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란시사첩 머리말

 

- 나 해 철

 

다산 정약용 선생이

시 짓는 친구들과 함께 만든

죽란시사첩이라는 동인지의 머리말을 보면

"모임이 이루어지자 우리는 이렇게 약속하였다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인다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인다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인다

가을이 되어 서늘해지면 서지에서 연꽃을

구경하러 한 번 모인다

국화꽃이 피면 한 번 모인다

겨울에 큰 눈이 내리면 한 번 모인다

한 해가 저물 무렵에 화분에 심은 매화가

꽃을 피우면 한 번 모인다

......." 는 말이 있다.

젠장! 시 쓰는 친구들아

다들 잘 있느냐

가까이 살구꽃도 복숭아꽃도 참외밭도 없어서

이렇게 사느냐

매화 보는 대신에 곗돈을 부어서라도

얼굴 보고 목소리 듣자

죽란시사 혀 차는 듯한 소리

늦가을 비 내리는 창밖에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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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6-01-12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늦은 밤, 내 친구 장OO 에게 전화를 했다. 다른 친구 곽OO이랑 술 한 잔 하는 중이란다. 둘이는 어제 감사를 받고 1년을 마무리하는 의미로 한 잔 했다고 한다. 장OO이야 자주 붙어다니지만, 애기 아버지가 된 곽OO은 얼굴 본 지 진짜 오래되었다. 학교 다닐 때는 맨날 얼굴 보면서, 임용 준비도 같이 했었는데... 그러다 갑자기 이 시가 생각났다. 방금 이 시 한 편만 달랑 적어서 대학 동기 세 녀석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 이번 방학에는 꼭 만나서 술 한 잔 하자고!
 

나 하나 꽃 피어

 

- 조 동 화

 

나 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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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1-11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이 이 분의 시로군요... 여교사 화장실 문에 붙어있어요. '교보생명'이라는 곳에서 제공해준..ㅋㅋ

작은 에피소드 하나. (지금은 아득하기만 한) 재작년 12월, 부산 시내 대부분의 학교에서 사설모의고사 취소 되는 것 보고.. 제가 베껴서 지부 게시판에 올렸더니.. 사람들이 제가 지은 '시'인줄 알았다나 뭐래나.. 저는 교보생명이 지은 줄 알았고.. 지금보니.. ㅋㅋ 작가분에게 조금 죄송한.. 개학하면 저 분의 이름을 살짝 써 넣어드려야겠어요.

여행은 즐거우셨죠? 저는 계속.. 유영.. 사실 개헤엄.. 어푸어푸..켁켁..*#^%^&*

느티나무 2006-01-11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며칠 전에 인디고 서원....책에서 봤어요 ^^ 좋아서 옮겨온 것이구요.
여행은, 좋아요. 같이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감사한 일이죠. 꼭 보고 싶은 걸 보는 거, 그래서 마음에 담아 오는 거... 여행은 일상의 변주인 셈이지요. 유영?도 하고 싶어 하는 일인 거니까, 즐겁게 하세요.^^
 

가을이 깊어지면

 

- 윤제림

 

학습진도 절반도 못 나간 느림보 국어 선생처럼

큰일났다 시간 없어서, 시간 없어서.

이제 막 읽어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따라 읽거라 정신 똑바로 차리고! 그러는 것처럼.

넘어가자, 내년에 또 배운다 하는 것처럼.

늦도록 놀던 바람은 "어서 가세, 심 소저" 그러는 것처럼,

남은 잎새들 "아이고 아버지" "아이고 청아" 그러는 것처럼.

 

사랑을 놓치다, 윤제림, 문학동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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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한봉

  

아름답구나 일몰

노동 끝낸 농부의 휴식 물들이며

산과 들

강물 속으로 깃드는

한 풍경이여 눈물겹게 아름답구나

고단함조차 이런 때는

담배불 당기는 마음 아래 집 지어

어떤 생각의 무거움이 토하는 기침마저 씻어버리고

탱탱하게 차오르는 바람도

서걱서걱 뼈아픈 시절 곁에 눕지 않겠느냐

홀로 깊어진 시간의 층계에서

기우뚱 몸 굽히는 일몰

아름답구나 저기 농부 어깨 위

세상에서 가장 경건한 물무늬로 일렁이는

터엉 비어 가득 찬

무욕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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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9-20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을이 진짜 좋아요...
그냥요...
저 농부의 무욕의 얼굴...처럼... 그냥요..

느티나무 2005-09-27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몰이 좋아요... 진짜루요.
아름다운 사람을 더 아름답게 보이는 배경이 되니까요.
그냥, 그랬으면 좋겠어요. 아름다운 사람들 옆에 서 있고 싶다는...
배경 같은 사람.
 

동두천 V

 

의자를 들게 하고 그를 세워 놓고 한  시간

또 한 시간 뒤에 교실로 올라갔더니

여전히 그는 의자를 들고 서 있고

선생인 나는 머쓱하여 내려왔지만

 

우리들의 왜소함이란 이런 데서도 나타났다

그를 두고 하선생과 주먹질까지 하고

나는 학교에 처벌을 상신하고

 

누가 누구를 벌 줄 수 있었을까

세상에는 우리들이 더 미워해야 할 잘못과

스스로 뉘우침 없는 내 자신과

커다란 잘못에는 숫제 눈을 감으면서

처벌받지 않아도 될 작은 잘못에만

무섭도록 단호해지는 우리들

 

떠나온 뒤 몇년 만에 광화문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

나보다 나이가 더 들어뵈는 그의 손을 얼결에 맞잡으면서

오히려 당황해져서 나는

황급히 돌아서 버렸지만

 

아직도 어떤 게 가르침인지 모르면서

이제 더 가르칠 자격도 없으면서 나는 여전히 선생이고

몰라서 그 이후론 더욱 막막해지는 시간들

 

선생님, 그가 부르던 이 말이 참으로 부끄러웠다

선생님, 이 말이 동두천 보산리

우리들이 함께 침을 뱉고 돌아섰던

그 개울을 번져 흐르던 더러운 물빛보다 더욱

부끄러웠다.

그를 만난 뒤 나는 그것을 다시 깨닫고

 

- 김명인, 동두천, 문학과지성사, 19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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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5-06-24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서는 절판인 김명인의 '동두천'을 오늘, 동네 서점의 시집코너 한 귀퉁이에서 찾았다. 동네 서점을 뒤지다 보니 낡은 시집을 네 권이나 손에 들게 되었다. 모두 다 아주 옛날 시집인데 낡은 냄새가 폴폴 날리는 게 참 정겹고 좋다. 내일 서울 갈 때 손에 넣고 갈까나? ㅋㅋ

해콩 2005-06-24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낡은 시집 찾기 하는 게 취미인데... 그 책은.. 암만 찾아도 없드마는... 책, 역시 인연이라는 게 있나봐요. 샘, 혹시 두 권 가지고 계시면.. 저한테 한 권 넘기심이.. ^^ (아, 나이 들수록 늘어가는 친밀함의 탈을 쓴 이 뻔뻔함이여~ ^^;)

느티나무 2005-06-26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콩님의 말씀 잘 기억했다가 다음에 그 책 보면 제가 다시 사겠습니다. ㅎㅎ 그 때 선물로 드리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