완전 다르지요.
하나하나 딸로 볼 때는 몰랐는데 같이 보니 약간 만화풍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두 분다 개성이 강해서 어떤 게 낫다고 섣불리는 말 못하겠어요.
분단의 현실과는 이담 님의 그림풍이 더 어울리지 않나 싶네요.
한편으론 이억배 님은 비무장지대에 진정한 봄이 오길 바라는 염원을 담아 더 화사하게 그리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해요.

마노아 2011-06-12 22:06   좋아요 0 | URL
전에는 해학적이다 느꼈는데 이담 작가님 그림과 연이어서 보니까 저도 만화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오늘 배현주 작가님 그림책을 보았더니 이쪽은 더 심하게 만화 분위기더라구요.
하핫, 재밌는 일이에요.^^
오늘 읽은 '산골 총각'은 또 이담 님 분위기와 비슷하고요.
모두 제각각의 개성이 있어요.
그래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 작가님인 김동성 작가님이에요.
좋은 작가님들이 많아서 참 좋아요. 이분들은 그림책에 봄이 되어주시는 분들이네요.^^
 
소년병과 들국화 마음이 예쁜 아이들이 사는 세상
남미영 글, 정수영 그림 / 세상모든책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그림책이 주는 장점이 많이 있지만 내가 유독 높이 사는 장점은 중요한 이야기를 쉽게 이야기해 준다는 것이다. 때로 그것은 어려운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더 어린 독자를 대상으로 하기 마련이기에 쉽고 간결하게, 그렇지만 강렬하게 설명해주는 힘이 있다. 그걸 해내지 못하면 좋은 그림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무척 좋은 그림책이다. 소년병을 통해서 한국 전쟁의 참상과 평화를 갈망하는 마음을 잘 표현해 내었으니까. 

 

어린 소년병은 국군이었다. 사흘 간 뺏고 빼앗기는 모진 전투가 끝나고 남은 총알은 그의 총에 들어있는 단 한 발 뿐이다. 상대방에게서도 총격이 중단되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야겠기에 정탐꾼을 보내야 했고 소년은 자원했다. 가야 하는 길목에 제 고향 집이 있기 때문이다. 피난을 떠난 어머니는 자신이 돌아올 것을 알았는지 비밀 몰래몰래 손가락으로 찍어 먹곤 했던 꿀단지 밑에 편지를 남겨두셨다. 소년의 마음에 파문이 인다. 원래 북쪽이 집이었던 소년은 공부하러 남쪽에 왔다가 전쟁이 나서 군인이 되었던 것이다.  

언덕을 기어서 높다란 나무 둥지까지 가는 그의 눈에 들국화가 밟혔다. 어머니가 개울가에서 빨래하고 돌아오실 때에 옷섶에 단추처럼 꽂고 돌아오시던 그 들국화. 소년병은 자신의 철모에 들국화를 꽂아놓는다.  

또 다른 군인이 있다. 그는 인민군이다. 고향이 남쪽인 그는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교사였다. 들국화로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했던 설레던 날이 아직도 생생한데, 약혼녀를 두고 의용군에 의해 강제 징용되었다. 그도 갑작스레 중단된 교전에 상대방 진영을 정탐하고자 언덕을 오르다가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들국화 한송이를 철모에 꽂았다. 추억에 너무 젖었던 탓일까. 나무 위로 오르던 그는 귓가를 스치는 장전 소리에 덜컹 놀라고 만다. 먼저 나무 위에 올라서 주변을 살피던 소년병과 맞닥뜨린 것이다.  

 

아직 한참 앳된 얼굴. 자신이 가르치던 아이들과 또래의 모습이다. 원래 남쪽 출신이던 그로서는 남쪽 군복을 입고 있는 소년이 자신의 적이 아니라고 여기지만 설명할 도리가 없다. 답답하고 막막한 현실이다.  

이런 일촉즉발의 순간에 총성이 울리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들국화 때문이었다. 서로에게서 발견한 들국화가 서로의 추억을 건드렸고, 서로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북쪽 병사는 주머니에 가득 담아온 산딸기를 남쪽 소년병과 나눠 먹었다. 서로 가야할 곳이 달랐던 그들은 각자의 고향 가족에 소식을 전해주기로 약속하고 헤어진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결코 그렇게 살벌한 상황에 내몰리지 않았을 사람들인 것을, 아프고 아픈 일이다. 이 책의 내용은 실화를 바탕으로 엮은 것이다. 어디까지 직접 겪은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적군을 그렇게 놓아둔 채 헤어진 사실을 그때 당시에는 밝히지 못했을 것이다. 오래오래 가슴 속에 묻어야 했을 비밀이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이야기도 때로 그렇게 감출 수밖에 없는 비밀이 되는 것이다.  

 

결코 꾸미지 않고 결코 뽐내지 않는 저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들국화처럼 우리가 있는 그대로 빛날 수 있을 텐데, 그래야 마땅한데 아직은 멀고 멀어서 안타깝다. 저렇게 맞잡은 손이 따뜻함을 알아차려야 할 텐데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