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 학교 3학년 소풍이었다. 그런데 어제까지 그 누구도 나에게 소풍 장소를 알려주는 선생님도 없고, 같이 오라는 말도 역시 없었다. 아마도 담임이 아닌 사람들은 으레 가지 않거나, 가더라도 소풍 장소 입구에서 인사만 하고-눈도장만 찍고- 돌아가는 것이 상례인 듯 했다. 어제 퇴근하는 길에 다른 선생님께 여쭈어 보았더니 안 가실거라고 하시면서, 같이 가 보려는 나를 아주 의아한 듯 보셨다.
전에도 다른 학교에서 담임이 아닌 적이 있었지만 그 땐 내가 부담임 역할을 확실하게 했기 때문에-그 때는 너무 학급운영이 하고 싶어서 담임샘께 말씀드려 토요일 종례는 내가 하고, 학급내 이벤트를 많이 벌였으니- 내가 따라 가는 게 너무나 당연했었다. 여기서는 그런 건수도 없어서 서먹서먹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는 가기로 마음 먹었다.
어제 퇴근할 때 칠판에 적힌 것으로는 시립미술관, 10시가 소풍에 대한 정보의 전부였다. 오늘은 여유있게 일어나서 지하철이 아닌 버스를 타고 시립미술관으로 갔다. 소풍 장소에 모일 때 보는 언제나 같은 모습. 화장을 짙게 하거나, 엄마 옷을 빌려 입은 듯한 여학생들은 한쪽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서 벌을 서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들은 혀를 끌끌 차고, 나는 당사자(?)가 아니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냥 우습기만 했다. 녀석들의 마음이 짐작되고...(벌 받을 걸 예상하고, 잠깐 혼나면 하루가 행복할 수 있다!)
아이들이 미술관에 입장하기 전, 먼저 들어갔다. 언제나 그렇듯 미술관을 왔다 가면 부자가 된 기분. 천천히 그림을 보았다. 오늘따라 그림을 보는 것이 아주 재미가 있었다. 퀴즈를 풀어 보듯 보기도 하고, 알 수 없는 것은 그냥 넘기고, 재치가 돋보이는 작품에는 감탄도 하고, 색감이 독특한 것은 즐기기도 하면서 2층과 3층의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중간에 들어온 남학생들은 그냥 휙휙 지나가 버리고 '그림이 어렵다는 둥', '이런 건 나도 그리겠다는 둥' 예전에 내가 그녀석들만 할 때 하던 소리를 하며 지나갔다. 나는 좀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몇 마디 말을 붙여 보기도 하고, 내 나름대로의 느낌도 말해 주기는 했지만... 여전히 어렵다는 표정. 반면에 여학생 몇 명은 나를 졸졸 따라다니기도 하고, 그림의 제목을 꼼꼼하게 보기도 하는 등 조금 진지한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이리 밀리고 치여서 전시실을 나왔다. 그래도 이번에는 혼자라서 비교적 오래 보았다. 아이들은 고등학교 3학년답지 않게 또 아이스크림을 사 달라고 졸았다. 아무래도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아서 '더치 페이'를 강조하며 매점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결국 아이스크림은 내가 샀다. 조금 있으니 다시 첫 번째 장소에 모일 시간이라고 한다. 그 때가 12시 30분이었는데...
아이들과 사진을 찍었다. 미술관을 배경으로 나는 그대로 있어, 나 또한 미술관처럼 여러 아이들의 배경이 되어 주었다. 저희들끼리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보며 낄낄거린다. 나는 그 자리에 더 있기가 민망했다. 곧 점심시간이라 선생님들은 식사를 하러 가실 것이고, 아이들은 빨리 자기들끼리 본격적인 소풍을 가고 싶을 것이다.
나도 서둘러 약속을 잡았다. 해운대 신도시에서 근무하는 후배에게 전화를 했다. 다행스럽게도 점심시간 동안 잠깐 얼굴은 볼 수 있다고 했다. 후배는 급히 미술관으로 와서 나를 태웠고, 우리는 근처 냉면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러고 보니 서로 얼굴 본 지도 꽤 되었다.
바닷가로 가서 길거리 커피를 마셨다. 시간은 짧았는데, 서로 하고 싶은 학교 이야기가 많았나 보다. 살다보면 얼마나 답답한 일이 많은가? 지금은 많이 나아졌는지 잘 걸러내어 가면서 살고 있는 이야기를 해 준다. 아, 학교는 어디나 비슷하구나! 이런 생각도 잠시, 우리는 서둘러 다시 일상 속으로 걸어들어 왔다.
지하철을 타고 오는 내내 졸았다. 사실은 학교에 가서 잡무를 할 생각이었다. 따지고 보면 오늘도 해야할 일은 많다. 내릴 역에서 잠시 고민! 그냥 내려서 집으로 왔다. 햇살이 눈부시다. 며칠 전부터 몸이 너무 무겁다. 집에서도 일을 해 볼까? 궁리를 하다가 '오늘은 나를 위해 그냥 내버려 두자'고 정했다.
목욕탕에 갔다왔다. 저녁에는 밀린 책을 읽을 것이다. 오늘은 나에게도 소풍이다.