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그리스도의 수난이 보여준 무서운 감동!
우선 이 영화의 대한 개인적인 평을 하기에 앞서 몇 가지 밝혀두고 싶은 것은 필자가 종교에는 완전 문외한이라는 사실과 그런 이유로 이 영화를 종교적인 관점에서가 아닌 영화 자체의 작품적인 면만을 두고 평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제부터 쓰게 될 영화 평으로 인해 종교적인 공방이 일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정치와 종교만큼 대립간의 접점을 찾기 힘든 문제도 없을 것이니, 모두 자신의 믿음을 마음속으로 깊이 간직하고 그것에 신념을 가지면 그만일 것이다)
예수 최후의 12시간을 다룬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이제껏 만들어진 무수한 종교영화와 분명 판이하게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이 이 영화만의 고유한 장점이 될 수도 비난의 여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영화 개봉 이후 끊임없이 논란의 축이 되어 온 여러 문제들, 이를테면 반유대적 영화라느니, 배경 설명의 부재라느니, 성서의 왜곡이라느니 등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도 밝힐 수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앞서 말했 듯 그런 문제들에 입장을 밝힐 만큼 필자 스스로가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부족한 지식으로 나름의 입장을 내세워 본들 속사포같은 반박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입장 표명은 별로 재미도 관심도 없다.
그러니 이제 불필요한(혹은 필자가 잘 알지 못하는) 외적 파장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서 멜 깁슨의 세 번째 연출작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그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고어 영화를 방불케하는 잔혹함으로 가득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못할 사실일 것이다. 영화는 유다의 배신으로 체포된 예수가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까지 12시간의 수난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가시 회초리와 채찍으로 멀쩡했던 예수의 몸이 서서히 짓이겨지고 피로 물들며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과정을 여과없이 내보낸다. 또 거대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는 도중 계속되는 매질과 고문, 마침내 당도한 언덕 위에서 손과 발에 대못이 박히고 창에 찔려 확인 사살까지 당하는 참혹한 모습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예수의 잔혹한 수난을 보여주는 것에만 영화는 80퍼센트 이상을 할애하며 관객들을 괴롭게 한다. 그 시각적 잔혹함에서 오는 살떨림은 필자가 본 그 어떤 강도높은 고어 영화보다 더 잔인하고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관객들은 그러한 장면들에 압도되어 예수의 고난에 감화되어 갈 수 밖에 없다. 예수의 살점이 파헤쳐질때마다 관객들의 마음 속에도 무시무시한 금속 채찍이 날아와 박힌다. 피와 살점이 엉겨붙은 예수의 몸은 그 자체로 관객들, 즉 관망자들을 죄인으로 만들며 그들(죄인들)을 바라보는 죽어가는 예수의 눈빛은 고통스런 속죄의 대못으로 치환되어 우매한 군중들의(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심장을 파고든다.
여기서 멜 깁슨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는 헐리웃 내에서 3천만 불에 달하는 최고의 몸값을 받는 특급 배우이다. 동시에 성공한 감독으로서 헐리웃 시스템을 주도하는 최고의 파워맨 중 한 사람이다. 필자가 본 멜 깁슨은 대단히 매력적이며 또한 영리한 사람이다. 그는 전작 <브레이브하트>로 아카데미 상을 거머쥐며 세계적인 감독으로 등극했다. 그것은 그의 영화적 열정에 대한 오랜 땀과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지만 그의 감독으로서의 천부적 재능을 보여준 예이기도 하다. 그는 열정적인 사람이면서 동시에 영화적 시스템을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면서 동시에 상업적으로 성공할 영화를 만드는 비법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감독이기도 하다.
멜 깁슨에게 세계적 거장이라는 명성을 안겨준 <브레이브하트>는 여러가지면에서 파격적인 영화로 기억된다. 기존의 시대극에서 볼 수 없었던 빠른 전개와 드라마틱한 영웅담, 무엇보다 사실적이고 잔혹한 전투장면은 기존의 시대극 모두를 잊게 만들었다. 칼로 목을 깊게 베어버리고 철퇴로 머리를 짓이기는 잔인한 장면들의 연속은 관객들의 얼을 빼놓기에 충분했고 스크린 속에 몰입하도록 만들었다. 그러한 과도한 폭력 위에 멜깁슨은 감정에 호소하는 고전적 장치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며 감동을 극적으로 끌어올린다. 어쩌면 그러한 감동은 과도한 폭력으로 인해 감정이 극도로 치솟아 오른 관객들을 쉽사리 감화시켜버리는, 강요되는 감동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는 휴머니즘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극적인 감동이 아닌 진짜 생활속의 감동을 원한다면 TV에서 방영하는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다큐 프로그램 같은 것을 봐야 할 것이다.
영화는 시대의 반영이기도 종합예술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장사의 의미도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어쩌면 그러한 상업적인 면이야 말로 영화 산업을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일지도 모른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종교 영화가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하나의 영화가 성공하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를 낳는 데에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들이 존재한다. 이 것 때문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딱부러지는 공식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때문에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두고 단지 잔혹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말 할 수 있는 것은 감독으로서의 멜 깁슨은 놀라운 재능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기획할 당시 '성령이 나에게 임했으며 나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복음을 전파하는 영화가 되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가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고 이 영화를 자비 2천 5백만불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분명 그는 종교적 열정을 가진 독실한 신자임이 분명하다. 한편으로 그는 예수라는 인물의 신화성을 상업적으로 활용한 능숙한 헐리웃 감독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내내 관객들을 괴롭게 만들었던 예수의 고문 장면은 필자로 하여금 멜 깁슨의 전작 <브레이브하트>에서 공개 처형으로 죽어간 윌리엄 월레스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예수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 '다 이루었도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이 말은 곧 윌리엄 월레스의 최후의 외침 '자유 freedom'와 일치하는 듯했다.
또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가장 심금을 울린 부분인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마리아의 곁을 지나치다 넘어지는 장면, 여기서 어린 시절 예수의 모습이 교차되며 고통과 추억, 슬픔과 안식이 대비되는 이 명장면 역시 <브레이브하트>에서 윌리엄 월레스가 죽기 직전 죽은 아내의 환영과 평온한 조우를 하는 극적인 대비를 연상시켰다.
이는 멜 깁슨이 이제 관객들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줄 아는 거장의 반열에 들어섰음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치밀한 상업적 전략가로서의 기질을 엿보게 했다.
필자에게 있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바로 이런 양면적인 면모를 동시에 보여주게 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런 양면적인 재능이야 말로 수년 전 만들어진 파졸리니의 <마태복음>, 스콜세지의 <예수 최후의 유혹>이 이루어지내지 못한 성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으리라.
멜 깁슨은 4대 복음서를 기초로 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예수 마지막 12시간을 장중하게 그려냈다. 그는 따분한 배경 얘기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모든 죄를 덮어쓰고 살이 파헤쳐지는 예수의 신체에 카메라를 밀착시켰다. 또 적재적소에 회상씬과 교차편집을 넣어 피 흘리며 죽어가는 메시아의 모습에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멜 깁슨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받는 육체를 영화 전면에 내세우며 이제껏 그 어떤 종교 영화도 이루지 못했던 극적인 부분들을 이끌어낸다. 묵묵히 고통을 인내하는 예수의 초인적인 한계가 그러했고, 미치광이 처럼 보여진 광폭한 집행인들이 그러했고, 예수가 흘린 피를 닦으며 내내 눈물을 흘리는 마리아의 모습이 그러했고, 처절한 고통의 순간마다 찾아오는 악마의 유혹하는 눈동자가 그러했고, 우매한 군중들의 야유가 그러했고, 십자가를 등에지고 클로즈업으로 느리게 쓰러지는 예수의 모습이 그러했고, 뿜어지는 피의 비가 그러했고, 그 공포에 전율하며 죄인이 되어버린 듯한 관객들의 압박감이 그러했다. 이러한 극적인 장치들이 종교적 사회적으로 어떤 식의 비난이 될지에 대해서는 필자로서 별로 궁금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러한 논란들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그리스도의 가혹한 수난이 보여준 무서운 감동 앞에 그저 시시한 말장난 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으니.
어떤 구구한 논란도 이 영화의 위력 앞에서는 보잘 것 없는 것이 된다. 피범벅이 되어 죽어간 예수의 모습과 교차되는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예수의 말은 심장에 와서 박히는 묵직한 대못처럼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니! 종교인이든 무교인이든 그 근본주의적인 가르침에는 모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 가르침이야말로 전쟁, 테러, 정치분쟁 등으로 얼룩져 서로를 헐뜯기에 급급한 오늘날 우리 사회에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니!
p.s 아주 개인적인 느낌 하나 - 시종일관 극적인 리얼리티로 감정을 뒤흔들던 영화는 오히려 예수의 죽음 이후 뭔가 엄청난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필자의 기대를 착 가라앉게 만들었다. 때문에 마지막에 부활하는 예수의 모습도 경외롭기 보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도 다시 살아나서 다행이다, 라는 느낌 혹은 마리아가 이제 울지 않아도 되겠구나, 라는 느낌이랄까...(필자가 무신론자라 그런 식의 인간적인 해석만을 한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