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 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불일폭포의 물방망이를 맞으려면 

벌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에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 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지리산에 오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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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12.01. 지리산 장터목대피소에서 들었던 그 감동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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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모를까 

 

- 김용택


이별은 손 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 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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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가는 길
- 어느 학생의 말

- 정희성

모든 문제의 답은 학교에 있고

정답은 언제나 근엄해서

담임 선생님의 얼굴 같지요.

답답한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삼차방정식보다 난해하게 변해 버린

선생님의 표정을 읽으며

정답까지 가는 길은 너무도 아득해

나는 가끔 다른 길을 갑니다.

비록 험하기는 하지만

이 세상 어딘가엔 즐거움도 있겠지.

생각하며 길모퉁이 돌아서면

찍소리 말고 공부나 하라는

어머니의 고함소리 멀어지고

친구가 다닌다는 공장을 지나면

신축공사장 인부들

오락실 근처에선 재수할 때 만난

친구의 옆모습도 보이지요.

무언가 고달파 보여도

정답처럼 엄숙하지 않아서

볼수록 정다운 얼굴들을 떠올리며

나는 교실로 돌아오곤 하지요.

그러면서 나는 자신에게 곧잘

어리석은 질문을 던집니다.

― 정답은 학교에만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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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리를 먹으며 

- 김 광 규

일찍부터 우리는 믿어왔다
우리가 하느님과 비슷하거나
하느님이 우리를 닮았으리라고

말하고 싶은 입과 가리고 싶은 성기의
왼쪽과 오른쪽 또는 오른쪽과 왼쪽에
눈과 귀와 팔과 다리를 하나씩 나누어 가진
우리는 언제나 왼쪽과 오른쪽을 견주어
저울과 바퀴를 만들고 벽을 쌓았다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자유롭게 널려진 산과 들과 바다를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고

우리의 몸과 똑같은 모양으로
인형과 훈장과 무기를 만들고
우리의 머리를 흉내내어
교회와 관청과 학교에 세웠다
마침내는 소리와 빛과 별까지도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고

이제는 우리의 머리와 몸을 나누는 수밖에 없어
생선회를 안주삼아 술을 마신다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온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도다리의 몸뚱이를 산 채로 뜯어먹으며
묘하게도 두 눈이 오른쪽에 몰려붙었다고 웃지만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오른쪽과 왼쪽 또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결코 나눌 수 없는
도다리가 도대체 무엇을 닮았는지를

* <도다리를 먹으며>-보충수업 교재 맨 마지막에 있던 문학 지문! (나는 김광규 시인의 시를 좋아한다.)오늘로 나도 보충수업이 끝났다. 내일까지는 반드시 끝내야 할 일이 하나 있긴 하지만 그것도 기한이 정해진 일이라 어쨌든 시간이 가면 끝날 것이고... 이제 열흘 남짓 진짜 방학이다. 조금 더 세상살이에 관심을 집중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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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사람들 9

- 사랑

 

월정사 부처님처럼

마음을 비우고 잠드는 밤에

마음 저켠 벌판에서 비가 내렸습니다

여리게 혹은 강하게 비가 내렸습니다.

눈물보다 투명한 그 빗방울들은

삽시간에 하늘의 절반을 적시고

우수수 우수수수수

부처님 발목 밑에 내려와

잠들지 못하는 새벽 풀잎 옆에

오랑캐꽃으로 피었습니다

은방울꽃으로 피었습니다

초롱꽃으로 피었습니다

바늘꽃, 두루미꽃으로 피었습니다

사랑꽃, 이슬꽃으로 피었습니다

아......

신록으로 꽉찬 오월 언덕에서

햇빛 묻은 미루나무 몇 그루

아름다운 이별처럼 손 흔들고 있었습니다

고정희, 지리산의 봄, 창작과비평사, 1994(재판)

   촛불문화제에 다녀온 밤에 시집을 펼쳤다.

   어제 저녁엔 무시로 비가 쏟아진 거리에 우산 하나 달랑 들고 문화제 앞자리에 서서 버티다가 비옷을 사 입을 생각으로 슬그머니 빠져나왔다가 눈에 띈 큰 서점 안으로 들어가 어슬렁거렸다. 비가 퍼붓는 거리는 한기 때문에 소름을 돋게 하더니, 서점 안은 온기가 있어 밖으로 나가기가 더욱 싫었다. 시집이 꽂힌 서가대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내리는 빗줄기가 그치는가 싶어서 밖으로 나오니 참가자들은 거리 행진을 시작했다. 나도 얼른 합류해서 경찰청까지 걸었다. 그곳에서 만났던 일행들은 보이지 않고, 역시 혼자 오신 김OO 선생님을 만나 말동무도 되고 끊임없이 구호도 외쳤다. 경찰청이 있는 연산동까지는 왜 그렇게 멀었던지... 남들 다 하는 구호도 나만 안 할 수 없고. 지금도 목이 살짝 아프다.

   경찰청 앞에서 이어진 정리 집회. 자유발언을 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그렇게 말도 조리 있게 잘 하고, 재치가 있는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동맹 휴업을 결의한 부산지역 대학의 학생들이 삼삼오오 많이 참가했었다. 생기발랄한 청년들을 보니 든든했다. 하지만 내가 가르친 학생들은 아무도 없었다. 10년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집에 들어오니 11시가 다 되었다. 그 때부터 이것저것 많이도 먹었다. 밤이 깊어 가는 시간, 습관처럼 책을 펼쳤다. 서점에서 기웃거린 시집 때문인지 시집을 펼친다. 고정희의 '지리산의 봄'.

   밤이 깊도록 시집을 읽는다. 문화제에 다녀온 날이다. 밤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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