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탑의 살인
치넨 미키토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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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명탐정이 탄생하다!


원뿔형의 거대한 유리탑. 대부호가 만든 그곳에 탐정, 의사, 영능력자, 추리작가 등 열 명이 모인다. 탑의 주인은 중대한 발표를 앞두고 밀실 상태에서 살해된다. 이어지는 기괴한 연속 살인! 눈사태로 탑은 고립되고 미녀 탐정과 그녀의 왓슨을 자처한 의사는 불가능한 연쇄 살인에 숨겨진 충격적 비밀에 다가가는데... 


치넨 미키토의 '유리탑의 살인'은 일본 출간 당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킨 화제작이다. 개인적으로 '영매탐정 조즈카'와 함께 국내 출간을 손꼽아 기다린 초기대작이다. 이 작가의 작품은 '가면 병동' 한 편을 읽은 게 전부지만 그 한 작품을 무척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난다. 그래서 '유리탑의 살인'에 가지는 기대치는 더욱 높았는데- 결과적으로 내 기대치를 완벽하게 충족시킨, '일본 차세대 신본격의 기념비적 작품'이라 할 만했다.


비유하자면 이 작품은 추리소설계의 '스크림'과도 같다. 시마다 소지, 아야츠지 유키토로 대표되는 일본 신본격을 필두로 동서양 추리 고전의 클리셰를 줄줄이 꿰며, 그 모든 걸작에 대한 존경과 향수, 해체와 재창조를 시도한다. 작가는 포우의 '모르그 가의 살인사건',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부터 최신 영화인 '나이브스 아웃'까지 언급하며 추리, 미스터리의 법칙과 장르적 특성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논다. 말 그대로 이 장르가 뻗어나갈 수 있는 극한의 경지를 선보이며 '신본격'의 '신세계'를 '신호탄'처럼 쏘아 올린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장점은 '고전적인 서사 기법'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폭풍의 산장, 밀실 살인, 한 명씩 죽어가는 구조, 불가해한 범죄와 심플한 트릭, 공정하고 논리적인 추리, 그리고 충격적인 반전! 추리 마니아라면 피가 끓을 요소로 가득하며 그 모든 서사가 작가의 '추리소설적 자의식'과 맞물려 정교한 퍼즐처럼 이어진다. 지금껏 나온 모든 고전 추리소설들, 화제가 된 걸작 추리소설들이 '유리탑의 살인' 속에서 복선으로 활용되고 직접적인 서사구조로 재배치되기도 한다. 더구나 이제 더는 신선함이 없을 거라는 작금의 본격물에 일격을 가하는 라스트 한 방은 탄성을 자아내기엔 충분했다.


현실에선 어째서 명탐정이 없는 걸까? 책장을 덮고 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명탐정은 명탐정이 없는 현실에 실망해서 스스로 명탐정이 된다. 그것은 역시 소설 속이니까 가능한 얘기다. 현실에는 홈즈, 포와로 같은 명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허준, 다이몬 미치코 같은 명의도, 손오공이나 배트맨 같은 슈퍼 히어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모든 영웅은 오직 '창작물'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것이 때론 서글프다. 어째서 인간은 창작물 속 세계가 아닌 현실 세계에 내던져진 걸까? 이것은 신이 내린 형벌일까 인간이 자초한 형벌일까?


너무나도 아름다운 유리탑에서 벌어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연속 살인. 그리고 그 불가능한 범죄에 도전하는 명탐정. 나선 계단의 소용돌이처럼 빠져드는 압도적인 서사의 끝에는 크리스티 여사도 놀랄만한 충격적인 반전이 연쇄 폭발을 일으킨다. 지금까지 발붙여온 모든 세계가 무너짐과 동시에 전혀 새로운 세계가 재창조되는 경악할만한 진실에 독자들은 무너지는 뇌를 끌어안기에 바빠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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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손을 거기에 닦지 마
아시자와 요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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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직 교사는 수영장 청소 후 배수 밸브를 잠그지 않았다. 실수를 깨달았을 땐 이미 수영장 물이 반이나 유실된 상태. 계산해보니 자신이 물어야 할 수도 요금은 13만엔. 돈도 문제지만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수영장 물을 대량으로 흘려보낸 관리 소홀 죄는 비난이 크다. 수도청에서 조사가 나오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 겨우 생각해 낸 것이 화장실 수도꼭지를 몰래 열어둬서 수도요금의 증가를 그쪽으로 오인하게 만드는 것! 화장실 수도꼭지라면 아이들이 장난한 것으로 돌릴 수도 있을 터. 계획 실행을 위해 아침 일찍 학교로 가서 가장 후미진 곳에 있는 화장실 수도꼭지 몇 개를 틀어 놓는다. 모든 게 순조로운 그때 불청객과 마주한다. 아내와 싸우고 쫓겨나 이른 새벽부터 학교에 진을 치고 있던 동료 교사. 과연 수영장 물 유실의 벌충 계획은 무사히 성공할 수 있을까?


아시자와 요의 작품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죄의 여백', '나의 신' 이렇게 네 작품을 읽었는데 네 작품 모두 고른 만족도를 안겨줬다. 때문에 이번 작품도 고민 없이 선택했고 역시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굳이 비교하지만 이 작품은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와 비슷한 결을 지녔다. 인간 관계의 갈등과 부조리, 내면에 움튼 어둠의 맨 얼굴 등을 섬세하면서도 날카롭게 그려낸 걸작 단편집이다.


다시 한번 감탄한 것은 미스터리를 쌓아가는 이 작가만의 창작 기법이다. 평범한 일상으로 시작해서 서서히 찾아 드는 균열과 그 속에 감춰진 악의, 숨겨진 진실을 서두르지 않고 하나하나 양파 껍질 벗기듯 펼쳐 보이는 솜씨가 수준급이다. 요코야마 히데오와 비견될 정도다. 무엇보다 인간의 위태로운 영혼을 쥐고 흔드는 강렬한 드라마 압권이다. 그러면서도 깔아둔 복선을 깔끔하게 회수하는 미스터리 기교 또한 완벽하다. 확실히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작가다. 조만간 엄청 큰 것 한 방을 제대로 터뜨릴 것 같다.  


수록작 다섯 편은 재미와 완성도 면에서 모두 뛰어나지만 역시 두 번째 수록작 '벌충'이 가장 재미있었다. 후루하타 닌자부로를 연상케하는 도서 추리극의 긴장감을 내내 유지하면서 마지막에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치는 기막힌 반전이 인상적이었다. 이 작가의 단편들에선 어딘지 샤르트르의 '타자는 지옥이다'의 정서가 느껴진다. 작가의 펜 끝에서 날카롭게 재단되는 인간 관계의 부조리와 그 차가운 공포는 이번 작품에서도 역시 가차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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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은 밀실에 숨는다
아쓰카와 다쓰미 지음, 이재원 옮김 / 리드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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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이 살인을 계획한다. 목표는 모 대학 교수. 나름 철저한 준비를 했음에도 막상 실행에 옮기려니 이런저런 변수가 따른다. 투명인간도 완전 범죄는 쉽지 않다. 마침내 교수실에 침입하고, 막 일격을 가했을 때 교수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탐정을 위시한 사내들이 교수실로 들어온다. 탐정은 말한다. 이곳에 틀림없이 범죄를 저지른 투명인간이 숨어 있을 겁니다. 과연 투명인간은 밀실에서 그들에게 발각되지 않고 무사히 위기를 넘길 수 있을까?


와쓰카와 다쓰미의 '투명인간은 밀실에 숨는다'는 4개의 중편으로 이뤄진 미스터리 소설집이다. 국내 처음 소개되는 작가지만 일본에선 꽤 주목받는 추리작가다. 본 작품으로 작년 한 해에만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 1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2위 '주간 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2위 등의 화려한 수상 실적을 자랑한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국내 출간을 손꼽아 기다렸던 작품이다.


 첫 수록작 '투명인간은~'은 투명인간 병이 발발한 사회에서 한 투명인간이 밀실 살인을 저지르는 이야기다. 형사 콜롬보, 후루하타 닌자부로처럼 도서 추리극의 형태를 취하며 긴장의 극을 잘 살린다. 소설의 절정은 밀실에 숨은 투명인간을 찾아내는 대목이다. 오래전 노리즈키 린타로의 단편 '두 동강이 난 남과여'의 마지막 트릭에 놀란 적이 있는데, 이 작품 속 마지막 트릭도 그때 느낀 것과 비슷한 대담한 발상이 압권이었다. 또한 투명인간이 가진 문자 그대로의 의미와 사회적 의미, 두 가지 모두를 곱씹게 만드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놀라운 트릭과 씁쓸한 비애를 동시에 안겨다 준 수작이다.


표제작 외에도 아이돌 마니아들로 이뤄진 배심원들의 좌충우돌 추리극 '6명의 열광하는 일본인들', 소머즈 급 청력을 가진 여인이 소리로만 범인을 추리하는 '도청당한 살인', 방탈출 게임에 참가한 이들의 진짜 탈출극을 그린 '13호 선실에서의 탈출'까지, 4편의 수록작 모두 독특한 설정과 세계관 위에서 벌어지는 전혀 다른 네 가지 색, 미스터리를 다룬다. 미스터리 소설로 본다면 모두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미묘하게 표제작에 비해 나머지 작품들이 살짝 아쉬웠다. 너무 추리적 기교에만 매달린 나머지 드라마가 얕았다고 해야 할까? 엄청나게 기대했던 것에 비해 조금의 아쉬움은 남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기대하기엔 충분하다. 


p.s. 작가는 네 편 수록작에 투명인간, 12명의 성난 사람들, 코넌 도일, 13호 독방의 문제 등 유명 고전의 오마주 형식을 조금씩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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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 좋은 밀실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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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남자가 마당에 설치한 핵전쟁 대비 지하 벙커에 들어가 체험을 해본다. 매일 아내에게 생존 교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이상한 교신을 받는다. '녀석들이 왔어. 난 여기서 버틸 테니 당신은 도망쳐!' 그 직후 아내와 집안 일꾼들이 벙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남자는 몸통이 절단된 채 죽어 있다. 벙커로 통하는 유일한 입구는 닫혀 있었고, 벙커는 무척 좁아 누군가 숨을 공간도 없다. 이 불가능한 밀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천재 탐정 시그마가 나선다. 그는 현장을 둘러본 후 단번에 진상을 알아낸다. 모두를 놀라게 한 사건의 진실은 과연?  


'완구 수리자'로 일본 호러 대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한 작가 고바야시 야스미. 2020년 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까운 작가다. 국내엔 '앨리스 죽이기'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는 미스터리와 호러, SF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정말 많은 소설을 썼다. 이제 작가의 신작은 볼 수 없는 만큼, 이미 발표한 작품이라도 국내에 모두 소개되길 바란다. 


'전망 좋은 밀실'은 7편의 중,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불가능한 밀실 사건을 해결하는 초한 탐정의 이야기를 그린 '전망 좋은 밀실', 섬뜩한 꿈 얘기를 늘어놓는 이웃집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눈 비비는 여자', 상대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진 조수의 이야기를 그린 '탐정 조수', 미지의 괴물체에 맞서 친구와 지구를 지키려는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망각의 침략', 시간 여행의 모순에 관한 우스꽝스러운 이야기 '미공개 실험', 인류의 궁극적 행복을 우주적 관점으로 사유하는 '죄수의 딜레마', 주산과 숫자로 형성된 가상 세계와의 교류를 그린 '미리 정해진 내일'까지- 하나하나 장르와 색깔이 모두 다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전망 좋은 밀실'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언뜻 이 소설집을 추리 단편집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소설집은 오히려 SF 단편집에 가깝지만 SF라고 딱 규정하기도 애매하다. SF적인 용어들이 다수 등장하고 그것을 플롯에 멋지게 활용하기도 하지만, 뭐랄까 그저 작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의 결과물로 보는 게 맞는 듯하다. 어떤 논리성이나 이성적인 기승전결을 기대한다면 조금 허망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저 작가가 만든 어마어마한 상상력의 롤러코스트에 탐승해서 신나게 즐기는 게 좋은 독서법이다.


가장 인상적인 수록작은 '망각의 침략'이었다. 소년의 망상 같은 상상에서 출발한 이 이야기는 뒤로 갈수록 어마어마한 가설이 더해지며 인류를 위협하는 괴생명체와의 아슬아슬한 사투를 담아낸다. 특히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을 절묘하게 활용해서 괴생명체를 제압하는 후반부가 압권이었다. 수록작 중 가장 황당한 상상력을 가졌음에도 가장 논리적인 추리 플롯으로 끝맺는다. 그러면서도 아포칼립스적인 세계관과 청춘 소설의 설렘까지 두루 아우르고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우리들 마음속에 아직 관측되지 않은 슈레딩거의 고양이는 살아있을까, 죽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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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왕성 파티
히라야마 미즈호 지음, 김동희 옮김 / 스튜디오본프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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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등학생 때 알고 지낸 여학생이 십수 년이 흘러 외설 사이트의 주인공이 되어 나타났다. 당시 꽤 예쁘고, 행실도 단정하고, 공부도 잘 했던 그녀가 어째서 지금 이런 꼴이 되어버린 걸까? 대체 그동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소설은 그녀- 쇼코의 시간을 좇는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학창 시절 책과 음악 밖에 모르는 외톨이 소년과의 짧았지만 인상적이었던 만남, 대학생이 되어 락음악을 하는 화가 지망생과의 수상쩍은 만남, 그리고 여러 번 그녀를 스치고 간 남자들과의 만남- 쇼코의 이야기로 이어지던 소설은 마지막 챕터에 이르러 다시 그녀의 행방을 추적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로 이어지며 처음의 의문으로 돌아간다. 특별할 게 없었던 그녀가 어쩌다 외설 사이트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라스만차스 통신, 잊지 않겠다고 맹세한 내가 있었다- 두 작품으로 팬이 된 히라야마 미즈호. 그래서 '명왕성 파티'에 거는 기대도 컸다. 절판된 책을 중고로 뒤져서 구입할 정도였는데, 읽고 나니 허무한 감정이 밀려왔다. 한마디로 내 기대에 영 못 미쳤다. 이 소설은 쇼코라는 여주인공을 내세워 그녀가 만나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것으로 작가는 인간의 소통과 허무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던 건진 모르겠다. 


하지만 내내 쇼코라는 캐릭터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이해할 수 없기는 다른 캐릭터들도 다 마찬가지다) 상당히 똑똑한 여성처럼 그리다가 느닷없이 남자에게 휘둘리며 농락당하는 캐릭터로 내버려진다. 그래서 쓸쓸하게 스스로를 명왕성이라 칭하며 외설 사이트를 통해 불특정 다수의 남자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싶었다며 부르짓는다. 내가 남자라 이해 못하는 걸까? 여자라면 쇼코의 심리에 공감할까? 그건 잘 모르겠다. 다만 소설로서 가독성은 뛰어나지만 캐릭터에게 공감을 느끼지 못하고, 별 다른 매력도 찾지 못하게 되니 결국 읽고 나서 공허함만 남았다. 


누군가에겐 어떤 공감과 위로로 닿을 수도 있겠지만 내겐 뭐랄까. 그저 그런 지지부진한 연애 스토리에 지나지 않았다. 여자들과 밥 먹듯이 잠자리를 갈아 치우며 바람을 피던 남자가 마지막에 무슨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이 여자친구에게 벅찬 가슴으로 달려가는데- 그러면 그게 진실한 사랑이 되는 건가? 그게 아름다운 모습이라도 되나? 아무래도 나로선 이해하기 힘들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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