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구멍 끝까지 짜릿하게, 마니아들이 열광할만한 호러 수작!

 

프랑스 개봉 당시에는 4만 5천명이 관람 후 실어 증세를 보였다고 하니 <엑스텐션>은 <스크림>, <링>, <식스 센스> 이 후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무수한 아류작들과는 분명 다른 뭔가가 있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25세의 천재 감독 알렉산드르 아야 감독은 몸서리치게 미칠 만큼 무서운 영화를 만들어 보고자는 결심 하에 <엑스텐션>을 만들었다고 한다. 감독의 그러한 의지가 영화 전면에 걸쳐 확실하게 드러난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숨돌릴 틈 없이 위력적인 공포를 선사한다. 그 공포의 강도는 이제껏 호러 마니아들에게 걸작으로 추앙받는 <텍사스 살인마>, <서스페리아>, <매니악> 등의 충격에 버금간다. 때문에 포스터 카피를 화려하게 장식한 '목구멍 끝까지 짜릿한, 샤우팅 스릴러''전 세계 호러홀릭을 열광케 한 센세이션'등은 실로 거짓이 아니다. 이 영화는 점잔을 빼며 숨기려는 심리 스릴러나 혹은 유쾌하고 장난스러운 팝콘 호러의 면모를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시종 일관 극단의 수위를 넘나드는 공포의 진면목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바로 이 '확실하게 보여준다'에서 호러 마니아들의 찬사를 자아낸 것이다.(개인적으로 3대 공포영화 <버닝>, <13일의 금요일>, <공포의 여대생 기숙사> 이 후 이렇게 가슴을 흥분시키는 슬래셔 무비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영화의 시작은 영화의 끝과 맞물려있다. 악몽같이 몽롱한 기억의 조각 위로 소녀의 독백이 반복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곧 영화는 두 소녀를 태운 자가용이 도로를 시원스레 질주하는 장면으로 바뀐다. 이때 배경음악으로 Sara Perche Ti Amo가 경쾌하게 흘러나온다. (사실 이 노래는 감독이 교묘하게 숨겨놓은 반전의 복선이지만 그것을 눈치채는 관객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알렉스의 집을 방문한 메리는 그날 밤 알렉스의 일가족이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잔혹하게 살해되는 광경을 목격한다. 살인마는 알렉스의 손발과 입을 묶은 후 어딘가로 데려가고 메리는 친구를 구하기 위해 살인마의 뒤를 쫓는다. 숨막히는 접전 끝에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게 되는 메리와 알렉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두 소녀와 살인마, 그들이 간직한 엄청난 비밀이 그들을 믿을 수 없는 끔찍한 공포의 패닉상태로 몰아넣는다.

살인마가 알렉스의 가족들을 찾아내어 하나 하나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하는 초반 살해 씬과 라스트의 충격적인 전기톱 살해 씬은 이 영화의 백미로 기억될 것이다. 자칫 평범하고 무디게 느껴질 수 있는 살해 장면을 감독은 가히 천재적인 연출력으로 기가 막히게 표현해낸다. 혀를 내두를만한 잔혹함은 물론, 심장을 도려 낼 듯한 자극적인 음향과 감각적인 미장센등의 효과로 정말로 눈앞에서 살인이 펼져지고 있는 듯한 가공할 공포를 만들어 냈다. 마니아들이라면 아낌없는 열광과 환호를 보낼 만큼 훌륭한 솜씨였다.

이 영화가 프랑스 언론으로부터 '영화 100년사 최고의 걸작 호러!'라는 찬사를 받은 데에는 비단 이러한 살해 장면에서 오는 센세이션 때문만은 아니다. 대다수의 슬래셔 무비가 간과하기 쉬운 허술한 스토리 라인을 <엑스텐션>은 정교하고 빼어난 시나리오로 뛰어넘는다. 이 영화는 정신없이 자행되는 잔인무도한 살인 행각 뒤에 숨겨진 뒤통수를 치는 반전으로 관객들의 넋을 빼놓는다. 그리고 그 반전으로 인해 이 영화는 하나의 퍼즐로 변해버린다. '과연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내는 순간 이 영화는 가족 대학살극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로 전환한다. 감독은 슬래셔 무비의 컨벤션을 조롱하듯 전통적인 장르적 관습들을 끌어와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결국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마지막에 가서 터뜨린다. 그리고 영화는 재해석된다.(결국 이 영화는 <데드 캠프>처럼 단순히 '살인마로부터 살아남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각설하고 <엑스텐션>은 진정한 호러 마니아들이라면 목구멍 끝까지 짜릿하게, 열광할만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더구나 심리 스릴러, 심령 호러, 범죄 스릴러 등에 지쳐있는 마니아들이라면 더욱) 말만 앞세우는 공포가 아닌, 정말로 높은 수위의 공포를 확실히 즐기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엑스텐션>을 절대로 놓쳐선 안될 것이다. 호러 모조품이 판을 치는 요즘, <엑스텐션>은 '이것이 호러다'라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단 노약자나 임산부, 심약자들이라면 관람을 삼가함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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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밍 풀

Swimming Pool

감독 : 프랑수아 오종

주연 : 샤를롯 램플링, 뤼디빈 사니에르

제작연도 : 2003

제작국가 : 프랑스

관람등급 : R, 18세 관람가

비디오 출시

 

정돈된 일상을 파고드는 모호한 균열

 

 

<스위밍 풀>은 프랑스의 젊은 천재 감독으로 연신 메스컴의 화제를 모으고 다니는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최신작이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이제껏 국내에 단 한 편도 소개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국내 관객들에게 프랑수아 오종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는 작은 단서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스위밍 풀>은 프랑수아 오종의 특별한 세계와 조우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이러한 이유로 <스위밍 풀>은 그 자체로 국내 관객들에게는 다소 낯선 프랑수아 오종 이라는 매혹적인 수영장 속으로 덜컥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과대한 기대감과는 달리 영화는 시작부터 굉장히 정돈되고 편안한 느낌이다. 편집장의 권유로 프랑스에 있는 그의 별장으로 휴가를 떠난 50대의 인기 범죄소설 여류 작가 사라는 화려하지만 고요한 별장의 정취에 흠뻑 빠져든다. 영화의 초반은 그녀의 디테일한 일상을 조용하게 따라간다. 넓고 조용한 자신만의 공간에 만족해 하며 사라는 새로운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녀의 정돈된 일상에 균열이 시작되는 것은 편집장의 어린 딸 줄리가 별장을 방문하면서 부터이다. 사라만의 공간에 줄리라는 달갑지 않은 인물이 침입한 것이다. 줄리는 그 때까지 평온했던 사라의 일상을 엉망으로 망쳐놓는다. 낮에는 수영장에서 수영과 선탠을 하며 밤에는 남자들을 끌어들여 난잡한 섹스 파티를 즐긴다. 젊고 싱싱한 10대 소녀 줄리가 만들어내는 갖가지 소음들은 사라의 정돈된 일상 속을 파고들며 뒤틀린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둘 사이의 감정의 골이 깊어 갈수록 점점 줄리의 도발적인 매혹 속으로 흡수되는 듯한 자신을 발견하는 사라는 줄리의 이야기를 글로 써 나간다.

영화의 마지막 30분은 이제까지의 나른하고 일상적이었던 영화의 분위기를 뒤엎어 버린다. 어느 날 줄리는 사라가 마음 속으로 흠모하고 있던 카페 주인을 별장으로 끌어들이고 그날 밤 그와 크게 다툰다. 다음 날 남자는 사라지고 수영장에는 핏자국이 가득하다. 이때부터 사라는 사라진 남자와 핏자국이 남긴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며 예상치 못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이야기의 흐름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놀라운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영화보기를 완전히 새롭게 재해석 시키며 영화의 주제마저 바꾸어 놓는다.

<스위밍 풀>은 정확이 무엇이다, 라고 꼬집어서 정의내리기가 무척 힘든 영화임이 분명하다. 물론 그것은 프랑수아 오종 감독이 의도적으로 계산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는 관객들이 자신의 영화를 보고 여러가지로 상상하며 재해석하기를 좋아하는 듯하다. 실제로 <스위밍 풀>은 마지막까지 다 보고 나서도 한참을 더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사라와 줄리가 만들어간 미묘한 갈등과 심리전, 그리고 위험한 범죄 등이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굉장히 모호하게 와닿는다. 무엇이 진실이며 무엇이 거짓인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판타지인지를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음으로 관객들이 이끌어낼 수 있는 상상의 범위는 커지고 그 가지는 여러갈래로 나뉘어진다.

어쩌면 프랑수아 오종 감독은 <스위밍 풀>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그 이상의 것까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와 줄리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감독은 관객들에게 또다른 상상력의 샘, 즉 그들만의 수영장(Swimming Pool)을 만들어 준 셈이다. 그 속에서 영화는 각각 새롭게 재 창작 되어 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스위밍 풀>은 하나의 결론으로 단정짓기 힘든 모호한 영화이다. 장르적인 면에서도 드라마, 에로, 심리 스릴러, 서스펜스, 추리극 등을 모두 아우른다. 내용적인 면에서도 언뜻 두 여인의 심리적인 갈등과 교점을 말하는 듯 하지만 창작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더 크게 아우르며 또다른 얘깃거리에 대한 공백마저 남겨둔다. 잘 짜여진 범죄 스릴러나 추리 소설적인 재미를 기대하면서 이 영화를 본다면 분명 실망할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런 류의 영화와는 많은 부분이 틀리다. 살인과 미스터리가 등장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재미는 사라와 줄리간의 치열한 대립과 심리전에 있다. 두 여배우의 연기는 백점 만점을 다 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완벽했다. 그래서 오히려 영화가 범죄물로서의 면모를 보이는 후반부에서 전개의 스피디함에도 불구하고 맥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코엔 형제의 <바톤 핑크>나 워쇼스키 형제의 <바운드>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바톤 핑크>만큼 창조적이지도 <바운드>만큼 자극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밍 풀>이 인상적인 이유는 정돈되어진 일상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모호한 균열을 일으키는 프랑수아 오종만의 마력적인 화술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어차피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모호함의 연속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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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 없이 보았던 1편이 200%의 만족감을 주었고 때문에 200%의 기대감을 안고 2편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편처럼 200%의 만족감은 주지 않더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개인적으로는 그냥 100% 정도의 만족감만을 얻었습니다. 100%면 충분히 만족할만한 재미이지만 매트릭스라면 뭔가 더 엄청난 것을 줄것이라고 기대를 했었거든요.

2편에서 가장 화려한 하일라이트는 극의 중반부에 네오와 스미스 요원과의 일당 백의 격투씬입니다. 'Burly Brawl'씬으로 불리우는 이 기막힌 액션 씬은 전편의 총알 피하기 씬을 능가하는 박력을 선사합니다. 정말로 이 씬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7000원이 아깝지 않은 영화입니다. 이제껏 모든 액션영화의 격투씬들을 싹 잊게 만들어주는 굉장한 씬 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하일라이트, 라스트 고속도로 추격씬이 있습니다. 이 추격씬 역시 이제껏 보아온 어떤 헐리웃 거대 블록버스트에서도 없었던 압도적인 액션을 보여줍니다.

이 두 개의 액션 씬 만으로도 매트릭스 2는 충분히 회자가 될 만한 물건임에 틀림없습니다. 2편의 제작비가 상당하긴 하지만(약 1억 5천만불) 이 정도로 충격적이면서도 짜릿한 액션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역시 매트릭스 뿐이다 라는 생각을 새삼 다시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1편을 따라잡기엔 여러모로 힘이 부족해 보이는 듯했습니다. 그것은 이미 1편에서 시리즈 3부작의 모든 하일라이트를 다 보여주었기 때문에 더 이상 새롭게 보여줄 볼거리는 없다라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이었습니다.
1편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독립된 한 편의 이야기가 될 내공이 있는 영화이며 그런 만큼 탄탄한 스토리라인과 군더더기 없는 짜임새를 보여줍니다. 입이 떡 벌어지는 오프닝, 미스터리한 초반 전개, 의문의 추적, 드러나는 비밀, 무공 수련, 그리고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한 최후의 대결, 죽음과 사랑으로서의 부활, 희망을 예고하는 에필로그... 등 1편은 시리즈 3부작의 모든 내용을 총체적으로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기막힌 스토리라인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2편에서 다시 1편의 뒷 이야기를 늘여 나간다는 것은 마치 스피디하게 본 영화 한편을 길게 늘여서 다시 보는 듯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1편에서 라스트에 센티널이 시온을 추적해서 공격하는 씬이 짤막하게 등장합니다.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기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씬이었는데 2편 전편에 걸쳐서 바로 이 센티널의 시온 추적 및 공격이 커다란 스토리의 축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미 1편에서 축약적으로 긴박감 넘치게 써 먹었던 설정을 2편에서는 다시 길게 늘여서 써 먹는 것이지요. 2편의 시작은 수만개의 센티널이 시온을 추적중이며 발견하기 까지는 시간이 얼마 없는 것으로 설정됩니다. 때문에 네오와 그 일당들은 센티널의 공격이 있기 전까지 매트릭스의 중심부로 침입해서 시스템을 완전 붕괴시켜야만 합니다.
어쩐지 출발서부터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스토리구나 싶었습니다.

더구나 2편에서 제이슨 친구^^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초반부에 시온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마치 고대 부족사회의 모습을 보는 듯한 시온의 풍경들과 족장의 연설 장면 같은 모피어스의 연설, 환호하는 부족민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이어지는 '딩가 딩가'울리는 축제의 한마당. 교차편집으로 보여주는 네오와 트리니티의 정사씬등은 매트릭스가 마치 고대로 되 돌아간 듯한 느낌마저 들어 상당히 짜증이 났던 부분입니다. 아마 딱 그장면부터 영화를 보게 된다면 이것이 매트릭스가 아닌 '늑대와 춤을'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 것입니다.

감독이 어째서 그런 불필요한 씬을 억지로 구겨넣은 건지(천재 감독들이니 다 이유가 있었겠지만은...)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매트릭스 매니아들로부터 한 소리 들을만한 빌미를 제공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내내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네오와 트리니티와의 로맨스는 너무 작위적인 느낌이 들어 껄끄러운 인상을 주었습니다. 지나치게 서로를 애틋하게 대하는 것이 너무 감상적인 듯해서 1편에서 보여주었던 둘 사이의 미묘한 감정 교류가 굉장히 신선했던것과 비교되었습니다.

또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장면은 모니카 벨루치가 등장하는 씬이었습니다. 프랑스 최고의 여배우 모니카 벨루치가 등장한다고 해서 기대를 했는데 그녀가 등장하는 씬 전체가 불필요한 씬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있으나 마나 한 캐릭이었습니다. 물론 그녀로 인해 키메이커를 구출해내지만 그 과정을 그런 식으로 처리한 감독의 의도를 잘 모르겠습니다. 특히 그녀가 네오에게 키스를 강요하며 키스 후 트리니티에게 '넌 정말 좋겠어'라고 말하는 장면은 실소를 금치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매트릭스가 어쩌다 이런 분위기로 빠지는지 싶을 정도로 군더더기 씬 같았습니다. 정말로 악녀같은 캐릭을 연출할 생각이었다면 트리니티와 네오 사이에 큰 갈등을 심화시켜 그것이 극 전체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게금 설정을 하던지, 이건 그냥 밋밋하게 끝나버리니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모니카 벨루치를 등장시켰으면 좀더 그럴싸한 캐릭터(악녀 캐릭이라고 할 지라도 좀더 매력있고 무게있는 역할을)를 만들것이지 어쩌자고 저런 3류같은 캐릭터를 만들었나 싶었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순전히 제 생각이오니 다르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부디 세세한 태클 걸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 라스트에 밝혀지는 네오와 매트릭스 사이에 숨겨진 놀라운 비밀은 다소 충격적이었지만 설명이 지나치게 복잡하고 난해해서 알아 먹기 참 힘들었습니다.(실제로 감독을 제외한 배우들과 스탭들 모두도 자신들이 찍고 있는 영화의 스토리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로 촬영에 임했다고 함, 이정도니 관객들이야 오죽 혼란스러울까...) 따지고보면 결국 기계들과 인간과의 전쟁이라는 간단한 내용을 뭐하러 계속 저러게 복잡하고 난해하게 이끌어 가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부분이었습니다.

영화의 런닝타임은 약 135분 정도인데 그 중에서 크게 두 번의 액션씬을 제외하고 나면 약 100분이라는 긴 시간이 시온 내부에서 일어나는 세세한 갈등들(특히 평의회 회의 장면은 정말 지겨운 장면이었음... 꼭 스타워즈를 연상케했음)과 인과관계에 대한 철학적인 사색, 운명에 관한 고찰등으로 이어지는 드라마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장면들은 더할나위 없이 따분한 장면이었으며 오로지 나중에 한방 크게 터질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간신히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은 앞서 지적했듯이 아마도 1편만큼 참신하지 못한 스토리라인에서 오는 문제 같았습니다. 현실은 가상현실이고 진짜 현실은 가상현실 너머 어딘가에 있다라는 매혹적인 스토리라인에서 벗어난 것이 없는 2편의 스토리라인은 조금 지겨울 정도로 그것을 되새김질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굉장히 창조적이었던 1편에 비해 더 이상 새로울 것은 없는 2편이었기에 다소 진부한 느낌이 들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화끈한 액션씬들조차 1편에서 이미 이루어놓은 기술적인 성과들을 다시한번 써 먹으며 단지 규모만 더 크졌을 뿐이었습니다.(그도 그럴 것이 제작비 면에서 1편의 2배 반이 들어갔으니)

하지만 매트릭스 2는 분명 대단한 영화임에 틀림없습니다. 말했듯이 네오와 스미스 요원과의 일당 백 결투씬과 라스트의 고속도로 추격씬 만으로도 어떤 액션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다 잊게 만드는) 진풍경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했던 것이 바로 매트릭스의 그러한 맛이었으니 그에대한 부응은 충분히 해 주었던 겁니다. 적어도 입장료가 아깝지 않을 만큼 놀라운 액션을 관객들의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보여주기 때문에 매트릭스 2는 필견의 가치가 있는 대작입니다.

또한 아직 3편을 보지 않은 상태이므로 위에서 지적한 문제점들이 어떤 식으로 말끔하게 연결되어 해결될 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3편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2편의 모든 것의 평가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요. 때문에 2편에 대한 완전한 평가는 3편까지 감상한 후에야 가능하겠지요. 그리고 비로소 매트릭스 3부작을 얘기할 수 있겠지요.

기대했던 것 만큼은 아니었지만(사실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것이 제일 큰 문제였겠죠. 관객들의 눈높이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높여놔서...) 2편은 역시 매트릭스다라는 찬사가 나올만큼 화려하고 대단했습니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Burly Brawl'씬과 고속도로 추격씬은 정말로 압권입니다. 보고 있으면서도 그 경이로움에 넋을 잃을 정도로 기막힌 황홀감을 경험하실 수 있습니다. 최고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명 액션 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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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나이트 메어 룸 - 학교의 비밀

기형도 전집

만화 박정희 1,2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현진건 단편집

날개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아낌없이 주는 나무

내슬픈 창녀들의 추억

바보바보

살아있는 동안 꼭 봐야 할 48가지

백정들의 미사

노인과 바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살인자의 건강법

너무도 쓸쓸한 당신

무라카미 라디오

기생수 애장판 1~8

돌아온 소년 탐정 김전일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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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 양장본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시대에 과연 진정한 신은 존재하는가. 인간 세상에 던져진 모든 선과 악, 그리고 고뇌
와 절망은 누구의 창조물인가. 그것이 만약 신의 창조물이고 신이 정해놓은 프로그램에 지
나지 않는다면 인간사에 던져진 그 모든 역경은 결국 신의 의지란 말인가. 따라서 어떤 죄
악도 상처도 결국은 신에 의해 예정된 일부이며 우리의 구원과 몰락도 그 예정에 따를 뿐인
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신의 하수인에 불과했던 카인은 신의 이름으로 저주받고 심판 당해
야 하며 배고픈 민중들은 미래가 없는 가난에 허덕여야 하는가. 그것이 신의 무책임한 방임
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절대자(권력을 가진 자)의 횡포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작가 이문열
은 이 물음에 대한 고찰을 '사람의 아들'로 대신한다.
'사람의 아들'은 작가 이문열이 이십대 초반이라는 나이에 쓰기 시작하여(이런 어마어마한
작품을 그렇게 젊은 나이에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이십대 중반에
중편으로 완성했다 이후 장편으로 개작한 작품이다. 이문열은 79년 이 작품 '사람의 아들'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장편 활동을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의 아들'은 이문열
의 작가적 출발점과 이후 작품 활동의 추이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어찌하여 그는 그렇게 젊은 나이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종교적 신성의 근간을 뒤흔드는
문제작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그의 처절했던 인생사와 맞물려 있다. 남로당계 간부였던 아버지의
월북과 가족의 이산, 월북자 가족에 대한 감시와 그에 대한 피해의식이 빚은 가혹했던 어린
시절의 삶, 이러한 유랑과 방황의 유년기가 청년 이문열로 하여금 사회와의 소통을 차단하
고 홀로 침전하여 관념의 늪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게 했던 것이리라. 그에게 있어 그를 둘
러싸고 있는 현실은 바람직한 가치가 상실되어 버린 회의와 환멸과 상실의 정서 그 자체였
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릴 적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책 세계 속에서 방대한 지식을 축척
하며 그 선험적 비판철학으로 인간과 삶의 탐구에 골몰했다. 그것은 그의 기구한 성장기에
서 어찌할 수 없는 선택에 불과했다. 때문에 '사람의 아들'의 탄생 역시 청년 이문열에게 필
연적인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사실 '사람의 아들'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처음에 이문열이 이 작품을 완성시켜 출판
사를 찾았을 때 무수히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그 이유를 세 가지 정도
로 생각해보았다. 첫 번 째로 70년대의 문단 상황을 고려해볼 때 유신 독재에 대한 사회학
적 상상력을 드러내는 작품에 대한 거부 반응을 들 수 있겠고 두 번 째로 종교 문제를 정면
에서 다루었다는 것에 대한 거부 반응을 들 수 있겠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어쩌면, 이
작품이 가진 강렬한 '추리'소설 적인 색채와 '판타지 무용담'적인 면모가 당시 '순수문학'(예
술로서의 작품 자체에 목적을 둔 문학 - 필자는 아직도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른다)
만을 고집해온 국내 문단에 달갑지 않은 사생아로(관념주의의 옷을 입은 통속소설 정도로)
비쳐졌기 때문이리라.
정말로 이 소설은 굉장히 '추리소설'적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공전의 히트를 거둔 '다빈치
코드'와 닮아 있다고 하겠다. 실제로 사건 전개나 두 이야기가 교차되는 구성 방식, 종교 문
제를 다룬 지적 스릴러의 요소 등이 상당부분 닮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닮은 점이라면
방대한 지식을 에너지원으로 하고 있음에도 '굉장히' 재미있다는 점이겠다. 이문열은 이 작
품을 쓸 때 그 자신의 엄청난 독서량에 의해 이미 베스트셀러의 공식을 꿰차고 있었으며 그
노하우가 응축된 작품이 바로 '사람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정
말 잘 읽힐 수밖에 없는 정교한 오락적 장치들의(추리 소설적 요소를 가미, 미스터리를 증
폭시킨 것, 그리고 신화적 인물의 재해석과 그 파란만장한 여정 등이 치밀한 액자형 교차적
구성으로 강렬한 흡입력을 제공한다) 경지를 보여주며 출간 즉시 엄청난 판매 부수를 기록
했다. 그리고 밀리언셀러로 등극하여 지금까지 현대 고전으로 꾸준히 읽히고 있다.
그러나 독자들의 흥미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오락적 측면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이 작
품에는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의 위대함이다. 필자는 아직 이문열의 모든 작품을 읽
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읽은 작품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비롯한 단편 몇 편, 그리고
'젊은날의 초상'이 전부다. 하지만 이문열 연구가들이나 평론가들이 대부분 '사람의 아들'을
이문열의 대표작으로 꼽고 있고 가장 많이 팔린 책도 역이 '사람의 아들'이다. 그리고 필자
역시 이 작품 '사람의 아들'을 이문열의 최고 작품으로 보는데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가장 간단한 이유를 말한다면 이 작품에 내재된 작가의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색채, 그리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폭넓고 이채로운 성찰은 사실 이후 그의 모든 작품에서
일면적인 모습으로 반복해서 다루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이 작품이야말로 이문열 문학의 뿌
리요 모체인 것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듯, 모든 이문열 작품은 '사람의 아들'로 통하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크게 두 가지 이야기가 액자 형식으로 맞물려서 진행된다. 액자 속의 '아
하츠 페르츠' 이야기와 액자 밖의 민요섭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진행된다. 민요섭은 비상한 두뇌와 세상을 보는 탁월한 안목을 지닌 신앙심 깊은 청년이다.
하지만 그는 언제부턴가 민중 구제라는 실천 신학에 빠져들게 되고 그후 홀연히 자취를 감
추었다가 의문의 살인을 당한다. 살인사건의 수사를 담당한 남 경사는 민요섭의 자취를 더
듬어가다 그가 남긴 노트에서 '아하스 페르츠'에 대한 소설을 접하게 된다. 민요섭이 쓴 소
설 '아하스 페르츠'의 이야기와 남 경사가 수사하는 민요섭 살인사건이 서로 맞물리며 소설
이 전개되어 감에 따라 점진적인 방식으로 단서와 비밀들이 공개되어진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작가가 아하스 페르츠와 민요섭을 거의 일대일의 방식으로 대응시
키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이인 일역을 하는 것처럼 생각과 행동이 닮아 있고 그래서
어느 한 쪽을 탐색하면 저절로 다른 한 쪽까지 탐색되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민요섭의 행적
속에 묻어 있는 의문은 아하스 페르츠의 행적을 통해 알 수 있고, 아하스 페르츠의 행적 속
에 묻어 있는 의문은 민요섭의 행적을 통해 알 수 있는, 독특한 구성이 형성되어진다.
그러나 흥미와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러한 구성을 압도하는 것이 바로 폭발하듯 쏟아지는
강렬한 주제의식이다. 이 주제의식은 이문열 스스로가 성장기를 통해 억제하기 힘들었을 사
회와 자아에 대한 심각한 성찰의 결과물이기도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앞서 언급한 이 작
품의 위대함이고 필자는 이 위대함에 전율했다.
무엇보다 필자를 전율시킨 것은 민요섭과 아하스 페르츠가 주장하는 신의 존재에 대한 근
원적인 물음이었다. 이것은 소설 속 두 주인공의 여정 중 신에 대한 회의, 방황, 반항에 해
당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들은 묻는다. 신의 말씀에 개인의 자유를 포기하는 대다수의 군
중을 '죽음' 말고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어째서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오로지 '죽음'으로
만 구원하려 하고, 공허한 천국의 약속만으로 굶주림과 모진 고난을 겪게 하는가. 그것이 신
의 자비인가. 신의 사랑인가. 또, 원수를 사랑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그 모든 가르
침의 실천이 인간에게 가능하다고 믿는가. 그 교훈은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오직 감당할 수
없는 영혼의 짐, 영원히 헤어날 길 없는 죄책감과 절망의 원인이 될 따름이 아닌가. 신으로
인해 율법은 완성될 것이지만 그것은 사실 인간과는 별 상관없는 독선의 완성일 따름이 아
닌가. 그렇다면 신이 존재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절대자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째
서 피 흘리며 죽어 가는 불쌍한 인간을 구원하지 않으며 어째서 사악한 무리가 사악함을 품
지 않도록 하지 않으며 어째서 세상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게 하지 않는가. 그것은 방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물음들은 당시까지 누구나 절대적 진리라고 믿어왔던 종교적 위대함에 대한 강한
반기였다. 작가는 아하스 페르츠와 민요섭, 그리고 예수를 비롯한 무수한 신적인 존재들을
내세워서 신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을 한다. 그래서 그때까지 무조건적으로 맹신했던
신과 종교에 대한 근간을 뒤흔들며 무엇이 진실이며, 그 진실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에
대한 다각도의 생각을 하게 했다. 어쩌면 작가는 아버지의 부재를 그런 식으로 얘기하고 싶
었던 지도 모르겠다. 혹은 당시의 견고했던 독재 권력을. 아무튼, 필자는 이러한 물음을 필
자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과 결부시켜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필자가
무신론자임을 감안하더라도) 아하스 페르츠의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다빈치 코드'에서 다
루어진 신화와 역사의 날조는 역시 절대적 권력가들의 횡포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의혹이 더
욱 짙어졌다. 정말로 신이 절대적 선의 존재라면, 어째서 악은 만들었는가. 어째서 오늘날
가난에 허덕이며 자살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가. 열차 전복 사고를
구경만 하는가. 전쟁으로 죽어 가는 무수한 인명들을 구하지 않는가. 어떤 신성한 이유들을
내세워도 이것은 정말 신의 방종이며 모순이다. 신화와 역사는 권력과 힘을 가진 자들의 것
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음이나 의혹이 아닌 절대적인 맹신인 것이
다. 때문에 아하스 페르츠는 예수를 유혹하려 했던 사탄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
만 소설 속의 아하스 페르츠는 결코 사악한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민요섭도 마
찬가지다. 그들은 신앙에 의혹을 품었을지언정 배고픈 민중 속으로 몸소 뛰어들어 그들에게
빵을 제공했다. 두드리는 자에게 현실 속에서 구원의 문을 열어준 이는 신이 아니라 그들이
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신은 신의 이름으로 돌을 던질 수 있는가. 세상의 모든 것을 창
조한 신, 심지어 그가 사탄으로 몰아세운 모든 악마들도 사실 그가 창조한 것이 아니고 무
엇이란 말인가. 이 이해할 수 없는(신의 아들이라면 이해했겠지만, 사람의 아들인 필자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을 인상적인 비유와 현란한 수식의 말씀으로 덮어버리려는가.
작가는 책의 마지막에 민요섭의 종교로의 회귀를 조금은 갑작스럽게 결정짓는다. 그러나
아하스 페르츠의 최후는 분명하게 결론짓지 않는다. 그것은 독자들에 대한 몫일 테다. 작가
는 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과 그 부정에 대한 부정을 방대한 지식과 깊이 있는 사유로 펼쳐
보인다. 그리고 최종 선택은 책을 읽는 이들의 판단에 맡긴다. 때문에 '사람의 아들'은 작가
의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부정과 의심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물질적 구원과 정신적 구원의
간극을 열어 보이고 신과 인간에 대한 환기를 통해 맹신에 대한 경종을 울린 것까지가 작가
가 제시한 전부다. 그 다음으로 제기될 수 있는 무수한 문제들은 독자들에게 전적으로 열려
있는 셈이다.
필자는 이 작품을 읽으며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떠올랐다. 난장이 가
족이라면 어땠을까. 사회가 정해놓은 테두리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 그래서 사회와 어떤 방
식으로도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면 물질적 구원과 정신적 구원 중 어느 것을 택했을까.
그리고 그 테두리의 중심을 지키고 있는 절대적 권력자들이라면 테두리 밖의 인간들에게 무
엇을 선택하게끔 종용할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아하스 페르츠가 살았던 시대와 지금의 현실이 크게 다를 것은
없다는. 절대자와 맹신자, 카인, 그리고 헐벗고 배고픈 '사람의 아들'들은 여전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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