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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머리 공주 - 마루벌의 좋은 그림책 25 ㅣ 마루벌의 좋은 그림책 25
안너마리 반 해링언 글 그림, 이명희 옮김 / 마루벌 / 200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어린 시절 읽고 자란 공주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백설공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공주는 아니지만 훗날 세자빈(?)이 된 신데렐라.... 그들 모두는 공통점이 있다. 멋진 왕자님을 만나서 행복해졌다는 점. 그런데 이 공주는 좀 다르다. 하긴, 그녀 역시 남자를 만나긴 만났다. 그런데 그 남자는 왕자님이 아니다. 전직 서커스 단원으로, 공주의 <모발용 가방 포터>라는 특이하고도 미천한 직업의 소유자였다. 공주는 이 남자와 도피를 감행하고, 궁궐이 아닌 서커스의 긴머리 공주가 되어 행복해진다.
이 독특한 이야기는, 만만찮게 독특한 그림과 어우러져서 충격을 배가시킨다. 내 머리 속에 큰 돌을 하나 던져 넣은 것 같다. 그러면서 동시에 오래 묵은 어떤 체증을 쑤욱 내려주기도 한다. 그런데, 다양한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는 나에 반해 딸아이는 담담하다. 그저 '오랜만에 재미있는 새 책 한 권 읽었네~'하는 얼굴이다. 당연하지. 백설공주와 잠자는 숲 속의 공주와 신데렐라가 그림책으로, 애니메이션으로, 영화로...내 머리 속에 꼭꼭 굳혀 놓은 고정관념이 딸아이에겐 없으니까. 굳은 것이 없으니, 깨질 것도 없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아주 뿌듯하고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이 그림책을 주고 페미니즘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리포트를 쓰라고 하면 아주 흥미로운 결과물이 나올 것이다. 공주의 긴머리와 그 긴머리를 대하는 국왕의 태도, 왜 하필이면 서커스 단원이었으며 그녀의 탈출이 어떤 의미를 띄는가... 이야기를 이끄는 모든 요소들은 사고적이지 못한 성향의 나도 충분히 눈치 챌만큼 암시적이다. 그러나 분석은 그만두자. 그럴 능력도 없을 뿐더러, 나는 지금 딸아이의 엄마로서 리뷰를 쓰고 있으니까. 그래, 딸아이의 엄마로 보기에... 이 그림책은 기존의 공주 시리즈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멋진 대안동화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굳이 백설공주를 흑설공주로 만들고, 신데렐라를 쟌다르크같은 여전사로 만든다고 대안동화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개미나 베짱이가 아닌 들쥐들의 이야기인 <프레드릭>이 무엇보다도 훌륭한 <개미와 베짱이>의 대안동화이듯이, <긴머리 공주>도 기존의 모든 공주 시리즈가 은연 중에 아이의 머리에 심어 놓을 모든 음모(?)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힘을 품고 있는 것이다. 왕자를 만나 결혼해서 궁전에 살아야 행복한 거라고? 아니! 왕자가 아니라 서커스 단원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다. 궁전 아닌 산골짜기에서 머리를 이불 삼아 누워도 진정, 행복할 수는 있는 것이다.
딸 아이가 여권운동가가 되길 원하느냐고 물으면...글쎄, 잘 모르겠다. 자식은 편안하고 여유롭게 살았으면, 하는 것이 대부분 엄마의 마음이니까. 하지만, 최소한 아이의 머리가 편협하고 부조리한 선입견으로 채워지진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 좀 더 솔직해지면 딸아이가 자라서 궁전 안의 왕자비가 되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 하지만 그 이전에 단칸 월세방에서 살게 되어도,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깨닫고 누릴 수 있는 아이가 되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그런 어른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긴머리 공주>같은 책이 좀 더 많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딸아이의 엄마가 아닌 '나' 입장의 사족 --- 그림책이 이렇게 섹시해도 되는거야! 공주의 도피 중, 서커스 단원 남자와 함께 긴머리를 덮고 잠이 드는 장면은...왠지 아득하게 섹시한 느낌을 풍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