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동성혼 이야기 - 방한림전 즐거운 지식 81
장시광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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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로 추정되는) 에 쓰여진 조선 소설이다.  소설의 배경은 중국 명나라. 북경 유하촌의 한 서생이 혼인 수십년 만에 자식을 보았는데 너무도 늠름한 딸이었다. 부부는 어렵게 얻은 딸 방관주를 남복을 입혀서 씩씩하게 키웠다. 부녀자들이 배우는 길쌈과 같은 것을 가르치지 않고 글공부를 열심히 하게 했는데 방관주 8세에 부모를 여의게 된다. 방관주는 입신양명하여 부모님께 효도하기로 결심하고, 문무를 함께 깨우친다. 전형적인 영웅소설 겸 무협소설을 연상시킨다. 12세에 장원급제하여 이름을 떨치고, 황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인사가 되어버린 방관주. 여전히 유모는 여자로서의 삶으로 돌아가라고 잔소리를 하지만 방관주는 그럴 뜻이 없다.  

한편, 병부상서 겸 태학사 서평후의 12번째 딸 영혜빙은 온갖 규제와 압박에 시달리는 여자의 삶을 거부하고자 한다. 모두가 사위로 점찍어 놓은 방관주와의 첫 대면에서 그가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리고 부부의 연을 가장하여 평생의 지기로 남고자 한다. 

이 대목이 이 소설을 특별하게 만든다. 남장 영웅은 많이 등장하곤 하지만, 그 남장 여인이 여인과 결혼해서 서로의 지기가 되어 잘 살았다는 이야기는 만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방관주는 전쟁터에 나가 큰 공을 세워 또 다시 이름을 떨치고, 자식이 생길 수 없는 두 사람에게 자식의 연이 닿아 장가까지 보내어 손주까지 품에 안게 되니 도무지 부족할 게 없어보인다.  

다만 영혜빙이 친정으로부터 압박을 받긴 했지만 지혜롭게 잘 넘긴다. 방관주는 여자의 몸으로 남자 행세를 하나 여성해방적 시각을 갖는 인물은 아니고 오히려 가부장적 시각이 더 두드러지는 인물이다. 그에 비해서 영혜빙은 방관주보다 더 깨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제 자신이 결혼으로 인해 남자에게 귀속되는 것을 거부하느라 스스로 원해서 여자인 방관주와 결혼을 했고, 그 결혼을 능동적으로 이끌어 나가니 말이다.  

작품 말미에 방관주는 하늘의 명을 듣는다. 그가 왜 여자의 몸으로 남자의 삶을 살게 되었는지, 하늘 속인 대가로 어떤 값을 치러야 하는지에 대한... 

해제를 보니 이 책이 당시 사회의 통념을 많이 깨버리는 바, 나름의 안전장치로 삽입한 내용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동성혼 이야기라고 하길래 동성동본을 생각했는데, 나의 예상을 완벽히 뛰어넘은 이야기였다. 

낯설어서 신선하고, 뜻밖에도 재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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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5 2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6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일곱번째 파도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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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의 뒷 이야기다. 보스턴으로 떠나면서 메일 수신함을 닫아버렸던 레오의 계정으로 에미가 지속적으로 메일을 보낸다. 닿지 않는 메일의 흔적을 보면서도 계속해서 메일을 띄우던 에미, 마침내 그 메시지가 레오에게 닿았다. 보스턴에서 돌아온 것이다.  

초반 이야기는 조금 지리하게 이어졌다. 여전히 되풀이 되는 말장난이 때로 귀엽기도 했지만 때로 짜증도 나고, 도대체 다음 이야기의 진전은 어찌 되는 것인지 애를 태우게 했다.  

그 사이 레오에게는 새 연인이 생겼다. 그녀의 이름은 파멜라. 오, 눈치 없는 독자라도 다 알아차리겠다. 이 여자, 가엾게 사랑을 마치겠구나... 눈앞에서 만질 수 있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서로를 느낄 수 있는 상대이건만, 보이지 않는 이메일 저 너머의 연인이 더 강력해질 수도 있다니... 

보면은, 에미는 좀 이기적으로 보였고, 막무가내형으로도 보였지만 자신에게 솔직했다. 그에 비해서 레오는 좀 더 예의가 바르고 이성적으로 대처했지만, 지나치게 조심스러웠고, 그래서 또 솔직하지 않았다.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게 서로에게 좋은 결과가 되지 못한다는 걸, 그는 좀 더 깨져보고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뭐, 그게 인생인 거지만. 

온라인 상에서 알게 된, 호감을 지녔던 이와 만남을 가졌던 적이 있다. 첫번째 만남은 좋았다. 우린 즐겁게 수다를 떨었고, 대여섯 시간의 대화 속에 지루함을 몰랐다. 두번째 만남에서 나의 환상이 깨졌다. 온라인 상에서의 그 이미지로만 남겨둘 것을... 하는 뒤늦은 후회. 덕분에 그 사람을 알게 됐던 모임까지 멀어지게 되었다. 모든 건 경우에 따라 다른 것이고, 그 사람과 나와의 인연의 문제지 그게 '온라인'과 '오프라인'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실제로 온라인에서 만나서 결혼해서 예쁜 아이들의 부모가 되어 잘 살고 있는 내 친구도 있으니까. 

레오와 에미의 만남이 드디어 이뤄진다. 그것도 꽤 빈번하게. 만남 자체가 이들에게 어떤 극적인 매개체가 되어주진 못했다. 만나고 나서 더 가까워졌다든가, 더 멀어졌다든가 하지 않는다. 어찌 됐든 두 사람은 서로를 떠날 마음이 없었다는 걸 자꾸 확인시켜준다. 그걸 인정하는 것도 엄청 돌아돌아갔지만.... 

앞 이야기에서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베른하르트'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그에게는 불행하게도. 

에미가 자꾸만 레오에게 당신 '자신'에게 집중하라고 요구하는 게 좋았다. 내가 어떤 상황인지, 입장인지, 내가 뭘 원하는지 말고 당신 자신이 어떠한지에 솔직해지라는 요구 말이다. 레오가 잘 해내지는 못했지만. 에미가 훨씬 지혜로웠다. 감정적이긴 했지만 그렇기에 제일 중요한 질문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일곱번째 파도'라는 제목의 의미도 은은하게 좋았다. 여섯 번의 파도가 지나간 뒤 계산하지도 못하고 들이닥치는 일곱 번째 파도를 맞닥드릴 때의 우리를, 나 자신을 상상해 본다. 당당히 맞설 수 있을까? 도망가지 않을 수 있을까?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까? 

다른 리뷰들에서는 전편보다 못했다는 반응을 접했던 것 같은데, 나로서는 이번 이야기가 더 좋았다. 절반까지는 전편이 더 좋았는데 후반부가 이 책을 더 마음에 들게 했다. 그러니까 에미, 그녀가 참 마음에 든다. 레오가 여전히 멋있기도 하지만. 

신선하고, 무엇보다도 로맨틱한 소설이었다. 그게 참 마음에 든다. 제목도, 일러스트도, 심지어 역자의 이름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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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1-05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전에 Jude님과 아프락사스님이 에미가 무척 좋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거든요. 그때 저는 "저는 레오가 더 좋아요!"했더랬어요. 그랬더니 Jude님과 아프님 두분다 "네, 레오도 참 좋아요!"하시지 않겠어요? 결국 우리는 그 둘을 다 좋아한거죠. ㅎㅎ

전편보다 못했다는 리뷰들은, 또 그럴수도 있는게, 처음 새벽 세시를 접했을때 설레임이 대박이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이미 새벽 세시를 통해 그것을 경험했으니, 두번째에서는 처음보다 그 설레임이 덜하겠죠? 아마 그런것들도 영향을 미쳤을거라고 보여져요.

사람이 정말이지 제각각 느끼는게 참 다른게 말이죠, 어떤 분들은 에미를 지독하게 얄밉다고 하시더라구요. 저는 에미가 얄미운 캐릭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말예요. 새벽 세시부터 일곱번째 파도까지, 전 에미의 행동들이 다 이해가 되던걸요! 결정적으로 자신이 사랑해도 되는 상황임에 대해 처음부터 말하지 않은것도 전 좋기만 했어요. 말했다가는 레오에게 파멜라를 버리라는 무언의 강요가 될 수도 있었을테니 말예요.

전 무엇보다 레오가 정말이지 좋아요. 자신에게 여자친구가 있으니 이메일상의 연인에게 끌리는 것은 옳지 못한게 아닐까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 같아서, 그것이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것일수도 있지만, 그것이야말로 끊임없이 상대에게 최선을 다하기 위해 고민하려는 것 같아서 무척 좋았어요.

아, 이놈의 회사 내팽개치고 집에 가서 다시 읽고 싶어요. 두근두근, 설레이고 싶어요. 사실, 오늘 좀 힘든 날이었거든요. 오후 두시반이 좀 지났을 뿐인데 말예요.

마노아 2010-01-06 11:3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에미와 레오는 정말 너무 잘 어울려요.
두 사람이 이메일 친구를 서로 잃어버렸다면 그 상실감은 어마어마했을 거예요.
반송되어 돌아오는 이메일을 지켜보는 에미도 힘들었지만, 그 시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에미를 부러 밀쳐내고 안간힘을 썼던 레오도 참 안쓰러워요.

누구라도 레오 입장이라면 더 세게, 더 빠르게 전진하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게 가능했다면 아마 선수일지도...;;;;
레오가 계속 고민하고 갈등하고, 번민하는 인간적인 모습들에 오히려 신뢰가 가는 것 같아요. 에미도 그걸 충분히 알아차린 거겠죠.

정말, 오고 가는 메일 속에 독자들은 설렘의 밤을 같이 보낼 수 있었어요.
어제 오후 두시 반밖에 안 됐는데도 그렇게 힘이 드셨군요..ㅠ.ㅠ
집에 가는 길 소주 한 잔 기울이셨나요?
토닥토닥... 늦었지만 위로를 건네요.
다락방님의 오늘은 평안 그 자체였으면 해요. 힘내요, 힘!!

비로그인 2010-01-05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에미가 좋아요! 했다가 레오도 좋아요! 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흐흐흐
전 둘 다가 좋아요. 이제는, 베른하르트 조차도 이해할 수가 있어요. 베른하르트가 전편에서 왜 그런 부탁을 했는지, 그리고 왜 후속편에서 그리 될 수 밖에 없는지도 이해가 가요. 처음부터 레오와 에미는 서로 `뭔가를' 해보겠다고 만난 사람들이 아니었지요. 남녀 사이의 만남이 무엇으로 끝날까요? 결혼 아니면 헤어짐이 거의 전부였어요. 그러나 그 두가지로도 끝이 나지 않는 만남이라니! 두 사람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서로에게 연인이 있고 없고가 아닌, 둘 사이의 언어가 마르는 일이었지요. 그래서 베른하르트가 그런 부탁을 할 수 밖에 없었구요. 제가 후속편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것은, 그 둘만의 언어로만 속삭이던 두 사람의 `갈 길'이 너무 뻔하게 정해진 것 같아서였더랬습니다. 갈 길이 명확한 남녀 관계는, 발전 가능성도 낮지요. 발전 가능성이 낮은 관계는 언젠가는 깨어진다는 것이 제 생각이어요.

마노아 2010-01-06 11:41   좋아요 0 | URL
베른하르트가 가장 가엾었어요. 자신은 이미 졌는데, 이미 링 밖으로 내쳐졌는데 어떡해서든 끈을 놓지 않으려고 무한 애를 썼잖아요. 비참해질 것을 알면서도 말이에요.
아, 끝이 나지 않는 마남이라니, 언어가 마르는 걸 경계해야 한다니, Jude님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이 책이 더 단단하게 다가오는 느낌이에요. 갈 길이 뻔함에도 환호를 보내는 건 해피엔딩에 대한 갈망 때문인가봐요. 어제 하이킥에서 닥터가 정음양을 자기 여친이라고 소개하는 장면을 보았는데, 가슴이 쿵쾅! 아, 저는 사랑에 빠지고 싶어요...ㅜㅜ
 
거짓말 학교 - 제10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35
전성희 지음, 소윤경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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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참신한 작품이다. 거짓말 학교라고 해서 위선으로 가득 찬 교단을 생각했지, 설마하니 거짓말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교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 중에서 성적과 면접을 거쳐 학생들을 선발하며, 제주도 너머 무인도에 위치한 섬에 학년별로 30명씩 기숙사 생활을 한다. 학생들은 진실학과 거짓학 등 분야별 전문 선생님들께 거짓말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배운다. 거짓말 학교는 국가의 안녕과 부강을 위해서 정부가 비밀리에 지원해 주는 학교로, 졸업하면 의무적으로 국가를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무상으로 공부를 시켜주는 것은 물론 매 방학 때마다 해외 연수도 보내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미 아이들도 졸업 후 취업난을 생각하며 무조건 콜~을 외치는 지경.

이 학교의 거짓말 헌장을 살펴보자.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유구한 역사의 뿌리 깊은 거짓말 전통을 이어받아 인류공영에 이바지하자. 이에 창의적이고 이로운 거짓말을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거짓말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여 창조적인 거짓말을 개척하는 데 온 힘을 쏟는다. 우리의 거짓말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국가 발전에 참여할 수 있는 거짓말의 가치를 드높인다.  

국가와 거짓말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야망과 실력을 갖춘 뛰어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만든 거짓말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17-20)

 
   

국민교육헌장을 암기해야 했던 세대가 아니어서 전문을 다 모르겠지만, 아마도 국민교육헌장을 약간 재단해서 거짓말 학교 스타일로 바꾼 게 아닐까 싶다. 유머로 생각하고 읽으면 재밌는데, 진심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국가는 정말 일상적으로 거짓말을 가르치지 않던가! 

아이들은 거짓말 뉴스를 일주일에 두 차례 시청하고, 교장 선생님의 반복된 거짓말 훈화를 주입받는다. 가끔은 졸업생 중에 훌륭히(?) 거짓말을 수행하고 있는 선배들의 조언도 듣는다. 제약회사에 입사한 선배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 회사는 약이 아닌 두려움을 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두려움을 파는 것이 무엇일까요? 다른 게 아닙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흔한 현상들을 치명적인 질병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부끄럼 잘 타는 것에 '사회공포증'이라는 전문용어를 붙이면 정말 심각한 문제로 여기고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76쪽)

 
   

이런 종류의 광고는 무척 많지만, 저렇게 당당하게(?) 듣고 보니 역시 서늘해진다. 거짓학 선생님의 강의를 들어보면 이번엔 착잡해진다.  정치가들이 위기를 모면하는 7단계 전략이다. 

   
 

1단계, 사태를 전면 부인한다.
2단계, 사실은 그러하나 이것은 다른 문제라고 사태를 새롭게 해석한다.
3단계, 사실은 그러하나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 단계에서는 간혹 잘 알려지지 않은 누군가가 책임자로 몰려 문책을 당하기도 한다.
4단계, 이 모든 사태는 이번 경우에는 옳은 일이었으며, 최소한 불가피했다고 주장한다.
5단계, 비록 사태에 연루되어 있지만, 자신이 원했던 일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6단계, 이 모든 사태는 어쩔 수 없는 예외적인 경우였다고 주장한다.
7단계, 앞 단계의 모든 사항이 아무런 효과가 없다면 사죄한다.

 
   

이야, 너무 그럴싸하다. 정치인들은 이런 것들을 전략적으로 학습하고 있을까? '거짓학'이라는 제목이 아닌 전술적 차원에서 연구하지 않을까? (정치인뿐 아니라 기업 차원에서도 가능할 것 같다.)

마지막 사죄의 단계에 대한 선생님의 설명도 놀랍다. 

   
  "대개의 경우 정치인의 사죄는 무의미하다. 사죄하고 거짓말을 인정한다 해도 달라질 게 없으니까. 마지막 단계는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니라 사죄라는 방법으로 사건을 마무리 짓는 거다."(158쪽)    
   

대통령의 무의미한 사과를 정말 사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휠체어 타고서 법정에 출두하는 기업인들을 정말 아프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만, 여러모로 혀끝이 쓰다. 그렇다고 대놓고 나 지금 거짓말 중이야!라고 해도 곤란할 것이다. 선생님은 계속 말씀하신다.

   
  "그 사람들이 바보라서 그런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다. 너라면 대한민국의 국민 1%만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정치가를 뽑고 싶겠니? 만약 정말 1%의 부자만을 위해 자기 한 몸 바치겠다는 정치가가 나온다면 그 말이 진실이라 해도 욕만 잔뜩 얻어먹고 외면당하겠지. 돌 맞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이럴 경우 뻔한 거짓말과 진실 중 어느 쪽을 선택해야겠니?" (159쪽)   
   

만약 저렇게 대놓고 속내를 드러내면 적어도 가장 가난한 노동자가 한나라당을 연모하며 충성 투표를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역시 거짓말은 당당히 유효! 

정치가와 기업가 얘기가 나왔다고 해서 이 책이 사회비판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다. 어디까지나 청소년 대상의 소설이며 또 동시에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인애, 나영, 준우, 도윤 네 학생이 주인공인데, 이야기 자체는 인애와 나영이가 번갈아 가며 1인칭으로 진행시킨다. 준우와 도윤이는 가정 환경에 대한 제시만 있을 뿐 구체적으로 그네들의 고민과 목표에 대해선 잘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애와 나영이의 이야기는 꽤 구체적이다. 왜 이 학교에 지원하게 되었는데, 어떤 목표를 갖고 있는지, 무엇에 좌절하는지 등등등... 

거짓말 뉴스를 시청하던 학생들이 모두 세 명씩이나 쓰러지고, 그 과정에서 모종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고 파악한 아이들은 진실을 찾고나 나름 탐정 비스무리하게 모험을 펼친다. 누가 진짜 스파이인지, 진짜 음모가 무엇인지 독자들도 같이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 재미있다.  

작품은 똑 떨어지게 어떤 결론을 보여주지 않은 채 열린 해석을 허락한다. 아이들은 한 단계 성장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기회를 갖는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거짓말은 내내 세상을 지배해 왔을 것이다. 착한 거짓말도 물론 있지만, 인간을 망쳐버리는 거짓말은 더 많았을 것이다. 교장 선생님은 완벽한 거짓말 능력자를 양성하는 데에 가장 큰 장애는 '인간에 대한 무모한 믿음'과 '쓸데 없는 양심'이라고 강조했지만, 작가는 오히려 그것들이 인간 세상을 유지하게 만들어준 큰 동력이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기실, 우리도 그렇게 믿고 싶지 않은가? 혹은 이미 믿고 있다거나...  

문학동네 어린이 수상작들을 몇 차례 읽게 되었는데 소년왕, 책과 노니는 집, 그리고 이 책 거짓말 학교까지 모두 우수한 작품들이었다. '어린이'란 타이틀을 달고 '청소년'이란 꼬리표를 달고 있지만 누가 읽더라도 충분히 공감하고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책들이다. 적극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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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3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3 2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같은하늘 2009-12-23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도 무지 공감되고 보고싶은데 갑자기 국민교육헌장이 머리속에 꽉~~ 들어오네요.
그게 언제적 얘긴데 아직도 기억이 날까? -.-;;;

마노아 2009-12-23 20:49   좋아요 0 | URL
예, 좋은 책이었어요. 울 언니들이 교육헌장 외우던 모습이 기억나요. 첫 문장은 저도 외웁니다. 하하핫...;;;;;;
 
얀 이야기 2 - 카와카마스의 바이올린
마치다 준 글.그림, 김은.한인숙 옮김 / 동문선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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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이 더 늘었다. 카와카마스와 같은 물고기 카와멘타이가 등장했고, 다람쥐와 들쥐도 등장했다. 말이 없던 얀은 여전히 과묵했고, 새 친구들도 말이 많지 않다. 변화가 있다면 경쾌하게 수다를 떨곤 하던 카와카마스도 어느 순간 과묵해졌다는 것. 대신, 그 빈 자리에는 음악이 차지했다.

제목에도 나왔듯이 카와카마스가 바이올린을 연주하게 되었다. 어디선가 습득한 형편없는 바이올린을 가지고도 너무도 즐겁게, 또 심취해서 연주하는 카와카마스. 끼기끼기 낑낑대던 연주가 어느 순간 라아라아라~하고 울리기 시작한다. 나아가 카와멘타이와 협주곡을 연주하기까지. 카와멘타이는 직접 만든 비올라를 연주했다. 

어느 날 비맞은 생쥐꼴을 하고 나타난 다람쥐와 연이 닿았고, 숲 속에서 마주친 들쥐는 늘 뭔가를 하느라 바빠서 말이라도 붙이려고 하면 "저기... 내가 겨를이 없어서...."라고 말을 하며 난감해 한다. 

얀은 추운 다람쥐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주고, 들쥐가 무엇에 바쁜지 속으로 헤아려 보며 들쥐를 이해해 본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기다움으로 일관하지만 누구도 불편하게 하지 않고 누구도 불편해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고 포근하고 한없이 이쁜 풍경도 가끔은 벼락을 맞을 때가 있다. 물고기인 카와카마스와 카와멘타이를 위협하는 어부의 투망이 그것이다. 음악을, 바이올린을 잃어버린 카와카마스가 혁명을 이야기할 때는 몹시 아이러니한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혁명이 진행될 때에는 바이올리니스트도 활을 잡기 어렵지 않을까? 아니더라도 그가 연주할 수 있는 곡목은 분명 달라질 것만 같다.

몹시 정적인 분위기를 이끌어내지만 지루하지 않다. 고요하지만 침묵은 아니다. 사계절을 모두 아우르며 시간을 내리긋지만 가파르지도 않고 숨가쁘지도 않다. 이 시리즈가 꽤 길다고 알고 있는데 국내에는 아직 2권만 나왔나 보다. 그나마도 공지영 작가의 추천으로 이만큼 선전한 것 같긴 하지만... 조금은 나른하기도 하고 고요한 이 분위기가 나로서는 마음에 드는데, 어쩌면 추운 겨울에 읽어서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분명 파릇파릇 새싹 돋는 봄이나 뜨거운 여름이나, 낙엽 스치는 가을의 책보다는 역시 겨울 책이다. 

그러니, 나는 좋은 독서를 한 셈이다. 예쁜 친구들을 만나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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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이야기 1 - 얀과 카와카마스
마치다준 지음, 김은진 외 옮김 / 동문선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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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공지영의 책으로 기억한다.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에서 소개되었던 책. 책을 읽고 바로 처분한 까닭에 어떤 느낌으로 이 책을 소개했는지는 가물가물하지만, 그때 그 글을 읽고나서 나도 이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했다. 책꽂이에 책을 꽂아둔 지는 좀 되었는데 오늘 아침 출근길, 바쁘게 책을 한 권 골라야 하던 순간 눈에 확 들어와버렸다.  

몹시 추운 날씨를 기록한 오늘, 건물을 날림으로 지어놨는지 오전 내내 난방을 해야 오후에 조금 손가락이 펴지는 교무실에서 이 책을 읽었다. 어디선가 라디에이터를 구해와서 언 발을 녹이려고 했건만, 과부하가 걸려서 컴퓨터 여섯 대와 인터넷 전화를 다 잡아드시고, 그래서 본의 아니게 컴퓨터 정전을 경험하며 오들오들 떨면서 읽었던 거다. 춥고 추웠던 그 시간에 읽은 책으로는 좋은 선택이었다. 무엇보다도, 따뜻했으니까. 

얀은 고양이, 그리고 카와카마스는 물고기다. 카와카마스가 어떤 물고기인지 들어보자. 

*카와카마스...... 러시아명은 시튜카, 영어로는 파이크(pike: 콘들매기류). 대형 담수어로 깨끗한 물에서만 산다. 암녹색이며, 1미터 이상이나 되는 것도 있다. 장수하는 물고기로 1백년 이상 산다고도 한다.  

요네하라 마리의 책에서도 철갑상어가 백년 이상 산다고 나오던데, 러시아 쪽 물고기들은 장수하는 법인가 잠시 갸우뚱... 

암튼, 혼자 사는 얀의 집에 어느 날 카와카마스가 방문하면서 두 친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언제나 먼저 인사하는 건 카와카마스인데, 수줍어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무엇보다도 따뜻한 어감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참 좋다. 

   
 

 안녕! 오늘은 날씨가 너무너무 좋아.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이렇듯 멀리까지 나와 버렸지 뭐야. ......앛, 나는 카와카마스야. 음, 그리고 저 멀리 빛나는 강에 살고 있어. ......아니지, 마나서 반가어. 카와카마스라고 해. 저 멀리 빛나는...... -21쪽

 
   

두 친구는 서로가 살아가면서 익힌 지혜에 대해서, 기술적 노하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고양이 얀이 초원 생활에 대해, 버섯이 많이 나는 숲에 대해, 그리고 잼 만드는 법과 그 보존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카와카마스는 강에서의 생활에 대해, 플랑크톤이 많이 있는 장소에 대해, 즐겁게 헤엄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돌아갈 때가 되면 언제나 부탁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아차, 그래그래, 내일은 이름의 날 축제여서 버섯 수프를 만들어야 하는데, 저, 안타깝게도 소금하고 버터가 다 떨어져서 말이야...... 있잖아, 저, 미안하지만 그것들을 좀 꾸어 줄 수 있겠어?" -23쪽

 
   

겸연쩍은 표정으로, 첫 만남에서부터 뭘 꾸어달라고 말을 하는 카와카마스가 뻔뻔해 보일 법도 하건만, 얀은 망설이는 법이 없이 언제나 기꺼이 청하는 것들을 내준다.  

그렇지만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카와카마스는 다음 날의 이름의 날 축제를 위해서 또 다시 뭔가를 요청하고, 얀은 내주는 것의 반복. 이러다가 살림을 차리는 것은 아닐까 우려가 될 정도다. 그렇다면 카와카마스를 그렇게 철판 깔게 만드는 '이름의 날' 축제는 무엇일까? 작가님 표 설명을 다시 보자.  

* 이름의 날...... 영명축일. 러시아정교에서는 1년 내내 성인의 축일이 지정되어 있다.(성자는 1천5백 명 이상이나 된다.) 따라서 자신의 세례명과 같은 이름의 성인의 날이 그 사람의 이름의 날이다. 

무려 천 오백 명 이상의 성자가 있으니 날마다 어느 성자의 축일이 이어질 것이고, 그 이름과 관련된 사람은 이름의 날 축제를 맞이할 것이다. 종교가 생활 속에 자연스레 녹아 있고 그것이 기념일로 승화된 것이 눈길을 잡는다. 직접 그 축일의 광경을 본다면 더 좋겠지만... 

암튼, 그렇게 늘 방문하고 맞이하는 카와카마스와 얀의 만남은 반복되면서도 지루함이 없고, 되풀이 되는데도 낯선 설렘이 있다. 그러니까 어느 날은 이런 인사로 등장하는 카와카마스를 어떻게 문전박대할 수 있을까? 

   
 

 안녕! 저녁 식사는 다 마친 거야? 그거 잘됐다. 달빛이 너무너무 고와서 그만 이렇게 멀리까지 나와 버렸지 뭐야. 정말로 아름다운 달밤이야. 이런 밤에는 누구라도 시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걸으면서 이런 시를 지었는데 들어 볼 테야? -40쪽

 
   

그리고 이어지는 아름다운 시의 향연. 

만약 저 두 친구가 고양이와 물고기가 아닌, 닳고 닳은 인간 어른이었다면 우리는 색안경부터 쓰고서 그를 판단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의 인사에 대해, 그의 의도에 대해, 그가 빌려달라고 하는 행위에 대해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먼저 채우고 마음을 불편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달빛이 너무 고와서 멀리까지 나가버린, 그렇게 마주친 친구에게 시 한 수 읊어줄 마음의 여유를 어느 때에 우리는 잊어버렸을까.  

두 친구의 만남이 늘 지속된 것은 아니다. 가끔은 날짜를 건너 뛰기도 하고, 몇 달씩 못 보기도 하고 시간이 흘러간다. 그리고 어느 날, 마침내 얀이 카와카마스를 찾아 간 날, 카와카마스는 마치 어제 헤어졌던 친구를 오늘 다시 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맞아준다.  

그리고 얀을 배웅하면서 이젠 뭘 꾸어달라가 아니라 뭐가 필요하니 갖고오라고 부탁한다. 역시나 내일 있을 이름의 날 축제를 위해서. 또 역시나 주저함 없이 기꺼이 그러겠노라고 말을 하는 얀. 

인간의 셈법으로는 하나를 받았으면 하나를 주어야 할 것 같고, 하나를 주었으면 하나를 받아내야만 할 것 같은 세상인데 얀은 자기 것을 나눠주고 내주어서 더 행복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엉뚱하고 당돌하기까지 한 카와카마스는 누구보다 얀을 외롭지 않게 해주는 멋진 친구이다.

글밥이 많지도 않고 가끔 그림도 마주치면서 빠르게 넘길 수 있는 책장이지만, 이 책은 천천히 읽을 때 더 잔잔한 감동을 받을 듯하다. 내게도 뭘 달라고만 하는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럼에도 내주는 게 아깝지 않고 오히려 기쁨이 되는 동무가 있다. 그리고 내게도 무엇이든 주고자 애쓰는 친구가 있다는 것도 같이 떠오른다. 얀과 카와카마스같은 자연스럽고 어색하지 않은, 안달복달하지 않는 따뜻한 친구 관계로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난방을 계속해서 실내가 따뜻해진 탓이 크지만, 마음도 같이 따뜻해져서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2권도 역시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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