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단 한 번일지라도

목숨과 바꿀 사랑을 배운 사람은

노래가 내밀던 손수건 한 장의

온기를 잊지 못하리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도

거기에서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 되리

내내 어두웠던 산들이 저녁이 되면

왜 강으로 스미어 꿈을 꾸다

밤이 길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가는지를

 

누가 뭐래도 믿고 기다려주며

마지막까지 남아

다순 화음으로 어울리는 사람은 찾으리

무수한 가락이 흐르며 만든

노래가 우리를 지켜준다는 뜻을

정지원, 내 꿈의 방향을 묻는다, 문학동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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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7-06-12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수 안치환처럼, 정지원이라는 이름을 읽었을 때, 남자인 줄 알았다.(사실은, 여자!-남자냐 여자냐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좀 놀랐다.)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의 아름다운 노랫말을 쓴 주인공이다. 최근에 조금씩 읽고 있는, 고종석의 모국어의 속살,에서의 호평을 보고 산 시집에서 찾은 시!
 

풍경의 깊이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시선 262,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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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7-06-11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만히 좋아하는, 을 읽는 내내 사랑을 놓치다,라는 시집이 생각났다. 둘 다 좋은 시집이라고 생각한다.

드팀전 2007-06-11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진복이닷...

느티나무 2007-06-11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아토피로 고생 중입니다. 입 주변이 벌겋습니다. 별로 가렵지는 않은가 본데, 계속 침을 흘리니 연고를 발라도 그 때뿐이고, 소용이 없네요. 녀석, 늘 침을 질질 흘리고 다닙니다. 안녕하세요, 드팀전님?

드팀전 2007-06-11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침흘려서 생기는 건 아토피가 아닐 수도 있으니 꼼꼼히 알아보세요.
어제 저희집은 난리였습니다.아이가 밤에 30분 간격으로 깨면서 울고 비비고..짜증내고ㅜㅜ
불쌍한 녀석 같으니...
아토피를 뱀 독 빨듯이 쏙 빨아서 퇘퇘 내뱉고 싶다니까요..

느티나무 2007-06-11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까운 병원에서는 아토피성이라고 하면서... 침을 안 흘리면 괜찮아질 거라고 하던데... 벌건 기운이 점점 번지던걸요. 아기가 고생이 많네요. 물론 부모님들께서도 함께 고생하시구요. 키워놓으면 이 고생한 거 다 알려나?ㅠㅠ<저도 잘 몰랐으니, 녀석들도 잘 모르겠지요?>

푸른나무 2007-06-11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왕 귀엽다. 느티나무님 닮았네요. ^^ 어쩌나요. 아토피...

느티나무 2007-06-11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그냥 기다리고 심해지면 병원 가고, 자주 산책 나가서 바람 쐬면 나아질까 싶어요^^ 저는 저렇게 귀여운 얼굴 아닌데요^^;;
 

희망의 바깥은 없다

 

- 도 종 환

 

희망의 바깥은 없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낡은 것들 속에서

싹튼다 얼고 시들어서 흙빛이 된 겨울 이파리

속에서 씀바귀 새 잎은 자란다

희망도 그렇게 쓰디쓴 향으로

제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지금

인간의 얼굴은 한 희망은 온다

가장 많이 고뇌하고 가장 많이 싸운

곪은 상처 그 밑에서 새살이 돋는 것처럼

희망은 스스로 균열하는 절망의

그 안에서 고통스럽게 자라난다

안에서 절망을 끌어안고 뒹굴어라

희망의 바깥은 없다

 

[슬픔의 뿌리, 실천문학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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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며


- 도종환


산을 오르기 전에 공연한 자신감으로 들뜨지 않고

오르막길에서 가파른 숨 몰아쉬다 주저앉지 않고

내리막길에서 자만의 잰걸음으로 달려가지 않고

평탄한 길에서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잠시 무거운 다리를 그루터기에 걸치고 쉴 때마다 계획하고

고갯마루에 올라서서는 걸어온 길 뒤돌아보며

두 갈래 길 중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모를 때도 당황하지 않고

나뭇가지 하나도 세심히 살펴 길 찾아가게 하소서


늘 같은 보폭으로 걷고 언제나 여유 잃지 않으며

등에 진 짐 무거우나 땀 흘리는 일 기쁨으로 받아들여

정상에 오르는 일에만 매여 있지 않고

오르는 길 굽이굽이 아름다운 것들 보고 느끼어


우리가 오른 봉우리도 많은 봉우리 중의 하나임을 알게 하소서

가장 높이 올라설수록 가장 외로운 바람과 만나게 되며

올라온 곳에서는 반드시 내려와야 함을 겸손하게 받아들여

산 내려와서도 산을 하찮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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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7-03-28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마음으로 살고 싶다^^
 

 꽃나무


- 도종환


꽃나무라고 늘 꽃 달고 있는 건 아니다.

삼백예순닷새 중 꽃 피우고 있는 날보다

빈 가지로 있는 날이 훨씬 더 많다.

행운목처럼 한 생에 겨우 몇 번

꽃을 피우는 것들도 있다.

겨울 안개를 들판 끝으로 쓸어 내는

나무들을 바라보다

나무는 빈가지만으로도 아름답고

나무 그 자체로 존귀한 것임을 생각한다.

우리가 가까운 숲처럼 벗이 되어 주고

먼 산처럼 배경 되어 주면

꽃 다시 피고 잎 무성해지겠지만

꼭 그런 가능성만으로 나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빈 몸 빈 줄기만으로도 나무는 아름다운 것이다.

혼자만 버림받은 듯 바람 앞에 섰다가 엄살떨지 않고

꽃 피던 날의 기억으로 허세 부리지 않고

담당할 수 있어서 담백할 수 있어서

나무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다.

꽃나무라고 늘 꽃 달고 있는 게 아니라서

모든 나무들이 다 꽃 피우고 있는 게 아니라서

                                                                            『부드러운 직선』, 창작과비평,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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