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는 하지 말고
잘 익은 감처럼
온몸으로 물들어 드러내보이는

진한 감동으로
가슴 속에 들어와 궁전을 짓고
그렇게 들어와 계시면 되는 것.



 

 

'시메일서비스-포엠토피아'(242호)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이 시를 아직 안 적어 두었다는 게 오히려 이상합니다. 분명히 이 서재의 어딘가에 적어 두었는데...지금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네요. 굳고 정한 갈매나무로 살고 싶습니다.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 백 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글샘 2006-01-22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 제가 참 좋아하는 나무랍니다.
이 시 참 좋지요? 쓸쓸하면서도 외롭고, 높고...

느티나무 2006-01-22 0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참 좋아요. 언제나 제 책상에 유리 밑에 있어요. ^^ 학교를 옮겨 다닐 때마다 꼭 챙겨서 가지고 다니구요. 정말 답답한 느낌이 들었을 때, 이 시를 읽으면서 견뎠지요.
 

修羅

- 백 석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내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 밖으로 쓸어 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 거미 쓸려 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 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삭기도 전이다

어디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 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러운 종이에 받아 또 문 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흰 바람벽이 있어

- 백 석

오늘 저녁 이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해콩 2006-01-20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무척 좋아하는 구절이예요.. 저리 살아갈 수 있을까?

느티나무 2006-01-20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도현 시인의 시집 중에 이런 제목의 시가 있잖아요? 외롭고 높고 쓸쓸한... 며칠 전에 읽으면서 아마도 이 구절에서 제목을 따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에는 몰랐는데요, 제가 아이들 앞에서 이 시를 낭독했거든요. 그래서 집에서 몇 번 연습해 봤지요 ^^ 그러니까 이 구절이 확 들어오더라구요. 건강하시죠? 여름 방학 때 누구처럼 어디 절에 들어가 계신 건 아니지요?

해콩 2006-01-24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 에는 인터넷 하기 힘들잖아요오~ 지리산은 좋으신지.. 지금쯤 거기 계시겠죠? 저는 대목이라 가업에 종사하느라 바쁘답니다. 설 잘 쇠시고요.. 복도 많이 많이 지으시고.. 나눠주시고..^^

느티나무 2006-01-25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지리산 못 갔습니다. 원래는 내일부터 가려고 했는데요... 이번 주 목요일에 있을 독서모임이 제 발목을 잡았어요ㅜㅜ 그래서 낼 간단하게 동네 뒷산 산책이나 가려구 합니다. 효녀 모드로 변신하셨군요 ^^ 복은 못 드릴지 몰라도 밥은 드리죠 ㅎㅎ
 

夕陽

- 백 석

 

거리는 장날이다

장날거리에 녕감들이 지나간다

녕감들은

말상을 하였다 범상을 하였다 쪽재피상을 하였다

개발코를 하였다 안장코를 하였다 질병코를 하였다

그 코에 모두 학실을 썼다

돌체돋보기다 대모체돋보기다 로이돋보기다

녕감들은 유리창 같은 눈을 번득거리며

투박한 北關말을 떠들어대며

쇠리쇠리한 저녁해 속에

사나운 즘생같이들 사러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