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왔는가 - <전교조 창립 19주년 전국교사대회에 부쳐>

그대 왔는가?
저 서울 변두리 어디에서 여기 여의도까지
그대 왔는가?
저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충청도, 제주도, 경기도
거기 어디 한 곳 아직은 절망할 수 없는
고민의 교실
그대 희망이 되어 아이들과 만나야 할
그대 빛나는 통찰이 되어 아이들 손을 잡아 주어야 할
그러나, 너무도 울화 끓어 오르는
절망의 미래만이 서성거리는
그대 존재의 비감한 현장
그 어둑한 교실 문을 나서서
그 허위의 교문을 나서서 오늘 여기까지
그대 왔는가?
그대 왔는가?


그대 왔는가, 여기 여의도
아, 명랑한 신자본주의자들의 국회가 떠 있는 섬
돈이 돈을 먹고 살찌거나 쓰러지는 거래소
그 자본의 블랙홀의, 섬
생산하라, 소비하라
단 두 마디, 인간을 위한 위험한 구호가 올해도
사쿠라처럼 찬란하게 피고 지나간
이 통제불능의 섬에
그대 왔는가?


손 잡아 보세
손 잡아 보세
왜 이리도 우리 나약하기만 하지
왜 이리도 우리들 교육은 흔들리기만 하는지
모든 인간과 모오든 가치와 모오든 이상이 냉혹한 시장으로 끌려나가고
여기 변방의 우리들 이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인지
너무나 무력하기만 한 손들
다시 잡에 보세
손 잡아 보세
그대 왔는가?
교육보다 막강한 것들이 교육을 흔들고
교실보다 거대한 것들이 교실을 흔들고
교사보다 권위 있는 것들이 교사를 종속하려 할 때
인간의 세상에 인간 아닌, 사악한 그 무엇이 인간의 머리 위
쇠그물로 덮치려 할 때
그 떨리는 손을 잡으려고
그대 왔는가?
나의 미래가 아닌,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오늘과 다른 내일이 아닌, 작금의 시대와 다른 새로운 시대를 위해
희망과, 그 무엇보다 튼튼한 희망의 신념을 그대 교실로 다시 가져가기 위해
그대
여기 왔는가?


아이들의 눈빛으로 그대 왔는가?
아이들의 고통으로 그대 왔는가?
아이들의 절규로


여기 여의도까지 왔는가?
서울까지 왔는가?
그대


2008.5.24 여의도에서 정태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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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처

- 정호승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그대는 이 세상
그 누구의 곁에도 있지 못하고
오늘도 마음의 길을 걸으며 슬퍼하노니
그대 눈동자 어두운 골목
바람이 불고 저녁별 뜰 때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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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징가 계보학 


-- 권혁웅


1. 마징가 Z
기운 센 천하장사가 우리 옆집에 살았다 밤만 되면 갈지자로 걸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철을 수집하는 사람이었지만 고철보다는 진로를 더 많이 모았다 아내가 밤마다 우리 집에 도망을 왔는데, 새벽이 되면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돌아가곤 했다 그는 무쇠로 만든 사람, 지칠 줄 모르고 그릇과 프라이팬과 화장품을 창문으로 던졌다 계란 한 판이 금세 없어졌다


2. 그레이트 마징가
어느 날 천하장사가 흠씬 얻어맞았다 아내와 가재를 번갈아 두들겨 패는 소란을 참다못해 옆집 남자가 나섰던 것이다 오방떡을 만들어 파는 사내였는데, 오방떡 만드는 무쇠 틀로 천하장사의 얼굴에 타원형 무늬를 여럿 새겨 넣었다고 한다 오방떡 기계로 계란빵도 만든다 그가 옆집의 계란 사용법을 유감스러워 했음에 틀림이 없다


3. 짱가
위대한 그 이름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가 오후에 나가서 한밤에 돌아오는 동안, 그의 아내는 한밤에 나가서 오후에 돌아오더니 마침내 집을 나와 먼 산을 넘어 날아갔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겼다 그 일이 사내의 집에서가 아니라 먼 산 너머에서 생겼다는 게 문제였다 사내는 오방떡 장사를 때려치우고, 엄청난 기운으로, 여자를 찾아다녔다 계란으로 먼 산 치기였다


4. 그랜다이저
여자는 날아서 어디로 갔을까? 내가 아는 4대 명산은 낙산, 성북산, 개운산 그리고 미아리 고개, 그 너머가 외계였다 수많은 버스가 UFO 군단처럼 고개를 넘어왔다가 고개를 넘어갔다 사내에게 驛馬가 있었다면 여자에게는 桃花가 있었다 말 타고 찾아간 계곡, 복숭아꽃 시냇물에 떠내려 오니… 그들이 거기서 세월과 계란을 잊은 채… 초록빛 자연과 푸른 하늘과… 내내 행복하기를 바란다.

 

마징가 계보학, 권혁웅, 창작과비평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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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자의 외간 남자 되어*

-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려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며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 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속같이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 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눈에는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 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도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 되겠는가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 김명인 시인의 「너와집 한 채」가운데 한 구절. 이 시는 「너와집 한 채」로부터 운을 빌려왔다.

- 가만히 좋아하는, 김사인, 창작과비평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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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삼십도 

  영하 이십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오도 영상 십삼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 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커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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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7-07-31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충수업 시간에 함께 읽은(?) 시^^ 아이들에게 문제 풀라고 해놓고, 이 시를 읽었을 때 내 느낌을 설명해 줄까 말까 망설이다가 관뒀다! 음, 찡했는데...애들도 알겠지?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