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 김광규

살펴보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이고

나의 형의 동생이고

나의 동생의 형이고

나의 아내의 남편이고

나의 누이의 오빠고

나의 아저씨의 조카고

나의 선생의 제자고

나의 제자의 선생님이고

나의 나라의 납세자고

나의 마을의 예비군이고

나의 친구의 친구이고

나의 적의 적이고

나의 의사의 환자고

나의 단골술집의 손님이고

나의 개의 주인이고

나의 집의 가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들이고 

아버지고 

동생이고 

형이고 

남편이고 

오빠고 

조카고 

아저씨고 

제자고 

선생이고 

납세자고 

예비군이고 

친구고 

적이고 

환자고 

손님이고 

주인이고 

가장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


과연 

아무도 모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문학과지성사, 19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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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아이


- 고재종


용골 아이 김순동이는

재 넘고 내 건너는 시오리 학교길

타잔처럼 날래게 뛴다

2학년짜리 그 아이

동무들 하나같이 떠나버려서

하학길엔 냇가에서

홀로 다슬기 송사리 잡고

숨 하나 안 차게 뛰어오르는 산길에선

먹딸기 따고 나리꽃들과 노닥이다

뉘엿거리는 해 동무하여

산막에 들면

지난 겨울 아이와

산노루 쫓다 허리 다친 그 아비

으흐흐흐 짐승처럼 끌어안고

그때쯤이면 칠흑 천지 속으로

알별 잔별 총총

풀벌레 울음 따글따글 영글어

머언 전설 한 태산 내려쌓인다

산아랫말 더벅머리 총각과

눈 맞아 떠나버린 그 어미처럼

우리 너무 쉽게 숫정을 버릴 때

우리 추억의 문도 소리없이 닫히고

용골 아이 김순동이 오늘도

야밤중에 오줌 싸러 나왔다가

산정 위 일등성 보고

엄마! 하고 부를 때

산이 산으로 우는 소리며

별이 별로 우우우 떠는 소리 더한

지상의 모든 순결한 것들이

제 몫의 외로움을 싸하게 깨닫는 소리

땅 끝 어디 한포기 풀잎에까지

싱싱한 이슬로 미쳐 떨린다

 

                                                                                        <날랜 사랑>, 창작과비평,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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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 박성우


끈적끈적한 햇살이

어머니 등에 다닥다닥 붙어

물엿인 듯 땀을 고아내고 있었어요


막둥이인 내가 다니는 대학의

청소부인 어머니는 일요일이었던 그날

미륵산에 놀러 가신다며 도시락을 싸셨는데

왠일인지 인문대 앞  덩굴장미 화단에 접혀 있었어요

가시에 찔린 애벌레처럼 꿈틀꿈틀

엉덩이 들썩이며 잡풀을 뽑고 있었어요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어머니,

지탱시키려는 듯

호미는 중심을 분주히 옮기고 있었어요

날카로운 호밋날이

코옥콕 내 정수리를 파먹었어요

 

어머니 미륵산에서 하루죙일 뭐허고 놀았습디요

뭐허고 놀긴 이놈아, 수박이랑 깨먹고 오지게 놀았지

 

                                                    <거미>, 창작과비평,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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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쩍새

 

- 윤제림

 

남이 노래할 땐
잠자코 들어주는 거라,
끝날 때까지.


소쩍. . . . 쩍
쩍. . . . 소ㅎ쩍. . . .
ㅎ쩍
. . . . 훌쩍. . . .


누군가 울 땐
가만있는 거라
그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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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6-09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를 읽으니... 울고 싶어지네..
...훌쩍...

느티나무 2006-06-13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에 울고 싶을 때 이 시를 떠올려 봐야 겠네요...

2006-06-15 0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생솔

 

- 박성우

 

눈은 언제나 치매밭골이 먼저 녹았다

구슬치기에 소질이 없던 나는

춘란이 유난히 많은 그곳에 올라 겨울방학을 보냈다

빨치산들이 살았다 하여 아이들은

내 뒤를 따르지 않았지만

꼭, 엄마 치맛자락처럼 생긴 그곳은 혼자 가도 좋았다

 

아버지는 빚 때문에

그해 겨울도 돌아오지 못했다

우리집엔 여느 집처럼 외양간 옆에

장작더미가 없었고 낯익은 얼굴들이

아버지의 소식을 묻곤 했다

정지에서 시래깃국 끓이던 셋째 누나는 가끔

생솔가지를 아궁이에 넣고 움츠려 있었다

한번은 연기가 맵다고 투덜거리는

내 등을 한참 동안이나 안고 있었는데

불에 던져진 생솔보다 더 끈적이는 송진을 흘렸다

 

성냥개비가 되어가는 줄 모르는 어머니는

베틀에 앉아 삼베 품을 팔고 늦은 밤에 돌아오셨다

그런 이유로 우리들은

남의 집 반찬에 익숙해져갔다

국민교육헌장 외우기에 좋았던 치매밭골,

그곳에선 솔방울 반 포대 줍는 동안

외우지 못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갈퀴나무를 하기 위해 그곳에 올랐다

갈퀴나무 흩어지지 않게 생솔가지 꺾어

칡넝쿨로 묶어오곤 했다

 

서울로 돈벌러 갔던 큰누나 내려오던 날

성적표를 본 누나는 부지깽일 들었지만 나는

따순 물 끓이며 생솔에 묶여진 갈퀴나무

아끼지 않았다, 밥 안치던

큰누나는 눈 속에 생솔을 태우고 있었다

 

박성우, 거미, 창작과비평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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