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 이외수


떠도는 그대 영혼
더욱 쓸쓸하라고
눈이 내린다.

닫혀 있는 거리
아직 예수님은
돌아오지 않고
종말처럼
날이 저문다.

가난한 날에는
그리움도 죄가 되나니
그대 더욱 목메이라고
길이 막힌다.

흑백 사진처럼
정지해 있는 시간
누군가
흐느끼고 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폭설 속에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

이 한 해의
마지막 언덕길
지워지고 있다.

 

* 부산에 그 전의 기록을 알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눈이 내렸다. 나는 눈이 내리는 걸 보면 항상 이 시가 생각이 난다. 지금이 12월은 아니지만 눈이 내리는 날은 조금 더 감상적으로 변하는 것 같다. 어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전화기를 만지작거려야 했다. 그래 어제 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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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5-03-07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산 쪽에 눈이 많이 내렸다던데..
"폭설 속에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 ->..서..설마 이 정도로 온 건 아니겠죠? ^^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정 호 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의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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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강가에서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안도현 [그리운 여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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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2-06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서재에도 올려둔 시네요... 생각나서 찾아봤더니 9월 어느날 이런 댓글을 달아둔...

"어딘가 잡지에서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는 정보여고 3년차였다. 차가운 강물 속으로 뛰어내려 형제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눈발이 마치 우리 아이들 같았다. 정말 그랬다. 힘들게 하루하루 버티는 어떤 아이들... 내가 살얼음이 되어 보듬어주고 받아줄 수 있을까? 생각은 그렇게 말짱했는데 돌이켜보면 우리는 서로에게 많은 상처도 준 것 같다. 인문계 고등학교로 옮긴 지금 가끔 너무 일찍 삶을 알아버리고 온 몸으로 힘겨워하던 그 아이들이 그립다."


겨울방학 보충을 우리 반 아이들 23명이 하지 않겠다 합니다. 담임의 입장이 난감하네요. 성적과 공부라는 매개 없이 그저 온 몸으로 삶을, 하루하루 생활을 고민하고 아파했던 그 시절이 조금은 그리워요. 이 역시 하나의 삶이며 생활이라면 할 말 없지만... 그래도 좀더 본질적인 것에 대한 고민이라는 차이가 있겠지요? 시험에, 점수에 방해받지 않고 아이들과 맘껏 사랑하며 '공부'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었으면 좋겠어요.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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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11-20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느티나무님, 선운사에서.. 그러시길래 드뎌 이 냥반이 날 보러 오셨군, 했어요. 가쉼만 두근거리다 말았네..X! 날 보러 와요, 날 보러 와요~ 흠흠..이거 시는 진지한데 넘 까불었나..죄송요.

느티나무 2004-11-20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하시다니요... 동백꽃이 후두둑 떨어지던 날, 선운사에 갔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좀 추웠는데... 그래도 선운사로 걸어들어가는 길과 선운사의 그 동백숲과 도솔암까지의 길이 참 예뻤지요. 손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걸었던 그 시절,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걸었던 그 길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이렇게 시를 올려 둡니다.

비로그인 2004-11-20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하..선운사를 기억해주시고 아껴주시기까지 하시다니요. 선운사의 풍광은 사계절이 아름다운데 특히 겨울과 가을이 인상적이었어요. 겨울엔 선운사를 지나 도솔암까지 올라가는 어귀에 빨간 새끼단풍들이 하얀 잔설에 붉으스름한 손을 내밀고 있더라구요. 가을엔 또 우수수, 지는 가랑잎과 은행잎도 장관이구요. 걷다보면 모과향내에 취해 그만 아찔해질 때도 있답니다. 운이 좋으면 보랏빛 산꿩도 볼 수 있어요. 고창에 사는 건 아니지만..암튼!
 

중학교 선생

 

 -  양정자

 

 

어린아이에서 사춘기로 고통스럽게 진입해 들어가는

번민 많은 아이들을 가득 싣고

슬픔의 캄캄한 터널 속을 빠져나와 달리는

성장의 급행열차가 잠시 멎는

시골의 쓸쓸한 간이역 같은 중학교

거기 몇십년씩이나 서서

손을 들어 달리는 그 기차를 멈추게 하고

멎은 기차를 또다시 출발시키는

해마다 늙어가는 기차역원 같은

돈도 명예도 없고

있었던 실력도 오랜 세월 쓰지 않아 녹이 다 슬어버린

허름한 중학교 선생

스치며 지나가는 아이들의 속력은 너무 빠르고 바빠

몇 년 지나면 마침내

아무도 찾지 않고 잊혀지는 중학교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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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1-19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이역.. 처음 발령 받아서 반 아이들이랑 너무 많이 싸우던(아이들로부터 왕따도 당했답니다.. 지금은 추억이지만, 그땐 정말 무진장 아팠어요) 그 해, 그런 생각을 했어요. 교사는 '간이역' 같은 존재가 아닐까? 내가 아무리 욕심부리고 내 맘대로 안된다고 투정부려도 아이들에게 교사는 스쳐지나가는 '역'같은 존재가 아닐까.. 더 욕심부리지 말자.. 그러면서도 못내 아쉬워했던 기억.. 장안사 척판암이라는 암자를 겨울에 오르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새롭네요. 이 시를 읽으니.. ㅋㅋ 그리고 요 며칠 샘 말씀대로 욕심을 좀 비워냈더니 덜 억울해요. 역시 '간이역' 역할에 만족해야할까봐요~

느티나무 2004-11-19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 지나면 마침내

아무도 찾지 않고 잊혀지는 중학교 선생



딱 맞는 말인거 같네요. 한 두 해는 반짝 찾다가도 -일종의 체면치레겠지요.- 어느새 자연스럽게 잊혀지니까요. 누군가에게 평생토록 기억된다는 것 - 한편으로는 욕심일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한 일이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