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보란 듯이

-윤제림


학질이나 그런 몹쓸 병까진 아니더라도
한 열흘 된통 보란 듯이 몸살이나 앓다가
아직은 섬뜩한 바람 속, 허청허청
삼천리호 자전거를 끌고
고산자 김정호처럼 꺼벅꺼벅 걸어서
길 좋은 이화령 두고 문경새재 넘어서
남행 남행하다가

어지간히 다사로운 햇살 만나면
볕 바른 양지쪽 골라 한나절
따뜻한 똥을 누고 싶네, 겨우내 참아온
불똥을 누고 싶네 큼직하게 한 무더기 보란 듯이
보란 듯이 좋은 봄날

<삼천리호 자전거>에서

 

강가에서

-윤제림


처음엔 이렇게 썼다.

다 잊으니까 꽃도 핀다.
다 잊으니까, 강물도 저렇게
천천히 흐른다.

틀렸다. 이제 다시 쓴다.

아무것도 못 잊으니까 꽃도 핀다.
아무것도 못 잊으니까, 강물도 저렇게
시퍼렇게 흐른다.

<사랑을 놓치다>에서

 

사랑을 놓치다

-윤제림

……내 한때 곳집 앞 도라지꽃으로
피었다 진 적이 있었는데,
그대는 번번이 먼길을 빙 돌아다녀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내 사랑!
쇠북 소리 들리는 보은군 내속리면
어느 마을이었습니다.

또 한 생애엔,
낙타를 타고 장사를 나갔는데, 세상에!
그대가 옆방에 든 줄도
모르고 잤습니다.
명사산 달빛 곱던,
돈황여관에서의 일이었습니다.

<사랑을 놓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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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윤재철

 

앞으로 갈 수 없는 길은

기어오르는 것인가

벽이면 담이면 달라붙어

드디어는 넘어서는 것인가

 

교육원 붉은 벽돌담에 달라붙어

뻗쳐올라간 너를 보면

우리들의 사랑은 노래가 아니라

달라붙는 것임을

달라붙어 소리없이 넘어서는 것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벽은 더 큰 사랑이 되고

더 큰 절망이 되고

절망은 뿌리박고 살며

뿌리박고 넘어서는 일임을 알았다

 

부정이 긍정이 되고

다시 긍정이 부정이 되는

소리 없는 싸움과 삶의 논리를

너는 뿌리 같은 네 몸으로 엮어

보이지 않는 작은 균열로부터

보이지 않는 작은 뿌리를 심으며

오늘 너는 소문 없이 기어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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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운사 동구

 

- 서정주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 이번 선운사 여행에서도 서정주를 무지 싫어하는 친구와의 동행이었다. 그래서 서정주 시인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는데, 나는 그래도 동백꽃이 덜 핀 걸 보고는 이 시가 생각이 난 건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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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05-03-29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서정주의 시는 높게 치는 편이예요. 시 잘 쓰잖아요. ^^

느티나무 2005-03-29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주님은 요즘 '살'을 화두로 살고 계신가보군요. ㅋㅋ 시인 서정주라... 저는 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정말 할 수 있는 말이 없네요. 이러면서 아이들에게 시를 어떻게 가르치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그 여자네 집

-김용택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운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 속에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 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언듯언듯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여하고 싶은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은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김칫독 안으로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허리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목화송이 같은 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히,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네집

어느날인가
그 어느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 집
내 마음 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있던 집

여자네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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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5-03-22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국어(상) 교과서에 들어있는, 박완서의 동명의 소설 '그 여자네 집'에 삽입되어 있는 시이다. 요즘 아이들과 교과서를 읽고 있는데, 시 부분만은 나름대로 한껏 감정을 잡아서(?) 내가 읽는다. 처음엔 잘 몰랐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에 잔잔한 파문이 이는 시다. 마치 나에게도 그 여자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禪雲寺  동백꽃

- 김용택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禪雲寺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때문에

그까짓 여자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禪雲寺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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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5-03-22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운사에 가게 될 모양이다. 이번 주말쯤이면 선운사 부근의 어느 뒷방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을테지. 이 시가 생각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